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060410 안산강의(요한복음)
Re..060410 안산강의(요한복음)
이름 : 오용익(IP:)
요한복음 안산강의(060410, 이근호 목사, 안산나라장로교회)
지금부터 안산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요한복음 17장 21절부터 23절까지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가운데서도 상당히 어려운 대목입니다.
(요한복음 17:21-23 21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23곧 내가 저희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여기서 뭐가 어렵냐 하면 본문에 나오는 “하나”라는 것이 과연 실효성이 있는 이야기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하나 된다는 것이 성립이 안되잖아요. 왜냐하면 사람들은 개체이기 때문이죠. 개체이기에 하나된다는 것이 성립 안된다는 겁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보통 교회에서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할때 A라는 사람도 믿고, B라는 사람도 믿는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A는 자기 믿음가지고 천당에 가고, B도 역시 자기 믿음가고 천당가면 그만이지 꼭 A와 B가 반드시 하나가 될 이유가 없잖아요. 하나 안되어도 천당가는데 미쳤다고 하나가 됩니까? 이 문제는 왜 생겨났냐 하면, 현대 사회가 과학주의 사회이고, 자본주의 사회가 아닙니까? 과학시대란 계몽에 의해서 주체가 발달된 시대를 말합니다. 주체란, 주체가 행한 노동의 결실로 효과가 되돌아 와요. 그러니까 남이 노동한 것을 내가 얻는 것도 아니고, 내가 한 노동을 남에게 주지 않아요. ‘공부해서 남주나?’ 하는 말이 있잖아요. 결국은 철저하게 효과가 나에게로, 나의 기계에로 돌아옵니다. 그러면 이런 주체 사고방식 가지고 예수를 믿는다고 합시다. 예수, 누구 좋아라고 믿겠습니까? 나 좋아라고 믿는 것이고 이것이 지극히 옳고 당연하다고 여기잖아요. 교회에서 ‘하나님께 바치면 복받는다’고 하잖아요. 그러면 자기가 안바치고 남이 바쳐서 복받는 그런 경우는 없어요. 목사가 그런 소리 할때에는 내가 바친 그 효과가 나에게 돌아온다는 식으로만 납득이 된다고요. 기도, 심지어 중보기도 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한 나에게 기도한 열매가 지극히 당연하고 정당하고 그것이 진리라고 보잖아요. 그죠? 이런 것이 버릇이 되어서 당연하게 되어 있어요.
칼빈주의가 있는데 칼빈주의란, 내가 한 노동의 대가는 하나님께서 꼬박 꼬박 챙겨준다는 것입니다. 만일 게으르면 게으른만큼 자기에게 저주가 올것이고 열심히 하면 열심히 한만큼 자기에게 복이 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 당시의 주체적인 계몽주의 사상으로 합치된 것인데 이것이 칼빈주의란 이름으로 포장되어 버리니까, 이것을 성경적으로 옳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하나가 되어 버리죠. ‘하나가 된다면’. 생각해 보세요? 둘이 하나가 된다면 둘중에 주도권을 누가 쥐게 됩니까? 이 문제가 생긴다고요. 하나님하고 나하고 하나가 된다면 주도권은 누가 쥘겁니까? 하나된다고 할때 무엇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 먼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미 ‘나’
는 나에게 무조건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다 자기밖에 모르기 때문이죠. 내가 나에게 무조건 하나인 것을 그것을 포기하지 않는한 타인과의 하나됨이 절대로 용납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기도한 것은 반드시 응답이 되잖아요. 예수님께서 기도를 이렇게 했다는 말은 결국 무엇에 대해서 공격을 하느냐 하면, 예수님이 기도한 응답을 가지고 기존의 인간들이 갖고 있는 그 종교적인 것, 자기중심, 자기주체중심의 그것을 대하여 뭔가 한바탕 해보겠다는 거예요. 결국은.
이걸 부숩니다. ‘내신앙으로 복받고, 내가 바쳐서 복받고, 내가 기도해서 효과얻고’라는 인식자체를 예수님의 기도가 와서 박살을 내버리는 것입니다. 그때 박살을 당하면서 어떤 느낌이 드느냐 하면, ‘내 영역을 누가 깨느냐’라고 화들짝 놀란 그순간에 비로서, 참된 예수님의 모습을 접촉할수 있는 거예요. ‘너의 자립심이 나에게 허락받은 적이 없다’고 합니다. ‘너의 독자성, 내가 믿어서 구원받는다는 그런 신앙과 믿음을 내가 너에게 준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타고난 인간들의 이기성의 발로에 불과하지, 내가 알아서 내가 구원받는다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식이 아니고 없다면 그러면 어떤식입니까?
자 그러면 예수님께서 우리의 이기적인 구원관 있잖아요. 내가 믿은것에 대해서는 남 안준다는 것이요. 내 믿음은 내가 천당가는 식으로 돌아오지 남에게 가지 않는다는 이러한 사고방식을 누가 공격한다고요? 주님께서 공격을 해 대지요. 공격을 하게 되면 어떤 식이냐 하면, 예수님께서 공격을 하게 되면, 아까 읽은 요한복음 17장 21, 22, 23절에 의하면 예수님의 계획이란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 저희도 내안에 있게”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이렇게 기도했으니까 예수님의 이 계획에 대해서 차질이 있겠어요? 아니면 없겠어요? 차질없습니다. 전혀. 차질없음. 그러니까 이것은 예수님만 오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과 더불어 누가 온다는 말입니까? 제발 잘 들어서 이해해 보세요. 예수님이 우리에게 다가왔다는 말은 요한복음 17장 21절에 의하면 예수님이 오실 때 예수님만 다가오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과 함께 계신 아버지도 예수님과 합작해서 다가오고 더 놀라운 것은 뿐만 아니라, “너희가 내 안에 있다”고 했으니까 나 말고 나보다 먼저 믿은 사람, 나 말고 먼저 주님에 의해서 포착된 사람이, 형제라는 이름을 가지고 우리에게 밀려 오겠죠.
