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060905a 조지 래드 [신약신학]-세례 요한(1)
Re..060905a 조지 래드 [신약신학]-세례 요한(1)
이름 : 한윤범(IP:)
20060905a 부산강의 : 조지 래드 [신약신학]-세례 요한(1)
(강의:이근호 목사)
래드의 신약신학을 서론 부분은 뛰어 넘읍시다. 서론 부분을 뛰어넘는 제 나름대로의 이유는, 그 사람이 신약신학 학문 자체에 대한 어떤 긍정성, 또한 당위성, 신약신학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 이 사람이 서론부분에서 뭐를 이야기하느냐 하면, 역사를 이야기해요. 역사라는 이름의 계시를 무시할 수 없다. 이렇게 주장한다 말이죠.
이것을 뭘 뜻하느냐 하면, 기존의 신약신학이 나오기 전까지는, 신학학문 자체는 교리를 정당화하는데 그냥 종노릇한 것에 불과한 것이니까. 기존의 교리를 꿰맞추기 위해서 그것을 옹호하기 위해서 성경구절 자체에서 말하는 것을 잘라버리고, 기존의 교리를 정당화해준다. 라고 일방적으로 붙였기 때문에 그것을 분쇄하고 성경 자체를 말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신약신학이 해야 될 이유다.
그런데 그 사람이 성경이 이야기한대로 가야 된다고 해놓고는 성경이 이야기한 대로 안 가고, 역사 쪽으로 가버려요. 성경이 말한 대로 가는 게 아니고 성경의 뿌리를 뭐로 바치느냐 하면, 역사라는 걸 가지고 성경에 나온다 말이죠. 성경이라 하는 것은 역사적 산물이지, 실제 역사 속에 일어나는 하나님의 계시보다 성경이 더 우선할 수 중요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보는 의견이지요. 상당히 위험한 발상이죠. 굉장히 위험한 발상입니다.
성경을 분해해서 날아가 버리죠. 성경은 뭐냐 하면, 넓은 역사 가운데 발췌하는 겁니다. 그 사람 주장하는 것은. 넓은 역사 가운데서 발췌했다. 그렇게 되면 충분히 믿을 게 못되지요. 이것은 교의신학에서 말하는 성경의 충족성에 위배됩니다. 성경의 충족성이라 하는 것은 성경은 더 보탤 필요 없을 정도로 하나님의 계시이다. 이게 충족성인데, 만약에 성경 말고 더 보탤 것이 있다면 성경의 충족성이 아니고 미흡성이죠. 성경의 불충족성이죠. 미흡하다 말이죠.
이런 사고방식이 돼버리면 사람들은 본인이 성령 받은 성도가 성령 받은 성경을 본인이 감화 감동 받았으면, 전부다 이건 사기가 돼버리고, 누구한테 조언을 받아야 되느냐 하면, 역사 공부를 했던 특히 신약시대의 상태의 역사를 공부했던 신학자한테 조언 받지 않으면 전부다 엉터리 해석이 나오게 돼요. 왜? 신약신학은 역사 본래의 모습을 더 포괄적으로 넓혀놨기 때문에 그냥 일반 평신도가 성경 봐서 은혜 받는다는 것은 전부다 엉터리일 수 있는 가능성이 많다. 이런 결론에 도달 되겠지요.
하여튼 신약신학을 하는 인간이든, 구약신학을 하는 인간이든, 조직신학을 하는 인간이든 자기가 하는 학문에 대해서 어떻게 자기 존재성의 정당성을 탈피할 수 없는지. 제가 보기에는. 신약신학을 하면서 신약신학은 십자가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다. 이렇게 나와야 될 건데. 구약신학을 하면서 내가 구약신학 전공자지만 십자가 앞에서 개뿔도 아무것도 아니다. 이렇게 나와야 될 건데. 이거는 공부 좀 한다 싶으면 전부 내 말 안 들으면 계시가 아니다. 이렇게 나오니.
그것은 바로 신학자들이 그렇게 나오니까 누구한테 욕 얻어먹느냐 하면, 철학가한테 욕 얻어먹는 거예요. 그게 바로 존재성에서 나오는 거예요. 내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에서 나오게 되지요. 내 존재는 자기 존재를 증명하는 쪽으로만 자기 존재에서 발산될 뿐이다 말이죠.
이걸 철학적으로 이야기하면, 인간의 존재에서는 그냥 존재만 나오는 게 아니고 행위가 나와요. 이 행위라 하는 것은 그냥 뚱땅 같이 나오는 게 아니고, 이 존재성을 더욱더 과시하겠다는 쪽으로 행위가 나오고, 그러면 뭐가 은폐되겠습니까? 내 존재성을 삭감하는 것은 은폐시키게 되겠죠. 그러니까 인간의 행위라 하는 것은 반드시 중간에 뭘 남긴다? 행위 하면 할수록 더욱더 은폐성을 남기는 거예요. 착한 일을 하면 할수록 그 착한 일에 수반되는 악한 일은 계속 숨기기 마련입니다.
목사가 설교하면서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열심히 설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누가 대신 해줬으면 좋겠다는 농땡이성, 설교 게으름, 이런 건 뒤에 감추는 거예요. 선이 있는 곳에 악이 있고, 악이 있는 곳에 선이 있는 겁니다.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는 이게 짝이 되어서 홀로 있는 경우가 없어요. 반드시 양쪽이 같이 나타나는 겁니다.
십자가를 알려면 선을 가지고 십자가 접근하면 안 되고, 악을 가지고 접근하면 안돼요. 선과 악 양쪽을 가지고 십자가 앞에서 그 둘 다 부셔져야 돼요. 선이 무너지면 악도 함께 무너져야 되고, 악이 무너지면 선도 함께 무너지는 겁니다. 무엇이 죄냐 하면, 놀랍게도 악한 것을 생각하는 자체가 죄가 돼요. 내가 악할까? 그거 왜 생각나는데. 그거 왜 생각해요.
하나님의 믿음이라는 것은 마치 유리판 위에 흘러가는 물 같아서 유리판이 흡수를 못합니다. 그냥 유리판에 물 쫙 뿌리면 물이 쫙 떠내려가지요. 물 뿌릴 때나 안 뿌릴 때나 나중에 남는 게 유리판 밖에 안 남잖아요. 인간은 선악구조기 때문에 주의 은혜라 하면 싹 흘러가면, 남는 것은 선악구조만 남아요.
그런데 사람들은 선악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은혜를 흡수해서 이걸 자기 의로 만들려고 하는 거예요. 마치 유리판이 자기 위에 흘러가는 물기를 흡수해서 내가 물기 촉촉한 유리판 되고자 하는 거와 똑같다 말이죠.
하나님의 거룩을 내 것으로 만들어서 내가 하나님의 거룩이 촉촉한 인간 되고자 하는 그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소위 반성하는 기능입니다. 이걸 칸트에서는 이성적 기능이라 하는데. 이성적 기능의 근본은 뭐냐? 자기반성에 들어간다. 하나님이 이렇게 거룩한데 나는 이렇게 죄 지어서 되겠느냐? 나도 착하게 살아야지. 하는 반성하는 기능이 나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자기 반성하는 것조차도 주님의 십자가로 행위로 구원받았다는 것을 모독하는 행위가 되는 거예요. 이해되십니까?
구원은 주님의 십자가 행위로 구원받는데 자기가 십자가로 구원받고 착한 사람 되어서 거기에 보태서 구원되고자 하는 심보가 여전히 그동안 미처 십자가를 알기 전에 몰랐던 죄가 발각 당하는 거예요.
저는 이 책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까 약간 우려하고 있어요. 보기 전부터. 혹시 이 책에서 행여나 주님의 십자가 은혜만 미끄럽게 증거 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흡수해서 내가 어떻게 달라지는가가 나올까봐 걱정스러워요.
그래서 막상 이 책을 보면, 여러분 이 책을 다 읽어 봤습니까? 이 책을 다 읽어 보면, 자기 딴에는 신앙생활 잘한다, 나도 복음 안다, 언약 안다, 나도 신학 한가락 한다. 하는 사람이 반박이 안돼요. 너무 인간이 나올 수 있는 것, 완벽하게 다 담았기 때문에. 마찬가지일 거예요. 반박이 안돼요. 그런데 이상하게 찝찝해요.
