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어떤 평신도의 글(이준)
[일반] 어떤 평신도의 글(이준)
이름 : 이근호(IP:)
성경을 읽다보면, 요한복음 20:22의 성령 불어내심(A)과 사도행전 2:17에 나오는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B)을 두고서 어떤 차이가 있느냐고 궁금해 하기 마련이다.
우선 몇 가지 선행 연구들을 간략히 살펴보면,
1. A는 교회의 기초인 사도들에게 내린 성령의 선물로써 개인적으로 임한 것이다. 신자의 내면에 진리를 깨닫게 하시는 내주하시는 성령으로 보혜사적 역할이 강하다. 이 점에서 요한복음의 성령은 개인적이며 정적이고 내재적이다. 이러한 부활절의 성령 주심은 활동적이라기 보다는 잠정적이었다. 즉 하나님의 때(오순절을 가리킴)를 기다려야 했다. B는 전체교회에 내린 성령의 선물로, 공적으로 강림하셔서 성령의 역사적인 임재를 대중에게 확인시킨 사건이었고, 선교를 목적으로 한 외형적이고 은사적인 성격을 강하게 지닌 것이었다.
A는 소생시키는 은혜를 가져왔고 B는 능력부여의 은혜를 가져왔다.
양자의 관계는 “단계” 원리 측면에서 이해되어져야 하는데, 이는 성령의 선물이 오순절이라는 단회적 사건을 통해 한꺼번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부활절-오순절로 이어지는 단계를 통하여 주어진 것이다. 이러한 정황을 보건대, A와 B의 성령 역사는 같은 게 아니다. 오순절 전에는 구원사역이 시간적 간격을 두고 일어나는 구원사적 단계가 있었으나 오순절 후에는 이 모든 사건들이 동시에 우리에게 나타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 표준은 A가 아니라 B이다.
**참고 문헌**
김유미(1995). 성령강림의 시기에 관한 연구-요한복음 20:22과 행 2장을 중심으로-. 서울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신학석사학위논문.
2. A는 B에 대한 요한적 해석도 아니고, 요한복음 군데군데에서 약속하신 성령 강림 예언의 약속에 대한 성취도 아니다. A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당신의 부활 후 당신을 대신하실 성령님의 특수 활동이나 임무 - 그리스도의 사역 계승자로서의 교회(제자들)에 그 자격을 부여함. (죄를 사해주는 그리스도를 증거함을 통해 행사되는) 사죄권을 교회에 부여하기 위함 - 에 강조를 두고 있다.
A는 B에 대하여 예변적, 예상적 말씀이다. 이는 A가 B에 대한 예표적 언급으로서, 마치 예수님께서 부활하여 육체로 돌아와 그의 제자들과 일시적으로 함께 계신 것이 그의 영적 귀환으로 “영원히” 제자들과 거처를 함께 하실 것(요 14:16)에 대한 예상적, 예표적 행동이었던 것과 같다.
교회(제자들)에 증거적 사명을 위한 궁극적이고도 강력한 힘을 제공하시는 분은 ‘생명수여자이며 성령수여자이신 부활하신 그리스도시다. 교회(제자들)가 그리스도 부활의 진리를 확신하는 기초위에 서 있다는 사실은 교회(제자들)의 증거적 생활에 있어 대전환점이 된다. 따라서, λαβετε πνευμα αγιον(성령 받으라)는 말씀으로 성령의 새시대가 이제 도래한 것이다.
**참고 문헌**
이승미(1985). 요한복음 20:22의 λαβετε πνευμα αγιον 해석. 고신대학 논문집 제3집.
3. 오순절을 전후로 하여 성령께서 구원의 은혜를 사람들에게 주신 것을 두고서 카이퍼는 B와 비교하여 하늘에서 내리는 비로 설명한다.
