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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Re..20050503 부산강의-데카르트강의고린도전서

Re..20050503 부산강의-데카르트

이름 : 한윤범(IP:)

20050503 부산강의-데카르트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해 봅시다. 137페이지.

근대 신학이라 하는 것은 데카르트라는 사람으로부터 출발합니다. 데카르트의 사상은 한 마디로 말해서 이겁니다. 신이 어디 있느냐 하면, 인간의 의식 속에만 신이 파악된다. 이것이 데카르트의 사상의 요약입니다.

그전까지는 신이 어디서 파악되느냐 하면, 세상에는 물질을 연구해 보면 거기에 무한스러운 요소가 있고, 그 무한스러운 요소를 이어나가면 결국 그것이 신과 선이 맞닿아지지 않겠느냐?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천지창조인가, 미켈란젤로가 그린 그림 있죠. 손가락 가지고 이렇게 하는 거요. 인간은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는 것처럼. 거기에 보면 손가락이 맞닿아 있지요. ET도 비슷한데. ET가 모방해서 했는데.

데카르트는 거기에 대해서 반대하고 있습니다. 데카르트가 반대하는 이유는, 토마스 아퀴나스나 그런 사람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 사람들은 긍정적이죠. 이 세상을 연구하면 신이 발견된다. 사실은 신이 발견되는 게 아니라, 신의 흔적이 발견되겠지요.

이 '흔적'이라는 용어. 그런데 레비나스라는 근대, 20세기에 들어와서 철학계에서 신을 흔적으로서의 신을 여기에 상당히 강조되어 있습니다. 레비나스 철학에 의하면, 신은 이 땅에 줄줄 흘리고 다니는 겁니다. 애들 동전 주머니에 집어넣고 뛰어다니면 온 천지에 동전 있듯이, 이 동전 누구 거야? 동전 누구 거야? 하고 동전의 주인을 찾아가면 동전을 흘린 주인공이 찾아들듯이, 하나님께서 자기 주머니에 있는 뭔가 줄줄 흘리는 거예요.

그게 신의 흔적인데. 신의 흔적이라는 이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이라고 봤고, 이것이 기독교신학자들에 의해서 형상론이 흔적처럼 그렇게 이해되기 시작한 거예요. 신의 형상, 하나님의 형상.

좀더 어렵게 이야기하면, 모든 존재에는 반드시 뭐가 있느냐 하면, 형상이 있다. 이렇게 본 겁니다. 그런데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이 형상은 존재를 구체화하는 건데, 구체화하기 전에 있는 걸 뭐라 하느냐 하면, ‘질료’라 합니다. 질료라 하는 것은 일종의 혼돈이죠. 흐리멍덩한 거예요. 질료란 뭐냐? 형상이 없는 게 질료에요.

그러니까 질료에서 존재가 되겠습니까, 안 되겠습니까? 왜? 형상이 없기 때문에. 찰흙을 가지고 코끼리를 만들어라. 찰흙이 코끼리 아닙니까? 이렇게 곤란하죠. 찰흙이라는 질료, 그 재료를 가지고 이제 뭘 만드는 거예요. 어, 코끼리 됐네? 우리가 미술시간에 학생이 생각하기를 내가 만약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이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다 이 말은 곧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지금 하나님이 형상대로 사람을 지은 그것을 미술시간에 그대로 재현을 해 보이는 거예요.

찰흙이라는 질료에다가 나만의 아이디어, 코끼리는 이렇게 되어야 돼. 나만의 아이디어를 손을 가지고 빗으니까 코끼리 형상의 코끼리가 나오듯이, 창세기 1장 26절에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만들자. 우리들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자. 하는 그것이 공작시간에 한 행동을 그대로 했다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초기 신학자들은 스콜라신학자들은, 질료는 이것은 사람이 아니고, 질료 이걸 '소마'라 하거든요. 소마, 몸이라 해요. 신약에서 소마라 하고, 구약에서 '바사르'라 해서 살인데, 구약에서 살이라 하는 것은 그냥 살이 아니고 살점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것은 무엇과 대비되느냐 하면, 항상 무엇과 대비되느냐 하면, 뼈는 아니라는 뜻에서 살점이에요.

근데 구약학자들이 근대의 그 당시 옛날 사람들의 인간론이 히브리인들의 셈족의 인간론이 뭐냐 하면, 사람이 서 있고, 사람이 행동하는 걸 외형적으로 드러난 살점이 움직인다고 본 겁니다. 뼈는 안 보이잖아요. 뼈는 안 보이고 뭐가 보입니까? 살점이 보이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이라는 것은 모든 행동은 살점이 행동한 거예요. 내가 쳤다하는 것은 이것은 '바사르'가 박살내버린 거예요. 바사르라는 몸이 친 거예요. 이게 인간이라면, 그래서 시편에 보면 이 바사르가 쇠퇴하고 후패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 말고 '네페쉬'라는 게 또 있어요. 네페쉬라는 게 뭐냐 하면, 이런 살점을 움직이는 힘은 따로 있다는 거죠. 그게 네페쉬인데 그걸 가지고 혼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신약에 70인경에서 구약의 네페쉬, 혼이라는 것을 번역할 때 뭐로 번역했느냐 하면, '푸쉬케'라는 것으로 했어요. 그 푸쉬케라는 용어가 나오는 곳이 고린도전서 2장 14절에 보면, 육에 속한 자가 나오죠. 거기에 나와요.

어쨌든 간에 그러니까 이 용어가 70인경 번역자들이 네페쉬라는 것을 푸쉬케라고 할 때 푸쉬케라는 것을 혼으로 본 겁니다. 그런데 혼으로 봤을 때 재미있는 게 옛날의 셈족 사람들은 인간을 요소들의 뭉침, 구성으로 사람을 안 봤는데 이걸 번역하면서 성경 번역할 때 독자들이 있을 것 아닙니까? 독자들은 그냥 보는 게 아니고, 근대의 기호학 언어학에 보면, 자기 나름대로의 이걸 지평이라고 합니다. 자기 나름대로의 선입관이 있어요. 세계관이 있다고. 그 세계관과 융화가 되어야 돼요. 그쪽 세계관에 맞는 그쪽 용어로 사용해야 된다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 생명력이 뭐가 되느냐 하면, 나중에 혼이 돼버려요. 프뉴마라는 것이 영이 돼버리고. 프뉴마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활동을 말하거든요. 그런데 이쪽에 신약에 와서 뭐가 돼버리느냐 하면, 이 용어를 가지고 사람들은 사람 속에 소유되어 있는, 그러니까 신약도 마찬가지에요. 신약도 언약적으로 보면 그냥 하나님의 성령의 활동을 말하는데 이게 프뉴마, 영인데, 그렇게 보지 않고 저쪽에서 활동한 그것이 내 속에 요소로서 변화되어서 장착이 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게 좀 말이 안 되지요.

저게 2%입니까? 마시는 게. 손무성 목사님이 2% 마시고 있다 말이죠. 그러니까 제가 2%입니까? 2%라는 음료수입니다. 그럼 내 속에 2% 있다고 하는 거예요. 손 목사님은 설치고 활동해도 그게 그냥 활동하는 건지, 이게 내 속에 나의 소유로 장착될 때 비로소 나에게 어떤 유익된 변화가 주어진다는 겁니다. 이 머리 사고방식이요, 이것 때문에 한국교회 다 완전히 버려놨어요.

제가 어제 야외예배 드리는데, 전화가 왔지, 비 오는데 합니까, 안 합니까? 뭐 이렇게 하는데. 날씨 때문에 일을 못하는 것, 앞으로도 뭘 해도 또 초조해지고. 지도자가 흔들리면 안돼요. 날씨 때문에 뭘 취소하면 안돼요. 그러면 자꾸 말씀 먹는 것보다 딴 데 신경을 더 쓴다고요. 우리 장로님 특징이 그래요. 그냥 밀어붙이는 거예요. 비가 오든 뭐가 오든 그냥 밀어붙이는 거예요. 안 그러면 여관 잡아서 하면 되니까. 그냥 밀어붙이는 거예요.

