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20050607 부산강의-라이프니츠
Re..20050607 부산강의-라이프니츠
이름 : 한윤범(IP:)
20050607 부산강의-라이프니츠
(강의:이근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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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함정]이라든지 이런 좀 어렵게 보이는 이런 공부를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사람이 스스로 서야 돼요. 스스로 자기가 단단하게 서야 됩니다. 뭐, 남 탓하고 조상 탓, 친구 탓, 심지어 하나님 탓. 이럴 입장이 못 되고 인간은 스스로 서야 되거든요. 스스로 서려면 뭔가 안에 내용물이 세상을 보는 눈이라든지, 하나님을 대하는 눈이라든지 그런 것들이 스스로 정립이 되어 있어야 됩니다. 이런 [철학의 함정]이라는 이 책. 더 필요하신 분 없어요? 다 있어요.
[50여명의 신학자들] 이런 책들을 공부해야 되는 이유가, 이제 남 탓은 그만하자는 거죠. 자기 운명은 이렇게 사는데 그때 부모 잘못 만나서 뭐 어떻게, 친구 만나 사기 당해, 보증서다 사기 당해, 이런 남 탓은 그만하자 이 말이죠. 남 탓은 그만하자는 이야기가 오늘 하려는 라이프니츠의 이야기입니다. 라이프하니까 총 이름 생각나지요. 제가 목이 아파서 먹는 사탕입니다. 건방지게 먹는 게 아니고.
오늘은 [50여명의 신학자] 페이지 수가 147페이지부터 오늘 시작을 합니다. 거기에 라이프니츠라고 1646-1716 사이에 어떤 신학자가 있다는 것이 거기에 나와 있지요. 라이프니츠가 어떠한 주장을 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우리가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움직일 때 이 세상을 그렇게 해서 만드는 게 세상인데 세상은 어떤 식으로 굴러가는가? 세밀하게 연구한 사람은 없는가?
이렇게 보니까 역시 라이프니츠가 대단히 열심히 그것도 아주 세밀하게 세상에 대해서 전체 전체에 대해서 꿰뚫고 있더라 하는 그런 소문이 들어서 그렇게 유명한 사람이라서 이 라이프니츠에 대해서 우리가 공부하게 됩니다.
그럼 라이프니츠에서 찾을 게 아니고 성경에서 찾을 게 아니냐? 성경에서 찾아야지 라이프니츠 봐서 되겠느냐? 라고 이렇게 생각하겠지만, 성경에서 하는 말을 사람들이 말귀를 못 알아듣는 중에 하나가 라이프니츠 같은 사고방식이고, 그 성경에서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말귀를 못 알아듣는 그 라이프니츠와 비슷하게 생각하는 것이 또한 우리들이기 때문에.
우리 자신들이 어떤 점에서 예수님의 생각과 차별 나는가? 그걸 한번 우리가 정리해야 돼요. 예수님 생각과 차별이 되지 않는다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은데, 예수님의 생각과 차별이 되지 않는다면 예수님이 가신 그 생활, 그대로가 다 나와야 됩니다.
예를 들어서 [말세에 고통 할 때에 이르리니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할 때가 그럴 때가 있다.] 이렇게 하면,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는 것이 오늘날 상식이잖아요. 그러니까 이것은 예수님의 뜻하고는 상관없잖아요. 이것은 단순히 예수님하고 상관없다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이 보는 세상과 우리가 보는 세상이 뭔가 틀리다는 뜻이고, 달리 이야기하면, 예수님이 보는 성경해석과 우리 성경해석이 뭔가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아주 우습게 간주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점에서 예수님과 우리와 다르냐 하는 그 점은, 우리하고 비슷한 사람이 누구냐 찾으면 되죠. 우리하고 비슷한데 우리보다 더 열심히 세상에 대해서 깊이 탐구한 사람이 있을 거다 이 말이죠. 그 사람 중에 하나가 라이프니츠에요. 이제 길게 라이프니츠에 대해서 공부할 이유에 대해서 제가 길게 이야기했으니까 더 이상 이야기 안 해도 되겠지요.
라이프니츠는 우리가 평소에 궁금해 하는 것을 미리 다 챙겨서 그것을 세상을 통해서 자기의 지혜를 총동원해서 이렇게 신께서 일하신다. 하는 것을 나름대로 정립한 사람입니다. 그것이 147페이지부터 쭉 나온다고 되어 있는데, 이 라이프니츠의 글이 쭉 쓰여 있습니다만 봐도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요약을 해 드리고 그 다음에 보시면 아하, 이해가 되는 압축된 그런 내용들이 많아요. 그래서 하나하나 보면서 하기보다는 너무 힘드니까 라이프니츠 사상이 어떻다 하는 것을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라이프니츠의 사상은 신에게 형상이 있고, 신의 형상이 물질, 그런데 보통 질료라 하는데, 그래서 물질, 형상이 물질과 결합해서 생긴 것이 피조물이다. 그 중에 누구도 포함되어 있느냐 하면, 인간도 포함되어 있어요. 신의 형상이 물질과 결합해서 생긴 것이 피조물이다. 그것이 인간이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라이프니츠는 창조를 신의 입장에서부터 창조를 시작하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지금 강의 처음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계속 이야기한 게 뭐냐 하면, 라이프니츠의 생각이 성경과는 예수님과는 다르다 먼저 전제하고 제가 이야기했거든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신의 입장에서 창조를 생각하는 것이 굉장히 라이프니츠를 공부했으면 이것이 마치 예수님의 생각인 줄 알고 생각하는데 라이프니츠를 공부하게 되면, 라이프니츠와 우리의 생각이 성경 보는 관점이 너무나 유사하다는 것을 오히려 느낄 거예요. 제가 처음부터 전제가 이것은 예수님의 생각이 아닙니다. 하는 그 의미를 여러분 나중에 깨쳐야 되는데.
신의 형상이 물질과 결합해서 피조물 되었다는 것은 모든 중세교회에서 주장한 중세교회의 신학이었습니다. 그럼 이건 새삼스러울 것도 없어요. 라이프니츠도 결국은 토마스 아퀴나스나 어거스틴이나 이런 중세에 있는 목회자들이나 그런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과 동일하게 주장했으니까 문제될 게 뭐가 있느냐 하는데 라이프니츠는 뭐가 다르냐 하면, 이게 달라요.
신의 형상이 이데아라 하는 것은 움직이지 않는 절대적인 형상인데 라이프니츠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라이프니츠는 이 형상이 움직인다는 겁니다. 움직인다. 운동한다. 움직이는 형상이 물질과 만나서 인간이 되었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이것이 라이프니츠가 아주 독특하게 주장하는 주장의 내용이 바로 이것입니다. 움직인다. 움직이는데 반드시 움직이면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힘이 나와야 되잖아요. 그 힘이 바로 신의 창조의 힘이라는 거예요. 신의 창조의 힘.
만약에 움직이지 않으면 인간은 움직이지 않는 신의 형상에 되돌아가는 식으로 성경해석이 되고, 모든 것이 교육이 되고, 가정교육, 교회교육이 인간은 움직이지 않는 형상을 본받는다. 이렇게 되는데. 만약에 움직이는 형상이라면 신의 형상에 들어갈 필요 없이 인간 자체가 움직이는 자체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있는 거죠.
다시 이야기합니다. 라이프니츠가 주장하기 전에 많은 중세신학자들이 절대적인 형상이 물질과 결합해서 인간이 된다. 그런데 인간은 부실부실 움직이잖아요. 움직이는 것은, 형상이 본래 형상이 아니고, 형상이 타락한 것이라고 봅니다. 하나님의 형상인데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자유의지로 말미암아 타락했기 때문에 뭔가 자꾸 변화한다는 겁니다. 고정된 게 아니고 확정된 게 아니고 변화한다는 거예요.
따라서 어서 움직이는 것을 빨리 처리해서 고정되고 안정된 안식의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총과 은사와 은혜가 필요한 겁니다. 그래서 죽어서는 신의 영원한 고정된 세계에 들어간다. 이것이 중세의 신학이라면,
라이프니츠는 그게 아니고 신의 형상 자체가 움직이기 때문에 그 움직임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신이 주신 힘에서 나오고 그 힘으로 말미암아 인간도 움직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움직이고 하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힘이 주신 움직임이기 때문에 인간은 움직임이 정상이지, 안 움직인다면 비정상이라고 보는 겁니다.
