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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대구 9월 4일 지옥의 하나님 p048 야곱의 전쟁강의-

대구 9월 4일 지옥의 하나님 p048 야곱의 전쟁

이름 : 이근호(IP:)

우리교회(IP:220.♡.176.141)

08-01-20 20:59

daegu060904

06 대구강의 10 - 지옥의 하나님 13

06,09,04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야곱의 전쟁에 대해서 !!

시작하겠습니다. 성경에는 "세상 만사가 말씀대로 움직인다" 라는 것이 여러 군데에 나오는데, 우리 인간들의 입장에서 가장 혼란스러운 것은, 물론 다른 것도 그렇지만, 과연 그렇게 말씀대로 되느냐는 것이다. 즉 그것을 믿을 수가 있느냐는 말이다.

이것을 다음과 같이 4가지의 단계로 정리할 수가 있는데,

* ① 세상 만사가 말씀대로 움직인다.
* ②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 ③ 내가 무슨 일을 해도 주의 뜻이다.
* ④ 곧 내가 신이다.

이것은 유대교나 이슬람교에서도 마찬가지인데, 그런데 이 4가지 전체가 성경의 뜻이 아니며, 더욱 더 놀라운 것은, 오히려 그런 것을 우리가 모르게 하는 것이 주의 뜻이라는 것이다. 즉 주의 뜻이 아닌 것으로 만드는 것이 주의 뜻이란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복잡한 논리를 풀 수 있는 것은, 주의 뜻을 이루는 주체자가 인간이 아닌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모든 것이 주의 말씀대로 된다고 해놓고, 자기가 무슨 짓을 하든지 주의 뜻이라는 것은, 그럴 수도,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는 말이다.

인간들이 이렇게 나오는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이렇게 "세상 모든 일이 주의 뜻대로 된다고 하는 것을 내가 어떻게 아는가?" 라는 것에서, 여기서 문제는 '나' 라고 하는 것이 등장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내가 어떻게 아는가?" 라고 해버리니, 그 뒤에는 나오는 2번과 3번과 4번의 것들이 모두 다 자기가 신이 되는 식으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제가 이렇게 정리는 해드렸지만, 사실 우리가 평생동안 신앙생활을 하면서 계속 질문이 들어오고 또 스스로 하는 것이고, 돌아서면 또 헷깔리는 것이고, 20년을 믿었다고 해도 또 고민에 빠지는 문제라는 것이다. 도대체 그 원인이 무엇인가? 이것이 칸트철학의 문제점이기도 한데, "그렇게 내가 아는데, 즉 그렇게 내가 아니까, 그 아는 것에 대해서 내가 나에게 대해서 가치를 주어야한다" 라는 말이다.

◈ 주께서 아시나이다 !!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러니 "말씀대로 된다" 라는 것에서, 거기에서 "내가 안다" 라는 쪽으로 나가버리면 안 되고, 어디로 가야 하는고 하니, "주께서 아시나이다" 라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쪽으로 말이다.

예수님을 임신한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기를,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 라고 했는데, 즉 주의 뜻대로 이루어진다고 말이다. 그렇게 된다면 2번, 3번, 4번이 마리아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해가 되지요? 천사가 나타나서 처녀인 자기에게 "아기를 낳을 것이다" 라고 했는데, 건방진 우리들 같으면 당장에 "아니, 그것을 어떻게 알아요?" 라고 나올 것이 분명한데 말이다.

그런데 마리아는 뭐라고 말했는가? "어떻게 그런 일이 저에게 생깁니까?" 라고 물었다는 것이다. 주의 일에 대해서 건방지게 알려고도 하지 않고, 더욱이 개입하려고 하지 않고, 단지 무엇이 고맙고 감격스러운고 하니, 주께서 자기를 사용했다는 그 사실이 그저 놀랍고 충격적이라서, 그래서 환희와 기쁨을 외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눅 1:38)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 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마리아의 이러한 모습은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는가? 오늘날 현대인들이 어떻게 해서든지 나름대로 신을 포착해서, 그 신의 뜻을 몽땅 다 알아 가지고, 그래서 그것을 근거로 해서 자기가 구원을 받고자 하는 구원의 욕망이, 그러한 구원욕망이 마리아에게는 전혀 해당사항이 없다는 것이다. 단지 마리아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용한 것이 너무나도 놀랍고도 감격스러워서,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기 부인에 해당되는데, 무슨 말인고 하니까,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자기가 신이 되는 방향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를 사용했으면 주께서 적당히 사용하고 적당히 버리시든지, 그것은 주께서 다 알아서 하실 일이라는 것이다.

◈ 믿음 - 주님이 행위의 주체가 된다는 사실을 믿을 때 !!

이렇게 모든 일에 있어서 주님이 행위의 주체가 된다는 사실을 믿을 때, 그것을 두고 '믿음'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자기가 아무리 하나님의 일을 안다고 할지라도, 자기가 그 말씀을 성취하는 주체가 자기가 되어버리면, 그것을 두고서 '행함' 이라고 하고 말이다. 로마서는 이러한 믿음과 행함을 대비시키는데, 그 주체자가 "약속하신 예수님인가? 아니면 인간인가?" 라는 것에 따라서 구별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로마서 4장을 예로 들어보면, 사라의 태 안에 이삭을 임신하게 된 것이 아브라함이나 사라가 주의 뜻을 미리 알아서, 즉 그들의 행위가 그 어떤 영향력을 미쳐서 생긴 현상인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라가 이삭을 임신해서 낳게 된 것은 약속의 주체자이신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신 일이고, 단지 아브라함과 사라를 도구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롬 4:19)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롬 4: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롬 4: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롬 4:22)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그러니 자기는 주께서 들어 사용하는 도구이고, 자기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주체자는 주님이라고 하는 것을 아는 관계를 두고 '믿음' 이라고 했을 때, 그러니 이 믿음에는 '행함' 이란 것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행함이 거기에서 버틸 재간이 말이다.

◈ 하나님이 우리를 어떤 식으로 사용하고 계시는가 ?

우리가 '지옥의 하나님' 이라는 교재를 가지고 성경공부를 하는데, 그러면 왜 이런 공부를 해야하는가? 첫째, 하나님의 뜻을 알아서 그것을 근거로 해서 구원받기 위해서, 둘째, 하나님이 지금 우리를 어떤 식으로 사용하고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 이 둘 중에서 몇 번인가? 당연히 2번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떤 식으로 사용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 당연히 야곱처럼 살아야지 ??

