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광주 강의(060721) 17-1
Re..광주 강의(060721) 17-1
이름 : 서경수(IP:)
광주 강의(2006. 7. 21) 17-1
첫째 강의 시작하겠습니다.
오늘부터는 요한 1서를 하겠습니다. 신약성경 388페이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생명이 두 가지 종류가 있어요. 요한 1서에 나오는 하늘에서 온 생명이 있고, 또 하나의 생명은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지상의 목숨, 육체에 달려 있는 목숨. 이 두 종류의 생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육체의 목숨은 죽음으로 끝이 나고, 하늘에서 온 생명은 영생으로 그 빛을 발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 여기에서 어려운 것이 뭐냐 하면, 죽음으로 끝나는 목숨과 하늘에 속한 생명과 연결이 안 된다는 것, 연결이 안 되는 이유가 한쪽은 죽음의 요소가 있고, 다른 쪽은 죽음의 요소가 없으니까 이 목숨 가지고 아무리 해도 생명을 얻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연결이 되지를 않지요.
연결이 안 되기 때문에 구약 성경에서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없는 자인데 불현듯 생긴 자, 대표적인 것이 이삭이지요. 이삭이 없는 자인데 약속에 의해 생겨납니다. 이삭이 없는 자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사라의 태가 죽지요. 없는데서 불현듯 생김으로 말미암아 이 주변에 있는 아브라함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죽음임이 들통 나 버렸습니다. 이것이 분명해 졌습니다.
성경을 보면서 자기의 생명가지고 하늘의 생명을 따 내려 하는 것은 예수님의 표현에 의하면 하늘의 별을 따는 것처럼 안 되는 거예요. 이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늘의 별 따는 것이 가능합니까? 안 되잖아요. 그런데 자꾸 따려고 하는데 이런 시도를 하면 이것이 종교가 되는 거예요. 이것은 예초부터 사기입니다.
근본적으로 불쑥 솟아난 이삭 같은 인물이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생명이 출현하고, 그 생명으로 졸지에 주위 사람들이 ‘아, 내 목숨은 생명도 아니구나!’ 라는 것이 화들짝 와 닫는 것입니다. 그러한 계기가 일어날 때 그 사람은 생명과 연관되어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예수님이 하늘에서 오셨다고 할 때, 예수님이 십자가 죽으시고 부활했다고 할 때, ‘아, 부활되지 못하는 내 목숨을 목숨도 아니구나! 하나님께서 이런 목숨은 목숨 취급도 하지 않는구나! 나는 죽음을 품고 사는 자구나!’ 라고 느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 전체가 없는데서 불현듯 생긴 그런 사람들을, 콩 심으면 콩 나듯이 쏙쏙 튀어나오는 생명들의 모임을 가지고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성도라고 합니다. 없는데서 새로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적인 직업이라든지, 월수입이라든지, 키가 몇 센티라든지, 집안이 어떤 집안인가 이런 것은 일체 영생 앞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죽음에 같이 묻혀 가기 때문에.
88고속도로로 오다 보니까 개울에 물이 내려가는데 거기에 빨간 꽃잎도 파란 꽃잎도 그냥 제 자리에 있을 때는 각자의 색깔로 자랑스러워하지만 흙탕물이 쳐들어오니까 그 꽃은 다 꺾어져서 탁류에 휩쓸러 가듯이, 누구하나 저기서 생명이 떳다 하면 그 순간 우리는 탁류에 쓸려가듯 싹쓸이 당해야 될 그런 목숨을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습니다.
생명이 출현되었기에 우리가 쓸려 내려가는 것에 대해서 너무 안타까워하시면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 믿고 팔자 고치겠다고 하는데, 팔자 고쳐봐야 탁류에 다 쓸려갈 팔자 고쳐서 뭐 할 거예요. 아무 소용없지요?
12년 동안 혈류병에 걸린 여인이 예수님의 옷가를 만지고 병이 나았다. 대단한 믿음이다. 라고 사람들이 좋아라고 하는데, 생각해 보세요. 12년 동안 피 흘리는 그런 병이 안 걸리면 더 좋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병에 안 결렸으면 예수님의 옷가를 만질 필요도 없단 말이지요.
지금 이 여인이 12년 동안이나 피를 흘리는 병이 난 것은, 이것은 뭐냐 하면, 바로 자기의 목숨이라는 것은 뭔가 떳다 할 때는 이것은 은퇴해야 될, 사라져야 될 목숨인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러한 장치를 하신 것입니다.
그 여인이 12년 동안 안 아팠으면 예수님의 옷가를 만질 일이 없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옷가를 만졌단 말은 ‘나는 죽은 목숨이요 당신은 부활이요 생명입니다.’ 라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죽은 목숨이요.’라고 만지면서, 죽은 목숨을 되돌아보면서 거기에 미련과 아쉬움이 있다면 주님 옷가를 왜 만집니까?