따라서 이것이 인간이 움직인다는 자체가 신의 창조와 함께 있는 이 자체가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보는 거죠. 이쪽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서 안 움직이는 쪽으로 목적을 가지고 있어야 되는데 여기는 목적이 뭐냐 하면, 움직이든 안 움직이든 신과 함께 있는 자체가 목적이라는 겁니다.
라이프니츠 식으로 이렇게 생각하면, 신은 움직이지 않고 질료와 합해서 물질과 합해서 인간이 된다. 이건 데카르트 쪽인데 데카르트와 기존의 쪽인데. 이런 식으로 돼버리면 뭐냐 하면, 세상에 있는 것은 추하고 더러운 것이고, 깨끗한 것은 고정된 하늘나라만 깨끗하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것에 대해서 별 의미와 가치가 없다고 보는 겁니다. 위에 쪽을 취하면. 라이프니츠 쪽을 취하면, 사람이 똥 싸고, 오줌 싸고, 일하고, 노동하는 전부다 신의 은총으로 보게 되죠. 하나님의 은혜로 보게 됩니다.
그리고 어떤 식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보느냐 하면, 그러니까 여기는 '이원론'되죠. 두 개가, 이원론이란 뜻은 뭐냐? 일원론이 아니란 말이죠. 하나로 뭉쳐지지 않고 서로 섞일 수 없는 두 개의 세계가 따로 존재한다는 게 이원론입니다. 이원론이 공통성이 있으면 안 돼요. 일원론으로 다시 복귀해야 됩니다. 이원론이라 하는 것은 물질과 그리고 정신세계는 완전히 질이 다른데, 물질세계는 이거는 후패해야 되고 섞어 없어야 되고, 정신세계만 고상하다. 이렇게 나눠지는 겁니다.
이렇게 돼버리면 라이프니츠처럼 돼버리면 현재 가지고 있는 물질 자체도 하나님 은총이 되는 겁니다. 얼마나 획기적인 생각이에요. 라이프니츠 생각이.
그러면 신께서 어떤 원리로 인간이 움직이는 것까지 다 하나님의 은총이 되고 사랑이 되고 그렇게 되느냐? 그렇게 되면 이게 움직이는 자체가 하나님의 은총이라면 여기서는 뭐가 빠질 수가 있어요? 뭐가 성립이 안 됩니까? 죄라는 개념이 수립이 안돼요. 죄가 없지요. 움직이는 자체가 은혜니까.
다시 말해서 전부다 어떤 일이 벌어지면 신의 탓이고 신의 은총이니까. 죄가 성립이 안 되니까. 죄가 성립 안 된다는 것은 곧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인간의 고유의 가치가 자기만의 가치가 우주의 가치 못지않다는 것이 확정되겠지요. 그러면 여기서 주체사상이 확립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17세기의 주체사상과 맞아떨어지는 거예요.
그전까지는 뭐냐 하면, 신은 우열하고 우리는 열등하다. 따라서 우리는 신 앞에 기를 펴서는 안 된다. 이렇게 봤는데, 라이프니츠는 이렇게 되면 뭡니까? 당당하게 하나님의 은혜의 덩어리인데 우리가 못 할게 뭐가 있느냐 이 말이죠. 우리가 기죽을 게 뭐가 있느냐 이 말이죠.
이제는 우리가 마음 놓고 과학하고 마음 놓고 학문을 하고 마음 놓고 운동하고 마음 놓고 육체를 즐겨도 그 자체가 하나님이 주신 은총이 되는 거죠. 그렇게 되면 여러분들 전도서 생각나죠. 전도서에 보면 뭡니까? 죽기 전에 마음 놓고 즐겨라 되어 있어요. 어차피 한 번 죽는 거. 해 아래 새로운 것 없는데 이렇게 즐기는 것도 하나님의 분복이다. 그러니까 마음 놓고 아이디어 짜내서 즐겨봐라. 기획 잡아서 즐겨봐라. 이것도 하나님의 분복이다.
너무나 허무하기에 따져봐야 허무한데 왜 따지냐? 어차피 허무한 것, 즐기면서 하나님의 복이나 즐기자. 이게 전도서입니다. 그러면 전도서의 이런 해석이 나오려면 거기에 합당한 철학적인 그런 신학적인 체제가 있어야 되는데 신과 인간의 관계가 있어야 되는데 이 점에 있어서 라이프니츠가 멋들어지게 제공하는 거예요.
지금까지는 쉽습니다. 라이프니츠의 이런 논리에 대해서 좀 어렵게 나가봅시다. 오늘 강의에서 여러분 어떤 희망을 발견한 것 같은데.
죄가 있으면 사람이 기가 죽게 마련이에요. 죄가 있으면 기를 펴지를 못해요. 마음껏 자기의 모든 것을 펼치지 못하고 움츠리게 됩니다. 혹시 이것도 죄 아닌가? 나는 죄인이기 때문에 죄가 나올 수밖에 없는데 혹시 이것조차 죄 아닌가 하는 것 때문에. 전에는 죄 지으면 벌 받는다 그런 차원이 있지만, 그런 차원이 아니고 이게 죄가 있으면 하나님 영광을 가릴까 싶은. 부모한테 효도 못할까 싶은. 요새 식으로 하면, 신이라는 부모님 앞에 효도 못하면 불효자식이 될까봐 그런 조바심 때문에 마음껏 활동을 못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라이프니츠의 이러한 철학 사고를 받아들이면, 뭘 해도 그것이 신의 은총이기 때문에 못할 게 없는 거예요. 어째서 라이프니츠는 이러한 주장을 아주 장담을 할 수 있느냐 하면, 신께서 피조물을 바로 만들지 않고 '단자'라는 걸 만들었다. 하여튼 환자는 기억하기 싫어서 잘 모르겠어요. 핑계인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하나밖에 없는 단자라는 것을 만들고 피조물을 만들었어요. 단자에다가 물질이 포함되어서 거기서 피조물 되는데.
단자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어디에 있느냐 하면, 이 세상은 피조물 밖에 없지, 단자는 이거는 개별체 밖에 없어요. 어디 있느냐 하면, 단자는 하나님 머리 속에 마음속에 있어요. 하나님은 각자각자 설계도를 미리 만들어요. 철수 같으면 철수의 설계도를 미리 만들어 놓고 그 철수의 설계도대로 물질을 결합해서 철수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십니다. 라이프니츠에 의하면. 그 철수라는 설계도면을 가지고 단자라고 이야기합니다.
예레미야 같으면 예레미야가 먼저 있고 예레미야를 그 다음에 엄마 뱃속에서 태어나게 해서 선지가로 만드는. 그러니까 예레미야가 물질이 사라져도 예레미야는 설계도는 남아 있잖아요. 만약에 이 건물이 불타도 이 건물 그대로 지을 수 있습니다. 뭐만 있으면? 설계도만 있으면 지어낼 수 있어요.
이게 라이프니츠의 하나님의 창조의 내막이다. 비밀이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비밀이 있다. 자기는 이제 알게 되었는데. 설계도만 있으면 물질이라 하는 것은 없어져도 설계도만 있으면 다시 만들면 되니까. 인간의 창조도 마찬가지다 말이죠. 모든 것은. 개구리든 코끼리든 모든 것이 신의 머리 속에 다 포함되어 있어서 그게 다 단자로 있고, 그 다음에 피조물 이렇게 되는.
그러면 단자라는 것을 만약에 빠뜨리면 어떻게 되느냐? 단자라는 것을 만약에 생각을, 그들은 신의 형상을 단자로 보는데. 라이프니츠 같이 신의 단자를 이런 아이디어를 생각 안하고 그냥 신께서 피조물을 만들어 나가버리면 어떤 것이 해결 안 되느냐 하면, 왜 신은 분명히 하나이면서 왜 피조물은 다양하냐?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게 해결이 안돼요.
