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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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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광주 강의(060721) 17-2

이름 : 서경수(IP:)

광주 강의 2 (2006. 7. 21) - 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도록 합시다.

첫 번째 시간에서, 생명이 나타난 것은 우리의 요구사항이 아니고 태초부터 있는 생명이 자기가 원해서 우리가 사는 세상에 그냥 출몰하신 겁니다. 그래서 제자들도 아무도 안 믿고 도망쳤는데, 그 생명 되시는 분이 기어이 따라와서 제자들로 하여금 ‘야, 진짜 태초부터 있는 생명이 바로 당신입니다.’ 라고 고백하도록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만든 작업이 저와 여러분에게 그대로 작용했는데, 이것을 붙잡으려고 하면 안 돼요. 그분이 작용했기 때문에 작용하게 되면, 우리한테는 예상치도 못한 어떤 징조가, 성령께서 우리 속에 작용해서 징조가 나오면 그 사람은 구원 받은 사람이고, 그런 징조가 없으면 구원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이 징조가 어떤 것이냐?
제가 첫째시간 끝에 이야기한 것이 뭐냐 하면, 시간과 공간을 우리로 하여금 잠시나마 완전히 잊어버리게 한다. 태초에 있는 생명을 우리가 눈으로 봤기 때문에 우리는 그 안에서 기쁨이 충만케 되는데, 충만이라는 것은 어떤 상자 안에 꽉 차서 다른 게 더 이상 들어갈 수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런 충만이 바로 태초에 생명께서 그런 기쁨을 우리에게 안겨주는 그런 징후와 징조가 자기 백성은 가지고 그런 것이 나오도록 하십니다. 이것이 첫째시간에 한 것입니다.

이제 둘째시간에 어떤 징조가 있는가?
6-7절에 보면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이라고 되어 있지요.

무슨 징후냐 하면, 빛과 어둠이 구분지어지는 그런 느낌을 우리에게 제공합니다. 빛과 어둠이 확연히 구분된다는 것을 우리로 알게 하는 거예요.

빛은 무엇이냐 하면, 여기 1장 9-10절에 보면, 빛은 죄 용서입니다. 이게 빛이에요. 그 전에 한 가지 더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빛과 어둠이 구분되는데, 그러면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빛과 어둠을 구태여 구분 지을 필요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빛이 와야 어둠이 어둠이란 것을 감 잡지, 빛이 오지도 않았는데 빛과 어둠을 구분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지요.

‘너는 어떻게 사노?’
‘그냥 사는 대로 살지 뭐.’
‘교회 왜 나왔는데?’
‘복 받기 위해서 나온거지 뭐.’

세상 사람들은 빛과 어둠이라는 자기를 둘러싼 어떤 외부적인 장, 영역, 외부적인 어떤 지배, 통치 그런 것 생각 안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오직 자기 몸만 편하면 돼요. 내 몸뚱아리만 잘 되면 끝나는 거예요. 교회 문을 들어와도 축복받기 위해서,

내가 어디에 속했느냐 하는 것이 귀찮아요. 그저 내 몸만 편하면 최고예요. 교회 다녀서 복만 받으면 최고예요. 이 복이 뭐냐, 몸 건강하고, 자식 잘 되고, 내 욕망대로 만사형통하고 이거잖아요. 내 몸뚱아리 하나 잘 되면 끝나는 거예요.

이걸 지난 수요일 설교하면서 뭐라고 했는가 하면, ‘立春大吉(입춘대길)’ 이라고 했어요. 절에 다니는 사람들은 봄에 절에서 뭘 주는가 하면 ‘입춘대길’이라고 선 부적처럼 된 것을 가계마다 붙이라고 줘요. 봄이 되면 큰 행운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만약에 절에 안 가고 교회와도 마음속에 뭐가 있습니까? ‘입춘대길’ 내 몸뚱아리 하나 잘 되면, 교회 계속 다녀서 가계도 잘 되고, 자식 잘 되고, 내 뜻대로 잘 되고 이러면 되는 거예요.

나는 어디에 소속되어 있고, 이런 것 생각하지 않아요. 자기를 덮치고 있는 것이 흰 구름이냐, 먹구름이냐 그런 것 생각 안 한다고요. 그저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내 몸뚱아리 하나 이게 가장 생생하게 느껴지고, 이것 외에는 딴 것 절대로 생각 안 하는 거예요.

