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광주 060623c 강의 16-3
Re..광주 060623c 강의 16-3
이름 : 서경수(IP:)
광주 강의 16-3
세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여기 12장 3절에 보면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고 했는데, 여기에서 “그”는 바울 자신을 이야기 하는 것이죠.
사도 바울이 ‘부득불 자랑 한다’고 하면서, 자기 경험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자기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보통 육체들이 자기 자랑거리를 어디에서 찾느냐? 자기 육체로 판단할 때 육체의 가치를 향상시키는 이것을 사람들은 자랑거리로 여깁니다.
어떤 인간도 자기 마음의 자랑거리라든지 자기 평화의 자랑거리 그런 것을 자랑거리로 삼는 것이 아니고, 실적적으로 이 세상에 권력과, 권력이란 것은 쉽게 말해서 자기 존재 가치지요. 나를 알아주는 것. 나를 알아주려면 누가 알아 줘야 됩니까? 주위 사람들이. 주위 사람들이 날 알아주는 이것이 하나의 권력자가 되거든요. 아까 이 권력 때문에 뺨을 치기도 하고, 사라잡고, 잡아먹는다고 했습니다.
결국은 무슨 뜻이냐 하면, 거짓 사도의 특징은 교회에서 권력자로 등장할 때 100이면 100 전부 이단입니다. 권력자로 등장할 때.
사도 바울의 경우에는 교회의 권력자가 아니라, 이것은 다윗도 마찬가지지만, 다윗이 골리앗을 이길 때에 다윗은 골리앗을 뭐와 한 통속으로 봤는가 하면 자기가 평소에 만났던 짐승과 한 부류로 본 것입니다. 짐승 레벨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좀 어려운 표현으로 하면, 상대방을 그의 의식하지 않고 돌을 던진 거예요. 마치 어디 사자 새끼가 등장했어. 하고 사자에게 돌을 던지듯 한 거예요.
그런데 권력자란 것은 항상 남들을 의식하고 자기가 그 중에 높아져야 하기 때문에 상당히 사람을 의식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누구를 의식한 적이 있습니까? 저 사람이 이렇게 하면 나를 어떻게 할 것이라는 그런 의식을 갖고 행동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평소에 그가 그리스도와 함께 있었다는 증거가 됩니다. 그래서 항상 그리스도만을 의식 하지요.
그리스도만을 의식한다는 말은 뭘 의식하지 않는다? 사람을 의식하지 않는 거예요. 사람의 인기를 의식하지 않고, 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대우할 것인가를 의식하지 않는 거지요.
그래서 복음 아는 사람들의 특징들이 이런 특징들이 나옵니다.
“내가 몸 안에 있는지 몸 밖에 있는지” 이것은 뭐냐 하면, 사람이 몸이 있으면 남들을 의식하기 마련인데, 자기가 하늘나라 갔을 때 몸 안에 있는지 몸 밖에 있는지 하는 것은, 사람들이 나에게 뭐라고 얘기해도 별로 신경 안 쓰겠다는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무슨 일을 하느냐 이것이 중요하단 말이지요.
7절에 보면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도의 육체에 있는 가시를 ‘사단의 사자’라고 했지요.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한 것은, 그리스도를 너무 의식하기 때문에 심지어 사단의 활동조차도 자기에게는 위협이 된다, 안 된다? 세상에! 사단의 활동도 위협이 안 된단 말입니다. 얼마나 그리스도를 크게 봤으면 마귀의 활동도 ‘놀고 있네.’ 이 정도로 여긴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인가 하면, “사단아 물러가라”고 고함치는 이런 사람. 십자가를 들고 사단아 물러가라고 하는 것이 기독교 문화 아닙니까. 그리고 집에 십자가 모셔놓고 마리아 모셔놓고 비는 사람들. 십자가 목걸이를 하면 은혜가 되는 것처럼, 목걸이 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것에 의미를 두는 사람들. 부적 붙이듯이.
또 이런 사람들도 그리스도와 함께 있지 않는 사람들이지요. 예를 들면, “도를 아십니까?”라고 했을 때, ‘나는 예수 믿는데요.’ “예수 믿어도 도를 알아야 합니다.”라는 말에, 갈등을 느끼는 사람. 그러니까 예수도 믿고, 자녀 결혼식하면 날짜 정하려고 점치러 가는 사람들.
그리고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내가 교회 가면 세상 사람들이 얼마나 비웃고 놀릴까’ 세상 사람들을 너무 의식하는 사람들.
이러고 보니까 다 해당되네.
이런 사람들은 사단의 역사를 우습게보지 못하고 사단이 역사했으니까 내가 해를 입지 않을까 그것을 겁내고 두려워하는 것.
이런 것도 자기가 아직 약해지지 않아서 그래요. 더 약해져야 해요.