옛날 한국의 민속적인 종교에 있어서 귀신 섬길 때 귀신은 물질마다 하나씩 있었습니다. 이사 가는 날, 이사 담당 귀신 따로 있었고, 떡 할 때 떡 전공 귀신 따로 있었어요. 애 낳을 때 이름 짓는 전공 따로 있고, 딸 죽이는 귀신 있고 아들 죽이는 귀신 따로 있고, 이 지방 귀신 따로 있고, 저 지방 귀신 따로 있어요. 그래서 이 지방, 저 지방 갈 때는 저 지방 귀신의 풍습을 따라줘야 돼요. 자기 담당 전문 귀신이 있다고요.
이게 그리스, 로마 신화에도 있지요. 우는 신, 술 신, 사랑의 신, 질투의 신. 신들이 인간의 감정 하나에 하나씩 달라붙어서 뭔가 하고 싶을 때는 그 신에게만 달래주면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신께서 직접 피조물 만들어놨기 때문에. 신께서 중간 신들, 귀신들, 중간 신을 만들어서 중간 신이 하급 신들이 이런 피조물 전부 담당하는 거예요. 일종의 피라미드 관계지요. 이쪽은 이쪽 과장한테 결재 받아서 하나밖에 없는 사장한테 올라가는 거예요.
그래서 만약에 코끼리라 하면, 코끼리하고 인간 사이에서 기존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에서는 인간 종은 따로 이고 코끼리 종은 따로 에요. 종은 따로 다 말이죠. 따로따로이기 때문에 인간이 코끼리를 지배할 수 있는 그런 권한이 없어요. 지배하려면 누구한테 물어봐야 하냐 하면, 신에게 물어봐야 돼요. 왜? 자기 소유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데 라이프니츠는 그렇게 보지 않고, 그러면 불교가 되지요. 이번 불교의 금정산 도롱뇽 사건 있잖아요. 인간이 도롱뇽을 함부로 잡을 수 없는 거예요. 왜? 도롱뇽 신이 따로 있기 때문에 그 도롱뇽 신은 인간이 아니거든요. 굴을 팔까요, 말까요? 팔까요? 이렇게 물어봐야 된다 말이죠. 이게 인간의 신성성이 불교에도 다 들어 있잖아요.
그런데 라이프니츠에서는 뭐냐 하면, 도롱뇽, 말도 어려워. 한국말. 이럴 때 차이가 뭐냐 하면, 똑같은 단자인데, 단자의 주름이 인간 같으면 265개의 층이 있다면, 이 도롱뇽은 한 열 다섯 밖에 안돼요. 그래서 도롱뇽의 특이한 점이 열다섯 가지 종류라면, 인간에게는 265가지의 특이한 점이 있어서 역시 특이한 점이 많은 것이 특이한 점이 적은 것을 지배할 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도롱뇽이 공 찰 수 있습니까? 축구할 줄 아는 공차는 특이점은 인간에게 있지, 도롱뇽에게는 없으니까 축구할 줄 아는 인간이 축구 못하는 도롱뇽을 지배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이 말이에요. 도롱뇽이 생각합니까? 도롱뇽이 청와대 데모했습니까? 우리의 생존권을 보장하라! 데모했습니까? 데모 안했잖아요. 그런데 데모는 누가 했습니까? 지율 스님이라는 아줌마가 했잖아요. 초인적인 아줌마. 백 일 굶어도 물도 안 먹어도 사는 초인적인 슈퍼우먼 같은 아줌마. 그 아줌마가 그랬다고요.
자, 이렇게 되니까 도롱뇽이 인간에 대해서 부러워 할 수 없는 이유가, 신의 뜻에 의해서 예를 들어서 특이점의 주름이 열다섯 개 밖에 안 줬기 때문에 열다섯 개고 이거는 265 개를 줬기 때문에 도롱뇽이 인간을 부러워하는데 인간이 도롱뇽을 부러워한다는 이런 쓸데없는 짓은 안 해도 되는 겁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대머리다 말이죠. 어떤 사람은 머리가 안 빠져. 이쪽은 대머리가 되서 266가지가 있다면, 이쪽은 뭡니까? 대머리가 안 되는 다른 것, 머리가 되는 267가지 또 있는 거예요. 대머리 돼야 되는데 안 되게 하는 게 있다 말이죠. 이쪽이 이쪽을 부러워하지 말고 전부다 누구 탓이다? 하나님의 만드신 그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그렇게 된 거예요.
누가 왔는데. 누구십니까? 누구세요? 누구십니까? 뭐 때문에 오셨습니까?
잠시 강의 중단합시다.
잘려도 괜찮아요.
뭐 때문에 오셨습니까?
b
두 번째 강의 시작합시다.
요샌 목사님들이 교회 안에 안 사시기 때문에 저런 사정을 잘 모르는데 교회 안에 살면 하루에 열 건 이상 옵니다. 도심지 교회는 하루 열 건인데, 그걸 잘해야 사찰로 오래 버티고 그것 못하면 사찰 잘 못해요.
저녁에 낮에만 오는 게 아니라 오밤중에도 와요.
그럼요.
그건 학교도 도장인데 뭐. 왔다가 얻어터지려고.
여기 보면, 인간이 만약 대머리가 있다. 그 대머리 된 것에 대해서 누굴 탓할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하나님의 단자 속에 그게 포함되어 있는 거예요. 대머리된 이 사람이 죽더라도 또 만들어지면 대머리된 본인이 튀어나와요. 왜? 아까 처음에 이야기했잖아요. 설계도는 이미 하나님의 창조 할 때 있기 때문에. 아, 이 대머리 같은 인생이 재수 없다. 새로 만들어주세요. 만들어도 대머리 또 나와요. 똑같이 또 나온다고.
라이프니츠가 세상을 볼 때 이렇게 보는 이유가 뭐냐 하면, 이렇게 대머리 아닌 것이 대머리 되는 그 모습을 뭐라 보느냐 하면, 운동이라고 보는 거예요. 아까 그 운동이 뭐라 했습니까? 하나님의 창조력, 신학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은혜, 은총으로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대머리 되는 모습 가지고도 이걸 슬퍼하거나 좌절하거나 낙심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보통 사람들은 자기는 대머리인데 저쪽은 대머리 안 되니까 그것 때문에 자기가 슬퍼하잖아요.
그런데 라이프니츠의 이론에 의하면 이미 나라는 인간은 대머리 되도록 되어 있는 주름이 내장되어 있기 때문에 이 대머리 되는 것을 아주 독특한 하나님의 은총으로 돌리겠지요. 그럼 사람 살아가는 사고방식이 어떻게 됩니까? 긍정적이 되겠지요. 나는 대머리 되는 주름살 있는데 너는 없지. 아이고. 나는 독특해. 라고 할 수 있다 말이죠. 저쪽은 나는 대머리 되고 싶은데 왜 못 돼. 울고 있고. 이야기 이상하게 되가는데.
그런 식으로 보는 세상관과 대머리든 아니든 죄의 값이라. 죽음의 흔적이다. 어서 천국 가야지. 이렇게 돼버리면, 평소에 대머리 되게 하신 하나님의 은총은 어디서 찾겠느냐 이 말입니다. 이게 라이프니츠의 주장이다 말이죠.
라이프니츠의 주장이 예리하게 인간의 신앙의 약점을 파고 들어간 것은, 사람들이 이렇게 이야기해요. 잘되면 하나님의 은총이고, 못 되면 자기 죄 탓이라 하는데 그게 과연 논리적으로 맞는 이야기입니까? 어디 맞는다고 생각합니까? 굉장히 겸손하고 굉장히 신앙적이고 온유한 모습이기는 하지만 따져보면 이게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식은 밥 먹으면 이건 다 내가 못난 죄 탓이고 뜨거운 밥 먹으면 하나님의 은총 같으면, 그럼 몇 도부터가 하나님 은총 영역에 들어가고, 몇 도부터가 자기 죄의 영역에 들어가는 겁니까? 흔히 교회에서 편하게 이야기하는데 따지고 보면 이거는 너무 억지라도 그런 억지가 없는 거예요. 뭔가 누가 이걸 정리해 줄 사람이 필요해. 이걸 그냥 무대포로 이렇게 밀어 붙일 게 아니고, 은혜롭게, 은혜롭게 밀어 붙일 게 아니고 뭔가 정리해야 되는데.
