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060905b 조지래드 [신약신학]-세례 요한(2)
Re..060905b 조지래드 [신약신학]-세례 요한(2)
이름 : 한윤범(IP:)
20060905b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세례 요한(2)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몸이 하나 밖에 없는 한 몸인데, 그게 지체가 될 때 그럼 개인 지체는 교회들 교회입니까? 몸 교회입니까? 아니지요. 교인수가 세 명이라도 한 명이라도 심지어 한 명이 있더라도 그것은 교회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교회가 된다면, 나 교회인데 그럼 우리 옆에 있는 교회는 뭡니까? 저것도 교회다. 그러면 교회가 몇 개냐? 교회들, 또는 교회 두 개의 교회가 되잖아요. 그런데 성경에는 한 몸으로 되어 있다고. 그렇다면 한 몸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이 한 몸이 됨을 지체라 하더라도 한 몸 전체가 들어있고. 그래야 이쪽이 울면 같이 울고 이쪽이 웃어도 같이 웃는다. 이게 바로 지금까지 설명한 유기체적 교회관의 모습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돼버리면 이것은 바로 개혁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카톨릭은 교황이 머리되기 때문에 지교회가 완전한 교회가 될 수 없고, 교황한테 결재를 받아야 완전한 교회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쪽에서 천주교에서 말하는 유기체라 하는 것은, 교황까지 포함해서 유기체라 하는 거예요. 지교회 하나만으로는 유기체 교회라 볼 수 없고, 같이 모여야 되는 거예요. 모여야 성경말씀대로 같이 모이기를 힘쓰라. 한 몸 되기를 힘쓰라하는 것은 모여야 교회된다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개신교는 안 모여도 교회라는 겁니다. 그것 때문에 교회 간에 싸우는 거예요.
그런데 둘 다 뭐가 모순점이 되느냐 하면, 현재 기존의 자기 교회를 교회라고 주장한 그 자체부터 이러한 오류가 생기는 거예요. 내가 지금 교회라고 자청하는 것도. 머리되시는 분이 에베소서 1장에 보면, 머리되시는 분은 이게 두 가지 경우로 해석합니다.
엠마오로 갈 때 두 제자가 가죠. 엠마오로 갈 때 두 제자는 교회 아닙니까, 성도 아닙니까? 성도 맞잖아요. 그런데 보는데 알아요, 몰라요? 몰라요. 자기 옆에 예수님 있는 줄 모른다고. 그때 떡을 뗄 때 그들이 뭐라고 합니까? 마음이 뜨겁고, 말씀을 풀이할 때 비로소 주께서 우리와 함께 있는 줄 알았다 이 말이죠. 함께 있음을 알았을 때 달랑 둘이만 교회인 줄 알았어요, 아니면 주께서 부활하신다면, 나뿐만아니고 또 다른 제자나 또 다른 오고 오는 세상 사람들에게 교회가 될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있지요.
다만 자기가 본 것은 뭐냐? 주께서 부활한 영께서 일만 하신다면, 그 현장이 어떤 현장이든 심지어 길에 가던 현장이든, 어떤 떡을 먹는 현장이든, 두세 사람이 주와 함께 있으면, 그게 교회됨을 존재적으로 나만 교회가 아니고 저쪽도 교회란 말도 아니고, 거기서 느끼는 것은 저쪽도 교회고 나도 교회란 뜻이 아니고 관점이 그게 아니고, 주께서 어떻게 자기 성도를 관리하느냐를 비로소 알겠지요. 그렇죠? 취지가.
아, 나 교회구나. 이러면 그 사람 또 돌아서서 지옥 가면 할 수 없잖아요. 교회 아니잖아요. 말이 안 되잖아요. 한번 했더라도 버리면 그만이니까. 그러면 나만 교회 아니고 저쪽 교회라 하는 것도 저쪽 교회도 아닌데 타락해서 가버리면 교회 아니니까. 지금 그게 궁금하다는 게 아니고, 주께서 자기 사람, 자기 몸을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서는 부활의 영께서 작용해서 관리한다. 이게 드러난 겁니다.
이것이 에베소서 1장에 보면 뭐냐? 주께서는 죽음을 이기는 부활의 영으로써 머리 노릇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오고 오는 자기 백성을 역사를 초월해서 모든 백성에게 자기의 지체를 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이미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그분 중심으로 세상이 통일되고 돌아간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는 이 관계를 에베소 3장에서는 성령이 함께 있어서 된 것이라고 이걸 가지고 성전, 또는 교회라고 합니다.