하늘에서 단비가 내렸다. 그 빗물을 사람이 받아 갈등이 일어날 때 목을 축이기 위해 간직한다. 그러나 간직하는 방법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각자가 따로 받아 간직한다. 다른 하나는 아주 다른 방법인데, 현재 도시에서 하고 있는 것처럼 공동수도 시설을 하게 되면, 개인은 물통이 필요가 없다. 다만 수도꼭지를 틀기만 하면, 각자가 원하는 대로 물이 나온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구원의 은혜가 몇 방울의 빗물처럼 성령께서 부드럽게 뿌리셨고, 꼭 같은 방법으로 각자가 자신을 위해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단순히 모은 것에 불과하다. 이런 것이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계속된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한 변화가 생긴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 자신의 인격 안에서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해 성령님의 충만한 흐름을 준비하시고, 그와 상관된 모든 성도들이 신앙이라는 통로를 통해서 연관되게 하셨으며, 그의 승천 이후에는 이와 연관된 성도는 온전해졌고, 그가 성령을 아버지께로부터 받아서, 최후의 장애물이 제거되고, 성령의 충만한 흐름이 신자들의 각 심령 속에 통로를 통해서 밀려들어오게 된 것이다. 이 전에는 각자가 자신을 위해서 고립적으로 노력하여 성령의 은혜를 받았으나, 이제는 그들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 아래 에 있는 모든 지체된 자들은 유기적 연합이 되었으니, 이것이 오순절 이전과 이후의 차이이다. 그러므로, 오순절에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로부터 그의 몸의 지체된 우리들에게 성령은 부어진 것이다.
**참고 문헌**
류동현(1998). A.Kuyper의 성령사역과 오순절성령강림. 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 신학석사학위논문.
4. A는 B와의 연관 속에서 오랫동안 많은 논쟁을 일으킨 신약의 어려운 문제중 하나이다. 이 구절의 해석에 대한 주된 견해는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요약이 가능하다.
첫째, 공적으로 성령의 강림은 오순절이었으나 이 날 제자들이 성령을 부여받았다는 해석이다. Calvin은, 성령은 예수의 은혜와 함께 뿌려진 것이지 B와 같이 충만한 능력과 함께 넘쳐 흘러난 것이 아니라고 한다. 즉, 성령이 주어졌지만 아직 넘쳐흐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Turner는 성령께서 두 번 오신 것이되, 그 성격은 다르다고 본다. 즉, A의 경우 요 17:17-19의 성취와 보충으로 주어진 것이고, B의 경우 보혜사 성령에 대한 약속의 성취라고 본다.
둘째, A는 B에서 주어질 성령에 대한 상징적인 약속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요한복음에서의 성령 오심에 대한 약속은 예수의 영광과 관련이 있고, 이 영광은 예수의 죽음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A의 성령은 의도된 선물이었다고 본다. 혹자는 A를 ‘요한의 오순절’로 이해하면서 부활절과 오순절을 구별하는 것은 요한 신학 - 요한복음서를 통하여 예수의 죽음, 부활, 승천을 근본적으로 하나로 제시함 - 과 맞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요한이 동일한 사건을 다른 관점에서 기술한 것에 불과하다고 본다. 즉, A와 B는 동일 사건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수혜자가 다르다는 점, 시간적, 공간적 차이점, 제자들이 계속 성령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점 등등으로 미루어볼 때 이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셋째, Gaffin의 견해에 따르면, 요한복음은 교회의 기초인 사도들에게 성령이 임함을 기술하고 있고, 사도행전은 교회 전체에 성령이 임함을 기술하고 있다고 묘사한다. 이에 따르면 성령은 단계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이렇듯 부활의 날과 오순절에 걸쳐서 단계적으로 주어진 것이기에, A는 B의 첫열매라 할 수 있다. 또한, A는 선교의 문맥 속에서 제자들에게 주어진 말씀이다. 부활하신 예수는 제자들에게 사역을 위임하시면서 그들의 사역을 준비시키기 위해 성령을 부여하신 것이다. 이것은 오순절 성령 강림의 선취적 의미를 갖고 있으며 성령의 부여로 제자들은 오순절을 기다리며 주님의 사역을 맡은 자들로서의 사역을 계속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은 것이다.
**참고 문헌**
노재관(2002). 칼빈논단. 요한복음에 나타나는 성령. 칼빈대학교.
위의 선행 연구들을 얼마든지(?) 참고로 할 수도 있다. 그러나, A와 B의 차이에 대한 이해를 통해 성령 주심과 성령 강림의 문제를 포함하여 평소 성경을 읽으면서 품어왔던 몇 가지 의문들은 ‘예수님의 주되심’, ‘성령’, ‘언약’, ‘십자가’, ‘종말’ 등을 포괄적으로 다시금 생각해 보게 하였다.