어디서 어디까지는 내 죄 값의 벌이고 어디까지는 은총이다. 그렇게 생각했던 그것이 전혀 사람마다 그 기준 따라서 전부다 너무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것이 되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 인생을 막 되먹게 살 수는 없는 거다 말이죠. 모든 운동에 대해서 신의 창조력을 다 집어넣어야 된다 말이죠.
그러면 지난 시간에 우리가 스피노자에 대해서 했지요. 해봐야 한 3주 지났으니까 다 잊어버리겠지만. 스피노자는 이겁니다. 뭐냐 하면, 이 움직이는 세상 전체가 신이기 때문에 신이 따로 창조한 것은 없다고 보는 겁니다. 그리고 그게 뉴턴도 마찬가지에요. 시계를 태엽을 감아 놨으면 저절로 태엽 풀리면 가게 되어 있지, 시계 갈 때마다 시계 한 번씩 패서 초점을 움직이게 하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일단 시계를 만들고 그것도 태엽을 만들었어. 신이. 그럼 태엽이 감긴 상태에서는 더 이상 신의 추가적인 보탬과 도움을 얻을 필요가 없어요. 태엽이 슬슬슬 풀리면 시계 바늘이 척척 돌아가면 그게 자동적으로 움직임처럼 우리 인생도 따로 하나님께 신이여, 도움을 달라. 라고 할 필요가 없다고 보는 겁니다.
사실 신이 늘 개입한다는 것은 데카르트가 이야기한 거예요. 데카르트는 인간은 물질과 영혼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물질이라는 것은 확장, 팽창시킬 수 있고 연장할 수 있다. 이어줄 수 있고. 영혼은 뭐라고 했습니까? 생각하는 것이지요. 기억나고 생각하는 것. 지난 시간에 다시 기억나십니까?
인간은 기억하기 때문에 뭐가 생기느냐 하면, 언어체계가 잡히고 언어체계에 따라서 신의 말씀이 들어오고, 그 신의 말씀을 해석함으로써 내게 있는 손에 잡히는 확실하게 잡히는 물질과 내 머리 속에 기억이 되는 하나님 말씀과 결합이 되어서 우리가 구원을 얻는다. 이게 데카르트의 주장이라 했지요. 그것이 예수님의 생각과 전혀 다르다고 했지 않는다고 했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늘 이야기한 라이프니츠의 사고방식은 그것과는 아니고, 분명히 그것과는 다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기서 성경에서 말하는 십자가 복음하고는 또 다른 아이디어가 새롭게 튀어나오지요. 그러니까 인간의 지혜라는 것이 이 정도까지 신과 인간과 결합시켜서 이 정도까지 놀라운 아이디어를 끄집어낼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 자신 속에 잠재되어 있는 그러한 속성을 보다 많이 알 필요가 있어요. 이 라이프니츠를 공부함으로써.
아아, 내가 전에 설교하면서 이런 아이디어를 끄집어냈는데 이제 보니 라이프니츠 쪽의 영이지, 예수님하고는 좀 떨어졌구나. 라는 것을 다시 한번 정립할 수 있는데.
제가 지금 좀 어렵게 한다고 했는데 어려운데 들어가려하니까 겁이 나는데요. 이왕 이 정도 했으니까 어려운 쪽으로 들어가 봅시다. 이제부터 하는 이야기가 라이프니츠가 이야기한건데 상당히 어려워요. 뭐냐 하면, 단자, 영어로는 monad. 단자에서 영혼이 나오고 영혼에서 육체가 나와요. 육체라 하는 것은 오감이 있죠. 감각이 있어서 이걸 통각이라고 합니다. 영혼은 여기서 정신이 나오고. 식물이나 또는 돌멩이라든지, 흐르는 물, 이런 데는 영혼이 없어요. 그런데 동물은 정신이 있어요. 통각이 있다고. 단자에서는 뭐가 있느냐 하면, 의식이 있다는 겁니다.
왜 라이프니츠가 지금 이렇게 세계를 나누는데, 나누면 여러분이, 강의 듣는 사람이 또 골치 아파요. 목사님, 나누지 말고 합쳐주세요. 나누면 다 외우려고 하니까 혼동되니까 합쳐달라고 해요. 이렇게 나누는 이유가 왜 나누느냐 하면, 잘 들어보세요.
졸도했을 때 졸도하고 나면, 졸도는 정신을 잃잖아요. 정신을 잃어버리면 제일 신기한 게 어떤 사람이 졸도하고 깨어났잖아요. 내가 누구냐를 어떻게 압니까? 졸도해버렸는데. 졸도했다는 것은 생각이 안 나고 생각을 못하게 되잖아요. 못하게 되면 깨어나고 난 다음에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서 내가 누구세요? 이렇게 될 텐데 졸도하고 난 뒤에 아, 나는 누구고 다 알잖아요.
그러니까 이것은 인간이 의식적으로 생각해서 생각한 게 아니고 생각하기 싫어도 인간 말고, 인간보다 더 깊은 층에서 너는 일관되게 이런 인간이라고 늘 우리한테 이야기해주는 어떤 층이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이 발견하지 못한 거예요.
다른 사람은 뭐냐? 내가 생각하니까 내가 존재한다. 그게 누구를 이야기합니까? 데카르트 이야기에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그러면 라이프니츠가 그럼 생각 안 할 땐 너 없겠네? 생각 안 하면 내가 없지. 우리가 졸도할 때는 이 말이 맞아요. 졸도할 때는 내가 멍청하게 생각할 때는 내 이름 불러도 그 순간 내 이름이 없어요. 딴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멍청하게 있을 때는 없어요.
전에 내가 인천 강의하러 가는데 동대구역에서 공부하다가 그만 기차시간을 잃어버렸어요. 나중에 화장실에 가서 시간 맞춰보니까 지나가 버렸어요. 그래서 30분 지각한 적이 있었는데. 사람이 졸도할 때는 한 쪽 생각할 때는 한 쪽 생각을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일을 하실 때는 이 점을 알아야 돼요.
하나님께서는 ‘무궁화 꽃이 피었네.’ 하는 식으로 일을 하십니다. 무궁화 꽃이 피었네. 노래가 뭐냐 하면, 술래는 눈 감고 있고 무궁화 꽃이 피었네. 짝. 이러면 움직이면 안돼요. 그러면 아이들이 서잖아요. 이게 뭐냐 하면, 항상 하나님이 우리가 생각한 것을 안 들어줍니다. 그냥 우리가 딴 생각할 때에 하나님이 해요. 하나님 그 일 했지요? 하고 싹 돌아보면 그 일 안 해요. 희한해요.
목사님이 교인하나 포섭하기 위해서 심방하고 기도할 때는 그 교인 절대 안 나옵니다. 포기해서 에라, 낚시나 갈까? 하면 그 다음날 그 교인 와 있어요. 이게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의 목회 방법입니다. 내가 어떻게, 하나님은 인간이 예상한 것은 어떻게 안 들어주시는지, 하여튼 인간이 예상했다하면 안 들어주는 걸로 아예 마음의 작심을 굳히기 바랍니다. 사람이 기도한 것을 안 들어줘요. 기도한 것은 일체 안 들어주고 기도 안한 것만 꼬박꼬박 다 들어주시는 하나님. 여기에 대해서 제가 장담할 수 있습니다.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제 이야기 듣고 어떤 일이 되고 싶잖아요. 할 때 기도를 안 해 본다고. 기도를 안 하지만 그것도 일종의 기도에요. 왜냐? 의식하기 때문에. 의식한 것은 일단 안돼요. 무궁화 꽃 피었다 식이에요. 손으로 눈 감으세요. 감으면 그때 일 이루고, 눈 뜨면 절대로 그 일 안 해 놔요. 왜? 하나님은 인간이 원하는 구원방식으로 구원 안하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의 원칙입니다. 하나님은 언약대로만 구원하고 인간의 원하는 대로 구원 안 하십니다.
그런데 언약의 주체자는 예수님이지, 우리가 아니거든요. 그래서 예수님은 절대로 우리가 기도해서 구원 받았니, 심방해서 구원 받았니, 열심히 주님께 찬양했더니 구원 받았니 생각을 일체 여기서 못되도록. 우리가 전혀 생각치도 못한 데 야금야금 주께서 모든 일을 다 해놨습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날마다 하나님의 거저주시는 은총으로만 우리가 천국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방법이에요. 약을 올리지요.