다시 설명하겠습니다.
생명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늘에서 온 생명이 있고, 우리가 지고 있는 목숨 이 생명이 있는데, 저쪽 생명이 eM면 우리 생명은 포기를 해야 돼요. 우리가 가진 생명은 주님 보시기에는 생명도 아니니까 그쪽 생명이 오면 우리 생명은 밀쳐 버리는 그런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궁금한 것이, 하늘로서 오는 생명은 어디에 생기는가? 그것은 사람 자체를 아예 없는 자에서 불현듯 생기게 만듭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이삭입니다. 이삭은 사람의 목숨의 연줄에 의해 태어난 것이 아니고, 아예 이삭의 엄마는 없고, 이삭의 엄마는 하늘에 있어요. 갈라디아서에 보면. 그래서 이삭은 아주 희한한 사람이에요. 우리 어머니는 하늘에 있다.
아주 독특한 사람인데, 이삭이 뜸으로 말미암아 이삭같이 없는데서 생기지 아니한 모든 것은 생명이 없다. 그런 것들은 다 끝난 것이다. 다 지옥가야 해. 라고 확인될 수 있습니다. 이삭이 옴으로 말미암아.
이삭이 오게 되니까 아브라함은 이제 이삭 득을 보게 되지요. 이삭처럼 그러한 약속을 이삭 이전에 아브라함 자신에게 계속 퍼부어 왔다는 것이 비로소 감이 오는 거예요. 아브라함한테는. ‘하나님께서 일을 계시하셨구나.’ 내가 안 되는 일을 하나님께서 계시했는데 그것이 뭐냐, 아내가 아들 낳지 못하는 죽은 태인데 거기에서 이삭이 태어난 것입니다.
아브라함처럼 이렇게 하나님이 일을 시작했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가지로 로마서에서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그 알맹이가 중요해요. 믿음이란 것을 딱 깨보면 그 안에 알맹이가 있는데, 믿음 안에 뭐가 들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약속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약속이 어느 정도로 되는 약속인가 하면, 몇 날 몇 일에 어느 다방에서 만나자, 기자 역에서 만나자 이런 약속이 아니라, 이 약속은 우리 인간세계에서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그것이 약속에 담겨 있어요. 태가 죽었는데 아이를 낳는다. 이것은 새로운 노선을 개시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새로운 노선을 개시하신 것을 아브라함은 믿은 것입니다. 이것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 노선에 관여된 것을 알게 되었지요. 이것을 가지고 로마서 4장에는 은혜의 노선이라고 말합니다.
로마서 4장을 잠시 봅시다. 16절을 누가 크게 한 번 읽어보세요.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여기에 보면 아브라함이 모든 사람이 조상이라고 나와 있지요. 이것이 뭐냐 하면, 아주 독특한 거예요. 특이한 노선을 개시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특이한 노선을 개시하기 위해서 어떤 요건이 필요한가? 아브라함이 믿었던 그 약속과 동일한 약속이 담겨 있으면 우리는 죽어가는 목숨들 가운데 불현듯 일어나는 새로운 노선이 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줄기가 시작되는데, 이것이 뭐냐 하면 로마서 4장에 태가 죽었는데도 불구하고 아이가 태어났다. 이것을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로 봅니다. 태가 죽었는데 아이가 태어난 것을, 십자가 죽었는데 예수님이 부활한 것과 같은 동질로 봐요. 같은 약속에 의해서 이뤄진 일로 보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때에는 아브라함 식의 부활이 뭐냐 하면, 태가 죽은데서 아이가 태어나는 것. 그러면 지금 우리 시대에는 뭐냐,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에게서 새로운 생명이 나오는 것. 죽었던 그분이 사흘 만에 살아났다 이것이 아니라, 새롭게 생명이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요한 1서를 하고 있습니다.
요한 1서 1장 1-4절에 왜 이런 내용이 나왔는가를 지금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라의 태가 죽었습니다. 죽은 자궁입니다. 그래서 아기를 낳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사라가 아이를 낳아 그 아이의 얼굴이 어떻고 코가 어떻고 하는 것은 아예 생각조차 할 수 없겠지요.
뭐든지 존재하기 이전에는 그 존재를 예상할 수 없지요. 아예 없는 거잖아요.
‘묻혀 있는 것들의 작동’이란 말이 있어요. 감춰져 있는 것들의 작동. 분명히 감춰져 있는데 밑에서 뭔가 움직임이 감지되는 거예요. 그런데 감춰져 있고 묻혀 있는 것을 사람들은 몰라요.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있는 것만 봅니다.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을 못 보는 것이 아니고 안 보이는 것을 못 보지요.
