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20050517 부산강의-스피노자
Re..20050517 부산강의-스피노자
이름 : 한윤범(IP:)
20050517 부산강의-스피노자
(강의:이근호 목사)
시간 1분전인데 시작합시다.
오늘은 141페이지에 나오는 스피노자의 신학이라 할까요, 철학이라 할까, 스피노자에 대해서 그 사람의 의견을 한번 들어봐야 하는데. 데카르트나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이렇게 이야기 나오면 특히 목사님들은 칼빈, 루터 이렇게 나오면 약간 흥미를 느끼지만,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데카르트 이렇게 나오면, 구원도 못 받은 인간들이 한 소리가 뭐 그렇게 중요하냐? 여러분들이 생각하실 건데,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신이 우리 개개인의 행동과 삶에 어떤 연관성을 갖고 있느냐하는 거기에 대해서 아주 몰두하고 탐구한 사람들이 이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개개인 생활에 대해서 어떻게 연관을 맺고 관여 하느냐 이 말입니다. 신이 존재하느냐, 존재 안 하느냐는 중세 때 관심사였고, 데카르트나 라이프니츠 이런 사람들은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일단 인정하고 난 뒤에 그 존재하면 뭐 합니까? 존재하신 분이 뭔가 실제로 우리 생활에 일일이 관여해야 되지 않습니까?
예를 들면 성경에 나오는 우리의 발걸음을 세신다, 우리 머리카락도 세신다 할 때 그냥 목사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발걸음을 세십니다. 우리의 머리카락을 세십니다. 다 지켜보고 계십니다. 이러고 설교 한 마디하면 다 끝날 문제지만, 이 철학자들은 어떻게 세시느냐, 어떻게 관찰하시느냐 우리를 어떻게 지켜보시느냐? 그것까지 관여하게 되는 겁니다.
그림으로 그리면 이렇습니다. 따져보면 사실은 일반 목사들이 오히려 무책임하다고 볼 수 있지요. 설교자들이. 무책임하죠. 어떻게 인도하십니까? 물으면, 어허, 성경대로 믿으면 그만이지, 왜 말이 많아. 이렇게 슬쩍 책임 회피해 버리고.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일일이 관여해서 이렇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라고 상세하게 이야기하면, 그건 성경적이 아니라고 해버리고.
상당히 비겁하죠. 비겁하고 나쁘게 말하면 사기성이 농후한, 사기성이 깔려 있습니다. 모르면 모른다 하면 되는데 모르면서 그냥 하나님께서 발걸음을 세십니다. 어떻게 세십니까? 그거는 각자 믿음대로 하세요. 이런 식으로 그 자리를 피해버리는 그런 경향이 있는데 그렇게 해서는 안 되겠지요. 그래서 데카르트 같은 경우에 이 사람은 어떻게 이야기했는가?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람에게는 두 개의 실체가 한꺼번에 있다는 겁니다. 하나는 '물질'이라는 실체가 있고, 실제로 있는 거예요. 상상력으로 지어낸 것이 아니고 실제로 물질, 지난 시간엔 살과 뼈지요.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지요. 구약의 바사르 개념, 살과 뼈가 있고. 이게 실제로 있고. 또 하나 실체가 뭐냐 하면, '정신'이라는 실체가 있다는 겁니다.
기계하고 원동기, 자동차 엔진하고 고물차, 폐차하고 인간의 물질하고 뭔가 차이 나는 게 있어야 될 것 아닙니까? 폐차된 것, 골목에 먼지 쌓여서 가만있지요. 그것하고 우리가 살점과 뼈다귀로 가만있다고 하면, 우리는 시체잖아요. 죽은 자는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그냥 시체로 보지요. 살아있다는 것은 살과 뼈가 있다고 해서 살아있다고 볼 수 없고, 다른 실체가 있을 때 살아있는데, 이게 정신이라는 거예요.
정신인데 물질의 특징이 뭐냐 하면, 이 특징은 따닥따닥 붙어있다는 특징이 있다는 겁니다. 이걸 연장이라고 합니다. Extension. 연장이라 하는 것은 쭉쭉 늘어난다, 확산된다, 공간적으로 지리적으로 퍼질 수 있다. 그걸 연장이라고 합니다. 따닥따닥 떨어지지 않고 붙어있는 특성을 갖고 있다. 물질은. 수제비하는 밀가루에다 또 하나 밀가루를 엎어버리면 둘이 합쳐질 수 있는 성질이 있지요.
그런데 서 목사님 생각과 내 생각 합쳐진다고 합쳐집니까? 안 합쳐지지요. 그죠. 정신은 합쳐지질 않잖아요. 물질은 합쳐지지만, 쇳덩어리에다 쇳덩어리를 녹여서 붙이지 큰 쇳덩어리 되잖아요. 따닥따닥 붙음이 가능하다. 붙일 수 있다. 그래서 요새 성형수술 같은 것 할 수 잇잖아요. 쌍꺼풀 수술 할 수 있잖아요. 엉덩이 살 떼어서 여기 살점 옮길 수 있고 이게 물질이기 때문에 그런 가능성이 있는 겁니다.
로케트를 만드는데 로케트를 만들기 위해서 부속품과 여러 가지 겉모양의 쇳덩어리 같은 것은 어디서 옵니까? 각자 하청업체에서 대구, 부산, 여러 군데 만들어서 그걸 조립하면 되잖아요. 그러니까 연장이 따닥따닥 붙음이 가능한, 이게 물질의 특징이라면,
데카르트가 이야기하는 정신의 특징은 뭐냐 하면, 사유한다. 생각. 특히 사유가 가능한 것은 특별히 데카르트나 뒤에 있는 철학자들이 사유할 때 생각할 때 사유라 하는 것은 생각을 말하거든요. 생각이 가능하죠. 그런데 폐차는 생각을 못 합니다. 폐차야, 미안하다. 좀 옮겨줘. 해도 폐차는 가만있어요. 폐차는 생각을 못 하니까. 죽은 사람보고, 아저씨, 죽으신 것 아는데 오래 계시면 안 됩니다. 벌떡 일어나 가세요. 그러면 안 되지요.
살아있는 실체. 정신, 실체가 있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생각을 하고 산 사람 보고, 좀 옮겨 주시겠습니까? 예. 옮겨가죠. 떠민 게 아니잖아요. 이게 어디서 우리 자리에. 떠밀지 않았는데 말로, 옮겨주시겠습니까? 옮겨간다 말이죠. 이렇게 된다 말이죠.
그러니까 물질을 구성하는 것은 현대과학에서는 세포, 또는 106가지의 원소, 원자. 금, 은, 동, 철, 금속으로 되어 있겠지요. 정신의 사유에 대해서 철학자들이 관심 있게 본 것은 '기억'입니다. 인간이 기억하더라 이 말이죠. 희로애락. 기쁘고, 성내고, 안타깝고, 즐겁고. 희로애락의 모든 원인이 어디 있느냐 하면, 과거에 기억한 것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일어나요.
어떤 사람이 나보고 욕을 하면 기분 나쁘죠. 과거에 나는 욕을 안 얻어먹었다는 것이 기본으로 깔려 있는데 생뚱맞게 욕을 해버리니까 과거에 기억한 것을 바탕으로 생각해서 당신, 욕했지. 이렇게 일어나는 겁니다. 즐겁다는 게 뭡니까? 내가 과거에 의해서 경험된 것이 축적됐는데, 과거에 예상한 것이 딱 아다리 되어서 맞아 떨어질 때 즐겁잖아요.
목사의 즐거움은 뭘까요? 오늘 김 집사, 교회 출석 나온다 하는데 딱 그만 11시 5분전에 나올 때 오늘도 가뿐하게 설교가 되면서 오늘 또 설교 되겠네. 역시 어제 기도한 효험을 봤구먼. 효과 있다. 의인의 기도는 간구하는 능력이 있어.
그런데 언제 희로애락입니까? 언제 슬픕니까? 토요일 날 열나게 두 시간 동안 김 집사를 위해 기도했는데, 참석을 예배시간까지 봐줘. 늦을 수 있으니까. 설교시간까지 참석 안하면 기분 좀 나쁘죠. 그런데 설교 시작됐으니까 포기하죠. 언제 기분 나쁘냐 하면, 꼭 11시 예배 전에 휴대폰으로 못 온다고 연락 올 때. 그만 성질나서 잡치잖아요.
