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20050404 부산강의-알미니안주의
Re..20050404 부산강의-알미니안주의
이름 : 한윤범(IP:)
20050404 부산강의-알미니안주의
(강의:이근호 목사)
츠빙글리 대해서 좀더 생각을 많이 해봐야 돼요. 츠빙글리하고 그 뒤 청교도하고 진젠도르프하고 생각을 해보셔야 됩니다. 그 진젠도르프와 요한 웨슬리하고 청교도하고 어떻게 다른가? 그 사람들이 어떻게 다른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칼빈하고도 어떻게 다른가?
하나의 이론이 나오면 그 뒤에 상세 이론이 나와요. 처음에 나온 사람이 모든 구석구석을 카바를 못하잖아요. 대략 하나님 뜻은 이렇게 흘러간다 하는 그 전체는 이야기할 수 있어도 그 세부, 세부로 그럼 인간이 이런 궁금증은 어떻게 해결하고, 이렇게 나올 때는 어떻게 정답이 나오고, 이건 어떻게 됩니까? 하는 그런 세부사항은 그 뒤에 있는 이미 다 한 사람이 거대한 틀을 만든다고 바빠서 못한 것 있잖아요.
그럼 그 틀을 한꺼번에 삼킨 사람들은 시간이 여유가 남는다 이 말이죠. 남고 거기에 대한 아이디어들이 있으니까 거기에 대해서 세부적인 교리를 상세하게 더듬어가는 작업들이야 루터, 칼빈 이후에 뒤에 청교도 이런 사람들이 쭉 하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말은 이렇게 좋게 세부 교리로 들어가서 연구한다 하지만 사실은 세부 교리가 아니고, 인간들이 자기 성향에 따라서 교파로 자동 분류가 됩니다. 택배회사가 경상도 지방, 전라도 지방, 충청도 지방으로 물건들이 물품들이 자동 분류되잖아요. 요새 택배회사 보면, 물품보관창고에서 분류가 된다 이 말이죠. 그걸 물류회사라 하지요. 물류창고, 그렇게 하듯이.
나는 역시 어느 것이 옳다가 아니라 어느 것이 옳고 진리가 아니라 자기 인생을 살아오면서 느낀 것이 있다고. 일반교인들이. 충격을 받는다든지, 감동을 받는다든지. 어떤 획기적인 자기에게 특화된, 특별히 의미가 부여된 사건을 접하게 되면 그것을 정당화해 줄 수 있는 그러한 교리를 찾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진리가 무엇이냐? 성경에서 진리가 무엇을 말하느냐? 이거는 사람들이 별 관심이 없고 내가 경험한 특별한 신앙적, 종교적 체험, 이것을 어떻게 누가 나서서 유명한 신학자가 나서서 그래, 바로 그거야. 그게 중생한 거야. 언질을 주었으면, 마음이 얼마나 편하겠습니까? 안심이 되고.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고 편안해지겠지요. 그런 류에 따라서 따로따로 분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감동을 주는 목회를 가지고 치유와 위로의 목회라고 하는 겁니다. 치유와 위로의 목회의 핵심은 뭐냐 하면, 성경에서 출발하자는 게 핵심이 아닙니다. 그들이 뭘 아쉬워하느냐? 그들이 뭘 소원하느냐? 그게 모든 목회의 출발점이 치유와 위로의 목회입니다.
그전까지 장로교의 신학교에서는 뭐냐 하면, 성경이 진리이다. 군말하지 마라. 성경이 진리다. 이 성경의 진리를 거부하는 놈은 전부 이단이니까 교회 나오지 말라고 해라. 하고 단호하게 진리를 사수하겠다는 정통개혁주의를 사수하겠다는 이러한 의미가 신학교에서 만큼은 딴 데는 개판이지만 하여튼 신학교만큼은 그건 있었거든요.
있었는데 그게 실제로 신학교 나와서 목회를 해보면, 교인들이 성경 구경하러 교회오진 않지 않습니까? 자기 마음속에 한이 맺혀서 온다고요. 한을 풀어주는 그러한 목회를 해야 되겠지요. 한을 풀어주는 목회를 하는데 그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우리는 정통신학교, 정통개혁주의 신학을 하기 때문에 당신이 알고 있는 신학만 알면 구원은 이건 완전히 된 겁니다. 라고 안심부터 주는 것도 거기에 포함되는 겁니다.
결국 성경 진리는 어디에 이용되느냐 하면, 그들의 마음을 행복하게 만드는데 하나의 수단으로 동원될 뿐이죠. 그러니까 누구하고 상관없습니까? 하늘에 있는 하나님 하고 아무 상관이 없는 거예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진실한 뜻하곤 아무 상관없는 겁니다. 물론 교인들이 처음부터 하나님 뜻을 알기 위해서 온 사람들은 거의 없으니까. 따라서 거기에 사람들의 소원과 그들의 존재의 정당함을 채워주기 위해서 하는데.
우리 공부 페이지를 뭐부터 먼저 보느냐 하면, 진젠도르프 하기 전에 알미니안, 134페이지부터 먼저 한번 봅시다. 이걸 보고 위를 한번 쳐 올라가는. 알미니안주의와 그 전에 있던 사람과 청교도, 진젠도르프, 웨슬리, 칼빈, 이 사람들과 알미니안주의와 어떠한 차이가 나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눈에, 머리 속에 확연히 들어올 것입니다.
알미니안주의가 정통개혁주의에서 거부당한 것이 유명한 돌트신조, 1619년 돌트종교회의에서 거부되었습니다. 돌트종교회의는 네덜란드에 있지요. 그리고 알미니안주의도 네덜란드에서 출발했습니다. 왜 네덜란드에서 출발하느냐 하면, 네덜란드가 그 당시에 개신교를 표방한 유일한 국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천주교도 싫고, 우리는 칼빈주의에 근거한 개혁주의로 그 자체로 나라를 만들겠다고 나섰던 것이 네덜란드이기 때문에.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다 형제지, 해놓고 가만히 보니까 아까 자기의 중생 체험, 종교적인 체험, 입맛에 맞도록 거기서 분류작업이 시작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 개척교회 할 때 우리는 십자가만을 외치고 어떻게, 노회도 마찬가지. 십자가 외치고 해놓고, 나중에 세월이 흘러가면 거기서 따로 분류작업이 시작되는 거예요. 또 분류작업 되는 겁니다. 이게 우리나라에 정당제도하고 똑같다고 보시면 이해하는데 더 이상 이해할 필요가 없을 거예요. 해바라기 비슷한 필요에 따라 옮겨 다니는 그런 거죠.
1619년에 돌트에서 거절당했는데, 1610년에 제안해서 허락을 받았지만 9년 후에 성경말씀과 거리가 멀다고 거절당했어요. 돌트종교회의에서. 그러면 어떤 내용이 있기에 성경과 거부당했는지, 우리가 잠시 아무 신학교도 안 나오고 평신도라고 생각해서 교회 처음 나왔다고 생각해서 알미니안주의자의 다섯 가지 요점에 대해서 135페이지부터 나와 있습니다. 그걸 같이 한번 봅시다. 보면 은혜와 감동의 물결이에요. 더 이상 은혜가 또 어디 있겠느냐?
[비록 인간의 본성이 아담의 범법으로 인해 타락해서 신중히 영향을 받았을지라도 인간이 영적 도움을 받지 못하는 상태에 남아 있게 되지는 않았다. 하나님께서 모든 죄인들이 회개하여 믿게 하실 수는 있으나 그분이 인간의 자유를 간섭하지는 않는다. 각 죄인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그의 영원한 운명은 그가 자기 자유의지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달렸다.]
어떤 분이 그런 반발을 최근에 저한테 했어요. 뭐냐 하면, 이근호 목사의 주장은, 그 사람은 평신도인데, 왜 선한 일을 하는 것도 죄라고 규정하느냐 그거에요. 한국교회가 잘못된 것을 같이 고발하고 같이 지적하고 그래서 이것은 잘못됐다하고 그걸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그 자체를 왜 나쁜 걸로 보느냐? 그렇게 행동하는 그 인간은 뭔가 남들보다 훌륭하다고 인정해줘야 되지 않겠느냐? 그러한 반론을 제시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뭐 하나 모르냐 하면, 자기가 구원을 갖고 있다고 여기고 싶지, 구원이 자기를 갖고 있고 싶다고 생각은 아예 그런 생각은 안 갖고 있는 거예요. 구원의 능력이 자기를 쥐고 있다 하는 생각보다도 내 구원은 내가 따냈다는 생각이 자기한테 자기의 모든 인생 경험과 체험에 맞춰서 이것이 자기한테는 상당히 기쁨을 주더란 말이죠. 기쁨을 줘요.