지금 칠판에 그림이 없잖아요. 그런데, ‘아 나는 저기 있는 그림이 안 보이네.’ 이것은 말이 안 되지요. ‘그림 여기 하나 걸렸거든. 그런데 왜 나는 안 보이지.’ 그러면 ‘이 사람이 돌았나?’ 하지요. 없기 때문에 안 보이잖아요.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 예수 믿으라고 해도 소용없어요. 예수님이 없기 때문에 안 믿는 거예요. 있으면 믿지요. 없기 때문에 안 믿고, 의지하지도 않고, 부르짖지도 않아요. 만약 있다면 숨어 있는 것도 캐낼 거예요. 없기 때문에 안 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가 있다는 것을 문제 삼지도 않아요.
우리교회 어떤 분이 그런 질문을 했어요. “옛날 우리 조상들은 예수 안 믿었으니까 지옥 갔습니까?”하는 상당히 상투적이면서도 사실 따지고 보면 굉장히 궁금한 질문을 했어요. 과거 조선시대, 고려시대에는 복음이 들어오지 않았으니까 그들은 지옥 갔습니까? 라는 궁금증이 생기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답변했어요. 지금 어떤 중이 문 앞에 와서 ‘석가모니 안 믿으면 지옥 갑니다.’라고 하면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합니까? 싱글벙글 웃지요. ‘미쳤나?’ 하고 웃잖아요. 우리가 답답해 할 필요 없단 말이지요. 그 사람에게는 예수가 아예 없는 거예요. 있는데 ‘내가 왜 예수를 안 믿었을까?’ 이러면 좀 안타까움이 있는데, 아예 그들은 예수라는 분에 대해서 기억조차 없어요. 없는데 안 믿었다고 안타까워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림도 없는데 ‘저 그림을 믿을 걸. 믿어야 구원 받는데.’ 해도, "없네." 하면 끝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다는 말이 얼마나 대단한 것 인줄 아시겠습니까? 뭔가 윤곽이 잡히면 캐내서라도 믿고 싶은데, 이미 태가 죽었어요. 얘가 태어난다고 했으니까 어떤 생김새일지 그런 것은 몰라요. 그냥 태가 죽은 것만 알아요. 그런데 거기에서 이삭이 태어났어요.
이렇게 태어난 이삭은 사라의 죽은 태와는 관계가 없고 하늘의 약속과 관계 되어 있어요.
아브라함의 그 정력, 사라의 태는 이삭 출생에 전혀 도움도 안 됐고 보탬도 안 되었지요. 이것을 믿습니까? 전혀 보탬도 도움도 안 됐지요? 이 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 이삭이 태어남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과 사라의 목숨은 무가치한 것으로 차버리는 거예요. 자식이 태어나는데 전혀 보탬이 안 되었으니까. 이삭 쪽에서 이쪽을 차버려도 할 말이 없지요.
‘차버려도 할 말이 없습니다.’ 하고 순종하는 것이 바로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갔다 바치는 거지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내가 반발할 수 있는 어떤 권한도 내게는 없습니다.’하고 즐거이 기쁘게 자기 아들을 하나님의 지시대로 드리는 것입니다.
질문: 그것이 아브라함 자체적으로 생산된 믿음이 아니잖아요?
대답: 그 능력이 어디에서 오는지 아브라함도 모르지요.
질문: 그 믿음을 해석한다면 예수님의 믿음이라고 하면 안 됩니까?
대답: 그렇게 할 수 있는데, 그것을 로마서 4장에서는 이야기하지요. 뭐냐 하면, 그것을 예수님의 믿음이라 하는데, 은혜에 속했다. 은혜라는 field, 장(場), 영역에 속했기 때문에 그것은 자기가 은혜를 주관하지 못하고 은혜가 쏘아대는 거예요. 물 폭탄처럼 하늘에서 장마 비가 쏟아지듯이 떨어지면 그 능력으로 아브라함은 이삭과 같은 노선에 있을 수밖에 없지요. 그것을 은혜에 속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능력이 아니고 믿음이라고 하는데, 지금 그 믿음을 해부하는 거예요. 도대체 믿음 안에 뭐가 들어있는가 해부해 보니까 인간의 이성과 노력과 공부로는 도저히 얻을 수 없는 놀라운 변동이 일어났어요. 새로움이 등장한다는 거예요.
쉽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없는데, 짠 하고 아기 천사가 하나 태어난 것과 같은 거예요. 없는데 나는 천사1, 나는 천사2 하고 없는데서 생긴 거예요. 이처럼 생명은 그렇게 오는 거예요.