A와 B의 차이에 대하여 이해하기에 앞서, 통상적으로 알려진 바, ‘오순절 성령 강림 = 교회의 시작’이라는 도식을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여 왔다. 그러나, A에서만 보더라도, B 이전에도 ‘예수님으로부터’ 성령이 임하셨다는 사실 자체가 기존의 우리의 선입관과는 다른 각도로 성경을 대하게 한다(일단 논의를 위하여 구약시대와 오순절 이후의 성령 임하심의 수많은 사례들은 배제하기로 한다).
또 한 가지,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시기 전에는 교회가 없었단 말인가? 스데반의 설교에서 볼 수 있듯이, 구약시대의 유태인 종교 공동체를 두고서 ‘광야 교회’라 불렀었다(행 7:38). 교회를 가리키는 ‘ekklēsia’라는 단어는 교회에만 사용된 게 아님을 그리스어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다. 에베소에서 있었던 아데미 은감실 세공업자들의 소요 사태와 관련하여 등장하는 ‘민회’라는 단어도 ‘ekklēsia’이다(행 19:39). 이렇듯, 성경해석에 있어서 늘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방법들 가운데 하나가 어학적 접근이다. 교회를 결정짓는 기준은 용어에 의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주되심 내지는 거기에 담긴 신구약에 흐르는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결정되어져야 한다.
의문점의 대상은 이외에도 많다. 몇 가지 예를 더 들어보고자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십자가 사건이 있기 전에도 예수님께서 멀쩡하게 살아계시면서(!)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선포하고 다니셨다는 점이다(본인이 원하지도 않았음에도 중풍병자의 죄를 용서하신 사례). 또한, 부활 사건이 있기도 전에, 더욱이 예수님께서 채 죽으시기도 전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고 선포하시면서 죽은 사람들을 살리고 다니셨다는 점이다(대표적인 사례가 죽은 지 나흘이 지나서 나사로를 살리신 사례). 이러한 모습들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희생 제물로서의) 죽으심과 상관없이 죄사함을 베푸실 수 있는 권한과 더불어, 자신의 부활과 상관없이도 부활의 능력을 베푸실 수 있는 권한이 있으심을 보여주신 사례들이다. 이는, 죽지 않으시고도, 부활하지 않으시고도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완수하실 수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러한 권한들 - 사죄권, 생명권 - 을 지니셨음을 보여주신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성취하실 진정한 주님이심을 ‘미리(인간들이 이해하는 시간적 표현으로는)’ 보여주신 것이라는 말이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내가 그리스도라고 하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가(설령 살아났다 해도) 정작 그러한 권한을 (공생애를 통해) 보여주시고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이 아니고서는 그 누구도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말이다.
앞의 선행 연구들에서 신학자들이 ‘예표적’, ‘예상적’, ‘예변적’, ‘선취적’이라는 용어들을 사용하였는데, 이러한 용어들을 차용하여 굳이 시간적으로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겠다.
1) 예수님이 죽으시기 전에도 죄사함 받은 사람들은 십자가의 공로로 죄사함 받을 보편적인 성도들을 예표한 것이요,
2) 예수님이 부활하시기 전에도 나사로와 같이 죽었다가 살아난 사례들은 앞으로 죽었다가 부활하실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 안에서 영생을 얻고 함께 부활에 참여하게 될 보편적인 성도들을 예표하는 것이요,
3) 요 20:22의 성령 불어내심은 행 2장의 오순절 성령 강림에 앞서 교회(엄밀히 말하면 ‘신약교회’)의 대표격인 사도들을 대상으로 하여 앞으로 보편적으로 성도들에게 임하실 성령강림을 예표적으로 보여주신 실제 사건이며,
4) 구약시대의 특정 민족 집단인 유태인 공동체를 가리켜 ‘광야 교회’라고 부른 것은 장차 도래할 보편적, 세계적(우주적) 교회로서의 신약 교회를 예표적으로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등등...
