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3:17-19 (계 3:17)『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
Re..계 3:17-19 (회개하라)
이름 : 이근호(IP:)
회개하라
2006년 7월 16일 설교 본문: 요한계시록 3:17-19
(계 3:17)『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계 3: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계 3: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부자가 되고 싶어 하는 바는 모든 인간들의 여망입니다. 인간들의 목표입니다. 부자가 못되어서 자살하는 경우도 흔하게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인간들의 열화 같은 희망사항인 이 부자에 대해서 하나님은 불온하게 보십니다. 건전치 못하다는 겁니다. 수상하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부자는 항상 상대적으로 자족하는 성향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부유한 것이 책망이 대상이 된다는 말은 실재적인 진리는 이런 부자 됨에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해주는 것이 됩니다. 주님은 “회개하라”고 하십니다. 회개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길을 바뀌어라는 겁니다. 다른 길로 접어들어야 한다는 겁니다. 진정 사는 길로 나서야 마땅하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이 길과 또 다른 길의 차이점을 둘 다 알아야 합니다. 현재 눈에 보이는 세상관을 그대로 따르는 것은 주님보시기에 인간들이 제멋대로 만든 가상이요 허상들이요 허구들입니다. 진실된 것은 따로 있기 마련입니다. 밑바닥까지 내려가야 합니다. 밑바닥에는 경계선이 없습니다. 너 나가 없이 공통적으로 마주대해야 하는 현실이 따로 있습니다.
그 인생 밑바닥에서 만나는 현실은 어떤 현실일까요? 그런 현실을 만난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성경에 가득 들어있습니다. 시편 130:1-5에 보면, “여호와여 내가 깊은 데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간구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케 하심이니이다 나 곧 내 영혼이 여호와를 기다리며 내가 그 말씀을 바라는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성도를 찾아오시면 성도는 졸지에 천하의 죄인으로 등장되어 감히 거룩하신 주님 앞에서 몸 둘 바를 모르며 바들바들 떨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죄인이 행복과 감사를 느끼는 것은 그러한 무서운 죄마저 주님께서 용서해주시기 위하여 오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늘 주님의 말씀과 함께 있기는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천국으로 데려가기를 원하십니다. 가상이 거두어지고 참된 현실을 보기를 원합니다. 그동안 가상적인 이 현실이 참된 현실을 보는 눈을 흐리게 해왔습니다. 천국이란 골로새서 1:13-14에 의하면 ‘사랑의 아들의 나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옮기기 전의 세계와 옮긴 후의 세계를 명확하게 구분지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증거를 통해서 보면, 옮긴 후의 세계는 ‘예수님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세계’입니다. 즉 인간들이 자신의 노동의 대가를 축적해 놓고서 거기서 그것을 뽑아먹는 식으로 사는 세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즉 개인적으로 부유한 것이 결코 하나님이 더 높이 인정하는 가치를 가졌다고 볼 수 없다는 겁니다. 오히려 개인적인 노동의 가치가 많은 것을 축적하고 저장한 것이, 그것으로 참된 현실이라고 착각을 유발하여 자기 신세를 망치는 요인으로 작용될 뿐입니다. 누가복음 12장에서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가 그 예입니다.
창고에 곡식이 그득하게 쌓여있더라도 문제가 계속해서 그 창고 곡물의 주인노릇을 노동한 본인이 행사할 수 없다는 점을 그 부자는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새로운 나라, 곧 천국은 아들의 나라입니다. 아들이 행하신 일의 열매와 대가를 가지고 여러 사람들이 증여받는 식으로 형성된 세계가 천국입니다.
요한계시록 4장 끝부분에서 성도들은 천국에서 자신의 생명의 면류관까지 주님 발 앞으로 던집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모든 것이 주님의 뜻대로 되었다는데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천국에서 보는 죄관과 이 세상에서 보는 죄관이 틀려집니다. 이 세상의 죄관이란, 개인적인 착함과 윤리와 도덕마저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요건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즉 오늘날 이 세상은 물건을 사고 파는 시장이라고 곳에서 모든 가치가 결정납니다. 그런데 그 사장에는 물품만 파는 곳이 아닙니다. 인간 자체에 가격이 매져져 팔려나가는 곳이기도 합니다. 만약에 아무리 본인 생각하기에 자신의 가치가 고결하다고 우겨더라도 찾는 사람이 없으면 시세는 폭락하게 되어 있습니다.
반대로 아무리 보잘 것 없는 것이라고 찾는 자가 많으면 대단한 가치가 있는 보물 대우받는 사람이 됩니다. 바로 이러한 돈 중심의 세계관이 곧 주님 보시기에 죄악된 것이 됩니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어릴 때부터 소경된 자가 나옵니다. 제자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인생관을 가지고 그 소경의 존재 가치를 함부로 판단을 합니다.
“예수님 저 사람이 소경된 것은 자기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답변은 이 가지 경우를 다 거부하므로서 제자들은 졸지에 세상을 잘못보고 사는 그룹이 되어 버립니다. 사실 제자들이 이런 견해를 드러나는 것도 십계명에 적힌 약속대로, 3, 4 대 후손까지 죄의 결과에 적용된다는 원칙을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다른 법을 제시합니다. 요한복음 9:39-41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자기 주제를 모르는 그것이 곧 죄요 소경이라는 겁니다. 그 젊은 이가 소경된 것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보여주기 위한 교육용 자재로 사용되기 위함이었습니다. 소경을 보고 누구나 죄를 생각해내는 이 세상의 생리 속에서 주님을 죄를 발굴해내시고자 일부러 그 청년을 날 때부터 소경 만드신 것입니다.
이처럼 새로운 피조물이란, 자신의 삶과 죽음과 그 중간 과정 마저 자기 안에 계신 예수님의 뜻으로 밖으로 노출시키고자 하나님의 뜻으로 이해할 줄 아는 사람을 말합니다. 주님과 함께 죽지 아니하면 주님과 함께 사는 것도 없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것을 예수님의 일하심으로부터 출발시키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