이것이 무식한 절에 다니는 할머니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유식하다는 대학교수라든지 사장님이라든지 의사나 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들이 교회 오는 이유가 뭐냐, 자기 몸뚱아리 하나 잘 되기 위해서 오는 겁니다. 자기 딸 외국어고등하교 입학하는 것이 목표고, 자기 잘 되면 끝나는 거예요. 그 외에 잡다한 소리 하면 잡니다. 듣기를 싫어해요. ‘여러분의 몸이 복을 받습니다.’라고 하면 자다가도 다 깨요. 목적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그런데 생명이 오게 되면, 자기 몸뚱아리를 뭘로 보는가 하면 죄인으로 규정해요. 죄인 되었다는 말은 더 이상 내 몸뚱아리에 대한 기대를, 뭘 요구하지 않고 ‘나는 빛에 속했느냐, 어둠에 속했느냐?’ 전에는 어둠에 속했는데 지금 빛에 속했다. 이것을 생각하게 돼요. 몇 초? 3초. 나머지 수 천 초는 뭘 생각하지? 내 몸뚱아리입니다.

사람의 육신이라는 것은, 생명이 다가와서 어떤 징후를 만들지 아니하면, 세상 사람이나 우리나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똑같습니다. 우리는 평소에 빛에 속했을까, 어둠에 속했을까 평소에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평소에 아무 생각 없는가? 아닙니다. 생각합니다. 뭘 생각하느냐? 내 몸 편한 것만 생각해요. 딴 거 아무것도 생각 안 해요. ‘오늘 교회 왔으니까 내 몸 편하게 해 주세요.’ 그것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한국교회가 절을 대체해서 제 2의 절로서 온 골목마다 절로 가득 찼습니다. 대한 예수교 합동측이라는 절, 일종의 조계종이지요. 여기 가까이 순복음도 있지만 전부다 “여러분, 복 받아서 몸 하나 잘 챙기시기 바랍니다.” 그 주제로 설교를 합니다. 만약 그 외에 다른 설교를 하면 그 교회 안 나오고, 교인 줄고 헌금 안 나오면 그 목사는 장로들에 의해서 쫓겨나고 길거리에 나앉아야 합니다.

오 목사님 같은 경우에는 큰 교회 안 간 것이 천만 다행이지 갔다고 하면 길에 내팽개쳐 졌겠지요.

목사가 되어서 돈까스 가계 하면 됩니까, 안 됩니까 하는데, 요한 1서에 의하면 돈까스 가계를 하는 것이 하나의 징후라면 해도 괜찮아요. 그런데 요한 1서에서의 징후는 뭔가 하면, “나는 빛에 속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돈까스 가계를 하는 것은 그냥 하는 것이 아니고 죄인으로서 돈까스 가계를 하는 겁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다 죄와 연관되어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빛 안에서 용서 받는 대상으로서의 죄인이고, 빛은 우리에게 용서를 해 줍니다. 그것이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1장 10절에 나오지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왜 그럴까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가 올 때는 화목제물로 다가왔는데, 우리가 죄 안 지었다고 하면 화목제물은 멀뚱하잖아요? ‘저, 짜장면 시키신 분?’ 이러는데 ‘우리는 초밥 시켰는데요.’ 이러면 짜장면 배달하는 사람은 멀뚱하잖아요.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서 무엇이 꼭 필요한가를 알아요. 그것은 화목제물의 피입니다. 피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것이 어디에 나오는가 하면, 7절에 있습니다.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이 말씀이 무슨 뜻이냐 하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줄 선물보따리를 가지고 왔는데 그게 한 글자로 뭐란 말입니까? “피”입니다. 십자가의 ‘피’로 왔다는 말은, ‘너는 너에 대해서 몰라.’ 라는 뜻이에요. ‘이근호, 너는 너에 대해서 몰라. 이근호에 대해서 아는 것은 나 예수가 더 알아.’ 이런 뜻이에요.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몰라요. 그냥 알아가는 거죠. 아까 했잖아요. 인간의 모든 행동은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거예요. ‘나는 뭘 좋아할까? 짜장면을 좋아할까? 개고기는 싫어. 영덕 대게는 좋아.’ 뭔가 알아가면서 평생을 보내는데, 진짜 제대로 딱 꼬집어서 ‘너는 이거야. 이런 거야.’ 라고 하는 것은, 주님께서 쟁반에 피 들고 왔을 때, 쟁반이 아니고 십자가의 피 들고 왔을 때, ‘아, 나는 죄인이구나.’ 하고 자백하면, 그 자백하는 순간 우리는, 주님과 우리 사이는 뭐냐? 빛의 관계 속에 놓여 있고, 그 다음에 더 중요한 것은 그 피로 왔기 때문에, 피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자동적으로 빛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어둠에 속했다는 것이 완전히 규정되어 버려요.

