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4:9-11 [9] 그 생물들이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돌릴
Re..계 4: 9-11 (면 류 관)
이름 : 이근호(IP:)
면류관
2006년 8월 27일 설교 본문: 요한계시록 4:9-11
[9] 그 생물들이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돌릴 때에 [10]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지금 우리 머리 위에서 일어나는 일을 오늘 본문은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미 죽어서 천국에 들어간 분들은 자신의 면류관을 주님 발 앞에 던지면서 주님의 몫으로 돌립니다. 이것은 대단한 ‘자기 포기’입니다. 생명의 면류관이 수월하게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의 면류관으로 인해 평생을 소비했던 그런 면류관입니다.
아마 이 지상의 관점에서 보면, 면류관이어야 말로 자신의 평생 위신과 체면의 자존심의 업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천국에서는 이 면류관을 주님 앞에서 포기했다는 말은 곧 이 분들이 이 지상에 살 때에도 자신의 위신과 체면과 자존심을 고려하지 않고 산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평소에 이 지상이 인간들은 세상의 모든 움직임이 자신의 체면과 위신을 높여주는 방향으로 움직이기를 내심 원하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체면과 위인이 무너지는 방향으로 사건들이 일어나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부는 그런 날씨 속에서도 결과적으로 자신의 체면이 손상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처럼 인간은 여전히 자신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라고 뻐기고 삽니다. 그런데 로마서 11:15에 보면, “저희를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사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복음 안에 사는 것은 곧 죽은 자로서는 사는 것이라고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은 애초부터 죽은 자로 간주하십니다. 갈라디아서 3:10에 보면,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우리 인간들 앞에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율법을 세워놓으시고는 그 어떤 인간도 이 하나님의 거룩한 법을 다 항상 지킬 수 없으니 당연히 저주를 받아도 마땅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인간들이 여전히 살아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법도 못지키는 주제에 자신이 살아있으니 계속 살겠다고 우기면 이것이 바로 현실을 바로 알지 못하고 자기 위신과 체면이 만들어낸 가짜 현실을 따로 차고 사는 모습입니다.
인간은 마땅히 진작 죽어야 합니다. 여태 우리들을 살려 두시는 것은 주님 쪽에서 우리를 가지고 하실 일이 따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은 바로 ‘인간 위주로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복음 위주로 일하시는’ 원리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은 복음을 증거하기 위한 용도로 필요한 자들을 계속 살아가게 하십니다.
복음을 위해서라는 말은 곧 하늘 나라에서 자기의 면류관마저 주님께서 반납하는 그 품성을 만들어내기 위함을 말합니다. 즉 이 지상에서는 그 어떤 인간도 자기 인간됨을 포기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신을 여전히 살 가치가 있는 존재로 간주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마음이 곧 불행의 씨앗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자신의 죄를 모르게 되면 그 빈 자리에 자신의 의로움을 채워져 있습니다. 의로움이 채워져 있으면 그 다음에 그 담겨 있는 의로움으로 자기가 원하는 바를 하나님께서 요청할 입장에 서 있노라고 착각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궁극적으로 자기만을 ‘자기 영광’을 따로 구축하게 됩니다.
마가복음 10:35-40에 보면,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예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들 두 제자는 자신만이 갖는 독자적인 영광 획득을 무슨 수로 다 할 마음가짐이 되어 있습니다. 이 두 제자는 자신에게 실망하고 자신의 인간됨을 포기할 마음자세가 아직 안되어 있습니다. 여전히 과거로부터 치밀어 올라오는 체면과 위신의 기초 위에서 미래를 건설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이란 맷돌과 같아서 무슨 경우나 사태를 만나면 여지없이 죄를 밖으로 생산해 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경우도 자기 속내가 안 들키고 버틸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뭐든지 기도하면 다 들어주신다’고 말씀하니 그 말을 붙잡고 이 두 제자는 평소의 자기 속내를 드러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책망하시기를, “너희들은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지 조차 모르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정말 기도할 내용을 심어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고난의 잔을 자신들도 꼭 마시기를 기도하라는 겁니다. 이것은 즉 그 인간으로 하여금 주님의 십자가 지심의 의미 안으로 빨려들어가는 경우를 말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고난의 잔을 마시는 것을 예수님은 ‘세례’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자기 사람들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요한복음 1:33에 보면, “요한이 또 증거하여 가로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줄 알라 하셨기에”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만 성령으로 세례를 부어주심으로서 그들의 마음이 자기 위신과 체면으로부터 벗어나 자신들이 전적으로 죄인이며 당장 죽어도 할말 없는 대상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렇게해서 그들 속에서 생긴 생명의 면류관은 도로 주님에게도 당연히 반납하게 만드십니다.
면류관을 바친다는 것은 곧 자신의 생명을 바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평소에도 이 지상의 성도들은 자기가 자기를 살리는 식으로 살아가는 자들이 아닌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될까요? 그것은 그들 안에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이미 죽은 자임을 명심하여 살려고 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