희로애락이 어디서 생깁니까? 목사가 죽은 시체 같으면 희로애락이 없잖아요. 죽은 놈 뭐 만진다고 찔러봐야 소용없잖아요. 그런데 뭐 때문에 그렇습니까? 기억을 하는 거예요. 무엇을 기억하느냐 하면, 자기 행동을 기억하죠. 그 기억은 바로 철학자에 의하면 언어로 생깁니다.
언어부분으로 나가면 이게 신학과 연관되죠. 뭐와 연관 됩니까? 계시, 다른 말로 하면 말씀이 된다 이 말이죠. 사람이 어떤 실체가 있는데 그 실체는 생각하는 실체고, 그 생각의 특징은 뭘 한다? 항상 생각한 것은 날아가 버리는 것이 아니고, 늘 기억하고 있는데, 그 기억의 유통은 뭐로 된다? 계시, 다른 말로 언어, 말씀이 된다.
따라서 하나님께선 이미 이걸 정신을 기정사실로 해 놓고,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뭘 줬다? 말씀을 주어서 우리가 기억된 것을 말씀을 받음으로서 우리가 뭘 받게 한다? 구원되게 한다는 것이, 이것이 철학가들이 성경을 볼 때 성경의 그 밑바탕에 형성되는 틀, 구원의 틀을 인간의 정신과 실체로 보는 거예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까 설교자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신다. 발걸음도 세신다. 이러면 그만이지만 철학가들은 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그렇게 말씀을 주시는가? 인간이 어떤 구조로 되어 있기에 그 말씀을 줘서 되는가? 바로 인간은 이 두 가지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 구조를 따라가 보니까 언어가 있고, 언어와 언어의 만남, 신의 언어와 인간의 언어이해력과 만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구원을 이루신다.
그러니까 신학은 이 안에 이것이 계시와 언어에서 구원, 이게 신학이라면, 철학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신학보다 더 깊이 들어가겠지요. 맞지요? 신학은 하나님께서 말씀 주십니다. 이렇게 끝나지만, 철학은 정신과 물질, 정신과 물질로 해서 이것으로 계시, 성경을 통해서 신을 발견하는 게 아니고, 그럴 필요조차 없다는 거예요.
정신과 물질, 여기에서 신을 발견하는데 신은 어디서 만납니까? 물질로 만나는 건 아니죠. 영적 존재는 천사나 하나님은 뭐가 없습니까? 물질이 없어요. 이걸 그들은 뭐로 보느냐? 피조 되지 않았다고 보는 겁니다. 하나님은 피조하시는 분이지 피조 되시는 분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뭐는 통하겠다? 정신은 통하니까 이 정신을 가지고 그들은 뭐라 하느냐?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합니다. 이게 창세기 1장 26절에 보면, 우리의 형상대로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했으니까 이게 창세기 2장에 상세히 들어가면, 흙이 있었는데 흙에서 '네페쉬'라 했지요. 지난 시간에.
숨을 내쉬면 이것이 뭐가 된다? 사람이 되지요. 그래서 이 철학자들은 봐라! 맞잖아. 흙이라 하는 것은 물질이고, 숨을 내쉰다 하는 것은 정신이니까 인간은 죽으면 다시 흙으로 돌아가고, 정신은 다시 하나님 품으로 돌아가고. 그러니까 인간은 물질과 정신으로 되어 있는 이 철학적 구조가 합당하지 않느냐? 라고 이렇게 자신만만하게 주장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철학자들은 이렇게 주장했는데 여기 하나님이 인도하신다, 발걸음도 세신다고 성경적대로 이야기했던 설교자나 신학자들이 이런 철학자들의 이런 작업을 보면서 동의를 하게 되겠지요. 동조를 하게 되겠지요. 뭐냐 하면, 성경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신학자도 하지만 뭐도 가능하다? 누구들도 신학이 가능하다? 철학자들이 신학이 가능한데, 가능할 정도가 아니라 더 깊이 가능하다. 더 월등하게 낫다. 철학자들이 신학자보다 성경을 연구한 헬라어, 히브리어, 원어연구보다도.
왜냐하면, 원어라 하는 것은 원어 연구해봤자 이 계시는 인간의 기억력과 정신력 바탕 위에서 시작하거든요. 원어라 해봐야 헬라어, 히브리어 백날 해봐야 결국 이건 어디에 모이느냐 하면, 기호학에 빠져버리는, 기호학의 공시적, 통시적으로 따져버리면, 원어 자체가 없어져 버립니다.
원어 자체가 없어지고, 그 시대에 약조된 문법적 인간적인 구조지요. 구조에서 이것이 나왔기 때문에 인간들이 발성할 때 목구조 연구하고 모음과 자음의 만남. 이런 것 하면 모음과 자음의 만남으로 이렇게 전체 인류의 언어를 한번 정리해버리면 거기에 헬라어, 히브리어 할 것도 없이 한국어, 일본어 할 것 없이 전부다 음성, 발성, 신체의 구조에 의해서 떨어지는 거고.
의미라 하는 것은 히브리어, 헬라어 의미가 없고, 그 당시 셈족이 살았던 사회적인 구조가 문화적인 형태와 관습이 의미를 이렇게 제공해 주는 것이죠. 타고난 전통 같은 게. 거기에 헬라어, 히브리어 한다는 것은 사실은 이거는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일 가능성이 많아요.
무슨 말이냐 하면, 원어가 없다는 말은 뭐냐? 그 당시 원어가 없다는 말이 아니고, 지금 우리가 원어라 하는 것은 지금 이 시대에 이 성경 말씀이 현재 있는 문화구조 속에서 어떻게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는가? 의미생성론이라 하는데 그것이 오늘날에 우리에게 원어가 되는 겁니다. 한국말 개역성경이 원어가 되는 거죠.
그렇다면 방금 일단 데카르트 이야기했는데 제가 여기서 멈추고, 과연 데카르트 주장이 성경적으로 맞습니까? 진리입니까? 여러분 생각에 어때요? 이게 맞는다고 생각하십니까? 이게 만약에 맞는다고 한다면, 신학보다도 우리는 철학을 통해서도 구원이 가능해요.
왜냐하면 철학자들은 성경을 참고할 뿐이지 성경을 믿는 사람이 이렇게 따져보면 이것이 인간의 존재 아닙니까? 존재성에서 따져보면 신까지 신의 존재가 확인되니까 하나님의 형상론까지 막 튀어나왔으니까 성경을 볼 필요가 없잖아요. 성경은 참고할 뿐이지, 성경에 얽매일 필요 없잖아요. 이게 어떻게 여러분 보시기에 이러한 철학자 주장이 맞는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마 기존의 모든 한국 신학교수들이나 목사들은 맞는다고 생각할 거예요.
틀렸어요. 왜 틀렸느냐 하면, 바로 이러한 사고방식이 유대인, 유대교의 사고방식입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사고방식이에요. 전부다. 이들이 결국 스스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자부했던 그들이 하나님의 형상 되시는 분을 죽여 버렸지요.
이건 곧 무엇을 의미합니까? 둘 중에 하나의 하나님 형상은 엉터리라는 말이죠.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다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형상되시는 예수님을 죽임으로 '당신은 틀려!' 하고 죽여 버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진짜 알려주고자 하는 하나님의 형상이 소위 자칭해서 하나님의 형상론을 맞는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배격 당했다면, 둘 중에 하나는 엉터리다 말이죠. 둘 중에 우리는 어느 것을 채택해야 되느냐 하는 그 문제에 있습니다.
결국 이것은 뭐냐 하면, 십자가의 비극으로부터 인간과 하나님과의 모든 것을 새로 해석해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 부분에 하나님의 말씀이 와서 우리가 그 말씀을 독해력으로 말씀의 언어, 기억력이 있으니까 말씀의 해석력을 동의해서 구원받는다. 라고 한다면, 이것은 바로 유대교인들의 유대교고, 이걸 흔히 말하는 종교지요.
종교인데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해석하게 되면, 십자가로 해석하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구원용이 아니고, 우리를 배척용이죠. 니, 구원받지 말고 밀어제쳐 버리는 거예요. 구원하지 마. 너 같은 인간은 구원받을 필요 없어. 밀어제쳐버린다 말이죠. 십자가는 그래요.