오늘 본문 1-4절이 바로 이런 이야기입니다.
이런 말을 할 때에는, 예상치도 못했는데 우리 곁에 생명이 나타났고 우리는 손으로 만진 바요, 눈으로 본 바가 되었다는 것이지요. “믿습니다”라는 말을 이렇게 한 거예요.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1절) 이것을 압축하면 “믿습니다”하는 이야기예요.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는 겁니다. 하늘에 별이 떠 있는데 그 별이 갑자기 내 곁에 와서 ‘저 마구간으로 가라’고 하면 깜짝 놀랄 일이잖아요. 분명히 별은 하늘에 떠 있어야 하는데 나 가까이 오면 ‘분명히 이것은 별 아닐거야.’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요.
없었는데 불현듯 생겨서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는 관계를 가지고 [믿음]이라고 한단 말이지요. 우리가 저이를 믿어야 해. 하고 믿었으면 이것은 신념에 해당 되는 것이지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상한 거예요. 우리가 예상한 것은 우리의 희망이고 여망이고 나의 확산(확대)이지요.
지금 요한 1서를 하면서 생명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생명이 어떻게 출몰해서 우리에게 어떤 반응을 나타내는가에 대해 설명하는데, 그 전에 이삭부터 먼저 설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관해도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죽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인정합니다. 이것은 안 믿는 사람도 인정합니다. 옛날 사람이니까 죽은 것이 사실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죽고 난 뒤에 다시 사흘 만에 부활할 줄 예상한 사람은 누가 있어요? 몇 명 되겠습니까? 한 명도 없어요. 놀랍게도. 이것이 하나님의 작전이었습니다. 단 한 명도 없었어요. 만약 한 명이라도 있었으면 그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왜? 그 사람은 자기 능력으로 믿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믿음이 아니지요.
자기 능력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 앞에 자기 가치가 그대로 살아 있어요.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은 믿음의 노선, 은혜의 노선이 아니고 행함의 노선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사람이어서 지옥 갑니다.
단 한 명도 없었어요. 다만 알고 있는 사람은 누구냐 하면 바로 변화산에서 예수님과 만났던 엘리야, 모세 이런 사람들만 알지요. 그런데 제자들 중에 안 사람은 단 1명도 없어요. 따라서 어떤 사람도 예수님이 부활이고 생명이고 나의 구세주라고 할 때, 4절의 그 낌새를 미리 알아 차려서 가능성 보고 믿은 사람 같으면 그 사람은 아직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내가 믿어지다니. 이것은 말도 안 돼. 아니 이럴 수 없어. 이것은 기적이야. 하늘의 별이 내 앞에 떨어지는 것과 동일한 거예요.
동방박사가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 별이 그 동네 별이 아니고 따라온 별이거든요. 자기 고향에서부터 계속 따라 오니까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어떤 교단의 학자들은 이 별을 UFO라고 합니다. 이것은 수직 수평 이동이 자유롭고, 이것을 타는 것은 천사인데 --- 어쩌고 저쩌고 해요.
샛별 떠는 이야기가 시편에도 나오고 베드로후서에도 나옵니다만 어쨌든 여기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그 모습은 과거 예수님이 지상에 있을 때 제자들이 만났던 그분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만약 그 분이었다면 제자들이 단번에 알아봤을 거예요. 그런데 제자들이 못 알아 봤어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이 알아보지를 못했어요. 이것은 뭐냐 하면, 우리가 알아볼 수 있도록 창자국, 못자국의 변신도 가능하지요.
이것을 안산 강의에서 했는데, 전 목사님은 들어서 아시겠지요? 벌써 2주 지났다고 다 잊었습니까? 제가 영체, 부활체, 그리고 육신의 모습 이렇게 세 가지가 있는데, 어찌했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예상할 수 있는 모든 것 바깥에서 그냥 도전적으로 우리에게 접근하므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너는 지금 새로운 노선에 가입되었음’을 통보해 주는 식으로 옵니다.
요한 1서를 다시 봅시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부활하신 모습은 죽기 전의 그 모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었다가 3일 만에 부활했다는 그것을 믿는 것이 아니고, 나는 예수님 믿는데 하등 보탬이 없고 예수님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내 생명은 이제 은퇴해야 된다. 지금 내 목숨 데려가도 나는 할 말이 없다.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예수 믿는 자가 진짜 믿는 자라는 이야기를 제가 한 것입니다.
참 생명이 떴는데 내 구닥다리 같은 생명에 연연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지요.