교회 다니는 것도 일종의 자극 아닙니까? 어제도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청소년들이 자극을 원합니다. 자극이라는 것은 왜 자극을 원하느냐 하면, 즐거움이라는 것은 신선한 자극이 없이는 즐거움을 채워주지 못합니다. 성경을 접하고 소위 복음이라는 것을 접했을 때 그 복음에 미치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 복음이 자기한테 자극이 되고 즐겁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 복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게 그렇게 즐겁다 이 말이죠.
그래서 복음으로 자기가 구원받았잖아요. 그러니까 그게 뭐가 나쁘냐 이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복음이 좋고 복음이 기쁘고 또 복음을 인정한다는 자체가 성령이 아니면 안 되는 성령의 열매라고 해서 그것마저 내가 수용했다면, 이제 복음을 알았으니까 복음 아는 내가 이제는 복음 모르는 인간들을 고발하고 잘못된 것 지적하고 활동하는 이게 뭐가 나쁘냐 이 말입니다.
그런데 제가 처음에 얘기했잖아요. 그 사람은 구원이라는 말을 따낸 걸로 여긴 거예요. 구원을 이제는 구원받는 자로 여기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에게는 뭐가 무너지지 않았어요? 아직도 자아가 전혀 무너지지 않았던 겁니다. 자아가 오히려 더 빛나고 있어요. 자아가 허물어지기는커녕 해체되기는커녕 자아가 눈부시게 막 수평선에 떠오르는 태양처럼 자기가 위대하게 역사의 지평에 막 떠오르고 있는 겁니다. 나를 주목하라! 이 말이에요. 나를 주목하라 하는 그 다음 말은 나를 건드리지 마라. 나를 채근하지 마라든지, 나를 벌주지 마라. 나를 건드리지 마라.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이 알미니안주의가 이게 그냥 나온 것이 아니라 어디서 나왔다? 정통개혁주의신학에서 나왔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감안을 해주셔야 됩니다. 그러니까 알미니안주의로부터 따로 생긴 것이 아니고, 정통개혁주의로부터 칼빈주의로부터 알미니안주의가 나왔다는 이 말은 뭐냐 하면, 그거 다 안다 이 말입니다. 다 아는데 2% 부족한 게 있더란 말이죠.
그러면 2%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은 뭐냐 하면, 결국은 칼빈주의 신학을 공부를 다 했는데 이것이 자기가 경험했던 종교체험하고는 뭔가 꽉 안 짜여지고, 포옹해도 팍 안아야 되는데, 멀찍이 5센티 띄워놓고 사랑해. 이렇게 하려고 하니까 자기가 힘들어 못살겠다 말이죠.
어느 정도까지 버티고 맞습니다. 역시 칼빈 말이 옳습니다. 루터 말이 옳습니다. 라고 버티고 싶은데, 에이씨. 하고 더 이상 못 버티고 속성상. 칼빈이 그게 아니고, 그게 맞는데. 그러나 이런 면도 성경에 있다는 걸 왜 모르노? 하고 자기의 성질대로 성깔대로 자기의 느낀 대로 그냥 툭 던져버린 겁니다.
그런데 그게 자기 혼자 같으면 내가 이단적인 생각이지 싶은데, 가만히 교회 내에 보니까 자기가 말해보니까 평소에 말은 안 하고 있어도 뭔가 불만 같은 것이 의외로 많더란 말이죠. 많으니까 그것들 간에 하나의 동아리가 형성되어서 나도 그래. 나도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새로운, 우리 한번 정리해보자. 정리해서 나온 게 알미니안 다섯 가지 속성이 나온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알미니안 이야기 그렇게 생각하게 된 지금 방금 이렇게 짐작하신다면, 알미니안이 어떤 주장을 하던 간에 그들의 주장의 문제점이 뭐다 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생각이 깊은 사람은 간파했을 거예요. 그들의 주장이 결국 뭐냐 하면, 개념 문제입니다. 그들이 정통개혁주의를 부인하는 게 아니고, 그러면서도 새로운 하나의 2% 더 첨가해서 말은 개념조정이에요. 개념의 범위조정에 들어가지요.
예를 들어서 하나님의 은혜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맞는데, 그 은혜라는 개념조정에 뭔가 포함되어야 된다는 거죠. 뭐가 포함되어야 되느냐? 하나님의 그냥 성령으로 주신 것만 은혜가 아니라 그걸로 인하여 우리가 행동하게 된 것도 은혜로 치자 이 말이죠. 우리가 새 생명 삶을 살고 있는 이 행동 있잖아요. 행함이 없으면 죽은 믿음이니까.
새로운 믿음이 들어와서 생기는 새롭게 발생된 믿음으로 행하는 행함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 행함을 은혜라고 쳐버리면, 그것까지는 정통개혁 칼빈주의도 주장하니까. 그 다음에 은혜를 설명할 때 은혜로 설명하지 말고 그거는 이제 앞은 떼어버려도 괜찮은 거예요.
다시 해 볼까요. 은혜로부터 해서 행함이 주어졌잖아요. 은혜의 결과가 행함 아닙니까? 행동은 보통 행동이 아니고 뭐로부터 행동이다? 은혜로부터 주어진 행동 아닙니까? 그러면 은혜가 뭐냐 할 때 다시 은혜로 돌아갈 필요 없이, 은혜로운 행동이 무엇이냐를 설명하면 은혜가 무엇인지 아니까 은혜, 그런 것 떼어내도 괜찮다 이 말입니다.
왜 가만있는 걸 왜 떼어 내냐? 이걸 떼어내 줘야 자기는 똑똑하니까 아는데 일반 무식한 사람들이 교회로 많이 몰릴 것 아니냐 이 말이죠. 행동을 이렇게 하시면 은혜로운 행동입니다. 하면 그래, 나도 그렇게 행동하면 됩니까? 됩니다. 하면 같은 교인되어서 교회가 부흥될 수 있다 이 말이에요.
그렇지 않고 행동의 원초가 되는 이 행동이 은혜로운 행동이냐, 아니면 그냥 인간적인 구원받고자 하는 욕구에 나선 욕망의 화신이냐, 욕심에 대한 결과냐? 하는 것을 그 원초를 따라서 다시 행동을 보류해 놓고. 다시 원초가 되는 뿌리가 되는 은혜냐, 안 그러면 인간에서 나온 욕심이냐 따져버리면 이 행동 자체를 원뿌리가 비난하게 되고 고발하게 되고 정죄하는 요구를 계속 남기잖아요.
대학교 MT나 어떤 조직체에서 어떤 사람이 영어회화를 잘한다 해 봅시다. 영어회화를 잘하게 될 때 너, 누구한테 배왔노? 북한 같으면, 우리 김정일 지도자의 은총으로 할 것 아닙니까? 그러면 북한에 영어 잘하는 사람 있어요. 그런데 그 앞에 뭐가 붙습니까? 김정일의 은총으로 영어를 잘했다고 붙잖아요. 그런데 남한에 있는 사람이 북한에 가 있으면서, 일본에 있는 사람이 또 북한에 살면서 같이 영어를 잘한 거예요. 영어, 왜 잘 하노? 내가 잘해서 잘하지. 이러면 그거는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거기에 뭐가 빠졌어요? 그러면 알미니안주의가 이거에요. 같이 영어 잘하면 그냥 영어 잘한다고 해줘라 이 말이죠. 다시 김정일이가 했느냐 이런 것, 묻는 것 자체가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말이죠. 어쨌든 하나님 은혜로 영어 잘했으면 끝나는 거지. 그거 잘해서 은혜로 바른 행동해서 이 행동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이게 칼빈주의 아닙니까? 이게 문제가 되는데 칼빈주의는 이게 문제되는지 모르잖아요. 사도 바울의 명령법 있으니까. 하라, 하라 했으니까 하라 하는 은혜를 통해서 행동을 통해서 영광을 돌리며 하라는 것 아닙니까?