그런데, 왜 굳이 우리가 느끼기기에 ‘시간차’로 다가오는 ‘예표-성취’의 단계(?)로 섭리해 나가시는 것일까? 이 점에 대하여 나는 ‘선취’ 혹은 ‘예표’라는 것이 오히려 시간적(순차적) 단계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순차적 단계를 뒤엎는 것이라 이해하고 싶다. 이 말은 예수님의 행적에 포함된 일련의 행위들이 사건들에 대한 인간의 보편적인 시간 의식-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를 향해 진행하는 - 을 뒤엎는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시간 의식에 비춰보면 ‘예표-성취’는 ‘맛보기-개시’의 의미로 다가오기 십상이다. 이것은 사건 자체에 의미를 두는 인간 본연의 의식적 활동의 결과이지, 사건 주체(예수님)에서 비롯되는 게 아님을 드러낸다. 이렇듯, 인간의 시간 의식을 뒤엎는 것을 핵심적으로 표현한 개념이 바로 ‘종말’이라는 것이다. ‘종말’의 의미는 실로 의미심장하다. 기존의 시간 의식에 오류가 있다면, 시간 의식 속에서 인간 세계가 벌여온 모든 것들도 문제가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나는 다음 인용글을 통하여 ‘종말’의 의미를 새겨보고자 하였다.
---------------------------------------------------------인용글---------------------------------------------------------------
[re] 다시 질문드립니다.
이근호 2006-08-18 20:13:26, 조회 : 25, 추천 : 0
예수님의 하신 일의 취지는 인간 세계의 시간 인식 순서에 의해서 정립되지 않습니다. 즉 "이것 다음에 이것 하시고 이것 다음에 저것 하시고..."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우리 인간들은은 시간적인 순서를 따라 인식 하고 싶어합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이 하신 일들이 인간들의 이해틀로서 해석이 가능한 일이 되고 맙니다. 여기에는 십자가 사건의 특창성이 빠져 있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간들의 이러한 인식의 틀까지 용인해주지 않고 파괴시키는 방식으로 작용합니다. 즉 인간들은 주님의 일을 이해가능한 지식으로 정립하여 소지하고 싶어합니다. (물론 자기 만의 지식으로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여기에 인간부정의 취지가 사라지고 인간긍정으로 마당이 되고 맙니다...(중략)...
종말이란 예수님께서 구상한 상황이 실제로 적용되는 와중에서 더이상 '시간적 지연'이 불 필요해져 버린 상황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히브리서 1:2의 말씀처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활동을 개시한 그 상황입니다. 이 '상황'을 자꾸만 '시점'으로 이해하려고 한다면 이는 여전히 인간들의 본성적인 순서적 인식틀을 망가트리고 싶지 않겠다는 본능적 반발에 해당됩니다. 예수님과 하나됨 영적 공간성, 그 외부가 다 종말입니다. 이 종말상태에서는...(중략)...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일하심을 증거하고 고백하는 식으로 가르쳐야 합니다...(중략)...성령님은, 성도들이 성령님 자체의 능력을 증거하라고 임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신 십자가 공로만 드높이라고 일하시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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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이라는 단어를 놓고서 나는 ‘끝장’이라 이해하고 싶다. 굳이 ‘시간’과 관련하여 생각해 볼 때, 종말은 시간의 끝이다. 시간이 끝장나버렸다는 말이다. 흘러가는 시간을 아무도 막을 수 없는데, 시간이 어디서 끝장 나버렸다는 것인가? ‘예수님 안’에서 그러하다.
척 스미스(‘세대주의’라는 종교 사기극단의 일원)는 자신의 계시록 강해에서 사도 요한이 ‘시간의 방’으로 이끌려 가서 미래에 펼쳐질 사변들을 미리 보고 기록하였다고 했는데, 굳이 표현하자면, 나는 ‘예수님 안’에서 ‘시간이 멈춰버렸다’고 말하고 싶다. 보다 엄밀히 말한다면, ‘인간의 시간 의식(보다 광범위하게 말하자면 인간의 역사의식)이 복음 안에서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시간이 끝장나버렸다’는 것은 그 시간이라는 것을 논의해왔던 인간들의 시간 의식도 더 이상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성경에 등장하는 일련의 사건들을 놓고서 시간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아담의 자손들은 그 모든 사변들을 순차적으로 이해하려 든다. 예컨대, 구원이라는 것을 놓고서 ‘예정선택-소명-중생-회심-믿음-칭의-양자-성화-영화’라는 식의 무의미한 순차적 나열에서 볼 수 있듯이 말이다.
(무엇이 끝장났다는 말인가? 인간 세계가 끝장 나버렸다는 것이다. 아담의 세계, 인간 사회의 의식과 그 의미, 아담 세계의 정신, 그 역사성 등이 총체적으로 종말을 맞이했다는 말이다. 물리적 종말은 굳이 표현하자면 ‘시간적’으로 분명히 있지만, 십자가 사건은 이미 아담 세계, 곧 역사 세계에 대한 종말을 결정적으로 선언하신 것이다.)
