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어떤 평범한 성도님의 글
[일반] 어떤 평범한 성도님의 글
이름 : 이근호(IP:)
# 남해 근처에 사시는 어떤 성도님의 글입니다.#
인간의 존재론적 측면(인간의 자아 의식과 행위)과, 그와는 별도의 율법주의적, 공로주의적 행위라...
일단 인간이라면 생각하는 것 자체, 행동하는 것 자체는 당연한 것인데 비해, 무슨 생각을 하는가, 어떤 행동을 하는가라는 점이 죄와 관련되어 있다는 말처럼 들린다. 마치, 라면을 끓여 먹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보편적이고, 당연한 것이며, 죄와 상관없는 것인 양 여겨지지만, 반면 거짓말을 하거나, 도둑질을 하는 것 등등의 특정 범죄만이 죄와 상관있는 것인 양 여기는 것이다.
(고전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언뜻 보기에 라면 하나 끓여먹는 행위는 하나님의 영광과 상관이 없어 보인다. 굳이 거창하게 무슨 학문, 신학, 종교, 윤리, 직업, 문화, 미래 따위를 거론하지 않아도, 평소 길을 걸으며 한발 한발 발걸음을 내딛는 것, 녹차 한 잔 마시는 것...등등, 위의 말씀에 비춰보면 우리가 일상사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기는 바, 삶의 사소한 파편들도 분명한 어떤 명제 하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 그(녀)가 성도라면 말이다.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은 일종의 장막과도 같아서 성도의 삶 전체 위에 쳐진다(덮여진다, 계 7:15). (그 장막 속에서) 표면적으로 보기에는 성도들의 일상사가 시간선상에서 직선적으로 펼쳐져나가는 것처럼 보인다(육체를 지닌 인간의 시간 의식에 비춰보면 그렇게 느껴질 따름이다).
그러기에 분명한 것은, 그가 온 종일 가도, 하루 이틀, 한 해 두 해...가 흘러도 누군가에게 이렇다 할 전도, 봉사...못했다 하더라도(물론 이런 것은 극단적인 표현이지만. 실제로는 이와 다를 것이다. 사람을 만나게 해 주시고, 사건이 일어나게 하시고...) 그는 이미 그 장막 아래 놓여 있다는 점이다.
위의 말씀에 비춰보면, 특정 범죄들만 저지르는 게 죄가 아니라, 먹고 마시며 지극히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도 죄이다. 아울러, 믿음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이 죄라는 말씀까지 미루어 볼 때, 인간 의식이 주체가 되어 산출되는 결과물들로서의 행위에 따라 죄, 죄 아님, 죄인 됨, 죄인 아님...이 결정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죄란, 하나님의 장막 밖에 놓여 있는 운명 자체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극단적으로 말해, 라면 하나 끓여먹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죄인 셈이다. 인간의 눈에 보기에는 지극히 자연스럽고 죄 아닌 것으로 여겨짐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한 가지 덧붙일 것은, 위의 말씀 끝부분의 "~하라"라는 표현을 두고서, 믿음을 발판으로 삼아 능력 받아서 이것저것 열심히 행해야되겠네...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마치, "믿으라"고 하셨건만,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듯이, "~하라"고 하셨건만, 제대로 행할 수 있는 이는 애초부터 아무도 없기에 말이다. 위 말씀은 성도의 삶의 모든 국면이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명제 하에 놓여 있음을 선언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하나님의 장막이 성도들 위에 쳐졌다는 말씀의 핵심중 일부는, 장막을 치신 분이 인간(성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는 말씀 그 자체에 담겨 있다. 달리 말해, 더이상 삶의 주도권이 성도에게 주어져 있지 않다는 말이다. 인간은 삶을 현상적으로만 접근하기 십상이지만, 그 이면에 하나님께서 이미 삶의 “적극적?소극적, 능동적?피동적인” - 게시판에 질문한 어떤 이의 표현을 끌어오자면 - 부분들을 섭리해 나가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현상적으로 어떻게 느끼던 말던 이미 인생의 주도권은 그분께 넘어가 있다는 점을 우리가 시시때때로 인정하려 들지 않으려는 게 문제다.