날씨 끝내줬어요. 심지어 날씨가 비가 가로로 막 뿌렸거든요. 전화가 와서 합니까, 안 합니까? 아, 합니다. 이렇게 됐는데. 그것 때문에 그 좋은 방갈로, 멋진 장소가 예약 취소 돼버렸어. 가니까 휭하니 실컷 놀다오니까 백 명이 예약 취소됐는데 우리 자리 들어가고. 날씨 좀 좋으니까 그때 차타고 와서 얼굴 내밀고. 좋은 장소가 비더란 말이죠.

그걸 알았어요. 하나님께서 말씀 중심으로 일하지, 날씨 중심으로 일 안 한다는. 여러분 수련회 같은 것 할 때 비가 오고 안 오고 관계없어요. 말씀만 좋으면 비와도 비 오는 대로 축복으로 느껴집니다. 단비, 마태복음 5장에서 선한 것과 관계없이 비 주듯이. 말씀을 생각 안 할 때는 모든 환경이 땅바닥에 되지만. 딴 소리했는데.

거기서 그런 설교했어요. 야외에서 이 이야기하는데 여기서 저기서 축구하고 족구하고 난리가 났어요. 홈런 하면서. 설교가 되어야지. 힘들데 예. 나도 여러 번 했지만. 그때 애들까지 있으니까. 그래서 거기서 행동으로 보여줬어요. 뭐냐 하면 종이쪽지를 메모지 해서 구원은 뭐냐? 해서 쭉 걸어 다니면서 한 장 줬어요? 아무 것도 적지 않은 건데. 구원은 가만있는데 주는 거다 말이죠.

그런데 어떤 사람은 내가 갖고 있으니까 이걸 얻으려고 나한테 오는 거예요. 오진 않았지만 오는 사람 있을 것 아닙니까? 뭐 나눠주니까 지도 뭐 얻으려고 티켓 하나 얻으려고 올 것 아닙니까? 그때 자기 힘으로 구원을 받고 싶은 사람은 진짜 꿀밤 주고 싶다고 했어요. 가만 생각해 보니까 너무 심하게 이야기했나? 점점 폭력적이 되가는 것 아닌가 생각도 했는데.

자기 힘으로 구원을 예수 믿어 구원받겠다는 사람들 쥐어박아 버리고 싶어요. 그거는 한국교회가 잘못된 게 왜냐하면, 한국교회나 모든 인간이 마찬가지인데. 왜냐하면, 구원이던 생명이던 전부다 내 소유로 장착을 하려고 하는 기라. 타악기, 총알 조율하듯이.

언약적으로 보면 구원이라 하는 것은 내가 가질만한 게 전혀 없어요. 저쪽에서 하늘나라에서 계속해서 일하시는 거예요. 심지어 내가 오줌 눌 때나 술 한 잔 먹고 늘어질 때나 전혀 상관없이. 밥 먹고 도둑질하던 뭐든 전혀 상관없이 구원이라는 것이 저쪽에서 일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밥 먹고 오줌 누고 술 퍼먹고 하는 이건 뭐냐? 이거는 바사르에요. 구약적으로 보면, 내 살점이 일하는 거예요. 근데 그 살점은 그런 일을 하면서 점점 후패해 가는 거예요. 길어도 70년. 수고와 슬픔뿐이네.

그런데 시편에 보면, 그런 인간을 구원하려는 것은 하나님의 의인데 그 하나님의 의는 나한테 있는 게 장착되어 있는 게 아니라 나의 것으로 전환되는 것도 아니고, 계속해서 언약 안에만 맴돌고, 이렇게 하나의 열기구처럼 공중에 있는 거예요. 언약 안에서 계속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연속이라 하는 것은 티켓처럼 하나 가지고 내 것 만드는 게 아니라 계속해서 그 인간이 죽을 때까지, 아니 천국 가서 계속해서 예수님의 의와 능력으로 우리에게 계속해서 햇빛 쏟아지듯이 부어주는 겁니다. 그게 은혜인데, 그게 은사의 특징 아닙니까?

은사도 다시 해야 돼요. 시중에 나와 있는 은사는 다 틀렸습니다. 은사는 다시 해야 돼요. 뭐가 다시 해야 하느냐 하면, 은사라 하니까 이게 전부다 달란트 비유처럼 은사라 하니까 소유용이 될 수 있는 은사처럼 여기는 겁니다. 그러니까 은사 가지고 그 사람의 다른 쪽과 어떻게 차이 나는 걸로 여긴다 말이죠. 그런데 차이 나는 인간들끼리 어떻게 사랑이 됩니까? 사랑이라 하는 것은 차이가 없어져야 사랑인데. 상대방도 이해 못하고 사랑한다는 게 사랑이겠습니까? 약 올리는 거지요.

그거는 어제 대구강의에서 어렵게 이야기했습니다만 이 강의는 주제가 그게 아니니까 그 이야기 안 하겠습니다만.

그래서 야외예배하면서 인간이 스스로 구원을 받겠다고 나서는 그 자체가 구원에 대해서 무지무지하게 오해하고 있는 거예요. 구원이라든지 영생이라든지 이런 것에서 무지무지하게 오해하고 있는데, 그 오해들이 우리만 오해하는 것이 아니고 여기 있는 50여명의 신학자들이 살아온 모든 신학을 통해서 보면, 전부다 대부분이 오해하고 있어요. 데카르트 오해하고, 오해하고 있다고.

그냥 주신다는 것을 이해를 못하고, 주셨다면 내 안에 소유라는 의식이 어떤 소유된 흔적이 있어야 되지 않겠느냐 하는 거죠. 소유된 흔적이 있을 때 비로소 나는 열매 맺혔다, 또는 나는 구원을 가졌다. 나는 구원의 은사의 열매가 드러난다. 이런 식으로 사도 바울이 이야기하는 것이 합당하게 내 현 상황과 성경말씀과 합당하게 딱딱 맞아 떨어지지 않겠느냐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한 사고방식의 대표적인 사람 중에 한 사람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인데, 제가 신학교 가지전부터 로이드 존스의 목사님의 책, [영적 생활]부터 해서 그 뒤에 나오는 책들은 거의 다 읽었다고 볼 수 있어요.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두꺼운 책 로마서 1권, 2권, 6권까지 나왔습니까? 거기다가 에베소서 강해, 이걸 다 읽어서 신학생 필독서라고 거기에 집어넣었는데,

그 사람의 책을 꼭 읽어보라 하는 이유가 그분의 설교가 한편 한편이 하나의 자기와의 약속, 자기가 생각한 논문이라는 것. 사람을 보이기 위함이 아니라 어떻게 내가 성경을 정리하나 자기 정리하는 노트로서의 나는 이렇게 신앙 생활한다는 식으로 상대방을 이야기하는 그것이 기존의 설교, 나는 목사인데 너는 나한테 배워라 하는 그것 하고는 너무나 대조, 딴 판이기 때문에 그 점이 참, 마음에 들었어요. 나, 이렇게 살아갑니다. 당신들이 어떻게 사는가 모르지만 난 이렇게 살아갑니다. 하는 난 성경을 이렇게 풀이했고 이렇게 해석하고 이렇게 생각합니다. 라는 그것과 또 하나는 뭐냐 하면, 설교를 하시면서 교회사, 조직신학, 성경신학, 전체다가 나온다는 거.

좀 미흡한 점은 설교 하나를 듣더라도 그 다음 설교를 안 듣더라도 그 자체로서 사람들에게 모든 걸 이야기 해 줘야 할 텐데 약간 그 다음의 시리즈를 자꾸 사람들에게 기다리게 하는 그게 있어서 계속해서 미흡함으로 남아 있다는 거예요. 그게 좀 설교에 있어서 실력이 모자라지 않겠느냐. 그게 설교 실력이 모자라는 그런 경향이 있지요.

그래서 박영선 목사님도 초창기 설교 보면 약간의 2% 모자라는 게 있어요. 다음을 기약하도록. 그걸 보면 설교, 설교 하나가 완결 쪽으로 나가지 않고 다음에 또 오시면 더 좋은 것 듣습니다. 이런 식으로 뉘앙스를 주는 것은, 그게 단점이라고 할 수 없는데, 그게 제가 보기에 약간 미흡하다 이런 생각이 들어요.