히브리서 2장 15절에 보면, 예수님이 오신 것은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죽음이 두려워서 평생 마귀의 협박과 공갈에 시달리는 사람을 풀어 해방시키기 위해서 ---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기 목숨의 노예입니다. 자기 목숨의 노예가 되어 살아갑니다. 누구라도 죽인다고 하면 겁이 나서 ‘예.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라고 나옵니다. 이것은 남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내가 나한테 무서워서 그래요.
요한 1서에서 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고 했는데, 만진 바라고 했기 때문에 더 잘 믿을 수 있다는 말이 아니고, 진짜 믿는 자에게는 더 이상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확실합니다. 라는 표현을 이렇게 한 것입니다.
따라서 요한 1서 1장 1절부터 4절 까지는 완전히 ‘약 올리기’예요. 우리는 손으로 만졌는데 너희들은 못 믿겠나? 네가 만진 것은 예수라는 청년의 피부를 만졌지 그것이 무슨 태초부터 있는 생명이냐? 안 믿는 사람은 이렇게 나옵니다. 네가 만진 것은 33살 먹은 보통 사람과 똑같은 몸을 만졌는데 그것 만졌다고 그것이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네가 만졌다고 해서 어떻게 그런 논리가 나오는가? 안 나오지. 당연히 안 나오지요. 손으로 만졌다고 메시아입니까? 안 나오잖아요. 안 나오니까 ‘약 오르지’라는 거예요. 너는 안 나오지. 그런데 나는 나오거든.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믿으라’가 아니라, 네 속에 이미 있는 믿음을 끄집어내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신 믿음이 있으니까 내가 어떤 사건을 일으키고 어떤 소리를 하더라도 믿음으로 화답하라는 것입니다. 그 사건도 주께서 일으키신 줄 믿습니다. 그 말씀도 주님 주신 말씀인줄 믿습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화답하라는 거예요. 그런 것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너는 아주 특별한 노선에 섰기 때문에, 아브라함 노선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는 안 나와도 너에게는 나오게 되어 있다는 거예요. 뭐가? 믿음에 대한 반응이.
이것을 징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징후와 반응을 제가 좀 차이를 두겠는데요, 반응이라는 것은 때리면 금방 튀어나오는 것이 반응입니다. 12시에 때려도 아프고, 새벽 1시에 때려도 아프고, 서울 가서 때려도 아프고, 대전 가서 때려도 아프고 공간 시간을 초월해서 때리면 항상 아프다는 반응이 나올 때는 반응이지요.
징후라는 것은 때려도 ‘아파볼까’ 해도 안 아프고, 다만 뭔가 내 쪽에서의 어떤 반응이라는 것은 내가 원하는 대로 안 될 때 그것이 징후입니다. 내가 의도하지도 않았는데 튀어나오는 반응을 징후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서, 하리수씨 에게는 미안하지만, 남자에서 여자로 변한 하리수란 사람이 있는데, 내가 장난삼아 “하리수 군” 하고 불렀는데, 하리수가 “예”하고 대답을 한단 말이지요. 자기는 의식적으로 나는 여자야, 하다가 “하리수 군”하고 부르면, 자기도 모르게 불쑥 “예”하고 대답한단 말이지요. 자, 이것은 내가 의도한 것이지요. 저쪽에서 기대한 것이 아니고 내가 의도한 것입니다. 내가 불러놓고 내가 반응을 얻었으니까 내가 일으킨 사건이지요. 그것이 믿음이라.
주께서 나에게 징후라는 반응을 일으킬 때 그것이 믿음의 사건입니다. 만약에 내가 의도해서 ‘내가 믿어야지’ 이렇게 하면, 그것은 나의 반응이지 믿음에 속한 것이 아니고 나의 신념, 나의 의도, 나의 계획 이런 거예요. 그것은 믿음이 아니에요.
믿음이라는 것은 절대로 다른 사람들이, 안 믿는 사람에게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아주 희한한 현상이 주님 주신 사건으로 말미암아, 원인 제공자가 원인의 결과를 되 가져가는 식으로, 그것을 징후라고 합니다.
