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사 15: 1 (모압의 멸망)
Re..사 15: 1 (모압의 멸망)
이름 : 이근호(IP:)
047강-사15장,1,(모압의,멸망)-isa060726
모압의 멸망
2006년 7월 26일
설교 본문: 이사야 15:1
(사 15:1) 『모압에 관한 경고라 하루 밤에 모압 알이 망하여 황폐할 것이며 하루 밤에 모압 길이 망하여 황폐할 것이라』
모압이라는 나라로 인해 유다 나라가 지닌 특수성이 확실하게 부각됩니다. 멸망받는 나라가 곁에 있음으로 인해 유다 나라가 말하고자 하는 구원의 실체가 분명해지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모압이라는 나라는 하루밤 사이에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멸망당하는 하는 운명이 이런 것이다 라는 것을 시범조로 보여주는 양상으로 멸망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흔히들 구원이란 개인적인 문제라고 간주됩니다. 여러 주위 사람들이 같이 휘말려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진짜 구원됨을 보여주시는 유다 나라는 그 주변 나라의 운명들을 같이 휘몰아 치게 만듭니다. 원하든 원치 않든 하나님이 벌리시는 구원 활동에는 구원받지 못하는 나라도 함께 휩쓸려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즉 구원받지 못하는 자들의 멸망이 없이는 유다 나라의 구원을 제대로 설명해 낼 수가 없습니다. 그런 의미로 관계가 성사되어 있어야 합니다. 흔히들 모압과 암몬 나라의 근원에 대해서 부정적인 인식들을 갖게 됩니다. 롯의 가족이 소돔과 고모라성에서 간신히 탈출 해놓고서는 그 두 딸들이 자식을 가질 희망이 전혀 없으니 할 수 없이 아버지인 롯에게 술을 먹여서 관계를 가져 나은 자식이 바로 모압과 암몬 나라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도덕적으로 용납해줄 수 없는 관계로 인해 생긴 나라이니 그 안에서 불길한 저주의 기운이 꽉 차서 흐르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 나라가 망한 것도 이미 그 씨앗 부터가 더러워서 그렇다고 여겨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그 어떠한 건전한 혼인 관계도 이들보다 더 복받을 만한 조건을 가졌다고 우길 수 없습니다.
즉 경건한 혈통이라는 조건을 보고 주님께서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 예로서, 에서와 야곱은 모두 한 아버지인 이삭의 자식들입니다. 하지만 한 사람은 무조건적으로 사랑을 받고 한 사람은 무조건적으로 저주받게 됩니다. 이것은 순전한 일방적인 하나님의 결정이지 인간들이 그런 유리한 조건을 받을 만한 이유를 사전에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즉 혈통적으로 저주의 혈통이 따로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마치 축복받은 혈통이 따로 없듯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란, 그 효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저주받는 나라들이 한결같이 그 축복에 대해서 저주해도 그 사랑이 닳아 없어지거나 취소되지 않는 법입니다. 저주받은 나라들이 유다 나라 옆에서 해야 될 역할이 바로 이런 겁니다.
그들이 전심으로 이스라엘을 저주하므로서 그 저주로 인해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주님의 사랑이 취소되거나 변경되지 않음을 분명히 보여주어야 하는 역할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복을 증거하는 방식이 바로 이런 식입니다. 복을 받지 못한 자들로 하여금 마음껏 시달리게 하는 겁니다.
그 과정을 통해 저주받은 자들은 자신이 품성과 본성을 더 이상 감추지 못한 채 폭로하게 됩니다. 즉 저주성을 통해서 말해지는 축복이 바로 하나님께서 드러내시고자 하는 축복입니다. 모압과 이스라엘의 만남은 발락과 발람 선지자의 만남에서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발락은 모압왕입니다.
그들에게는 기분 나쁜 소식이 들여왔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 막강한 통치력을 가진 애굽 나라조차 붙잡지 못하고 뿌리치고 탈출에 성공했다는 소식입니다. 도대체 그들의 탈출이 성공할 수 있었던 힘은 어디서 나왔는지 궁금했습니다. 동시에 모압 나라에게도 대단히 위협이 되는 나라임에 틀림이 없었습니다.
발락왕은 그 나라를 저주해야 했습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자기 나라의 운명이 위태로웠습니다. 발람이라는 선지자 포섭에 나섰습니다. 이 선지자는 참으로 신으로부터 계시를 받는 신입니다. 그 선지자를 초빙하기 위해 막대한 재물과 직위를 보장해 주겠노라고 약속하면서 고위 귀족을 그에게 방문토록 했습니다.
하지만 발람 선지자는 그 후한 제의를 다 거부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는 오로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만 전한다”고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그 발람선지자로 하여금 이스라엘 대열과 만나도록 하십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발락왕도 몰랐고 발람선지자도 몰랐습니다.
도중에 발람 선지자는 하나님의 사자를 만나 죽을 뻔합니다. 미물의 당나귀의 처신으로 인해 겨우 살아남게 됩니다. 비로소 발람 선지자는 이스라엘 하나님 앞에서 독자적으로 처신하고 판단 할 수 없는 지경에 놓여 있음을 알게 됩니다. 즉 이스라엘을 축복하는데 있어 본인이 빠질 수 없는 운명임을 알게 됩니다.
아무리 발락왕이 막대한 재산을 제공해도 발람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운명에 대해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대변자로 변신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어떤 나라입니까? 그 나라는 단순히 복을 소유하고 있는 나라 정도가 아닙니다. 누구든지 어떤 나라이든지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나라는 복을 받고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나라는 저주받게 됩니다.
이것은 단순히 이스라엘 나라는 복받은 나라라는 정도가 아니라 다른 주변의 모든 나라는 단지 이스라엘 나라와 접촉했다는 이유만으로 이스라엘의 축복의 위력을 증거해야 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나라로 소집당하게 된 것입니다. 주변 나라는 도저히 이 이스라엘 나라에 대해서 축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받은 축복은 인간의 행함이나 수고나 열성을 통해 획득한 축복이 아니라 인간의 그 어떤 조건도 보지 않고 일방적으로 제공된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이 축복은 본인 뿐만 아니라 그 누구에 의해서 취소되거나 빼앗기지 않는 축복입니다. 이런 축복의 특이성에 대해서 마귀들린 자들도 증언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메시야 됨에 대해서 가장 곁에서 뚜렷하게 알고 있었던 사람은 의외에 가룟 유다였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일의 심각성으로 인해 그는 참지 못하고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다른 제자들에게 있어 그만큼 심각성은 없이 예수님의 체포되자 각자의 생활로 되돌아 갔습니다.
오늘날 우리 성도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축복은 너무나도 대단해서 평생 주위의 사람으로부터 그 어떤 위협과 협박과 놀림이 주어져도 놀랄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가진 사랑이 얼마나 큰 횡재인 것을 알게 하옵소서. 사랑을 지키는 자에 머물지 말고 사랑을 나누어주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