오늘 우리가 공부할 교재의 본문은 '야곱의 전쟁' 인데, 사실 이 야곱의 전쟁에 대해서 자기가 개인적으로 안다고 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는데, 그것을 알든 모르든, 그것과는 상관없이 그 전쟁의 주체자는 결코 자기 자신이 될 수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욕심이 있는고 하니까, 야곱의 전쟁에 대해서 알았으면 그것을 그대로 실행해서 야곱처럼 살아야 한다는, 그런 욕구가 우리 속에서 불뚝불뚝 나오는 수가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런 설교를 하게 되면 교인들에게 강요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야곱의 전쟁을 알았으면, 당연히 야곱처럼 살아야지요" 라고 말이다.

그러니 목회자는 "하나님께서 성도에 대해서 어떻게 다루시는가?" 라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한 가지만을 이야기하면 안 되는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다루시는고 하니, 성도의 입장에서는 "주의 뜻대로 우리를 구원하신다" 라고 하는 것은 맞는데, 그런데 그것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주의 뜻대로 버릴 자는 버린다" 라는 것도, 즉 이렇게 두 가지 양상을 다 이야기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설교자는 이런 두 가지 뜻을 다 이야기해주어서, 억지로 강요만 하려고 하지 말고, "당신들은 두 가지 중에서 어디에 해당합니까? 스스로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라고, 그렇게 제시만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모이기를 힘써라' 라는 의미는?

히브리서에 보면 "모이기를 힘써라" 라는 말씀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 모이기를 힘쓰라는 말씀을 성취하기 위해서, 자기 백성들로 하여금 모이기에 힘쓰는 사람들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성도가 아닌 사람이라면 백발백중 모두 삐치게 되는데, "아니, 모이기를 힘쓰고 싶어도 바빠서 못하는데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라고 하면서 말이다.

(히 10: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이런 사람은 그야말로 말귀를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인데, 주께서 명령을 하시면 자기가 알아서 그것을 실행에 옮겨야 될 사항이라고, 그렇게 오해를 했다는 것이다. (마치 회사에게 상사가 부하에게 그렇게 명령을 하듯이 말이다.)

◈ '예수 믿으세요' 라는 의미는?

그렇다면 이 믿음이라는 것도, '믿으세요' 라고 하는 말은, "믿음이 이미 여러분 속에서 역사하고 있는 사람은 손들어 보세요" 라고 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새삼스럽게 믿어서 구원받으라는 것이 아니라, 이미 '믿으세요' 라는 말씀이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사람이 누구냐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말씀을 공부하게 되면 지극히 마음이 편안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새삼스럽게 행할 것도 없고 구원받을 일도 없으니 말이다. 다만 우리가 아는 것은, "주께서 나를 이런 식으로 사용하시는 구나" 라는 것이다. 그것만 체크하고 받아드리면 그것이 영광이 되니까, 그처럼 편한 것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목사의 경우에는, 안 믿는 사람까지도 억지로 믿게 하려고 하니까 엄청나게 힘이 든다는 것이다.

◈ 목사님, 이게 무슨 뜻이지요?

그러니 목사가 이러한 내용들을 설교하면서 "여러분, 주께서 하시는 것이 실제로 여러분의 삶에서 다 이루어집니다" 라고 하면, 그러면 분명히 교인들 중에서 반발하면서 질문하기를, "목사님, 저는 그렇게 기다려도 이루어지지 않던데,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고 한다면, 목사는 그때 뭐라고 대답해주어야 하겠는가?

귀찮다고 해서 "좀더 기다리세요" 라고 하지 말고, "그것을 왜 저에게 묻습니까? 제가 당신을 창조한 것도 아니고 믿음을 준 것도 아닌데, 저에게 따질 문제가 아닙니다. 저는 다만 '실제로 성도에게 이렇게 역사합니다' 라고 이야기할 뿐입니다. 만약에 제가 그것을 할 수 있다면 제가 예수님이지 말입니다" 라는 하는 것이 맞지 않는가? 현실 속에서 성경말씀이 이러한 반발을 살 수 있는 경우가 굉장히 많은데, 사실 성경전체가 다 그렇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라고 하면, 사람들은 여기에 대해서 반발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신자가 반발을 하지 말이다. 그런데 "믿는 자가 적으니라" 라고 하면 또 반발을 하고 말이다. 다 똑같은 말씀인데 말이다. 그것은 앞에 있는 "이웃을 사랑하라" 라는 말씀을 오해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앞의 경우는 "아하, 이것은 내가 할 수 있다" 라고 여기는 것이고, 뒤의 경우에는 "그러면 한국교회는 다 이단인가?"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교재 '야곱의 전쟁'을 공부할 것인데, 정말 말씀대로 모두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 예가 우리 교재 48페이지에 나오는데, 창세기 23장 25절을 보도록 하자.

(창 25: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 너무나도 단정적인 하나님 말씀 !!

여기에 보면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라고 하는데, 하나님은 우리가 보기에도 정말 기분 나쁘게
닮정적이라는 것이다. '있구나, 나누이리라' 라고 바로 단정해버린다는 것이다. 여기에 무슨 토를 달겠는가? 사실 우리가 교회에 나와서 말씀을 들으면 기분 좋은 것이 토를 달지 못한다는 것인데, 물론 성도에게만 말이다. '섬기기라' 라고 하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대로 되는데, 그런데 문제는 2번의 경우인데,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느냐?" 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를 이삭과 리브가가 듣고 난 뒤에 헷깔리기 시작하는데, 그것이 2번인데, 즉 "그 사실을 어떻게 내 것으로 만들어서 내 것으로 만드는가?" 라고 말이다. 여기에 4명이, 즉 이삭, 리브가, 야곱, 에서가 오해를 해서 착각의 시기를 보내게 된다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해보라고 하면, 물론 결론적으로는 예수님이 오셔야만 이해가 되는데, 즉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이사야, 예레미야, 베드로, 요한, 그 누구라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고 부활하셔야 비로소 정체를 드러내는데, 즉 십자가를 집어넣어서 해석하면 된다는 것이다.

"아하, 여기에서 두 민족이 싸우고 하는 것과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는 것은, 그것은 바로 예수님 때문에 그렇구나" 라고 알게 되지만, 그러나 이삭을 비롯한 4명의 식구가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다 오해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 장차 오실 예수님이 알려주시면 !!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그렇게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냥 넘어가면 되는가? 그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오셔야 안다는 것은, 예수님이 알려주셔야 비로소 안다는 의미라는 말이다. 그러니 이삭이나 리브가가 이것을 알게 된다면, 그것은 장차 오실 예수님이 미리 알려주어서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야곱도 처음에는 그것이 자기에게 해당되는 줄 알고 오해를 했는데, 그런데 그것이 자기가 아니라 메시야가 와서 이룬다는 것을 안다면, 그것은 장차 오실 메시야의 영이 야곱 속에 있어서 알려주었기 때문에 알았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 사실을 알았다고 해도, 이렇게 우리는 주님이 알려주어야 하는 입장이라면, 우리도 역시 이삭과 그 가족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인간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메시야의 영이 야곱에게 알려주어서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우리도 현재 그런 야곱의 자리에 있다고 하면, "저는 다 아는데요" 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에게 알려줄 때 개인적으로 은혜를 받게 하는 대목은 따로 있다는 것이다. 남들이 끼들 수 없는 말이다. 그래서 목사가 집사가 은혜 받는 것에 대해서 간섭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주님께서 그 사람에게만 알려주는 뭔가 새로운 것이 있는데, 이것을 철학에서는 '개별자' 라고 하는데, 철학에서 이 개별자가 강조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아무리 해도 남의 속을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설령 칼로 가슴을 열어서 본다고 해도 말이다.