물론 이 래드는 마지막에 전천년주의자라고 고백했기 때문에. 아이고, 드디어 자기 정체를 드러내는구먼. 결국은 인간주의고. 서론부터 보면 이게 안 나오는데. 전천년주의자니까 뭔가 거기서부터 단서로 잡고, 이게 전천년주의 아니니까, 무천년주의 아니니까 앞에 뭐가 있다. 하고 찾아봐도 잘 안 들킨다 말이죠.
그 정도로 자료가 방대하다 말이죠. 방대하다는 말은 자기주장만 이렇게 내세우는 게 아니고,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전부다 다 ( ) 통해서 알려줘서 보는 사람이 알아서 골라잡으세요. 할 정도로 아주 대범한, 대승적인 그러한 마음으로 학문을 하기 때문에 남들한테 뭔가 잡히기가 곤란하거든요.
하지만 이러한 사람이 여러분 교회에 교인으로 집사로 앉아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역시 그 사람도 십자가 복음을 들어야 될 사람 아닙니까? 그렇지요? 그렇다면 그 사람한테 복음을 어떻게 전하겠어요? 그게 아니고 이게 복음이라고 전할 수 있어야 돼요. 그러면 그 사람이 알고 있는 이것을 우리는 알아야 돼요, 몰라야 돼요? 이걸 알아야 돼요.
조지 래드가 이 자리에 앉아 있다 하는 것은 약간 어불성설이지만, 래드를 추종하는 자라든지 래드의 사상을 반쯤 안다는 사람도 래드와 같은 노선이기 때문에 길이 같은 길이기 때문에 그들에게도 십자가 복음을 들을 권리가 있어요. 심지어 불신자도 그런 권리가 있듯이. 자기는 이게 구원의 길인 줄 알고 있을 게 아니냔 말이죠. 이게 구원의 길이라고 생각할 것 아닙니까?
사람이 뭘 알게 되면, 안만큼 사람이 그만큼 교만해질 가능성이 농후한 겁니다. 십자가에서 자꾸 떠날 가능성이 많아요.
다시 말씀드리면, 역사를 이미 이야기했다는 것은, 역사라 하는 것은 사람들이 존재가 만들어내야 만들어지는 거거든요. 그런데 지금 존재라 하는 것은 존재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존재의 힘으로 작용한단 말이죠. 그 존재의 힘이 뭐로 나온다 했습니까? 행함으로 나오는데, 20세기 초반까지 니체 철학까지는 뭐냐 하면, 존재에서 행함이 나오기 때문에 인간의 행함을 누가 저지하는 것은 어떤 인간도 용납해서는 안 된다. 신이라는 이름으로도 인간의 행함을 인간의 자율성을 박탈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20세기 초반에 확 퍼졌어요.
니체가 주장한 비범이라 하는 것은 초인사상인데 초인사상이 뭐냐 하면, 우리가 얼른 들으면 능가한다, 뛰어넘는다. 높이뛰기 할 때 저쪽을 넘는다. 뭐 그런 뜻이잖아요. 그런 뜻이 아니고, 초인사상은 인간은 원래부터 놀이하는 인간이라는 뜻입니다. 그게. 인간이 놀겠다는데 신이 니가 왜 방해하느냐? 이게 초인사상이에요.
초인사상에서 주의할 것은, 초인사상은 역사를 초월합니까? 라고 묻는 것은 실례가 되는 거예요. 니체의 초인사상은 역사를 초월해서 영원에 들어간다는 것도 아니고, 그런 구차한 것 생각할 필요도 없이 지금 즐기자는 거예요. 역사가 어떠니, 영원이 어떠니, 천국이 어떠니 그럴 게 없이 지금 즐기면 될 것을 무슨 천국이니 그런 것을 왜 생각하느냐 이 말입니다.
이 초인사상에 대해서 지금까지 굉장히 강하게 지금도 유행하고 있지만, 지금 많은 철학가들, 특히 경북대학교 철학교수 같은 경우에는 초인사상에 빠진 사람들이 한두 명이 아닙니다. 제 딸이 거기 강의를 듣고 하기 때문에 아는데. 거기에 대해서 반성하는 게 뭐냐 하면, 사람이 행위가 나왔을 때는 뭔가 감추고 행위가 나오지 그냥 나오는 게 않는다. 여러분, 로켓이 올라갈 때 뒤에 엉덩이로 뿜어내지 않고 올라가는 것 봤습니까? 반드시 뿜어내는 반발 에너지를 통해서 위로 올라가잖아요.
이 반발 에너지를 라캉을 통해서 비로소 사람들은 이야기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니까 그동안 초인사상, 인간은 즐기면서 산다. 여기에 대해서 라캉에 대해서 얼마나 공격했다고요. 지금도 공격하고 있어요. 지금도 라캉 죽이려고 공격하고 있습니다. 인간 그렇게 어둡지 않다 이 말이죠. 프로이드 공격 막 합니다.
특히 누가? 생물학자들이. 생물학자들이 프로이드는 과학도가 아니고 이거는 소설이다. 하고 미국에서 공격하거든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프로이드 사상이 문제되는 게 아니고 생물하면 발전, 발전이에요.
그런데 프로이드는 인간의 어두운 면을 이야기하니까 사람들이 즐겁게 행동하려다가 주춤하잖아요. 주춤한다고. 이것 또 내가 지금 밝게 나는 솔직하게 행동하는데 라캉에 의하면 뭔가 숨겨놓은 게 있다는데, 숨겨 논 게 뭔가 찾아보자. 이렇게 주춤한다고요. 주춤하면 코앞에 즐길 것을 즐기질 못하고 그만 거기서 반성해 버리니까 진짜 즐기질 못하잖아요.
니체사상의 핵심은 뭐냐 하면, 그겁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아작아작 따먹을 때 그 기쁨을 유지하자 이 말이죠. 넘지 말라고 할 때 넘지 말라고 선을 그을 때 그걸 넘는 쾌감은, 먹지 말라는 사과를 완전히 와자작 씹을 때 그 삼키는 맛. 이거는 안 가르쳐주지. 이 맛이 보통 맛이 아니에요.
먹어라! 할 때는 그 맛이 안 나와요. 하지 말라고 금지할 때 그 금지선을 넘으면서 해보는 그 맛. 애들한테 그런 게 많아요. 나중에 어른도 그런 게 있는데. 앞뒤 안 가리고 해보는 거예요. 그것이 니체에요. 그것이 이 자본주의를 움직이게 하는 발전을 시키는 원동력입니다.
공장을 세우는데 환경문제 신경 쓰면 안돼요. 환경문제 관계없이 무조건 폐수 오염하고 돈만 벌면 돼요. 왜? 그래야 발전하니까. 애들이 오토바이 타고 질주. 속도가 180, 200 넘어가는 겁니다. 왜? 너, 하지 말라. 하면 200 넘지 말라. 하면 넘을 때 오는 내가 넘었다는 것. 내가 모든 법에서부터 초월했다는 이 초인사상. 이 맛은 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마약, 동성애, 온갖 금지가 거기서 생기는 거예요. 아직 주춤주춤하고 있는 사람, 그걸 비난하는 사람들은 아직 자기가 그 선을 안 넘어갔기 때문에 비난하지, 같이 넘어가면 동지가 돼버리죠. We are the world. 하나의 동지가 돼버려요.
이것이 바로 역사를 이끌고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 성경신학의 이런 약점이 서론에 있기 때문에 제가 그 점을 이야기한 겁니다.
오늘은 서론부분 넘어가고, 세례 요한에 대해서.
세례 요한에 있어서 이 사람이 아주 중요한 단서를 제공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세례 요한 당시에 유대인들이 구약을 어떻게 해석했느냐? 아, 중요한 문제 아닙니까? 대단히 중요한 문제지요. 세례 요한 당시에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구약을 어떻게 해석했고, 어떤 메시야를 찾았느냐? 라는 것에 대해서 이 사람은 두 가지의 노선이 있었다고 이야기하지요.
한 가지 노선이 뭐냐 하면, 기록종교였습니다. 여러분들이 이걸 다 어떻게 읽어 오셨습니까? 기록종교라 했는데. 기록종교를 제가 좀 설명해 드릴게요. 에스라, 느헤미야 시대를 말합니다. 기록종교란 게.