학부 때부터 신학을 전공해 오다가 신대원을 중간에 자퇴하고 현재 (당분간) 철가방 배달을 하는 중, 선교 훈련원의 선배 목사로부터 러브콜이 들어오고 있다는 한 친구와 그간 나눈 이야기 끝에, "네가 '그 장막' 안에 놓여 있다면 - 달리 표현해서, 하나님의 언약 속에 놓여 있는, 혹은 십자가에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힌 사람이라면 - 철가방 배달을 하든, 신대원 복학해서 마저 공부 끝내어 네가 말하는 그 필수적인 ‘증’을 따서 꿈에 그리던 국외 선교사로 나가든 뭐가 문제냐.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네 삶만을 두고 말한다면, 지금 확실히 결정하지 않으면 신대원 시절로부터 어느새 수년이 지난 30대인 지금 그냥 그대로 10년이 더 지나가고 말거야, 그리고 그 이후에 10년이 또 지나가겠지..."라고 말했었다.
그 친구로선, 늘 뭔가 앞날의 진로에 대하여 결정을 내려야 할 때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판단이 서지 않았던 경험들이 누적되어 왔다. 여러 가지 선택의 기로에 서서 - 교육전도사로 봉사하던 당시 그 교회의 담임 목사의 온갖 처신을 보면서 신학을 계속해야 하는 걸까, 돈 내고 안수 받는 현행 제도 하에서 목사가 굳이 꼭 되어야만 하는 걸까, 신대원을 그만 두어야 할까, 국외 선교사가 꿈이긴 한데 그리로 부르심이 확실한 걸까...등등을 놓고서 - 막상 자신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뭔가를 결정하려 들 때면, 그것이 과연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지 아닌지를 확신하지 못한 채 그때그때 제대로 자리매김을 하지 못했던 경험들이 표면적으로 볼 때 늘 그에게 쌓여 왔던 것이다.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그 친구는 내가 해준 말들에 담긴 생각들을 머리로는 이미 다 알고 있는 듯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의 처지나 형편은 그동안 달라진 게 없었다. 이렇다 할 결정을 내린 게 여지껏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 그를 두고서 사귀던 여자 친구도 ‘비전이 없다’면서 그의 곁을 떠나갔다고 한다.)
인간은 한편으론 늘 자신의 판단과 계산이 내심 서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접촉점이 어디인가를 찾아 헤매는 듯 보인다. 그래야 ‘자신의’ 소신(내지는 소명)도 펼칠 수 있고, 하나님의 뜻도 산다고 여기기 때문일까.
어쨌든, 위에서와 같이 '그 장막'에 덮여진 삶(삶의 주도권이 하나님께로 이양된 삶)이 있다면, 그렇지 않은 삶도 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 지 그 장막 안에서 이루어지는 삶이 아닌 경우 말이다. 아담 세계에 포함된 모든 유형의 삶이 그것이다.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그런 인간은 라면 하나 끓여먹어도 지옥 갈 짓을 하고 있는 셈이다. 신학을 해도, 종교를 가져도, 직업 생활을 해도, 문화를 향유해도...그 모든 것들을 적극적으로 향유하든, 소극적으로 반응하든 간에 여전히 그 장막 밖에 있는 것이다. 마치, 그 옛날 방주(또는 언약) 밖으로 배제될 운명에 이미 놓여진 삶들처럼 말이다.
노아가 방주로 들어갈 때, 방주 안에는 하나님께서 친히 이끄신 것들 외에 그 당시 인류가 이룩해 놓은 나머지 것들은 일체 배제되었다. 생명의 문제 앞에서 신학도, 윤리도, 종교도, 직업도, 꿈도, 장래도, 그 어떤 것도 의미를 갖지 못했다. 평소 그 아담의 세계 속에서 인간들은 서로 부대끼며 자신이 처한 환경 속에서 문화를 적극 향유하기도 하고, 주변들에 대하여 소극적으로 반응하기도 했겠지. 그럼에도, 그들의 운명은 모두 동일했다.