만약에 이런 교회인데 우리는 무슨 중심이다? 자기 존재 중심의 교회라 했지요. 지금 내가 교회일까? 아니면 나만 교회일까? 옆에도 교회일까? 이것은 교회가 요한계시록 2장, 3장에 있는 것처럼 몽땅 어떻게 됩니까? 몽땅 촛대 옮겨버리면 그 라오디게아, 빌라델비아, 교회 아닌 거예요. 촛대 옮기면.
그러면 내 중심, 내 교회가 교회일까 하고 출발하면, 주님의 교회관하고 다른 거다 말이죠. 그러니까 유기체니, 무기체니 그런 관점에서 보지 말고, 주께서 부활하신 분이 항상 그때그때 만들어내면 교회됩니다. 이걸 나는 생성적 교회라 한다는 겁니다.
-그럴 때 목사님께서 음행하는 자가 앉아 있으면, 늘 평상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부활과 십자가의 은혜와 고백하는 성도가 있습니다.
난 안 믿지요.
-평상시에 그래 왔던 분입니다.
그래 왔던 분이라도 그 사람을 믿질 않지요. 그 사람이 어떻게 믿는지 그걸 판단할 자격도 없고 판단할 필요도 없어요.
-그랬을 때에 그 사람을 목사님은 어떻게 대중들 앞에서 관리
아이고, 훌륭한 성도님이 여기에 앉아 계셨군요. 이렇게 되죠. 훌륭한 성도님께서.
-다른 사람에게 권장할 정도로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을.
권장할 필요 없고. 보세요. 이 사람의 고백처럼 우리도 그런 고백을 본받읍시다. 이렇게 나오죠.
-만약에 음행하고 있는 사람을 지금 앉아있다면
그거는 음행하고 있다면
-음행하고 있습니다보다도 탄로 났으면, 음행하고 있는 그 상태를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을 때에 목사님이 그 사람을 어떻게 교인들 앞에서 어떻게 할 것입니까?
교인들한테 할 것이 아니고, 개인적으로 찾아가서 앞으로 할 것입니까, 안 할 겁니까? 하든지, 그런 걸 물어보고.
-그러면 목사님께서 그 사람을 관리하고 있다는 거죠. 관리하면 목사님은 그 사람을 지체라고 보는 거죠.
관리하는 게 아니고 권면이죠. 권면. 도와주고.
-그때는 권면이고, 떨어질 수 없는 관계가 아닌 상태가 되니까.
떨어지는 관계는 복음적인 관계에서만 떨어지지 않아요. 목사라는 직책과 교인이라는 지체는 항상 떨어지게 되어 있고. 복음적으로 동의할 때 고맙게 여기고 감사하지요.
-그러면 누군가가 찾아와서 저 사람이 음행하고 있습니다. 라고 했을 때 목사님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거는 다른 사람, 당신의 말을 믿을 수 없고, 내가 직접 한번 보겠습니다. 이렇게 되지요. 직접 찾아가서 본인하고 이야기해야지요.
-그 사람이 그렇게 되었을 때
본인의 태도가 아이고, 내가 참, 실수를 했습니다. 라든지, 아이고 잘못된 줄 압니다. 하고 내가 주님 사랑 안하고 어디다 정신을 두었는지, 회개를 하면, 그 회개도 주의 역사입니다. 하고. 내가 음행은 할지라도 예수 안 믿습니다. 하면, 아 당신은 신자 아니었군요. 이러고 하죠.
-목사님은 외부 사람을 찾아가서 그렇게 권면하신다는 거죠.
권면하는 것도 주께서 이렇게 사랑으로 하라 하면 하는 거고. 무조건적으로 기계적으로 하지는 않지요. 아이고, 똑바로 안 갈 수도 있고.
-다른 교인이 그 사람에게 그렇게 한다면 목사님은 그 사람보고 뭐라고 하십니까?
그건 그 사람이 하는 거고 그 사람을 성령께서 움직이기 때문에 목사가 관여할 수가 없죠.
-그러면 아무도 관여하지 않고, 아무도
그것도 주의 뜻이 되죠. 만약에 관여하지 않는다 하면, 내가 가볼까? 하는 것도 주께서 움직여서 하면 내가 가서 하면 되는 거죠.
-그러면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형제들 중에서 음행한 자들을 내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그거는 사도 바울이 그게 불신자인 줄 알면서도 또는 신자이지만
-형제라고
그건 사도 바울이 본인이 알거에요.
-아니, 형제라고 하는 자가 그렇게 했을 때에
형제는 용어에 불과하고 뭔가 형제 그 이상으로 진짜 형제라는 느낌이 왔을 거예요. 그걸 일반화시킬 수는 없는 거예요.