그래서 여기 8절부터 보면,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정말 멋지지 않습니까?
완전히 더 이상 내 것이 없어요. 내 것이란 것이 없어요. 자기 몸에. 주님이 마음대로 가지고 놀아. 사단도 집어넣고, 가지도 집어넣고, 그리고 나로 하여금 기쁨이 솔솔 나오도록 때로는 힘들게 하고 그렇게 해서 내 것이 전부 흐물흐물 다 해체되도록.
그러니까 이런 사도 바울에게서 나오는 것은 그리스도의 능력, 그분을 자랑하는 것만 나오는 거예요.
10절에 보면,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력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견디는 정도가 아니라 견디는 것보다 더 적극적으로 기뻐하노니,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무슨 뜻이냐 하면, 강함이란 남들 보기에 ‘약하다, 약할 수밖에 없구나. 약해서 아마 곧 죽을 걸’ 라고 함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어떤 기쁨을 느낄 때 그것이 강함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영적인 사람과 육적인 사람이 이렇게 차이 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를 찾아오신 것처럼 주님께서 찾아온 성도는 주님께서 한시도 그 사람에게서 관여를 안 한 적이 없습니다. 심지어 어느 정도 관여를 하는가 하면, 내 발걸음 하나도 주님께서 떼게 하시는 것처럼 우리에게 깊숙이 모든 일에 관여하십니다. 무엇 때문에? 네 것은 더 이상 네 것이 아니라 나의 것임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그리고 약한데서 주님의 강함을 증거하기 위해서.
어떤 사람은 약한데, 어느 정도로 약한가 하면 집이 3채 있고, 월 수입이 2,600만원, 자가용은 벤츠 2대 아우디 3대, 집에 파출부 10명. 그런데 이 사람이 강하신 주님을 바라 볼 때 이것을 약하다고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사람 사람마다 본인이 그리스도를 강한 자로 여기면 집 3채에 땅 10만평 주고 이렇게 해서라도 주님만 강하게 한다면 주께서는 마음대로 가지고 놀기 때문에 괜히 이런 상대방의 약함을 나의 약함으로 부러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동일한 약함의 모델은 없어요. 저 사람처럼 되어야 약하다는 것이 일체 없어요. 사람 사람마다 그리스도의 강함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님은 각자의 개성대로 다 다루시기 때문에 ‘저 사람처럼 되지 말게 해 달라’든지, 반대로 ‘저 사람처럼 되게 해 달라’는 말을 할 필요 없습니다.
하리수가 만약 복음을 안다고 하면, 하리수 같은 경우에 남들은 욕을 하지만 본인은 미치고 환장할 지경입니다. 심리적으로 정신적으로 이미 여자인데, 유전자는 X X가 아니고 X Y예요. 그리면 하리수가 결국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다면 자기는 못 낳고 자기 아내가 낳겠지요. 그러면 그것을 사회에선 뭐라고 합니까? 얘 낳는 쪽을 여자라고 하고 얘 낳게 한 자를 남자라고 하지, 언제 정신적 심리적인 것을 가지고 남, 여를 말하지 않지요.
아무리 성전환 해서 호적이 바뀌어도 그 속에는 자손을 번식할 때 남성의 역할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데 ---
예를 들어, 하리수가 결혼 할 때 그냥 보통 사람하고 결혼하는 것이 아니고, 여자인데 남자로 성 전환하고 결혼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러면 이야기가 좀 복잡해지지요. X Y하고 X X가 결혼했는데 사회에서는 뭐냐 하면, X Y는 X X고 X X는 X Y로 보는 거예요. 사회에서는 그렇게 보지요. 자기도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 해요. 그런데 둘이 결혼해서 얘를 낳아 봐요. 얘한테 누가 아빠냐고 하면 하리수가 아빠라고 하지요.
약함 이야기하다가 왜 이렇게 되었지?
하리수가 그럴 경우에, 세상에 이런 운명으로 태어났으니까 하리수가 하는 말이 ‘성도 여러분, 제가 이렇게 약한 가운데 주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라고 했을 때, “나도 성전환 수술 할래” 이렇게 나오면 그것은 바보란 말입니다. 그것은 그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약함이고, 또 나는 나대로 약함이 있어요.
사람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욕망이 있잖아요. 물려받은 유전자가 있고, 욕망이 있다보니까, 우리 집에서는 적어도 50명 중 10등 이상으로 넘어가면 이것을 약함으로 보는 것입니다. 우리 삼촌들도 전부 1등 아니면 2등. 형도 1등 아니면 2등인데 혼자 25등이라. 뒤에 25명이나 있는데 그것도 용납이 안 돼요. ‘나가 죽어라.’ 용납이 안 돼요. 이것이 그 집안에서의 약함입니다.