(한편으론...역설적으로, 방주는 그 당시 건조 기술을 이용하여 짓지 않았던가. 이집트의 모든 문화를 뒤로 하고, 광야 생활을 시작할 때에도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셨건만, 정적 브살렐과 오홀리압의 기본적인 장인 기술은 어디로서 온 것이었을까. 이집트의 그것이 아니었던가. 이런 것들 두고서, "봐라, 하나님께서는 문화를 건전하게 사용하시도록 하지 않는가?"라고 생각하기 십상일 것이다. 그러면서, 문화적 도구들은 중립성을 띤다고 역설하면서 급기야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고 주장하는 자리까지 나아가는 것이 인간 속에 늘 도사리고 있는 속셈일 것이다. 그러나, 성도라면 같은 사건을 놓고서도 하나님의 관심은 애당초 문화에 있는 게 아니었다는 점을 간파할 수 있도록 조명해 주실 것이라 생각한다.)
인간 실존을 놓고서 인간에게서 비롯되는 활동성을 분리시켜 생각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에게서는 끊임없이 그 내부의 욕망들이 다양한 활동들로 분출되어 나오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인간 자아의식에서 발현되는 행동들을 대상으로 하나씩 하나씩 죄인 것과 죄 아닌 것들을 분리하고 골라내려는 의식 자체가 이미 인간의 죄인됨을 규정하는 기준이 뒤틀려져 있음을 드러낸다. 만약 어떤 특정한 행위가 죄로 여겨진다면, 어떤 특정한 삶의 방식이 잘못으로 여겨진다면, 그렇지 않은 나머지 행위들이나 방식들은 얼마든지 취사선택하여 마음껏 향유해도 된다고 여기기 때문이며, 실제로 그렇게 하는 게 인간 아니던가. 이러한 의식 자체가 하나님의 언약이 아담의 세계를 둘로 가르고 있다는 것에 전혀 관심 없음을 보여주지 않는가. 이런 의식을 가진 자들은 지금 나는 삶의 실제적인 부분을 말하고자 함인데, 왜 굳이 죄라는 용어를 써서 구원 여부의 문제를 다시 끌어다 개입시키느냐 라고 반문할 지도 모를 일이다. 여전히 ‘죄’의 범위를 모르는 소치에서 나오는 질문이다.
특히, 성화론의 입장에서 보면, 구원은 이미 챙겨놓았다고 주장하면서도, 삶이라는 여정에 대하여 주관하는 뭔가 분명한 규범이 있어야 하고, 또 그 삶의 과정 한 가운데에서 이렇게 살아야 할까요, 아닌가요...라는 식의 논의가 필요함을 역설함으로써, 자신들이 받은 구원의 진정성과 아울러 자신들이 향유하고 있는 삶이 구원으로 이어졌으면 하는 여망을 그때그때 보증해 두고자 하는 욕망이 표출된다고 본다.
위와 같은 내막을 생각해 보건대, 흔히 거론하는 '율법적 사고방식'이란 우리가 평소 제기하는 다양한 의문문들 속에 이미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율법적 사고방식이 무엇이던가? 흔히들 행함으로 구원받고자 하는 유태인들의 종교적 열심 내지는 그와 유사한 경우가 율법적 사고방식이 아니냐고 일축해 버리고 말지만, 평소 우리가 끊임없이 자문하거나, 또는 주변의 전문가들에게 공개적으로 또는 넌지시 확인받고자 하는 의문점들, 즉, "~는 해야 할까요, ~는 하지 말아야 할까요, ~는 버려도 되나요, ~는 적극적으로 행하면 안 되나요, ~라는 식으로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로 반응하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는 버리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소극적으로 반응하며 살아가야 합니까..." 등등에 이미 율법적인 사고방식이 녹아 흐르고 있지 않는가. 그러한 의문형에서는 은혜로부터 받은 그 어떤 자유함도 묻어나지 않음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단순히, 위와 같은 의문형 진술의 주어가 무엇인지 한번만이라도 자문해 본다면...여전히 그것은 “내가”이다. "내가”. 자아의식과 행위의 주체가 바뀌지 않은 채 여전히 자신으로 머물러 있는 것이다.
아담의 세계 안에서는 이미 선악과 성분(?)의 탓인지, 삶의 규범으로서의 율법의 필요성과 더불어 성화를 말하지만, 실제적 삶 속에서는 어느새 자유함 대신, 즉 영이 아닌 의문(규범, 규정)에 끊임없이 구애받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할까요. ~하지 말까요. 이렇게 하는 것은 너무 소극적으로 반응하는 것 아닌가요. ~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살면 안 되나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