알미니안주의는 칼빈주의 보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 영광 돌리는 행동이 나왔다면, 그것을 긍정해 주고 장려하고 부추겨주지, 그걸 다시 검열하고 검사할 필요가 뭐가 있느냐 이 말입니다.
그러면 칼빈주의에서 말하기를 자유의지에서 나왔는지, 안 그러면 진짜 하나님의 은총인지 분간해야 될 것 아니냐 이렇게 칼빈주의에서 하잖아요. 그래서 알미니안이 이 바보 같은 칼빈주의자들. 이 자유의지 자체를 하나님 은혜를 집어넣으면 되잖아. 이 자유의지 자체를.
그러니까 사람이 행동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행동은 은혜에서 나왔다 하잖아요. 행동이 은혜에서 나왔다 하지 말고 행동은 자유의지에서 나왔다 해도 같은 의미다 말이죠. 알미니안주의가 하나님 은혜를 부인합니까? 아니잖아요. 알미니안주의가 하나님 은혜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를 하나의 동기유발로 치고, 다만 그 눈에 띠는 중간 매체로서 자유의지를 집어넣는 거예요.
그러면 자유의지를 빼는 것보다도 빼버리면 기계가 되니까 로보트가 되니까 같은 뉘앙스라면 자유의지를 집어넣어서 행동이 나왔다 하는 것이 아무것도 모르는 일반교인들에게 납득이 충분히 되고 그러면 교회 부흥되는데 수월하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알미니안주의는 개혁주의에서 나왔다는 것을 꼭 감안하세요.
그런데 이러한 알미니안주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알미니안주의하면 목사들이 신학교에서 자다가도 알미니안주의는 안 된다고 들었다고. 들어 노니까 이렇게 깊이 설명해줘도 알미니안주의이기 때문에 무조건 안 된데. 그러면서도 저거들 칼빈주의 이야기하면 똑같이 가르치면서도. 알미니안주의하면 무조건 안 된데. 지는 알미니안 가르치면서. 참, 문제가요 그러니까 알미니안 해도 알미니안이 뭔지를 공부도 안 해 봤어. 그건 시험에 안 나온다고. 교수한테 요번에 시험에 뭐 나옵니까? 다 공부해야 될 건데. 다 공부 안하고 낙제 안 하려고 그것만 딱 공부하니까.
계속 봅시다. 여기선 난 자유의지가 뭐라고요? 그러니까 뭐냐 하면, 내가 자유의지라는 게 있을 때 일반 교인 정도가 아니라 일반 사람들에게 납득이 되는 이유가, 지옥이 책임을 지는 자에게 지옥을 해야 형벌이 형벌답지, 자기가 의도하지도 않는 일을 자기가 행동했다고 처벌해 버리면 그건 하나님의 공의성에 문제가 있다 말이죠. 은혜는 은혜대로 따로 주장하면서도 자유의지를 주장해 놓으면 훨씬 수월하지 않느냐 이 말이죠. 모든 것이 이해하는데 수월하지 않겠느냐 이 말이죠. 은혜를 부인하는 게 아니고.
그 다음에.
[인간의 자유는 영적으로 악보다 선을 택할 수 있는 능력에 있는 것이다. 즉 인간의 의지는 그의 죄를 짓는 본성에 노예화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노예화되지 않았다 이 말이죠. 죄가 없다는 말 한 게 아니고 알미니안주의가 죄를 안 짓는 게 아니고, 노예화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노예화가 돼버리면 이거는 노예는 자유의지 신분과 다릅니다. 노예의 특징이 뭐냐 하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 돼요.
그래서 만약에 인간이 죄를 지은 것에 대해서 책임을 물으려면, 니가 죄 졌지? 이게 가능해야 되지, 나 시켜서 했습니다. 누가 시켰는데? 마귀가. 마귀를 벌해야지. 인간을 벌하면 안 되잖아요. 자기는 그저 시키는 대로 강제적으로 했다면, 그거는 안 된다 이 말이죠. 군대에서 작전에 잘못했을 때 그 부하한테 묻는 게 아니고 작전을 한 인간에게 묻는 게 아닙니까? 자기는 시키는 대로 했으니까.
그래서 알미니안주의가 또 여기서 모르는 게 뭡니까? 구원이 뭐로 봅니까? 개인적으로 천당 가는 걸 구원으로 본다니까. 제가 아까 처음에도 이야기했죠. 구원을 개별화시킨다고. 왜 예수 믿고 착해서 행동하는데 그게 뭐가 나쁩니까? 하는 그것도 구원을 자기가 나의 구원으로 보는 거예요. 내 몫의 구원이 따로 있는 거예요. 내 몫의 구원은 남이 거기에 터치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 사람 생각에. 절대 터치 못하죠.
왜냐하면 내가 거듭나서 내가 깨달아서 구원했기 때문에. 지가 깨달은 게 아니거든요. 남이 깨달아 구원 받은 것을 내가 왜 낼름 거기다 공거로 먹으라 하겠습니까? 이건 말도 안 되는 욕심쟁이 아닙니까? 내 구원은 내가 알아서 깨달아서 구원하는 거예요. 칼빈주의 아무리해도 인간에겐 영원히 뭣은 남아 있어요? 알미니안주의의 요소가 영원히 위에서 마그마처럼 슬슬 끄물끄물 희물희물 올라오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알미니안주의라고 했지만 철학적으로 말해서 여러분이 [철학의 함정]을 여러 번 읽어보셔야 하는데, 거기에 보면 개인의 존재성, 주체성. 이 주체성이 있기 때문에 강한 자아성, 주체성, 이것이 있기 때문에 내 인생, 내 운명을 내가 하듯이 내 구원문제도 내가 알아서 내가 한다 이거에요. 그리고 그 뜻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받은 구원은 남한테 줄 수 없고 남이 내 구원은 뺏을 수 없고 그렇지요. 그게 라이프니치의 단자론, 모나드 아닙니까? 나는 내안에 끝까지 갇혀있는 거예요.
그 다음에.
[죄인은 하나님의 성령에 동조(협조)하여 재생할 수 있는 권능이 있고 또 하나님의 은사를 거절하여 멸망될 수 있는 권능도 소유하고 있다.]
이거는 바로 인간이 살아가면서, 다시 봅시다. 내 구원은 내 것으로 결정 났기 때문에 내 관리 하에 있기 때문에 내 구원 되는데. 그런데 내 관리 하에서 계속해서 관리를 잘 해야 되지요.
흔히 선교단체에서 뭐라 합니까? 청지기론이라 합니까? 청지기론. 하나님이 주신 이 세상을 관리를 잘해야 되는데, 문제는 관리를 잘해야 된다 하는 것은 인정하는데, 관리를 못했을 경우에 하나님께 어떤 징계와 어떤 처벌을 받느냐 하는 그 문제에 세부교리에 들어가 버리면, 자기들이 하나님의 청지기다, 하나님의 종이라고 생각했던 그 나름대로의 이론들이 만세까지의 본색을 다 드러내요.
친구인 줄 알았더니만 엉뚱하게 전부다 동상이몽입니까? 제가 문자 썼지요. 방금. 동상이몽, 같이 자도 꿈은 따로 꾸고 있는. 그런 것이 하나하나 들통이 나는 겁니다. 그거는 개인과 다른 사람과의 관계도 그렇지만 한 인간이 살아가면서 연륜에 따라서 세월에 따라서 다 달라요.
그러니 이 이야기는 성령과 동조해서 해야 된다 이 이야기는 성경에 근거한 게 아니고 순전히 저거들이 종교적인 그동안 연륜과 체험과 경험에 맞추어서 이런 이론이 맞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이런 이론은 장로급들, 교회 장로급이나 장립 집사급들, 이런 사람한테는 이런 이론이 먹혀 들어가겠지요.
교인들이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서 성경이 뭐냐, 진리가 뭐냐? 이것 좀 관심을 두면 좋겠는데, 뭐만 자꾸 관심을 두냐 하면, 그러니까 내가 구원 받은 것 맞습니까? 백날 자기 구원 받은 것 맞습니까? 그것만 확인하다 보니까 자기 그럴싸한 다른 이론들이 나오면 혹하고 완전히 거기 넘어가 버려요. 맞다, 맞다, 맞다. 이거는 우리 목사님이 몰랐던 거야. 따라서 이게 맞아. 내가 처음에 맞아. 해서 거기로 마음이 다 빼앗기는 겁니다.