우리보다 나쁜 짓 더해서 어둠이 아니라 용서의 피가 없는 영역이, 용서의 피가 적용이 안 되는 영역이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어둠이 됩니다. 그런데 그것을 안다는 것은 하나의 징후로 아는 거지요.

요게 어려운데, 숨겨져 있는 것이 작동한다고 말했지요. 현재 우리 속에 주님이 계시는데, 우리가 24시간 정신 차리고 아는 게 아니에요. 다만 우리는 본성상 내 몸뚱아리만 알아요. 우리 안에 아무리 예수님이 계시고 생명이 있더라도 우리는 내 몸뚱아리만 생각해요. 권사님 그렇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내 몸이 최고라. 우간다에 비가오고, 우간다고 나이지리아고 내게는 소용없어요. 내 동생이 있는 지역에 장마가 왔다고 하면 관심을 갖지요. 그런데 내 동생이 아니고 옆집 동생 이야기하면 신경 안 쓰요. 옆집 동생을 내가 왜 신경 써. 내 몸뚱아리와 관련된 것만 신경 쓰요. 이게 우리 본성이에요.

그런 우리가 정신 차린다고 해서 빛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신 생명의 징후가 아니에요. 그런데 뭔가 내 예상한 일이 요상하게 꼬이면서 예상치도 않는 일이 벌어지고 사건이 일어날 때, 갑자기 내 몸뚱아리 생각한 것에 대해서 화가 치밀고, 아무것도 아닌 것에 신경 썼다는 자체가 손해 본 것 같고 할 때, 그 사람은 이미 빛에 속한 사람입니다.

생명이 가만 두지 않는 사람, 빛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 피가 생각나면서 그 순간만큼은 기쁨이 충만하지요. ‘아, 나는 살았지. 나는 죽을 놈이 아니고 살 사람이지. 나에게 생명이 있지. 내 이 목숨 말고 다른 생명이 또 있지.’ 라는 그런 생각이 드는데, 그것은 주님께서 왔다 가신 것입니다. 왔다 갔다니까 말이 좀 이상한데, 주님께서 “하리수 군” 하면서 한번 건드려 본 거예요. 장난을 쳐 본 거예요. 사실 장난이란 것이 우리를 통해서 주님을 증거하게 하신 것이지만, 제가 말을 쉽게 하기 위해서 그냥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자, 이렇게 되니까 그 어려운 요한 1서가 서서히 풀리기 시작하지요? 조사하면 다 나와요. 슬슬 풀리기 시작하지요?

주님께서 우리를 가지고, 생명을 가지고 생명 없는 우리를 대상으로 노크를 하고 두드리면서 장난치고 합니다. 그 대목이 어디에 나오는가 하면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데, 제가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계시록 3장 20절에 보면,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고”

예수님께서 문 열고 들어오시지 왜 문을 두드리고 난리를 치냔 말이지요. 제자들 모여 있을 때에는 잘도 들어오셨는데. 제자들에게 ‘잘 계십니까?’ 노크하고 들어왔어요? 그냥 들어오셨어요. 문이 닫혔는데도 그냥 들어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20:19)고 하셨지요.

그런데 계시록 3장에는 노크를 하는데 왜 이렇게 하느냐? 이미 성도한테는 ‘내가 너와 지금 사귀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주님한테 있어요. 지금 네가 혼자 몸이 아니고 내가 너를 지금 사귀고 싶어 한다는 것을 계속 신호를 보내고 싶은 모습이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는 거예요.

오늘 본문 다시 봅시다.
요한 1서 1장 3절에 보면,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사도들과 사귀는 거지요.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그 다음 7절에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이렇게 되어 있지요.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엄마, 아빠, 아들, 딸 4명이 함께 있는 것처럼, 사도와 우리, 예수님과 하나님 전부 부둥켜안고 우리는 한 식구라고 확인시키기 위해서 생명을 통해서 우리에게 노크도 하고 장난도 치고, 깜짝 놀라게 만들고 그러면서 결론적으로는 그리스도 피로 말미암아 기쁨이 충만케 하고.

“우리가 남이가” 라는 유명한 말이 있지요. 지역감정에 호소해서 표 찍어달라는 소리인데, 예수님이 “우리가 남이가” 하는 식으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이런 일을 하시는 거예요.