그런데 그 모르는 것에 대해서 다행스럽게 여겨야 하는데, 동일한 성경말씀을 보아도 그 사람은 은혜를 받는데 자기는 못 받았다고 하면, 그것은 그 사람에게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이 주시는 은혜에 대해서 왈가왈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말씀을 가지고 평소에는 곡해를 했다가 나중에 그것이 아닌 것을 알고는, 그렇다면 그런 말씀을 오해해서 생긴 일들도 모두 다 자기 잘못으로 깨닫게 되는, "아하, 그것이 아니었구나" 라고 말이다. 그것이 야곱과 에서 사이에서 계속해서 일어나고, 지금 우리는 그것을 탐색하고 있다는 말이다.

여기서 교재 48페이지를 처음부터 보자.

** [야곱의 전쟁] - 이삭 이후에도 전쟁에서 승리할 인물이 나온다. 그 사람은 야곱이다. 이 야곱은 우선 그 쌍둥이 형인 에서와 싸움을 벌이게 된다. 이 싸움은 운명적이라서 태어날 때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면 어린 자가 이기도록 되어있다.

어떤 사람이 이 대목을 보고 이야기하기를, "아니, 같은 가족끼리 왜 싸우는가? 싸우려면 적하고 싸우지 말이다" 라고 하는데, 즉 왜 피를 나눈 같은 형제끼리 싸우느냐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보기에는 형제이지만, 그러나 하나님 입장에서는 그들이 형제이기 이전에 먼저 하나님의 계시를 증거해야 될 도구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계시라고 하는 것은, 멸망을 받을 자는 멸망시키고 축복을 받을 자를 축복하는 것인데, 지금 그것을 이삭이라는 가정을 통해서 보여주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같은 한 가정이 왜 싸우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싸움을 통하지 않고는 일이 안 되기 때문에, 비록 한 가족이라고 해도 싸움이 벌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도 역시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여기서 요한계시록 5장을 5절을 보자.

(계 5:5)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지금 일곱 개의 책이 봉인이 되어있는데, 그냥 다 떼버리면 되지 왜 우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이긴다' 라는 이야기는 왜 나오느냐는 것이다. 지난 주일에 이 대목은 설교하지 않았는데, 설교해버리면 설교시간만 두 시간이 넘어가니 말이다. 그러면 교인들은 얼마나 당황하겠는가? 12시 반에 약속을 잡아놓았는데 말이다. 12시에 마친다는 것을 묵시적으로 약속해주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아예 교회에 나오지 않는 수가 있다는 것이다. 약속에 늦을까 싶어서 말이다.

아무튼 봉인된 하나님의 책이 어디에 있는고 하니까, 그것이 보좌의 책인데, 거기에는 모든 인간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담고 있는 책이라는 것이다. 인간들의 모든 행동을 담고 있는 생명책인데, 그것이 행위책까지도 포함하고 있는지는 불확실한데, 아무튼 그 책에는 신자든 불신자든 모든 인간들의 행동들이 다 결정된 체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것을 두두둑 뜯어버리면 그 안에 있는 내용들이 능력이 되어서 지상에 좌악 퍼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냥 그렇게 두두둑 다 뜯어버리면 되는데, 그런데 왜 다윗의 뿌리가 이겼다고 하는 이야기를 굳이 해야만 하느냐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 봉인 된 것이 싸움이 없이는 열릴 수가 없다는 것이다. 즉 주님이 그것을 봉인한 이유가 싸워서 이겨야 그 봉인이 된 것을 뗄 수가 있도록 했다는 것이다. 싸움에서 지면 도루묵이고 말이다.

◈ '이스라엘'에 담긴 뜻은?

지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준 것은, 이 '이스라엘' 이란 이름의 뜻이 무엇인고 하니, "신과 싸워서 이긴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신의 영역에 대한 장악을 의미하는데, 이 이스라엘의 역할이 무엇인고 하니, 이스라엘은 언약의 나라이고 제사장 나라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법으로, 그 법으로 이 세상을 정복해야 될 책무를 지고 출발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승리한 이스라엘만 구원받고 나머지는 다 저주를 받는데, 이것이 바로 야곱에게 주신 언약이란 것이다.

그런데 지금 야곱은 앞으로 자기가 장자되는 것에만 관심이 있지, 야곱 자신과 자기 후손에게 내려주신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인물이냐에 대해서는 아직 잘 모른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에게는 전쟁에서 승리해야 야곱이 야곱답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법이 어떤 사람을 지목해서 "너는 내 종이다" 라고 했을 때는, 그 사람이 감당해야될 책임과 임무를 주고 난 뒤에, 그대로 했을 경우에만 종이 되고, 그렇지 못하면 탈락한다는 조건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율법의 조건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모조리 다 실패를 하니까, 그 어떤 인간이라도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도 율법대로 순종하지를 못하고 실패했으니 말이다. 그러니 이 세상은 계속해서 저주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고, 하나님의 보좌는 보좌대로 따로 있다는 것이다.

◈ 이 땅으로부터 승리한 자가 나와야 !!

그러니 이제는 저주받은 이 세상이 멸망하고, 하나님의 보좌가 새하늘과 새땅으로 구원하는 일들을 하려고 하면, 뭔가 이 땅으로부터 승리한 자가 나와서, 그 승리한 것을 근거로 해서 자기 백성들을 데리고 가서 하나님의 온전한 새하늘과 새땅의 백성들이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다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 말씀 속에는 자기 백성을 건지는 것도 포함되어 있으니 말이다.

결국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추방시켜놓고, 이 인간을 구원하는데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움과 거룩함이 이 땅에서도 승리, 승리, 승리로 유지될 수 있도록, 지금 이 임신하지 못한 리브가에게 임신을 예고하면서 두 아이를 주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는 패배하도록, 다른 하나는 승리하도록 되어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로마서에서 한쪽은 사랑했고 다른 한쪽은 미워했다고 한 것이다. 사랑한 쪽은 반드시 이기게 되어있고, 미워한 쪽은 반드시 지도록 되어있다는 것이다.