왜냐하면 십자가라 하는 것은, 고린도전서의 의미가 뭐냐? 어떤 인간의 지혜를 총동원하더라도 십자가는 납득이 안 되게 되어 있는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다 말이죠. 인간의 모든 지혜를 총동원하더라도.
그러니까 그 지혜 중에는 신학도 있을 것이고, 철학도 있을 것이고. 신학과 철학이 아무리 총동원해도 십자가는 이해가능하다, 안 가능하다? 절대로 이해가능하면 안 돼요. 만약에 이런 식으로 십자가 이해가능하면, 그 십자가 엉터리입니다. 그 사람은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또 오면 또 십자가 못 박아 죽일 사람이에요.
요새 대구에 실내체육관에 박옥수가 와서 난리라. 온 거리마다 도배를 했어요. 도시 자체를 도배를 했어요. 박옥수 집회에 모이라고. 그러니까 목사 임무 중에 하나가 또 그러한 이단이 나타날 때 그들의 정체를 드러내는 것이 추가된 과제가 되는 겁니다. 박옥수, 저걸 저 이단성을 어떤 식으로 드러내야 되는가?
기존 교회보고 박옥수 이단 소리 못 하지요. 저거들도 이단인데. 이단이 뭐 이단이라고 합니까? 박옥수는 오히려 기존교회가 달려들기를 기다리고 있지요. 왜냐하면 기존교회는 율법시대가 아닌데 십일조 이야기하고 주일성수 이야기하고 두 가지 가지고 장사를 해 먹고 있기 때문에. 그걸 막강하게 공격해 버립니다. 어디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아직도 십일조고 주일성수냐? 조져버리지요. 그쪽에선 할 말이 없단 말이죠.
그러면서 박옥수는 뭡니까? 오직 예수님 피로만 구원받는다. 손댈게 없어요. 너무 복음적이라서. 기껏 기존교단에서 그렇게 나오니까 할 말 없거든요. 기존교단에서 신학자들이 모여서 약점 캐내기 위해서 고생하다가 기껏 하나 박옥수 부스러기 하나 건진 게 뭐냐 하면, 박옥수는 사람은 한번 십자가 피로 구원 받고 난 뒤에는 더 이상 죄 짓는 게 없다. 그거 하나 해서 박옥수는 한 번 회개로 끝나지, 두 번 회개, 세 번째 회개 없다. 이런 식으로 이단이다 하거든요. 이단이 이단이다 해봐야 그건 말이 안 되는 거예요.
박옥수 집단의 문제점의 해결점은 의외로 간단해요. 창세기 3장 22절로 24절에 보면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추방했다. 그걸로 끝나버립니다. 그래서 어제 그런 이야기했지만 여기 4층이죠. 창문 열고 하나님께서 여기 에덴동산이라면 창문 열고 집어던지는 거예요. 이 에덴동산에서 살지 말라고 집어 던지는 거예요.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추방한 이유가 기존교회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한번 겁 줄려고 내보냈다. 이렇게 하거든요. 겁주려고. 니, 죄 지면 무서운 걸 알아. 이건 무서운 거야. 겁 한번 주려고. 번지 점프가 안전한 이유가 뭐가 있습니까? 끈이 있잖아요. 그래서 일종에 죽이는 건 아니고, 끈 매달아서 한번 혼 좀 놔 봐라. 하고 집어넣진 거예요. 그렇게 보는 겁니다.
에덴동산에서 사람을 쫓아낸 것은 생명나무 보호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생명나무 외에는 관심 없어요. 생명나무가 누구냐?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거든요. 잠언서에 나오고 나중에 신약에 나오는데. 예수님, 생명나무의 가치가 훼손되지 않기 위해서 인간을 추방시켜버립니다.
만약에 생명나무를 자격 없는 인간이 따먹게 되면 생명나무의 가치가 주되심이 이 온 우주에 훼손되는 겁니다. 골로새서 1장 16장에 보면, 모든 피조물들은 만들어진 목적이 있어요. 오직 주를 위하여 만들어졌어요. 주로 말미암아 주를 위하여 만들어졌어요.
요즘 우리교회의 화두가 뭐냐 하면, 지옥에 간 사람도 하나님을 찬양합니까? 그것 가지고 며칠째 저한테 질문하고 있어요. 여러 사람이. 찬양이라는 의미가 좋아서 찬양하는 의미도 있지만, 후회하면서 주를 인정하는 곳이 지옥입니다. 후회하면서. 세상에 이런 잘못을. 로마서 1장에 보면, 핑계치 못한다 하잖아요.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대해서 모독해 놓고 지옥 가서는 핑계치 못하는 거예요.
나사로 앞집에 있던 부자가 지옥 가서는 어떻게 됩니까? 지옥 가서 거기서 또 땡깡부립니까? 거기서 지 잘났다 합니까? 후회막급이죠. 오죽 후회했으면 아직 안 죽은 동생들 걱정하겠습니까? 사람이 후회한다는 것은 자기 처지를 이런 처지로 몰아넣은 주도권자를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말을 너무 어렵게 했습니까? 쉽게 이야기하면, 사람이 후회한다는 말은 내 마음대로 안 되는 일도 있었네. 라고 후회하는 거예요. 세상만사가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것도 있었네. 라고 후회하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 안 믿는 사람의 특징이 뭡니까? 세상은 내 마음대로 될 거야. 라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지옥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이 세상이 지옥입니다.
제가 몇 년 전에 대구 동일교회가 아니고 동일교회 근처에 있는 교회인데 굉장히 큰 교회 있어요. 동부교회도 아니고 그것보다 작지만 한 만 명 모이는 그 교회에 초청받아서 강사를 하는데 헌신예배 설교하는데, 제 첫 마디가, 이 세상의 문화는 악마의 문화입니다. 이렇게 시작했어요. 거기서부터 삐지기 시작해서 설교 내내 다 삐졌어요. 나중에 끝나고 나서 저 강사, 누가 불러 왔냐고 난리 났어요.
그때 제 설교한 내용이 뭐냐? 누가복음 23장에 나오는데 뭐냐 하면, 온 지구상에 예수님이 임하는데 특히 강조한 것은, 마음이 생활의 염려로 둔하여져서 예수님이 오신지, 안 오신지 분간이 안돼서 생활의 염려에 거기에 완전히 몰두해서 이 지구상에 누가 오는가? 지금 감을 못 잡고 있다는 그 대목에 제가 치중해서 설교한 거예요.
마지막 때에 그러니까 제가 강조한 것은 흔히 CF에 보면 내 커피 내 마음대로 하는 것 있잖아요. 설탕 조절하고 프리마 조절하는 것처럼.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은, 이 세상은 내 세상 내 마음대로 조종하는 거예요. 그런데 지옥은 뭐냐 하면, 후회하는 이유가 내 팔자 내 마음대로 안 됨을 왜 진작 몰랐느냐 이 말입니다.
그리고 천국 가는 사람도 마찬가지에요. 자기 팔자 자기 마음대로 안됐다는 것을 사전에 눈치 챈 사람이 천국 가는 사람입니다. 모든 것이 발걸음을 인도하는 것이 주님이지, 물론 평소에 24시간 그렇게 생각할 순 없어요. 때로는 원망하고 불평하지만. 그러나 성령께서 함께 있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니가 그렇게 된 것도 니한테 은혜고 니한테 과하다. 이거거든요. 모든 것이 니 인생은 값없이 준 인생인데 니가 왜 그 값을 따지느냐 이 말입니다. 천국이 원래 그런 곳입니다.
천국에 대해선 제일 재미있는 대목이 뭐냐 하면, 포도원비유인데, 아침에 10시에 온 사람도 집어넣고, 12시에 온 사람도 포도원에 집어넣어 일하잖아요. 두 시에 온 사람, 놀고 있던 사람들. 천국은 이와 같다 해서 예수님이 천국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마지막에 품값 계산을 할 때에 예수님께서 요구한 것은 그거에요. 네가 노동한 것에 대해서 계산하지 마라 이 말입니다. 네가 어떻게 일했는가에 대해서 계산하지 마라 이 말입니다. 교회에 보면 꼭 노는 사람이 있어요. 교회 보면 일하는 사람만 일하고 노는 사람은 꼭 노는 거예요. 교회 헌금하는 사람만 헌금하고 헌금 안 하는 사람은 헌금 하나도 안 해요. 꼭 그래요.
