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4:6-8 (계 4:6)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Re..계 4: 6- 8 (거룩한 천사)
이름 : 이근호(IP:)
거룩한 천사
2006년 8월 20일 설교 본문: 요한계시록 4:6-8
(계 4:6)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 뒤에 눈이 가득하더라』
(계 4:7)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
(계 4:8) 『네 생물이 각각 여섯 날개가 있고 그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 하고』
평소에 천사들이 보고 싶지 않았습니까? 실제 천사의 모습을 보니 그들은 수많은 눈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 지상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처럼 형태를 갖고 있지 아니하면 모두 괴물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눈은 달랑 두 개만 있어야지 더 많으면 비정상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천사는 온통 눈이 밖혀 있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천사가 해야 할 기능과 관련있기 때문에 생겨난 기관입니다. 천사들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다 알 수 있는 시각점을 살고 있습니다. 비록 이 지상에서는 보이지는 않지만 하늘 나라의 보좌에서는 이 세상 구석구석을 다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천사들은 눈이 가득한 형태로 존재하는 겁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 전부를 다 알지 못하기에 쉬지 않고 실수하고 오류를 범합니다. 뭣하나 제대로 하는 일이 없습니다. 돌아보면 모두 미흡하고 후회할 것들입니다. 하지만 거기에 비해 천사들은 이미 완료된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하늘 나라의 보좌를 보게 되면 사자, 송아지, 사람, 독수리 얼굴을 하고 있는 천사들에게 의해서 늘 이동할 준비가 갖추어진 보좌를 모습을 보여줍니다.
4명의 천사들은 보좌의 각 측면을 담당하여 보좌 안에 계신 분의 분부에 따라 즉각 보좌 자체를 이동할 역할을 하는 천사들입니다. 에스겔 1장에 보면, 이들 4 생물의 천사들은 그들 안에 바퀴들이 있어 늘 분주하게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런 연유로 하여 그동안 요한계시록 2-3장에 걸쳐 지상의 교회를 비판해 온 겁니다.
즉 참된 거룩한 장소는 지금 이동중이기에 결코 지상의 특정 장소에 점유당할 수 없다는 겁니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눈이 어두운 것은 생각못하고 육신적인 눈과 욕망에 준해서 현재 자신의 자리에 연연하고자 합니다. 그러한 예가 성경에 나옵니다.
열왕기하 6장에 보면, 엘리사가 거하는 성에 아람대군들이 삥 둘러 포위하게 되었습니다. 엘리사의 사환이 얼굴이 새파랗게 되었습니다. 그는 절망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엘리사는 여유만만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눈이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 사환의 눈도 열게 합니다. 그제사 사환은 왜 엘리사 선지자가 여유만만하게 행동했는지를 압니다.
엘리사 편에 수많은 천군 천사와 불말과 불병거들이 함께 진을 치고 있어 그 어떤 적들이 쳐들어와도 전멸시킨 준비태세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와같이 신앙은 ‘눈 열림’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24장에 나오는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눈이 열리지 않아 함께 동행하시는 분은 부활하신 예수님이신 줄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숙소에는 식사하면서 주님께서 그들의 눈을 엘게 하니 비로소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했음을 알게 됩니다.
이처럼 눈이 가득 박혀 있는 천사들은 모든 면에 있어 인간보다 우월하고 월등해보입니다. 그들은 거룩하며 인간들은 더럽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시킨대로 삽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자신의 자율성을 다지는 쪽으로 살아갑니다. 창세기 3장에 나오는 모습은, 인간들은 두 가지 점을 욕망하고 있음이 드러납니다.
하나는 오래 사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모든 것을 아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몸은 죄의 지배를 받고 있는 처지라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죄가 압박하면 인간들은 더 이상 살고 싶지 않고 도리어 오래 사는 것이 고역임을 알게 됩니다. 숱한 지식도, 재물도 자신의 몸이 우습게 되어버리면 그것들도 우습게 됩니다.
하나님과 인간들의 관계란 마치 병원에서 철없는 소아과 어린 환자와 의사와의 관계와 같습니다. 어린이는 의사 앞에서 자기 자랑하기 바쁩니다. 자신은 유치원에서 노래도 잘하고 선생님에게 칭찬도 많이 받고 그림도 잘 그려서 상도 많았다고 자랑합니다. 의사선생님은 그런 아이들의 고분고분 들어주는 척 하면서 간호사를 보고서는 “간호사, 수술 준비하세요!”라고 단호하게 사태 파악에 맞는 일을 진행합니다.
하나님과 이와마찬가지입니다. 인간들은 세상을 보는 눈에 없어 늘 자기 중심적으로 세상을 좁게만 봅니다. 하나님께 충성해서 복받은 것으로 자신을 정상인으로 간주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수술 준비를 시키십니다. 그들 성도들은 죽지 아니하면 살 수 없고 예수님께서 외롭게 흘리신 보혈의 피가 아니면 영생할 수 없는 입장에 놓여 있는 겁니다.
이처럼 천사와 인간들 사이에는 엄청난 수준 차이가 존재하고 질적 차이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성도보다 천사가 천국에서 더 위대할까요?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6:3에 보면, 성도는 천사도 판단하는 높은 위치에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어째서 우리가 천사 위에 있는 자들이라는 말입니까?
그것은 천사는 우리 성도들처럼 죽음을 맛볼 수 없는 피조물들입니다. 처음부터 영원하기에 죽음이 주는 공포와 박탈감과 상실성과 절망감을 맛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천사들은 죄를 알지 못합니다. 영원토록 주님께서 시킨대로 움직였기에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시킨대로 일하는 피조물들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말씀처럼, 잃어버리지 않는 양 99마리 보다 잃어버렸다가 목자가 친히 되찾아오는 한 마리의 양이 참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집에서 평생 아버지와 함께 충실하게 일한 맏아들보다, 도리어 아버지 재산을 탕진하고 빈털터리 몰골을 하며 집으로 처량하게 돌아오는 그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주는 피조물입니다.
이처럼 성도에게는 다른 피조물들이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하나님의 아들의 고귀한 피가 묻혀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 피의 사랑을 받고 그 피의 증거에 동참한 자기 사람을 영원토록 자기 곁에 두십니다.
사람이 자율성이 남아 있게 되면 천사처럼 영원토록 거룩과 거룩을 주님께 돌리지 못합니다. 주님께서는 성도를 계속해서 죽이시고 죄인되게 하사 자신의 자율성을 믿지 않고 예수님의 피의 희생만 바라보게 합니다. 이렇게 될 때 비로소 그 성도는 영원토록 주님 곁에서 주님께만 감사와 영광과 거룩을 돌리게 됩니다.
이처럼 성도는 무엇을 해도, 종으로서 단지 할 바를 했을 뿐이라는 고백을 쏟아내는 자들입니다. 인간은 자아에 관심을 쏟으나 주님은 인간의 몸에 관심을 두어서 그 몸을 자신의 부활체와 같은 천사의 몸으로 바꾸십니다. 따라서 우리의 속 알맹이는 오로지 ‘시킨대로 움직인다’는 겸손함이 있어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로 하여금 더욱 죄인되게 하사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자아의 체면과 자존심을 생각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