그 징후가 바로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것이라든지, 기생 라합이 정탐군을 숨겨 주는 것 이런 것. 이렇게 할 때 다른 사람이 ‘라합아, 네게 무슨 마음으로 그렇게 했는가?’ “주께서 주신 은혜입니다.” 이렇게 할 때, 그것이 내가 예상한 것이 아니고 돌발적인 상태가 왔을 때 돌발적인 반응을 나타내는데 그런 식으로만 홍해를 건너게 되고, 그런 식으로 우리가 천국에 갑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오실 때는 어떻게 오느냐? 도적 같이 오세요. 도적같이 오는 것은 예비를 못 합니다. 만약에 예비한다면 그것은 자기 반응이지 징후가 아닙니다. 도적 같이 오실 때, 도적같이 납치되어서 주님과 함께 들려 올라갈 때 그것은 주께서 일으키신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것을 모르고 신학자들이 믿음이냐, 행함이냐? 논쟁을 하는 거예요. 내가 미리 예상해서 정리한 것은 내가 만든 반응이지 믿음의 징후라고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제가 첫째 시간에 강조하고 싶은 것은, 생명이 출몰했을 뿐 아니라 계속해서 생명의 징후를, 우리를 가지고 놀면서 계속 뽑아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리수 군” ‘예’ 남자 맞네! 이런 식으로. 계속 우리를 하리수 군으로 삼아서 너는 믿는 자라는 그런 징후들을 뽑아내는 식으로 생명이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활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중 하나가 뭐냐 하면, 나는 예수를 만났는데 손으로 만졌어, 눈으로 보았어. 그런데 너희들은 안 믿지? 당연하지. 주의 능력이 임해야 믿지.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 1서에서 이렇게 시작하지만 중간 중간에 징후가 뭐냐 하면, 사랑이라는 것인데, 그 사랑이 어떤 사랑이냐? 죽는 것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랑. 이건 보통 사랑이 아니에요. 심판이 전혀 안 무서운 정도의 사랑입니다. 심판이 있다는 것이 전혀 안 무서울 정도가 되어야 사랑입니다.
제가 전에 서울에서 그런 강의를 했습니다.
우리교회 자기 어머니가 순복음교회 전도사인데, 제책 [지옥의 하나님]을 주니까 보지를 안아요. 무슨 하나님이 천국의 하나님이지 지옥의 하나님이 다 있냐? 고 하면서 안 읽어요.
지옥의 하나님도 즐거이 볼 수 있을 정도로 주의 사랑이 가득해야 합니다.
로마서 9장 3절에 보면 사도바울이 이런 과감한 말을 해요. ‘내가 내 형제를 위해서 지옥 가라고 하면 갈게. 내가 지옥 갈지언정 내 형제가 구원 받았으면 좋겠다.’ 얼마나 큰 사랑을 받았으면---
그래서 요한 1서 4장 16-18절에 보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했고,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그리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이 세 가지를 보세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그 사랑이 있으면 심판 날에도 겁나지 않고, 심판 날 뿐 아니라 지금도 모든 두려움을 추방을 합니다.
어둠을 보고 나가라고 하면 안 나갑니다. 그런데 빛만 갔다 대면 어둠을 사라집니다.
우리가 왜 두려운가 하면, 우리에게 사랑의 빛 스위치를 안 켜서 그래요. 사랑의 빛 스위치만 켜면 우리에게는 두렵다는 어두움도 싹 사라져 버려요.
사랑만 들어오면 갑자기 두려움이 사라져요.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은 것도 사랑이 넘쳤기 때문에 죽음이란 것이 자기에게는 큰 문제가 안 돼요. 이것을 누가 그렇게 했습니까? 생명이 생명답게 되기 위해서 우리를 가지고 논 결과예요. 생명이 우리에게 장난 짓을 하고 있어요. 생명이 우리 안에서 노닥거리고 있는 거예요.
요한 1서 2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생의 자랑을 좇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주님으로 기뻐한다는 것이 있거든요.
주님께서 우리를 가지고 놀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생의 자랑거리가 별 의미 없이, 그것 아무것도 아닌데 그게 뭐가 중요해. 라고 한 3초 정도 느끼게 한단 말이지요. 이것이 징후지요.
3초 지나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생의 자랑거리가 또 나오지요. 그런데 생명이 내게 찾아와서 장난을 치면 순간적으로 이런 것들(육신의 정욕 -- 등)이 아무것도 아니지. 이미 생명이 있는데. 라는 생각이 불현듯 드는데 그것이 바로 믿음의 마음입니다.
이제 요한 1서 초반부터 차례로 하겠는데, 이것 하기 전에 요한 1서에 대서 묻거든 이렇게 하세요. 생명이 출몰해서 자기 백성을 가지고 노는 책. 이것이 요한 1, 2, 3서입니다. 누구 허락도 없이? 내 허락도 없이 마음대로 갖고 노는데, 갖고 놀 때마다 나오는 것이 뭐냐? 사랑 나오고, 두려움은 사라지고, 그리고 심지어는 어떤 죄도 다 씻어짐이 확인되는, 생명이 있는 사람에게는 다시는 정죄함이 없다. 얼마나 놀라운 이야기입니까?
이것이 어디에 나오는가 하면 5장 18절인데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놀라운 거예요.
