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3:20-22 (계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Re..계 3:20-22(더불어 먹고)
이름 : 이근호(IP:)
더불어 먹고
2006년 7월 23일 설교 본문: 요한계시록 3:20-22
(계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계 3: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계 3: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 본문이 개인적인 불멸의 욕망을 달성해주는 구절이 아닙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자신이 도중에 없어지거나 파괴됨이 없이 영원토록 그대로 보존되기를 원합니다. 나만의 가치가 도중에 훼손되지 않기를 간곡히 바랍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인간들의 욕심일 뿐입니다. 인간이 죄인이라면 당연히 지옥 들어가는 것이 마땅한 일입니다.
문제는 하나님 쪽에서 하나님 나름대로 계획해 놓은 것이 따로 있으시다는 겁니다. 그 계획은 바로 거룩한 하나님께서 죄인들과 한데 엉켜 살겠다고 나서신 것입니다. 죄인이 뭐가 그리 좋아서 거룩한 하나님께서 인간들과 살고 싶으신 것일까요?
그것은 죄인들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도저히 용서될 수 없는 것들을 용서하신 엄청난 사랑이 그들에게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은 자신이 치르신 용서하심의 가치가 영원토록 보존되기를 바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 용서에서 오늘 영광받음을 영원토록 지속하기를 원하십니다.
옛적부터 하나님께서는 새 나라를 만들려고 했습니다. 사실 이 세상에 살면서 국민들은 자신의 나라가 멋들어진 새 나라로 변모되기를 늘 고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새 나라 만들기는 하나님께서도 실시하셨습니다. 그 새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가지고 ‘구원’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 새 나라에 가담하게 되는 사람들의 특징은 바로 죽음을 맛본 자에 한해서 들어간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구원의 능력이란 건전한 인간들의 건전한 행위들을 수집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예 이미 죽어버린 인간을 건져내는 능력이어야 합니다.
죽음조차 이겨버린 능력이 아니면 진정 구원의 능력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오신 것은 죽는 것이 무서워서 평생토록 악마의 종노릇만 하다 볼 일 다 본 자기 백성들을 건져내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것은 죽음 안에서도 죽음의 세력을 버티는 생명을 가지고 더불어 먹고 마시는 겁니다.
흔히 사람들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를 자기 인생 경험에서 찾아 모으기 십상이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진정한 하나님의 살아계심의 증거는 예수님께서 죽었다고 그 죽음조차 이기고 다시 살아나신 분으로 계시다는데 있습니다. 이렇게 되니 이 세상적으로 볼 때 수많은 사람마다 다 능력에 차이나고 성격과 자질의 차이가 나는 것처럼 보일 지라도 죽음이라는 거대한 강물 속에는 모두다 동일하게 죽은 자로 간주될 뿐입니다.
문제는 그 죽음 안에서 여전히 죽지 않고 뭔가 꿈틀거리는 것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생명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은 죽음으로 인해 고요하게 된 죽음의 수면 위를 과감하게 박차고 튀어오르고 말았습니다. 그 누구도 그 능력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바로 이러한 거부할 수 없는 능력이야 말로 제대로 된 구원의 능력입니다.
바로 이런 능력이 자기 백성에게 찾아오심으로 자기 백성은 세상 사람들과 전혀 다른 노선으로 인도함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동행’입니다. 동행이란 혼자서는 구원이 결코 될 수 없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므로 죽음을 보지 않고 천국에 들어갔습니다.
노아도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들의 가족만이 방주 안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례는 인간에게 있어 죽음이란 결코 혼자 힘으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사례입니다. 노아 이후 아브라함 시절로 접어들면 그 때부터는 단순한 동행이 아니라 하나님의 동행으로 인해 성도에게 어떤 변화들이 일어나게 되는가를 보여주게 됩니다.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게 되면 인간은 숨어있는 세속적이고 극히 인간적인 추악한 본성을 드러내게 됩니다. 즉 하나님 방식으로 구원받겠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생각해놓은 방식으로 구원도 받고 하나님과 동행도 하겠다는 식으로 나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이와 다릅니다.
성도로 하여금 모든 인간적인 생각을 포기하도록 만듭니다. 예를 들면, 복의 근원인 아브라함에게 있어 아내는 어느 누구도 탐을 낼 말한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여인이었습니다. 이것은 곧 주위 사람들로부터 그 여인인 남편이라는 이유 때문에 늘 세상 권세자로부터 위협을 받을 입장에 놓인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서 아브라함은 한 번도 자신과 아내는 실은 당연히 죽어 마땅한 존재라는 것을 느끼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단지 그들은, 하나님과 동행하고부터 자기 생활에 불편함없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이런 나름대로 아브라함이 지정해 놓은 인생길이 따로 있습니다만 하나님은 그를 인간의 길이 아니라 하나님의 길로 데려가시려고 합니다.
이것을 위해 터진 사건이 바로 이삭의 출생입니다. 이삭은, 아브라함 내외가 도저히 생산할 수 없는 낯선 아기입니다. 그 아기는 하늘의 약속에 의해서 출몰했습니다 이 이삭으로 인해 졸지에 이삭 외에 모든 인간들은 원래부터 저주 아래 놓여 있는 자들라는 점을 드러나 버렸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육신의 어머니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삭의 어머니는 이미 태가 닫힌 상태입니다. 이것은 ‘죽음’의 징후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죽음 안에서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때부터 아브라함의 인생길은 이삭의 원천을 향해 가는 인생길입니다. 이삭의 어머니는 하늘에 있었습니다. 갈라디아서 4:26의 말씀처럼 거기서 약속이 자손이 쏟아집니다.
이삭의 아들 야곱은 소위 그동안 자신이 축복받았다고 여긴 것이 다 상실합니다. 심지어 애지중지 한 아들 요셉마저 죽은 자로 먼저 세상을 뜹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죽은 줄만 알았던 그 요셉을 통해서 야곱이 잃었던 것을 대신하여 하나님이 주신 것들로 넘치게 하십니다.
즉 축복이란 산 자에 노력과 공로에 의해서 제공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로부터 옵니다. 그래서 죽음조차 이긴 구원의 능력이 되는 겁니다. 성도가 천사보다 하늘 나라에서 더 가치가 있는 것은 그들이 죽음을 맛보았다는데 있습니다. 죽음과 그 죽음이 오직 그리스도의 피의 능력으로 이길 수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오직 성도들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 속에, 그들과 함께 있기를 원하시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눈에 보이는 교회 부흥에 주님께서 관심두는 것이 아니라 아에 우리 몸을 자신의 성전으로 삼았음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