-그러면 방치를 하는 게 되는데
방치하지 않도록 찾아간다니까.
-그런 일이 벌어졌을 때에 회중들 앞에서 그 사람을 어떤 식으로 할 것이냐는 이 단계가 결국은 조금 전에 말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의 지체관계로서 목사님이 대하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을 찾아갔었고, 그 사람이 누군가 말하고 있을 때 그 사람한테 이렇게, 이렇게 말을 하고 있는 것이지, 지체의 관계로서 있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닙니까?
내가 했잖아요. 성도라면 서로 권면하는 게 옳기 때문에 저거는 복음적이 아니다 싶으면 이거는 늘 권면하지요. 해 보니까 나는 예수 안 믿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중단 못합니다. 하면 아니구나. 하고 그때
-그럴 때에 오 목사님은 교회 관리에 들어간다는 말이 나오지요.
누가요?
-오 목사님이.
왜 오 목사님 이야기를 왜 자꾸 끄집어내는지 몰라.
-그 사람은 그걸 관리로 본다는 거예요.
몰라요. 오 목사님이 무슨 말 했는지 난 모르겠는데. 그 사람이 무슨 소리했는지 모르겠어요. 내 말은 하여튼
-그러니까 지금 목사님의 그런 논리로 이야기하신다면, 지금 분명히 교회의 같은 형제로 지체로서 대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오 목사님한테 뭔가 맺힌 게 있는가? 서로 사랑하라 했는데 사랑하지도 않고. 보세요. 지금
-사랑이지요. 지금 그런 문제가 그런 문제들을 발생시키는 걸 볼 때 이게 문제기 때문에 제가
이런 게 있어요. 지체기 때문에 늘 권면하려 하면, 하루에 권면을 세 번 해야 돼요, 네 번 해야 돼요? 이거는 꼴리는 대로 할 수밖에 없어요.
-그 관리를 하고 있다는 자체가 벌써 성령 안에서 지체기 때문에 이걸 꼭 유기체적 관계가 아니다. 이렇게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니까.
주께서 그렇게 찾아가는 게 옳지 않겠느냐 느낌을 주면 가는 거지요.
-그러니까 유기체기 때문에 결국은 관리하게 만들고 그렇게 말하게 만들고 하나님께서 찾아가라고 권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 유기체라는 것이 철학적 용어다 말이죠. 내 말은.
-그러니까 말을 사용한다면 유기체 아닙니까?
예.
-내가 연결성이 없다면 그리스도 몸으로서 같이
그런데 손 목사님은 유기체란 말을 자꾸 사용하지 말고 방금 제가 이야기하는
-유기체를 자꾸 문제 삼으시니까 유기체를 말하지 말라하니까 이렇게 꼭 말하려고 그런 게 아니라니까요. 제 말은.
그러니까 제 말대로 아, 성령께서 역사해서 하는구나 하는 제 말을 왜 동의 못합니까?
-성령이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연결성을 찾았다는 이야기는 결국 연결성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그 말이 내 말 아닙니까? 뭐 틀린 게 있습니까?
-지체 아닙니까? 지체.
지체 맞아요. 그래. 맞는데 그 지체라 하는 것은 주께서 지체라 할 때 지체기 때문에 한번 지체는 영원한 지체는 될 수 없지요. 다만 복음 안에서 그랬잖아요. 복음 안에서 복음을 순종할 때만 지체구나 하게 할 수 있다 이 말입니다. 나는 뭐가 문제되는지 도대체 모르겠는데.
-꼭 그렇게 용어를 쓴다면 그게 유기체가 아니냐 이 말입니다.
아니죠. 그게.
-손 목사님 말씀은, 찾아가는 그 관계가 유기체적 관계를 전제로 하고 찾아가는데, 왜 목사님은 유기체적 교회를 자꾸 부인하고
참, 이야기했잖아요. 유기체라는 자체가 항상 교회존재를 정당화하기 때문에 그래요. 목사가 어떤 교인을 찾아갈 때 내가 찾아가더라도 아이고, 내가 목사로서 찾아가나, 안 그러면 내가 목사 맞아. 라고 그 찾아가는 순간을 통해서 찾아가는 사람과 나와 서로서로 다시 한번 자기 앞에 죄인 됨을 깨닫게 하시는 역사는 이건 유기체로 설명 안 돼요. 유기체로 설명되면, 목사는 집사에게 뭘 한다, 이렇게 돼요. 그냥 목사가 늘 목사가 아니잖아요. 목사 되게 했을 때 목사지.