요새 대장간 박기삼사장님의 설교를 잘 들어요. 들어보면 하나하나가 완결되고 설교가 참 좋았어요. 상당히 깊고요. 설교가 45분 넘어갑니다. 쭉 넘어가는데 녹음 상태가 좋고 안 좋고 상관없고 내용만 좋고 자기 성의를 다해서 하면 그게 좋은 거예요.

은사론에 있어서 로이드 존스 목사님에 있어서 뒤에 나오는 소위 명령법이 있잖아요. 로마서 강해서 보면 뒤에 명령법이 나오는데, 그 명령법을 앞에서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이렇게 본 거예요. 앞에서 에베소 1장이든, 골로새 1장이든, 로마서나 앞에서는 교리가 나온다고 본 거예요. 그 사람은.

교리가 나왔으니 이 교리가 인간의 속에 소유가 돼버려요. 소유가 되면 이 소유가 인간을 존재를 변하게 하고, 이 변화된 존재가 자연적으로 나온 게 뭐냐 하면, 이 명령에 맞는 어떤 행동이 나오는 겁니다. 행동이라는 것은 인간의 존재에서 나오고, 그 존재는 뭔가 들어있는 구성에서 행동이 나온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앞에 반드시 뭐가 있어야 되는 거예요? 앞에 있는 교리적인 하나님의 모든 활동이 자기 것으로 소유화 되어야 나만의 행동이 나온다는 겁니다.

말이 참 어려운데 쉽게 해 봅시다. 술 취하지 말고 성령에 취하라. 할 때에 저는 이걸 딱 보면서 이거는 개인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 전체에 대한 요구사항이라 이렇게 보거든요. 개인적이 아니고. 그런데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이 이론에 따르면 술 안 취하고 성령 취한 사람이 따로 있고, 그렇지 않고 다른 사람은 술 취한 사람이 따로 있다고 보는 거예요. 개인의 특수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말씀대로 순종하는 사람에게만 이 말씀이 성취가 되고, 그렇지 않으면 성취되지 못하는 개인적인 말씀이라고 염두에 두고 이 말씀을 줬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저는 이걸 그렇게 보지 않고 하나의 그리스도 몸에게 준 거지 전체에게 준 것이지, 개인에게 니, 이거 술 취하지 말고 잘해봐. 그러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개인에게 어떤 당부하지 않은 말씀이라고 저는 보지 않는다 이 말입니다.

이야기 처음 듣지요. 이게 이스라엘의 개념을 알게 되면 이런 개념이 나와요. 구약의 이스라엘이란 개념이 개인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야곱은 그렇게 오해했어요. 사다리 위에 천사가 오르락내리락하니까 그 많은 천사가 전부다 자기보고 돌보아 주기 위해서 자기 보디가드 하는 것으로 온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 천사가 얼마나 숫자가 많은지 '마하나임'이에요. 나중에 보니까 이스라엘은 야곱은 그냥 야곱의 허리를 빌릴 뿐이에요. 야곱의 허리에서 뭐가 나옵니까? 왕들이 나와요. 결국 그것은 이스라엘이라는 하나님의 에스겔 37장 8절에 보면, 골짜기에서 해골되고 마지막에 수많은 사람이 골짜기 산더미 있는데 그 전체를 하나님의 군대 아닙니까? 하나님의 군대 전체를 위한 천사들의 활동입니다.

그게 여호수아 장군이 여호수아 전쟁하기 전에 가나안 전쟁하기 전에 누굴 만납니까? 모세처럼 군대장관을 만나지요. 그때 신발을 벗잖아요. 그러니까 가나안 전쟁이던 모든 전쟁은 사실은 천사들이 최초로 있었던 악한 천사와 나쁜 천사들의 계속된 전쟁에 그 영적인 실상이 지상에 언약공동체를 위해서 그게 표현되는 거예요. 바깥으로 드러나는 거예요. 역사의 장이 그래요.

여자의 후손, 뱀의 후손, 용어 자체가 영적 용어 아닙니까? 무슨 뱀 새끼가 뭘 겨냥할 줄 압니까? 뱀의 후손, 뱀의 자식과 여자의 후손이라는 이 용어 자체가 우리가 역사적에서 배태되는 인간의 바사르, 몸에서 나온 그런 용어로서는 도저히 표현이 안 되는 거예요.

무슨 말이냐 하면, 성경 자체가 인간의 언어로서 표현이 안 되는 겁니다. 전부다. 영적으로 표현되는 거예요. 영적으로 표현되는 것을 육적으로 바사르 쪽으로 표현하다 보니까 인간들은 거기에서 과거에 있던 아담 속에 있던 푸쉬케라 하는데, 아담 쪽에 있는 혼인데, 혼에 대한 개념들이 용어들이 많이 있어요.

아담에서 내려온 인간의 자연적인 본성, 생래적인 본성, 그냥 자연스러움. 인간이 죄 짓고 난 뒤에 지옥 에 다 보냈는데도 불구하고 그중에 특수한 사람을 몇 명 뽑아서 자기 백성 삼은 것은 영적인 전쟁을 하고 있는 영적인 전쟁이 어떤 양상이냐를 역사 속에 보여주기 위한 용사들이에요.

그래서 다윗을 느낍니다. 뭐냐 하면, 다윗은 하나님의 영적인 눈을 열어서 골리앗을 대할 때 역사적인 평가를 보면 골리앗은 장대 같고 다윗을 왜소하기 때문에 승리가 안돼요. 그런데 영적으로 보면 같은 바사르에 속하거든요. 같은 육에 속한 것 아닙니까? 그래서 이 전쟁은 사람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말 하기는 굉장히 쉬워요.

이 전쟁은 사람에게 속한 게, 목회는 사람에게 속한 게 아니라 말하기는 그렇게 쉬운데, 왜 비 온다고 교인 몇 명 빠지니까 왜 화딱지나서 설교도 안 되고 그러냐 말이죠. 목회는 내가 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하는데 왜 자기가 하지 않는 목회 일에 지가 왜 신경을 쓰고 관심을 갖고 있느냐 말이죠. 이게 욕심이잖아요.

차~암, 골리앗과 전쟁을 하면서 사울 왕과 골리앗 입장에서는 바사르적이에요. 육적이라니까. 육적이기 때문에 이쪽은 장대 같고 이쪽은 키도 크니까 반드시 지게 돼 있고, 그러니까 사울 왕은, 애야 다윗아? 예. 니 갑옷 입고 가야지. 창 들고 가야지. 그런 이야기를 한 것은 이미 역사 자체가 이미 이거는 하나님께 의도 없고 이거는 바사르니까 박살내야 돼요.

사실은 그 자체가 지옥이고 아무 의미 없는데, 뭔가 섬광처럼 하나의 별똥별처럼 반짝 불꽃 놀이하는 것처럼 그 순간순간 뭔가 반짝 피어오르는 게 있는데 뭐냐? 그 전쟁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 하십니다. 하나님 안 보이잖아요. 안 보여도 사람의 덩치 차이가 아무런 여기에 의미가 없다는 덩치 차이나 인간의 육적인 힘의 차이가 하나님 일과 아~무 연관성이 없어요.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는데, 크로스빌리지에 인간의 구원받기 위해서 오면 쥐어박고 싶단 말이죠. 인간이 자기가 육적인 힘으로 구원을 받는 것은 썩어질 인간의 일이지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조건과 장애와 아이큐와 그 사람의 출생신분, 남자냐 여자냐, 죄 많이 졌느냐 적게 졌느냐, 목사냐 평신도냐, 불교신자냐 절의 스님이냐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은 주시고자 하는 자는 자기 양을 구원하시는 거예요. 예수님의 자기숙제입니다.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그게 믿어진다는 게, 오히려 다윗이, 이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전쟁이라는 고백만큼이나 놀라운 고백이 뭐냐? 예수님께서 다 하십니다. 그 고백이에요. 정말 그 고백이요, 참, 육적인 것 갖고 이런 인간의 더러운 아담의 본성을 갖고 있는 인간으로서 그런 영안이 열리면서 영적인 걸 본다는 게 놀라운 겁니다.

