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계 4: 1- 3 ( 보 좌 )
Re..계 4: 1- 3 ( 보 좌 )
이름 : 이근호(IP:)
보좌
2006년 7월 30일 설교 말씀: 요한계시록 4:1-3
(계 4:1)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가로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계 4:2) 『내가 곧 성령에 감동하였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계 4:3)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땅에는 사람이 살고 있고 하늘에는 하나님이 사십니다. 그런데 하늘에서 자꾸만 추궁이 주어집니다. 즉 하늘 나라 보좌가 아니면 영원히 살만한 곳이 못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하늘나라에서 내려다보면 더러워서 심판받을 처지에 놓여 있게 됩니다. 만약에 계속 땅의 살기를 고집하신다면 이 땅과 함께 멸망당하는 것은 시간 문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땅을 고집하는 사람들은 나름대로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쉴새없이 정신과 몸을 움직여야 합니다. 마치 사마리아 여인이 물동이를 들고 끊임없이 우물에서 물을 길러내는 수고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 그 여인은 물동이를 던져버렸습니다.
즉 그동안 자신의 부족분을 채우기 위해 생각해놓은 그 인생의 틀이 주님 앞에서는 아무 짝도 소용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늘 형식을 생각하고 그 형식을 만족스럽게 채우는 식으로 인생을 삽니다. 하지만 일시적 만족스럽게 여겼던 그 형식의 틀이 얼마가지 않아서 실증을 내고 짜증을 유발하는 껍데기로서만 존재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 건저하고 괜찮은 교회라고 자부해도 그것마저 과거의 산물이요, 거듭해서 형식적인 예배만 껍데기처럼 남아버립니다. 참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인정하는 보좌라면 교회가 끊임없이 거룩이 생산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인간의 능력으로는 끊임없는 거룩과 의로움이 늘 나올 수가 없습니다.
도리어 반대로 끊임없이 이기주의에 토대를 둔 욕심이 나오지요. 욕심이 욕심을 낳고, 그 놓은 욕심을 토대로 하여 더욱 더 예상 외로 크게 발전된 욕심이 튀어나오는 것이 인간입니다. 한 때 거룩했다는 것을 이유로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인간의 힘으로 자기 안에서 거룩한 성전을 지속시킬 수가 없습니다. 즉 그 누구도 거룩한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4정에 보니 분명 하나님 보좌 근처에 24장로들이 앉아 있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인간이 아니고 천사들이란 말입니까? 그들은 분명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구원될 희망이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 24장로들은 주님 보좌에 둘러 앉아 자신이 받은 생명의 면류관을 도로 반납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생명의 면류관을 머리에 서실 분들이 따로 계시다는 고백을 나타내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이 구원받은 것이 결코 그들의 노력이나 자질이 아닙니다. 뭔가 하나님 쪽에서 그들을 향하여 작업을 벌리신 것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1절에 보면,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라고 되어 있습니다. 문이 열려져야 합니다. 이 문은 이 땅에 있는 인간들이 폴짝 폴짝 뛴다고해서 열리는 문이 아닙니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신 가면 군말들이 열린 문이니다.
시편 24편에 보면,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찌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신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하신 여호와이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이 벌리시는 전쟁을 통한 그 위력으로 인해 여호와 하나님이 자리 잡을 일에 그 어떤 적들의 강한 성문들도 장애물이 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 받을 실 때는 지상의 문들 뿐만 아니라 하늘이 문도 열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벌어진 문을 통해서 하늘에서 성령이 비둘기같이 예수님 머리 위에 강림하시게 됩니다. 이로서 하늘과 땅에 서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단 예수님이 앞으로 하실 일의 결과로서 그 혜택을 입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벌어진 문을 통해서 주어지는 일들은 인간들의 그 어떠한 노동의 열매로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한 때 야곱이 그렇게 오해했었습니다. 창세기 28장에서 야곱은 자기 머리에 하늘의 사다리가 펼쳐지는 꿈을 꾼 적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야곱은 ‘하늘의 문’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자신의 행함으로 인해 그 하나님의 뜻을 달성하는 줄로 알았습니다. 실은 그 사다리 위에 천사들이 많이 왕래하고 있었습니다. 그 천사들이 열심히 일하는 이유는, 야곱을 살려주기 위한 그 누구의 지시에 따라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야곱이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자기가 힘써 모아놓은 재산이 빼앗기는 위기를 맞이 할 때였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목숨까지 뺏기 위해 덤벼들었습니다. 야곱은 천사와 대결하면서 극구 자신의 노력으로 지키려고 했지만 그 와중에서 알게 된 사실은, 자기 목숨은 진작 죽어야 될 목숨이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찾아온 것은 하나님 나름대로의 뜻을 야곱 자기를 통해서 펼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때부터 야곱은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요, 이스라엘로서는 산 자가 되었습니다. 즉 야곱으로서 사는 인생이 아니라 이스라엘로서 사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이 속에는 야곱의 개인 적인 뜻을 거부당하고 하나님의 약속만은 성실하게 성취될 뿐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진정 야곱의 존재는 ‘하늘의 문’ 맞습니다.
예수님은 단독적으로 성령을 받으시고, 성령으로 일하시다가, 성령의 힘으로 십자가에 죽으시고, 성령에 의해서 그 죽음의 장소인 무덤에서 부활하셔서, 하나님 보좌에 앉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는 자신이 생각해 놓은 사람들의 죄를 대신 해결했다는 성과가 담겨있기에 그들에게 성령을 부어주게 되면 성령을 받는 당사자들은 죄를 이미 해결받는 사람들이 되어 있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 안에서 예수님의 소유가 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한결같이 구원받게 된 모든 힘과 공적이 오직 예수님에게 있음을 고백한다 데 있습니다. 마치 24장로들처럼 말입니다. 이들에게 있어 더 이상 모자람을 채우는 식의 인생은 살지 않고 오로지 주님의 행하심에 대해서 감사하고 고마워하는 심정으로 살아갑니다.
이들은 자신의 강한 의지력을 발휘하는 자들이 아니라 자아로부터 해방되어 오로지 자기 안에서 일하시는 주님의 지시하심에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들에게는 다른 자아, 곧 주님의 자아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것이 곧 거룩한 성전인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바로 진정한 자유인입니다. 더 이상 자기 공로를 말하는 자유인이 아니라 자기 안에 계시는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를 말하는 자유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더 이상 우리 소유라고 믿지 않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