-교회를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찾아가는 그런 목사도 있습니까?
전부 다지요. 전부다. 안 그런 목사가 어디 있습니까?
-교회를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찾아가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찾아가는 것이지, 교회를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찾아간다는 그거는 종교성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찾아가는 것도 있고 하지만 교회 중심으로 찾아가는 것도 있고. 다 있어요. 다 있다니까.
-그러니까 다 있다고 지금 목사님 말하시는데
다 있지요. 인간은 죄인인데 다 있지요. 다 생각나게 되지요. 만약에 내가 찾아가려 하는데 옆에 교회 와서 심방하고 있더라. 누구신데? 옆에 김 목사인데요. 감사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도와주세요. 이렇게 말하면서도 씨, 지가 뭔데 내 교인 찾아가. 나올 수 있겠지요. 그게 뭡니까? 내 교회 중심 아닙니까? 나오잖아요. 인간은.
-내 교회 중심을 만들기 위해서 찾아가지 않는 경우가 분명히 있잖아요.
그래서 둘 다 있다하니까 자꾸
-그런 것도 있지만은 지금 목사님은 그런 것만 있다고 말을 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제 말은. 그런 것도 있지만 분명히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어떤 연결성을
주님의 사랑으로 찾아가는 경우는 그냥 나올 수 없고, 주께서 나를 회개케 할 때 그때 나오는 결과로서 나와요.
-그래 나오는데
그래 나온다 하니까 뭘 그렇게 시비를 걸어요. 나온다는데 왜 그렇게 시비를 걸어요. 그래
-그걸 왜 교회 관리다 하니까 문제다 이 말입니다. 그걸 왜 교회 관리다 말하느냐 말이죠.
그걸 교회 관리다 하면 안 되지요.
-안 되지요. 안 되는데
안 되는데 교회 관리일 수 있지요. 왜? 인간은 돌아서서 또 다시
-아니, 목사님, 교회 관리 안 되지 해 놓고, 교회 관리라
그건 왜냐하면, 다시 늘 인간을 무시해놓고는 그걸 업적으로 내세우는 게 인간이거든요.
-제 말은 할 수 있는 것 있고, 그렇게 안 할 수 있는 게 있는데
그 말이 내 말 아닙니까? 똑같은 말을 왜 자꾸 되풀이 합니까? 그 말 있다는데. 그것이 늘 우리는 그것이 사랑해놓고 분명히 주의 사랑으로 가놓고 돌아서서는 아이고, 목사로서 진짜로 아무 사심 없이 갔구나. 하고 지 자랑하는 게 인간이다 말이죠. 그게. 그런데 주께서 니 목사, 그만할래, 말래. 나오면 아이고, 주여 잘못되었습니다. 할 수 있는 게 상한 심령이 되는 게 인간이다 말이죠. 주가 역사하면 그렇게 된다 이 말이죠.
그래 착한 일 한번 했고, 이건 나쁜 일이야. 내가 구분 될 수가 없어요. 착한 일 한 것도 항상 이건 내가 했어. 하는 그 순간 그게 내가 죄로 전가되는 거예요. 주께서 하셨는데 마치 내가 훌륭해서 주께서 훌륭하게 쓰시기 때문에 한 것처럼 착각할 수가 있다 이 말이죠. 그걸 난 또 깨닫게 하는 거예요.
-방금 손 목사님 이야기하신 가운데서 성령께서 직접 형제를 찾아가고, 찾아가는 관계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찾아가는 건 아니냐 이야기
성령께서 역사해서 부활하신 주께서 역사
-그걸 유기적으로 표현할 수도 있지 않느냐라는 이야기거든요. 그게 뭐 발전이라는 개념이라든지
그게 유기체로 표현해 버리면, 점점 퍼져서 유기체적인 교회가 존재해야 돼요. 존재라 하는 것의 특징이 뭐냐 하면, 한 번 존재하면 이 존재가 사라지는 것을 거부해요.
-그런 논리는 제가 보기에는 어쩔 수 없고. 어디까지나 주의 몸 된 교회는 어떻게 존재하든 우리는 된다, 안된다 하는데 하나님 보시기에는 다 있는데 다 연결되어 있다면, 유기적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걸 왜 거부하느냐라는 거죠. 손 목사님 말은.
유기체라는 말이
-왜 거부하십니까? 그러면. 우린 연결성을 가지고 있는데, 유기체적인 연결성을, 꼭 쓴다면 유기체적 어떤 관계가 분명히
그러면 그걸 왜 무기체적 연결이라고 그냥 연결이라는 말을 왜 못 써요? 연결, 서로 관계, 왜 이런 말을 왜 못 써요?