엘리사가 게하시한테 영안을 열려주니까 저쪽의 군사 있는 만큼 이족은 천사들이 많잖아요. 그러니까 저쪽은 사람인데 이쪽은 누가 있다? 이쪽에 사람은 두 사람 밖에 없어. 엘리사하고 게하시 밖에 없는데 그게 무슨 전쟁이 됩니까? 그런데 이쪽에 누가 있습니까? 눈 떠 보니까 만군의 천군천사가 이쪽에 다 있잖아요. 그러니까 그놈들이 패배해서 봉사 되서 쫓겨나고 그런 이야기 나오잖아요.

이걸 어떻게 데카르트가 이런 걸 알겠어요. 어떻게 옛날 고대 신학자들이 이걸 알겠어요. 그 사람들은 제도권 교회를 부흥하는데 그것만 신경이 팔려 있지. 어떻게 이런 걸 아냐 말이죠. 그들이 신을 논하고 예수를 논해도 전부다 인간적으로 사람 하나 꼬셔서 교인 만들기 위한 수작에 지나지 않는데. 사람들이 갖고 있는 본성, 그 본성이 아까 뭐라 했습니까? 소유. 뭐든지 소유 아닙니까? 은사도 소유, 구원도 소유, 생명 영생도 소유, 전부다 예수님도 소유, 전부다 소유하려고 하는.

다시 이야기합니다. 구약에는 이런 개념이 없어요. 구약에는 움직이는 것은 육이고, 그 움직이게 하는 것은 푸쉬케,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아담을 지으시고 푸쉬케가 아니고 네페쉬, 혼을 집어넣었던 그 생명력으로 그렇게 된 겁니다. 이것이 신약에 오면 생명력이 뭐로 바뀌느냐? 마음으로 바뀌어요. 스콜라 철학에서 마음으로 바뀐다고.

마음이 아니라니까, 마음이 아니에요. 네페쉬는 마음이 아니란 말이죠. 그냥 생명력이에요. 우리 생명력이 아니고, 주님의 생명력이에요. 그게 신약에 와서 그 생명력이 뭔가가 분명히 드러난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나온 능력이라는 사실을 알았지요.

십자가의 능력이라는 것이 골로새서 1장에 보면, 죄를 씻는 그뿐만 아니고, 어느 지방에 비 오고 안 오고, 하는 전부가 십자가의 능력 때문에 생긴 현상입니다. 그것도 십자가의 능력이에요. 십자가의 능력이 개인의 죄만 씻어주는 게 아니고, 모든 세상의 만물을 지배하고 통치하는 여호와의 주권적인 능력까지 전부다 십자가에서 흘러나오는 겁니다.

그 말은 흘러나온다는 말은 다시 회수해서 십자가로 모으는 거예요. 그래서 나중에 열심히 착한 사람 지옥 가고 난 뒤에 내가 왜 지옥 갔지? 보니까 십자가 보여요. 아, 십자가 저걸 거부해서 지옥 갔구나. 지옥 간 이유가 하나밖에 없어요. 착한 일 나쁜 일 아니라, 십자가의 그 언약을 안 믿기 때문에 지옥 간 거예요. 그런데 십자가 믿을 능력도 하나님께 받은 적이 없어요. 그러니까 자기는 지옥 가도 당연한 거예요.

남자가 남자 화장실에 가면서 여자화장실에 못 갔다고 우는 놈 봤습니까? 남자로 태어났기에 고추가 있기에 남자화장실에 가야 되고 여자는 여자화장실에 가야 되잖아요. 이게 어렵습니까? 얼마나 쉬운 거예요? 쉽잖아요. 남자는 남자화장실에 말로는 쉽네? 이렇게 쉬운데 왜 지옥 갈 놈이 천당 가려고 오냐 말이에요. 이건 혼란이에요.

성서유니온의 창시자, 우리나라에선 유명한데, 윤종하씨가 뒤늦게 예정론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는 그 주장한지 한 10년 됐지요. 예정론 하는 것은 있으면 안 된다. 난 예정론을 거부합니다. 참, 그동안 숨긴다고 얼마나, 자수를 한 거지요. 그래서 우리교회에서 예정론을 한다고 싫어서 단지 예정론 때문에 안 나오는 사람이 있어요. 한 가족이.

아, 참, 그걸 볼 때 예수님이 예정했다 하면 고마운 줄 알면 그만이지, 그걸 왜 대드나 들이대나 말이죠. 그게 얼마나 웃기는 이야기입니까? 내게 보내준 자는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살린다 하면 살릴 줄 알고 믿습니다. 아멘 하고 하면 되지, 그게 왜 되도 않는 바사르적인 능력, 왜 그러니까 이게 좀 어려운데. 더 어렵게 해봅시다.

몸, 바사르, 육체, 살점이죠. 살점의 움직임을 뭐로 봤다고요? 인간으로 봤지요. 구약에서는 인간이 어떻게 마음을 모아서, 분석하지 않았다니까요. 왜 분석하지 않았는지 알아요? 그냥 인간은 꽃을 피우듯이, 유대인들이 꽃 분석합니까? 이거는 꽃잎이고, 이거는 ( ) 분석합니까? 전체가 꽃이에요. 마찬가지로 인간은, 바람에 꽃이 흔들리면 꽃이 흔들린다 하지, 저건 꽃이 흔들리니까 꽃은 따로 존재하고 꽃잎이 흔들리지. 이렇게 안 봤잖아요. 꽃 전체가 흔들리듯이 사람이 움직이면, 저건 마음이 어떻고 안 했어요. 그냥 움직이면 겉에서 나온 바사르가 그냥 하나님의 네페쉬에 의해서 그냥 움직이는 거예요.

그런데 구약에서 이렇게 하면서 그 다음에 바사르의 내용이 점점 더 깊어집니다. 인간이 왜 부패하느냐 하면, 죄라는 개념이 등장해요. 물론 이 죄라는 개념이 구약에서 언약에서 나와요. 언약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과 지상에 있는, 하나님 말씀은 다윗에 의하면 다윗은 뭘 믿었습니까? 저 할례 받지 못한 놈이 절대로 할례 받은 우리를 이길 수 없다는 언약적 원리를 주장했잖아요. 할례 받았다는 할례는 언약 아닙니까? 언약과, 지금 구약 이야기입니다.

언약과 바사르, 인간의 흔들리는 몸, 킬로수가 한 100킬로는 나와야 실감이 나는데, 흔들리는 살점과 언약과 만나면서 이 자체가 뭐가 되느냐 하면, 이게 죄로서 부패하는 이유를 언약을 통해서 알게 돼요. 그래서 인간은 풀의 꽃이요, 이사야에 나오지요. 인간은 풀의 꽃인데 영원히 사는, 이게 없어요. 인간은 그냥 풀의 꽃인데 다만 살아남는 것은 뭐냐 하면, 말씀은 영원해야 된다. 언약은 영원해야 된다. 이렇게 본다 말이죠.

그러면 나중에 구약 후반에 가면 다니엘 쯤 가면 다니엘이나 이사야 26장 쯤 가면, 이 말씀이 썩어가는 육을 새로 살립니다. 무덤에서 새로 살려요. 그러니까 이쪽에서 알아서 부활되는 게 아니고, 이거는 은퇴해야 돼. 이거는 갈아버려야 돼. 가루로 만들어줘야 돼. 이쪽에 뭔가 있어요. 뭔가 있는데 뭔지 몰라요. 이쪽에 의해서 뭔가 새로 나와요. 새로운 피조물이 나와요.

나중에 이쪽 안에 언약 안에 뭐가 있는데, 그 뭔가 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데 나사렛 예수 아닙니까? 내가 바로 말씀의 완성자다. 내가 다 이루었다. 나로 인하여 믿는 자는 나는 부활이고 생명이다.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 새로운 구약에 있는 모든 것이 언약에 있는 조직체에 의해서 다 살아나는 거예요. 살아나면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임금이 되고 살아난 사람이 이스라엘 군사가 되면서 그 자체를 놀랍게도 사도 바울은 놀랍게도 그걸 소마, 몸, ‘그리스도의 몸’이라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리스도의 몸이니까 그 안에 영혼이 있고, 이런 소리하면 안 되지요. 마음이 있고, 이런 소리하면 안 된다 말이지요. 그러니까 삼위일체가 문제 있지요. 예수님의 마음이니 뭐니 그거는 사도 바울이 한 이야기가 아니에요. 예수님 자체가 몸이에요.