그러면 제가 이런 소리를 하면, 이런 소리를 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면 우리는 바보 등신처럼 가만있으면 주께서 다 이루어지게 하시느냐? 맞습니다. 그 말은 맞는데 실제로 아무 등신처럼 가만있질 못하는 이유가, 아무 등신같이 있겠다. 하는 그것이 뭐가 되느냐 하면, 뭘 하나 이루겠다는 수단으로 동원되거든요. 바보 등신 같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뭔가 이루어냈다는 그러한 계획을 갖고 있는 이상은 그것, 안 들어주십니다.
강도가 내가 사람 몇 명 죽이고 강도질하고 십자가 달리면 그때 메시야가 옆에 있어서 구원해 줄 거라는 계획을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항상 도발적이고 우발적이고 우연적으로 상상도 못하는 일이 벌어지는 거예요. 예상치도 안했는데 구세주가 옆에 와 있어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뭐냐? 완전히 잃어버린 자를 찾는 그 방식으로만 구원해요. 잃어버린 자가 계속 죽을 때까지 잃어버린 자로 있어야 돼요. 잃어버린 자가 안 잃어버린 채로 있으면 그 다음부터는 자기가 일하려고 하기 때문에 일이 안됩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게임이 안돼요. 계속 잃어버리게 해요. 놀랍게도 라이프니츠가 이 점에 대해서 다른 식으로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걸 앞으로 이야기할 텐데. 계속 잃어버린 자로 만들어내 버립니다.
그런 예가 상당히 많은데. 그건 제가 어렵게 이야기하려고 하는데 뭐냐 하면, 영혼 쯤 되면 영혼에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 정신이 생기죠. 정신이 있다고 하면 정신을 차리는 주체가 자아입니다. 자아가 있으면 이 자아는 누구와 라이벌이 되느냐 하면, 자아라 하는 것은 독립개체기 때문에 자기 말고 타인이에요. 하나님이 남이 돼요. 하나님이 남이 되고, 나는 남 아닌 나가 돼요. 남 아닌 나가 된다는 것이, 이것이 인간이 정신이 있기 때문에 생긴 겁니다.
거는 코끼리나 이런 것은 별로 없어요. 남 아닌 나가 된다는 것은 이거는 새나 백합이나 들풀은 이런 게 없어요. 백합이나 새는 키워주시는 분이 그 속에 있어요. 그래서 새가 농사를 안 짓습니다. 창고를 만들기 않아요. 자아성이 없어요. 들풀이 백합이 스스로 아름답게 하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왜? 자아가 없기 때문에.
그런데 인간 속에 정신이 있기 때문에 인간이 그런 걸 갖고 있는 이유가, 주름이 그만큼 다른 것보다 주름이 더 층층이 많이 있어서 그런 거예요. 하나님은 그것보다 무한대로 많은 게 하나님이고. 그렇게 보는 거예요.
자아가 있기 때문에 자기 속에는 자아만 들어 있어요. 자기 속에는 타자가 들어오질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도 들어오질 않아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왔다는 것은 놀라운 고백이에요. 그걸 가지고 뭐라 하느냐 하면, 영적 사람이라고 해요. 영의 사람은 마치 새와 들풀 같아요. 걱정 근심할 수 있는 권한이 박탈되어 있습니다.
억지로 걱정, 근심을 하는 그것도 본인한테 짐이 돼요. 아이, 없는 근심 한번 해보자. 나도 그 짓 좀 하고 살자. 하지만 그것이 골치 아파요. 근심이 안 되는데 어떻게 하란 말이에요. 안되는 근심이 억지로 하려고 하니 그것도 보통 문제가 아니라니까. 나도 좀 두려워 해보자. 백합에 두려움이 있던 가요? 오늘 있다가 내일 불쏘시개로 베이는 들풀이 내일을 걱정합니까?
그 대목이 염려하지 말라는 대목이에요. 들풀이 내일 되면 잘려서 불 속에 들어가다니, 걱정합니까? 걱정 안 해요. 왜냐하면, 자아가 없기 때문에 이 들풀 하나님 것이지, 자기 게 아니거든요. 하나님이 걱정 안 하는데 지가 왜 걱정해요. 자기 속에 하나님이 염려를 안 하는데 지가 왜 염려를 한다 말이죠. 그게 영적 사람이에요.
영적 사람은 걱정하고 싶어도 걱정이 안 되는 게 걱정이에요. 두려움 하고 싶어도 두려움이 안 생긴다는 게 좀 염려가 될 정도로. 그 정도로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말이 그런 의미입니다. 그런 의미를 보면 성경해석이 다 됩니다.
예를 들면, 천하 자식이나 나보다 사랑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하면, 해석이 어떻게 되느냐 하면, 하나님 이 말씀 참 잘 하셨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너희를 대접하는 자에게 소돔과 고모라 같으니라. 불 심판 받는다. 잘 했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이렇게 기차게 정당하게 일 잘했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마지막 때에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니라. 맞습니다. 하여튼 하나님이 일일이 다 맞는 말이야. 이렇게 감사하고 그 하신 말씀에 동의하지, 그럼 나는 어떻게 하란 말이야. 돈 사랑하는 나는 지옥 가란 말입니까? 이런 반발이 안 나와요. 왜? 자아가 없기 때문에.
자아가 없기 때문에 자아 구원론이 성립 안 되고, 자아 구원론이 성립 안 되면 성화론도 성립 안돼요. 성경해석이 다 돼요. 어느 해석도 다 돼요. 어떤 해석이든 간에 잘 하셨습니다. 그것만 붙이면 끝이에요.
천지를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더라. 잘 했습니다. 하면, 빰빠밤 하고 이것 붙이면 끝나는 거요. 누구든지 이 말 위에 더 붙이면 내가 생명나무에서 제해 버리리라. 짠짜잔. 빵빠레 울리고 잘 했습니다. 하면 돼요. 마지막 날에는 행함대로 사는 자는 지옥 불에 가리라. 짠짜잔. 하고 빵빠레 울리고 잘 했습니다. 이것 하면 돼요. 그게 성경해석의 바른 해석이에요. 다른 해석 필요 없습니다. 잘 했다 하는데 무슨 해석이 필요합니까?
성경해석이 안 되는 이유가, 주여, 좀 탕감해 주옵소서. 이 말씀은 내가 도저히 못 지키겠습니까? 이렇게 자아성을 띠고 들어오니까 자아성을 거기다 집어넣으니까 그 다음부터는 성경해석이 안되는 겁니다.
이걸 어떻게 완화시키는 방법이 없을까? 목사님, 부탁입니다. 이 말씀이 입는 거 먹는 걸로 족할 줄 알라 했는데 이것 좀 말씀을 완화해서 나의 힘으로 된다는 이렇게 한다든지 침대 들여도 된다든지 바꾸는 방법이 없습니까? 자꾸 자아성이 스스로 구원받으려는 욕심 때문에 내가 구원받아야 된다는 생각 때문에, 구원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들지요.
구원이 안 된 상태에서 구원되기 위해서는 이 말씀 지켜야 되는데 그 말씀을 지킬 수 없으니 수준을 낮춰 달라는 거예요. 그러면 거기서 뭐가 생기느냐? 염려가 생기고 두려움이 생기고 혹시 저주 받을까봐 걱정하고 그런 겁니다. 그래서 성령이 오신 이유가 바로 이런 인간의 자아성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는 사실을 우리한테 고발하기 위해서 십자가로 정죄하기 위해서 성경에서 되는데.
여기서 이제 진짜 어렵습니다. 잘 들으세요. 주무시려 하는데 지금 주무시면 안 됩니다. 자아가 있고 난 뒤에 자아가 자기 육체를 관리하는데 육체는 신의 단자, 하나님의 창조에서 나왔잖아요. 라이프니츠의 이론에 의하면. 단자에서 나왔다고요. 육체가 자기 것이 아닌데 자기가 관리하다 보니까 여기서 오버액션하는 거예요. 현재 자아에 맞는 적당한 육체 되기를 원하는 겁니다. 주름살 펴기, 쌍꺼풀 하기 이거거든요. 뱃살 똥배 빼기 이거다 말이죠. 자아는 똥배 없는 육체를 그리워합니다. 그런데 육체는 원치 않는 똥배가 나왔어요.