-성령께서 관할하셔서 방금 그렇게 연결하고 있는 연결, 그 연결이 되어있을 때에는 그게 관계가 되어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보세요. A라는 사람과 B라는 사람이 연결되어 있잖아요. 제 말은 생성론적으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 연결을 누가 해줬겠습니까? 부활하신 주님이 했잖아요. 그 연결을 주님께로 돌리자 이 말입니다. 연결을 연결로 남기지 말고. 없애버리자 말이죠. 다시 주께서 또 다시 연결하시면 연결하겠지. 주님께로 돌리기 위해서는 이 연결체 자체를 어떤 규정지을 수 없다 이 말입니다. 이건 규정지으면 안돼요. 유기체, 우리는 지체, 이러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주께서 연결했는데 왜 우리가 마치 그것에 대해서 연결한 것처럼 자꾸
-그 말하고 다르거든요. 주께서 연결하셨다. 라는 말도 유기적으로 연결되었다 말은 사용할 수 있어요. 이건 고정되었다는 그런 개념이 아니라
서 목사님, 유기체적으로 연결되었다 할 때 이걸 근원적으로 포괄적으로 다 이야기하려면 누가 이렇게 했느냐 할 때는 누가 이렇게 했느냐 까지 포함해서 표현하는 것이 포괄적인 표현은 더 낫다 이 말입니다. 맞지요. 그러면 이러면 되겠네. 생성하신 날마다 교회를 만드신 주께서 교회를 유기체적으로 만듭니다. 이 말 같으면 내가 동의하지요.
-그러니까 둘 다 사용해야 되는 게 안 맞습니까? 생성론적으로 있기도 하고, 생성론의 차원에서 유기적인 차원으로
사용하면 좋은데 사람은 앞에 걸 항상 떼어먹을 버릇이 잇다 말이죠. 주께서 하는 것은 핑계고. 우리 교회는 영원한 참된 교회라고 이걸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사람은 자기 존재가 있으면 존재를 자꾸 확산시키려는 버릇이 있기 때문에 이거는 타고난 거예요. 아담의 속성이에요.
-그러니까 생성론적으로만 생각하니까 자꾸만 어제 교회가 오늘 교회가 아니고 오늘 교회가 어제 교회가 아니라는 그런 이야기가 결국은 나오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이야기하는 이유가 뭘까요? 교회 부수자는 이야기에요. 뭐예요? 누굴 증거 하자는 겁니까? 그렇게 이야기하는 이유가. 오직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부활의 영으로 엠마오 가는 사람처럼 지금도 날마다 일하신다는 걸 증거 하기 위해서 하는 거잖아요. 그걸 반대하는 것은 뭘 증거 하겠다는 말이에요.
-그걸 부정하는 게 아니고 지금
부정 안 하면 시비 걸지 마세요. 그걸 부정한다면, 뭘 증거 하겠다는 말입니까? 결국은 주께서 주신 우리 교회를 인정하자는 결국 교회론 쪽으로 나가버린다 하니까 그게. 이광호 목사 그렇게 돼버려요. 주께서 거듭나게 하신 모임. 이것 지방교회와 똑같잖아요. 그렇게 될 수가 있다 말이에요. 그 고리를 인정해주면 안 돼요. 잘라버려야 돼요. 그 고리를 잘라버리세요.
제가 항상 했잖아요. 뭘 강의를 하던 설교를 하던 항상 누구를 증거 하기 위해서 함이냐? 어떤 호기심이나 궁금증을 푸는 게 아니라 누구를 증거 하기 위해서 함이냐?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일하고 계셔서 우리가 존재한다. 항상 그리스도 때문에 산다는 그걸 증거 하기 위해서 한다면, 모든 신학이 그쪽으로 모여져야 된다 말이죠. 그렇게 모이게 한다고 그걸 자꾸 시비 걸면 곤란하죠. 도대체 무슨 마음으로 시비 거는지 의심될 수가 있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제 말 틀렸어요?
지금 유기체 주장 안 하는 교회가 어디 있습니까? 모든 신학 가운데 개혁주의 신학 가운데 심지어 천주교까지. 우리는 유기체다. 유기체다. 다 그렇게 이야기한다고요. 그러면 유기체하면 다 교회 맞아요? 이단들인데. 내가 보기에는.
-유기체를 지금 뭐라 하는 게 아니고, 생성론과 유기체란 것이 지금 같이 있는데 목사님은 생성론적인 것만을 이야기하니까 자꾸 그렇게 되는 겁니다.