제가 강의를 처음 시작하면서, 이 모든 것이 주의 뜻대로 이루어진다고 했는데, 그러니 주의 뜻대로 우리에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새삼스럽게 무엇을 하고 말고 것이 없는데, 다만 주님이 노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데리고 그렇게 자기의 뜻을 이루어간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주께서 지금 우리를 어떻게 다루는지, 그것이 몹시 궁금하고 말이다.

◈ 주님은 어떻게 우리를 다루시는가?

주님은 어떻게 우리를 다루는고 하니, 이 세상의 모든 죄와 사망과 마귀를 이긴 분이 속에서 역사하고 계시니, 그것을 믿으라는 것이다. 우리는 남북통일과 선진조국에 관심이 있는데,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은 이미 우리 안에 승리하신 분이, 즉 우리의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승리한 그분이 우리를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땅에서 승리함을 보여주는 증인의 방식으로 말이다.

그러니 야곱을 이야기하면서 우리가 얼마나 편안하냐는 것이다. "아하, 주께서 그렇게 다루고 계시는구나" 라고 말이다. 거지 나사로의 경우에도, 비록 자신은 거지이었지만 부자에게 꿀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큰 승리냐는 말이다. 사도바울과 같은 경우에도 그렇고 말이다.

사도바울은 자기 몸에 가시가 있었고, 가진 재산도 없고, 직업도 변변찮고, 그러면서도 고난을 그렇게 받으면서 복음을 전했는데, 남들이 볼 때는 얼마나 하찮게 보였겠는가? 그러나 정작 본인은 승리의 찬가를 부르고 있다는 것이다. 죽었으나 산 자이고, 아무 것도 없지만 모든 것을 다 가졌다고 말이다. 약하지만 강하고, 삼층천에도 갔다왔다고 하면서 말이다.

다시 말해서, 사도바울은 이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그야말로 엉뚱한 소리만을, 전혀 먹혀들지 않는 소리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야곱에게 내린 계시가 그 안에 들어있기에 말이다. 그리고 그 야곱에게 준 계시의 말씀이 사도바울에게 역사하고, 동일하게 오늘날 우리에게도 역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보잘것없지만, 악마를 상대로 승리하신 그분이 그렇게 하신다는 말이다. 이해가 되지요?

계속해서 교재 48페이지를 보자.

** 개인적인 운명에 관한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영원히 존속될 한 국가적 운명의 씨앗이 된다. 그 나라는 이스라엘이다. 장차 나타날 국가 이스라엘의 운명은 야곱이라는 한 남자의 운명으로 그 본질이 마련되기 시작한다.

여기에 '야곱' 이라는 우리가 잘 아는 이름이 등장하는데, 그 이름의 뜻이 "형의 발꿈치를 붙잡았다" 라고 해서 붙여진 것인데, 그런데 이 야곱이란 이름이 얼마 가지를 못하고 '이스라엘' 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대체가 된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 왜 '야곱'과 '이스라엘' 이란 이름이 반복되는가?

어떤 사람이 질문하기를, "목사님, 왜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었는데, 왜 성경에서 계속해서 야곱이라는 이름을 계속해서 사용합니까?" 라는 것이다. 말이 되는 질문인데, 야곱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뒤에도 어떤 경우에는 사용이 되고, 또 사용이 안 되고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형제와 가족을 논할 때는 야곱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하나님이 독단적으로 사용할 때는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석한 사람이 바로 스피노자인데, 유대인으로 성경을 깊이 연구한 사람으로, 우리가 가만히 생각해보면 일리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했다고 해서, 즉 새 사람이 되었다고 해서 우리의 옛 성품이 하루아침에 날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어차피 야곱이라는 존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수단이 된다면, 야곱이 이스라엘이 된 이후에도 야곱적인 요소와 이스라엘적인 요소를 계속해서 번갈아 가면서 하나님께서 자기 뜻대로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특히 이스라엘이란 이름은 국가적으로 사용될 때는 나오게 되는데, 그것은 이스라엘 속에 야곱이라는 이름이 완료된 상태에는 이스라엘이 사용된다는 것이다. 물론 야곱은 이스라엘이 되었지만, 이 야곱의 자식들과 그 자식들의 형제들에게는, 즉 요셉의 형제들도 해당이 되는데, 그들에게는 아직도 야곱이 이스라엘이 된 취지가 녹녹히 스며들지 않았을 경우에는 야곱이라는 이름도 자주 사용된다는 것이다. 저는 이것이 일리가 있다고 보는데, 아무튼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 이야기라는 것이다.

◈ 하나님의 싸우시는 방법은?

그렇다면 하나님의 싸우는 방법이 무엇인가? 야곱은 형을 붙잡는 것인데, 하지만 붙잡힌 놈이나 붙잡은 놈이나 둘 다 하나님의 방식은 아니라는 것이다. 야곱의 방식으로 하면, 구원을 받으려면 자기가 행위의 주체가 되어야 하는데, 즉 자기가 형을 붙잡아야 하니까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그것을 철학적으로 말하면 삼킴을 당하게 되는데, 한쪽이 다른 한쪽을 점령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렇게 되면 야곱이 에서를 이겨야 하는데, 그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계시를 주신 분이 양쪽을 다 이겨야 하니 말이다.

◈ 육의 인간은 철저히 도구에 머물러야 !!

어차피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의 도구로만 사용되어야 하는 것이지, 자기가 승리의 주체자로 덜렁 나오게 되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육을 통해 나온 인간이 다시 육을 통해서 하늘나라로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것이다. 철저하게 도구에 머물러야 하는데, 이사야나 예레미야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이사야가 승리하면 안 되고, 예레미야도 승리하면 안 되고, 역시 우리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오직 예수님이 승리해야 한다는 말이다.

◈ 성도는 목격자이고, 증인 !!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를 낫게 했는데, 남들이 보기는 분명히 베드로와 요한이 낫게 했다는 것이다. 누가 보아도 말이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결코 자기들이 승리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자기들이 그 앉은뱅이에게 믿음을 준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주님이 이 앉은뱅이에게 믿음을 주었고, 자기들은 그러한 일의 '목격자' 라는 것이다. 즉 '증인' 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이제 베드로와 요한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못하는데, 이것이 중요한 문제인데, 흔히 목사들이 교인들에 대해서 걱정하는 것이 많은데,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의 목격자이고 증인이기 때문에, 성령을 받고 난 되에는 결코 예수님을 부인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은 자기들 눈에는 보이니 말이다. 이 얼마나 신기한 일인가?

◈ 승리자가 따로 있으면 되었지 !!

스데반 집사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지금 스데반 집사를 죽이려고 돌맹이를 던지고 그 난리를 쳐도 스데반 집사는 "어, 달이 떴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죽인다고 덤벼들고 해도 뜬 달을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다. 즉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부활했으면 되었지, 그 이상 자기가 더 이상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다. 주님이 부활하셔서 지금 일을 하고 계시는데 말이다.