무슨 뜻인지 너무 어려워서 잘 안 되는데. 밥 먹고 누워 자기를 원하잖아요. 밥 먹고 누워 자는 것이 자기 뜻이 아니고, 자기 육체의, 아까 주름살, 주름이 하나 펴지면 정보가 하나 튀어나와요. 신께서 주신 정보가 있으니까. 밥 먹고 누워 자고 싶어요. 왜? 잠이 오라고 해서 오는 게 아니고 슬슬 오거든요. 잠이 알아서 육체가 잠을 부르고 따라서 잠을 잤단 말이죠. 자니까 똥배가 나오더란 말이죠.
그럼 나는 뭘 원해요? 잠은 자되 똥배 안 나오는 자아상을 갖고 있는 거예요. 왜? 잠자는 건 기분 좋지만 똥배 안 나오는 건 불편하니까. 당뇨, 고혈압 이런 게 문제가 되니까. 그러니까 어떻게 합니까? 이러니까 자아가 오버액션하는 거예요. 자아의 틀에 맞는 육체를 관리하는데 여기에서 비현실적인 현실적이 아닌 비현실적으로 하니까 라이프니츠에 의하면 존재의 공백. 쉽게 말해서 내가 원하는 육체와 실제 육체와의 간격이 생깁니다. 간격이 생기면서 그 다음부터는 자아가 고민에 빠져요. 신이시여, 왜 세상이 내 마음대로 안 됩니까? 공백에 빠집니다.
그런데 그렇게 까불락까불락 하면서 신에게 대드는 것도, 그것도 자기 똥배에 관심이 있을 때나 그런 고민이 되는데, 마침 자기 똥배에 관심 있어서 똥배 안 들어가서 고민이 되는 그때에, 애가 성적이 자기 반에서 2등하는 놈이 여자 친구하고 붙어 자기 반에서 꼴찌하고 있을 때에 그 애 닥달낸다고 한참 시달리다 보니까 자기 똥배는 지나가 버리고 생각이 나지 않는 거예요.
정신은 정신이 놀랍게도 모든 것을 포괄하는 것이 아니고, 정신이 이게 얼마나 미약하고 약한지 당장 고민거리에만 정신이 집중되지, 그 외에 다른데서는 정신이 거기에 쏠리지 않습니다.
라이프니츠가 이런 얘기 했어요. 예를 드는데, 바닷가에 가보라. 그 많은 파도소리 다 들립니까, 아니면 일부만 듣습니까? 일부만 듣죠. 코앞에 있는 파도의 소리만 듣지, 여기서 6킬로 떨어진 저쪽 해변가의 파도소리는 안 들리잖아요. 그런데 그쪽 가면 파도칩니까, 안 칩니까? 파도치죠. 소리 들립니까, 안 들립니까? 소리가 날아오지요. 날아오지만 이쪽 것만 듣지요. 그만큼 인간은 자기 제한적으로 코앞에 있는 것 밖에 모르면서 거기서 죽느니, 사느니 하고 있단 말이죠. 전체를 다 들을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의식이죠.
무슨 말이냐 하면, 지금 귀라는 통각, 육체가 귀라는 감각이잖아요. 청각으로 들리는 것은 10미터 앞에 파도소리만 들리잖아요. 그런데 나라는 육체는 6킬로 떨어진 그 파도소리가 사실 들려요. 들리는데 집중을 지금 어디다 하느냐 하면, 자아가 집중하기를 그 파도소리만 집중하니까 10미터 파도소리 들리는 거예요. 파도소리 듣고 있다가 저 뒤에서 자기 애인이 자기야, 밥 먹자. 하는 순간에 아까까지 듣고 있던 10미터 파도소리가 날아가 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그런 인간이 세상에 대해서 알면 얼마나 알며, 진리에 대해서 개뿔이 알기는 뭘 알아요. 그저 관심 있는 것 밖에 모르는데. 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인들도 아쉬운 일 있을 때는 신과 결부해서 새벽제단에 엎드리고 눈물 흘리지만, 막상 어떤 바쁜 일 생기면 교회도 못나오고 거기 정신 팔려서 성경 한 구절 안 보고 성경에 그런 말씀 있느냐 그렇게 합니다. 사람이 성경 안 보면 자기가 죄인인 줄 몰라요. 잘 나가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 오래 안 나오면 다 훌륭한 사람 되고, 교회 가끔 나오면 졸지에 죄인 되고 그런 거예요.
파도소리 하나 전체를 해석, 분석도 못하는 주제에 어떻게 인간이 남과 함부로 비교하고 내 인생은 불행한 인생이고 남의 인생은 행복한 인생이고, 어떻게 그렇게 지 마음대로 자기에 대해서 함부로 평가하며 사느냐 말이죠. 그것이 다 원인이 어디 있다고 보느냐하면, 자아에 있어요. 그래서 라이프니츠는 자아는 존재를 관리할 권리가 없다고 했어요. 맨 날 환상만, 공상만 띄울 뿐이에요. 맨 날 풍선만 하늘에 붕붕 띄워요. 자아가 문제에요.
그래서 라이프니츠는 자아에서 벗어나서 뭐로 가자? 단자로 가자. 단자 안에 뭐가 있는데? 하나님의 머리 속에 이미 이근호라는 인간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집어넣은 하나님의 설계도가 차곡차곡 챙겨져서 있단 말이죠. 그것이 인생을 40을 살고 50을 살면서 하나하나 풀리는 거예요. 풀리면 40대에 미처 몰랐던 내 성깔이 52살에 튀어나오고, 50대에 미처 몰랐던 성질이 60대에야 튀어나온 거예요.
튀어나온 그것 때문에 너무 슬퍼하거나 낙심하지 마세요. 인생이 여러분을 속이더라도 여러분 노하거나 슬퍼하지 말라 했어요. 거짓말이에요. 왜냐하면, 이것은 처음부터 하나님 머리 속에 이미 다 챙겨져 있었던 것인데, 60년을 살아야 비로소 발현되어 노출되도록 그때 타이밍이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라이프니츠의 일종의 자동기계죠. 다만 라이프니츠의 자동기계인데 다만 다른 점이 뭐냐 하면, 그렇게 하는 신이 그때그때마다 하나님의 창조의 힘이 거기에 개입한다.
이제 라이프니츠가 주장이 과연 복음적으로 옳은가를 생각해 볼 시간이죠. 그런 타이밍인데. 라이프니츠의 이러한 주장이 왜 나오게 되었는가를 제가 먼저 설명해 드려야 되겠습니다.
교회에 나오는 어떤 물리학자가 있다고 합시다. 물리학자가 교회에 나온다는 자체가 그게 믿기지 않지만, 와봐야 신자도 아니고 뻔하지만. 교회에 나오는 물리학자가 교회 나올 때 십자가 밑에서 저의 죄를 용서해 달라하고 성만찬 하고 용서 받았다 하고 집에 가서 물리학을 공부한다고요.
그런데 물리학이 뭐냐 하면, 이게 운동에 관한 거잖아요. 물리학의 물질의 운동에 관한 겁니다. 물리학이 분석에 관한 것은 화학에서 하는 거예요. 쪼개서 하는 것은. 물체가 어떻게 움직이느냐 하는 것은 물리 담당이거든요. 그러면 운동을 담당하면 그 운동은 어디서 나왔느냐 하는 겁니다.
물리학자는 운동을 하나님에게서 나온다고 보질 않아요. 하나님께서 손길 해서 옮기고 또 옮기고 이렇게 한다고 보질 않습니다. 물리학자는 운동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교회에서는 주여 저의 죄를 용서해 달라 해놓고, 물리학자의 운동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이 세상은 에너지의 구조로 되어 있어요. 에너지 구조 가운데서 가용 에너지, 쓸 수 있는 에너지를 전환하는데 있어서 어떤 법칙이 있다는 겁니다.
물은 그냥 흘려버려요. 그 중에서 물이 떨어지는 법칙을 이용하면 밤에 형광등을 켤 수 있는 가용 에너지가 포함되죠. 현재 우리 주위에 에너지가 가득해요. 지금 우리 몸과 지구 사이에도 중력이라는 게 흐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뉴턴이 발견한 물리학자가 발견한 바에 의하면 모든 물체와 물체 사이에는 서로 당기는 힘이 있다고 본 거예요.