요한 1서 이제 대략 아시겠지요? ‘아, 장난치시는 구나.’ 그렇게 아는 겁니다. 그런데 그냥 장난치시는데, 그렇게 장난치셔서 하나님이 얻고자 하는 것이 뭐냐? 그것은 바로 진리에 대해서 알려주고자 함입니다.

진리란 것은 ‘확증되었음.’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목사들이 목회를 하면서 제일 괴로울 때가 언제냐 하면 확증 된 것이 손에 안 잡힐 때 제일 괴로워요. 힘들어요. 교인들이 애먹이고, 누가 말썽 일으키고, 교회서 나가라, 저는 벌써 네 번 쫓겨났나 모르겠습니다만. 여하간 여러 가지 사태가 일어났을 때에 그 가운데서 제일 어려운 것이 뭐냐 하면, 확증된 것이 손에 잡히지 않을 때 제일 힘듭니다.

설교 전에, 뭘 전해야 되는데 확증된 것이 없을 때, 제일 설교하기 곤란한 거죠. 확증된 것이 없을 때 설교하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신학 강의가 돼 버려요. 목사님들 설교 들으면서 신학 강의식으로 들리면 ‘아, 확증된 것이 없어서 시간 때우는 식으로 하고 있구나.’ 이분이 이런 식으로 계속 나가면 곤란한데, 하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확증된 것이 있으면 설교가 되는 정도가 아니고 목사가 설교하면서 모든 시름과 걱정이 없어져요. 교인이 3명이 오던 1명이 오던 상관없이 증거할 수 있습니다. 확증되었다는 그 자체에 기쁨이 충만해서 그것이 설교로 그대로 나와야 돼요.

그러니까 이 설교 듣고 누가 나에게 욕을 하겠는가, 그런 것 따진다는 말은 아직도 확증된 것이, 자기 몸뚱아리만 확증되었지 아직 진리는 확증 안 된 상태기 때문에 그런 걱정이 되는 거예요. 너무나 확증되었으면 내 몸뚱아리가 여기 있는지 저기 있는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해요. 방송에서 한 이야기인데, 연극하는 사람인데, 연극 초반에 하도 어려워서 열심히 했는데 손님들이 잘 안 오는 거예요. 그래도 열심히 준비를 했기에 연극 공연을 하는데, 상영 시간이 10시여서 상영을 했는데, 손님이 1명 왔어요. 연극하는 사람은 15명이라. 회의를 해서 상영 하느냐, 마느냐를 의논해서 하기로 결정했어요. 나이 40 중반쯤 된 관객 1명이 앉아 있는데, 15명의 사람이 열심을 다해 했답니다. 10분쯤 지났는데, 그 관객이 화를 내면서 “내 하나보고 연극하고 있는데 내가 민방해서 더 못 보겠다.”고 해서 연극 하는 사람 15명 다 불어서 막걸리 싸 줬답니다. 수고 했다고. 입장료보다 더 많이 들었지요.

혼자밖에 없는데 뭣 하러 공연하느냔 말이지요. 내가 민망해서 못 보겠단 말이지요. 식사를 해도 같이 해야 맛이 있고, 공연을 봐도 여럿이 같이 봐야 재미가 있지 혼자 무슨 재미로 봅니까. 15명이 웃어가면서, 울기도 하고 하는데 혼자 앉아서 얼마니 찜맛이 없겠어요.

그런데 설교자는 사람보고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주신 생명에 붙잡혀서 하기 때문에 관객 1명 두고도,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어요. 저는 1명 두고도 설교 했어요. 제 아내 말고. 아내 같으면 둘이 의논해서 오늘 하지말자고 했을 것인데, 아내 말고 진짜 1명 왔는데도 했어요. 기쁨이 충만해서.

왜냐하면, 설교 몇 명 가지고 안 한다는 것이 확증되었기 때문에. 교인 몇 명 왔느냐? 교회 이렇게 해서 되겠느냐? 이런 것 가지고 안 따지기로 확증을 했기 때문에, 확증되었으므로 오는 안도감 때문에 마음껏 설교를 할 수 있었던 겁니다.

끝나고 난 뒤에는 저 나름대로 바쁘지요. 왜 안 오셨습니까? 혼자 했습니다. 하고 짜증내는 척 하면서 전화도 하지만, 설교할 때는 다 잊어버리지요.

어떤 교회는 1명오니까 찜맛 없어서, 연극에서처럼, 오늘은 하지 말고 수요일은 폐지합시다. 그렇게 해서 안 모이는 교회도 있습니다.