재미있고 쉬운 예로, 여기 십자가 있고 여기 제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뭐냐 하면, ‘어떻게 구원받지? 십자가 있구나. 십자가 있으니까 내가 믿으면 구원받지’라고 십자가앞에 내가 단독으로 서 있잖아요. ‘십자가라는 사건을 내가 믿고 돌아서면 내가 구원받지’라는 식으로 되잖아요. 십자가 믿고 돌아서려고 하는데 뭐가 십자가안에서 한 트럭이 나오는 겁니다. 그 트럭에 누가 계시냐 하면, 아버지계시고, 아들 계시고, 먼저 믿은 형제들이 우르르 쫒아 와가지고, “게 섰거라” 하고 달려든다는 말입니다. “게 섰거라” 제가 지금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요새 교회의 풍토가 뭡니까? 큰 교회 예배당 뒷자리에 앉아가지고, 예배 드리고, 적당히 점심값 하라고 헌금하고, ‘오늘 말씀 알았다’고 하면서, 그러니까 요새 애들 학원에서 강의듣고 자기 힘으로 시험치면 합격되잖아요. 천국이라는 시험이 있는데, 거기 통과할수 있는 시험과목을 목사에게 배워가지고, ‘아 이런 이런 것을 챙기면 시험 합격 되겠다’는 식으로 챙겨가지고 자기 공부로 구원받으면 그만이라는 말이죠. 이것은 교회라는 이름의 학원이니까 그것이 가능한데, 진짜 예수를 믿게 되면 예수님한테서 우르르 쏟아지는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자기한테. 형제, 자매, 우르르 쏟아지면서 예수님에다 아버지까지 오더라 이말이죠. 우리는 내 편한대로 혼자 조용히 믿고 조용하게 천당가겠다고 왔다가, 그야말로 경상도 말로 “시껍”, 혼쭐나는거예요. ‘나에게 형제라는 게 있구나’.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은 ‘나에게 아버지가 계시는 구나’ 그리고 ‘나의 맏아들 되시는 분이 계시구나’ 그리고 그 관계를 맺어 주는 것은 맏아들 되시는 분이 보내신 성령이라는 분이 계셔서 그래서 그분이 엮어 주시는구나’ 라는 것을 “주여 저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옵소서” 라는 것이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이것은 철저하게 태어날때부터 자립심과 자의식과 독립정신으로, 똘똘 뭉치고, 믿음도 ‘네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 ‘바쳐도 네가 바쳐야 복받지 남들 바친것으로는 복 못받는다’는 철저하게 경쟁주의, 개인주의적으로 교회를 부흥시키려고 하는, 그야말로 가짜교회죠. 이 가짜 교회에 대해서 예수님은 전혀 아는바가 없습니다. 그들이 내세우는 예수님은 요한복음 17장의 예수님과 전혀 달라요. 여기는 우르르 와가지고 납치해 버립니다. 혼자 구원받고 혼자 내빼려고 하다가 잘못 걸려 가지고 완전히 납치 당한 거예요.
방금 이야기한 것 잘 이해 하시겠죠? 이것이 1부입니다. 앞으로 몇부가 남아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이것이 1부입니다. 전도사님! 이것 이해되시지요? 제 2부가 남아 있습니다. 뭐냐 하면, 혼자 예수 믿고 도망치려고 하다가 예수님에 의해서 포착되었잖아요. 포착되고 보니까 이미 예수님이 만드신 세상에 끌려 들어갔지요. 들어가 보니까 여기 누가 있습니까? 예수님계시고, 아버지계시고, 이미 “예수님과 아버지와 하나된 저희들”이니까, 나 말고 다른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있죠. “저희들”이 있습니다. 비로서 이런 세계가 있다는 것을 비로서 발견하죠. 발견하면서 중요한 것은 이 전체가, 하나님과 예수님 이 모든 것들이 우리가 보기에는 따로 따로 잖아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이 모든 것에 어떤 용어를 썼습니까? 하나라는 용어를 썼다는 말이지요. “하나”라는 용어. 성경밖에서는 이 하나라는 용어를 어디에 사용하는가 하면 '개체성’에 사용합니다. 딱 딱 떨어져 있는 개체성. 내발이 근지러운데 (여러분이)근지럽습니까 안근지럽습니까? 안근지럽잖아요. 내가 배고픈데 (여러분이) 배 고파요? 안고파요? 안고프잖아요. 왜 안고픕니까? 다르지요. 그러면 하나가 여기서 뭡니까? 둘되지요. 둘이 된다고요. 그러면 저쪽이 아플때 내가 아프면 그것은 둘입니까? 하나입니까? 하나지요. 그렇게 되게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게.
이것이 고린도 전서 12장에 나오잖아요. 예? 교회에서 한 지체가 기쁘면 같이 기뻐하고, 또 한 지체가 울면 함께 슬퍼한다“는 것. (고린도전서 12:26 만일 한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 하나니) 분명히 고린도 전서 12장에 나오지요? “발이 눈더러 쓸데없다 못한다”는 그대목이 나오죠? (고린도전서 12:21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 그런데 이것이 현대의 우리가 사는 이 사회에서는 불가능하다 이말입니다. 남에게 동정을 한다는 것이 남의 사정을 알아주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괜히 남을 동정하고 싶어서 하는 것인데 그 동정을 해 봐야 남을 이해했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동정해 봐야 동정하고 있는 그 행동을 자기가 이해할뿐이지, 동정받는 사람은 당신이 날 무시한다고 하면 끝나버립니다. 인간이 남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서로 아무리 좋아하고 사랑한다고 해도 남을 이해할 수가 없어요. 목사가 교인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부부간에도 이해가 안돼요. 내가 보기에 분명히 화를 낼 말이 아닌데 저쪽에서 화를 내고 있다고요. 여기 애들 쉼터에서 애들 키워보면 알겁니다. 분명히 저건 화낼 것도 아닌데 화를 내고, 별 웃을 것도 아닌데도 혼자 웃고 있고요. 그럴때 약간 소외감을 느끼지 않습니까? ‘이상하다 내가 쟤들이 웃을때 함께 웃어줘야 하는데 아무리 연구해도 웃을만 한게 없는데’ 이것은 뭐냐 하면 인생은 각자 인생이라는 말이죠. 인간적인 힘으로 아무리 애를 쓴다고 해서, 찬송가에도 있잖아요. “형제 사랑” 어쩌고 그거 백날 해도 소용없고, 손붙잡고 통성으로 방언으로 백날 기도해도 소용없어요. 그런다고 전율이 일어나서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자기 이 외에 다른 사람은 이해가 되지 않을뿐더러 타인과 하나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때까지 그런식으로 계속, 죽 가는거예요. 부모가 되었든 자식이 되었든. 자식을 어떻게 부모가 이해합니까? 부모도 자식이 이해가 않되고. 하나될 수가 없습니다. 나중에 극단적인 순간에 자기 이익에 손해다 싶으면 딱 돌아서는 것이 인간이예요. 그런데 그렇게 안되는 것이 뻔한데 여기 하나님께서 뭐 되게 한다? “하나되게” 한다. 방법은 뭐냐? 자기 부인밖에 없는데, 그 자기 부인과 부정은 인간이 못합니다.