인간의 의식이 시간에 지배된다, 달리 말해 인간이 시간 의식에 매여 있다는 것은 인간, 즉 아담의 세계가 시간 의식 속에 놓여 있다는 말과 같다. 아담의 세계는 동산에서 추방당할 때부터 노동이라는 저주받은 운명 속에 살아가도록 결정되어졌다(여기서 타락한 인간의 저주받은 노동 원리와 하나님의 노동하심을 연관짓지 말라). 종교에 대해서도 이러한 원리는 똑같이 작용한다. 왜? 종교는 아담 세계의 구색 갖추기에 동원되는 필수품 중의 필수품이기에.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성경이라는 종교적 경전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변들에 대해서 본연의 인간의 시간 의식으로 정리하려 애쓰는 것도 알고 보면 아담 세계 정신(의식)의 발로다.
나는 (굳이 신학자들이 표현한 바) ‘예표적’, ‘예상적’, ‘예변적’, ‘선취적’ 행적들이 예수님 자신의 주되심을 드러내시는 것이라 본다. 이러한 주되심을 드러내는 행위들은 우리가 생각하기에 특정 시점에만 국한되어야 함을 뛰어넘어 말 그대로 선취적으로 작용하는데, 이것은 소위 말하는 ‘이미-아직 아니’라는 영적, 건설적 긴장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건전한 종말적 삶을 살아가도록 하려는 성경신학자나 기독교 윤리학자들의 입장에 우선적 역점을 두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아담 세계의 역사적 진행은 묵시 세계의 원리에 비춰볼 때 의미가 없다는 선언적인 말이다. 말 그대로 끝장나버린 것이다. 예수님의 주되심 속에는 주님으로서의 권한 속에 종말적 섭리가 담겨 있다. 언약은 아담 세계에 종말을 몰고 왔다.
부활절 이후의 성령 주심 또는 오순절의 성령 강림 사건 등과 같은 사안들도 반드시 예수님의 주되심이 띠는 성격과 관련하여 이해해야한다는 주장은 흔히 성령론은 기독론적으로 풀어가야 한다는 신학적 진술을 달리 표현한 것이라 하겠지만, 정작 그것이 아담 세계에 던져주는 바는 의미심장하다.
예수님께서는 성령께서 오시면 죄, 의,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실 것이라 말씀하셨다(요 16:8-11). 성령의 역할은 오직 예수님의 것을 가지고 성도들에게 알리시는 것이라 하셨다(요 16:14). 그런데, 그러한 사안들은 (여태까지의 것들이 아니라) ‘장래 일’이라는 것이다(요 16:13). 정리하면, 성령께서 성도들에게 알려주시는 ‘장래의 일’이란 어디까지나 예수님과 관련된 것인데, 그 내용물은 죄, 의, 심판에 대한 내용이라는 것이다.
우선, '장래'라는 말로 미루어 보아, 기존의 것, 여태까지의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는, 인간의 의식에 비추어 이러하다 저러하다는 식으로 여겨져 오던 것, 생각해 오던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즉, 아담의 세계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죄, 의, 심판에 대한 내용이 예수님을 중심으로 전혀 다른 각도로 펼쳐지기 때문이다.
죄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라고 하셨다. 인간의 통념상 적법하지 못한 것, 반인륜적인 것들이 죄로 여겨지는 법인데도 예수님께서는 죄임, 죄 아님의 기준 한가운데에다 예수님 자신을 꽂아버리셨다.
의란, 더 이상 예수님을 뵙지 못하는 것이라 하셨다. 기존의 ‘의’ 개념이란 인간의 자기 정당화이다. 인간은 어떨 때 자신을 정당화하는가? 자신의 행위와 관련짓지 않을 수 없다. 사회적 관계 측면에서든, 심지어 신 앞에서든 간에 특히 자신의 언행심사가 떳떳하다 싶은 부분에서는 당당한 게 인간의 의식이다. 그러나, ‘의’에 대하여 내리시는 예수님의 개념정의는 다르다.