진리가 확증되었으면 죄는 뭐냐? 중요합니다.
죄는 확증되지 않는 것에 마음 빼앗기는 것이 죕니다. 이것이 요한 1서의 죄예요. 확증된 적도 없고 그냥 앞으로 잘 할게. 이런 것에 대해서 기대는 것. 앞으로 잘 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런 기대를 걸고 있는 것. 이 모든 것이 죄입니다.
‘손으로 만진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이미 확증되었잖아요. 결장 나버린 거예요. 생명은. 지금 생명 얻으면 다 얻은 거잖아요. 그러면 생명이 나타났으면 다 나타난 거예요. 더 없는 거예요. 없는데, ‘내가 교인 좀 더 모아야 하는데, 지금보다 설교를 좀 더 잘해야 되는데’ 뭔가 계속해서 미흡함을 느끼고 결핍을 느끼면서 그걸 채우려고 애쓸 때, 그것이 바로 죄라고 하는 겁니다.

진리에 확증된 것에 모자라는, 미 확증에 대해서 네가 신경 쓴다는 것. 그 자체가 죄가 되는 겁니다. 이 죄는 평생 우리를 따라다닙니다.

우리가 미흡함을 느끼니까 마귀가 슬슬 장난을 치지요. ‘봐라, 지난번에 벌 받은 것은 네가 죄를 지어서 그렇다.’ 진리에 합당해야 된다는데 진리에 미흡하니까 죄를 느끼는 거예요. 죄를 느끼니까 여기서 마귀가 덤벼들고, 심판이 찾아오고, 벌 받을까 싶어서 두려움이 찾아오고 그렇게 되니까 기쁨의 충만은 이미 날아가 버렸어요. 기뻐하지 않아요. 죄 안 짓기 위해서 정신 바짝 차리는 거예요.

정신을 바짝 차리는 것은 있지만 안도감이 없어요. ‘야, 무슨 사태가 일어날지 몰라? 이런 사태가 일어나면 큰일인데, 안 돼, 안 돼. 하나님이여 제발 그런 사태만은 일어나지 않게 하옵소서.’ 이것은 아예 두려움을 호출하는 거예요. 두려움을 다 끌어 모으는 겁니다.

이 집 팔려고 내 놓았습니까? 이 집을 내 놓았으면 두려움이 생기는 거예요. ‘빨리 팔려야 할 텐데. 팔리더라도 제값 받고 팔아야 할 텐데. 세금 너무 많이 나오면 안 될 텐데’ 등등 여러 가지 미흡한 요소들을 막 끌어 모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육신을 갖고 있는 이상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뭔가 예상 못할 일, 갑자기 집 걱정이 있는데 얘기 스키 타다가 넘어졌다고 하면, 그 순간만큼은 얘 걱정에 솔리면서 집 생각은 안 했는데, 병원으로 가는 도중에 전화가 와서 원하는 만큼 돈 줄 테니 집 팔라고 연락이 왔다면 기쁩니까, 안 기쁩니까? 안 기쁜 거예요. ‘마음대로 하세요.’ 전에는 기쁨이 충만하다고 해 놓고는 지금은 퉁명스럽게 ‘알아서 하세요. 지금 신경 쓸 일이 많으니까 사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세요.’

하나님께서 일을 처리하면서도 내가 예상한 기쁨은 안 주고 정신을 딴 데 돌릴 틈새에 그만 예상치도 않은 일이 일어납니다. 그럴 때에 세상만사가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장난을 치시는구나, 왜 얘가 평소에 건강할 때 그 건강한 것 때문에 주님 앞에 감사하지 못하고, 건강한 것을 당연히 여기고---

얘들 키워보면 알지만, 공부 못한다고 그렇게 닦달하지 마세요. 얘가 아프면 공부 못해도 좋으니 제발 건강하라고 빕니다. 그렇게 되면 얘가 시건방져서, 아이스크림 사 와라, 핸드폰 사 달라 뭐 온갖 요구를 다 하지요. ‘그래, 해 줄게’ 하고 약속하지만 그 약속은 김정일 약속하고 똑 같아요. 다 취소되는 것이고.

어쨌든 우리가 평소에 작은 것에 감사하고 있지 않은 것에 대해서 뭔가 일을 하나 터뜨리게 해서 새삼스럽게 우리가 생명의 혜택을 입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이것이 바로 확증된 진리와 사귀고 있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우리와 사귀는 분이 장난치기를 좋아해서 맨날 확증된 것을, 우리가 어려울 때마다, 우리가 괴로워 할 때마다 확증된 것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시 한번 기쁨을 재생시키고 활성화 시키는 일을 계속 하십니다.