2부순서는 “하나되게” 하는 것이 뭐냐는 것입니다. 여기에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안에”라는 말이 있죠. 그러면 아버지가 누굽니까? 하나님이죠. 아들은 누굽니까? 예수님이죠. 예수님과 아버지가 하나죠. 어떻게 하나냐고 묻지 마세요. 그것이 우리는 이해가 안됩니다. 성부는 성부고 성자는 성자인데 하나가 된다는 것은 이해가 안돼요. 이해가 안되지만 우리가 듣기로는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아버지와 하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상식은 뭐냐? 하나가 되면 기도할 대상이 없어요. 자기가 자기한테 기도하는 것이 되기에 기도할 대상이 없습니다. 우리네 사고방식이 그렇습니다. 하나가 되어버리면 동질이 됩니다. “A = A”가 되어 버려요. A가 A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 되어 버립니다. 하나라는 것은 동질을 말하기에, 이 세상에서 나 말고 다른 누군가가 있을때 그것은 둘이 되지 하나가 아니예요. 내가 다른 사람에게 뭔가를 부탁하면 이것은 둘이지 하나가 아니잖아요. 그죠? “하나 된다”는 말은 한 조직이 있다는 그런뜻이 아닙니다. 조직이 있어도 그것은 둘이예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신비롭게도 아버지와 따로 따로 독립되어 있으면서도 “하나”라고 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그것은 우리가 이해도 안되고 납득도 안되지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기에 그대로 인정할 수밖에 없어요. 인정하는데 “그 예수님이 아버지와 하나되는 것 같이”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어요? 우리가 누구하고? “하나님하고 하나고, 예수님하고 하나고, 그리고 먼저 믿은 예수 믿는 사람들하고 하나되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한다는 말입니다. 이린 이야기는, 교회 나와서 십일조 해서 복받고, 잘먹고 잘살겠다는 인간적인 그 원초적인 욕구와 욕망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겁니다. 이것은. 교회와서 우리 애 좋은 대학 가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과 아무 상관이 없어요. 장사하고 있는데 그 슈퍼 잘되게 해달라는 것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요. 주님의 기도의 목적은 하나 되는 것이지, 슈퍼 잘되고 내 애 공부잘하는 것과 관계 없습니다. 내 아이가 공부를 잘하는 것이 남의 아이 공부 잘하는 것이 되는 것 아니잖아요. 내 인물 잘났고, 내가 부자되는 것은 내가 부자되는 것이지 예수님이 부자되는 것이 아니라 이말이죠. 안그래요? 전도사님! 안그래요? 맞지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기도가 뭐냐 하면 “하나”가 되는 것이지. 어떻게? 예수님이 아버지하고 하나되는 것을 이제는 예수님에게만 적용되는 사항이 아니라, 내가 불러준 너희에게도 아버지로 하나되게 하는 것이 목적이지, 독자적으로 내 아이가 좋은 대학 가면서 저쪽 아이는 다 떨어져 버리고, 우리 애만 서울대학 가고, 다른집은 다 안되고, 우리집은 잘먹고 잘살고. 이게 아니다고요. 이게 예수님의 뜻이 아니다는 말이죠.
우리가 우리 애 좋은 대학가고, 하는 일 잘되어서 돈 잘벌고, 교회 부흥되고, 선교사 많이 보내고, 헌금 많이 거두고 이것은 뭐냐 하면 인간이 태어날때부터 타고난 자기 밖에 모르는, 이미 자기는 하나예요. 그 하나에 타인이 들어 올수가 없어요. 왜냐 자기가 하나로서 꽉 찼기 때문에. 들어올 여지가 없다고요. 들어올 여지가 없는 나를 어떻게 하느냐 하면, 확장하는 일에 들어갑니다. 무슨 이름으로? 부흥의 이름으로. 내가 출세했다는 이름으로, 목회성공했다는 이름으로. 그것을 확장시킨다고요. 백날 확장해봐야 나라는 하나가 커질뿐이예요. (아 덥다! 열받아서. 오늘 조용하게 하려고 했는데---)
한번 생각해 보세요. 내가 당회장인데 내 밑에 부교역자가 들어왔습니다. 내 밑에 들어왔던 부교역자가 일년쯤 있다가 나가서 그 옆에 교회를 세워서 부흥이 된다면, 이게 화딱지가 나는 거예요. 왜? 이쪽 교인이 저리로 가거든요. 한 지역에 교회가 새로 생겼다는 말은 요새 새로운 교인이 없고 그냥 이동할 뿐이거든요. 이쪽교인이 저쪽으로 가게 되면 화가 난다고요. 화가 난다는 말은 처음부터 그 부교역자가 들어 왔을때, 요한복음 17장 21, 22, 23절을 그 목사는 전혀 생각한 적이 없어요. ‘저 형제는 나하고 하나다’라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내가 이미 하나인 이 교회에 와서 너는 내 하나됨을 확장시킬때 보탬이 된다면 월급을 줄것이고 내 위신이 높아지고 내가 자존심이 커지는 일에 네가 보탬이 되어 준다면 그때 안쫒아 낼게” “그렇지 않고 네가 독자적으로 나와버리면 나는 너를 죽여버린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의 이 말씀은 삽을 가지고요 인간, 그 자체를 뿌리채 파버리는 것입니다. 완전히. 여기에 교회가 되었든 목사가 되었든 상관없어요. 인간을 그 뿌리채 팍 파가지고 180도를 완전히 뒤집어 버리는 거예요. 마치 땅에다가 떼어 차버리는 것같이 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아버지 앞에서 어떻게 살았습니까? 하나됨을 위해서 사셨음을 우리가 이 본문 보면서 부인할수 없지요? 예수님하고 아버지하고 하나니까. 그렇지요? 그러면 예수님이 아버지와 하나되었을때, 그런 마음 자세가 진정 예수님과 아버지사이에 있었던 그 관계가 진정 나에게도 동일하게 침투하고 덮치기를 진정 우리가 소망을 하고 있습니까? 진정! 아니면 반대로 옆에 있는 집사, 옆에 있는 목사, 옆에 있는 교인보다 내가 더 유명하고 능력있는 목사 되기를 - 물론 저쪽에 있는 목사는 박살내고 말이죠 - 간절히 소망하고 있습니까? 어때요? 여기에 쉼터가 있는데 저쪽 쉼터 생기니까 저쪽것을 박살내고 이쪽의 것이 융성되기를 원하겠어요? 안원하겠어요? 원하지요. 그런데 언제 그런 것을 원하지 않게 되느냐 하면, 송목사님과 사모님이 불치병에 걸려서 내일 죽게 되었다고 할때는 “아버님 아버지시여 내일 죽는 마당에 무슨 욕심이 있겠습니까?” “다 가져가 다”. “여기 쉼터의 모든 재산, 시에서 제공한 모든 것까지 다 가져가” “여보! 우리는 손잡고 빨리 천당갈 준비나 하자”라고 했을 바로 그 순간만 그런 마음이 들겠지요.
바로 예수님은 늘상 그 순간으로 아버지앞에 살았습니다. 따라서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 자기에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자기뜻이 남지 않았으니까. 예수님의 자기뜻이 남지 않았다는 것이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마지막 겟세마네 기도에 나오지요? 예수님의 뜻이 뭡니까? 죄인을 구원하는 일에 대해서는 예수님이 반대를 하지 않아요. 안하는데 이 잔이 너무나 쓰고 고난이 심하기 때문에, 고난없이, 고난없는 상태로 내가 대속의 일만을 할수있게 해달라. 할수 있거든. 하지만 그것조차도 “내뜻대로 마옵시고” 참! 이거! 내가 여기에 한번 적어 볼께요. “내뜻대로 마옵시고”하는 이것이 왜 교회의 금요철야기도회의 기도제목으로 택해지지 않는지 이유를 모르겠어요. 저는. “내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뜻대로 하옵소서”아닙니까? 이것이 그대로 적용되려면 반드시 무엇이 선행되어야 합니까? “내뜻”이 있어야 됩니다. 이게. 어떤 사람은 이것을 흉내낸다고 자기 뜻도 없앤다고 하는데, 자기뜻을 없애면 안돼요. 자기가 알아서 없애면 뭐하려고 기도합니까? 자기가 알아서 다 없앴는데. 이해 하시겠습니까? 내뜻이 있어야 합니다. 인간은 완벽하지 않고, 완전하지 않고, 죄인이기 때문에 자기뜻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돼지를 키우고 있다면, 건강하게 돼지새끼를 낳게 해주시고, 교회를 하고 있다면 교인들이 올때마다 부자교인들이 많이 와서 헌금도 많이 많이 하게 해주시고, 한교인도 빠지지 말고 십일조 하게 해서 교회 부흥되게 해주시고. 그렇게 되면 장로들이 목사를 내쫒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오래 오래 계셔 주시오. 월급올려 줄께”라는 이런 소리, 이런것들이 다 “내뜻”아닙니까? 목사되고 난 뒤의.