본문은 다르지만, 요20:22과 이어지는 문맥 끝에서 도마의 의심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나를)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고 말씀하셨다. 성경은 믿음으로써만 의롭다 인정하심을 받는다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뵙지 못한 상태에서 믿음으로써 의롭다 인정함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바로 성령이 오셔서 하시게 될 일, 즉 ‘장래 일’, 달리 말해, 아담의 세계에 속하지 않는 예수님의 구속 사역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오순절 이전에도 능히 성령을 베푸실 수 있음을 보여주신 것은 이러한 일들을 가능케 하시는 성령이 오직 예수님으로부터만 나오신다는 것을 확인시키려는데 있다.
심판이란, 이 세상 임금이 심판 받았다는 것이다. 아담 세계가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요, 하나님의 심판은 아담 세상의 임금인 악마가 심판받았다는 말이다.
보라. 이 모든 개념들 - 죄, 의, 심판 - 이 아담 세계와의 단절, 아담 세계에 대한 심판, 아담 세계에 속한 기존의 통념 내지는 의식에 비춰 논해왔던 내용들과 단절됨을 확인할 수 있지 않는가. 이것은 그야말로 ‘종말’적 의미를 띠는 것이다. 이러한 아담 세계(의 정신, 의식)에 대한 ‘종말’은 어디가서 결정적으로 성취되는가. ‘십자가’이다. 구약으로부터 전해져온 언약의 정신이 모두 이 ‘십자가’를 향하고 있다. 아담 세계의 종말을 십자가 안에서 발견할 수 있다. ‘아담 세계의 끝장나버림’은 영원한 예수님 나라의 전개와 동시에 이루어진다. 성령 주심 또는 성령 강림은 반드시 이러한 종말적 맥락 하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
‘성령론적 사안들은 기독론적 중심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명제 하에, 이 글의 논점 - 성령 주심 또는 성령 강림과 관련된 차이점에 대한 이해 - 에 대하여 성경에 등장하는 관련된 일련의 사건들을 두고서 순차적으로 그 관계를 풀이해 나가는 것은 아담의 세계의 정신, 곧 인간의 시간 의식에 걸맞게 기존의 신학자들이 논의해 온 것이라 본다. 이에 대하여, ‘종말’이라는 개념은 예수님의 주되심, 아담 세계에 대한 심판, 묵시 세계, 성령님의 사역을 언약적 차원에서 포괄적으로 접근하게 한다.
성령 주심 또는 성령 강림의 차이성에 대한 이해도 바로 이러한 ‘종말’의 주도권이 예수님께 있으며, 이러한 예수님의 ‘종말’의 주도권은 구속과 심판이라는 언약적 섭리 -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예수님께만 사죄권과 심판권이 주어져 있다고 말씀하셨다. 마 9:6, 요 5:27 - 의 전개의 맥락에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계 1:18)”라고 말씀하셨었다.
전에 죽으셨던 예수님...즉,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은 영원히 살아계시면서 사망과 음부에 대하여 지니시게 되신 권한으로 이어진다. 앞서 ‘종말’은 ‘십자가’와 연관되어 있다고 했는데, 이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말한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아담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성격을 띤다. 동시에 아담 세계가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인자를 죽임으로 그 본색을 드러낸 것이기도 하다.
사망과 음부는 무엇인가? 천국에 대한 것이 아니다. 사망과 음부는 어디까지나 아담의 세계를 겨냥한 것이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사실이 ‘종말’에 대한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킨다. 사망과 음부는 아담 세계의 파멸이요, 종말이다. 즉, 예수님께서 지니신 사망과 음부의 열쇠(권한)는 곧 예수님께서 지니신 바, 아담 세계에 대한 종말(심판)의 권한을 뜻한다.
예수님께서 이 아담의 세계에 오셨을 때 어둠의 세계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죽여 버리고 말았다. 빛과 어둠은 양립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근본적으로 대결 관계에 놓여 있다. 그러한 대립의 절정이 또한 ‘십자가’이다. ‘십자가’는 이제 예수님을 죽인 아담 세계를 겨냥하고, 그리하여 아담의 세계는 하나님의 전쟁의 대상으로서 판정받았음이 드러났다.