그 다음 2장 봅시다.
너무 쉽지요. 요한 1서 말씀이 어려운데 너무 쉬우니까 이상하다.

1절에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자, 보세요.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범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마귀에게 놀림감 될 수밖에 없는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때문에 매일 거기에 파묻혀 삽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죄 짓지 말라고 하시면 될 텐데,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죄 짓는 것을 기정사실로 여기고, 우리를 어디로 보내느냐 하면, 우리로 하여금 중간에 대언자, 중보자지요. 중보자에게 관심을 높이고자 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문제점은 어디에 있는가 하면, 우리는 내 몽뚱아리만 생각하지 주님의 몸에서 피가 나오는지 땀이 나오는지 그것은 생각 안 해요. 내 몸만 생각하니까.
그러니까 내 몸만 생각하는 인간을 주님 몸만 생각하는 인간이 되도록 생명께서 우리에게 자꾸 사건과 일들을 일으킵니다. ‘네가 죄 짓는 것은 기정사실이지만 너의 죄를 대신해서 용서해 달라고 하는 대언자가 있으니 곧 그리스도다.’

그분이 누구라고요? 우리 곁에 오신 ‘눈으로 본 바요, 손으로 만진 바요’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2절에 “우리 죄를 위한” 여기에서 우리는 사도지요.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온 세상은 1장 3절이나 7절에 보면 사도와 사귀는 사람만을 말합니다. 그냥 온 세상이 아니고 사도의 이 말을 듣고 사도와 가까이 하는 그 사람에게만 주님께서 화목 제물로 오셨다 이 말입니다.

그것이 확증된 것을 가지고 요한 1서에서는 “온전함”이라고 합니다. 늘 온전함이 미흡한 우리 속에 삽입되어 있는 식으로 지금 우리가 있습니다. 이것을 2장 6절에서는 “거한다”고 했습니다.

‘사귄다, 거한다’ 이 말은 같이 있다는 것입니다. 같이 있기 때문에 너도 예상 못한 예수님 생각을 하지, 만약 네가 네 힘대로 예수 믿으면 바쁘면 예수님 생각 안 할 것이 분명하잖아요. 우리는 바빠서 예수님 생각 못하는 것이 아니고, 바쁘든 안 바쁘든 우리는 내 몸을 생각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건드리기 때문에 건드릴 때마다, ‘아하 예수님이 대언자로 계시지, 우리 죄를 용서해 주셨지.’ 라는 생각이 순간순간 떠오르고 기쁨이 충만하게 하신다 이 말입니다.

여러분이 정말 주님 주신 기쁨이 있는가를 측정하는 방법은, 지금 내가 죽는다고 생각해 보세요. 내일 계획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지금 교통사고로 죽는다고 할 때, 그게 만약 아깝다고 한다면 그것은 자기 몸뚱아리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죽어도 좋다고 할 때는, 자기 몸을 잊어버리고 주님의 몸을, 피를 생각할 때는 그 순간만큼은 지금 죽는 것이 별로 무섭지 않아요. 여한이 없지요.

그러나 이것은 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오셔서 계속해서 그러한 현상을, 징후를 우리에게 드러내고 하시는 겁니다.

2장 10절에 보면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여기 형제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그림으로 설명하겠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개인의 가치가 우선되기 때문에 경쟁이란 것이 생겨요. 경쟁이 성립되려면 각 개인마다 자기 몫의 가치가 따로따로 구분되어 있어야 합니다. 내 가치, 네 가치 따로 구분되어 있어야 서로 경쟁이 되지요.

그런데 교회에서는 공동의 가치입니다. 주님 한 분이 흘리신 그 피를 공동이 자기 것도 아닌데, 주님의 것인데 공동이 누리는 그런 식의 가치지요. 이 자치는 주님의 의인데, 우리가 반듯하게 살고 착하게 살아서 생기는 것이 아니고, 공동의 가치, 주님께서 공동용으로, 공동의 가치 속에 공동이 누림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의로 우리가 구원 받습니다.

그런데 만약 여기에 성화가 개입되어버리면 성화론은 개별자의 가치로 전환되고 말아요. ‘너 열심히 기도하는데 왜 하냐?
‘성화 되려고.’
‘그러면 너는 열심히 기도해라. 나는 놀게. 그런데 네가 기도해서 얻은 거룩한 것을 내게도 좀 다오.’
‘안 돼. 이것은 내가 노동했기 때문에 나만 누릴 수 있어.’