범죄치 아니한다. 이것을 어떻게 믿으란 말인가? 어떻게 믿을까요? 이렇게 물으면 바울은 ‘그런 것 염려할 필요 없다. 너는 원래 그런 사람이다.’ 라고 이야기 할 것입니다. 내가 이것을 어떻게 믿을까 라고 하면 그것은 처음부터 잘못 된 거예요. 처음부터 믿음이 뭔지 모르는 사람이에요. ‘정말 나에게 이런 상태가 나옵니까!’ 라고 감탄하면서 고맙다고 받아들여야 할 문제이지, ‘어떻게 내가 이렇게 합니까?’ 라고 묻는 것을 잘못 되었어요. 생명이 그렇게 하지요. 생명이 범죄치 않게 해요.
그것이 요한 1서 4장 4-5절에 보면,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저희는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
이렇게 노선이 둘로 나눠집니다. 이것은 생명이 와서 우리에게 장난질을 쳐서 우리가 구원 받은 거예요. 생명이 와서 장난 친 거예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사도요한부터 시작해서 12제자 중 한 명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베드로 같은 경우에는 세 번씩 부인하고 도망쳐 버렸습니다. 사도요한도 모르는 채 하고 도망쳤습니다. 아무도 믿은 사람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런 말을 하거든요. 왜 그렇습니까? 성령께서 와가지고 ‘너는 빼도 박도 못해. 너는 완전히 나에게 장악된 자야.’ 그 징후들을 보여주는 것이 요한 1서입니다.
제가 어렵다는 것이 뭐냐 하면, 요한 1서 1장 첫 대목이 어려운 거예요.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 이것이 어려운 말씀인데, 왜 어려우냐 하면, ‘태초’가 뭐냐고 묻지 말란 말입니다. ‘태초’가 뭐냐고 묻게 되는 것은, 우리 목숨을 안 버리고 앞에서 쥐려고 할 때 이런 물음이 가능해요. 생명 안에서 우리 목숨을 포기하면 되는데 포기 안하고 ‘내가 태초가 무엇인지 알아서 신앙에 보탬이 되어야지’ 이런 마음으로 태초가 뭐냐고 묻게 되요.
이것이 요한복음 1장에도 나오지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고 할 때, 우리의 관심사가 ‘태초’에 가면 안 돼요. 그런데 우리의 관심은 ‘태초’에 가요. 그 이유는 모든 육체는 시간과 공간을 포기를 못해요. 우리 육신은 시간과 공간 속에 놓여 있기 때문에 그래요.
시간과 공간을 통해서 우리는 ‘나’라는 인간을 파악합니다.
어떤 학자가 말하기를 ‘사람이 뭔가 행동에 옮기고 실천에 옮기는 것은 전부 나를 보기 위함이다.’ 내가 누군지를 알기 위함이라고 했어요.
뷔페식당에 갔는데 어떤 사람은 잡채에 젓가락이 가고 어떤 사람은 탕수육에 젓가락이 간단 말이지요. 잡채와 탕수육이 같은 형제간인데 한 사람은 잡채 편에서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탕수육에서 데려감을 당하고. 그렇게 가는 거예요. 왜 잡채와 탕수육이 형제인데 A는 잡채 데려가고 B는 탕수육 데려가느냐? 잡채를 놓음으로서 내가 누군지를 아는 거예요. 잡채 좋아하는 나. 나는 탕수육 좋아해.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대학을 진학하는데 어떤 사람은 법대를 가고, 어떤 사람은 의대를 가요. 왜?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서 그래요. 어떤 사람은 부모가 법대를 가라고 하는데 기어이 안 가요. 왜냐하면 자기는 농사짓겠대요. 기어이 농사짓겠대요. 왜? 법대 가면 자신이 누군지를 몰라.
그래서 어떤 사람이 행동을 할 때 그 사람의 잘 잘못이나 가치를 논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것은 그 사람이 그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게 했겠기 때문에 그 사람의 그 행동은 나보다 더 가치가 있다든지 없다든지 그런 소리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제가 목사님들께 ‘공부하라’고 했는데, 공부하라고 해도 그것은 소용없는 말이에요. 왜? 공부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어요. 그런 사람은 하지 말라고 해도 하는데, 공부하라는 말을 언제 좋아하는가 하면, 내 말 듣기 전에 평소에 공부하기를 좋아했는데, 제가 ‘공부하면 좋습니다.’라고 하니까 “그렇지”하면서 동의하면서 나오지요. 원래는 제 말에 동의 하지 않다가 자기 본색에 맞으니까 그 때는 동의 하는 거예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억지로 한다고요. 그러니까 자기 본성에 안 맞는 거예요. 하지만 나도 공부 좀 했습니다. 이런 핑계대고 틈만 나면 놀면서 나중에는 바빠서 못했다고 변명하고 합니다. 사람은 자기 본성 따라 가기 마련인데, 공부하는 것이 가치 있고, 공부 안 하는 것이 가치 없다고 평할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람의 본성 따라 가는 거예요.