포괄적인 것이 더 우선되어야 합니다. 포괄적인 것이. 사탕 있다. 맞지요. 그런데 누가 주는 사탕이냐? 이럴 때 의미가 달라져요. 만약에 사탕 있다 했으면, 사탕 내 것이다 할 수 있어요. 교회 있다. 유기체로 있다. 아니고, 내 교회 참된 교회구나 이럴 수가 있다 말이죠. 그걸 그냥 유기체라 하지 말고 주께서 있게 하셔서 교회되게 했다. 왜? 촛대 옮겨 버리면, 그만이니까. 촛대 옮겨버리면 교회라고 붙은 교회 간판 내려야 돼요.
그러니까 아, 주께서 교회되게 하실 때만 교회구나. 이걸 가지고 그냥 없는 용어니까 있을까 싶어서 생성론 썼는데, 생성론 주장한 것도 아니에요. 목사님 말씀대로 머리는 그리스도요, 우리는 몸인데 그게 부활의 영으로 역사합니다. 저는 그렇게 만 이야기하고 싶어요. 그런데 질문 자체가 생성론 나오고 유기체 차이점 나오고 하니까 설명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머리와 몸의 관계고 그런 상태로 있다면
그게 부활의 영으로 있는 거예요.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형제를 찾아가게 되는 것이지, 형제를 왜 찾아가느냐 니가 나를 찾아가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어떤 주가 되셔서 음행하지 말라고
찾아가는 과정을 통해서 양발차기 한다니까. 하나는 주께서 사랑한다는 것 나오고, 하나는 뭐냐 하면, 우리의 자기 행위, 죄 됨을 나오기 위해서 양쪽 다 나온다고 아까 첫째 시간에 그렇게 이야기했는데도 왜 그렇게 한 쪽만 이야기합니까?
사람이 이렇게 이것이 내 행위로 내가 교회 관리 차원에서 한다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이게 죄라는 걸 깨달을 때 순전히 주님의 사랑으로 한다는 것을 안다니까. 자기가 죄인인 걸 알 때 주님의 은혜가 은혜답게 더 커지는 거예요. 자기 죄인 될 때.
그때 만약에 가서 집사님, 뭐 음행하셨다면서요? 하면, 집사는 나, 음행이고 뭐고 당신한테 권면 받는 것 당신 교회 안 다니고 딴 교회 간다 할 때에 사람이 심방 갔는데 이런 소리 나오더라도. 맞아. 이 사람이 언제까지 니 교인 아닌 것을 깨닫기 위해서 찾아가라 했구나. 내가 참, 찾아갈 때는 이 사람은 내 교회고 내 지체기 때문에 찾아갔는데, 막상 가보니까 목사님, 나 목사님하고 볼 일 없습니다. 나, 다른 교회 갑니다. 아하, 내가 이 사람을 우리 교회 소유로 삼았다는 그런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일부러 두 사람을 만나게 했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 거예요. 그러면 가세요. 하고 기쁨으로 보낼 수 있지요.
항상 어떤 과정에서도 나의 품어 있는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그런 일들을 주셨다 보자 이 말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온전히 주님의 사랑으로부터 나왔다. 도대체 뭐가 문제되는지 나 이해가 안 되는데.
-용어를 다른 교회의 일반적으로 사용 안하는 용어, 유기체라는 그걸 그것 때문에 그 다른 개혁교회도 목사님, 다른 계시 뭐, 교회 다 쓰잖아요. 그런데 이제 의미가 다르잖아요. 목사님 이야기하는 것 하고 그들이 이야기하는 것
그들은 유기체로서 교회가 안정되었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그건 아는데 목사님, 우리도 사용할 수 있지 않느냐? 뜻은 다르게. 그런데 그걸 목사님께서 포용
아아, 뜻을 다르게 사용되는데 반드시 왜 다른가를 설명해 줘야 되죠. 그걸 설명 안 해 줘 버리면, 마치 기존의 교회관이 옳은 게 돼버려요. 교회 중심의 교회관이 되면 안 되거든요.
-그런 식의 유기체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니까요. 지금
그런데 그러한 잘못이 여전히 우리 속에 남아있단 말이죠. 항상. 남 잘못이라 할 것이 아니고 내 잘못으로 그게 언제든지 나올 수 있다 말이죠. 내가 복음 전했더니만 몇 명 건졌구나. 그러니까 이 교회는 훌륭한 교회다. 라고 착각할 때가 있다 말이죠.
-그건 맞죠.