제사장들, 이 사람들 에스겔 때 사로잡혀 가서 제사장들이 포로 잡혀 가면 제사장으로 인정 안 해 주죠. 그냥 포로인이니까. 제사장은 자기 대를 세습제이기 때문에 자식도 제사장 돼야 될 텐데 제사장이 덜렁 포로 잡혀가니까 제사장 자체가 날아가 버리고, 자식들한테 제사장 어떻게 한다는 것도 시킬 수 없고. 왕은, 더구나 왕도 없고.
옛날에는 제사장이 제사를 드리면서 세미나를 여는 겁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모든 가장들은 어떤 조건하에 일년에 세 번씩 세미나에 참석하느냐 하면, 출애굽기 13장 1절, 2절에 보면, 첫 번째 태어난 것은 전부다 내게 돌리라. 내 것이라 했습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나라를 기존의 나라로서는 모든 그 나라의 왕이든 백성이든 그 가정 하나하나가 자기 조상에 의해서 연속적인 형태를 가지고 할아버지, 아버지 이렇게 내려오는데.
이스라엘 나라의 특징은 뭐냐 하면, 장자가 항상 볼모로 잡혀요. 누구한테? 여호와한테 볼모로 잡혀요. 자기의 장자를 하나님의 소유로 돌림으로써 그 장자의 운명과 남은 식구들이 같이 동고동락할 때만 그들은 거룩한 백성이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 국가라 하는 것은 가족이 모여서 되는 거잖아요. 옆에 있는 가족, 그 옆에 있는 가족, 가족 가족끼리 모여서 전체가 하나의 국가 되는데, 한 아가페 하나 가족 가족마다 그 제일 위에 장자들이 전부다 누구 것이라고요? 자기 집안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으로 돌려버리면, 전부다 하나님의 지점이 되지요.
그러니까 그 장자는 하나님에 의해서 파견근무하고 있는 하나님이 지사하게 되면 하나님의 사원이 되는 거죠. 그래야 하나하나 거룩한 가정이 되어서 하나하나가 거룩한 국가를 형성하는 겁니다. 그 가장들이 일년에 세 차례씩 모이게 되어 있습니다.
세미나를 들었는데, 그 세미나 현장에서 그들은 그냥 빈손으로 오지 못하고, 양과 이런 제물을 드려서 특별히 자기가 드릴 게 있다 싶으면 더 드려도 괜찮고. 안 그러면 그냥 기본적인 양, 애가 셋 태어나서 그런 것 해서 드려서 제사를 드립니다.
제사를 드리는 현장에서 제사장들은 율법을 들어서 옛날에 과거에 조상들의 하나님이 일하심과 역사와 시편에 나오는 여러 가지 기사들 그걸 설명해 주고 해석하지요. 그러면 그걸 전수받은 사람이 자기 집에 돌아가서 대대로 자식들에게 이야기해 주는데 그 모든 일들의 초점이 바로 유월절의 의미가 뭐냐? 왜 우리는 유월절을 지내야만 하는 민족이냐? 그거에요.
유월절을 왜 지내야 되는가? 유월절뿐만 아니고 맥추절과 수장절, 이 세 가지 절기에 왜 우리가 매여 살아야 되는 그러한 민족인가 하는 것을 되새기죠. 그렇다면 출애굽기 12장에 나오지요. 너희 후손들이 말하기를, 아버지 왜 이걸 드려야 됩니까? 할 때 옛날 우리 조상들이 애굽에서 나왔을 때 이러이러한 놀라운 기적이 있었다. 라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드리고, 옛날 그 사건이,
여기서 어려워요. 그게 신기하고 어렵고 논리적으로 안 맞는데, 논리적으로 안 맞는 이야기가 돼요. 뭐냐 하면, 하나의 유월절 사건이 그때 이스라엘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유월절을 되풀이할 동안만 새롭게 이스라엘 자체가 갱신된다는 그러한 논리를 율법에 들어있습니다.
인간적인 철학적인 논리에 의해서는 그게 왜 그렇게 되느냐 말이 안 되지요. 왜냐하면 역사라 하는 것은 인간의 행동에 의해서 움직이기 때문에 현재 인간이 살아있으면 지나간 것은 과거는 사라지게 되어 있어요. 현재 있는 현재는 과거가 누적돼 있기 때문에. 과거가 누적된 상태에서 또다시 과거를 되풀이할 이유는 없다 이 말이죠.
그런데 유월절이라는 것을 되풀이 해버리면, 이것은 역사를 되풀이하는 역사의 의미를 중첩시키는 그러한 주체자가 소위 역사의 주인공이라는 인간의 손에서 떠나버리고 하나님의 법에 의해서 마치 그때의 현실을 되풀이하는 현실이 되는 거다 말이죠.
이것 좀 설명해 드릴게요. 지금 차영배 교수가 이런 것 때문에 헷갈리는 거예요. 단일성과 반복성을 말해 놓고 어떻게 이어지는가 말도 못하고, 단일성과 반복성만 주장하고 나가 떨어졌는데. 성경구절 하나 대고. 왜 그렇게 되었느냐 하는데.
기존적으로 제가 50대지만 40대 나, 어디 있습니까? 없잖아요. 없다고요. 지금 50대 내 속에 40대가 과연 들어 있느냐? 40대가 들어있다고는 말을 할 수 없어요. 그냥 40대는 지나가고 50대로서의 내가 있는 거예요. 그런데 40대에 만약에 예수의 십자가를 믿었다면, 50대에는 안 믿어도 됩니까?
만약에 지금 래드처럼 역사를 주장한다면, 40대에 믿는 믿음을 역사의 주인공인 내가 계속 열심히 믿자, 믿자 해서 50대까지 이어져서 만약 오늘밤에 죽는다면 낙원에 간다. 이런 논리가 되는 거예요. 이해되십니까? 이해되십니까?
래드의 주장에 의하면 역사가 중요하다고 이해된다면, 계시가 역사 바깥에 벗어나지 않는다는 게 확실하다면, 40대 처음 예수 믿었으면 이게 지금 구원파잖아요. 처음 믿잖아요. 당신 언제 구원받았어. 하면 그걸 유지해야 돼. 누가? 역사의 주인공이 누군데? 나, 아닙니까? 내가 농땡이 부리면 안 되잖아요. 열심히 교회 다녀서 40대 믿음, 고이 간직하고 여기다 성화도 보태서 그래서 50대 나를 만들어야 그래야 지금 주께서 부르시면 갈 수 있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지금 모든 교회가 다 그렇잖아요.
그런데 40대 믿은 것을 무효로 돌리고, 50대에 십자가 믿은 믿음은 역사를 초월한 다른 외부에서 지금 오늘 믿은 은혜를 따로 주지 아니하면 나는 지금이라도 십자가의 복음을 버릴 수밖에 없다. 이렇게 나온다면, 역사의 주인공은 누굽니까? 내가 아니잖아요. 자, 둘 중에 어느 게 맞습니까? 역사의 주인공이 우리가 될 수 있어요? 지금 이런 걸 모르니까 사람들은 십자가는 알고 그 다음에 성화란 말이 튀어나오는 거예요. 이런 걸 모르니까.
베드로하고 요한이 사도행전 3장에 보면 성전 미문에 있는 앉은뱅이를 낫게 했지요. 그걸 걸어가게 했을 때에 그게 베드로의 죄악입니까? 자, 오후 3시 30분에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낫게 했습니다. 이게 성령의 역사 맞지요. 이게 살아계신 주님의 역사 맞지요. 이게 베드로가 죄 지은 겁니까? 베드로가 죄 지은 거예요? 베드로가 죄 지어서 낫게 했습니까?
베드로가 죄 지은 게 아니고, 방금 누가 했다 했습니까? 방금 베드로라는 주체가 아니고, 주님께서 성령께서 이렇게 했지요. 그런데 3시 40분에 베드로가 말하기를 나, 3시 30분에 주의 역사로 해서 내가 낫다. 할 경우에 이 베드로가 한 이야기는 의로운 겁니까, 죄악된 겁니까? 3시 40분에. 10분 차이인데. 그럴 때는 이게 죄가 되는 거예요.
