Re..사 19: 18-21 (장 망 성)
Re..사 19: 18-21 (장 망 성)
이름 : 이근호(IP:)
053강-사19장,18-21,(장망성)-isa060913
장망성
2006년 9월 13일
설교 본문: 19:18-21
[18] 그 날에 애굽 땅에 가나안 방언을 말하며 만군의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는 다섯 성읍이 있을 것이며 그 중 하나를 장망성이라 칭하리라
[19] 그 날에 애굽 땅 중앙에는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이 있겠고 그 변경에는 여호와를 위하여 기둥이 있을 것이요
[20] 이것이 애굽 땅에서 만군의 여호와를 위하여 표적과 증거가 되리니 이는 그들이 그 압박하는 자의 연고로 여호와께 부르짖겠고 여호와께서는 한 구원자, 보호자를 보내사 그들을 건지실 것임이라
[21] 여호와께서 자기를 애굽에 알게 하시리니 그 날에 애굽인이 여호와를 알고 제물과 예물을 그에게 드리고 경배할 것이요 여호와께 서원하고 그대로 행하리라
성경이 세상에 대해서 진리를 말한다고 하니 사람들은 자신의 이 세상 생활에 도움되고자 성경 풀이를 목사들에게 부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성경은 마치 점장이들이 점궤를 발췌하는 식으로 풀이하게 됩니다. 물론 성경이 당연히 세상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씀하는 세상은, 복음을 말하기 위한 배경용으로 동원되기 위해 세상을 말할 뿐입니다. 즉 왜 세상에 기대해서는 아니 되고 오로지 복음만을 의지해야 되느냐를 설명하기 위해 세상을 대해서 말할 뿐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통해서 이 세상 살이에서 세상적인 도움을 얻고자 한다면 그 어떤 성경 구절도 이 목적에 대해서 반대하게 됩니다.
요한일서 2:15-17에 보면,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곳이라는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란 일체 이 세상에서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그동안 오랫동안 이 세상에서 살아왔습니다. 따라서 얼마나 많은 자들에게 정을 주고 정을 받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가까운 가족이 사별하면 사람은 참을 수 없는 스트레스와 충격을 받게 됩니다. 큰 좌절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럴 경우라도 성경은 그 사람을 위로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책망거리가 될 뿐입니다. 왜냐하면 애초부터 성경은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고 분명히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는 무엇이 있는 겁니까?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상의 자랑거리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정욕들은 인간들을 잡아 끌어당기는 자력과 같은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즉 그 어떤 인간이라도 이 세상이 끌어당기는 자력을 극복하고 벗어날 위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악마로부터 유혹을 받을 때, 경제적인 유혹과 인기 얻을 유혹과 세상의 권력을 장악하는 유혹이 작용했습니다. 따라서 성경에서의 세상이란 그냥 빈 공간이나 진공 상태에 있는 세상이 아니라 인간을 쉴새없이 유혹하고 끌어당기는 강한 힘이 작용하는 세상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성경은 애굽을 ‘장망성’이라고 부릅니다. 잊어야 될 도시라는 뜻입니다. 원래 이 도시는 태양신을 모시는 신전 중심으로 운영되는 도시입니다. 이 도시에 대해서 하나님은 용서치 않고 멸망시키고 맙니다. 구약 성경을 한마디로 압축하면,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입니다.
불신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여호와 하나님은 오직 자신의 영광만 알고 다른 그 어떤 신도 용납하지 않는 독선적인 신으로 비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그들 불신자들 입장에서는 그저 마음 편하게 생각해서, 인간들에게 신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율성의 폭을 약간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즉 이왕 참된 신이 여호와 하나님 한 분이라면 인간들이 그 신외에 다른 신을 섬기더라도 얼마든지 이해해 줄만한 일이 아니냐는 겁니다. 하지만 그들은 중요한 점을 놓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상이 단순히 인간이 선택한 신이 아니하는 점입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신이란 인간이 골라잡을 수 있는 대상으로서의 신이 아닙니다.
도리어 신이 인간을 통제하고 지배하는 겁니다. 마치 인간이 평소에 자기가 생각하고 싶은 것을 생각하는 것 같지만 생각이 그때그때 나기 때문에 인간이 생각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이 자기가 생각했다고 우기는 것은 평소의 문법적인 습관 때문에 그러합니다.
이처럼 인간이 세상 유혹에 빠지는 것은 자신이 선택해서 빠지는 것이 아니라 유혹이 인간을 강제하고 있기 때문에 생긴 현상입니다. 에베로서 2:1-3에 보면,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사람들이 우상이 좋아서 우상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기껏 자신의 본심상 신을 섬기다보면 그것이 전부 우상식으로 표현되는 겁니다. 자신의 육체의 욕심을 자신이 거부할 수 있는 입장에 있지 못합니다. 인간이 세상적으로 더 좋은 것을 원하는 것은 아무리 본인이 부인해도 죽을 때까지 계속 없어지지 않고 떠오르는 욕심입니다.
그리고 그 욕심을 낳는 마음으로 신을 섬길 때, 비록 그 신의 이름이 무엇이되었든지 간에, 예수든, 여호와든 , 삼위일체든 상관없이 그것은 곧 우상의 신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참된 여호와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은 특별히 하나님의 능력이 임해야 합니다. 어떤 능력 말입니까?
사람은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인간들이 제일 기피하고 싫어하는 저 낮은 곳으로 떨어졌습니다. 그 곳은 사람들이나 하나님에게도 버림받음 영문 밖입니다. 죄인이라고 지적받은 자들이 가는 십자가 지신 형장입니다. 주님은 그곳에서 우리를 만나십니다.
자신이 십자가 외에는 결코 구원받은 길이 없음을 아는 마음이 생겼다는 것은, 곧 저 낮은 곳으로 눈을 돌릴 수 있다는 것은 일반인들에게 다 해당되는 사항이 아닙니다. 결코 아담의 본성에서 도출된 본성이 아닙니다. 새로운 본성을 받아야 가능한 일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비록 애굽은 장망성이 되어야 하지만 놀랍게도 그런 애굽에서도 여호와를 바라보는 은총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찌 인간의 능력이겠습니까!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능력을 믿지 말고 주님으로부터의 은혜만을 사모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