이것은 바로 계속해서 승리자가 우리가 아닌 것을 말해주는데, 만약에 우리가 승리하자이고 계시의 성취자라고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불평을 하게 되는데, "하나님, 제가 그렇게 힘들게 애쓰고 노력했는데 성과가 겨우 이 정도라는 말입니까? 아니, 더 이상 제가 주의 일을 하라는 겁니까? 하지 말라는 겁니까?" 라고 말이다.

◈ 노회 목사님들, 너무 기죽지 마시고 !!

사실 현실적으로 우리노회에 속한 목사님들이 힘 빠질 일이 많다 싶은데, 한 마디로 말해서 교회가 안 된다는 것이다. 처음에 한 20명 정도 된다 싶으면 나중에 보면 그 절반도 안 남아있고 말이다. 그러면 "아하, 내 마음을 낮추기 위해서인가보다" 라고 여기면, 원 상태로 만들어주어야 하는데, 나중에 보면 5명만 덜렁 남고 말이다. 그러면 당연히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지 않겠는가?

자기가 설정한 자기 나름대로의 기준으로, 즉 교인수가 늘어나면 주의 뜻으로 여기겠다고 하는, 그런 식으로 일을 하려고 하면 주님께서는 그것을 피해버린다는 것이다. 목사가 그래도 성도라면 예수님이 승리자라고 하는 것을 믿어야지, 눈에 보이는 교인수로 그것을 측정하려고 하면, 주님은 자꾸만 그런 것과는 어긋나는 일들을 만들어서 우리의 본색을 드러내게 하신다는 것이다.

◈ 계시는 역시 계시다워야 !!

제가 어제 낮 예배시간에 설교하면서 예를 들기를, 사람이 겉모습이 화려해도 곰국을 끓이듯이 끓여버리면 나중에 진액만 나온다고 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제 아무리 목사라고 해도 마지막에 가면, 예수님에게 실망해서 삐치고 토라져서 그동안의 화려했던 종교적인 허례허식은 다 날아가고, 목사와 같은 이런 직책들을 다 모아서 불 속에 다 집어넣어 버리면, 나중에 알맹이만 남아서 마치 가룟유다처럼 예수님을 배반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주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인데, 왜냐하면 "계시는 계시다워야 계시이다" 라는 것이다. 그래서 오직 계시만 남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모든 것들은, 즉 '나의 나된 것'은, 처음 강의를 시작할 때 말한 1번처럼, 모든 것이 다 말씀대로 다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주여,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 라고 한 마리아가 얼마나 속시원하고 믿음이 좋은지, 이 마리아가 여자 당회장이 아니고 여자 노회장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리아는 임신을 했다고 해서 특혜라는 것이 전혀 없는데, 이것이 얼마나 멋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마리아에게 특혜를 만든 것은 중세 때 사기꾼들이 그런 짓을 했지 말이다.

마리아는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낳고 키우고 젖을 주고 했는데, "예수님께 젖을 먹이는 자는 복되다" 라고 하면, 그것은 바로 말씀대로 되는 사람이 복되다는 것이다. 아니, 젖을 먹이는 것이 복이 있다고 하면 다들 예수님을 가짜 임신이라도 해야 되는 것이 아닌가? 다시 말해서, 십자가를 믿는 자가 복되다는 것이다.

◈ 주님은 당연히 우리를 버릴 권한도 !!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사용하고 버리고 하는 것을 다 알아서 하시는데, 그러한 권한이 당연히 창조주이신 주님에게 있다는 것을 우리가 우리 자존심 때문에 자꾸만 놓치는 경우가 많은데, 이제 목회를 한 10년 정도 했으면 주께서 그만 사용하시고 그렇게 버리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드리면 되지, 그것을 왜 안 된다고 발버둥을 치고 난리를 피우느냐는 것이다.

우리가 살면서 이런 것이 늘 다가오는데, 단지 본인이 구원을 포기했다고 해서 구원이 안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포기를 하고 싶어도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주께서 포기를 시키지 않으면 말이다. 아무튼 주께서는 계속해서 다루고 계신다는 것이다.

◈ 누가 과연 영적인 존재를 이길 수 있는가?

그렇게 되면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입장에서 볼 때에 원수가 영적인 존재인데, 즉 악마라는 것이다. 아까 요한 계시록 5장을 하면서 했는데, 예수 그리스도만이 승리할 수 있는 적은 악마밖에 없다는 것이다. 아니, 그 어떤 인간이 광야의 세 가지 시험을 다 이기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악마에게 이길 수 없다면 악마의 졸개가 되는 방법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는 것이다. 악마를 이기려고 까불지 말고 말이다.

인간은 악마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는데, 무슨 악마를 이기고 구원을 받는다는 말인가? 그냥 예수님이 오셔서 건져주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악마를 이길 수 있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기에 예수님 이름 외에는 구원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다는 것이다. 성경말씀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행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그런데 우리가 살다가 보면, 우리의 적은 악마가 아니라 이웃집의 아저씨가 될 수 있고, 같은 교회에 다니는 어느 집사님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전부가 다 자기 중심으로 적과 동지를 구분하는데, 그것이 곧 철학이란 것이다.

◈ 철학은 항상 정치성을 띠면서 !!

제가 지금까지 철학을 공부하면서 느낀 것은, 그것은 항상 정치성을 띤다는 것이다. 이것을 철학자들이 자꾸만 숨기려고 하는데, 그런데 김석수 교수는 가끔 상대방에게 화도 내고 자기의 정치성을 유감없이 발휘하던데, 그것이 녹취록에 나오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진짜 성도라면 이런 정치성에서 탈피해야 하는데, 즉 동지와 적이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철학은 학문이기 때문에 반드시 기존의 것을 비판하면서 그것을 딛고 올라서야 하기 때문에, 그래서 칸트가 나오면 칸트를 비판해야 되고, 헤겔이 나오면 헤겔을 비판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나오면 마르크스를 비판해야 하고 말이다. 철학은 계속해서 그렇게 적과 동지를 구성할 수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러한 자체가 바로 악마가 만든 시스템 속이 있는 것인데, 어떻게 철학을 해서 악마의 시스템에서 벗어나 구원을 받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계시가 임해야 구원을 받지 말이다.

여기서 고린도후서 10장 5절과 6절 말씀을 한번 보자.

(고후 10:5)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고후 10:6)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

여기에 보면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라고 되어있는데, 예수님은 자꾸만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벌할 자는 반드시 벌하겠다는 것이다. "야, 근호 너 이리 나와" 라고 해놓고, 그 뒤에 있는 놈을 공격한다는 것이다. 자기 백성은 빼돌리고 나서 그 나머지를 마구 조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할 자와 벌할 자를 그렇게 구별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쌍라이트를 켜고 양쪽에 다 미사일을 발사하기 위해서 하는 것인데, 그런데도 우리는 자기 입장만 생각해서 자기 구원에 집착한다는 말이다.