왜냐하면 인간이라 하는 것은 날때부터 생존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주위에 있는 공기와 햋빛과 바람과 자기가 살고 있는 이 터전 이 모든 것을 다 끌어 모아서 나의 터전을 더 견고하게 강화시키고 단단하게 만들기 위해서 사는 겁니다. 그래서 중소기업은 안가고, 공기업에 들어가고, 공무원이 되려고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공기업이 그 뿌리가 단단하니까. 구조조정 당할일이 없으니까. 오래도록 월급쟁이 하면 오래도록 밥먹고 살수 있으니까. 왜 부자 아버지를 만나는 드라마가 있어요? 난데없이 부자 아버지가 등장해서 만나게 된다는 스토리의 드라마가 있잖아요. 그런 것 왜 내보내요? 그것이 시청자들이 원하는 것 아닙니까? 실컷 고생하고 사는데 부자 아버지가 나타나서 “내가 네 애비다”하면 얼마나 좋냐 말이죠. 이것이 대리만족 아닙니까? 카타르시스가 뭐예요? 재벌 아버지가 나타나서 그동안 고생하면서 살던 것 끝내고 호강시켜주는거 있잖아요. 호강시켜 주는거. 어디 드라마에 그런 것이 있더라??? 아. 그 뭐고? 삼순이 나오는 데서 나오는 여자 이름 뭐예요? 촌에서 가짜엄마 만나서 산골에 있다가 영화감독 만나서---. 신앙생활 한다고 전부 드라마를 보지를 않아서 잘 모르시는데. 있지요. 갑자기 졸지에 신분이 상승되고 변화됩니다. 이것은 인간이 남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이용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겁니다. 내 터전을 든든히 다지는데 저 사람이 얼마나 유용할까를 따져서 단 것 다 빼먹고 내던져버릴건데 ‘그 시점을 언제로 할것인가’라는 통밥을 굴리면서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되어 있는 것이 인간이라니까요. 이 성경공부도 마찬가지예요. 목사님들이 성경공부할 때 ‘저거 배워가지고 목회 성공할까’ 이것을 계산해서 배웁니다. 공부한 것으로 목회가 성공 안되는 성 싶으면 좀 배우다가 가버려요. 말씀에 관심이 없다니까. 주의 뜻에는 관심이 없고, 내가 목사니까 목사로서 자기 터전을 견고히 다지겠다는 여기에 혼신의 힘을 다 하는 겁니다. 그것이 "내뜻”이예요. 생각해보세요. “내뜻”아닙니까? “내뜻”. “주의 뜻대로 하옵소서” 이게 아니잖아요. 사람이 성경이 아니면 이런 인간의 실체를 어디가서 이야기 할데가 없어요. 성경의 실체가 아니면.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대비시키지 아니하면 어떤 인간도 거기에 자기정당성이 약간은 남아 있도록 되어 있어요. 그러나 예수그리스도만 들이대면 어떤 인간도 죄인중의 괴수예요. 어떤 인간도 자기 잘났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낮에 성경공부를 하는중에(서울 의존교회 강의) 교인들에게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당신들은 당신들에게 죄인이라고 공격하고 죄인이라고 이야기 해주는 사람을 또 만나고 싶습니까? 이렇게 물었어요. 이웃집에 사는 사람이 자꾸만 찾아와서 “댁의 애들이 너무나 떠든다”고 해대면 그 사람을 또 만나고 싶겠습니까? 만나고 싶지 않겠지요? 그런데 고린도전서 13장에 보면 “지금은 거울을 보는 것 같이 희미하게 보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고 본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12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이게 무슨뜻이냐 하면 나의 정체를 남김없이 다 드러내 주고, 십자가의 피를 흘려가면서 ‘너는 이렇게 죄인이었고 이 피없으면 너는 의인이 아니었다’고 고발해주는 사람이 정말 보고 싶으냐는 것입니다. 정말 보고 싶어요? 결국 이것은 한국교회 전체가 가짜라는 뜻이예요. 보고 싶지도 않은 거예요. 누가. 예수님이 보고 싶지 않은 거예요. 예수님은 보고 싶지도 않으면서 자기가 영원히 살수 있는 천국, 에덴동산은 소망하는 거예요. 이런 사기꾼들이 어디 있어요. 천국이 뭔데요? 골로새서 1장에 보면 천국이란 아들의 나라 아닙니까? (골로새서 1:13,14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사함을 얻었도다). 아들만 칭찬받고 다른 사람은 그 앞에 무릎을 꿇는 세계 아닙니까? 천국이. 나는 부인하고 면류관까지도 반납하는 그 세계가 천국이잖아요(계시록 4:10). 그런 상태되기를 학수고대하면서 ‘나는 언제쯤 주님앞에 무릎을 꿇고 주님만 높일까’하고 바라보면서 주님과 연결되는 그것을 가지고 ‘소망’이라고 합니다. 그 소망은 로마서에 보면 환란가운데서 소망이예요. 이땅에서 의지했던 것이 다 잘릴때 소망이라.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무엇을 낳는다? 소망을 낳잖아요. 소망을!!!
(로마서 5:1-4 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니라 5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6 우리가 아직 연약할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이런 이야기가 평소에 시장바닥에서 안나오잖아요. 시장바닥은 콩나물 한봉지 더 팔면 그만이잖아요. 예수도 꼴보기 싫고, 그저 내 존재가 내영역이 확대되는 것을 소망으로 두고 살아가요. 확대되는데 그걸 전능하신 하나님이 좀 도와달라는 거예요. 그걸. 교회에서 목사가 시키는대로 십일조도 하고, 주일성수도 다 할테니까 내 존재를 확장시켜서, 내 영역의 뿌리가, 존재가 좀더 든든하고, 왔다 갔다 하지 않고, 이땅에 착 뿌리 박히는 식으로 해서 ‘성공했구나’ 소리 들으면서 인간다운 대우를 받으면서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이것이 교회 나오는 목적이 아닙니까? 교인들이. 예? 우리 젊은분들 안그래요?
000: 다 그렇지는 않죠. 모든 교인들이 자기 평안을 위해서 교회를 나간다고 보기는 어렵죠
목사님: 그러면 “내 뜻”이 없어져 버리는데요.
000: 아니 뭐, 꼭 다 그렇지는 않다는 것이죠.
목사님: 그러면 “내뜻”(예수님의 “내뜻대로 마옵시고”의 기도 내용에서)은 어떤뜻인데요?