성령이 협조하여 재생할 수 있다 했는데, 그 점에 대해서 한번 봅시다. 인간의 하나님의 성령에 동조하여 협조하여 재생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했는데, 여기 하나님께 성령에 협조하여 재생할 수 있다는 말과 죄인이, 그냥 죄인이 자유의지를 발휘해서 자기 구원을 관리할 수 잇다는 것과 어떤 차이가 납니까? 어떤 차이가 있어요? 알미니안주의는 하나님의 성령에 협조란 말을 꼭 집어넣는데, 이렇게 집어넣게 된 그 의도가 뭡니까? 무엇이 그렇게 켕기기 때문에 무엇이 거기에 뭔가 욕 얻어먹을까 싶어서 집어넣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알미니안 이 사람들은, 협조했다 해도 문제되는 게 지분을 몇 % 갖느냐가 문제되거든요. 50 대 50 이냐? 100%, 100이냐? 100% 100이란 말이 내나 50 대 50이란 말이에요. 그게 권성수라든지 이한수라든지 총신에서 주장하는 거 아닙니까? 그게 뭣이냐? 알미니안주의에요. 50대 50이라니까. 협조하는 거예요.
협조한다는 말을 하지 말고 아예 인간에 자유의지를 줬으니까 자유의지에 맡겨둬서 잘 못 되면 책임 물어서 지옥 보내고, 잘하면 잘했다고 격려해서 천당 보내고 이렇게 하지, 왜 ‘성령에 협조 하에’라는 말을 집어넣는 그들의 그렇게 주장하는 의도가 뭐냐 말이에요. 그게 참 궁금하다 말이에요. 앗쌀하게 나오지 사나이답게 나오지, 슬그머니 성령에 협조라는 말을 왜 하느냐 말이에요. 성령께서 그냥 뒤에서 배후에서 지켜본다 하면 그걸로 끝나지, 왜 협조한다는 말을 왜 하느냐 말이죠. 그것은 착하고 싶어도 무엇이 착한지를 기준 되는 것을 인간은 만들어 낼 수 없다는 의도입니다.
프로이드 이론에 보면, 이드와 에고와 초자아가 있잖아요. 초자아를 프로이드는 양심이라고 봤잖아요. 이드라 하는 것은 동물적인 본성을 말합니다. 종족본성. 종족본성은 성적 에너지로 나오지요. 동물적인 본성이지요. 이드가 막 튀어나오면 짐승같이 되니까 여기 초자아가 억누르지요. 억누르는 걸 가지고 억압, 또 짜부라뜨린다. 이렇게 봐요. 찌그러지게 한다.
찌그러지게 나왔기 때문에 찌그러지면서 부서져서 몇 개 튀어나온 것이 잠재몽. 꿈속에선 잠재몽이 현실몽이 돼요. 꿈속에도 두 가지 있는데 잠재몽이 현실몽이 있어요. 잠재몽에 있다가 꿈을 꾸면 잠재몽에서 몇 개가 파편 되어서 찌그러진 상태에서 현실몽이 튀어나오면, 그래서 꿈은 스토리가 복잡해. 짜부러뜨려서 깨져서 나오는 거예요.
누가 깨는지 알아요? 야, 니가 아무리 꿈이지만 너무하잖아요. 검열하는 게 있어요. 검열하는 것은 이것이 양심이라면, 양심이 뭐냐 하는 것에서 연구하는 것이 자크 라캉이에요. 초자아에서 연구한 것이. 초자아에서 이걸 실제계라 이야기해요. 이건 프로이드가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라캉이 이야기한 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 사회적인 통념, 목사의 설교, 아버지의 교분, 이런 것들이 생긴다 말이지요. 그래서 부모 없이 막되 먹게 어릴 때부터 어두운 구석에 자랐던 애들이 담배 피우는 것이 좋은지 나쁜지 그런 것도 모르고, 길거리에 칙, 침 뱉는 것도 이게 왜 나쁘냐는 것도 모르고, 그냥 사람 찔러 죽이는 것은 나쁘지만 거리에서 담배 피우는 것은 안 나쁘다. 자기 마음대로 자기 들은 풍월대로 되는 거예요. 남 찔러 죽이는 것은 안 나쁘지만 자기 조직 내에 의리를 위반하는 것은 나쁜 걸로 보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주위에 주어들은 것이 뭘 만듭니까? 자체 내에서 자기 에고가 조절하는 거예요. 이것은 선한 쪽으로 보내버리고 요거는 이드는 악한 쪽으로 보내서 그때그때마다 자기 양심이 하거든요.
그러니까 알미니안주의가 성령의 협조란 말을 왜 집어넣었습니까? 그것은 인간의 본성이 이렇잖아요. 그러니까 이 역할, 초자아 역할, 양심의 역할이라 할 때 양심이라 하면 이거는 완전히 자연종교 아닙니까? 이걸 누구 몫으로 돌리자 이 말입니까? 하나님의 삼위일체 가운데 성령님의 몫으로 돌려버리면, 얼마나 일반사람들이 납득이 되느냐 말이죠.
왜냐하면 일반사람이 종교를 모르고 기독교를 몰라도 이미 평소에 찾아가는 것이 자기를 늘 검열하고 이래선 안돼. 라고 천사의 음성이래서 보이스 오브 엔젤. 발음이 되는가 모르겠네. 천사의 음성을 듣고 있는데 그 천사의 음성을 그걸 그냥 양심의 소리라 한다면, 지옥 갈 불신자고, 그걸 성령의 음성이라 하면 거듭난 성도가 되고. 세상에 이것보다 수월하게 거듭나는 게 어디 있어요. 수월하게 천당 가는 게 어디 있어요. 최고에요, 최고. 설교시간에 꾸벅꾸벅 졸아도 이 한 마디만 들으면 구원 다 받아버리니까. 그러니까 성령의 협조란 말을 할 때 더 거룩해지잖아요. 더 고상해 보이고. 그게 천주교 신자잖아요.
팔십 셋 먹은 영감쟁이 하나 죽었다고 난리야. 같은 날에 누가 죽었는지 알아요? 장동휘 죽었어요. 팔십 세로. 돌아오지 않는 해병. 뭐, 별 소문도 없어. 장동휘 죽었다고 달라이 라마가 조전 안 보냈어요. 그런데 교황 죽었다고 조전 보내고 이 난리친다니까.
그게 뭐냐 하면, 모든 인간 속에는 양심의 지도자가 필요했다 이 말입니다. 양심의 지도자. 나의 인생의 빛이 되는 어떤 분을 내가 어느 정도로 흠모한다는 그 자체가 아직도 나는 짐승이 아니고 선한 인간으로 지금 움직이고 있다는 확인할 수 있는 멋진 그게 되지요. 종은 또 명동성당에 가서 초에다가 향, 해서 한다고 사진 찍고. 스님도 바로 존경하잖아요.
아이고, 그걸 보면 데살로니가후서에 나오는 말씀처럼 적그리스도 같아. 딱 맞아. 적그리스도가 딴 게 아니에요. 적그리스도가 오늘날 신부나, 교황이나, 목사나 오늘날 적그리스도에요. 인간의 일반적인 민중들의 초자아를 대체하는 존재로서 등장합니다. 예수님은 안 믿고.
십자가 예수님은 어떻게 죽었습니까? 사람한테 좋은 보답 받은 줄 압니까? 짓밟혔어. 짓밟혔어. 심지어 예수님은 교황처럼 귀때기까지, 교황은 귀때기 안 맞았습니다. 미친놈이 총 쏴 맞았지만, 예수님은 귀때기 맞았어요. 예수님은 공개적으로 귀때기 때렸고, 그 누구 하나 아쉬워하지 않았어요. 막달라 마리아 하나 아쉬워했지. 다른 사람 별로 없었어요.