항상 베드로라는 인간을 통해서 주께서 역사하게 되면, 베드로 말 그대로 나의 경건으로, 나의 열심으로 한 게 아니라는 것이 분명히 고백되면서 그 현장에 주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10분이라도 과거잖아요. 과거의 이것을 내가 현재까지 나의 주체로써 끌어당기는 순간부터 과거의 이것은 현재 이걸 자랑한다면, 자랑한다는 자체가 이게 죄가 되는 겁니다. 그때 주께서 그렇게 사용했고, 지금은 내가 또 딴 걸 사용할 수 있겠지요. 그렇게 될 때 이 사람은 베드로는 죄가 아닌 것이 돼요.
만약에 이걸 두고 볼 때 이걸 죄라고 할 수는 없는 겁니다. 이 세상은 죄만 있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거예요. 이 세상은 죄만 있는 것이 아니고, 분명히 주께서 역사하시는 겁니다. 그러나 인간은 항상 뭔가 과거에 이렇게 주의 은혜로 뭘 했다고 자랑할 수 없을까? 나라는 인간을 주체로 삼는 순간부터 이거는 죄가 되어서 나와 버리는 거예요.
-거기서 베드로가 끝까지 자기의 한 것에 대해서 주께서 하셨다고 하면,
해도 그게 죄가 되는 거예요.
-그런 말없이 하면 죄로 남지 않고 의로 남습니까?
계속 의로 남는 거죠. 만약에 3시 40분 쯤 같으면 진짜 베드로 같으면, 10분 전에 멋진 일 했는데 난 몰라. 그건 주께서 알아서 한 것이고. 3시 40분 되서 3시 40분에는 주께서 나한테 또 할 일이 있어. 지금 오줌 누는 게 할 일이야. 오줌 누는 게 의가 되죠.
-그렇게 되면 목사님, 성령의 열매나 이 모든 것이 죄로 결과적으로 나타내기 위해서 나왔다는 말이 틀렸다는 말입니까?
아니죠.
-그러면 결론을 따지면, 그렇게 하는 것이 죄로 나타내게 하기 위해서 했다는 말이, 그 논리가 틀렸느냐는 거죠.
그 논리가 틀리지 않아요. 인간은 3시 40분에 반드시 과거를 생각하게 되어 있어요. 인간이니까. 이것을 벗어나는 인간은 없어요. 아무리 바울 사도가 관리를 해도 내가 자기 행한 것으로 의롭다 할 수 없는 거거든요. 반드시 생각하게 되어 있어요.
-바울이 고린도후서 12장에 14년 전에 천국에 간 체험을 객관화시켜버리거든요. 그 사람 있는데 난 모르겠다. 이렇게 나온다고.
난 말도 할 수 없다.
-그러니까 만약에 그때 내가 이렇게 되는 것은 죄가 되어서 그럼 그렇게 말한 겁니까? 그건 아니죠?
내가 되었다. 할 수 있는데 내가 섞는 것이 주의 뜻이라면 섞을 수도 있는데, 문제는 인간이라는 사실은, 인간이라는 자체가 자기가 자기를 잊어버려도 잊지 못한다는 겁니다. 원리를 이야기하면.
-오 목사님이 이야기하기를 성령의 열매나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죄로 나오게 하기 위해서 결국은 발생시킨다. 그렇게 말하고 있는데, 맞는 말입니까, 틀린 말입니까?
전체적으로 맞는 말이에요. 그런데 어떤 사건을 가지고 죄라고는 할 수 없어요.
-죄를 발생시키기 위해서 결국 성령께서는 그렇게 모든 앉은뱅이를 일으키기도 하고 성령의 열매로 나타내게 하기 위해서 결국은 죄를 발생시키기 위해서 나타내게 한다.
그 말 백 번 맞는 말이지요.
-결국은 다 죄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한다 이 말입니까?
전체적으로 봐서 그렇다. 왜냐? 전체적으로 봐서 인간은 항상 자기의식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맞는 말이죠. 그런데 어떤 사건이 죄악 된 사건이다. 이건 말 잘못 되었지요.
-그것 자체를 죄악 된 사건으로서 유발하기 위해서 나왔다. 그렇게 돼야 될 것 아닙니까?
아닙니다. 그건 아닙니다.
-결과적으로 결론적으로 죄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하기 위한 하나의 시발점이 아닙니까? 그런 이상한 이론이
아니, 이론이 아니고. 이래요. 비행기가 쉭 지나가거든요. 아이가 오줌을 싼다 말이죠. 애들 특징이 비행기 지나가면 오줌을 싸는 특징이 있어요. 그럴 때 조종사 찾아가서 당신이 비행기 지나가면, 아이 오줌 싸기 위해서 하기 위함입니까? 하면, 개 알지도 못하는데 난 비행기만 조종했을 뿐인데 애 오줌 싸는 것은 지 문제지, 왜 나한테 따지느냐 이러는 거예요.
주님께서 앉은뱅이를 낫게 하시는 것은 비행기 지나가는 것처럼 이렇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걸 보고 오줌을 질질 싸는 것은, 그거는 각 인간마다 그렇게 하는 건데 그 책임을 애한테 물을 수 없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이 누구기에 비행기가 지나가든 뭐든지 지나가는 것을 보면, 비행기가 지나가는 것은 결국 나로 하여금 오줌싸개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했다 하는 말은, 본인한테는 맞는 말이죠.
지금 손 목사님은 인간의 고백 차원과 실제로 주께서 일하는 차원과 이렇게 혼동하시면 안 됩니다. 주께서 이렇게 일하시는 것은 모든 것이 거룩하고 의로운 거예요. 하지만 인간의 고백 차원에서는 그 일을 보고, 자기는 죄인일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런데 그 고백에서 말하기를 그러니까 모든 것은 내 죄를 유발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지요. 하면 이거는 너무 자기 위주잖아요. 아까 처음에 이야기했잖아요. 유리판에 물 뿌리는 것처럼. 우리가 이것은 내 죄를 더 깨닫게 함이다. 하는 그 자체가 이거는 주님한테는 엉뚱함이다 이 말이죠. 아직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 미련을 갖고 있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거든요.
-그것보다도 이런 문제를 이야기하는 게 뭐냐 하면, 지금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죽었다 다시 살아난 상태가, 부활의 상태가 어떤 상태라고 봅니까? 죽었다가 살아있는 상태, 어떤 상태로 봅니까? 부활의 상태가.
죽었다가 살아있는 상태, 죽었다가 이미 산 상태라고 말할 수 있는데.
-살아있는 상태가 어떤 상태를 보고 살았다고 말씀하십니까?
살아있는 상태니까 살아있는 거죠. 그냥.
-성령은 어떻게 작용하며 성도는 어떤 상태로 살아있느냐는 겁니다.
지금 질문 자체가 벌써 답변이 나왔어요. 어떤 상태로가 뭐라 했습니까? 살아있네, 했지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십자가로 죽었다가 살렸도다. 할 때에 살아있는 상태가
상태가, 살아있는 것이 어떤 상태냐 이 말 아닙니까?
-산 상태가 성령에 의해서 깜빡깜빡거리며 살리시는 상태냐, 아니면 늘 살아있는 상태에서 성령이 작용하고 있는 상태냐?
성령이 늘 작용하는 상태죠. 그런데 인간은 깜빡깜빡 느끼죠.
-성령께서 작용 안 하시면 그럼 죽은 상태입니까?
아멘. 할렐루야죠. 그렇죠.
-그러면 어떻게 성령이 거할 수 있습니까?
질문부터 봅시다. 어떻게 상태가 살아 있느냐 하는 자신을 가지고 보세요. 상태라 하는 것은 살아있음을 이야기하는 똑같은 거예요. 목사님이 우는데 지금 어떤 상태입니까? 지금 우는 상태지, 뭐.
-목사님, 죽어있는 상태에서 성령께서 들어가 계시냐 이 말입니다. 살려서 깜빡깜빡 살려놨는데 그럼 모순이에요. 모순. 분명히 창세기에서 죽어있는 시체인 상태에서 신이 같이 거할 수 없고 같이 관계할 수 없는 상태인데 어떻게 죽어있는 상태에서 성령이 깜빡깜빡 같이 살 수 있는지
지금 죽음이라는 것도 용어가 개념이 두 개가 있어요. 뭐냐 하면, 하나님이 보시는 일하시는 죽음과 인간이 개인적으로 느끼는 죽음이 있고, 살아있는 것도 마찬가지고. 하나님이 살아있다는 것과 우리가 살아있다는 느낌이 드는데. 자꾸 곤란합니다. 주님이 살아있다는 것은 저 안에서 관계가 있으면 주님과 성도의 관계에 있으면, 이거는 산 상태라고 보는 거예요.