000: 아니요 그 부분하고는 좀 다른 부분인 것 같아요. 비유가 좀 안맞는 것 같아요(녹취자 주 / 목사님께서 강의중에 “내뜻”의 내용으로 풀어낸 것을 보니 모든 인간을 다 싸잡아서 한꺼번에 다 몰아붙이는 식으로 하는 것 같은데 그게 좀 억지같다는 의미로 풀이됨)
목사님: 예수님께서 "내뜻대로 마옵시고”라고 했거든요. 그러면 “내뜻대로 마옵시고”에서 "내뜻”이 있어야 된다고요.
000: 예수님이 인간들로 하여금 구원되게 하기 위해서, 그러니까 구원을 위한 조건들을 인간들에게 말씀하신 부분 같은데---
목사님: 아니죠. 인간의 구원이라는 것은요.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예수님이 있는 것이 아니고.
000: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그런 조건들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까?
목사님: 아니라니까요. 아니예요. 왜냐하면 인간을 구원하기로 할 것 같으면 에덴동산에서 쫒아 내지도 않았어요. 구원할 것 같으면 뭐한다고 쫒아 냅니까?
000: 그러니까 그 이후의 이야기 아닙니까?(인간의 구원이라는게)
목사님: 에덴동산에 쫒아낼때의 그 취지가 뭐냐? 그 취지가 없이는 에덴동산 밑에서 한 일을 몰라요. 에덴동산에서 쫒아낼때는 취지가 있어요. 우리같으면 뭐라고 하겠어요? “어이” “선악과를 따먹었나” “앞으로는 잘해라” 이러면 되요. “제가 따먹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그래 내가 자비하신 하나님이 아니냐?” “내가 봐줄게” “어이” “앞으로 조심해” “인간인 이상 실수할수도 있지” 이러면 그만이예요. 그게 아닙니다. 에덴동산에서 쫒아낸 정도가 아니고 아예 천국에 오는 길을 막아 버렸죠. 이것은 뭐냐 하면, 너희들의 존재가치를 너희쪽에서 출발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내(예수님)가 건져주는 사람만 구원받지 알아서 구원받고 싶다고 해서 구원해준다는 것이 아니다”라니까. 이게 하나님의 예정된 선택이 있어야 되는 거예요.
000: 그러니까 구원의 문을 열기 위해서 예수그리스도께 십자가에 못박히기 직전에, 우리 구원의 의미를 설명하는 부분이 아닙니까? 하나 된다는 의미가.
목사님: 이것은요. 예수님의 말씀은 시간이 초월돼요. ‘무엇 무엇 하기 전에’ 혹은 ‘후에“라는 것이 없고, 그냥 한꺼번에 나가게 돼요 한꺼번에. 지금 제 논리에 문제가 있습니까?
000: 논리에 문제는 없는데.
목사님: 없지요? 그럼 들어보세요. “내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라”고 했다고요. 지금 이 대목을 제가 왜 설명하냐 하면, 다른 것이 아니고. 예수님과 아버지가 하나였다 이말이죠. 제가 답답한 것은 ‘하나임을 진정 우리가 원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임을” 그런데 우리는 태어날때부터 나밖에 모르잖아요. 나밖에 모른다면 이렇게 해야 돼요. “주여 난 나밖에 모르는 인간입니다” “나를 좀 깨가지고 이제 나밖에 모르는 인간에서 예수님에 의해서 새롭게 알아지는 인간이기를 원합니다”라는 것이 금요철야기도에서 제목으로 나와야 한다니까.
제 말은 그거예요. 이 대목을 제가 이야기 한겁니다. 다른 것이 아니고.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 하면, 기도할 때 하나 하나 기도의 제목이, 나로 더욱더 견고하고, 나로 더욱더 뛰어나고, 성공적인 인간이 되겠다는 그것이 빠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처럼 스데반처럼 “예수님만 있으면 족합니다”하는 그것이 나와야 되는데, 그것이 안나오는 이유를 지금 성경가지고 따지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런 기도제목이 안나오느냐 말이죠. 안나오는 이유를 따져보니까, 거기에는 다분히 예수님을 이용하겠다는 것이 들어 있다는 거죠. 예수님을 이용하는것에는 여러 가지 있는데, 예수 믿고 천당가겠다는 것도 포함되어 있어요. 예수 믿고 천당가겠다는 것은 이것은 말도 안되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도저히 자기 주제파악을 할수 없기에 나오는 헛소리에 지나지 않아요. 하나의 발광이라고나 할까? 살기 괴로우니까 죽어서 좋은데 가고 싶다는 소리입니다. 이런 것은 마치, 판사가 피고를 향하여 “10년”하니까, “10년 당연한데요. 교도소 좋은 자리 있으면 좀 소개시켜 주세요” 이것과 똑같은 소리입니다.
“주여” “마땅합니다” “십년이 아니고 더 죽어도 당연하지요” 베드로가 배 오른편에 그물 던져서 고기잡고 난 뒤에 뭐라고 했습니까?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그 다음에 뭐라고 했어요? 그 다음에. “나를 떠나소서” “나를 떠나소서” “나를 떠나소서”. 이것은 성경 하나 하나가 기존의 인간의 구원욕구에 대해서 고발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구원욕구 - 예수 믿어서 천당가고, 살아서 복받고 - 이런 인간의 구원욕구에 의해서 누가 오해를 받냐 하면 바로 이땅에 직접 오신 예수님과 스데반과 베드로와 사도들이 이런 것 때문에 핍박을 받게 되요. 이런 것 때문에. 이런 엉터리 같은 것 때문에 진짜로 복음을 믿는 사람들이 완전히 또라이로 진짜 미친놈으로 간주되었어요. 그러니까 사도바울보고 미쳤다는 소리가 여러번 나오는데 고린도후서에 보니까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그래 미쳤다. 미쳤는데” 어디에 미쳤다? “예수님의 사랑에 미쳤다” (고린도후서 5:13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 뒤에 나오는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예수님이 한번 죽으심으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이제 희망 없지만 “이제 산자들로 하여금 더 이상” 그 다음에 나오죠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오로지 자기를 위해 죽었다가 살아나신 예수님을 위해서 살게 하려 함이라”고 하면서 그 뒤에 나오는 고린도후서 17절에 보면 그런즉 예수 안에 있는 자는 뭐다?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린도후서 5:14-17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그러면 새것이 되었으면 새것에 담는 그 존재의 내용물은 뭐예요? “더 이상 나를 위해 살지 않고”가 나오지요. 그러면 나를 위해 사는 것은 다 동원해야 돼요. ‘나를 위해 살았을때 나는 어떻게 살겠나?’ 해보세요. 그중에 하나가 무엇도 포함됩니까? ‘예수 믿고 천당가자’도 포함되죠. 예수 믿고 천당가는 것, 십일조 내서 복받는 것, 이 세상에서 더 오래사는 것, 잘 먹고 잘 살아서 영광돌리겠다는 그런 심보. 그런 것이 전부 다 포함되는 거예요. 나를 위해 살겠다는 것을 정당화 하는 그 어떤 성경대목이 없습니다. 어떤 형제가 상속문제로 찾아 왔을때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눅 12:13-15 13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14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15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이거 이런 따위의 소리를 하다가는 교회에서 쫒겨납니다. 그리고 곡식저장창고를 짓겠다고 계획하고 있는 부자에게 하는 말이 이 어리석은 놈아 “오늘밤에 네 영혼을 데려가면 저 창고에 있는 곡식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자기에게 충실하고 주님에게 소홀한 것이 바로 이와같다고 합니다
(눅 12:19,20 19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이런 말씀이 바로 주님의 말씀이잖아요. 그런데 이러한 주님의 말씀에 대해서, 진짜 계속 듣고 싶고, 만나고 싶으냐 이말입니다. 지금 제말은! ‘아아-- 그런것도 있었구나’ ‘그런 견해도 있을수가 있지’ ‘뭐 그런 가설도, 성경은 여러 가지 이니까 그중의 하나 일거야’. 그게 아니고 정말 예수님을 보고 싶어 하느냐 말입니다. 정말로 정말로 예수님을 보고 싶어 하느냐 말입니다. 아니면 예수님을 갖다 버릴래.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도 근본적인 것, 내가 예수님을 별로 안좋아하면서도 열심히 성경을 봐요.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천독을 했느니 만독을 했느니 그렇게 한다고요. “예수님을 만나고 싶습니까” 했을때 별로 만나고 싶지 않아합니다. 만나고 싶은 사람은 누구이겠어요? 내가 성경 천독했다고, 만독했다고 칭찬해주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해요. 왜. 자아가 빛이 나니까요. 내가 기도많이 한 것을 칭찬해 주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요. 왜. 그래야 자기 포섭이 되니까. 자기 부하 직원이 될 수가 있고, 자기 교인들이 될 수 있고, 그래야 목회가 성공할수 있습니다. 자기 기도에 능력이 있다고 칭찬해 주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요. 왜. 이런 사람은 자기 교회의 집사 혹은 장로가 될 가능성이 많아요. 그 사람을 붙들고 개척교회를 시작해도 되는 겁니다.