그럴 때 일 열심히 하고 헌금 많이 한 사람이 그 교회에 대해서 얼마나 다른 사람에 대해서 불평하겠습니까? 그리고 목회자에 대해서 제일 시험거리가 뭐냐? 목회 노동한 대로 목회의 결실이 별로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거 뭐 우리 노회에 절실하게 느끼고 있잖아요.
그런데 천국의 특징이 뭐냐 하면, 자기 노동한 것에 대해서 따지지 말란 말입니다. 따지면 안 돼요. 나는 몇 시간 일했는데, 그 따지는 곳은 천국이 아니에요. 왜냐? 그렇게 일하게 한 일 자체가 거저주시는 은혜의 일종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것도 은사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내가 남보다 일을 수고 더하게 된 것도 하나님께서 특별한 은혜를 주셔서 수고를 더한 거예요. 그게 천국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지옥의 특징은 뭐냐 하면, 주도권이 자기한테 있기 때문에 내 인생은 내 팔자 내 것이니까 내 마음대로 하겠다. 그런 걸 생각해 볼 때 지옥에서도 찬양까지는 아니지만 적어도 주의 놀라운 능력에 대해서 찬양하지요. 후회막급하면서. 그리고 야, 내 인생 내 마음대로 되는 것도 아니네. 비로소 그때 가서 후회하면서 알고, 천국 가는 사람은 이미 살아있을 때부터 내 인생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다 이것도 주님의 은혜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천국입니다.
그렇게 볼 때 그걸 따지고 볼 때 구원도 뭡니까? 구원도 내 구원 내 마음대로 안 돼요. 그걸 아시는 분이 십자가를 아시는 분입니다. 구원받고자 하는 것이 그것이 죄에요. 이걸 내가 한국교회에 꼭 이야기하고 싶어서 내가 [지옥의 하나님]이란 책을 거의 마무리 되간다는 기쁜 소식이 안 오는데 아마 한 달 내에 올 거예요.
구원받고자 하는 게 죄인데 박옥수는 구원받고자 하는 것을 의로 본 겁니다. 이게 박옥수 이단의 문제점이에요. 구원받는 것이 죄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구원을 저지하십니다. 막으십니다. 창세기 3장 24절에서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추방시켜버렸어요. 뭣 때문에 했다 했습니까? 생명나무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들은 거기서 신앙을 하든 하소연하든 그거는 이미 끝난 이야기에요.
하나님께서 문 열고 에이. 나쁜 놈, 이 에덴동산에서 살지 말아라. 하고 집어던져 놓고 밑에서 내려보니까 너무 심하게 했거든요. 아이, 미안하다. 내가 너무 심하게 했지? 다시 밧줄을 내려서 끌어올려? 그러면 그 행동은 스스로 우리한테 사과하는 셈이 되는 거예요. 그때 너무 심하게 행동했다고. 세상에 그런 하나님이 어디 있습니까?
던져놓고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는 생명나무와 남은 것은 생명나무 밖에 없지요. 생명나무 차원에서 생명나무는 예수님을 상징하니까 예수님과 하나님과 의논해서 저희들을 에덴동산에서 추방한 일이 참 잘한 짓이다. 참 훌륭한 일이다. 라는 것을 우주에 알리기 위한 새로운 조치에 들어가는데 그게 뭐냐 하면, 바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없는 인간 새로 만들어서 이 세상에 집어넣고 그들을 잃어버린 자를 다시 건지는 작업에 나섰습니다. 복잡하지요.
이삭이 아브라함에서 예상되었습니까, 안 되었습니까? 아브라함과 사라가 예상한 것은 이삭이 아니고, 기껏해야 이스마엘인데 그건 예상 못했어요. 예상치도 못한 작업을 생명나무 되시는 예수님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삭이라는 없는데서 생겨났고, 그 인간은 결국 죽은데서 도로 받는 식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날 교인들이 제일 큰 문제점이 뭐냐? 자기를 잃어버린 자로 간주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전적으로 잃어버린 자로 간주를 하지 않습니다. 잘만 하면 또 예수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다. 자꾸 가능성을 약간 일부 갖고 있어요. 전적으로 완전히 잃어버리게 되면, 그 잃어버린 자를 찾아가든 안 찾아가든 누군가 뚜벅뚜벅 발자국 내면서 누군가 와서 목자가 와서 건져 줄 때만 구원이 가능해요.
잃어버린 자가 알아서 일어서서 저희가 알아서 주님이여 어디 계십니까? 구원받고자 합니다. 저요, 저요. 이런 잃어버린 자는 없어요. 이건 아직 자기를 잃어버린 자로 간주를 하지 않는 인간입니다. 마치 바리새인들이 자기가 죄인이야 하면서 자기를 치는 것과 똑같은 행동이에요. 바리새인들이 아무리 나는 죄인입니다. 주의 자비만 필요합니다. 우리 선배들은 우리 신앙의 조상들은 고아와 과부들을 학대했지만 우리는 이제는 그런 죄를 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면서 말씀대로 삽니다. 어떻습니까? 저, 작품 어때요? 저 괜찮은 인간 아닙니까?
이런 식으로 후회할 때, 그때 주님은 술 먹고 있었습니다.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지, 자기를 죄인이라고 여기는 그 잘난 놈을 구원하러 온 게 아니다 말이죠. 완전히 사람들 머리에 완전히 자기가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몰라요. 아무도 몰라요. 아브라함도 몰라. 아무도 몰라요.
하지만 십자가를 통해서 십자가의 예수님의 모질게 달리고 모질게 저주받는 그 모습을 통해서 성령이 임한 사람은 그 십자가의 예수님의 당하심이 실제 우리의 실체다. 우리의 본 모습이 우리도 하나님 앞에 저렇게 당해야 된다. 그걸 마땅하다고 여기죠. 우리는 구원받고자 하니까 주님께서 율법을 앞장세우니까 율법 앞에 당할 재간이 없어요. 율법을 다 지키지 아니하면 누구나 죄인이고, 죄인이면 마땅히 저주를 받아야 된다는 사실을 율법을 통해서 비로소 발견하기 때문에 죄는 지었는데 구원을 받고자 한다는 자기의 은근한 노림수는 통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이 와서 건져줄 때만 건짐 받고 값없이 건짐 받고 그렇게 된 사람의 특징이 뭐냐? 예수님께서 건져주셨습니다. 라는 예수님께만 공로를 돌리는 예수님만 사랑하는 그런 아주 독특한 사람이 등장하지요.
그러니까 지금 이 철학, 데카르트의 방금 철학을 늦게 온 사람은 못 들었습니다만 할 수 없습니다만. 데타르트의 철학은 결국, 다시 한번 할까요? 또 여러분도 다 잊어버렸잖아요. 한 번 더 해도 괜찮지요? 왜냐하면 데카르트의 철학에서 생각하는 것이 모든 인간들의 기본적인 본성이고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이고 모든 종교인들의 특징이 그겁니다.
신께서는 두 개의 실체로 만들었다. 뭘 만들었느냐? 물질을 만들었는데 인간에게는 뭐라고 했습니까? 살과 뼈다귀. 또 하나는 뭐냐 하면, 인간은 뭔가 생각하기 때문에 인간은 뭘 만들었습니까? 정신이 있다. 이 정신을 가지고 그들은 영혼이라 봤고, 이 영혼은 실제로 있는데 이 영혼 속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사람이 기억을 하게 되어있어요. 자기 경험한 것, 체험한 것.
이것도 문제 있다 했지요. 영혼이 동일합니까, 동일하지 않습니까? 저거들 말로는 영혼은 신이 주었기 때문에 동일해야 되는데, 체험을 통한 기억이기 때문에 사람마다 성장과정이 다르고, 가정환경 다르고, 부모가 다르고, 경세사정이 다르고, 처음에 있었던 기억은 다 다르지요. 그러니까 사람마다 영혼이 같다는 말도 또 상반되는 모순이라. 어차피 엉터리니까 뭘 모순해도 괜찮고.