우리가 산 상태인데 우리는 지금 죽어가고 있잖아요. 육체가. 죽어가고 있으니까 죽음 상태에서 이 관계를 아니까 때로는 관계를 은혜로 감사하다가도 때로는 아이고, 나는 어떻게 살까? 사는 게 골치 아프다 하고. 아이고, 은혜 주시는군요. 아이고, 살았군요. 지금 죽어도 좋습니다. 이렇게 하다가 까불다가 하고. 손 목사님 깜빡깜빡 걷는 겁니다. 계속해서. 주님 보시기는
-목사님께서 설명해주신 상태인데, 성령께서 어떻게 이걸 좀 설명해 달라는 겁니다. 성령 어떻게 지금 방금 깜빡깜빡 깨워서 마치 살리는 것처럼 설명하고 있잖아요. 목사님은. 성도를.
성령께서 내주를 하게 되면 ....
-우리가 성도가 죽어 있는데 깜빡깜빡 살려서 살리는 상태가 되는데
지금 내 말 잘 들어보세요. 지금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주님께서 하나님께서 성령이라 하지 말고 하나님이라 합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금 자기 백성 삼았잖아요. 주님께서 삼았는데 우리는 아직 육체의 한계가 있고, 머리가 나쁘고 모든 걸 제대로 모르기 때문에 이걸 충분하게 못 느끼는 거다 말이죠.
그러니까 못 느끼는 건데 주님 보고, 지금 손 목사님이 저한테 질문하는 것은 뭐냐 하면, 우리 주님께서 성령께서 어떻게 하면 느끼게 하고 어떻게 하면 안 느끼게 하십니까, 어떻게 일하십니까?
-그게 아니고. 지금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와 죽었다가 다시 연합해서 살아났잖아요. 살아난 상태에서 방금 이 목사님께서 그 살아난 상태를 죽어있는 상태에 있는데 깜빡깜빡 성령께서 깨워서 살리는 상태라고 할 때, 아멘 했다고.
그렇게 아멘 한 게 아니고.
-방금 아멘 했어요. 방금.
지금 주님께서 내주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아멘 했다고. 주님께서 그 성도에게 안에 계시고 모든
-내주하시려면 성도가 죽음의 상태에서 어떻게 내주하느냐 말이죠.
죽었으니까 내주하지요.
-어떻게 해서 창세기에서는 육체가 된 상태에서 어떻게 성령이 내주한다고 합니까? 관계하지 못하는 상태고 죽은 상태인데.
그거는 새언약이 주어지면 관계하게 되어 있어요.
-살아있기 때문에 성령께서 들어가서 관계 하는 것 아닙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성경말씀에 어긋나지요. 날마다 ....
-목사님의 그런 식의 논리라 한다면, 결국은 어제 교인은 오늘 교인이 아니라는 그런 논리가 분명히 나오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분명히 성경에 보면, 어제 교인은 오늘 교인이 아니라는 논리가 되어 있어요. 성경에 보니까. 왜냐하면, 성경에 보니까 성령이 계시기 때문에 항상 그것을 어제나 오늘이나 주께서 창세 전에 예정했다 나와 있잖아요.
-늘 교인인데 어떻게 깜빡깜빡 깨워서 어제는 교인이 아니었다가 오늘 교인 되었다가 또 오늘 교인이 아니었다가 내일 교인이 되는 그런 상태가 될 수 있느냐 말이죠.
그런 상태가 되면 안 되지요.
-그러니까 오 목사님이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어제 교회가 오늘 교회 되질 못한다. 이렇게 이야기했다 말이죠.
그러면 안 되지요. 그건 잘못 되었지요. 그걸 못 느낀다 해야 말이 맞는 건데, 아니다 하면 곤란하지요.
-그러니까 성령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찾아왔을 때에는 이미 확정된 관계 안에서 그런 거예요. 다만 성도가 느낄 때
못 느끼지요. 바쁜데
-느끼다가 못 느낀다 하는 걸 목사님이 깜빡깜빡이라고
그런데 그것조차 성령께서 해준다 말이에요.
-조금 전에 목사님이 그렇게 안했다고. 성령께서 죽어있는 상태의 우리들을 깜빡깜빡 살려서 마치 살아서 움직이도록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해서 그런 식으로 할 때 아멘 했다니까요 목사님이.
-목사님의 표현은 그런 표현이 아니고. 죽어있다. 라는 게 우리가 못 느끼는, 성령은 함께 하심으로 늘 함께 하시는데 우리가 느낄 때는 살아있음을 느끼고 못 느낄 때는 죽은 것처럼 그렇게 표현하신다고.
형님이 동생하고 있는데 동생이 시건이 없어서 실수를 하니 가끔 형이 발로 차는 거예요. 자식아, 정신 차려라. 하면 아이고, 형님. 하고 또 돌아서서 실수하는 거예요. 이렇게 한다 말이죠. 이게 내재했기 때문에 다 일어나는 현상이다 말이죠.
-그러면 죽음의 상태가 아니잖아요.
아니지요. 산 상태지요.
-죽음의 상태가 아닌데 그러니까 왜 그런 논리가 나오느냐 말이죠. 오 목사님의 그 논리가.
몰라요. 오 목사님의 논리는 몰라요.
-이 목사님의 논리거든요. 그거는. 이 목사님의 논리기 때문에 오 목사님이 그런 논리를 펴는 겁니다.
-어쩌면 그 표현들이 이근호 목사님이 그런 식으로 인식하지 않았는데, 예를 들어서 우리가 어제 교인이 오늘 교인이 아니라고 했을 때에 우리의 입장에서 내가 주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있을 때는 교인이 아니라고 표현한 거지, 하나님 입장에서는 완성된 상태에서는 영원한데 개인이 느낄 때 오늘 주님의 은혜를 전혀 잊어버리고 망각한 상태니까 내가 지금 현재 교인이 아니다. 그런 식으로는 이해가 되는데, 주님의 관점에서 어제 교인이 되었다가 오늘 교인이 안 됐다 하면, 이건 성경이 말이 안 되거든요.
성경말씀에 보면 역사를 초월합니다. 이미 창세전에 너를 택했다. 이 말 자체는 역사를 논하면 안 된다 말이죠. 그런데 만약에 어제, 오늘 이렇게 역사를 논한다면, 이거는 성경말씀을 우리 느끼는 것, 우리가 인식하는 것, 믿음이라는 것을 인식할 때 신앙 생활할 때 그런 느낌들이 성경말씀을 영원하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우리가 느낄 때는, 우리는 주의 역사가 임하지 아니하면 우리는 신앙생활 못 하는 거죠. 만약에 주의 역사가 임하지도 않았는데 우리 힘으로 버텨나간다면, 제가 아까 한 것처럼 뭡니까? 내가 40대에 믿었던 걸 가지고 내 힘으로 유지해서 50대에까지 이어지는 그런 논리가
-‘내 힘으로’라는 말을 목사님이 쓰셨습니다. 어떻게 해서 성도가 내 힘으로 그걸 유지할 수 있느냐 말입니다. 성령께서 관리하고 있는 상태에서 어떻게 40대에서 50대까지 내 힘으로 관리해 들어가서 성도가 영원히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느냐 말입니다. 그 논리가 목사님께서 방금 죽은 상태에 있기 때문에 다시 깜빡깜빡 살려서 그렇게 살리는 상태에 있기 때문에 결국은 그때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그분에 의해서 관리에 의해서 결국 된 것이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때에 죽은 상태로 설명하고 있거든요. 논리가.
죽은 것 하고는 상관없는데.
-성도가 죽어있다는 것은, 그러니까 지금 바울이 말하고 있는 ‘하라’, ‘하지 말라’체를 회개용으로 말씀하시는 이유가, 죽어있기 때문에 그걸 너는 죽어있는데 하려고 하느냐 그렇게 말하고 있거든요. 목사님께서 말씀하시잖아요. 바울이 말하는 ‘하라’, ‘하지 말라’체는 결국은 성령께서 내주하셔서 새로운 새생명이 들어와서 성령의 관리 하에서 그 성령의 은혜에 임한 살아있는 성도에게 요구하는 것이지, 죽은 성도에게 요구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살아있는 성도한테 요구를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성령의 관리 하에서 결국은 그런 은혜가 너희 몸속에 들어왔느냐? 아멘. 라는 것이 결국은 바울이 말하는 ‘하라’체와 ‘하지 말라’체의
그렇게 되면 성경말씀에 어디에 어긋나느냐 하면, 내가 날마다 죽는다 하는 말이 안 맞아요. 하나님께서 날마다 죽이신다는 그 말씀과 안 맞아요.