나중에 혹시 기회 있으면 성만찬이론이 뭐가 문제인지를 좀더 상세하게 제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떡이 과연 예수님 살점이냐 살이냐, 피냐 하는 그 문제. 성만찬이 왜 그렇게 발달하느냐 하면, 요한복음 때문에 그래요. 요한복음에 보면, 누구든지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않고는 생명이 없다고 하니까 이거는 후대 교인들이 기어이 사람들에게 머리를 쓰고 환장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애들이 아이큐가 낮은 사람인지 분간이 안 되는데. 내 살과 내 피를 먹는다니까 이걸 실제로 살과 피를 입에 집어넣어 주는 그 장치를 교회가 만들어놓고 이 교회 없으면 구원이 없다. 이렇게 주장하고 싶은 거예요. 참, 그걸 보고 병신하고 천재하고 종이 한 장 차이다. 습자지 한 장 차이다 하는데, 습자지 한 장도 아니고 둘 다 똑같아요.

저는 근본 원인이 바로 바사르, 자기 육에서 나오는 육의 욕정, 그러니까 구원의 욕정, 자기 썩어져 가는 육을 회복시키려하는 그 본성을 끝내 이기리라(?) 천만의 말씀. 끝내 그걸못하고 발산되어서 나오는 그런 흔적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봅니다.

지금까지 한 걸, 산만하게 했는데 다시 한번 제가 확실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구약에서 언약적으로 보면 언약은 달처럼 떠있고 언약은 쏘는 거예요. 뭘 쏘느냐? 능력을 쏘는 거예요. 그 능력을 쏘는데, 인간에게 쏘아지는 능력을 네페쉬라고 합니다. 네페쉬라고 하는데 이걸 번역하니까 혼인 거예요. 구약에서도 이런 게 있어요. 영혼 할 때 네페쉬인데 그런데 70인경에서 번역하면서 이걸 뭐로 봤다? 헬라인들이 갖고 있는 세계관에 그걸 납득이 되도록 하다 보니까 이걸 영혼육에서 혼, 또는 합해서 영혼. 여기다 번역해버린 거예요.

번역하니까 헬라의 사고방식이 뭐냐? 육은 더러운 것이고 영혼은 깨끗한 것이다. 이렇게 본 거예요. 목사님, 그 말이 맞잖아요. 육은 더럽고 영혼은 깨끗하고. 이게 맞다, 아니다 문제가 아니에요. 그거는 강의한 것, 여러분 이해 못한 거예요. 이게 육은 더럽고 육은 썩어지고 영혼은 깨끗하다. 이 말이 맞잖아. 사실상 맞잖아. 우리가 그렇게 알고 있잖아. 라고만 생각한다면 그게 틀렸습니다, 맞는다 그 말이 아니고,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게. 이게 여러분 제일 이해가 안돼요.

이렇게 나누는 게 자체가 없다니까요. 제 취지가. 육은 썩어버리고 영혼은 남잖아. 이 말은 틀린 말이 아니잖아. 맞는 이야기 아닙니까? 할 때 맞다는 말이 자체적 내용상 틀렸다는 말이 아니고, 오히려 성경에서 이렇게 안 나누는데 왜 나눠놓고 맞는다고 이야기하느냐? 내 이야기는.

만약에 이게 맞아 버리면, 외부에서 날아오는 주님의 영이 여기에 아무 상관이 없어요. 아이큐가 낮은 개들이 보면, 주인 그림자를 밟는다고 장난친다고. 그런데 그림자라 하는 것은 내가 없으면 없는 건데, 이거는 몸체를 보지 않고 자꾸 강아지처럼 그림자만 보는 거예요. 강아지 눈에는 그림자가 뭐로 보입니까? 그게 실체로 보이는 거예요.

하나님 보시기에는 구약의 영혼육 전체가 뭡니까? 육인데 이건 누가 이야기했습니까? 사도 바울이 이야기했어요. 영혼육 전체 합해서 육이에요. 이게 육이라니까.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이 사람은 뭐로 보느냐? 육을 육이라고 보는 거예요. 육은 육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들의 식의 용어를 써요. 어떤 때는 육을 육으로 보면서도 사실은 그게 아니고, 영혼육 전체가 육이다. 이게 구약적으로 맞다.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후대 신학자들은 헷갈리는 기라. 사도 바울은 그게 전도용이거든요. 그 사람들의 세계관 속에 파고 들어가기 위해서 그들의 용어를 사용하니까.

그들의 자신의 용어를 포기하면 되는데 포기를 안 하는 거예요. 인간은. 왜냐하면 인간은 구원받고 싶은 욕망. 그래서 어떤 때는 소마, 육, 바사르, 푸쉬케, 또는 다른 또 있어요. 육적인 용어가 세 가지 있는데. 하여튼 그러한 것들을 사용하시는 것은 이러한 짓들을 다 때려 부수기 위해서 한 겁니다. 그 이야기는 아까 했고. 로이드 존스 목사님 이야기 다시 해 봅시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지금 이러한 사고방식에서 못 벗어나서 영혼이 살고, 영혼이 될 때 육이라는 생명이 나온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이렇게 보는데 모든 사람이 놀랍게도 여기에 동의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에요. 고개 끄덕이면서. 왜냐하면 교인들이 로이드 목사님이나 모든 목사님들이 이렇게 설교할 때 그들이 비로소 설교에 납득을 해요. 납득을 한다는 것이 수상하지 않습니까?

마치 뭐냐 하면, 골리앗하고 다윗이 싸울 때 다윗은 소년이니까 소년이 지고, 또 혹시 이기더라도 그건 요행이고, 사실 다윗이 지는 것이 정상이고 이기는 것은 골리앗이 이기는 게 정상이다. 라고 사울 왕이 백성들에게 이야기했거든요. 백성들이 전부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맞습니다. 옳습니다. 했는데 그게 다윗 형들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다윗은 이번 전쟁은 언약에 관한 것이다. 이게 키 크고 작고의 육적인 것이 아니고, 언약에 관한 것이다. 라고 하면 알아듣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아무도 못 알아들어요.

오늘날 교인들도 마찬가지에요. 그들이 생각하는 육적인 세계관을 설명하면 납득하면 되는데 진짜 성경대로 복음대로 하면 아이고, 어이 그럴 수 있습니까? 내가 아무것도 안 하는데 구원을 받아요. 뭘 해야 구원받지. 목사님, 명령법 폼으로 있습니까? 명령법 많이 나오데요.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명령대로 살아라 하는데 우리도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인간이 달라지고 달라지면 인간의 행동이 나오고 그 행동대로 하면 구원받은 삶을 살고, 이게 맞는 것 아닙니까? 라고 그런 이야기 듣기를 마음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떤 때는 설교자가 그들이 생각하는 세계 속에 들어가야 돼요. 들어가서 휘저어버려야 돼요. 들어가서 헷갈리게 만들어버려야죠. 일단 들어갈 때는 쏙 들어가서 그게 아니고요 휘 저어버리면, 진짜 믿는 사람은 납득이 되고, 다른 사람 같으면 멀쭘하니 있지요.

하나의 예를 듭시다. 성경 오늘 처음 찾는데. 베드로후서 2장 385페이지, 6절에 보면,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 특별히 형벌하실 줄을 아시느니라" 이렇게 쭉 나오면서 2장 끝까지 나와요.