◈ 자기 구원에 집착하면 항상 시험에 !!

그런데 이렇게 자기 구원에 집착하면, 언제 시험에 드는고 하니, 자기 교통사고를 내서 사람을 죽였다든지 할 때, 그렇데 큰 죄를 지었다고 여길 때, 그리고 아주 부끄러운 일을 했다가 들통이 났을 때, 그리고 교도소 등에 갔을 때, 자기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렸다고 고민을 하게 되는데, 그러나 그것이 주님이 보실 때 너무나 웃기는 일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잘해서, 즉 자기가 잘나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반대로 자기가 잘못한다고 해서 구원에서 탈락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왜 자기의 잘못이나 자기의 죄 때문에 주님의 일을 막혔다고 여기는가? 어떤 면에서는 주님이 일부러 그런 환경을 조성하는 경우도 있는데, 사실 그런 환경을 주시고 말이다.

우리는 "아, 주님 저 때문에 일이, 죄송합니다" 라고 하면, "야야, 비켜라 비켜. 너 때문에 벌할 놈이 안 보인단 말이야. 지금 주님은 불신자에게 벌을 주려고 하는데, 자기는 구원을 받아놓고는, 그 앞에서 얼쩡거린다는 것이다. 사실 주님이 시키는 데로 거기서 비키는 것이 바로 '자기 부인' 인데, 이게 말이 쉽지, 실상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자책감은 적과 동지로 구별하게 !!

자기 부인은 자기 반성이 아닌데, 자기 품위나 자기 위신에 대해서 너무 깊이 생각하는 것도, 그것도 역시 철학의 정치성처럼 적과 동지로 구분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시험을 우리가 통과하게 되면, 그것은 마치 동해안 영덕에서 부는 시원한 바닷바람과도 같다는 것이다. (웬 영덕?) 거기에 가니 바닷바람이 오라고 안 해도 그냥 저절로 시원한 불더라는 것이다.

이렇게 스스로 자기 자책감에 빠져버리면, 주님의 일을 자기 중심으로 여겨서 적과 동지로 구별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철학에서는 이런 적과 동지의 구별을 위해서 윤리를 동원하게 되는데, 그렇게 윤리를 적용시키게 되면, "이렇게 하면 나쁜 놈이고, 저렇게 하면 좋은 놈이다" 라고 구분하는 일을 하게 되는데,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를 말이다. 그것이 곧 철학이란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 48페이지를 보자.

** 야곱은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과 싸움을 벌이게 된다. 야곱은 지금까지 자기가 시도했던 방법을 사용한다. 그러나 결국 그의 잘못된 싸움의 방법으로 말미암아 자기를 찾아온 하나님마저 이기려고 덤벼든 꼴이 되고 말았다. 즉 야곱은 자기가 위치해 있는 자리가 바로 하나님의 원수가 서 있는 자리임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은 자기를 떠나려 한다. 야곱은 애걸복걸한다, 그는 자기 육의 본질을 알았다. 그러므로 자신의 육적인 힘을 부인하고 자기 죄를 회개하게 되었다.

(호 12:3) 야곱은 태에서 그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장년에 하나님과 힘을 겨루되
(호 12:4)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저를 만나셨고 거기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

이것은 무엇을 보여주는가? 야곱은 자기가 적이라고 생각한 자가 적이 아니라, 오히려 그분이 자기를 구원해주고 축복해줄 구세주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동안 이것을 자기의 야곱적인 인식 때문에 몰랐다는 것이다. 야곱이 드디어 이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 잘못된 축복관 때문에 !!

이러한 경우를 두고서 사도바울이 무엇이라고 했는고 하니, 자기가 잘못된 축복관을 갖는 것 때문에, 예수님을 악마처럼 여기게 되었다고 했는데, 그것이 바로 고린도 교회의 큰 실수였다는 것이다. 진짜 사도를 알아보지 못하고, 진짜 시도는 마귀의 종으로 간주하고, 양의 탈을 쓴 이리는, 즉 악마의 종들을 주의 종으로 간주했다는 것이다.

지금 대구의 어느 교회에서는 당회장 목사를 마귀의 종이라고 욕을 하면서도 주의 종이라고 인정하고 있으니, 만약에 도둑놈이라면 경찰에 신고하면 되는데, 그런데도 그들은 그를 '도둑님' 이라고 부르고 있다는 것이다. 웃기게도 "도둑님, 제발 나가주세요" 라고 하면서 말이다. 아니, 어떻게 도둑놈을 두고 도둑님이라고 부르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아마 그들에게 천사를 보내면 도둑님이 아니라 도둑놈이라고 하지 싶다는 것이다.

◈ 야곱에게 생명의 세계는?

아무튼 야곱이 왜 형과 싸웠는가? 죽음을 이기지 못해서 그런데, 즉 자기가 죽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야곱을 축복한 것은, 이 '죽음' 이라는 경계선을 훌쩍 뛰어넘어서, "사나 죽으나 너는 나의 것이다" 라고 하는, 죽음이 더 이상 야곱을 위협하지 못하고 생명의 세계를 소개하는 일을 감당토록 했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야곱은, 이 생명의 세계가 자기를 위한 세계가 아니라 자기에게 일을 시키는 세계라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생명의 세계는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죽어서 좋은 곳에 가는 세계가 아니라, 자기에게 생명의 주되심을 증거하라고 명령이 하달되는, 바로 그 주체자가 있는 세계라는 것이다. 죽지 않고 오래 사는 세계가 아니라 말이다. 만약에 그렇다면 선악과를 따먹고 생명나무 열매를 또 다시 따먹으면 되지 말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난 뒤에 생명나무의 열매를 허락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바로 오래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가 담겨있는 인생이, 곧 그것이 바로 그 사람이 살았던 죽었던 그것에 상관없이 생명의 세계라는 것이다. 그래서 야곱은 그곳 이름을 자기가 죽었다가 살았다고 해서, 즉 자기의 생명이 보존되었다고 해서 '브니엘' 이라고 불렀다는 말이다.

(창 32:30) 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오늘날 성도에게도 이런 일들이 야곱처럼 그대로 재현되면서 주어지는데, 그래서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실 때는 어떻게 오시는고 하니, 그렇게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필과 함께, 우리에게 할 일을 주신다는 것이다. 사명을 말이다.

◈ 성도 - 시키는 대로 살자 !!

그렇다면 성도가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한 마디로 이야기하라면, 이것을 제가 '말씀의 조약돌'에서 간단하게, "시키는 대로 살자" 라고 했는데, 이것뿐이란 것이다. 그냥 "가라고 하면 가고, 오라고 하면 오고, 까라고 하면 까자" 라는 것이다.