-그러니까 자기 자신이 살려고 하는 것을 날마다 죽이는 것이지요.
그럼요.
-그렇게 해야지요.
날마다 죽는다는 죽는 그것을 분석해 내야 될 것 아닙니까?
-그렇게 되는데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려고 하는 것을 죽이는 것이지.
그래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려고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설명하고 있잖아요.
-하나님을 위해서 살려고 하는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성령에 의해 의에 대해서 살려 하심이라. 그렇게 살려 하게 하신 자로서 살아가는. ( )라든지 성화론적 차원에서 저도 공부합니다.
목사라 하는 것은, 나, 신앙생활 잘한다. 이것 자랑하는 게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 설명해주어야 될 봉사의 임무가 있거든요. 그러면 아까 손 목사님 말처럼, 날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자기를 위해 산다는 이걸 주께서 성령께서 죽인다. 안 합니까? 그럼 자기를 위해 사는 게 어떤 것인가를 까발려주고 그걸 설명해 줄 책임이 목사한테 있는 겁니다. 이걸 지금 제가 설명하는 거예요. 아마 손 목사님과 오 목사님 의견이 안 맞았다면, 오 목사님의 이 대목에서 설명한 것 같아. 이래, 이래 하는 것이 자기를 위해서 사는 것이니까
-오 목사님의 논리는 이 목사님의 논리입니다.
사람은 남이 될 수 없어요. 어떻게 인간이 될 수 있습니까? 사람은 아무리 해부해서 남을 몰라요. 인간은 남하고 같을 수가 없습니다. DNA부터 다르고 다 달라요.
-오 목사님의 논리가 이 목사님의 논리와 다르다고 말씀하시지만 오 목사님은 이 목사님의 논리를 그대로 갖고 있습니다.
그거는 세상에 어느 법에도 잇을 수 없어요. 왜냐하면, 어떤 인간이 나는 저 사람과 똑같다는 소리를 본인이 할 수 있어도, 똑같은가 둘이 해보면 달라요. 사람은 다 다르기 마련이에요. 그러니까 똑같다고 우기시면 곤란합니다. 나하고 내 마누라는 달라요. 내 자식하고 나, 다르고. 인간은 개별성을 가지고 있어서 인간은 그 개별성을 누구도 찾지 못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똑같이 할 수 없어요. 그냥 이용하지요. 저 사람은 내가 좀 이용할만하다 해서 이용하는 것이지. 사람이 어떻게 복제품도 아니고 똑같을 수가 있어요. 없어요. 그런 게 없어요.
-그러면 이 목사님은 오 목사님의 논리가 틀렸다고 보십니까?
오 목사님에 대해서 연구한 적이 없는데, 뭐.
-오 목사님이 말씀하셨던 어제의 교회가 오늘의 교회가 아니라는 것에 대해서
무슨 취지에서 한 것인지 모르지요. 만약에 인간이, 오 목사님이 목사니까 인간이 자기 위해서 사는 것이 어떤 모습이냐 양상이냐 설명한다면, 설명해서 이걸 제대로 하고 이걸 설명한다면, 이 말은 맞지요. 왜냐하면 신약에 나오기 때문에. 자기를 위해 사는 그런 신학이 딱 나오거든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 거니까 거기에 대해서 오 목사님이 강의를 한다면, 사람이 주께서 역사하시는 것은 인간의 죄를 깨닫기 위해서 그건 왜? 십자가와 같은 취지기 때문에. 그 점에 대해선 내가 동의하지요. 그러나 그건데 그렇게 앎으로서 구원받는다. 이건 아니다 말이죠. 구원이라는 것은 창세전에 예정된 대로 구원되는 것이지, 그걸 알았다고 해서 구원되는 건 아니다 이 말이지요.
-목사님, 저도 그 부분에서 헷갈리는 게 뭐냐 하면, 예를 들어서 목사님 글 가운데서 전도하는 죄, 기도하는 죄라고 애기했을 때 그 전도나
그거 잘못되었지요. 기도하면서 죄가 나오지요.
-그렇게 표현하면 쉬운데 목사님, 때로는 어떤 때는 전도하는 게 죄고, 기도하는 게 죄다. 라는 이런 식으로 느끼게끔 어떤 표현이나 오해가 있거든요. 그러면 어떤 부분에서 강의를 듣는 사람이 그런 식으로 이해를 하고 있더란 말이지요. 그래서 서로 이해하면서 굉장히 충돌 같은 게 일어났는데 그 표현들이 조금 조심이 되거든요.
그 말은 전도하는 가운데 죄가 나올 수가 있습니다. 하면 더 큰 문제가 돼버려요. 전도하는 가운데 죄가 안 나올 수가 있다 하니까. 죄가 안 나온다는 부분은 성령이 하시는 부분에서 죄가 안 나오는 것이지, 인간이 행동 할 때는 죄가 나오지 왜 나옵니까?
-그런데 그 문제가 예를 들어서 전도하는 죄, 기도하는 죄라고 이야기했을 때 성령님께서 함께 하실 때는 그건 죄하고 상관없는 거니까 그 문제는 있을 수 없는데, 우리가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게 아니라 예를 들어서 예배당을 늘리기 위해서 나가라. 하는 그거는 전도하는 죄라고 말할 수 있는데, 사실 전도도 아니죠. 그죠? 그런데 그런 것 저런 것 따지지 않고 인간은 행위를 통해서 결국은 죄가 나올 수밖에 없으니까 전도하는 게 죄다, 기도하는 것도 죄다. 이런 식으로 일방적으로 논리를 펴버리니까 성령이 전도하게 하시는 것도 죄로 표현하는 이상한 논리가 만들어져버린다는 거죠. 그 이야기를 통해서.
그거는 본인이 그렇게 해석한 것에 대해서 잘 모르겠는데 예를 들어서 그런 해석마저 제가 미리 방지하기 위해서 전도하는 데도 죄가 나옵니다. 하면 문제가 더 커진다니까.
-목사님 표현 가운데서 때로는 그렇게 직설적으로 표현함으로서 전혀 다르게 이해하는 부분이 있더란 말이죠.
그 책임을 저한테 돌릴 수 없다니까. 본인이 잘못 이해한 것을 저한테 책임을 둘 수 없는 거예요.
-목사님, 그렇게 되면 방종한 그런 일이 벌어졌을 때에 목사님이 책임이 없다 말씀하시면, 그건 이상한
인간치고 방종 아닌 게 어디 있어요. 다 방종이지요.
-그런 논리를 제시했으니까 방종이 나올 수밖에 없는 거예요. 오 목사님이 지난번 모임에서도 나는 일년 동안 헌금을 안 했다. 만약 목사님 교회 교인들이 이렇게 했을 때 목사님은 뭐라 하실 겁니까?
그건 당신 마음대로 하시라 하죠.
-그럼 목사님 사석에서 왜 그러면 헌금을 잘못했냐? 헌금을 하시라고 그렇게 이야기를 권하셨어요.
그거는 그 상황에 그분이 생각하는 게 다르기 때문에 그래요.
-그렇게 되면 말이 안 되는 거죠.
상황이 틀리기 때문에 말을 틀리게 해야지요.
-방종하게 만들어놓고 난 뒤에 또다시 방종을 다시 되돌리는 그런 것밖에 안되는 거예요.
방종하게 만들기는 어느 인간이 누굴 방종하게 만들어요. 본인 방종하고 싶어서 환장할 때 옳다구나 목사님 말씀 잘 됐다. 본인이 책임지지. 방종하게 만드는 게 어디 있어요? 본인이 만드는 것이지. 그 책임을 남들에게 전가할 수 없는 겁니다.
-목사님이 그런 논리를 펴셨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나왔다고 우리는 생각하거든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에스겔이 이야기한 것은 에스겔이 다 책임져야 되고 그런 것 없어요.