두 분 목사님 사이에 당기는 힘이 있어요. 느낍니까? 못 느끼는 것은 그 물체가 질량이 너무 작기 때문에 약한 거예요. 하지만 우리는 작고 지구 덩어리는 엄청나게 클 때는 이게 시속 몇 킬로입니까? E=mc2 엄청난 시속으로써 꼴아 박아 버립니다. 물론 그냥 시속이라 할 수 없는 게 가속도가 붙으니까. 높은 데 올라가면 점점 더 가속도가 붙어서 나중에 부딪칠 때는 박살날 정도로 우리의 물질이 박살날 정도로 엄청난 힘이 있지요.
우리의 물체가 20층에서 떨어져서 박살나면 그제야 힘이 사라져요. 왜냐? 조각조각 난 것은 단위 조각조각 자체의 물질에는 질량이 거의 없기 때문에 지구가 당겨도 별로 힘이 없어요. 힘은 질량이 있어야, 이게 어려운 게 힘이라 하는 것이 어디 있는가를 뉴턴은 못 찾았어요. 왜냐하면 힘이라는 것이 질량이 있으면 다른 질량과 더불어서 관계 속에서 생기는 건데 질량이 공중에서 떨어져서 박살나버리니까 힘이 없어져 버렸어요. 그 힘 어디 갔어요? 질량이 없으니까 실제로 사물이 없어졌으니까 힘도 없어져요. 그럼 힘은 어디 갔느냐 말이죠.
라이프니츠는 그걸 가지고 유령이라고 합니다. 라이프니츠는 유령이 두 개에요. 하나는 뭐냐 하면, 우리 자아가 유령이에요. 우리 자아는 떠도는 유령인데 오늘이면 오늘의 새로운 존재를 관리하기 위해서 내 육체를 관리하기 위해서 내가 상상한 육체, 상상한 자아가 되기 위해서 또 그것을 위해서 애쓰는. 놀다가 다음 날 되면 또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
라이프니츠가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존재의 공백을 메우는 떠도는 유령. 오늘 이것 하나만 알면 돼. 적어 놓으세요. 이거는.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닙니다. [존재의 공백을 메우는 떠도는 유령]을 가지고 두 자로 이걸 가지고 뭐라 하느냐? 이걸 가지고 '자아'
구 목사님 녹음도 안하고 파장이라고. 존재의 공백을 메우는 떠도는 유령. 이게 자아에요. 이게 라이프니츠의 이야기입니다. 얼마나 똑똑한지 몰라요. 21세기를 살아가는 인간을 거의 다 꿰뚫은 것 같아요.
떠도니까 안정되질 못하는 거죠. 거짓 육체는 뭡니까? 어디서 적합한 나의 육체를 만날까? 인생은 나그네 길~ 인생은 나그네 길이라고 안 합니까? 나그네 아니더라도 직장생활해도 사람은 떠돌고 싶어요. 어떤 직장이든 그곳에 박히길 원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처음에는 도전적 정신으로 이 회사에서 봉사하고 싶지요. 한 6개월만 지나면 어디서 스카우트 안 하나 떠돌고 싶어요.
목사도 한 2년, 3년 있으면 제발 다른데서 불러줬으면 좋겠다. 지겹다 이제. 교인들 얼굴도 지겹고, 그 마물에 그 밥이고, 이제 떠나고 싶다. 그래서 감리교는 3년마다 정기적으로 바꾸기도 하고 바꾸잖아요. 서경수 목사님도 동원교회하고 바꾸지. 여긴 바꿀 수 없다. 그 나물에 그 밥인데.
사람이 도대체 마음에 머물지를 못해. 오래 있으면. 그래서 직장도 바꾸고, 직업도 바꾸고 마누라도 바꾸고 싶어요. 바꾸고 싶지만 경제가 안돼. 요새 위자료가 많기 때문에. 자식도 바꾸고 싶고. 전부다 나라도 바꾸고 이민가고, 나라도 바꾸고 싶고 정치도 바꾸고 싶고. 현재 캐나다 국적인 사람 한국으로 바꾼답니다. 재미없어서.
이게 라이프니츠가 그게 왜 그러냐 하면, 원래 자아라는 것이 정신이 만든 것이지 하나님이 만든 게 아닌데. 내 정신이 만든 것이지, 하나님이 만든 것이 아니고. 다시 자아 만든 것이 따져 보면 하나님이 만들었죠. 왜냐하면, 주름 잡혀 있으니까. 주름 잡힌 영혼이 펴보니까 떠도는 유령처럼 돼버린 거예요. 그래서 이런 떠도는 유령 가지고 맨 날 성경을 보니까 됩니까? 안 되지요. 하나님, 오늘은 이것 해 주세요. 내일은 요것 해주세요. 되질 않는 거예요.
성경의 뜻은 이것뿐입니다. 원래 자아라 하는 것은 없었어. 그리고 니 몸은 니 몸이 아니야. 회수해야 돼. 하나님이 회수해 갈 거야. 그게 성경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처음부터 하나님 것이었고, 우리는 내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지만 그거는 착각뿐이지, 처음부터 하나님 것이었고 죽을 때 되면 폐건전지 회수해가듯이 회수해 가버리는데.
자꾸 인간은, 그게 야고보서에 나옵니다. 아침 안개처럼 니가 어디 가서 도시로 가서 일을 보리라 하는 인간들아. 그건 죄다 말이다. 주의 뜻이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리니. 이것처럼 우리가 주의 뜻에 의해서 사는 것 같은 이걸 모르고 마치 따로 나의 자아를 설정하니까 이건 문제가 그렇게 되는 겁니다. 영적인 예수님 것이라고 도로 반납하세요. 도서관에 책 반납 안하면 도서관 직원들 화내고, 비디오가게 반납 안하면 전화가 옵니다.
날마다 비디오가게 전화 오는 게 성경 말씀이에요. 삐리리 전화해서 먹는 게 있으면 족한 줄 알라. 또 전화하고. 전화 안 받겠다는 사람이 교회 안 다니는 사람이에요. 전화 안 받는다. 목사 설교 안 듣겠다. 나는 내 자아로서 떠도는 유령으로써 만족하겠다.
이 성경을 보면서 원래 주인이 따로 있구나 하는 것을 알고, 그런 자들이 잃어버린 양이며, 그 잃어버린 양에게 원래 주인이 오셔서 자기 것 되찾아가는 것입니다. 주여, 왜 찾아오십니까? 원래 주인이 찾아오는 거예요. 그래서 오, 나의 주여! 하잖아요. 원래 주인이 찾아와서 자기 것 가져가는 거예요. 내 것 없었습니다.
교인들이 천국에 대해서 제일 착각하는 게 뭐냐 하면, 자아가 천국을 찾아간다고 생각하는데 이래서 구원 받은 사람, 한 사람도 없어요. 천국이 우리에게 접근해서 구원하는 겁니다. 천국이 우리에게 와서 부딪쳐서 우리가 구원받는 거예요. 내가 찾아가는 천국은 자아가 만든 천국이라서 가짜입니다. 완전히 가짜에요. 이 가짜 천국은 백날 가봐야 지옥입니다. 거기는 자아가 주인공이 되서 이건 주님이 주인공이 아니고 자아가 주인공이에요.
그런데 진짜 천국은 우리에게 와서 우리를 박살내고 있어요. 그 증거가 뭐냐?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넣습니다. 내가 죽는다는 것만큼 더 천국이 이미 왔다는 걸 확실히 보여주는 증거가 또 없어요. 이미 내가 죽어가고 있다는 걸 나는 사라지고 있다는 자체가 이미 천국에 왔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다루고 있다는 거예요. 사람들은 자기 죽어가고 있으면 살려고 하니까 이게 문제가 되는데. 와서 부딪치는 거예요.
아까 물리학자도 마찬가지고, 화학자도 마찬가지고. 어떻게 하면 이 물체와 물체의 운동을 밝히느냐를 할 것이 아니라 그렇게 생각하는 나는 과연 정당하냐를 교회에서 생각해 봐야 돼. 내가 물리학자인데 이 물리학자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과연 하나님 보시기에 정당한가, 옳은 것이냐? 라고 자기를 돌아보는 시간이 바로 교회에서 설교 듣는 시간입니다.