이것은 바로 자본주의의 원칙이지요.
주님은 공동의 가치예요. 개인이 노력한다고 해서 개인 가치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하신 일로 해서 공짜로 누리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에서 제대로 된 형제라는 개념이 생깁니다.

요한 1서 3장 16절에 보면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지 아니하면 사랑이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형제를 위해서 목숨 안 받칩니다. 턱도 없는 소리예요. 그런데 주님의 사랑은 능력이 있는데, 어떤 능력이냐 하면 개별적인 가치를 무산시키고 그 경계선을 넘어서 공동적인 가치로 자기 사랑을 내 놓게 하는 능력이 나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내 사랑이 아니고 주님의 사랑이 나를 가지고 놀기 때문에, 마음껏 나를 다루기 때문에 나로 하여금 주님의 사랑이 퍼지도록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의 징후가 되겠지요. 생명이 있다는 징후가 됩니다.

너와 나의 경계선이 성립되면 안 돼요. 형제만 있으면 돼요. 형제들이 있으면 안 되고, 그냥 형제예요. 오 목사님과 합해서 형제들이 아니고 그냥 형제예요. 그러나 보통 집안 식구들은 형제들이 몇 명입니까? 3명입니다. 이렇게 되지요. 이것은 형제들이 되지요.

그러나 우리는 형제밖에 없어요. 하나의 형제밖에 없어요. 너와 나의 구분이 없어요. 그런데 지금 이 말씀을 하는 것은 다 하나의 징후입니다. 우리에게 이것을 지키라고 하면 지킬 사람 아무도 없어요.

선한 사마리아인이 강도만난 사람을 도와줄 때 어떤 마음가짐으로 도와줬는가? 누가복음에는 이걸 뭐라고 하는가 하면 ‘자비’라고 했지요. 자비심으로 그렇게 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누구의 형제가 되겠어요? 자비라는 그러한 연대로 묶여진 사람은 이웃이 되니, 이웃이 생겼다는 그 자체가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그 말도 함께 자동적으로 성취가 되고 마는 거예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율법사가 주님께 뭘 물었습니까? 율법사는 따로 떼서 물었지요.
‘십계명의 온 말씀이 뭡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그것이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자기가 행동의 주체가 되어서 해보려고 하는 거예요.
내 밖에 있는 이웃은 이웃이 아니에요. 내가 그 사람과 이미 하나 된 상태가 아니면 이웃이란 것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이웃은 자비가 우선될 때 이웃은 뒤따라 자동으로 등장하는 거예요.

자비, 사랑의 대상이 되는 것이 따라 올 때, 사랑은 대상을 향하여 겨냥하게 되어 있는데, 사랑이 꽂이는, 사랑이 쏘는 그 화살일 때 그것이 이웃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새삼스럽게, ‘오, 이웃. 사랑합니다.’ 이런 것은 성립이 안 돼요. 사랑하니까 이웃이 되는 거예요. 이미 사랑이 있으니까, 그 안을 들여다보니까 이웃이 거기 있는 거예요.

그리니까 새삼스럽게 이웃을 사랑하지 마세요. 그냥 사랑만 하면 이웃은 저절로 그 사람이 바로 이웃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성도들은 원하든 원치 안든 형제고 이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오해하는 것은, 김 집사님 우 집사님 다 이웃인데, 김 집사님이 돈이 털어져서 ‘우 집사님, 100만원 빌려주세요.’ ‘미쳤나. 돈 빌려주게.’ ‘형제라면서’

돈 ---- 형제가 아니고, 내가 사랑하는 형제가 아니고, 주님이 주신 형제인데, 내가 일부러 김 집사와 형제하려고 돈 빌려줄 리가 없잖아요. 그러면 돈 안 빌려줘서 삐쳐서 ‘그럼 형제 안 한다.’ 그러면 처음부터 형제가 아니었지요. 그것은 다른 관계 때문에 맺어진 것이지 주의 사랑 관계는 아닙니다.

그래서 보증서지 마세요. 삐쳐서 나가거든 처음부터 형제 아닌 줄 알고, 그저 당신 만난 것이 주님의 사랑 때문에, 사랑 안에서 교재하기 위해서 만나지, 주님이 만들어준 형제지 우리가 돈 문제 때문에 만난 형제는 아니다. 이럴 때만 진정한 형제입니다. 믿습니까?