-저번에 이야기했을 때 내용이, 인간들에게서 팔대 이 효과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발언자가 A라고 이야기했는데 듣는 자는 그것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해서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목사님께서 그렇게 쭉 이야기해 오신 것에 대한 우리 듣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얘기를 해왔다는 겁니다.
그거는 그 사람이 내가 성령이 하신 일이 옳다고 이야기해도 평소에 숨어있는 것이 뭐냐 하면, 그것에는 관심이 없고 어떻게 하든 간에 내가 하는 전도 가운데 의로운 게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딱 기다리고 있는 상태에서 내가 성령이 하신 것만 의롭습니다. 하는 그건 귀에 들어오지도 않다가,
성령이 하신 것이 의로운 이유는, 우리가 하는 게 아니고 우리가 하는 것은 죄 밖에 안 나온다. 성령이 하는 것이 의롭습니다. 할 때 우리가 하는 게 죄 밖에 안 나온다. 옳지, 잘 걸렸다. 내가 이용하겠다. 이런다 하니까. 본인이 그런 걸 딱 기다리고 있는데 나보고 어쩌라고. 본인이 기다리고 있는데.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 의로운 일인데 그 사건을 나에게로 그때 잡아채서
잡아채면 아무 문제없는데. 예를 들어서 잡아채서 아아, 성령이 하시는 것이 전도기 때문에 그럼 내가 전도하는 가운데서 뭘 발견하면 돼요? 성령이 하신 전도고, 그 앞에서 나는 아무리 전도 많이 해도 나는 악하고 죄 밖에 없구나. 본인이 알고 있으면 될 텐데. 이거는 이걸 거부해 버리니까 나머지 뭐 없나? 전도하는 게 죄라고? 그러면 어디 전도하면 죄고, 성령 하면 죄지. 성령이 하는 죄와 전도하는 죄가 이게 서로 둘 중에 하나를 하는 게 아니고, 둘 다 같이 가는 거예요.
왜냐하면, 성령이 이미 전도를 하시기 때문에 비로소 우리는 전도하는 죄가 나오는 겁니다. 성령이 임하면 너희가 예수의 증인이 되라. 하는 말이 있잖아요. 예수의 증인 되라는 말은 예수증인 달랑 나오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인간은 나의 증인으로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같이 병행해서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겁니다. 왜? 성령은 십자가의 영이기 때문에 십자가를 가지고 들이대는 식으로 거기서 상한 심령을 만드는 거예요. 전도하면서.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 은혜입니다. 이렇게 자기 행함 주장하지 않고 그렇게 나오게 되어 있어요. 별 문제 없다고 보는데요.
성령이 전도하시는 것은 죄가 아니고, 인간이 전도하는 건 죄 맞습니다. 뭐, 이게 틀렸습니까? 그런데 앞에 것 떼어버리고, 전도하는 게 죄입니다. 이러면 문제가 되는 겁니다. 앞에 것 떼어버리고 뒤에 것만 이야기하면 문제가 되는 거예요.
-목사님, 그러니까 성령께서 베드로를 통해서 앉은뱅이를 일으켰잖아요. 그것이 성령의 역사니까 의인데, 사용되는 거는 베드로잖아요. 죄인이잖아요.
그걸 죄인 아니라고 하는데 문제가 되는 거예요. 그게 죄인 아니라는 거예요.
-그럴 때 베드로를 통해서 나타난 행위 있잖아요. 사용되어진 행위, 그거는 의가 아니잖아요. 그 사람 자체가 나타난 그거는.
그건 의가 맞아요.
-맞습니까?
그건 의가 맞는데 왜냐하면, 쓰시는 분이 베드로가 쓰시옵소서. 한 게 아니고. 쓰시는 전이든 쓰신 후이든 죄인 맞아요. 인간은.
-그런데 사람은, 자기가 볼 때는 내 의가 아닌 게 되잖아요.
죄인이 수제비를 했을 때 수제비는 주께 의 맞는데. 수제비를 하기 전에는 죄인으로 수제비한 거예요. 그런데 만약에 베드로가 나중에 3시 30분에 했잖아요. 예를 들어서 3시 40분에 해서 주께서 말이야, 나 같으니까 썼지. 다른 사람 같으면 쓰지 않았어. 내가 했다는 게 아니야. 나는 쓰임 받았단 말이야. 쓰임 받았음을 주장한다면 그건 곤란하다 말이죠. 그거는 죄성이 드러나는 거예요. 주께서 다른 사람을 쓸 수 있는데 자기를 썼는데, 주께서 나를 썼단 말이야. 할 때 인간인고로 자기의 특별성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게 인간이에요.
-그것 자체를 죄라고 말하는 게 아니고, 방금 그 앞에 베드로가 그렇게 한 그것이
그거는 의죠.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위하여 모든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져야 할 문제 아닙니까?
그럼요. 당연하죠.
-그것까지 보면, 뒤 부분 그걸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10분 후에 그게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져야 될 문제로서 영광이 나타내야 될 것 아닙니까?
그렇지요.
-그 자체가 의인데
그 자체가 의죠.
-죄로 결말을 짓기 위해서 시작이라고 말하는 것을 틀렸다 이 말이죠. 제 말은. 그 자체를 그런 식으로 몰고 가야 됩니까?
지금 손 목사님이 앞 뒤 문장을 바꾸고 있는데.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낫게 하는 것은 의입니다. 누가 뭐래도 의에요. 왜? 주께서 하신 것인데 의 맞잖아요. 맞는데 이 자체가 의라는 걸, 오 목사님이 이걸 죄다 하던가요?
-그 자체를 죄로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 일을 시켰다 이 말이죠.
아니 이걸 죄로 만들기 위해서 하던가요? 안 그러면 이걸 이용하는 이것이 죄라는 걸 만들기 위해서 하던가요?
-그 자체를 발생시킨 이유가, 결국은 죄로 결말을 짓기 위해서
그거는 오 목사님 말이 맞네요. 이 자체가 의 맞잖아요. 여기서 손 목사님, 오 목사님, 의 같이 하죠? 이 자체가 의라는 것을.
-예.
이 의가 있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죄인 되게 함이다. 그 말은 맞네요. 그래. 그럼 오 목사님이 뭐가 틀렸습니까? 나는 오 목사님이 이것 자체를 죄라고 한다면, 이건 곤란하다 이 말입니다. 세상에 일어난 십자가 일도, 십자가 일이 왜 있습니까? 우리 죄인 되게 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예수님 하는 일이 십자가와 분리된 일이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잖아요.
-그 자체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결말을 내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냐는 거죠.
그럼요. 방금 손 목사님 의견에 동의합니다. 이 자체로서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결말을 내릴 수 있는 것으로 종결지을 수 있는데
종결됩니다. 동의합니다. 종결돼요.
-그것으로 더 이상 생각하지 말아야 될 것을
왜 생각하지 말아야 됩니까?
-왜 하필이면 죄로 결말을 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 일을 시작했다고 말을 하느냐 말이에요.
위해서, 위해서. 이것이 손 목사님 말씀대로는 이 자체로서 영광 자체로서 목적이 끝나버렸다 이 말이거든요. 거기에 대해서 제가 손 목사님 동의합니다.
-그 자체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한 뜻으로서
동의합니다. 거기에 대해선 동의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결국은 죄로 낳게 하기 위해서 시작된 하나님의 식언이다 이렇게 말한다 말입니다.
그러면 이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이걸 죄로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 했다. 그건 안 맞지요.
-결국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모든 하는 것이 모든 시발점이 결국 죄로 결말을 짓기 위해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제 윤곽이 드러나네.
-그러니까 방종 한다는 게 아니에요?
또 방종하고 관계없고요.
-방종하지요. 그러니까.
인간은 방종 하는 인간이에요. 다 방종 하는데. 방종하고 관계없고. 이게 의로 종결되는 것, 이거는 손 목사님 백 번 맞아요. 내가 보기에는 100점이에요. 종결되고. 이 종결된 것을 주께서 사용을 하는 거예요. 십자가에서 끝나버렸는데 구원 안하면 되겠어요? 십자가를 가지고 사용하는 거예요. 종결 된 완성된 걸 사용하는데 이걸 사용할 때는 우리로 하여금 죄를 드러내게 사용합니다. 심지어 거기에 가담했던 베드로, 요한까지도 죄인 되게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위해서'라는 말은 좀 곤란한데. 그걸 사용해서.