따라서 “예수 믿으세요.”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말에 예수의 생명이 이미 들어있는 사람은 좋아하고, 생명 없는 사람은 억지로 믿으려고 하니까 가짜 교인 되는 거예요.
자기의 본색을, 자기의 징후를 그대로 드러내면 되요. ‘나 예수 믿습니다.’(목에 힘을 주면서) 하는 사람은 가짜입니다. 이것은 가짜고 ‘예수 믿으라고 해서 믿으니까 얼마나 좋은지--’ 갑자기 “얼마나 좋은지”가 나오면 이것은 진짜예요. 믿으라고 해서 믿습니다. 그런데 나를 지옥 보내기만 해 봐라. 이러면 이것은 가짜예요. 그런데 누가 예수 믿으라고 이야기 안 해주나? 아, 해 주는구나. 내가 믿을게요. 라고 나올 수밖에 없는 거예요.
성경에도 이런 경우가 많잖아요. 삭게오 같은 경우. 자진해서 나오잖아요. 이것은 이미 주님과 다 내통했기 때문에, 자기 삶이기 때문에 가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같이 예수님을 봐도 별로인데, 삭게오는 예수님 보기 위해 애를 썼단 말입니다. 그렇다고 다 나무위에 올라가도 소용없어요. 삭게오는 자기의 본색을 그대로 드러낸 거예요.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란 말이 무슨 뜻인가 하면, 생명의 말씀이 태초를 새롭게 규정을 이 땅에 남겼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요 태초가 없어요. 왜? 태초가 필요치 않기 때문에 그래요. 이 세상 사람들은 시간과 공간 사이에서 ‘나’만 있으면 돼요.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 장마가 왔을 때 조선일보 1면에, “강원도에 폭우가 내려 손실이 많습니다.” 이렇게 나와야 하는데, “우간다에서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서 죽었습니다.” 이런 것이 나올 리가 없습니다. 조선일보는 우리나라 신문이기 때문에 우간다 이야기를 1면에 낼 이유가 없잖아요. 그렇지요? 같은 지구상에 일어난 이야기라도 우간다 이야기는 조선일보 1면에 안 나온다고요.
예가 너무 엉뚱하지만 잘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태초’에 관심이 없어요. 조선일보에 “태초에 생명의 말씀이 있었다.”는 것이 안 실립니다. 왜? 조선일보는 2006년 이야기가 중요하지 ‘태초’가 중요하지 않아요.
그러나 믿는 사람은 ‘태초’가 중요해요. 이것이 믿는 사람의 특징이에요. 희한한 사람들이라. 분명히 자기가 대한민국에 살고, 광주에 살고, 2006년을 보내고 있으면서 중요한 것은 여긴 줄 아는데, 한 2, 3초 동안은 ‘태초’가 중요해요. 갑자기 ‘태초부터 나를 알아서 주께서 오셨구나!’ 갑자기 ‘태초’가 그 사람의 시간 속에 개입하고 그 사람의 공간을 헤집고 개입합니다.
생명의 말씀은 ‘태초’를 앞장세워 우리에게 들이닥친다는 것입니다.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은 그런 관점으로 우리 마음속에 징후를 남기면서 들이닥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 자신의 목숨이란 것은 파리 목숨이며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생기는 그런 반딧불 같은 하찮은 목숨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태초부터 있던 계획이 밀려들러 왔는데 사소한 나의 프로젝트는 그 앞에서 빛을 잃어버립니다. 태초에 계신 분이 나에게 작업을 들어왔는데 내가 벌리는 작업은 그 태초의 작업에 비하면 하잘 것 없는 작업입니다.
동박 박사들이 무엇 때문에 멀리서 왔습니까? 그곳에서 곗돈 받으러 왔습니까? 동창회 참석을 위해 왔습니까? 태초가 밀어서 온 거예요. 태초의 생명의 말씀이 밀어서 와보니까 태초의 말씀 되시는 분과 접견이 가능했습니다. 황금과 유향과 몰약 참 중요한 거지요. 하지만 그 아기 예수님에 비해서는 아무것도 아니지요. 아낌없이 그것을 예물로 받칩니다. “오! 메시아여. 영원한 우리의 왕이시여.”
그 때 그 동방 박사와 아기 예수의 만남은 이 땅의 공간과 시간이 아니고 태초의 정지된 시간이 있었고 그 공간은 별이 함께 했던 거룩한 천국이었습니다. 바로 그러한 놀라운 일들을 생명 되시는 분이 우리를 가지고 캠버스로 사용해서 이 광주 땅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10분 쉽시다.
(2006. 8. 4. 17:53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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