그야말로 별 볼 일 없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그게 그 당시의 예수였고, 오늘날 교회의 교인들의 예수에요. 오늘날 예수는 교황적인 예수지, 오늘날 교인들의 예수는 교황적인 예수지, 별 볼 일 없는 예수는 예수로 취급을 안 해요. 참, 마지막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고 하는데.
하여튼 어느 한 순간도 위기의 한 순간이 된 적이 없어요. 항상 위기입니다. 헌금이 좀 들어오고 교회가 안정되면 또 위기에요. 그것보다 더 놀라운 일은 헌금이 안 들어오고 교회가 없어지면 그건 더 위기고. 이래도 위기고, 저래도 위기고. 한 순간도 그래서 항상 깨어있으란 말이 그 말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꿈꾸지 말란 말이죠. 현실을 가지고 꿈으로 환상으로 조립하지 말란 말이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생산한 것이 현실이지, 그 외에는 다 환상이거든요. 사람이 자기를 바라보는 순간 환상은 시작됩니다. 사람이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고 자기를 생각할 때 그때부터 환상이 시작되면서, 나는 두 시간 뒤에 뭐가 되어 있을까, 나는 사흘 뒤에 어떤 일을 하고 있을까? 새로운 환상에 들어갑니다.
그 환상은 주의 뜻하고 아무 짝도 소용없는 아무 상관없는 짓이에요. 지가 그걸 즐기고 싶은 거예요. 자기의 이드, 동물적인 것과 그리고 자기 양심과 적당한 선에서 조절해서 그야말로 협조해서, 이 뭐라 했지 아까? 동조하고 협조해서 튀어나온 것이 이게 오늘날 환상을 만드는 인간입니다.
그래서 그 인간은 어떻게 해야 돼요? 십자가 앞에서 날마다, 주여, 내가 바로 죄인입니다. 십자가 달리신 당사자가 바로 접니다. 제가 저분과 동일시 돼야 되는, 납니다. 라는 고백해야 돼요. 그래서 알미니안 보면서 알미니안 이야기가 딴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 속에서 끌어 오르는 우리 이야기라고 보면 됩니다.
그 다음에.
[타락된 죄인은 성령의 도움이 필요하나 그가 믿기 전에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아도 된다.]
이게 뭔 뜻이냐 하면, 신앙 다음에 자기가 스스로 자유의지로서 결단을 내리는 사람에 한해서만 이차적인 작업에 성령께서 도와주게 되어 있어요. 알미니안주의에 의하면. 성령으로 거듭나는 게 아니고, 성령으로 도움으로 거듭나 버리면, 알미니안주의 생각에 어떤 생각을 했느냐 하면, 성령으로 도움으로 거듭나버리면 어떤 일이 벌어지냐 하면, 아무리 구원받고 싶은 그러한 자유의지를 갖고 있어도 성령이 안 도와주면 그 사람 어디 가야 됩니까? 지옥 가야 되기 때문에 그러한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있느냐 말이죠.
디모데전서 2장에 보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죠. 하나님이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한다면, 말만 그렇게 해서는 안 되잖아요. 하나님 쪽에서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한다면 모든 사람에게 기회만큼은 공평하게 배설을 해야 돼요. 기회만큼은 공평하게 제공해야 되면, 어떤 것을 제시해야 되며 어떤 것은 제거돼야 하느냐?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거하는 것은 하나님 쪽에서 미리 제거해줘야 빼줘야 돼요.
다시 이야기할게요.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한다면, 구원받기를 원하는 그 점에 대해서는 그 기회마저 박탈되는 경우는 없어야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럼 앞뒤가 안 맞으니까. 그렇다면 어떤 요소를 빼야 된다? 그 사람이 구원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 구원되는 장애되는 요소를 빼야 되는데 그게 뭐냐 하면, 성령님을 믿기 전부터 집어넣어버리면 처음부터 반편성이 끝나버리니까 안 되고, 일단 믿고 싶습니다. 한 사람에게는 아까 표준이 있어야 되고 모델이 있어야 되니까, 그때는 장하구나. 도와줄게. 이렇게 나와 줘야 이게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다 그 말에 맞다.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한다 그 말씀하고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그 두 가지 가지고 신학교 한번 만들어보세요. 거기에서 그 두 가지 말씀을 가지고, 우리 노회 강도사 시험 치면 멋지다.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한다 하고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두 가지를 가지고 문제를 내는 거예요. 여기서 오직 십자가신학을 끄집어 내보라. 그것 못 끄집어내면 그거는 나중에 보면 또 딴 소리 할 거예요. 색깔이 분명하죠. 교인들에게도 이번 주일에 숙제 한번 내보지. 검사 안 할 테니까, 검사 안 하는 숙제 한번 내보지.
어떻게 하느냐 하면, 바로 새 언약과 옛 언약부터 출발해야 돼요. 그 말씀이 어디 박혀 있느냐? 바로 새 언약이 신약이니까. 그러면 새 언약은 어디 기초해야 됩니까? 옛날 언약에 기초해야 되죠. 그러면 구 언약에 있어서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구원한다는 그 뜻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그 뜻이 옛날 모세 율법에 의해서 어떤 식으로 풀이되고 있느냐를 조사해 보면 그게 나오겠지요.
그게 나오게 되면, 결국 모든 사람이라 하는 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모든'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하나님의 창조에서 나온다고. 그 창조의 뜻이 뭡니까? 무에서 유의 창조 아닙니까. 여기 모든 사람이 구원되려면 하나님에 의해서 무에서 유로 창조된 사람을 모아야 되겠지요.
그렇다면 이 ‘모든’과 신약시대는 새 언약이기 때문에 뭐가 충돌됩니까? 사람들이 알고 있는 ‘모든’이 있겠지요. 사람들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은, 인간이라면 모두고 인간은 모두인데 그것 때문에 파생된 것처럼 모든 계층, 모든 분류가 유대인에 의해서 차별화된 무시당한 계급이라든지 여자라는 이유 때문에, 어린아이란 이유 때문에, 또는 직업이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민족이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차별을 당하는 이런 것을 꺾어버리기 위한 새로운 ‘모든’이 들어갑니다.
그러면 참, 이게 어려운 게 그러면 모든 계층이나 이런 게 차별 없이 들어가니까 그럼 유대인이나 우리나 차별이 없네. 이러면 뭐가 또 어려운가 하면, 모든 구원이 유대인에서 보고, 유대인이 참 감람나무 이것도 어긋나요. ‘모든’이라는 것은 모든 계층이다. 그런 이야기로 종결지으면 안 됩니다. 그렇게 돼버리면 유대인이나 우리나 똑같네. 똑같은 게 아닙니다. 그러면 언약이 날아가 버려요.
영적 이스라엘만 구원받아요. 그것이 모든 안에 포함되어야 됩니다. 그러면 어디서 나오는가? 없는데서 새로 생겨서 생긴 ‘모든’이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다. 지금 하나님께서 창조하신다. 없는데서 있게 하신다 이 말이죠. 그 창조가 옛 언약이라면 새 언약, 예수님이 주 아닙니까? 주 안에 뭐가 포함되어있다?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는 그 작업 숙제가 누구한테 있습니까? 여전히 예수님이 해야 될 과제 안에 포함되어 있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의 ‘모든’이죠. 우리 인간 쪽에서 되도 않는 인간들이 생각하는 ‘모든’이 아니라 예수님 쪽에서 모든 것은 살아있는 인간을 살게 하는 게 아니고, 없는 죽은 해골 같은 인간을 살린다 이 말입니다.
이번에 [지옥의 하나님] 벌서 1월 말에 나온다 해놓고 벌써 4월 달 넘어 왔는데도 아직도 끙끙 앓고 있는데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이 출판사 사장님이 얼마나 꼼꼼한지. 목사님, 이거는 목사님이 돈 준다고 해서 책 내는 그런 책은 전 안 냅니다. 이거는 출판사의 저의 명예입니다. 이왕 내는 거 정말 잘 냈다 하도록 저한테 맡겨 주이소. 해서 맡겨 줘 버렸어요. 그런데 그 내용 중 하나가 죽은 해골이 일어섰다. 하는 소제목이 나와요.