(히 12:27-28) 『이 또 한 번이라 하심은 진동치 아니하는 것을 영존케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 곧 만든 것들의 변동될 것을 나타내심이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성령님께서 오셔서 죄, 의, 심판에 대하여 예수님의 것만 말씀하신다는 것은, 아담 세계의 죄, 의, 심판에 대한 의식을 철저히 부숴버린다는 말이기도 하다. 진동치 못할 나라에 대하여 이 진동하고(겔 31:16) 요동치며(시 65:7) 소동하는(사 17:12) 세계의 의식을 거부하고 심판하여 거짓되다 판정하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는데(요 7:7), 이러한 예수님의 의식(정신)을 성령님께서 그대로 자기 백성들에게 알리실 것이라는 말이다. 이것을 알게 된 백성들, 즉 성도들은 이 아담 세계 안에서 가인과 아벨처럼 대결 관계에 놓이게 될 수밖에 없다. 히 11장에 언급된 허다한 믿음의 증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통념상 ‘종말’을 ‘시간의 끝’에 해당하는 어떤 정점(특정 시점)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은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쥐고 계신다. ‘죽음과 지옥의 권세’를 예수님께서 쥐고 흔드신다는 말은 ‘종말’이 시간 의식을 넘어 예수님의 인격, 예수님의 주되심, 언약 성취자로서의 십자가의 예수님께 속한 것임을 말한다.
‘종말’이 시간의 끝이라고 여기는 의식은 그 특정 시점으로서의 ‘종말’ 이전의 시간의 선형적 흐름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예수님 = 종말에 대한 권한 소유자’라는 의식에 비춰보면, 이미 기존의 인간들의 시간 의식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성령 주심과 성령 강림의 차이점을 시간적 간격을 바탕으로 하여 공간적 차이, 수여 대상의 차이, 선교적 관점에서의 차이...등으로 논하는 잡다한 논의들도 ‘종말’의 개념 틀 안에서 다시금 논의되어져야 할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성령 받으라 하신 것은 이 아담의 세계가 이미 “끝을 맞이했다(끝장났다)”는 것이요(아담의 의식을 가지고 성경을 해석하는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종말의 대상이 됨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동시에 성도에게는 “끝을 기억하라”는 말씀이다. 다시 말하지만, 부활절의 성령 주심과 오순절 성령강림의 차이점 이해에 대한 문제도 이러한 맥락에서 접근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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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아, 드디어 수련장에 도착했네...어, 이제 강의 끝나고 물놀이 할 시간이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음, 풀장이 어디지. 아, 그 전에 몸부터 씻고 들어가야지. 씻는 곳이 어딨나? 아, 여기군. 그런데, 왜 이리 샤워기 물줄기가 가늘어...
B: ^^ 집사님, 조금만 참으세요. 조금 있으면 풀장에 풍덩하고 시원하게 몸 전체를 담글 수 있을테니까...어, 꼬마야, 안 씻고 풀장에 먼저 들어가면 어떡하냐, 하여튼...애들은 저렇다니까...어쨌든 보기 좋네요. 아이들이 마냥 즐거워하니...^^
A: 아, 마침 저기 풀장 주인이 오시는구만...사장님~ 사장님 맞으시죠?
C: 아 네, 제가 수련장 관리를 맡고 있는 ‘김상식’입니다. 무슨 일이라도...
A: 여기 샤워 시설이 좀 그렇네요. 물줄기가 빡세게 안나오는 거 같던데...풀장 관리하시면서 이런 우선적인 것에 신경 좀 써주셨으면 하는데요...
C: 에? 샤워 시설에 문제가 있던가요? 음, 그럼 풀장은 별 문제 없던가요? 그래도 저희 시설은 이 부근에서 유일한데다 그간 다녀가셨던 분들도 물 좋다 그러시고, 다른 별 말씀을 안 하셔서...실은 샤워장의 물도 풀장과 마찬가지로 ‘같은 곳’에서 끌어오거든요. 어쨌든...제가 이곳 주인이니 속히 점검해 보고 업자 불러서 조치하겠습니다.
김상식 씨...그는 분명히 이렇게 말했다. “제가 수련장 관리를 맡고 있는...” 그는 샤워장과 풀장 모두를 맡고 있다. 이용자들의 만족도와는 상관없이. 샤워장이든 풀장이든 그의 책임 하에 놓여 있다. 일부 꼬마들과는 달리 성숙한(?) 이용자들은 순차적인 수칙(?)을 지킬는지 모르겠지만...그러나 세 가지만은 기억하자. 하나는 수련장 ‘전체’를 관리하는 주인의 입장이요, 다른 하나는 순서에 아랑곳없이 물로 뛰어들어 마냥 좋아하는 아이들의 모습.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샤워장의 물이든 풀장 물이든 그 수원은 똑같다는 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