계속해서 몇 명의 종이 나오고 그들의 형편. 21절에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저희에게 나으니라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 했을 때에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

골리앗은 반드시 이기고 다윗은 지게 되어 있다는 이런 육적인 바사르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사람한테 이 이야기를 해주고 설명해 보라고 해보세요. 해보면 전부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십자가의 도를 알고 난 뒤에는 정신 바짝 차려서 다시는 즉 이 명령이 나오니까, 명령을 다 지켜야 되고, 하여튼 성경에 나오는 명령, 베드로전서에 나오는 명령, 후서에 나오는 명령들, 사도 바울의 명령이란 명령은 다 지켜야 되고, 만약에 하나라도 무시하고 어겨버리면, 이것은 개가 토했던 것을 도로 삼키고, 돼지가 더러운 곳에 씻었다가 도로 들어가는 그런 식이기 때문에 이러한 인간들은 결국은 롯처럼 되지 못하고 뒤 돌아봐서 멸망당하는 사람이 됐다. 다 그렇게 이야기해요.

그리고 특히 여기 목사들한테 기분 좋은 것은 뭐냐? 10절에 보면,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 특별히 형벌하실 줄을 아시느니라" 이건 줄 그어놓는 거예요. 교회 주관하시는 이가 누굽니까? 목사 아닙니까? 목사한테 대들면 뭐가 온다? 형벌. '특히'가 중요해요. 특히 형벌이 주어진다.

그러면 이 소리를 듣고 교인들은 방금 이야기한 것처럼 교인들의 육적인 선입감에 명령, ‘하라’를 안 지키면 안 되니까, 예수 믿고 그 다음에 명령 중에 뭘 들었다? 불의한 더러운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 행하는, 주관하는 이에게 복종해야 된다는 명령도 그 교인들이 반드시 들어야 비로소 구원이 성사되는. 이거 참,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목사한테 순종해야 구원이 성사돼요. 만약에 안 그렇다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소돔과 고모라의 의로운 롯처럼 롯의 반열에 들어가지 못하는 겁니다.

이게 너무 가혹하잖아요. 너무 가혹하니까 목사들은 단계를 만들었어요. 하나는 뭐냐? 영적인 단계와 그 다음에 이게 단계가 육신의 단계, 육체의 단계 이거는 성경적으로 맞는 이야기인데 사실 단계가 아니고 같은 거지만, 그게 아니고 육신 중에도 두 가지가 있어요. 어린아이 같은 육신이 있고, 알면서도 일부러 세상 것에서 탈피 못하는 육신이 있어요.

육신의 종류가 두 가지가 있어요. 그러니까 옛 성품에서 아직도 못 빠져나온 육신, 알면서 그런 짓하는 놈과 몰라서 하는 사람들. 그러니까 교회에서 영적인 사람들 있죠. 1번. 2번은 어린아이 같은 사람들. 3번은 알면서 나쁜 짓하는 사람들. 이 세 그룹이 교회를 차지하고 육적인 사람은 이거는 아예 교회가 아니고.

그래서 이 사람은 구원 받는데, 문제는 세상적인 3번에 해당되는 이러한 알면서 나쁜 짓하는 이 사람은 어떻게 되느냐? 부끄러운 구원을 받고, 영적인 사람은 뭘 받느냐 하면, 이거는 하늘나라 상급이 보너스가 듬뿍 있다는 겁니다. 두 번째 인간은 목사한테 철저하게 종속되어서 가르침을 받아서 점점 더 어른 같은 영적인 어른으로 해야 될 그러한 대기상태에 있는 사람들. 이거 교회에서 제자훈련 하면서 해보세요. 그 다음부터 결석하는가?

이미 육적인 사고방식에 젖어있는 인간의 본성상, 이러한 신학이 옛날 웨슬리, 칼빈, 후반기 루터, 전부다 이게 그전에 천주교. 안 나올 수가 없어요. 천주교신학이 전부다 이거 아니에요. 천주교신학이 행함의 신학이에요. 여호와증인도 마찬가지고 전부다.

-목사님, 박영선 목사도 ....

박영선 목사도 그래요? 그러니까 지금 뭐냐 하면,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다는 것을 안 믿는 사람들이에요. 다른 원리인데, 원리가 다른데. 원리가 달라요. 이게 기존에 신학 책들을 보면 전부다 이런 식으로 되어 있어요.

이게 제가 보기에는 소유, 존재론을 깊이 공부를 안 해 봤기 때문에. 인간의 존재론부터 공부를 해야 되는데 신학교에서 그것까지 이야기 할 사람도 없고, 또 이야기해 줄 시간도 없고, 노회라고 총회라고 일주일 쉬어버리고. 20분 늦게 들어와서 20분 일찍 나가버리고 10분 동안 강의하고. 강의시간 들어와서 목사들 욕하고 나가버리고, 지 강의한 것 아무것도 없고.

-그러니까 이제 인간을 이분설, 삼분설, 그런 걸 가지고 ....

전부다 헬라철학이거든요. 그러면 헬라철학에서 왔다면 그냥 건성으로라도 헬라철학에서 인간이 왔다. 라고 헬라철학이 뭔지 공부를 해야 될 것 아닙니까? 헬라철학을 누가 이야기해주는 사람도 없고, 가르치는 사람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고, 말해주는 사람도 없고.

정답은 그겁니다. 소유가 아니고, 다 빼앗아 가버립니다. 소유가 아니고 하나님의 성령의 은사는 우리로 소유케 하는 것이 아니고, 현재 우리 남아 있는 것이 왜 죄냐? 왜 죄일 수밖에 없느냐? 를 들통 내면서 우리를 끌고 가버립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다는 특징이 뭐냐? 끌고 가면서 죄가 죄 되게 드러나는 거예요. 다른 사람한테는 안 드러나요. 다른 사람들은 멀쩡해요. 그런데 성도에게만 죄가 죄로 드러나요. 그 죄가 윤리도덕 죄가 아닙니다.

무슨 죄냐? 베드로후서 아까 읽었던 것에 아무 구절이든 다 되는데, 베드로후서 같은 경우에 여기에 "육체을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 행하여" 나오지요. 아까 10절에 나오잖아요.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 행하여 딱 나오면,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그 육체를 더럽히는 정욕이 뭐냐를 내가 평생 살아가면서 언약적으로 나에게 그걸 인식시키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임합니다. 육체의 정욕이 뭐냐를 성경을 가지고 쥐면서 평생 두고두고 살아가는 거예요.

더 쉬운 예로, 다윗이 누굴 이겼습니까? 골리앗을 이겼지요. 사실은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것뿐 아니라 다윗이 사울 왕을 이겼어요. 왜? 사울 왕은 골리앗을 못 이겼으니까. 그거는 개시에요. 다윗이 엉뚱한 골리앗 하나 등장시켜서 조진 것은 앞으로 싸움이 누구 싸움이냐? 다윗과 사울 왕의 싸움인데 그 사울 왕을 평가한 사람이 누군 줄 알아요?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그러니까 그 이스라엘 백성들한테 계속 쫓겨 다니는 거예요. 심지어 그 쫓겨 다니는 다윗에게 도와준 제사장 완전히 다 죽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자기 내부의 죄를 몰라요. 그 죄를 알리기 위해서 다윗 하나 등장시킵니다. 다윗 등장시키고 사울 조지고, 그 다음에 다음의 차기 왕이 누군 줄 몰라요. 아무도 몰라요. 솔로몬 태어나지도 않았어요. 솔로몬 태어나지 않았는데 다윗의 현 인생을 통해서 밧세바와의 관계를 통해서 그리고 밧세바에게서 태어난 자식의 죽음을 통해서 다윗 자신이 내가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주관자는 다윗, 나도 아니고, 골리앗은 나도 아니고, 사울 왕도 아니고, 언약 속에 있는 누구인 줄은 모르지만 그분이십니다. 그분만이 처음부터 언약의 주인공이었지, 이스라엘의 임금이고 주인공이었지, 저 다윗은 아니올시다. 똑같은 일을 지금 하고 있어요.

사람들이 은사할 때 은사가 우리한테 온다고 이렇게 이해하는데, 은사가 오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오는 거예요. 예수님이 덮쳐서 오는 거예요. 은사가 오는 게 아니고 예수님 자신의 능력이 오는 겁니다. 언약은 이 성경 전체는 왜 예수님이 우리와 똑같은 육신의 모습으로 와야 되느냐가 초점이에요. 성경의 핵심이 거기에 있습니다.