그러면 목사님, 우리가 어떤 교회가 참된 교회입니까? 라고 자꾸 그걸 달라 해서 수정해서 이런 교회가 참된 교회입니다. 수정한 소제목이 뭐냐? 죽은 해골이 일어난다. 죽은 해골이 일어나야 그게 교회다 이 말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남자나 여자나 어떤 계층이나 유대인이나 필요 없다. 하지만 그들이 새로운 유대인이 되는 거예요. 새로운 이스라엘이라 하는 점은 포기해선 안 됩니다. 자칫하면 모든 계층이니까 유대인 니나 내나 똑같다. 이러다 보면 그건 언약 자체가 깨지기 때문에 그렇게 되면 곤란한 게 있다고요.
하여튼 모든 사람이 구원 받는다 그것 하고 그 다음에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그 두 개 하고 오직 십자가 그게 나올 수 있도록 생각해 보면 좋겠지요.
알미니안주의가 가만히 ‘이 이단자들이!’ 라고 욕하더라도, 가만히 그들의 주장을 들어보면, 일반인들이 너무나 타당하고 왜 진작 이런 아이디어가 안 나왔느냐? 칼빈, 루터 이 사람들이 무슨 귀신이 씌워서 이런 좋은 말을 안 했느냐 하지만, 칼빈, 루터 이런 사람이 왜 이런 소리를 안 했느냐 하면,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그거는 그들이 너무 어거스틴, 토마스 아퀴나스 선배 신학자들의 그 권위에 완전히 기가 죽어서, 어느 정도 얼추 비슷해줘야 이단 소리 안 들으니까 선배 신학을 본받아서 그런 게 아닌가? 그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거예요. 알미니안 쪽에서.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를 해야 될 텐데 너무 유명한 신학자로부터 후광을 입으려고 하기 때문에 그렇다. 이렇게 하는데.
따라서 그들은 이야기가 잘 풀려 저희끼리 이야기 잘 돌아 가. 일단 자유의지 하되 성령이 있어서 우리는 이렇게 살아야 돼.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시키는 대로 자유의지를 동원하면 신자에요. 그러면 형제가 하나님의 백성이 무한대로 늘어나요. 나중에는 결국 어디가 늘어납니까? 감리교가 어디로 갑니까? 불교와 손을 잡죠. 감리교가 불교와 손잡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그겁니다. 그리고 천주교가, 천주교가 더 맞아요. 딱 천주교 아닙니까? 천주교가 손잡을 수밖에 이유가 그거에요.
두 번째. 아니 그 앞에.
[신앙은 죄인이 하나님께 드리는 선물이며]
그러니까 하나님이 지금 뭘 받기를 원합니까? 하나님께서 자유의지를 줄 때는 그냥 즐기라고 준 게 아니고, 뭔가 얻고 싶은 게 있으니까 줬잖아요. 그게 뭐냐 하면, 신앙이다 말이죠. 신앙은 인간이 하나님께 드리는 선물이다. 반대로 되어있죠.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 아니고, 인간이 하나님께 드리는 선물이며, 그것이 곧 인간 구원에 이바지한 셈이 된다. 신앙이란 거듭나게 전에 신앙이 먼저 있어야 되고, 신앙이 있고 난 뒤에서 거듭나야 되고. 이렇게 돼요.
[둘째로 하나님이 개인을 선택하셔서 구원을 받게 함은]
보세요. 이 말 보세요. 개인을 선택했잖아요. 구원이 그리스도의 몸을 구원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개인이 마치 자격증 하나 따내는 것처럼 따내는 걸로 생각하는 겁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부름에 순응하리라는 그 분의 예견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거리낌 없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만을 선택하셨다.]
야, 여기 알미니안주의가 선택을 다 이야기하다니. 놀랍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선택했다는 말을 예지하고 선택했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자, 그러면 이거 그냥 넘어가선 안 되지요. 도대체 왜 그러면 하나님이 선택했다는 말을 그들이 집어넣는 이유가 뭡니까? 우린 츠빙글리에서 배웠는데? 신의 속성상 신이 모르는 일이 있으면 됩니까, 안 됩니까? 이건 말이 안 되는 거예요. 그들도 지금 복잡해.
신이 모르는 일이 없잖아요. 신이 모르는 일이 없는데 내가 자유의지로서 십자가를 믿는다. 그들도 십자가를 이야기해. 아이, 참. 십자가를 믿고, 안 믿고를 나는 모르지. 나는 자유의지를 될 때는 모르지만 나는 결정하면 그만이지만, 내가 자유의지를 동원해서 십자가를 믿게 된다면, 이걸 신의 전지전능 안에 포함시켜 버리면 이 자체가 또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이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결국 무슨 뜻이냐 하면, 신은 알고 있었지만 관여를 안 하지요. 관여 해버리면 그건 내가 노예가 돼버리니까. 그러니까 일반인들에게 신은 뭐냐 하면, 학교 선생님, 목사님 쯤 되는 거예요. 부탁하는 거예요. 부탁하고 뒷짐 지고 잘 하는가 지켜보는 거예요. 그럴 때 애 하나가 엄마, 나 잘했지. 목사님, 나 참 잘 했지요. 그럼 잘했지. 널 위해 천국이 준비되어 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일반사회의 정서하고 하늘나라의 구원하고 부합되는 가장 편하고 알기 쉬운 것이다.
그러면 미리 알았다, 모르는 게 없다, 이걸 뭐라고 하느냐? 그들은 예지라고 합니다. 또는 다른 말로 하면, 예견했다. 그러면 미리 알았다, 미리 안다. 이것을 그들은 뭐라 하냐? 미리 알았는데 미리 안 것은 큰 범위에요. 큰 범주. 여러분들이 선택이라는 말을 개념을 지금 알고 있으니까 알미니안 할 때는 그걸 잠시 보류하세요. 그걸 모른다고 생각하고 지금 알미니안 선택을 제가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미리 안다가 이것이 먼저고요, 범위가 넓고. 그중에 하나가 뭐냐? 그러니까 너를 골랐잖아. 라고 선택을 미리 아는 것 속에 집어넣는 거예요. 그러니까 선택의 의미가 예정부터 선택한 게 아니고 나는 미리 알고 너를 뽑아 놓았단다. 이런 쪽으로 안다. 그러니까 아는 게 먼저고, 아는 게 결과가 하나의 선택했으면 하는 행위로 나오는 거예요. 선택함.
선택이 아니고 뭡니까? 칼빈주의는 선택이지만 여기는 선택이 아니고 선택함이죠. 선택함과 선택이 다르죠. 선택이라 하는 것은 사전에 미리 골라놓는 것이고, 선택함은 선택하는 행위를 말하는 거죠. 미리 아신 게 큰 거고 선택, 그건 나중이란 말이죠.
그걸 쉽게 예를 들어봅시다. 애 방에다 몰래 카메라를 설치했어요. 엄마는 그 애가 어떤 행동을 할 것이란 것을 다 안다 말이죠. 학교에서 돌아와서 숙제부터 하고 손 씻고 다 알거든요. 애가 하는 말이 엄마, 학교에서 돌아와서 손 씻고 숙제했어. 그러니까 니, 내 자식이지. 라고 하는 거예요. 이미 다 내 자식으로 알고 있다고. 그게 선택이에요. 그러니까 내 자식으로 선택했잖아. 이렇게 됐다 이 말이에요.
그렇게 되면 선택이라 하는 것은, 이게 어려워요. 미리 선택했다는 것을 인간에게 알려주는 게 아니고. 참, 이건 여러분들이 졸면 안돼요. 제일 중요한 것인데. 오늘 강의에서 제일 어려운 거예요. 선택했다는 말은 미리 알려주는 게 아니고, 내 잘했지. 라고 했을 때 너무 잘난 체 안 하기 위해서 내가 선택했잖아. 차후에 그들이 하는 고백을 듣고 선택했다는 말을 할 때 그때만 선택이 섬광을 일으키면서 반짝, 선택으로 만난다 이 말입니다.
미리 알려줘 버리면 선택했는데 미쳤다고 내가 믿나! 이럴 수가 있다 말이죠. 내가 안 믿고 지옥 가면 그건 하나님 잘못이지. 왜? 나 선택 안 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지옥 갈 것 같으면 내가 이러나저러나 지옥 가고 처음부터 천당 갈 것을 선택했으면 이러나저러나 천당 갈 텐데 미쳤다고 내가 착한 일 하나. 나는 예수는 안 믿는다. 이렇게 될 공산이 많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진짜 최선을 다해서 정말 이렇게 하는 것이 다 잘했잖아. 그게 다 니 덕이 아니고 하나님 공로지. 이런 식으로 차후에 통보하는 식으로 차후에 정답을 내는 식으로 선택을 한다 이 말입니다.