왜 이렇게 했습니까? 그 얘는 25등 해서 공부는 비록 못하지만 ‘나는 예수님 믿어서 하늘나라 간다.’ 이렇게 된단 말이지요. 그런데 25등 얘가 항상 40등 50등 하는 형제 앞에 나는 약하다고 하면 맞아 죽지요. ‘공부도 잘 하는 것이 뭐 약하노’ 이렇게 하겠지요.
실제로 이런 경우가 참 많이 있습니다. 제 아는 사람 가운데 서울대학을 들어갔는데, 고등학교 때 과학고등학교를 다녔어요. 과학고등학교에서 공부를 못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죽으려고 하는 거예요. 왜? 공부 못한다고. 반에서 중간쯤도 안 된다는 거예요. ‘아이고 ~’ 자기가 약하다는 것이지요. 안 약해요. 그래도 서울대학교에 들어갔어요. 과학고등학교 얘들은 2년 만에 고교과정 끝내고 대학 가는데, 자기는 3년 만에 대학 갔어요. 우리 조카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약함이란 것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마음대로 사용하기 때문에 그 사람 나름대로 그리스도를 증거하면 그것으로 충분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 같은 형태로 살아야, 결혼도 안 하고 그렇게 살아야 약한 것이 아니고, 그것은 사도 바울 나름대로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주께서 그렇게 다루시듯이 지금도 성도를 하나님께서 그냥 두지 않고 엠마오 두 제자를 찾아 온 것처럼 지금도 찾아오셔서 우리를 더욱 약하고 약하고 약하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14절을 봅시다.
“보라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기를 예비하였으나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하리라”
예비하였지만 가지를 못했어요.
“나의 구하는 것은 너희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 어린 아이가 부모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요 이에 부모가 어린 아이를 위하여 하느니라”
15절에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함으로 재물을 허비하고 또 내 자신까지 허비하리니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덜 사랑을 받겠느냐”
이것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실컷 이야기해 놓고 내가 고린도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다고 하면서 그 뒷부분에는 아주 무서운 이야기를 합니다.
13장 2절에 보면, “내가 이미 말하였거니와 지금 떠나 있으나 두 번째 대면하였을 때와 같이 전에 죄 지은 자들과 그 남은 모든 사람에게 미리 말하노니 내가 다시 가면 용서하지 아니하리라”고 합니다.
3절에 “이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너희가 구함이니 저가 너희를 향하여 약하지 않고 도리어 너희 안에서 강하시니라”
사도 바울이 여기에서 또 딴 말을 하지요. 갑자기 내가 약하다고 해 놓고 강하다고 하지요. 이것은 뭡니까? 내가 그리스도한테는 약하지만 너희들에게는 강해야 한다. 그 이유는 내가 너희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해야 하기 때문에.
이것은 결국 한 마디로 해서, 사람을 의식하지 않는다. 사람에게 어떤 대우를 받을까를 머리 굴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증거하는데 전력을 다한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의 눈치 살피고, 사람들이 호응해 준다고 그들에게 아부하고 이런 것이 일체 없다는 것이지요.
주님 앞에 약함이 결국 사람 앞에 강함이 됩니다. 이 공식에 의하면 사람한테 약하다는 말은 결국 예수님을 차 버릴 가능성이 많아요.
여기 4절에 보면 중요한 것이 나오니까 이것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자, 봅시다.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약했습니까? 안 약했지요? 할 소리 다 했잖아요. 두려워서 할 말 못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약한 거예요. 누구 앞에서 약한 것입니까?
‘내가 온 것은 내 뜻을 위함이 아니고 오직 아버지 뜻을 위함이라.’
아버지 뜻 앞에서는 예수님은 한 없이 약했는데, 심지어는 아버지 앞에 하소연했어요.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나에게서 지나가게 해 달라’고. 안 돼. 안 되면 할 수 없지요. 그러면 이 잔을 마시겠습니다. 라고 할 정도로 철저히 아버지 뜻에 굴복했어요.
예수님이 어느 정도로 강하냐 하면, 40일 동안 금식하면서도 물도 안 마시고 버텼습니다. 보통 강한 게 아니에요. 100일 금식한 지율스님 보다는 약하겠지만?
그래도 마귀가 와서, 온갖 유혹을 했지만 말씀으로 거절했습니다. 그 정도로 아버지 앞에 복종했습니다.
4절에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
이것은 강하다는 말 대신, 함께 살리라. 함께 영생하자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하는데 어떻게 약합니까?
‘제발 내가 구원 받은 것처럼 너희도 구원 받으라.’는 말을 하는데, 이것을 어떻게 (힘없는 목소리로) ‘구원 받아 주세요.’ 라고 하겠습니까? ‘구원 받아라. 이 놈들아!’ 하고 강하게 나오지요. ‘다시는 저주가 없는 사람이 되어라.’ 라고 강하게 이야기 하는 거예요.