-‘위해서’라는 말을 쓰니까
결국 단 하나가 문제네.
-그 뉘앙스가
‘위해서’라고 하지 말고 그걸 사용해서
-봉사하는 것은 죄를 낳기 위해서 봉사하는 것이 되니까
오 목사님의 잘못은 ‘위해서’에 있습니다. 그 ‘위해서’를 바꿔야 돼요.
-아니, 목사님의 논리가 그 속에 들어 있단 말입니다. 봉사를 하는 것은 죄를 낳게 하기 위해서 봉사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은 죄는, 봉사하는 죄다. 이렇게 말을 쓸 수 있는
이것을 사용해서 하십니다. 사용해서 우릴 죄인 되게 하는데. 우리 죄인 된 입장에서는 위해서 라는 말이 가능해요. 왜냐? 우리 죄인 된 입장에서 내가 왜 죄인이야? 아하, 십자가 진 것은 죄인 되게 하기 위해서 한 것이다. 말이 돼요. 이게 사건으로 되는데 제일 중요한 게 뭐냐? 모든 것은 언약을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언약 안에는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방금 손 목사님이 하는 대로 주님의 거룩이 들어있고, 반드시 맞은편에 뭐가 있어야 되느냐 하면, 죄인이 있어야 돼요. 죄인이 있어야 이게 은혜가 돼요. 그냥 거룩이 거룩으로 끝나는 게 은혜가 됩니다. 은혜가 은혜로 끝나기 위해서 죄가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언약을 위해서 라는 말은 은혜를 위해서는 방금 손 목사님이 의를 위해서, 맞아요. 그 다음에 죄를 위해서, 맞아요. 둘 다 세트가 갖추어져야 모든 것이 십자가를 위해서 복음을 언약을 위해서 라는 말이 성립되는 겁니다.
-( ) 늘 모든 나타난 것은 항상 죄로 종결되기 위해서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를 지금 오 목사님이 ....
만약에 이 하나님의 의라는 그걸 위해서 그것만 아니고 이것도 하나의 수단이 되어서 몰아넣는다면 그것도 문제가 되지요. 이제 윤곽이 뚫리네. 그렇게 이야기할 걸 가지고 생명, 죽음 해서 헷갈려 버렸는데.
-목사님,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하세요.
-저는 질문이 뭐냐 하면, 아까 베드로를 사용하시잖아요. 그런데 그 자체가 의라고 했는데 베드로 측에서는 그것이 의가 아니라고 나는 생각되어지거든요.
아니죠. 베드로가 의를 느끼죠. 아아, 주께서
-그게 오히려 죄로 느껴지는 게 아닙니까? 나 같은 게 왜 이런 게
같이 느끼죠. 주는 의롭고 나는 죄인이구나 느끼죠. 동시에 느껴지잖아요. 그 말이 우리 동의한 말들입니다. 같이 느껴져요.
-그럼 만약에 사용 안 할 때 어떻게 됩니까? 앉은뱅이를 일으킬 때에
아직도 내가 어떤 죄가 있는 지를 자기가 모르는 상태에 있는 거죠.
-그렇지만 제가 생각해보면, 성령께서 내주해 계시기 때문에 끊임없이 사용 안 되더라도 계속해서 죄가 드러난다고 생각되어지거든요.
사건들을 일으키죠.
-그런데 모든 순간이 사건이라고 생각되거든요.
맞아요. 그러면 맞아요. 하여튼 자기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냥 죄인이 되었다 말이죠. 하지만 우리는 선악과기 때문에 죄의 요소와 의의 요소를 자꾸 분리해요. 이런 것은 의롭고 이건 아직까지 의롭고, 이건 죄다. 의로움을 나누거든요. 자꾸 어떤 일들이 벌어지다 보면, 모든 죄 속에 의가 함께 의 속에 있다는 걸 느껴요.
-그러니까 사용되어질 때만 의가 아니고 제가 생각하기에는 가만있어도 지금 베드로도 다 없어졌잖아요. 지금 예수님도 없고. 그렇지만 지금 우리가 앉아 있는 상황 자체도 성령께서 계속 뭡니까?
죽이는 상태죠.
-우리가 계속 죄를 드러내는 상태, 어떤 특별한 사건 속에서만 아니라고 전 그렇게
아니에요. 사건화 되어서 나오는 거죠. 그 말은 잠재적으로 맞습니다. 예를 들어서 갈라디아서 2장 20절. 유명한 말씀 아닙니까?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나니" 이 말 한 마디에 다 들어있어요. 죽었는데 내 안에 사는 것은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다. 나는 계속 죽어 있는 상태에 있다.
그 죽음이 무슨 죽음이냐? 관계성이에요. 그러니까 나는 주님과의 관계가 없으면 나는 죽은 자다. 그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거는 개인적으로 따로 말씀대로 행위 안하더라도 남아 있어요. 다만 그걸 살아가면서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가 느끼는 지점에서 그것도 설명해줘야 되니까. 성경 전체적인.
-방금 목사님 이야기하신 그 부분에서도 죽어있는 상태로 지금 설명하거든요.
그 죽음의 용어가 두 가지라니까요. 성경에도 두 가지 용어로 사용하고 있어요. 하나는 사도 바울이 하는 말이, 내가 죽어서 이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다. 이런 대목도 나오고, 지금 내가 주 안에 함께 있다. 이런 대목도 나오니까 사람들이 헷갈리는 거예요.
그럼 당신은 언제 주와 함께 있는 거야. 죽어서 주와 함께 있는 거야, 살아서 함께 있는 거야? 물을 때는 베드로는 그것이 관계성으로 이야기할 때는 이미 살아도 부활된 것이고, 몸에 관계에서는 나중에 몸이 없애고 새 몸을 입을 때 부활이고. 어떤 사람은 부활이 지나갔다 하는 데 부활이 지나간 게 아니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죽음이나 삶이라는 것도 두 가지에서 관계성
-저가 볼 때는 그래요. 지금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셨다 할 때 그 사신 상태에 있는 우리 성도가 살아있는 상태냐 말이죠.
살아있는 상태죠.
-살아있는 상태
당연하죠.
-새 생명이 있는 상태
그렇지요.
-새로운 피조물
아멘. 그렇지요.
-깜빡깜빡 살리는 상태는 어떤 그 뉘앙스입니까?
그거는 우리가 느끼는 데 있어서 우리가 그걸 다 인식하지 못한다 이 말이죠.
-느끼는 상태는 어떻게 설명하십니까? 목사님은.
성령께서 그렇게 느끼게 하시는 상태. 이렇게 볼 수 있죠. 느끼는 것도 우리가 지 마음대로 못 느끼니까.
-그러면 사실 때에 우리들이 예수를 믿는 상태고 살아있는 상태고.
그렇지요.
-그러면 계속적으로 살아있는 거네요?
그렇지요. 살아있는데 그게 언약적 관계로 살아있다 이 말이죠. 살아있으니까 계속해서 일을 하시는 거예요. 우리 자체적으로 역사를 주장을 못한다 말이죠.
-그러니까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어제 교회가 오늘 교회이다. 라는 말 자체가 틀렸네요?
어제 교회가
-어제 교회가 오늘 교회다 말이 틀렸네요. 어제 교회가 오늘 교회 되지 않을 수 있고, 오늘 교회가 내일 교회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
그 말이 맞지요. 그 말이 맞는 말이에요.
-그 말은 그러면 모순이에요.
교회 종류에 있어서 두 종류 있잖아요. 이미 주의 관계 속에 창세전부터 있는 교회 같으면 영원한 교회인데, 이게 현실에 나타낼 때는 사람들이 인간의 죄성이 있어서, 죄성 가운데 교회관이 있어요. 이 교회관은 뭐냐 하면, 인간은 역사 속에 있기 때문에 방금 손 목사님이 이야기한 그러니까 나는 교회 맞아. 라고 생각한 것은 이게 얼마 못 가요.
-그렇게 자기가 생각한 교회가 아니고, 자기 생각하든 안 하든 간에 늘 그리스도의 몸으로써의 교회가
있지요. 영원한 교회가 있는데.
-늘 그리스도의 몸으로써 오늘 교회가 지난주의 모임으로서 내가 교회로서 있었던 내가 오늘 모여서도 교회고, 이번 주간 모든 생활 속에서도 내가 교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