그런 사람이 그립지 그냥 내 대신 피흘린 예수님은 졸지에 그 앞에 나가면 나는 뭐가 되버려요? 나는 강도가 되어 버리고 창녀가 되어 버립니다. 어떤 미친놈이 자기가 강도로 창녀로 나타나는 것을 좋아하겠습니까?
나 : 나 점잖은 목사입니다. 나 총신나왔습니다!
예수님 : 이놈아, 너 강도야!
나 : 아이 씨.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
도망치고 싶은 것이 인간의 심리지, 저 계속 강도라고 이야기좀 해 달라고 달라붙는 사람이 누가 있겠냐 이말이죠. 그러면 결국 뭐냐 하면, 예수님하고 하나 되고 싶은 것을 누가 거역하느냐 하면 내가, 내 욕심이 주님과 하나 되는 것을 내가 싫어한다니까 내가. 그래서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거예요. 우리가 기도 못하는 것을. 우리가 기도못하는 것을 예수님이 기도하셔서 우리에게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뭘 통해서? 성령을 통해서. 다른 말로 하면 바람같은 사건들을 통해서. 내가 안되거든요. 나는 나를 포기못해요. 남들 천당가고 내가 지옥가는 것은 내가 용납이 안된다고. 예수님께서 누구는 택해서 천당보내고, 누구는 택해서 지옥보내는 것을 내가 용납 못한다고요. 나도 끼워달라는 거죠. 무슨 권리로 끼워 달라는 건지. 죄인인주제에 가만 있으면 되지. 어떤 권리로 끼워달라는 거예요.
우리가 여기서 요한복음 17장을 보면서 얻을수 있는 결론은 이겁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응답안되고 끝나는 법이 없는데 예수님께서 이런식으로 기도했다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뭘 기도해야 하는가 하면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과 하나될 것을 기도하신 것 같이 우리도 하나되게 하실 것을 우리는 고대해야 합니다. “주여!” “주께서는 해 내시고야 맙니다” “나는 이러나 저러나 예수님을 등쳐먹고 예수님을 이용하고 내 개인사정 어려울때는 안찾아오고, 주님을 멀리하고, 성경도 안보고, 기도도 제대로 안하고 그렇지만 제가 믿는 것은 주님께서 반드시 이 말씀대로 주님께서 저에게 파도처럼 덮치도록 할것입니다.” 이게 믿어진다고요. 이게 믿어지는 것이 요한복음 나중에 나오는데 이것이 뭡니까? 이게 성령께서 하시는데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이 성령을 뭐라고 합니까? 14장을 봅시다. 요한복음 14장 2절에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고 하는데 14장 23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고 되어 있지요. 그 거처가 뭡니까? 20절에 보면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하죠. 아직까지는 성령이 오지 않았죠. 성령이 오게 된다는 말은 17절에 나오죠. “저희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속에 계시겠음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간에 성령이 덮쳤다는 이말은 이미 우리안에 누가 계셔서 우리를 간섭한다? 예수님이 계셔서 우리를 어떻게 간섭합니까? 예수님이 아버지와 하나된 것 같이 기어이 우리를 예수님과 하나되도록 예수님께서 조치를 하시는데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그 조치 하시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기도한 것을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죠. 모든 것을 다 이루었기에 이룬 것을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을 시켜 버리면, 우리는 예수님과 아버지가 누렸던 그 모든 영광과 모든 것을 함께 누리면서 “하나가 된다”라는 것이 여기에 나와있다 이말이죠.
우리보고 하라는 말이 아니예요. 우리는 십년을 믿어도 자기밖에 몰라요. 생각해 보세요. 어제처음 교회 나온 사람하고, 15년이나 20년동안 교회다닌 사람하고 똑같이 예수 믿으면 되는데.
@ : 저... 어제 처음 나왔습니까?
교인 : 처음 나왔습니다.
@ : 우리의 구세주는 누구죠?
교인 : 주님입니다.
@ : 그러면 우리는 주님 안에서 뭡니까?
교인 : 하나죠.
이러면 될터인데
20년 믿었다는 사람이 뭐라고 합니까?
20년 : 어제 처음 나왔죠?
처음 : 처음 나왔죠
20년 : 난 20년 믿었는데.
이런 이야기를 왜 하는데. 예? 이런 이야기를 왜 하는데? 뭡니까? 평신도입니까? 목사입니까? 이런 이야기 평신도, 목사 이런 이야기를 왜 하는데? 주도권 쥐겠다는 겁니다. 주도권쥐겠다는거예요. 예수님한테는 이런 것이 없어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뭐라고 했습니까? 누가 더 높으냐고 할때 예수님께서 그걸 누구라고 세웠어요? 아이들을 앞에 세웠지요? 제자들은 지금 예수님께 부름받아서 3년동안 - 3년인지 2년인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 따라 다니는 중입니다. 애는 그날 처음 만났어요. 처음만났다고. 그래서 하시는 말씀이 뭐냐 하면 누구든지 어린아이같이 되지 아니하면 어디에 못간다고요? 감히 어디에 못가요? 감히 천국에 못가지요. 그러면 그것이 예수 믿기 전의 상황이라면 이미 예수님을 믿게 된 상황에서는 어린아이 상황을 그대로 적용시키는 것이 예수 믿고난 이후의 내용물이 맞지요? 그렇죠? 그래야 말이 되잖아요. 무슨 말이냐 하면, 예수 믿기 전의 책망받았던 그 상황이 예수 믿고 난 뒤에는 그것이 어디로 날라가 버린 것이 아니고, 그 원리가 그대로 적용되지요. 적용되면 어떻게 되요? 20년 믿었다 혹은 하루 믿었다든지 이것이 아니라, 하루를 믿으나 20년을 믿으나 ‘예수를 믿으면 우리는 형제입니다’라는 말이 나올때 비로서 그 사람은 예수를 믿고 난 이후의 사람이 맞는 것 - 맞는지 안맞는지 딱 잘라서 말할 수는 없으나, 그래도 - 같군요 라고 이야기할수 있다 이말이죠.