기억을 하고 이 기억에서 나온 것이 뭐라 했느냐 하면, 언어라 했지요. 사람이 기억이 없으면 언어를 못하잖아요. 왜 청각장애자들이 말을 잘 못합니까? 들은 게 있어야 단어와 저 단어와 이 단어 사이에 변별성, 분별성을 가지고 의미가 나오는데, 들은 게 없으니까 '버섯' 이렇게 하면, 저거 물탱크가 버섯인지, 저거 기차가 버섯인지, 버섯이 버섯인지, 건물이 버섯인지, 저 버섯이란 저 음성, 저 발성은 어떤 걸 지칭할 때 버섯이라 하는 걸 들은 게 없기 때문에 의미를 발견할 수 없어요.
아주 무식한 아주 깊은 산골의 할머니들한테 요새 일반뉴스나 신문사설을 봐도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습니다. 내나 한글로 써있고 글자가 한글로 뜨문뜨문 기억, 니은 이렇게 해도 의미를 몰라요. 코스닥하면 닭튀김 종류인 줄 알고 그 코스닥이 뭔 줄 몰라요. 그 변별성 때문에 변별성 알려면 새로운 지식이 정보가 추가되어야 되는데 맨 날 아침에 일어나 감자나 캐고 아는 것도 기억력 떨어져서 다 잊어버리니까 속이 텅텅 비어있으니까 변별성이 떨어지면 대화가 안 되는 거예요. 사투리도 마찬가지에요. 이쪽 사투리하고 저쪽 지방 사투리하고 다르니까 안 되지요. 하여튼 그렇다 하고.
언어가 있을 때 철학자들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 언어의 의미가 있으니까 그 의미를 향하여 하나님께서 계시, 같은 말로 말씀을 줬다는 거지요.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면 이 말씀 가지고 이 언어를 가지고 뭘 안다? 우리 말씀을 주신 신의 존재함을 알고, 그 신을 영화롭게 하면 구원을 받는다. 라는 식으로 이야기했는데,
이렇게 했던 사람들이 그들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이뤘다는 사람이 진짜 하나님의 형상되신 예수님을 죽여 버렸으니까 그 둘 중에, 죽은 하나님의 형상이 진짜 하나님의 형상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현상되신 분을 죽였던 그 하나님의 형상되는 인간들이 진짜 형상인지, 둘 중에 하나는 가짜고, 하나는 진짜다 말이죠.
결국 이들의 주장은 잘못되었단 말이죠. 이들의 주장이 잘못되었다 이 말은 오늘날 교회와 신학자들의 주장이 잘못되었다 이 말입니다. 십자가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인간의 정신력, 이런 것 가지고 언어, 이런 것 가지고 연구해서 출발한 것은 신에 도달하지 않는다. 십자가가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저한테 이렇게 물어요. 목사님,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제 답변은 오히려 간단했어요. 그 사람한테는. 피 뿌림으로 구원받습니다. 피로써 구원받는다고 하면, 또 이게 피를 자기가 믿어주면 구원받는 줄 알고 있어요. 피 뿌림이라 하는 것은 외부에서 쏘는 거예요. 총을 쏘듯이. 이렇게 피 뿌림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이게 출애굽기 19장에 나오잖아요. 모세가 양푼에 담아서 20장에 보니까 확 부어버리잖아요. 자, 이것이 언약의 피다. 부어버린다 말이죠.
언어의 피라는 말은 이 피 흘리는 사람이 달성할 문제다 이 말입니다. 말씀에다가 언약의 피를 담았다 이 말은, 이 말씀은 결국 피를 지향하게 돼요. 피를 겨냥하는 말씀이고 그리고 이 말씀을 성취하는 분이 피를 흘리게 되어 있고 결국 이 사람이 흘린 피가 말씀 안에 다 녹아져서 피가 말씀을 다 지킨 게 돼요.
히브리서 10장에 보면, 옛날 율법은 폐기해야 되는데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새로운 몸이 옛날 율법을 다 이루었기 때문에 더 이상 우리에게 지킬 율법이 우리는 완성태로 주어지기 위해서. 로마서 3장 마지막에 보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완성한다고 했습니다.
보세요. 행함으로 말미암아 율법이 완성되는 게 아니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이 완성한다는 말은, 율법의 완성이 믿는다는 통로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되었다 이 말입니다. 따라서 예수 믿고 지킬 율법이 남아 있질 않아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예수 믿었으니까 이거는 본격적으로 내가 율법을 한번 지켜볼까? 이렇게 나온다 이 말이죠.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이게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더 이상 인간의 행함으로 지킬 하늘의 법, 율법, 하나님의 법, 십계명 다 좋습니다. 지킬 십계명조차 남아 있질 않아요. 왜 남아 있질 않느냐 하면, 지키지 말자가 아니라, 그러면 저보고 그럼 간음하잔 말입니까, 살인하잔 말입니까? 이미 믿음을 통해서 율법이 다 지킨 걸로 우리에게 전달되었습니다. 그게 '의'입니다. 그게 이미 율법을 다 지켜야 의가 되거든요.
우리 속을 뜯어보면 율법 완성자란 도장이 우리 몸 안에 찍혀있단 말이죠. 지금 율법을 지킨 상태인데 뭘 또 지키느냐 말이죠. 율법을 안 지켜도 된다는 말을 한 게 아니고 율법을 지킨 사람으로 우릴 지목했는데. 너, 만점 맞았어. 라고 이야기하니까 앞으로 몇 점 더 맞아야 됩니까? 이 소리와 똑같은 거라. 만점이라 하니까 왜 말이 많아. 만점을 맞았는데 뭘 또 몇 점 맞아야 돼.
그러니까 불신자들이 뭐냐 하면, 예수 믿었다. 이제는 내가 거짓말하지 말라 했으니까 거짓말 안 하는 걸로 거짓말 안 해 야만 자기가 값을 한다고 그러니까 더 추가적으로 하나님께 본격적으로 영광 돌리겠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걸 거부한 것이 스피노자입니다. 이제부터 남은 시간 스피노자에 대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지금까지는 무슨 이야기했다고요? 데카르트 이야기했거든요. 지금부터 스피노자 이야기할 테니까 잘 한번 들어보세요.
스피노자는, 아까 뭐라 했습니까? 실체가 두 개라 했잖아요. 데카르트의 자아라 하는 것은, 이 두 개가 합친 거예요. 아까 몸이 있고 또 하나는 정신이 있고 이 두 개가 합쳐서 자아가 형성된다. 이렇게 본 겁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팔공산 올라가서 팔다리가 뿌려졌다. 그래도 자아는 남아있습니까, 안 남아있습니까? 남아있어요. 정신이 남아 있잖아요. 그런데 다 죽었다. 그럼 자아는 없어요. 정신이 없으면 자아가 안 되니까.
그런데 상당히 맞는 말 같지만 좀 이상스럽지요. 사람이 그러면 죽고 난 뒤에 자아가 사라져버리지 않느냐 하는 그런 문제가 생겨버린다고. 만약에 몸이 없더라도 자아가 남아있다. 이렇게 되려면, 이 이론 자체를 폐기처분해야 되죠. 정신이 자아다 이렇게 돼야지요. 몸은 그냥 뒷북치는 것이다. 이걸 누가 이야기했느냐면, 뉴턴이 이야기했어요. 뉴턴이란 과학자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데카르트하고 달라요. 뉴턴은 그렇게 했습니다.
여기 나오는데 141페이지 위에서 네 번째 줄에.
[하나님은 공간적으로 자기의 모든 피조물에게 현재한다. 이런 뉴턴은 공간의 하나님의 감각 중추라고 했다. 하나님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뉴턴의 기본 구도는 영혼과 육체의 상호 관계이다.]
제가 처음에 강의할 때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발걸음을 세신다 했잖아요. 어떻게 세시는가? 어떻게 머리카락을 세시는가? 어떻게 인도하느냐?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달라. 그냥 성경대로 믿어라 하지 말고, 하나님은 우리의 발걸음을 세신다, 우리의 세세히 모든 걸 아신다. 어떤 식으로 아느냐 할 때 뉴턴은 하나님은 정신이고, 우리는 뭐다? 하나의 몸인데 그걸 감각으로 관여해서 작용해서 한다.
