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계 5: 6-10 (피로 사신)
Re..계 5: 6-10 (피로 사신)
이름 : 이근호(IP:)
피로 사신
2006년 9월 10일 설교 본문; 요한계시록 5:6-10
[6]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7] 어린 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책을 취하시니라
[8] 책을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9]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10]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신앙인의 참 모델을 이 세상에서 찾아보려고 해서는 아니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흔히 호감을 갖는 찾는 것은 자신이 갖고 있고 되고 싶은 위상을 이미 가진 그들을 부러움 가운데 선망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신앙인의 참 모습이 세상의 풍요와 유혹으로 인해 왜곡되게 나타나게 됩니다.
신앙인의 참 모습은 성경에서 12제자들의 모습과 숱한 순교자들, 특히 스데반 집사의 모습을 통해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 35-38에 보면,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볼 것 같으면, 신앙이란 신앙자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니라 그 신앙을 주신 분이 어떤 분이신가를 증거하라고 주신 신앙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고난과 시련으로 구원이 되었다면 당연히 그런 예수님으로부터 신앙을 받은 자는 예수님의 고난과 시련을 자기 인생을 통해서 배태되는 것이 지극히 정상적이고 당연한 운명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성경이 아니라 교회 내에서 신앙인의 모델을 찾고자 나선다면 평소에 자신이 갖고 싶고, 되고 싶은 것을 이미 가진 여유와 재산이 탐이 나서 그 세상적인 것을 얻기 위한 수완으로서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주님의 고난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고난과 의로움과 대단함을 남들에게 자랑하는 셈이 됩니다.
예를 들면 기도의 경우, 아무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이런 자리를 갖게 되었다고 겸손의 모습을 띠며 고상한 기도를 드렸다고해도, 결국 본인이 이 세상에서 일찍 뜨기 싫고 더 오래 더 쭉치고 싶다는 그런 기도를 했다면 기도 자체도 주님의 고난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위한 수완을 발휘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들은 결코 이런 음흉한 기도를 하신 분들이 아닙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어떤 주님으로 알아모시는 것이 참된 신앙일까요? 오늘 본문에 9절에 보면, ‘피로 사서’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대단히 간단한 문장입니다. 딱 넉자입니다. 하지만 이 넉자 안에서 많은 내용이 함축되어 들어있습니다. 우선 ‘사서’라는 말은 인간의 제안으로부터 구원이 시작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즉 구원이란 사람들의 선행되는 요청에 있어 그 요청을 들어주는 차원에서 구원해 내시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하나님쪽에서 그 사람을 건져내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샀다’는 표현은 구입자가 구입했다는 표시입니다. 즉 구입하신 쪽의 의사가 그대로 남겨지는 방향으로 구원은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 사랑은 ‘피’입니다. 이 내용이 참으로 깊이 있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왜 하필이면 피로 구원하시는 겁니까? 낚시대로 구원한다고 해서 구원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의사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충분히 표현할텐데도 말입니다. 왜 꼭 ‘피’로 구원되어야 하는 것일까요?
그 내막은 레위기 17:10-12에 잘 나와있습니다. “무릇 이스라엘 집 사람이나 그들 중에 우거하는 타국인 중에 어떤 피든지 먹는 자가 있으면 내가 그 피 먹는 사람에게 진노하여그를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너희 중에 아무도 피를 먹지 말며 너희 중에 우거하는 타국인이라도 피를 먹지 말라 하였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생명이 피에 있다면,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주시기 위해서 구원하셨다면 우리는 피라는 피는 더 퍼마시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생명은 피에 있으니 피를 마시는 것이 곧 생명을 마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레위기 말씀에 의하면 오히려 반대로 나오십니다.
곧 피를 마시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먹을 자격이나 가치도 없다는 겁니다. 창세기 3장에서 인간들이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한 이유는, 단순히 인간이 범죄한 것에 취지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생명나무를 따먹고 인간들이 영생할까 해서 근처도 못오도록 추방시킨 겁니다. 그리고 그들이 영생을 그리워하면 다시 생명나무로 올라오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 불을 가진 천사까지 동원해서 생명나무의 가치성을 유지하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생명나무의 가치성이 이 지상에서는 어떤 식으로 펼쳐질까요? 그것은 곧 피입니다. 인간들로 하여금 피인 생명을 못먹게 하므로서 그들이 본래 생명과 무관하게 지내야 될 자인 것을 명확히 하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신약에 와서는 도리어 피를 먹어야 산다고 하십니다. 요한복음 6:53-54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오로지 메시야의 피로서만 건져내시는 이유는, 인간이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자격이나 근거나 그 본인에게 있지 아니하면 대신 희생하신 오직 예수님에게만 있음을 오로지 믿는자를 통해서만 온 우주에 증거케 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씀드리거니와 신앙이란 믿는자를 건져내는 용도로 주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만이 일방적으로 사랑으로 건져내는 일로 인하여 완료될 일이라는 겁니다.
유월절날 성도들이 살게 된 것은 오로지 문설주에 발린 피 때문입니다. 버스의 노선으로 인하여 구원되는 것이지 결코 그 버스에 올라탄 사람들의 자기 의로움으로 구원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런 사랑을 막과 훼방하는 것은 인간들이 축적하려는 ‘자기 의로움’ 밖에 없습니다. 이런 자기 의로움 누적 시도가 곧 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기 잘남을 늘 부셔주시고 그 자리에 예수님의 피만 흥건하게 적셔지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