이렇게 시키는 대로 살면 되는데, 그런데 우리가 평소에 이런 것을 잊어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주님이 시키는 대로 살지 않고 자기가 거룩해지는 방향으로 살아가려고 한다는 것이다. 거룩해야 복을 받고 자기의 소박한 소망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말이다.

이렇게 우리가 자꾸만 자기를 꾸미고 장식하고 자기를 보다 아름답게 하려고 살다보니, 정작 주님이 시키는 대로 살아야 하는 것이 정작 자기를 꾸미고 화려하게 살고 싶은 마음 때문에 가려지고 무시당한다는 것이다. 온갖 고민과 걱정은 혼자서 다 해놓고, 나중에 결과를 보면 자기가 고민한대로 되지 않고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결과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 강단에서의 로맨스와 헛다리 !!

제가 이런 예를 몇 번이나 들었는데, 이 목회자는 예배시간 1시간 전에 설교를 다 요약하고 암기해서 설교하는 그런 스타일인데, 그런데 그만 예배시간 1시간 전에 전화가 와서 상담을 한다고 그만 주일 설교준비를 다 망쳐놓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설교를 시간 땜질하는 식으로 대충하고 내려왔는데, 그런데 교인들이 설교가 최고라고 하면서 은혜를 받았다고 난리라는 것이다. 자기는 그야말로 죽을 쑤고 내려왔는데, 그런데 주께서 새로움을 주게 되니, 듣는 사람들은 그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자기는 평소에 설교를 준비한 만큼 은혜를 주신다고 여겨서 그렇게 철저하게 준비하고 또 준비했는데, 그런데 주님은 그런 방식을 채택하지 않고, "니가 성의를 다하든지 말든지 나는 내 방식으로 구원할 자를 챙긴다" 라고 나오니, 그때 우리는 뭐라고 해야 하겠는가? 그동안 우리의 노력과 경건으로 교인들이 은혜를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주께서 알아서 은혜를 베풀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의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목회자는 또 통밥을 굴리는데, "아하, 준비를 하지 않으면 되는구나" 라고 말이다. 준비를 하나 하지 않으나 주님은 자기 마음대로 은혜를 주시는데, 굳이 힘들게 준비는 왜 하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설교준비도 하지 않고 설교를 하니, 은혜를 받았다는 교인조차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 49페이지를 보자.

**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는 언약의 법칙은 야곱의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통해서 실현에 옮겨진다. 그리고 이 이스라엘의 섬김과 희생의 정신으로 함 족속을 정복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요셉이다.

◈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는 법칙 !!

지금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는 언약의 법칙을 들은 사람들이 누구인고 하니까, 리브가, 이삭, 야곱, 에서, 이렇게 4명인데, 그런데 이 4명중에서 아무도 이 해답을 모른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 4명을 통해서 이루어지지도 않고 말이다. 그런데 난데없이 요셉이 통해서 이것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여러 번 보았지만, 여기서 다시 창세기 27장 29절을 보자.

(창 27:29)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여기에 나오는,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는다" 라고 하는 메시야적인 기능을 이야기하기 이전에, 뭔가 이런 메시야적인 기능을 하려면 조건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먼저 '주'가 되어야 하고, 이렇게 주가 되려면 리브가가 받은 계시대로 '어린 자'가 되는 운명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니 말이다. 그러니 고난받음이 있어야 주가 되고, 그 다음에는 사람들이 주가 되는 자를 보고 놀라면서 완전히 역전이 되면서 섬긴다는 것이다.

◈ 아니, 어떻게 '형제들'이 !!

그런데 지금 제가 이야기하고 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 지금 29절의 이 장면은 이삭이 야곱을 보고 축복하는 것인데, 여기에서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라는 것이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야곱은 쌍둥이로서 형이 '에서' 혼자밖에는 없는데 어떻게 '형제들' 이라고 복수가 되느냐는 것이다. 둘이 같이 말하면 몰라도 말이다. 그러나 이 본문은 그런 것이 아니라 분명히 야곱은 제외되어있는 상태라는 것이다.

◈ 이 예언은 요셉에 의해서 !!

그런데 놀랍게도 이 예언은 요셉에 의해서 이루어지는데, 하지만 여기에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렇게 요셉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해서 '단회성'으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나중에 에서의 후손들이 이루는 에돔 나라와 야곱의 후손들로 이루어지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서로의 본질로서 굳혀진다는 것이다.

이런 것을 하나하나 분석해 들어가면 성경이 결코 만만한 책이 아니라는 것이다. 굉장하게 복잡하고 머리가 훤히 다 벗겨지는 책이라는 말이다. 물론 이런 골치가 아픈 것은 목회자 혼자서만 감당하면 되고, 교인들은 살아가기에도 복잡하니 간단하게 설교를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고 좀 어려운 것을 원하는 교인들도 있고 말이다.

제가 설교를 하다보면 어떤 분은 다음과 같이 불만을 토로하는데, "목사님, 그렇게 좀 뛰어넘지 말고 순서대로 이야기를 좀 해주세요" 라고 말이다. 하지만 복잡하고 어려운 것을 싫어하는 다른 사람들을 때문에 그렇게 하기가 좀 곤란하다는 것이다. 즉 연약한 자들을 배려해서 결론만 이야기하고 넘어간다는 것이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지식장난(?)이 되는 수가 있다는 것이다.

◈ 불붙는 광주는 현재 진행형 !!

이번에 광주강의를 하면서, 그것이 특강이었는데 처음에 약속하기는 우리가 어떤 시스템 속에서 살아가는지, 그것을 현실화하기 때문에 '제국' 이라는 무지무지하게 어려운 책과, 그리고 막스베버가 지은 '지배의 사회' 라는 관료주의 역사에 대한 것을 다룬 것인데, 옛날 초창기와 봉건시대와 오늘날 관료주의는 어떤 카리스마를 사회 속에 발휘하고 있는지 말이다.

그래도 특강을 해달라고 부탁을 받은 터라서, 위의 두 가지 책의 내용을 주된 테마로 해서 여러 가지 준비를 해서 열심히 달려갔는데, 그런데 막상 도착해서 강의를 하려고 하니, 특강을 요청하고 듣고자 한 사람들이 그만 사정상 참석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요즘 광주강의에 지난번에는 25명이나 참석하고 그 열기가 보통 뜨거운 것이 아닌데, 그래서 특강을 준비된 것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거기서 존 로크 이야기를 대신하게 되었고, 또 그것을 우리교회에서 오후예배시간에도 설교했는데, 그런데 몇 몇 사람들이 졸아서 그냥 끝내버렸다는 것이다. 계속해봐야 앞의 설교를 잊어버리니 또 반복하며 설교시간이 길어지니 말이다.