-목사님은 유기체는 쓰지 말라. 이런 말로 완전히. 유기체 뜻, 의미나 결국은 한 몸, 지체된 관계
그래서 제가 포괄적인 뜻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그걸 고수하는지 몰라서 그래요. 왜 그러냐 하면 주님을 증거 하는 더 좋은 뜻이 있는데도 왜 그걸 할 필요가 뭐가 있느냐 이 말이죠. 자꾸 모호한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좋지 않다 이 말이죠.
-'관계'라는 이것도 철학에서 많이 쓰데요.
많이 쓰지요.
-그러니까 그런데 관계는 그리스도 교회의 관계. 그렇지만 의미는 완전히 다른 것 아닙니까?
예. 다르지요.
-그렇게 이해를 하고 넘어가면 될 것 같은데
항상 어떤 용어를 쓰든지 간에 그걸 통해서 자기 죄를 발견하는데 사용해야 됩니다. 자기의 부족한 것. 왜 십자가만 구원 받을 수밖에 없나. 하는데 나와 줘야 십자가만 증거 되는 겁니다.
세례 요한 좀 이야기하고 마치겠습니다.
두 가지 있다고 했어요. 하나는 세례 요한 묵시적이 있고, 하나는 뭐냐? 기록 말씀이 있잖아요. 에스라, 느헤미야는 뭐냐 하면, 이제는 성경기록이 말씀이 안정되었기 때문에 이것 지켜서 구원받지, 뭐, 제사장 더러운 놈들 와봐야 물든 놈들, 믿을 수 없다. 이제는 말씀 중심으로 나가야 된다. 물론 제사장도 하지만 항상 말씀이 우선이에요. 그냥 말씀이 아니고, 기록된 말씀입니다.
기록된 말씀으로 한 것은 뭐냐 하면, 더 이상 선지자가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하나의 주의할 것은 선지자가 없다는 말이 나, 선지자요. 하는 그걸 말하는 게 아니고, 그 당신 구약 선지자는 뭐냐 하면, 주께 어떤 선지자는 특정 직업이 있는 게 아니고, 선지자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는 게 아니고, 말씀이 선지자 되게 하는 사람이 없는 거예요. 말씀이 우선이고 말씀이 떨어진 사람이 없는 거예요. 말라기 이후에. 말씀이 떨어진 사람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누가복음에 보면, 세례 요한은 희한하게 말씀이 떨어져요. 본인이 원치도 않는데 심지어 지가 요단강에 세례 줄 때도 자기가 없으니까 저분 누군데 묻지도 않는데 말씀이 떨어져요. 이것은 세례 요한이 더 이상 자기의 생존에 연연이라든지 뭐, 내가 선지자 이런 데 관심이 아니라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일이 중지되지 않고 연속되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방식이 바로 세례 요한에게 주어진 방식대로의 메시야이지, 그때 세례 요한에게 나타났다는 말은 앞에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기록된 율법, 이것 지켜서는 절대로 아니다 말이다. 그렇다면 세례 요한부터 예수님은 뭐와 대조가 되겠습니까? 기록된 말씀 가지고 관리하고 합리적으로 따지고 이걸 체계를 세워 시스템을 만드는 모든 것은 완전히 아니다 이 말입니다. 완전히 아닌 거예요.
그래서 신약성경에서 놀라운 것은 세례 요한의 뿌리가 말라기에서 나왔다고 보지 않고, 놀랍게도 요한복음과 같은 다른데 보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먼저 선지자에요. 그런데 세례 요한을 묶을 때 말라기와 묶는 게 아니고, 분명히 말라기와 묶어져요. 말은 맞는데 실제로 뜻은 맞는데. 해석하기를 예수님께서 또 세례 요한도 마찬가지고. 내가 전하는 광야에서 왕의 소리로 이렇게 묶어 버려요.
이렇게 묶는다는 말은, 이 기록 말씀을 지키겠다는 인간이 결국 선지자를 욕되게 하고 선지자를 공격하는 식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이 말이에요. 그렇게 이게 돼야 세례 요한부터 비로소 이게 마지막 때라는 말을 쓸 수가 있습니다.
마지막 때라 하면 그 다음에 뭘 쓸 수 있느냐 하면, 성령과 불로써 세례가 성립 됩니다. 성립이 되고, 물세례는 그 마지막 때를 대비하는, 대비한다기보다는 하나의 사인 보내는 거예요. 마지막 때, 마지막 때. 풍선에다가 마지막 때라는 풍선을 올리는 것처럼. 여기에 대해서 세례를 받음으로써 마지막 때라는 그러한 걸 올리는 거예요.