로마서 8장에 나오지요.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왔다. 했지요. 예수님이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과 우리가 어떤 차이가 있느냐 말이죠. 예수님의 육신은 그 자체가 육신이 아니고 영이고, 육신을 가져도 영이고, 우리의 육신은 바사르라 해요.

그래서 이 영적 전쟁의 승리자는 예수님이지, 결코 어떤 인간도 다윗도, 모세도, 엘리야도 결코 승리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해 줌으로써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주시라고 찬양하고 고백하는 그것이 성경 전체의 스토리입니다. 줄거리에요.

그런데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아, 그 정도는 기본적으로 안다고 합니다. 그 기본이 전혀 개인적인 구원론이라든지 개인적인 인간론이 먹혀들지 않는 것은 은사를 못 받아서 그래요. 그 실제적인 주님의 은사를 못 받았기 때문에 은사라는 것을 마치 내 속에 있는 카드처럼 내가 안 포케트에 넣을 수 있는 내 소유가 될 수 있는 것처럼 간주해 버립니다.

그러니까 은사하고 누구하고 떨어져요? 예수님하고 딱 떨어져버려요. 이게 단추 떨어지듯이 딱 떨어져버려요. 땡하고 굴러가서 나의 은사가 돼버려요. 나의 달란트가 돼버리고. 예수님의 힘이 아니고, 내 힘이 돼버린다 말이에요. 이게 뚝 떨어져서. 손모가지 떨어지듯이 뚝 떨어져서 때구루루 굴러가서 내게 돼버려요.

그럼 나는 뭐가 되느냐 하면, 이게 은사 힘이고 베드로후서에 나오는 이 말씀대로 완벽하게 지키지 아니하면 나는 구원을 못 받는다는 그러한 의식이 여기서 발생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그 자체가 뭐가 있느냐 하면, 예수님하고 전혀 상관이 없는 처음부터 예수님의 은사를 안 받았기 때문에 이런 아이디어가 생기는 겁니다. 예수님하고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 돼버립니다.

베드로후서 다시 보면, "저희가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라"라고 하실 때 이 말씀이 우리를 우리 소유용이 아니고, 이 말씀으로 우리를 공격하고 있다고 생각을 해야 돼요. 왜냐하면 우리의 형상은 예수님의 몸이기 때문에 받는 형상이지, 내가 따로 받는 형상은 없습니다. 그걸 아까 개인적인 말씀이 아니고, 이스라엘 전체에게 주신 말씀, 몸이라는 하나의 몸을 주신 말씀이지, 내 몸을 위한 말씀, 구원을 위한 말씀이 아니거든요.

그렇다면 이 목사, 당신의 주장은 뭐야? 그러면 결국 뭐냐고? 이 예수님과 떨어지지 않는 말씀이 우리 속에 성도에게 이것이 성취가 되는 거예요. 어떻게 성취되느냐 하면, 들어 봐. 아무개 목사가 예수님의 도를 안 후에 다시 개처럼 토하지 아니하고 돼지처럼 더러운 곳에 안 갔잖아. 그것 봐. 그러니까 예수님의 실력이 얼마나 놀라워. 이렇게 되는 거예요. 구원이.

꼭 속은 기분입니까? 다시 하라고요? 아무개 집사가 여기 중요해. 이 예수님 실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그 집사로 하여금 다시 토한 걸 먹지 않고 개한테 속하지 않고 그렇게 조치했잖아. 라고 예수님의 세상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집사한테 개인적으로 물어보죠. 당신은 어떻습니까? 나는 개지, 뭐. 이래요. 나는 돼지죠. 나는 평소에 살면서 개며, 나는 맨 날 토한 걸 또 먹으며, 나는 마치 더러운 곳에 또 가는 나는 돼지인 줄 알았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예수님이, 그것 봐. 그러니까 자기를 믿지 않고 누굴 믿었다고? 예수를 믿었잖아. 믿으니까 그런 골리앗 같은 본인도 다윗이라는 예수님에 의해서 승리되는 사람이 되었잖아. 그렇게 되는 겁니다.

구원받은 성도의 고백이 뭐냐 하면, 사도 바울 같은 경우에 내가 죄인 주의 괴수라 했거든요. 그러면 이거 뭐, 김 집사, 이 집사, 이 목사 하지 말고 사도 바울 봅시다. 사도 바울을 쭉 보게 되면, 자기가 이렇게 착한 일하고 있다. 이걸 증거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를 증거 하는 게 아니고, 지금 예수님이 나한테 뭘 퍼붓고 있다는 걸 증거 하는 거예요. 그 퍼붓고 있는 게 뭐냐 하면, 바로 은혜요, 그리고 자기를 말씀의 사역자로 세웠다. 특히 에베소 같은 경우에는 복음의 투구를 쓰고 영적인 싸움을 하고 있다 하잖아요.

그런데 영적 싸움을 본인이 하는 게 아니에요. 뭐, 베드로의 나의 경건으로 하는 게 아니에요.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영적인 싸움을 영안이 열리고, 영적인 싸움을 엘리사도 마찬가지지만 자기 싸움, 자기가 아람군대하고 싸우고 싶어서 환장한 사람이 아니잖아요. 영적인 싸움을 본인이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자꾸 자기를 가지고 영적인 싸움의 전쟁터에 자꾸 보내는 거예요. 자꾸 보낸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사도 바울과 일반교인 같은 엉터리 같은 교인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사도 바울은 지금 자기 원치 않는 싸움을 계속 싸우고 있는데, 일반교인들은 자기 구원을 자기가 챙기려고 자꾸 애를 쓰고 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자기 구원을 위해 애 쓸 수 있다는 자체가 이미 그거는 제가 보기에는 예수님의 은사를 못 받았기 때문에 꿀밤을 주고 싶다 말이죠. 지옥 간다고 말하고 싶지 않아요. 왜냐하면, 그 사람들도 직접 하려고 하는데.

그게 아닙니다. 그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게 육신적인 생각입니다. 그게 어린아이 같은 생각이에요. 내 구원을 내가 알아서 챙기는 게 아닙니다. 얼마나 든든한 분이 없었으면 못 믿었으면 자기가 알아서라도 어떻게 구원을 해보려고 애를 쓰겠습니까?

다윗이 얼마나 하나님을 든든하게 믿었으면 키가 3미터가 되던 5미터가 되던 아마 골리앗 말고 골리앗 형님이 와도 5미터 왔으면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또 한번 덤벼 볼래? 어차피 이 싸움은 끝난 싸움이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적 싸움도 이미 끝난 싸움 아닙니까? 끝난 싸움인데 자기가 자기를 구원하려고 애 쓴다는 것은 뭔가 배후에 주님이 뭔가 안 계신 것이 분명하지 싶어요.

이 말씀 한 구절 한 구절, 요한일서 3장 16절에 보면,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 마땅하니라"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면 이 말씀을 지켜야 됩니다.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 마땅하니라. 인간이 무슨 수로 이걸 지켜서 구원받습니까? 구원되었기에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내놔야 될 입장에 우리를 앞장 세워서 내보내지요. 보내는데, 잘 들어보세요. 이게 제일 중요한 겁니다.

다 그래야 된다는 것이 아니고, 이 보내는 것을 교회보고 했다는 거예요. 이해를 지금 못 하시는 것 같아.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 마땅하잖아요. 나는 발가락이고, 이장우 목사님은 손가락 아닙니까? 그런데 여기 어떤 형제가 지금 목숨을 바칠 형제가 살고 있을 경우에, 나도 나오고, 너도 나오고 이게 아니라니까. 아니고 한 마음이니까 이장우 목사님 보고 가라 할 수 있다 말이죠. 했을 때 누가 한 거예요? 내가 한 거예요. 이해 안 되십니까? 이게 한 마음이기 때문에.

이게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옵니다. 발이 한 것도 눈이 한 거예요. 눈이 한 것도 발이 한 것이고, 그게 주님이 한 것이고. 그런데 이게 개인적으로 보면, 아아, 이장우 목사님 좋겠다. 씨이, 형제를 위해서 목숨 바쳐서 지 구원받고. 나도 안 걸리나. 누구 내 목숨 바칠 놈 없나. 이거는 뭐냐 하면, 몸의 구원이 아니라 개인적인 구원을 생각하는 이게 바로 스콜라 철학이고, 이게 바로 엉터리 같은 신학들이고, 오늘날 신학들이다 이 말입니다.

