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사 19: 11-15 (어리석은 인간)
Re..사 19: 11-15 (어리석은 인간)
이름 : 이근호(IP:)
052강-사19장,11-15,(어리석은,인간)-isa060906
어리석은 인간
2006년 9월 6일
설교 본문: 이사야 19:11-15
[11] 소안의 방백은 지극히 어리석었고 바로의 가장 지혜로운 모사의 모략은 우준하여졌으니 너희가 어떻게 바로에게 이르기를 나는 지혜로운 자들의 자손이라는 옛 왕들의 후예라 할 수 있으랴
[12] 너의 지혜로운 자가 어디 있느냐 그들이 만군의 여호와께서 애굽에 대하여 정하신 뜻을 알 것이요 곧 네게 고할 것이니라
[13] 소안의 방백들은 어리석었고 놉의 방백들은 미혹되었도다 그들은 애굽 지파들의 모퉁이 돌이어늘 애굽으로 그릇가게 하였도다
[14] 여호와께서 그 가운데 사특한 마음을 섞으셨으므로 그들이 애굽으로 매사에 잘못 가게 함이 취한 자가 토하면서 비틀거림 같게 하였으니
[15] 애굽에서 머리나 꼬리나 종려나무 가지나 갈대나 아무 할 일이 없으리라
애굽이란 그 당시 강대국 중의 하나입니다. 강대국은 주변의 나라로부터 선망의 대상입니다. 강대국이 하는 식대로 하는 길만이 본국도 강대국으로 접근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누구나 마음먹게 될 것입니다. 약소국가에게 있어 강대국은 이상형입니다. 이사야 31:1에 보면,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말을 의뢰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앙모치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거니와”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당시 애굽나라는 유다나라로부터 의지되는 나라였던 모양입니다. 유다 나라에 없고 귀한 것들이 그 나라에 풍요하게 있었습니다. 한 국가를 운영하고 유지해야 하는 왕에게 있어 애굽 나라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애굽 나라를 경영하는 통치자들부터 관료들다 다 지혜롭고 똑똑한 자들이 뽑혀 일하고 있다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시는 견해는 다릅니다. 그들 애굽의 관리들이 어리석고 우둔하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제 몸 하나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술에 흠뻑 취한 자들의 모습과 같다고 합니다. 정신도 못 차리고 엉뚱한 길로 애굽 나라를 인도한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똑바로 가고 싶더라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들 관리에게 사특한 마음을 넣어주어서 그렇게 되었다는 겁니다.
따라서 유대 나라의 입장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애굽 나라를 그렇게 만들은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즉 애굽 나라는 결코 의지할 만한 동류의식을 가질 수 없는 나라라는 겁니다. 그것은 애굽 나라를 여호와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방식과 유다 나라를 다스리는 방식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애굽 나라와 이스라엘이 동반해서 있었던 초창기 시절에 애굽 나라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심히 강퍅한 태도를 드러내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일을 벌리기만 하면 항상 ‘강퍅’이라는 양상으로 그 본질을 드러내었습니다. 그렇다면 ‘강퍅’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강퍅이란 하나님이 친히 벌리신 일에 대해서 인간 자신이 등장해서 하나님의 일을 가로막고자 나서는 태도를 뜻합니다. 즉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의 일로 여기지 않고 단지 우연하고 자연적인 일처럼 달리 생각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일부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신 것은, 강퍅하지 않도록 관리하는 대상이 따로 있고 바로 그런 대상자가 이스라엘임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다른 원리로 인도하실 대상입니다. 그 원리란 바로, 인간의 이름을 지우고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곳으로 데려가서 하나님의 이름이신 분을 만나게 해주시는데 있습니다. 신명기 12:5에 보면,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거하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는 데는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흔히 상투적으로 말하는 ‘주의 뜻’은 오직 하나님의 이름되시는 분을 만나는데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이름 되시는 분을 만나는데 있어 하나님은 ‘인간의 이름’을 철저하게 말살하고 죽이는 일을 병행하게 됩니다.
사람에게 있어 ‘자기 이름’을 부정 당한다는 것은 인간들의 가치나 의미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사람에게는 자존심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자존심이 있다고 것은 곧 자기 고유의 이름이 지닌 가치를 스스로 지키겠다는 뜻입니다. 만약 누가 자기 이름을 거론하며서 욕을 하면 자존심이 손상받게 됩니다.
그런데 자기 이름이 없다고 한다면 아무리 누가 자기를 위하여 욕을 해도 그 욕을 받을 목표점이 상실해 있는 이상 기분 나쁠 수가 없게 됩니다. 고린도후서 4:11-12에 보면,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사도 바울은 지금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나게 당하고 있습니다. 자기 이름의 가치를 죽음의 세력으로 제거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인해 오히려 사도 바울을 대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생명이 전달됩니다. 마치 사도행전 3장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자신들의 이름으로 앉은뱅이를 낫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낫게 했다고 증언하듯이 말입니다.
주의 이름이 실체화 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이름을 가지고 구원받지 못하게 하십니다. 오로지 주의 이름으로만 구원하십니다. 이 세상에 주님의 이름말고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구원될 자는 자기 안에 ‘자기 이름’이 그대로 남아 있으면 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늘 자기 성도에게 그 인간의 이름을 지워버리는 일을 하십니다. 그것이 곧 죽음입니다. 갈라디아서 2:20에 보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죽었나니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 이름을 지워나가시는 그 능력으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여전히 자기 이름을 보존하려는 본능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순종하고 싶어도 제대로 순종치 못합니다. 로마서 11: 31-32에 보면,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치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저희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을 입을 자에게 긍휼을 입힙니다. 왜냐하면 그 어느 누구도 순종치 않을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이름이 없어져야 율법의 저주를 겨냥하는 목표점이 되지 않는 법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이름은 우리 이름을 후벼 파서 그 빈 자리에 자신의 이름으로 채워서 우리를 구원해 내시는 겁니다. 더 이상 자신이 이름을 계속 고수하는 것은 애굽 나라의 강퍅에 해당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이름을 좋게 할 것이 아니라 오로지 주의 이름으로만 구원됨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