예수 믿고 나서 세상적인 복을 받았다는 이것은 결코 이것이 예수 믿기 전에 예수님께서 제자들보고 “야 제자들아 네가 왜 세상의 복을 안비냐”고 나무랬고 “왜 너희 자식들이 서울대에 가도록 기도를 하지 않느냐”고 이렇게 나무랬다면 “아이고 우리가 믿음이 없어서 못했습니다”하고, 그 다음에 예수 믿고 난 뒤에는 이제는 나라가 잘되고, 교회가 복받고 부흥되고, 애들 잘되라고 기도하면 되는 것이 맞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예수믿기 전에 뭐했냐 하면, 마귀가 돌이 떡이 되게 하라고 했을때 예수님께서 마귀보고 뭐라고 했습니까? 동의했습니까? 안했지요! 마귀가 예수님한테 높은데서 뛰어 내려도 다치지 않는 기적을 베풀어 보라고 하면서 그렇게 기적을 베풀면 사람들이 호응 안해주고 못배기면서 메시아가 왔다가 호응해줄것이라면서 기적을 행하라고 했을대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했습니까? 안했지요. 세 번째로 마귀가 그토록 한국교인들이 원하는 - 금식기도해가면서 원하는 - 세상의 부귀영화를 챙기라는 말에 예수님께서 동의했습니까? 안했지요? 그런데 그것은 예수님만 이길수 있었지요.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예수 못믿겠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이 무슨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니냐. 두 번째는 뭐냐, 기적을 베풀면 나 믿음 좋으니까 나 따라오라는 그것에 다 시험들거고. 세 번째는 세상부귀영화에 안넘어갈 인간이 없어요. 이게 예수님을 빼놓고 모든 인간이예요.
그렇다면 이제 정말 성도라면 무엇을 소망해야 되요? 예수님처럼 돈보다도 주님, 기적적인 세상의 인기보다도 아버지의 뜻, 세상 부귀 영화보다도 아버지의 뜻이 이땅에, 주님의 영광이,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소망하고 있어야 그것이 앞뒤가 모순되지 않고 딱 들어 맞는 신자의 모습이 아니냐 이말입니다. 내 말은. 예? 아니예요? 제 논리에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맞지요? 자 그러니까 하나 하나 정리를 해 보면, 결국은 예수님 혼자서 이런 주장을 했지 이런 주장에 대해서 동의할 제자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한명도 없어요. 한명도 없습니다. 그점이 중요한 거예요. 사람들은 이 말씀을 보고 되지도 않을 능력을 발휘해가지고 이걸 비슷하게 따라 붙일려고 해요. “아버지여 세상 영광을 버리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는데 그 말은 거짓말입니다. “세상 영광을 버리는 그 이유로 인하여 난데 없이 세상영광이 굴러 들어오게 하옵소서” 그게 그뜻이라고요. “저 보세요. 저 믿음 좋습니다. 저는 세상의 축복을 원하지 않습니다”라는 말을 내 뱉는다는 것은, 그걸 꼭 내가 말로 해야 되겠는가 하면서 눈치 때려가지고 내가 원치 않는다고 하더라도 솔직히 알아서 주셔야 한다는 겁니다. “아 진짜 미치겠다. 주님 뭐하고 있노. 내가 이걸 싫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알아서 줘야지. 그래야 남들이 주께서 살아 계시다는 것을 알지”라고 눈치 때려서 달라는 그런 은근한 것이 있다 이말이죠.
그래서 어떤 인간도 이 말씀대로 살지 못한다는 것을 제가 분명히 이야기 합니다. 여기에 누가 동원되는가? 마지막으로 정리하겠습니다. 벌써 한시간이 다 되어 갑니다. 오늘이 마지막 시간이 될지도 모르기에 이것을 정리해야 합니다. 이것은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의 역사. 성령의 역사가 구체적으로 어떤 역사인가 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고린도 전서 2장에 나옵니다. 거기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어요. 성령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알지 못하는 지혜가 있다고 하지요. 그게 뭐게요? 아무리 똑똑한 철학자, 박사, 아무리 성경연구를 많이 한 사람이라도 성령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알수 없는 지혜가 하나 남겨져 있다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2장에. 그게 뭔지 알아요? 그게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만약에 그들이 십자가를 알았더라면 그들이 영광의 주를 못박지 않았을 것이라고. 이것은 십자가를 아는 것은 마음으로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눈으로 봐서도 안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얼마나 감추어진 것이면 사람들이 누구나 십자가를 가지고 뭐라고 하냐고 요새 말로 “미련 곰탱이” “어리석다”고 했어요. 보통 구원의 능력이라는 것은 세상종교에서는 나의 행함에서 나옵니다. “나의 행함”. 나는 여기 있고 구원은 저기 있다. ‘저 구원과 내 사이에 어떤 행동들로 이어가면 그 행동들의 힘에 의해서 구원을 따낼것인가’라는 이러한 징검다리를 제시해달라고 교인들은 목사에게 닦달내죠. 목사님이 시키는대로 할테니까 내가 여기 있고, 주님은 하늘나라 저기에 있는데 저기까지 갈수 있는 단계를 - 2단계든 3단계든 좋으니까 - 제시해 달라는 거죠. 시키는대로 다 할거니까 어떻게 해서 구원받고, 어떤 사람은 어떤 행동을 해서 복받았다, 은혜 받았다, 기적받았다는 식으로 어떻게 어떻게 하면 된다는 그 방법만 이야기해주면 저는 당신을 위대한 설교자로 인정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에서 하는 말이 뭐냐 하면, 세상 사람들이 알수 있는 지혜는 이것으로는 천국에, 구원에 이를수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구원의 능력은 행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다른 곳에서 나온다는 거예요. 그것은 뭐냐? 십자가사건 자체에서 능력이 나온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잘 이해가 안된다면 고린도전서 2장 4절에 보면 내가 전한 말은 사람의 말로 하지 않고,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어요? 성령, 성령의 능력으로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고전 2:4/ 내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그러면 우리가 여기서 그말을 딱 듣게 되면 그 다음에 세상 말로 할수 있는 것을 다 알아야 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철학이고 윤리이고 도덕이고 양심입니다. 고운 양심, 순결한 신앙, 아주 깨끗한 티끌 하나 없는 순결한 마음 이런 것들이예요. 그런데 그런것들이 인간들이 할수 있는 것들이죠. 인간들이 숙련하고 노력하고 영성운동하면 다 할수 있는 것들이예요. 그런데 인간들이 아무리 해도, 아무리 해도, 아무리 해도,(녹음기 고장나서 반복되는 것 아님) 안되는 것이 있는데 그게 뭐냐 이게 성령의 역사거든요. 그래서 성령의 역사는 무엇을 갖고 있느냐 하면, 사람들이 아무리 해도 들키지 않는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능력이 인간에게서 안나오고 오직 십자가의 능력에서만 나온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몰라요. 모르기 보다는 사람들이 그것을 거부하죠. 인간은 주체성이 있어서 내 복은 내가 챙기는 거예요. 공자, 소크라테스, 석가모니, 예수 넷중에 골라잡으라고 하면 예수를 고릅니다. 내가 고르는 거예요. 내가. 여호와의 증인, 통일교, 합동측이 있는데 나는 합동측, 이렇게 내가 고르는 거예요. 