참, 미리 아니까 자연적으로 선택이 될 수밖에 없지 않느냐? 미리 아니까. 그러니까 선택이 있고 미리 아는 게 아니고, 미리 아니까 선택이란 말이 뒤에 들어온다 이 말이죠.
-그럼 하나님이 몰랐었다 이거에요?
그건 전지전능함에 어긋나기 때문에 있을 수 없죠. 미리 다 아시죠. 그런데 그 이야기를 하면 안 되죠. 인간이 아까 같이 제칠 수가 있죠. 농땡이가 될 수 있죠.
[따라서 선택해서 구원받게 함은 인간의 부름에 부응하는 기초를 두고 있다. 거리낌 없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만을 선택하셨다. 선택이란 인간의 하는 바에 따라서 결정된다.]
무슨 뜻이냐 하면, 자기가 결정해서 선택됐다는 이 말이 아니고, 자신이 하는 바에 따라서 아, 이러니까 선택되었구나. 라고 차후에 선택을 안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시는 신앙과 그로부터 하나님의 선택이 기초를 두고 계신 신앙은 하나님이 죄인에게 주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인간의 자유의지에서 초래되는 것이다.]
인간의 자유의지로부터 비로소 부각되는 것이다 이 말이죠.
[또한 하나님을 알고 구원받게 되는 것은 전적으로 각 인간에게 달려 있다.]
이거는 초장부터 주장하는 것이고.
[인간의 자유의지로 그리스도를 선택하는 자를 하나님은 선택하신다. 따라서 궁극적인 구원은 하나님이 죄인을 선택하시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 그리스도를 선택함으로 이루어진다.]
현상 상.
[셋째, 그리스도의 속죄로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되나 실제로 어떤 사람의 구원을 보증하지는 않는다.]
아아, 보증하지 않는다. 이 말을 왜 하느냐 하면, 그 뒤에 나오죠.
[그리스도가 만인을 위하여 죽음을 당하셨으나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만이 구원받는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이게 이들의 고민이에요. 그러니까 여분의 피를 흘린 거예요. 일단은 세 사람이 있으면 3인분 밥을 하는 게 아니고, 6인분을 하되 밥 먹기 싫은 놈은 밥을 갖다 버리는 거예요. 피는 구원받을 피는 100인분인데 믿겠다고 하는 놈이 열 사람이라면 나머지 90인분은 갖다 버려야 돼요.
왜 그래야 되느냐 하면, 그렇게 해줘야 그들이 지옥 가도 할 말이 없잖아요. 만약에 열 사람에게 10인분 밥을 해 줘버리면, 밥 먹고 싶어도 밥 못 먹어서 지옥 갔는데 그 책임은 하나님이 책임져야지, 숟가락 들고 밥 구경도 못했어. 그러니까 밥 먹고 싶었는데 밥이 없어서 못 먹었는데 니, 왜 밥 못 먹었어. 지옥 가. 이러면 모순되니까 밥 먹으라 할 때 밥 먹지, 뭐 하려고 놀다가 이제 왔나. 뭔가 나무랄 근거가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빌미가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것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래서 이것은 결국 뭐냐 하면, 예수님은 충분히 사랑했다. 자꾸 니 지옥 가도 그 탓을 예수님 탓으로 돌리지 마라. 이래서 나온 것이 침례교 이론이 아닙니까? 침례, 하여튼 많이 받으라. 그래.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는 어떤 구원의 능력이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안 나와요. 안 나오고 십자가지는 데까지만 예수님이 해놓고 나머지는 구원을 받고, 안 받고는 어떤 사람이 복음을 듣기로 자기가 스스로 선택해서 십자가를 받아들일 때만 비로소 그리스도의 대속의 효과를 보게 된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남한테 효과를 안 줘요.
자, 보세요. 이거 약간 머리를 써야 돼요. 사실 약간 난해한 대목인데. 땅 속에 헌금 상자가 100만원 들어있어요. 이 백만 원이 유통 안 되잖아요. 지금. 백만 원 땅에 묻혀서 효과 없어요. 어떤 사람이 삽을 가지고 파는 기라. 파서 백만 원을 끄집어서 유통시킬 때 유통될 때 비로소 백만 원의 가치가 있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구원의 효력, 대속의 효력은 항상 땅에 묻혀 있어요. 이걸 파내 가는 사람만 실제로 그 사람에게 효력을 주고, 그냥 구경하고 획 그냥 지나가는 사람은 효력이 없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의 주장에 의하면, 천국과 지옥을 처음부터 하나님은 지옥을 만들어 놓지 않았어요. 몰라.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해서 천국은 만들어놨는데, 부랴부랴 자꾸 이게 시시하게 여기고 웃기네. 하고 안 믿는 사람이 있어서 부랴부랴 숫자에 따라서 그때그때마다 지옥을 만들어 놓을 필요가 있는 거예요. 처음부터 지옥 없는 하나님이죠.
그러니까 이렇게 되면 뭡니까? 처음부터 인간이 선악과 따먹고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추방할 때부터 하나님은 큰 실수를 저질렀어요. 처음부터 안 쫓아내야 되는데. 괜히 겁 줄려고 쫓아놓고 나중에 당하기는 지가 당해요. 처음부터 에덴동산 추방하면 안 돼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머리를 긁적이며 미안하다. 미안하게 됐다. 그때 내가 왜 쫓아냈는지, 이런 셈이라.
그래서 하나님은 누구한테 다 미안해요. 다 미안한 거예요. 하나님이 꼭 부처님이라. 다 미안해. 다 너희들 잘못 없어. 그냥 예수 안 믿고 간 놈도 미안스럽고. 그러니까 결국 미안하면 나중에 뭐도 취소해야 돼요? 지옥도 알아서 나중에 한 10년 살다가 없애 버려야 돼요. 여호와증인들이 돼야 돼. 부처님 그렇게 돼야 돼요. 그 사람들 머리가 나빠서 이것까지 생각 못한 모양이죠?
결국 구원의 효력은 누가 나와야 돼요? 구원받는 것은 내가 파낸 효과, 내가 삽질해서 파내는 내가 그걸 알아먹는 야, 저거 십자가, 내가 심으면 구원받겠다는. 자신의 공로, 그것만이 자기를 구원하는 거예요. 내가 나를 구원하는 거예요. 예수님은 등신이라. 멀춤하니 나를 믿어주세요. 독도는 우리 땅. 예수님은 피켓만 들고 있어요. 아무것도 못해.
그러니까 설득도 하면 안돼. 예수 설득하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누가 로보트냐 하면, 예수님이 로보트에요. 예수님은 로보트고, 활발하게 움직이는 것은 인간들이 움직이는 거예요. 알미니안은 예수님이 로보트라. 사랑하고 싶어도 사랑하면 안 돼요. 나는 너를 사랑한다. 이러면 안 돼요. 이러면 차이 나. 이러면 우연히 사랑 받은 사람만 구원받기 때문에 그러면 안 돼. 예수님은 냉정해야 돼요. 마네킹처럼 로보트가 되서 독도는 우리 땅처럼 그냥 가만있는 거예요. 나를 믿으면 천국 갑니다. 가만있는 거예요.
그걸 보고 인형 고르듯이 물건 하나 골라주면 구원받는 겁니다. 예수님이 로보트에요. 예수님 뒤에 로보트 된 사람이 누구냐? 하나님이고. 하나님하고 예수님, 둘 다 불쌍해 죽겠어. 성령님하면 세 분, 세 분 하나님이 고개 푹 숙이고 있고.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미아리에 가면 여자들이 하얀 드레스 입고 진열되어 있잖아요. 그냥 곱게 차려입고 삼위일체 앉아 있는 거예요. 앞에 술 먹은 놈, 남정네들 와서 너, 나와. 하면 그때 비로소 구원의 효력이 덮이는 거예요. 인간이 하나님을 구원하는 겁니다. 오늘 좋은 말 했죠. 인간이 하나님을 구원한 거예요.