교회에서 형제라고 하면서 돈 거래, 보증서는 문제 때문에 시험 들고 할 필요 없어요. 갑자기 분위기가 이상해 졌네.

다시 이야기합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왜 그러냐 하면 형제는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이미 정해놓은 것입니다. 형제가 정해졌다는 말은 이미 사랑이, 형제를 사랑하는 사랑이 내 속에 들어와 있어서 그래서 작동을 개시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몇 개지요? “몸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하나지요. 하나가 둘이 될 수 없고, 셋이 될 수 없어요. 둘, 셋을 노린다면 이것은 형제의 몸을 깨는 거예요. ‘우리는 한 성령을 같이 마셨다’고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말씀하셨는데, 이 말은, 우리는 아무리 헤어져도 하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어디가도, 10이 되더라도 다 하나다. 전부다 하나라는 것이고, 이것이 태초의 생명 되시는 분이 그렇게 하셔서 그렇습니다.

2장 14절을 봅시다.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형제이기 때문에 아이들아, 어른들아 나이별로 다 해요.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이 어디에 거한다고요? 우리 속에 거한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조금만 더 하고 마치겠습니다.
2장 7절을 봅시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새 계명이 뭐냐 하면, 사랑입니다. 1장 7절에 보면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빛 가운데 거한다는 말은 확증된 어떤 권력 속에 우리가 이미 사로잡혀 있다 이 말입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움 가운데 있고” 그러니까 여기 1장 1절에 “눈으로 본 바요 손으로 반진 바라” 이것은 예수님께서 실제로 사람 모습으로 오셨잖아요. 예수님께서 우리를 건질 때 낚시 대로 건지는 것이 아니고 진짜 형제의 모습으로 같은 사람의 모습으로 와서 사랑을 증거 하듯이, 이 사도들이 너희보기에는 초래해 보이지만 예수님도 사도 못지않게 초라했다. 그런데 초라한 분이 우리 사도들을 이렇게 사랑했듯이, 이 초라한 사도를 너희 형제들아 좀 영접해 주고 같이 사귀자. 이 말입니다.

사귀는데 그 사귈 때 인간의 사랑이 아니라 주님이 주신 사랑이 있는 사람만 사도의 가치를 알아보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요새 가치 있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돈도 가치 있고, 부동산도 가치 있고 다 가치가 있는데, 사도가 전하는 생명의 복음을 가치 있게 보는 사람은 그의 없잖아요. 그의 없는데 있다는 말은, 그 사람이 위대해서가 아니라 주님이 주신 생명이 그 사람 속에 있으니까 결국 서로는 미워하지 않고 말씀 가운데 서로 사귈 수 있는 그런 놀라운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게 뭐냐? 사랑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자, 그러면 그 사랑이 있으면, 이제 그 사랑으로 다 설명을 하는데, 15절을 봅시다. 이런 사랑이 있으면 어둠에 속한 것을 사랑하지 않아요. 왜 어두움을 사랑해서는 안 되는가, 그것을 설명 해 드리겠습니다.

어두움 쪽에 속한 사람이 뭘 말하는가 하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올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와서 우리한테 해 준 게 뭐가 있냐 이 말입니다. 흔히 ‘교회 갑시다.’ 라고 하면 ‘나도 왕년에 교회 다녀 봤는데, 교회 다녀도 내게 돌아오는 게 없더라.’ 이 말입니다. 결국 이 말은 교회에서 뭔가 들 줬다는 말이 아니고, 관심 없다는 말이 아니고, 근본적으로 예수님의 사랑이 없다는 징후가 되는 겁니다.

아까 징후는 영생이 있는 생명의 징후이지만, 또 징후가 뭐냐 하면, 어두움이 어두움으로 고발해 내는 그런 징후가 있는 거예요. 그런 것이 이 세상에 분명히 있어서, 어둠에 반응하는 사람은 어둠 쪽으로 가고, 빛에 반응하는 사람은 빛 쪽으로 오고, 한 쪽은 세상에 속한 사람이 있고 한 쪽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있고 분명히 둘로 구분될 필요가 있습니다.

구분될 필요가 있는데, 그러면 그것을 한데 모으는 것은 뭐냐? 그것은 바로 이유 없이 형제를 사랑하는 이것이니라. 하는 뜻이에요.

피곤하시니까 한 5분만 쉬고 마지막 시간 합시다.

(2006년 8월 25일 18:00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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