이것이 오순절 이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을 받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게 예수 믿음이라는 걸 써서 풍선을 올리면, 저기서 올라오면 이 세상이 무슨 세상이다? 마지막 때라는 증표로써 올라가는 거예요. 개인적인 구원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세례 요한 이후에는 내가 구원받는 게 문제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사람만 구원된 사람이고, 구원되고자 하는 사람은 절대로 구원시켜주지 않는 식이에요. 구원받고자 하는 사람은 절대로 구원시켜주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용도로서만 등장하는데 그걸 결과적으로 말해서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기록된 말씀 가지고 제대로 지켜보자 하는 것을 거부해요. 무슨 말이냐 하면, 성령 받아서 이 성경말씀 제대로 지켜보자는 사람들, 다 사기입니다. 신자아니에요. 옛날 사람 못 지킨 것, 성령 받아서 지켜보자 하는 사람들, 다 사기입니다. 이제는 그런 시대가 아니에요.
그런 시대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만 하면 충분하고 모자람이 없고 다만 다 이루심이라는 것을 풍선으로 날려 보낼 때 사람들은 이게 우리가 뭘 새삼 지켜서 구원받는 시대는 끝났구나. 주께서 건질 자만 자기 증인으로만 건지고, 나머지는 완전히 싹쓸이하는 그런 시대에 돌입했구나 하는 겁니다.
그런 식이 되려면 인간으로 구원되고자 하는 것은 극구 저지하고 막는 방식으로 나올 수밖에 없어요. 계속 인간 힘으로 인간의 식으로 구원되는 것은 일체 있을 수 없는. 인간 식으로 구원되는 것은 있을 수 없어요. 이제는 구원론은 끝나버렸어요. 구원론은 없어요.
남은 것은 기독론밖에 예수 그리스도론 밖에 없습니다. 구원되는 것은 그리스도론에 의해서 결과적으로 성립이 돼요. 이 싸움이 세례 요한이후에 예수님 공관복음에서 계속해서 기존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하고 계속해서 싸우고 있는 대목이에요.
그걸 상세하게 이 책에서는 이야기 안 해 주고 있습니다. 이 책에 왜 이야기 안 해 줄까요? 처음에 이야기했죠. 왜 이야기 안 해 주느냐 하면, 이 책은 역사주의거든요. 역사는 과거 없는 미래는 없고 과거 없는 현재는 없습니다. 역사를 이으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나 저는 반대합니다. 세례 요한은 역사를 잇는 사람이 아니고, 역사를 단절시키는 거예요. 역사를 완전히 단절시키고 묵시적으로 나가 버리는 거예요. 역사를 단절시키는 겁니다. 왜냐하면 다른 차원에서 예수님과 같이 결합된 분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알고 있어야 세례 요한의 의미가 있는 거예요.
이것이 세례 요한이 태어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례 요한이 태어나고 예수님 태어났지만 사실은 세례 요한이 태어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해서 세례 요한이 있다는 예수님 중심으로 결합해버린 겁니다. 이것은 이미 시대가 붕 날아가 버렸어요. 딴 것은 시대에 열차처럼 기어간다면, 세례 요한이후는 역사가 공중으로 붕 날아버려요.
이것은 역사로서 포착이 될 수 없는 묵시가 믿음을 줘야 되는 그런 식으로 날아버리죠. 그렇게 나둠으로 말미암아 성경에 대한 율법에 대한 역사적 해석은 아무리 해석해도 예수 그리스도가 포착되지 않는 그런 시대에 돌입합니다. 들을 귀 있는 자만 듣고, 그리고 모든 것을 구원받지 못하도록 감추어진 비밀로서만 계속 비밀로서만 저지하고 거부하는 식으로만 해석이 계속 이어져 나오고 있습니다.
방금 여러분들이 이 책을 쭉 보면, 요한의 세례, 물세례, 세례의 기원, 쭉 나오는데 이 사람이 4복음서의 요한 해서 이 부분에서는 약간 설명했어요. 이 사람은 뭐냐 하면, 요한복음은 진짜 그 당시의 책이 아니고, 재해석한 책이라고 보기 때문에 요한복음의 세례 요한의 모습과 공관복음의 모습하고 다르겠구나 하는 거예요. 그러나 저는 그걸 거부하기 때문에 지금 요한복음 입장에서 전체를 다 다시 설명해 드리는 겁니다.
한번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아, 오늘 힘들어.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있게 된 것은 예수님이 먼저 계시기에 저희들이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에 우리가 철저하게 그것만 관심 있고 바라보게 해주시고 어떻게 사는지, 어떻게 죽는지에 대해서 관심두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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