내가 불러줄 때 하나님의 사랑은 빛나니까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을 효력 있게 해주려면 사람이 그 사랑을 믿어줄 때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이 아니면 사랑의 하나님도 아니에요.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할 때 비로소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으로 피어나는 겁니다. 꽃처럼. 하나님은 창녀입니다. 매춘부라고.
그런데 방금 제가 하는 게 과격하게 들리시지 않습니까? 들리시더라도 참으세요. 왜냐하면 이런 하나님 할래, 아니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는 걸 믿을래. 둘 중에 하나에요. 모든 인간은 내가 하나님 할래, 아니면 하나님으로 하여금 하나님 되시게 할래. 둘 중에 하나입니다. 주님이 하나님 하실래, 아니면 교인 여러분, 여러분들이 하나님 할래. 무서운 이야기 아닙니까? 내가 하나님 하겠다는 것이.
이게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내가 신이라 하는 것이 알미니안주의는 절절하게 우리에게 지금 증거 되고 있습니다. 훌륭한 증거에요. 이게 바로 교황입니다. 이 인간이 교황이에요. 그리고 온 사람들은 십자가보다도 예수님보다도 교황을 더 좋아합니다. 저거들이 교황보다 십자가를 예수님 더 좋아하면, 이슬람교가 십자가로 예수님 기독교로 바뀝니다.
절대로 이슬람교가 안 바꿔요. 불교가 절대 안 바꿔요. 다만 교황은 좋지만 예수는 싫다. 그러니까 교황은 그리스도를 가로막는 적그리스도죠. 밥 퍼주는 사랑, 테레사 수녀, 이해인 수녀, 이런 인간들. 법정 스님, 법정 스님은 법적으로 조치해 버려야 돼. 그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가로막고 오늘날 한국목사들이 그리스도를 가로 막습니다. 교황 못 되서 안달이라. 제가 교황 장례식 보고 내 아내와 농담했어요. 내 죽으면 저렇게 크게 장례를 벌일까? 이렇게 했거든요. 웃기고 있네.
참, 보세요. 그러니까 이 사람들 아무 생각 없이 어떤 의미에선 그저 교회부흥하기 위해서 사람들 협잡해서 한 소리인데, 따지고 보니까 결국은 하나님을 매춘부로 진열장의 인형처럼 그렇게 자기가 신이고, 하나님은 자기가 신이 인간을 피조한 게 되고 신은 로보트가 돼버렸죠.
[넷째로 성령은, 인간들의 복음 초대에 의하여 외면으로 불려오는 모든 자들을 내면으로 불러들인다.]
성령은 뭐냐? 인간이 벌려 논 구원 잔치에 그냥 초대장 받아야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이에요. 성령님은 인간이 판을 벌릴 때 나도 끼워줘. 해서 나도 노름 판돈 있다 해서 끼여 들어오는 거예요. 이게 내면 들어오는 거예요. 불러줄 때 어이, 너도 한번 들어올래. 하고 인간이 성령을 불러줄 때 꽃으로 불러줄 때 의미 있다고, 그때 성령은 판돈 들고 들어오는 기라. 성령님이, 하나님이. 아이고, 불쌍해 죽겠어. 내가 볼 때는.
그러나 만약에 노름하다가 성령이 사기 치잖아요. 쫓겨나가는 기라. 그게 뭐냐?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어서 성령의 부름을 어떻게 할 수 있다? 저항할 수 있다. 나가라. 나가. 니, 노름판에 안 넣어준다. 나가라. 불쌍해 죽겠어. 이거는.
그러면 이거는 고린도후서 1장에 보면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성령의 보증으로 성령의 보증금으로 왔다는 것이 다 깨져버리죠. 그들은 그 대목을 뭐라고 주장하겠습니까? 고린도후서에 성령님께서 보증금으로 우리에게 들어왔다를 뭐로 주장하겠습니까? 다만 믿는 자에게 보증금 대줄까 싶어서 이제 한번 의견을 개진하러 들어왔다가 나중에 그것도 싫으면 쫓겨나는 거죠.
그 다음에. 136페이지.
[성령은 죄인이 믿을 때까지 그를 중생 시킬 수 없다.]
왜? 믿을 때 중생해 버리면 이거는 성령이 안 온 사람은 지옥 가기 때문에 그러면 공평하지 않으니까요.
[새로이 탄생되기 전에 신앙이 있게 되며 신앙으로 새로운 탄생이 가능하게 된다. 이와 같이 인간의 자유의지는 그리스도의 구조작업에 있어 성사의 역할을 제한시킨다. 성령만이 하나님에게 동조하는 자를 그리스도에게 이끌 수 있다.]
아까 협동하는 것, 협조하는 거예요.
[죄인이 순응할 때까지 성령은 생명을 줄 수 없다.]
죄인의 허락받고. 그러니까 죄인이 누굴 심판하느냐 하면, 재판장을 심판하는 거예요. 판사가, 저 피고! 예. 얼마 때릴꼬? 2년만 때리소. 알겠다, 2년. 이렇게 되는 거예요. 판결은 피고가 하고, 다만 판사는 로보트가 돼서 시키는 대로 하는 거예요.
[따라서 하나님은 은사는 정복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은사는 인간이 저버릴 수도 있고 왜곡시킬 수도 있다.]
[다섯째로 믿고 구원받기로 된 사람들로 신앙을 잃으면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된다.]
그건 당연하지요. 이렇게 되면 그들은 이제부터 평생 동안 무슨 관리에 들어갑니까? 자기 구원이 자기 신앙을 관리해야 되겠죠. 그럼 자기 신앙을 관리한다는 말이 무슨 말이야 하면, 내가 과연 신앙인이냐, 아니냐를 늘 자기를 점검해야 될 필요가 있지요.
다섯 번째를 이렇게 딱 보니까 오늘날 정통개혁주의라고 주장하는 놈들이 전부다 성화론하는 놈들이 전부다 결국은 알미니안주의에요. 결국은 믿는 구석은 없고, 못 믿겠다. 믿을 놈이 있지, 내가 어떻게 예수를 믿느냐? 결국은 그거에요. 내가 미쳤다고 나를 믿지, 어떻게 예수를 믿느냐 말이죠.
사람이 자기를 정복한다는 말은 무슨 뜻이에요? 때려 죽여도 예수를 못 믿겠다 이 말 아닙니까? 큰 소리 쳐야 됩니까? 마이크 고장 나도록. 너, 뭐 믿고 나 믿노? 말이죠.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어라. 십자가는 한 때고. 그때는 처음 예수 믿을 때만 믿고. 나머지는 누굴 믿어야 돼요? 내 신앙은 내가 관리해야 된다. 나를 믿어야 된다. 그게 성화론입니다. 이래도 이단 아니에요. 이 사람들이 이래도.
지금 일반적인 교회들이 알미니안주의 공부 왜 합니까? 다섯 번째에 다 걸려요. 그래서 나온 이야기가 '십자가 이후' 아닙니까? 그러니까 십자가 능력은 효력이 없는 거예요. 십자가 믿을 때만 효력이 있고, 그 이후에는 효력이 없는 거예요. 십자가 이후는 누구 관리 속에 있다? 내 관리 속에 있다 이 말입니다.
미쳤다고 십자가만 믿지, 나머지까지 도와준다. 그런 예수를 안 믿어지는데 어떻게 해? 이렇게 하는데 뭘. 십자가를 이용만 하고 딱 먹고 그 다음부터는 더 이상은 예수님이 안 믿어져. 왜? 자기가 지금 나쁜 짓 하고 있으니까. 결국 자기가 나쁜 짓 하는 것 때문에 지옥 간다고 생각하는 것은 결국 자기가 예수 믿는 것은 착한 일 했다는 거예요. 한 가지, 결국 예수 믿는 게 아니고 예수 믿는 착한 일을 믿는 것이지. 예수 믿는 게 아닙니다.
예. 근데 그 소리하면 아까 뭐라 합니까? 그 행위는 어디서 나왔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성령의 행함이다. 이렇게 주장하지요. 왜 그들이 몰랐다 합니까? 다들 그렇게 한국교회 전체가 기독교 150년 역사, 다 그렇게 이야기하니까 그들이 맞는 줄 알았어요.
[인간이 하나님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