더 심하게 이야기해 볼까요? 이장우 목사님이 하신 것이 아니고, 이미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이 형제를 살렸습니다. 이장우 목사님은 그냥 동원된 것뿐이에요. 그렇다면 예수님 믿는 사람은 그 다음부터 어떤 행동을 하든 구원받은 거예요. 지가 한 거예요. 그 몸에 붙어 있으니까. 자기가 구원받은 거예요. 그 정도로 예수를 믿어야 돼.

한 예를 들면, "내가 마지막 날에 아버지가 내게 보내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할 때 목사님, 저거 어떻게 지킵니까? 하면 안돼요. 그거 누가 지킵니까? 내가 마지막 날에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누가 지키는 거예요? 예수님이 지켰다면 그 예수님이 지킨 그 결과가 누구한테 퍼부어집니까? 한 몸 되는 나한테 퍼부어지면서 결국 나는 잃어버리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믿어진다는 거예요. 이게 믿어진다는 게 축복이다 이 말이에요. 발로 한 것이, 눈이 한 거예요.

그래서 같이 울라 하고 같이 웃고 같이 울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형제한테는 미움이 있을 수가 없지요. 왜? 자기와 한 몸이니까. 그래서 형제가 잘 될 때는 같이 좋아하고 못 될 때는 같이 울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예수님한테 한 몸에 묶여 있기 때문에 그 형제 한 것이 내가 한 것이에요.

어떤 복음을 아는 목사들끼리 어떤 교인이 그 교회 갔다 이 교회 왔다. 누구는 복음 모르나? 누구는 복음 모르나가 아니라 누가 됐든 간에 그 목사님이 설교한 것이 내가 설교한 거예요. 그 교회 간 것이 우리 교회 온 거란 말이죠. 앞으로 강단교류가 활발해지겠는데. 이 소리 듣고. 이 정도 되려면, 이미 나는 바사르다. 나는 몸인데 내가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영이 영적 방주가 날 구원하는 거예요.

마지막으로 영에 대해서. 아직 영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영에 대해서 이야기합시다.

영이라 하는 것은 구약에서는 인간의 요소가 영이 아닙니다. 이거는 언약이에요. 영의 하나님은 항상 구약에서는, 구약의 특징이 뭐냐? 육은 영을 못 만나게 되어 있어요. 영을 만나면 죽게 되어 있습니다. 모세도 영적 세계에 가서라도 모세는 여호와의 얼굴을 보면 안돼. 죽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구약에서 육은 영을 만나면 죽게 되어 있어요.

심지어 누굽니까? 마노아? 그 이야기했잖아요. 그걸 알기 때문에. 하나님의 천사라면 우린 죽었다. 천사가 아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육의 세계에서 영이 지배하면 그 자체가 죽음이에요. 그리고 군대장관 만날 때도 마찬가지에요. 하여튼 영적으로 만나면 죽게 되어 있습니다. 육은 육대로 놀고 영은, 그래서 야곱이 씨름하고 난 뒤에 싹싹 비는 것이 그것 때문에 그런 거예요. 영과 육이 만나면 육이 죽고, 영은 그 거룩성 때문에 거기서 육을 반드시 죽이도록 되어 있어요. 그래서 그걸 알고 브니엘이 뭡니까? 네가 죽었는데 내가 축복해서 살려준다는 이스라엘을 살려 주잖아요.

그러니 옛날 사람은 영이 육과 하나 될 일이 없다는 거예요. 영이 육에 오면, 그러니까 언약된 하늘나라에 계신 분이 오게 되면 죽게 되어 있는데, 세상에, 이 불가능한 이야기가 말씀이 육신이 될 줄을 누가 알았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를 안 믿는 거예요. 믿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아무리 봐도 육인데, 그게 어떻게 영입니까? 영은 육을 만나면 죽게 되어 있는데.

영 대신 육신이 되서 와 버렸단 말이죠. 오니까 사람들은 그분을 안 믿었지요. 가끔은 기적을 일으켜요. 물 위를 걷는다든지. 그야말로 놀라운 그런 기적을, 오천 명을 먹인다든지, 이런 것을 할 때 예수님을 중매자로 봤어요. 마치 선지자처럼. 영은 아니고. 하나님은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온 다른 특별한 선지자, 대단한. 왜냐하면 육에 속하니까. 그렇게 봤지, 내가 곧 하나님과 하나이다, 라는 이 말을 요한복음 5장에서 했지만, 그 말을 사람들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영은 육과 만나면 죽게 되어 있다는 것이 고린도후서 3장에 보면 나옵니다. 3장에 보면 우리는 왜 안 죽느냐? 그게 예수님의 영이기 때문에 안 죽는다는 거예요. 지금 우리 성령 받으면 죽어버려요. 그런데 예수님의 영이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 받아도 안 죽고 사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영은 바로 십자가의 영이고, 십자가의 영은 육을 허용합니다. 육을 허용한다는 것이 어폐가 있지만 육을 용납해주는 인간의 연약함을 용납해주고 더러운 육 속에도 거룩한 영을 담긴, 그걸 성전이라 합니다.

더러운 우리 육을 자신의 성전으로 삼으시는 그 너무나 낮으신, 모든 하나님의 영광을 다 포기하시고,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자기를 낮추어 종으로 놓기까지 하신 그 영이시기 때문에 비로소 그분의 영이 우리 속에 들어올 수 있고, 우리는 그분의 영 덕분에 우리가 육이라는 우리가 더러운 육에 불과한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도의 특징이 뭐냐 하면, 갖고 있어도 이거는 죄인 덩어리가 여기 있다는 걸 알게 되는 것, 그게 성령이 임한 특징이 거기에 있지요.

데카르트의 문제가 교재에 있는데 제가 이걸 하나하나 설명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다만 교재상 몇 가지 말씀드리면, 데카르트는 이러한 고대에 있던 신학, 이런 것을 거부하고. 그러니까 데카르트의 주장은 무한, 무한을 연결시키면 신이 된다는 걸 거부했거든요. 신이라 하는 것은 무한에서 연결해서 신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식 속에 신이 있다. 라고 한 겁니다.

의식 속에 신이 있다는 말은 뭐는 아니다? 물질 속에는 물질로서는 신을 알 수 없다. 그러니까 과학으로는 신을 알 수 없고, 인간의 신 의식 속에서만 신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함으로서 인간 속에 계신 인간의 의식, 인간의 마음을 신이 주신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고, 모든 철학을 시도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철학을 시도한 이유가 뭐냐 하면, 잘 들어보세요.

그 당시 과학이 ( ) 과학은 과학끼리 가라. 허용 할 게. 지구와 달을 돌든지, 지구가 태양을 돌든지 그건 아무 상관없다. 구원은 의식으로 구원받지 과학으로 받지 않는다. 해서 종교도 살리고 철학도 살리고 과학도 살리고 그런 것을 다 한 사람이 데카르트인데, 그로 인하여 데카르트는 뭐냐 하면, 과학한테 매이지 말고 인간에 신이 들어있는 인간의 주체가 과학보다 낫다는 이 주체사상이 데카르트로부터 시작됩니다. 이걸 절대주체, 절대주체사상. 이게 데카르트가 주장한 거예요.

이 절대주체사상은 결국 나중에 뭐로 이어지겠습니까? 개인주의로 이어져요. 이 개인주의로 퍼지는 것이 바로 오늘날 개신교 아닙니까? 개신교고 그 당시에는 천주교도 마찬가지고. 오늘날 종교도 데카르트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주의가 아니고 누구 주의? 예수를 믿는 신앙주의. 그게 신앙주의죠. 내 신앙. 신앙주의니까. 개인주의니까. 예수님 하는 일이 곧 내 일이라는 생각 안 하고, 내가 악바리처럼 말씀을 지켜야 그게 나의 구원으로 떨어진다고 여기는 사고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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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