이게 참 어려워요. 제가 매직을 몇 바퀴 돌린다고 여러분 예상합니까? 몇 바퀴 돌리겠습니까? 두 바퀴, 한 바퀴. 반 바퀴 돌렸지요. 내 마음대로 아닙니까? 그럴 때 내가 반 바퀴 돌린다고 결정할 때 이때 하나님은 뭐 하시느냐 이 말입니다. 그걸 지금 철학가들이 따지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너, 반 바퀴 돌려. 이렇게 지시했겠느냐, 아니면 내가 반 바퀴 돌리고 싶다고 할 때에 하나님께서 반 바퀴 돌리도록 조치를 하셨는가? 아니면 반 바퀴 돌리는 것은 내가 했는데 뒤에 차후에 너, 반 바퀴 돌리는데 내가 허용했다. 라고 그렇게 하실 것인가? 그걸 지금 데카르트, 라이프니찌, 스피노자 따지고 있다 이 말입니다.
이게 남의 이야기 아니냐? 남의 이야기 아닙니다. 최 집사님은 왜 이 목사한테 욕을 했습니까? 물으면 1번, 하나님의 뜻인데, 나는 하나님의 뜻으로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인데 하나님의 뜻이 어제 밤의 꿈에 나타났습니까? 아니면 말을 한 그 순간에 이야기했습니까? 아니면 하고 난 뒤에 생각해 보니까 뜻이라고 생각했습니까? 그것 하고 똑같은 문제에요.
그리고 여러분들이 기도하실 때에 하나님 아버지, 기도할 때 사람들이 마음이 복잡한 마음, ( )한 마음들이 얽힙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 아버지, 제 아들이 취직을 못해 취직시켜 주옵소서. 하지만 이 기도가 만약에 기복신앙이면 거두어 주옵소서. 하지만 이게 기복신앙 거두어 주옵소서가 착한 마음이거든 들어 주옵소서. 그럼 들어달라는 말인지 그만두자는 것인지 분간이 안 되거든요.
자기가 이렇게 내가 기도하게 된 것도 이렇게 내 아들 취직시켜 달라 하는 이게 내 욕심이고 기복신앙인 것을 깨닫게 한 것도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인 줄 믿습니다. 하지만 성령의 역사인 줄 믿는 이 믿음은 내가 얼마나 착합니까? 하지만 이 착한 이게 성령의 역사인 줄 믿는 그 착한 마음은 저는 성령의 은혜로 주신 줄 믿습니다. 이렇게 하거든요. 혼자서 바빠. 되게 바쁜 거야 지금. 기도하면서 신학을 강의를 해. 지가 하나님인 상태로.
기도할 때 들을 줄을 몰라. 그냥 해대기만 좋아하는 거예요. 대구에 갓바위가 있거든요. 갓바위 보면 바위는 가만있어. 그냥 100원짜리 동전만 들고 있는 기라. 그냥 철야하면서 기도하면서 10시간, 20시간 계속 줄줄 퍼붓기만 해. 전화할 때 제일 곤란한 게 듣지는 않고 마구 쏘아대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진짜 하나님 살아계시면 하나님 쪽에서 무슨 말 하는지 들어야 될 거 아닙니까?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우리교회에서 지옥에서도 주님을 찬송합니까? 따지는 사람이 또 이야기를 해. 목사님, 만약에 기도할 때 기다렸는데, 기다리는 게 응답인지, 내가 지어낸 게 응답인지 어떻게 압니까? 또 이런다고.
내가 상상해서 하나님의 응답일 거라고 생각해서 만약에 상상해서 그것조차 부정해야 됩니까? 하나님의 응답이라 생각했는데 딱 돌아서서, 주여, 감사합니다. 이런 응답을 주셔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하고 돌아섰는데 또 새로운 생각이 들어올 때 앞에 건 포기하고 마지막에 들어설 때 나온 그 뜻이 하나님의 뜻인데 둘 중에 어떤 걸 선별합니까? 이런 질문을 막 해대는 거예요.
아주 저는 기쁘지요. 말씀에 관심이 있으니까. 그럼 저는 이렇게 이야기하지요.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주의 뜻입니다. 그렇게 말씀에 관심 있는 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뭘 분간 못하느냐 하면, 은혜와 뜻을 분간 못하는 거예요. 뭐냐? 뜻은 전달되면 내가 실행해야 될 것을 뜻으로 보는 거예요. 세상에 그런 뜻은 없습니다. 모든 뜻은 은혜뿐입니다. 자꾸 지시받는 걸 원하지, 뜻을 알면 뜻대로 내가 행하면 뜻을 이룬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스피노자가 그 점에 대해서 아주 멋진 아이디어를 제공합니다. 스피노자 이야기 한번 들어보세요. 실체가 있게 되면 자아가 형성되게 되면 이것은 문제가 됩니다. 왜냐하면 이 자아가 수시로 변하거든요. 수시로 변하면 뭐도 변한다? 실체가 변해요. 자아 실체가 변해요. 내가 누군지 모른다 이 말이죠.
윌리암 제임스라는 사람이 있는데 별로 유명하지 않은 신학자가 이렇게 했어요. 인간의 의식을 네 가지로 나누는데. 첫째는 인간의 의식은 반드시 소유주가 있다. 두 번째, 모든 의식은 흐름이다. 끊어지지 않는다. 세 번째, 모든 의식은 변화한다. 종잡을 수가 없다. 네 번째 의식은 뭐냐?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데, 이게 뭐냐 하면, 여러 가지 의식이 떠올라도 사람은 꼭 한 개만 선택합니다.
오늘 이 강의 끝나면 어디 갈지, 오늘 오후 5시에 뭘 해야 될지. 여러 가지 대안들이 한 열 개 나옵니다. 그런데 막상 오후 5시 되면 딱 한 개만 해요. 나머지 아홉 개는 다 없애 버립니다. 결국 선택한다는 이 말은 뭡니까? 너무나 인간들이 일방적입니다.
선택한다는 이것만 윌리암 제임스 이야기했지, 윌리암 제임스가 어떻게 선택하느냐에 대해서 이야기를 못했거든요. 그 이야기를 한 사람이 라캉이죠. 인간은 바로 욕망에 의해서 선택한다. 여기까지 들어갑니다. 프로이드는 더 깊이 했어요. 인간은 생존을 위한 욕망, 그 뿐이다 말이죠. 생물학적으로 보면 그냥 뭡니까? 동물의 적응이죠. 그냥 동물이에요. 짐승이라니까. 어떻게 삽니까? 적응하며 사는 거예요. 진리고 뭐, 선이고 악이고 그건 다 사치스런 겁니다. 사람이 배고프면 짐승 되게 마련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는 본의 아니게 죄인 됩니다.
무인도에 빵이 10분이 떨어졌는데, 100명이 있다. 동작 빠른 사람이 10인분 가졌습니다. 졸지에 나머지 90명은 뭐가 되느냐 하면, 빵을 못 먹는 자가 아니라 죄인이 되었지요. 왜 죄인이 되었느냐 하면, 그 다음부터 10명을 향하여 시기와 질투와 이걸 무엇의 열매라 했습니까? 갈라디아서에 보면, 육체의 열매지요. 시기와 질투나 하면서 결국 행동으로 옮기는데 결국 10명을 동작 빠른 것 때문에 공격하게 되지요. 공격하게 되면 뭐가 어긋나느냐 하면, 십계명에 어긋나지요. 탐내지 마라에 어긋나지요.
그런데 결국은 물질의 부족이 가만있는 인간을 물질이 안 주어졌으면 다같이 100명이 모여서 울면서 우리 여기서 살자. 형제여, 그냥 죽자. 하다가 그냥 죽자고 할렐루야 노래를 부르면서 천국 가기를 바랐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빵이 열 개 주어지는 순간부터 그 다음부터는 지옥으로 변한 거예요.
그럼 앞에 할렐루야 부르면서 이건 뭡니까? 어쩔 수 없이 가진 게 없으니까 기껏 마지막 종교에 귀의하는 거예요. 이게 오늘날 기독교고 불교란 거예요. 배부르니까 아직 살만 하니까 종교에 귀의하는 거예요. 거기서 죄인 아닌 것처럼 할렐루야 할 때는 죄인 아니었어요. 분명히. 그런데 빵 떨어지는 순간부터 죄인으로 강도로 돌변했고 때려죽이고 이노무 새끼, 서로 싸우고 난리 났어요. 빵 하나 빼어서 지 자식 하나 주고 이렇게.