장로교, 내가 고르는 거예요. 내가 가까이 하게 하는 것까지는 하나님이 하시고 그 다음에 믿고 안믿고 하는 것은 내가 알아서 하는 거예요. 이게 인간의 능력이예요. 이게 바리새인들이 했고 유대교인들이 했던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고자 했던 사람들중에 그렇게 하는 일에 도사가 있었어요. 그게 누구냐? 사도바울이 도사였습니다. 성경대로 사는 일에 사도바울보다 더이상 의로운 사람은 없어요. 바리새파중의 바리새인이예요. 인간이 할수 있는 최정점에 있는 사람이예요. 그런데 그 사람을 주님께서는 죄인중의 괴수로 만들어서, 결국은 죄인중에 괴수되었다는 사실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그냥 예수님께 내가 죄인이라면서 회개한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겸손한다고 해서 구원되는 것도 아니고, 그냥 그런 인간의 행위와 관계없이 십자가의 능력으로만 구원되는 거예요. 그럼 십자가의 능력은 고린도전서 2장에서 보게 되면, 사람의 내부는 심령이 아니고서는 알수 없듯이, 하나님의 속마음도 성령이 아니고서는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사람들로서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사람들의 행함이 아니고 은혜로 주신 것을 몰라요. 그게 십자가예요. 왜냐하면 십자가는 그게 성령이 아니고서는 모르기 때문에. 자 그렇다면 결론을 내려 봅시다. 아까 제가 성경을 다 외운다고 해도 성경지킵니까, 못지킵니까? 못지킵니다. 왜냐하면 지켜 봤자 그 공로가 자기에게 돌아오기 때문에. “쉬지말고 기도하라”고 했을때 그걸 지키면 쉬지 말고 기도한 자기에게 공로가 돌아오게 되어 있어요. 이게 인간이 타고난 겁니다. ‘내가 기도했잖아 내가’ ‘내가 잘나서 기도했잖아’ ‘내가 훌륭하잖아’ 이것이 돌아오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성령이 아니고서는 이 성경말씀을 지킬수도 영광돌릴수도 없게 되어 있어요. 성령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십자가를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로마서 3장을 찾아 보고 마치겠습니다.
로마서 3장 23절에 보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지요? 답변 해주세요. 이거 제말이 아닙니다. 맞지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으면 어떤 결과가 되었어요? 그 뒤에 나오지요? 어떤 결과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제가 다시 묻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영광이 되지 못했잖아요. 그러면 하나님께 영광돌릴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는 이유가 뭡니까?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지요. 율법이 없었습니까? 아니죠. 그 앞에 보면 율법이 있었어요. 율법이 있어도 율법을 지켜서 영광을 못돌리죠. 왜냐하면 그 앞에 19절 20절에 보면 율법은 뭐하는 용도예요? 용도가 뭐예요? 율법줘서 율법가지고 영광돌리게 하는 용도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모든 입을 막고” 사람을 어디 아래 둔다? “너는 이제 자슥아 구원받을 자격도 없어” 하고 “저주 아래 두기 위해서” 일부러 준거잖아요. 율법지켜서 영광을 돌리지 못하지요? 율법지켜서 영광돌리겠다는 소리를 하면 됩니까? 안됩니까? 안되지요.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율법을 못지키고 율법을 못지키면 영광이 안돼요. ‘뭐 틈새로 한두개 지키면 안되겠나’ 안된다니까. 하나도 못지켜요. 그러면 영광의 통로는 하나로 모아졌지요. 23절에 “율법외에” 그 뒤에 무엇입니까? “한 의”인데 그게 뭐냐 하면 예수님의 화목제물 아닙니까? 화목제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되요? 안되요? 영광되지요? 그럼 문제 끝났지요? 이 성경말씀 전체를 봤다는 말이죠. 이 성경 전체를 보는 것은 뭐로 봐야 되요? 나는 지금 잘났나고 보는 거예요. 나는. 나는 교회 20년 다니면서 성경 잘 알고, 잘 가르치고, 설교도 잘한다고 본거예요. 그런데 성경을 보니까 그 어떤 짓을 해도 그것이 누구 영광? 주님의 영광을 빙자한 자기영광. 그러니까 나는 주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오래 살아야 한다는 말이예요. 나 이근호는 오래 살아야 돼. 왜? 잘났으니까. 전부 다 자기 영광 돌아오지요. 이것은 하나님께 죄악된 거죠. 하나님께 영광이 아니죠. 그러면 영광은 “율법외의 한 의”죠. 그 “한 의”란 “예수님이 행하신 한 행함”인데 그게 뭡니까? “화목제물”이죠. 화목제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영광도 받으시고, 그 다음에 예수님도 의롭다 하시고, 그 뒤에 보면 예수 믿는 우리도 뭐가 된다?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요.
(로마서 3:19-26/ 19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20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21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들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그렇다면 성령께서 - 이제 마지막 결론입니다 - 성령께서 어떻게 합니까? 우리에게 십자가를 들이대는 이유가 뭡니까? “네가 잘났으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겠나” 이렇게 나오시는 겁니다. “그렇게 잘났고, 그렇게 설교 잘하고, 그렇게 훌륭해서 돌아다니고 한다고?” “네가 그렇게 잘났으면 잔소리나 몇마디 해대고 말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렸겠는가” 십자가를 들이댐으로 말미암아 “주여 내 행한 것으로 영광되지 못하고, 십자가를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는 바 영광입니다”라고 고백하게 합니다. 요것이 그대로 담긴채 제가 죽었다고 봅시다. 죽었다고 보고 그대로 천국에 올라가게 되면 우리는 면류관도 그대로 도로 반납하면서, “내가 지금까지 한 것은 다 주님의 은혜며, 오직 영광받으실 분은 우리 주님밖에 없습니다”가 유지되는 것, 그것을 두자로 천국이라고 합니다. 참 모든 사람으로 무릎을 꿇고, 주의 이름만 높임으로 말미암아 아버지께 영광이 되는. 빌립보서 2장 11절. 그게 천국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이 와서 날마다 나를 낮추시고, 날 위해 죽으신 십자가의 피만 높이는 그것이 교회죠. 그게 교회죠. 그 교인이 어디에 박혀 있는지 저는 모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그 교인이 어느곳에 있든지 하나되게 하고 계십니다. 뭐만 쳐다보면서? 자기를 쳐다보면서? 아닙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만 쳐다보면서.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되게 함의 의미를 알았습니다. 우리 중심의 하나가 아니라, 내 교회중심의 하나가 아니라, 내 가족중심의 하나가 아니라, 예수님 십자가중심의 하나됨을 알았사오니, 이제는 자기중심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늘 성령께서 자기를 부인케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