자, 이것이 어려우니까 그림으로 설명 드리겠습니다.
이제 마지막이니까 조금만 참으세요. 강해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의 일이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이것이 퍼집니다. 이것이 퍼질 때 그리스도의 몸 가지고 퍼집니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그리스도의 지체를 향하여 퍼져 나갑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서 약했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사신 것처럼, 이 십자가의 원리가 그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퍼지게 되면 우리를 계속해서 약하게 만들어요. 스스로 자기 자신을 의뢰하지 않게, 스스로 의지할 것이 없게(말을 제대로 해야 돼요), 내가 나를 의지할 만한 것이 없게, 그 정도로 나를, 내가 보기에 ‘나는 이런 주특기가 있는데’ 라고 할 만한 것이 전혀 없도록 만드실 때, 그 순간 주의 영이 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낙도에 갔던 목사님이 진짜 성도라면, 주님께서 의지할 만한 딸도 죽이고, 의지할 만한 마누라도 죽여 버리고, 오직 남은 것은 사도 바울처럼 오직 그리스도만 의지하도록 하기 위해서 주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 일들이 똑같이 일어나야 성도입니다. 이 말입니다. 이것이 고린도후서에서 사도 바울이 전하는 이야기입니다. 자기 이야기를 계속해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나 죽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이 그리스도의 능력만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 자신의 것을 의지할 것이 없도록 지금도 그런 일들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돈을 의지하면 돈을 빼앗고, 건강 의지하면 건강을 잃게 하고, 돈을 의식하지 않으면 돈이 생기고, 건강을 의식 안하면 건강하고 이런 것입니다. 꼭 달라고 하면 도망가고, 삐치면 도로 오고, 마치 숨바꼭질 하는 것처럼 달라는 것은 안 주고, 달라고 하지 않은 것은 주시고, 원치 않은 것 주셔서 감사하다고 하면 또 사라져 버리고, 엉뚱한 것이 또 들어오고 --- 이런 식으로 우리로 하여금, 절대로 예수님처럼 자신을 의지하지 않는, 그리스도에 달린 그 지체가 되게 하기 위해서 지금도 주님께서 부지런히 영적으로 일하고 계십니다.
8절에 보면 (밑줄 그어 놓으세요)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 이것이 상당히 중요한 것인데, 왜냐하면,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진리만 의식하기 때문에. 이거 대단한 것 아닙니까?
나는 진리에 죽고 진리에 산다는 것입니다. ‘진리맨’입니다. 진리에 죽고, 진리에 살고.
9절에 “우리가 약할 때에 너희의 강한 것을 기뻐하고”
우리가 이렇게 망가져도 너희가 예수 믿는다면 그것으로 기뻐한다는 말입니다.
“또 이것을 위하여 구하니 곧 너희의 온전하게 되는 것이라”
세상에 이런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나는 죽더라도 너희는 살아라. 이런 심정이 진짜 주의 종, 사단의 종이 아닌 주의 종의 심정이란 말입니다. 내 죽어서 너희들 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삼층천(셋째 하늘)까지 본 사람이 이 땅에서 해 줄 수 있는 선물입니다.
우리 같으면 삼층천 봤다고 부흥회 돌아다니면서 돈 떴어내고 할 텐데, 그것이 아니고, 삼층천을 봤기 때문에 다 가져 가라. 그리고 나처럼 구원 받아라. 나처럼 약해지고 너희 안에 주님이 강해지기 바란다.
마지막 13절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이것은 삼위일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주 예수가 먼저 나오는 것으로 봐서 이것은 십자가의 일을 성령도 도와주고 하나님이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을 앞장세우는데 있어서 하나님도 성령님도 주저하지 않고 뒤에서 퍅퍅 받쳐준다는 말입니다.
삼위일체가 어떻게 협력하고 그런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이것이 확실한 주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주의 일은 없어요. 우리를 약하게 만들고 십자가를 강하게 만들어서 약한 우리를 구원하는 그 복음, 그 능력 그것이 참된 주의 복음이고 다른 능력은 있을 수 없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저희 것이 아니고 벌써 주의 것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세상 무리들에 묻히다보니 내 능력으로 멋있게 내 힘으로 달성했다는 그런 자랑거리를 내가 만들어 내기를 원했습니다. 남에게 기죽지 않고, 자존심 안 상하고, 나의 가치가 남들에게 빼앗기지 않는 그런 멋있는 사람 되기를 소원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지신 주님은 그렇게 살지 않았사오니, 이제 십자가의 영이 우리에게 임하사 우리가 약해져도 괜찮을 정도로 십자가에서 모든 것이 다 용서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이 죄인 속에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찔리고 상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평안을 누리고 영생을 얻게 된 것을 주님께 감사하고 공노를 돌릴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06. 7. 19. 16:38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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