김달원 목사님의 설교에 보면 이런 게 있어요. 천국을 설명하면서 아주 재미있는 것이, 만나를 거두는데 있어서 많이 거둔 자나 적게 거둔 자가 동일하게 모자람이 없었다 하는 그 사실을 보고, 그게 인간의 모든 노동의 행위를 거부하는 거예요. 많이 거두는 자도 남는 게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람이 없게 만드는 겁니다.
이것은 기존의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인간의 어떤 행동도 일체 하나님께서는 그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거죠. 어떤 행동도 착한 일이나 거룩한 모든 행동도 일체 인정하지 않아요. 오직 예수님이 주시는 그 다 이루었다는 율법을 피 안에 담겨서 그 피로 말미암아 그 예수님의 피가 곧 하나님이 이루신 우리에게 필요한 의라는 것을 그걸 믿는 자 외에는 일체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습니다.
스피노자는 그래서 실체를 뭐로 보느냐 하면, 신의 속성으로 보자. 이렇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실체는 누구 밖에 없습니까? 하나님 밖에 없죠. 하나님만 실체고 그러니까 변함이 없고, 우리라 하는 실체는 우리의 실체, 자아는 동등한 것이 없으니까 아침의 생각하는 나, 오후의 생각하는 내가 다르니까 아까 이야기한 것 같이 내가 배부를 때는 남한테 구제하죠. 그러나 어려울 때는 나부터 챙기지요.
왜 같은 나인데 왜 행동이 다르냐 이 말이죠. 아까 제임스 첫 번째가 뭐라고요? 모든 의식은 소유주가 있다. 자기 위주이다. 두 번째는 흐름이 있다. 의식은 흐름에서 끊어지지 않아요. 쉬세요. 목사님, 쉬시기 바랍니다. 못 쉽니다. 손 목사님 쉴 때 어떻게 쉽니까? 쉴 때 의식이 가버립니까? 아예. 심장마비 걸립니까? 아니잖아요. 쉬시라 해도 그 순간에 생각하잖아요.
항상 목사 부인들도 항상 생각할 때 돈 안 주나. 어떤 집사가 와서 공납금 안 주나. 어떻게 쉽니까? 세상에 뭘 어떻게 쉬어요. 잠시 생각을 딴 데로 돌리지요. 부산 갈매기 하면서 사직 가서 야구 보면서 쉬잖아요. 쉰다는 말은 레크레이션이라는 말은 의식을 잠시 딴 데로 돌린다는 뜻이에요.
신나게 살다가 스트레스 풀려고 어디 가느냐 하면, 사직 가서, 맨 날 두산한테 깨지드만. 저희끼리 게임이 중요한 게 아니라 같은 류끼리 모였다는 그 즐거움. 소주 먹고 또 다 시켜. 코치, 감독 다해. 투 스트라이크 하면서 감독 다 하면서 그 재미, 확 푸는 재미. 또 어떤 아줌마는 장구 치면서 사물놀이 하면서 확 푸는 거.
세 번째는 뭐냐 하면, 의식은 변화한다는 거예요. 의식은 종잡을 수가 없어요. 네 번째 제일 중요한데 뭡니까? 그러면서도 그것을 선택해 놓고 그것을 뭡니까? 난 잘했다. 또 다른 말로 하면, 최선을 다했다. 그래서 제임스는 이것 말고 인간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 있으면 나와 보라고 했습니다. 신학이고 철학이고 나발이고 이 네 가지 빼놓고 인간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 있으면 나와 봐라. 더 이상 나올 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 뭐.
그런데 이런 인간들에게 스피노자는 미리 이야기했지요. 그렇게 하는 원인이 뭐냐? 자기 위주, 자아를 부인하라 하는데 자아가 없다. 뭐냐? 내가 이 모양, 이 꼴로 생긴 것은 다 신의 속성이다. 신의 속성의 특징이 뭐냐? 이게 자꾸 변동한다는 사실. 이래야 현상과 맞는다는 거예요. 이래야 세상을 제대로 보는 철학이라는 거예요. 이걸 좀 더 어렵게 이야기하면, 나란 인간은 흩어지고 모였다가, 모여졌다가 흩어지고 그런 거예요. 의식도 마찬가지에요.
예를 들어서 기차를 탔는데 이번 기차 좌석은 창가에 자리 좋은데 앉아야 할 텐데. 어떤 젊은이 같으면 오늘 기차 타고 가는데 서울까지 가면서 옆자리에 예쁜 아가씨 타야 하는데. 이렇게 생각할 것 아닙니까? 그렇게 생각을 딱 해 놨다 말이죠. 차 타려고 기다리는데 차 타려고 들어가려고 보니까 표가 없는 거야. 표 찾는다고 분주하잖아요. 나중에 보니까 지갑에 넣어 놨다 말이죠. 허겁지겁해서 기차 타잖아요. 할 때 아까 표 잃어버렸다는 걸 모르기 전에 옆자리에 예쁜 아가씨 타리라는 생각을 못했는데 딱 타보니까 예상외로 예쁜 아가씨가 탔단 말이죠. 그러면 그 사람한테는 뭡니까? 예상대로 된 것이 아니고 우연이죠.
그래서 스피노자의 철학을 한 마디로 뭐냐? 모든 것은 인간에겐 우연이고, 사실은 우연이라고 생각하는 게 잘못이라는 거예요. 왜 잘못이냐 하면, 표를 잃어버렸다. 표 잃어버리기 전까지는 예쁜 아가씨 타야 된다. 하는 생각이, 사실은 니 자아가 생각한 게 아니고, 그 시점에서 신께서 또 우연히 그런 생각을 집어넣은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 보기에는 우연이라 보지만 자아가 없는 상태에는 모든 것이 필연이죠. 이 필연을 그는 뭐로 보느냐? 축복이라 보고 이걸 은혜로 보자 이 말이에요. 이게 스피노자의 생각이에요. 스피노자가 142페이지부터 계속 나와요. 굉장히 어려운 걸로 써놨는데. 어려운 걸로 해봐야 하나하나 다 해봐야 설명하려면 몇 시간씩 걸리니까 다 못 하겠는데.
143페이지 위에서 여섯 번째 줄. 방금 그 취지는 아시겠습니까?
[이렇게 볼 때 사고와 연장은 각 개별적 실체에 근거한 속성이 아니라 오히려 개체적 차별을 넘어선 전체인 유일자의 실체에 속하는 속성이 되며, 우리가 흔히 개별 실체로 여기는 정신 또는 사물은 사실 실체성을 갖는 개체가 아니라 오히려 유일자의 속성이 전개되어 나타난 결과의 모습과 양태일 뿐이다.]
제가 설명 안하고 보니까 뭔 뜻인지 모르겠는데 설명하고 보니까 뭔 뜻인지 알겠지요. 이렇게 쉽게 설명한 걸 무지무지하게 어렵게. 이렇게 어렵게 해야 되는 이유가 함축되어 있기 때문에 어려운 겁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인간은 뭐냐? 하나님의 속성이 나타난 하나의 모드. 모드 알지요. M, O, D, E. 영어로 무슨 뜻입니까? 이걸 '양식'이라 하지요. 패션모드라 안 합니까? 하나의 스타일, 외형적으로 나타난 외형적 형태, 그걸 모드라 하잖아요. 모드라 하는 뉘앙스가 뭐냐 하면, 이게 유행 탄다는 뜻이 있지요.
그러니까 자아를 절대적으로 갖지 말아 주세요. 라는 것이 스피노자가 우리한테 부탁하는 거예요. 사람이 자아를 갖게 되면 그것이 일단 현실적으로 자아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자아를 만들어놨기 때문에 스스로 이거는 짐이 되고, 스스로 불행을 아예 사서 고생하게 된다 말이죠. 나는 남보다 나아야 될 텐데 남보다 뛰어나야 할 텐데.