◈ 여보, 설교가 영화 '괴물' 같아요 !!

또 이것을 제 집사람에게 그냥 지나가지 못하고, 설교가 왜 마치 영화 괴물처럼(?) 그냥 마치느냐고 한 잔소리를 들었는데, 설교자의 속사정도 모르면서 말이다. 중요한 포인트를 놓치지 않게 위해서는 교인들을 그렇게 배려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아무튼 하나님은 세상적인 왕국을 원하지 않는데, 즉 하나님은 이미 인간적인 왕국을 만들어놓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사야의 자기 공로를 대속해주는 그 임금님으로서, 즉 오늘날 이 세상에서 잘난 체 하면서 자기가 신이 되는 그런 상태와 대조해서 말이다. 제가 그렇게 설교를 했다는 것이다.

◈ 창27:29 - 요셉 이후의 이스라엘까지도 !!

아무튼 이렇게 단회적인 것이 아닌데, 그러니 우리는 "아, 맞아. 요셉에 대해서 이루어졌지" 라고 하면 안 되고, 그렇게 해서 창세기 27장 29절이 제대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이 본문을 설명하려면 "요셉에게서 이렇습니다" 라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그 다음에 이 본문을 대할 때는 요셉 이후에 이스라엘에서 어떻게 말씀이 살아서 역사하는지가 설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본문을 10번을 설교해도, 이미 들은 사람에게는 계속해서 추가적인 정보가 계속해서 투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뒤에는 아모스나 호세아 이야기가 나오지만, 그러나 처음에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요셉 이야기밖에는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계속해서 설교가 업그레이드가 되어야 하는데, 말씀 자체가 그 엄청난 양을 모두 품고 있기 때문에 말이다. 그런데 시간 관계상 이런 것들을 이야기를 다 못하니, 어떤 경우에는 요셉 이야기에서 그치고, 또 더 나가기도 하고 말이다.

◈ 복 받은 자 - 복과 저주를 주는 중심선에 !!

아무튼 이 축복과 저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어야 하는데, 이렇게 축복을 받았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본인이 복을 받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본인이 복과 저주를 주는 중심선에 서 있는 사람이 되었다고 해서, 그것을 두고 복 받은 사람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성도가 복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자기가 개인적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로 인해서 축복과 저주를 가늠하는 기준잣대로서, 그렇게 지금 우리가 2006년 9월에 존재해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모든 것이 말씀대로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짓밟고 무시하지 말라는 것이다.

주께서 피로 값 주고 사신 몸이고 지금도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시는데, 그런데 우리는 스스로 자기가 기도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자포자기하면 그것이 바로 가롯유다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갈수록 믿는 자가 없는데, 그때마다 성도라고 하면서도 자꾸 좌절을 하는데, 결코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성도라면 말이다.

여기서 교재 49페이지를 보자.

** 이제부터 전쟁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전쟁이었다. 그래서 이름도 이스라엘로 바뀐다. 하나님과 인간을 이긴 이름을 가지는데, 이것은 곧 야곱 안에서 일하실 하나님의 이름이요, 하나님의 사명이 되었다.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는 언약의 법칙은 야곱의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통해서 실현에 옮겨진다.

◈ 어린 자는 결국 예수님 !!

여기 나오는 '어린 자'는 결국 예수님인데,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예수님이 추가되어야만 다 끝나는데, 마치 24장로들이 자기 면류관을 어린양 보좌에 던지듯이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소위 야곱과 같이 자칭 '큰 자' 라고 자처하는 인간들 속에 어린 자의 모습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렇게 남을 덮치고 남을 삼킴으로서 더욱 더 큰 자가 되려는, 즉 자기를 확대하는, 그런 자아 증식을 시도하는 심보들이 우글거리는 세상 속에서 예수님은 한없이 자기를 서서히 이 땅에서 사라지게 하는 존재로 보이게 한다는 것이다. 물론 예수님 본인이 할 것은 다하고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 49페이지를 보자.

** 처음에 요셉은 자기가 뭔가 특별한 사명을 입게 될 것임을 꿈을 통해서 알게 된다. 그런데 그 꿈을 성취하기 위해서 자기가 아버지와 형제들의 희생물이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는 성실했고 유혹까지 물리치면서 바르게 살았지만, 날이 갈수록 자기 신세가 초라해지고 오히려 주위 사람들은 자기로 인해 복을 받게 된다.

요셉은 자기가 특별한 사명을 입게된다는 것을 꿈을 통해서 알기는 알지만, 그러나 본인이 꾼 꿈의 해석에 대해서 본인도 사실 모른다는 것이다. 다만 하나님이 사용한다는 것은 알지만, 그러나 자기가 어떻게 사용될지는 모른다는 것이다.

◈ 우리의 꿈대로 버티고자 할 때는?

그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인데, 우리 속에 성령이 있다는 것은 알지만, 그 성령이 우리를 어디로 데리고 갈지는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시키는 데로 살아야지, 만약 우리의 꿈대로 버티고자 할 때는 주님께 반항하는 꼴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여기에 '초라해지고' 라는 말이 있는데, 사실은 이게 좀 어폐가 있고, 이것보다는 '절망적' 이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는 것이다. 결국은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네가 꾼 꿈은 너희 희망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요셉의 꿈을 철저하게 잘라내는 작업을 하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목사나 선교 단체의 간사들이 무엇이라고 하는가? 꿈을 이야기하기만 하면 요셉을 들고 나와서 들먹이고는 하는데, 즉 꿈을 꾸면 그 꿈대로, 즉 자기의 희망대로 이루어진다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와 정반대라는 것이다. - 보이스 비 에비셔서 !

◈ 아브라함도 요셉도 몰라 !!

다시 요셉이 꾼 꿈으로 가서, 아무튼 그 방식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잘라내는 쪽으로 하나님은 강하게 요셉에게 작용한다는 것인데, 그러니 이것은 요셉에게는 절망에 이르게 된다는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요셉은 주께서 자기가 꾼 꿈을 이루어지게 한다는 사실은 알지만, 그러나 그 방법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캄캄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아브라함과 같은 경우인데, 아브라함은 하늘의 별과 같이 많은 자손을 남긴다는 계시는 받았지만, 그러나 그 계시를 이루는 방법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는데, 오히려 아브라함이 평소 생각한 것과는 철저하게 반대되는 방식으로, 즉 대치가 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니 아브라함은 반발을 하는데, 자기가 지금 자식이 없기 때문에 아내를 누이동생이라고 속이고, 자식을 낳아야 되니 말이다. 그리고 이스마엘을 종이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우기는데, 이렇게 버티고 버티어보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아브라함을 자꾸만 피해간다는 것이다. 이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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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739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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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