목회자가 과연 목회하는 이것이 정당하냐를 다시 한번 말씀 앞에서 비춰봐서, 야, 목회는 주님이 하시지 내가 하는 게 아니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 그것이 바로 또 설교시간입니다.
다시 한번 아까 물리 다시 해봅시다. 운동이라 했을 때 제일 이상한 게 힘이라고 하는 것이 힘이 질량이 없으니까 사물이 없으니까 힘도 사라진 거예요. 그런데 질량이 등장하고 어떤 사물이 등장하니까 그 사이에 힘이 있는 겁니다. 두 사람도 만유인력이 있는데 지금 너무 미미하니까 못 깨닫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뭐냐 하면, 이 세상에는 에너지로 가득 차 있는데 이 에너지를 니한테 쓸데 있는 나한테 이익이 되는 에너지로 바꾸기 위해서 내가 노동하고 수고해야 된다. 하는데 이걸 가지고 두 자로 뭐라 하느냐? 이걸 경제라고 해요.
광부가 땅 파고 농사꾼이 씨를 심고 이게 뭐냐 하면, 그 씨 안에, 밭 안에, 이 물줄기 안에, 햇빛 안에 뭐가 있다? 에너지가 있는데 에너지는 가만있으면 되지 않고 내가 수고로이 밭은 갈고 가라지를 뽑고 씨를 심는 수고를 하고 허리 아프지만 오늘은 밭 저 끝까지 고추씨를 심어놔야 햇빛이라는 에너지와 물이라는 에너지를 식물이 받아서 식물은 물과 에너지를 받아서 자체 내에 있는 에너지장치, 광합성 작용을 해서 고추 또는 벼, 옥수수, 감자 이런 것을 내고 그 감자를 딸 때 우리는 에너지를 따는 거예요. 에너지 덩어리를 따고 가용 에너지죠. 에너지를 먹으면 탄수화물이 들어 와고 탄수화물이 60조 세포에 들어가서 산소와 결합해서 ATP 작용에 의해서 에너지를 줘서 우리에게 말할 수 있는 게 나온다 말이에요.
이것 외에 진리가 더 없지요. 그렇잖아요. 이게 물리학자 아닙니까? 이게 생물학자고. 그렇다면 여기에 무슨 신이 필요하면 무슨 죄가 필요합니까? 생각해 보세요. 그래서 오늘날 교회 가는 사람들이 사실은 신을 안 믿고 죄를 안 믿는 사람들이 일종의 노동을 해서 여기 있는 에너지를 가용 에너지로 전환시키려는 노력으로 성경 하나 더 보고, 기도 더 하는 그러한 모독일 수가 있습니다.
자, 이제 끝으로 도대체 라이프니츠가 결국 논리에 의해서 죄가 사라졌습니다. 없는 죄를 어디서 찾아야 될까요? 없는 죄를 어떻게 찾습니까? 우리가. 아무리 라이프니츠의 강의를 들었지만 도대체 하자가 보이지 않아. 어떤 오류가 보이지 않죠. 너무너무 완벽해. 방금 물리학자 이야기했잖아요.
배가 있다. 배라는 것은 신께서 만든 그 안에 주름이 있죠. 배가 있고 그 에너지로 되어 있고. 인간이 있다. 인간은 배에게 작용함으로써 감추어진 에너지를 가용 에너지, 내게 유익한 에너지로 바꿀 수 있다.
라이프니츠는 말하기를 이것까지 말해요. 사람이 죽었다. 사람이 죽었다 해도 죽음이라는 것은 없다. 왜 죽음이 없느냐 하면, 죽어도 그게 분해돼도 육체보다 먼저 정신은 있고, 육체가 깨져도 정신은 온전하며 의식이 있는 이상은 육체는 없어져도 이것은 남아 있으니까 영원히 소멸되는 죽음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봤어요. 더 이상 완벽에 완벽을 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일종의 뭐와 같으냐 하면, 불교 같아. 기가 바뀌는 거예요.
그러면 이러한 논리에 대해서 우리가 죄가 여기서 성립되지 않는 문제가 있는데 그러면 분명히 상식적으로 다 맞는데 복음적으로 문제가 있단 말이죠. 그럼 그 문제점이 어디 있느냐? 죄라는 것이 법이 없으면 죄가 성립이 안 됩니다. 라이프니츠는 뭐를 ( )하느냐 하면, 이게 마지막 어려운 거니까 잘 들어보세요.
이 법에서 죄가 나오는 법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거예요. 라이프니츠는 법에서 그러니까 하나님의 형상에서 법칙에서 존재만 나왔다고 본 거예요. 존재만 있지 죄가 따라 나온다는 사실을 몰랐던 거예요. 라이프니츠는 하나님의 형상에서 인간을 만들고 단자에서 물질을 해서 인간을 만들었잖아요. 그런데 율법이 있음으로써 죄가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그는 도저히 상상도 못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인간의 눈에 보이는 존재만 따지기 때문에.
그러나 죄는 보이지 않아요. 보이지 않거든요. 라이프니츠는 보이지 않는 것까지 라이프니츠는 신의 속성 가운데 집어넣어야 될 텐데 라이프니츠는 보이는 인간만 따져서 하나님은 이렇다고 이야기했지, 보이지 않는 악마나 천사나 죄에 대해서 하나님의 속성을 거기다 개입시킬 그러한 엄두도 못 냈어요. 낼 수 없는 거죠.
인간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법이어야 할 텐데, 이 법을 저는 언약이라 봅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의하면 인간이라 하는 것은 선과 악을 증거 하기 위해서 그러니까 선과 악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의 공의와 사랑이죠. 예수님의 공의스러움과 사랑을 증거 하기 위해서 인간이 만들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의하면.
그렇다면 무엇이 하나님의 공의에 비해서 죄냐 무엇이 의냐를 증거 하기 위해서 인간이 또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인간은 죄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저주를 받아야 될 인간이 태어나야 되고, 하나님의 의를 알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의를 알기 위해서 의를 증거 하는 인간이 또 태어나야 돼요. 저주 받고 복 받기 위해서. 그러니까 복 받기 위해 태어나야 되고 저주 받기 위해 태어난다 말이죠.
그런데 제가 아까 물리학을 이야기한 것은 단순히 뭡니까? 에너지를 가용 에너지로 전환시켜서 ( ) 이건 뭐냐 하면, 나의 생존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나를 만드는 게 돼요. 나의 생존을 위해서 하나님이 만들어놨기 때문에 거기 뭐가 성립 안 되냐 하면, 죄라는 게 성립이 안 되죠.
전의 신학에서는 중세신학은 뭐냐 하면, 니 육체를 갖고 있으니까 죄를 진다 이렇게 되는데. 라이프니츠는 그게 아니고 현재 활동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총으로 보거든요. 그 점은 제가 아까 이야기했기 때문에 이해되지요.
그런데 활동하는 그것 자체가 은총이 아니라 활동하는데 발생되는 그 죄가 용서받는 그것이 의고, 용서 안 받는 상태가 그 자체가 죄가 된다는 상태를 라이프니츠는 모른다 이 말이죠. 은총을 죄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살게 하시니 고맙습니다. 라는 쪽에서 정립되면 곤란하다 이 말입니다. 그거는 성경적이 아니다 이 말이에요. 이제는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제가 평소에 언약이야기를 하면서도 들을 때는 여러분들이 안다 싶은데 막상 라이프니츠나 데카르트를 이런 철학가들을 갖다 들이대 미는 이유는, 안다는 생각하고 상태에서 라이프니츠라든지 비교를 해보니까 또다시 혼돈이 일어나고 혼선이 일어나고 헷갈리는 거예요. 또다시 언약적인 복음적인 걸 다 까먹게 되는 겁니다. 맞다. 신의 은총으로 살았잖아. 오줌 누는 것도 은총이고 그런데. 그게 왜 살아있느냐를 묻는 거예요. 단순히 살아있으니까 살아있다는 거죠.
끝으로 하나만 더 하죠. 여러분 가용 에너지의 뜻이 뭡니까? 나한테 쓸모 있는 에너지 아닙니까? 누구한테 나한테 쓸모 있다? 나한테 쓸모 있지. 그래서 돈 있는 놈은 부동산 투기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