이걸 현대 사회론에서는 이걸 가지고 에릭 프롬이 그런 얘기를 했지만, 현대 근대 주체, 아까 실체라 했지만, 실체가 주체가 되지만, 주체의식이 사상이 생기면 인간은 모든 것을 양적인 가치를 만들어요. 가치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양적에서 가치가 나와요.
그러니까 개척 교회한다면, 제일 먼저 묻는 게 첫 번째 묻는 게 몇 명 나오나? 두 번째 묻는 게 헌금 얼마 나오나? 두 개면 끝나버려요. 양이에요. 숫자에요. 그 사람들 예수 믿나? 이런 거 안 물어요. 몇 명 나오나, 그 다음에 헌금 얼마 나오나? 이렇게 물어요.
옛날에 바벨론시대 때는 경제란 게 없었어요. 뭐냐 하면, 어떤 사람이 의사가 되고, 어떤 사람은 농부가 되면 이걸 신의 우연이라고 본 거예요. 신의 우연으로 봐서 의사 된 것을 잘난 체 하지도 않고 농부된 걸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각각 자기 자리를 찾지 한 걸로 하나님의 농부 되라 해서 농부 한 거예요.
그러나 현대 주체사상에서는 가치가, 의사란 가치는 수입이 한 달에 얼마냐 이렇게 나온 거예요. 500만원. 농부는 한 달에 100만원. 그러면 의사, 농부라 하는 것은 바벨론에서는 완전히 구별되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은 것이지만, 현대에 와서는 이게 숫자로 환산되지요. 숫자로 환산되면, 이쪽은 100만원이고, 의사는 500만원 아닙니까? 그러면 500만원은 100만원의 몇 배입니까? 5배의 가치가 있지요.
그러니까 결국 이걸 뒤돌아 가면 의사는 농부보다 몇 배나 있습니까? 5배의 가치가 있는 거예요. 자식 다섯 명 중에서 하나는 의사하고 하나는 농부하면 아무래도 의사하는 자식이 아무래도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이게 새로운 효도의 가치로 등장합니다.
오늘날 이런 시대의 효도인데 무슨 주의 일하고 무슨 효도하고 무슨 관계있습니까? 사람들이 교회 문을 열고 들어올 때부터 생각하는 게 뭐냐 하면, 양적 개념을 가지고 들어온다 말이죠. 주여, 인간되게 하옵소서. 이렇게 오는 사람 없어요. 주여, 더 퍼부어 주옵소서. 이렇게 해서 오지, 주여, 사람 되게 하옵소서. 이렇게 해서 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보세요. 예수님은 어떤 부자가 자기 창고에 넉넉한 게 있다고 해서 영혼아, 걱정하지 말라. 우린 살았다. 이렇게 하고 있을 때 그날 밤에 그 영혼 데려가면 이 모든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누가복음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생명은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아니하다.] 해서 이 생명과 기존의 이 세상의 모든 양적 개념을 완전히 낯선 세계로 따로따로 딴 세계에 같이 처박혀 있는 것으로 봤어요. 그리고 두 세계는 서로 접촉이 안 된 걸로 봤습니다.
교회 문을 삐거덕 열고 들어올 때는 낯선 세계를 듣기 위해서 들어와야 되지, 현재 있는 이러한 소유의 세계와 연장시켜서 아까 연장 나오지요. 익스텐션. 물질. 이런 연장을 추구해서 오면 안 되는, 그건 이미 교회를 찾아온 게 아니고 절간을 찾아오신 거예요. 잘못 찾아오신 거예요. 엉뚱한 데를 온 거예요. 마치 남자가 여탕에 들어간 것과 똑같은 거예요. 오시면 안 되는 곳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으로.
그러면 목사님, 이것 따지고 저것 따지고 교인은 몇 명 되겠습니까? 이렇게 나오지 싶은데, 생각해 보세요. 목회는 누가 하십니까? 목회를 누가하느냐 말이죠. 목회는 목사가 합니까, 주님이 하십니까? 주님이 하시잖아요. 그러면 그걸 믿어야지. 부활하신 주님의 부활하심을 믿어야 될 것 아닙니까? 목사가 그것부터 안 믿고 무슨 목회를 해요?
지난주일 설교에 신앙에 절망하자고 이야기했는데. 낯선 세계가 다릅니다.
그런데 스피노자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가요. 세상이 서로 다르다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스피노자는 안 다르다. 원래 세상은 신의 만든 세상은 하나밖에 없다. 둘이 아니고 하나밖에 없는데 문제는 인간들이 주체의식, 또는 자아의식에 있어서 인간 사회에 그렇게 우선하다 보니까 이것들이 지 마음대로 엉터리 같은 현실세계를 따로 만들어서 문제지, 원래 신께서는 모든 게 은혜로 충만하게 있는 것이지, 그 쥐새끼 같은 인간들이 아담의 후손들이 죄를 지어서 엉뚱하게 현실을 잘못 본 게 문제지, 원래 하나님은 모든 것이 충만하게 은혜로 끝난 문제인데 그게 무슨 두 개의 세계냐, 세계는 하나밖에 없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자, 그러면 이것이 성경적이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비성경적이다. 라고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합니다. 이 사람들이 스피노자의 이러한 은혜로운 이론을 비성경적으로 공격하는 이유에 대해서 제가 먼저 말씀드리고, 거기에 대해서 스피노자가 어떻게 반격하는가를 들어보세요.
방금 이렇게 모든 것이 은혜의 하나님의 속성으로 충만 되어 있고, 그 중에 하나도 우리 인간이다. 우리 인간이 그렇게 만들었다. 그러면 반대하는 쪽에서 하는 말이, 그럼 신은 어디 있느냐? 하니까 스피노자가, 신은 움직임, 자연의 흐름, 변동사항 그 자체가 신이다 이 말이죠. 신 있고 자연, 자연 있고 신.
왜 그럼 스피노자가 자연을 신으로, 신과 자연을 같이 봤느냐 하면, 만약에 신을 따로 두면 성경적으로 말해서 신은 따로 계시고 없는데서 자연을 피조세계를 따로 만들어서 신은 이 피조세계 바깥에 따로 있어 버리면, 이 자연세계와 신과 연결고리가 없다는 거예요.
이것은 데카르트가 주장한 거예요. 데카르트는 신은 따로 있고 이 세상은 따로 있고, 그 연결고리를 성령으로 봤어요. 되게 복음적이죠. 자세히 보니까 성령이란 게 뭐냐? 정신이에요. 데카르트 이렇게 본 거예요.
스피노자가 거기에 반대하기를 그렇게 돼버리면 하나님은 뭐냐 하면, 여기에 뉴턴도 스피노자 반대했는데, 뉴턴은 전부다 나중에 비슷하게 스피노자 반대했어요. 반대하는 이유가, 스피노자야 생각해 봐라. 지금 내가 매직을 던졌는데 어느 바보가 아니면 던져도 도로 내려온다. 천하가 다 아는 이야기인데 스피노자 당신 말 같으면, 매직을 던져도 하나님이 작용해 주어야 떨어지게 되어 있지, 저절로 떨어지는 법은 없다고 본 거예요.
매직 올라갔다. 내려올 때 하나님 또 작용해야 되고, 또 작용해서 결국 또 작용해야 되는 거예요. 발걸음도 우리 마음대로 못 걷는 거예요. 하나님 옮길까요, 말까요? 옮겨라. 알겠습니다. 이런 셈이 된다는 거예요. 매사에 하나님께서 관여해 버리면, 그렇게 하면 너무 힘들게 사니까 그러지 말고, 이 매직이 올라가면 내려오는 원리가 있어요. 그 원리가 E=mc2입니다. 이게 중력의 법칙이에요. 뉴턴이 발견했거든요. 사실 정리했지요.
지구와 매직 사이에는 힘이 있는데 이 힘은 뉴턴에 의하면, 이 힘은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힘이다. 잘 들어보세요. 하나님께서 이 힘을 만들어놓고 하나님께서 그 힘대로 해놓고 손 털고 지켜보기만 하면 이 세상은 매직은 E=mc2의 이 공식에 의해서 떨어지게 돼있다. 하나님이 만드신 거예요.
그러니까 백 번 해봤자 지 뭐, 천 번 해봤자 지 뭐. 백만 한 번, 백만 두 번, 더 해 볼까요? 마찬가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