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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Re..광주 강의(2006. 6. 23) 16-2강의고린도후서

Re..광주 강의(2006. 6. 23) 16-2

이름 : 서경수(IP:)

광주 강의(2006. 6. 23) 16-2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그리스도가 오셨고,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라는 말은 결국 인간 세계를 부수기 위해서 오셨죠. 왜냐하면 아까 고린도후서 5장 5절에 보니까 “모든 이론을 파하며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라고 되어 있으니까요.

결국 예수님이 나타났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를 보냈다는 것은 인간세계를 전부 심판하기 위해서, 인간세계를 완전히 괴멸시키기 위해서 오신거지요. 모든 인간의 높아진 것을 다 사로잡아서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한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기에 복종해야 하는가 하면, 이사야 53장 5절을 보면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예수님께서 어떤 행동을 취하는데, 그분이 찔림을 받는 행동을 한 거예요. 왜 찔렸다?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이것을 알고 있는 분이 하나님과 예수님입니다. 다른 사람은 아무도 몰라요. 성령이 와야 알지요.

하나님은 예수를 보내셔서 ‘너는 찔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찔려야 하는 것은 우리에게 허물이 있기 때문이고, 예수님이 찔림을 통해 우리의 죄인 됨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를 계속 우리에게 들이 된다는 말은, 계속 우리의 허물을 발취해 내고 고발하는 그러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같은 말인데, “그의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사53:5)
그러니까 우리 죄는 내가 죄인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아는 것이 아니고, 그분이 상하신 것을 봐야 우리가 죄인인 것을 압니다. 예수님의 제자 도마는 뭘 보고 예수님을 믿었습니까? 예수님의 옆구리에 창 자국과 손의 못 자국을 보면서 “주여, 나의 구세주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뜻이지요. 이사야 53장의 그분 맞군요.

그래서 진짜 메시야를 기다리려면 이사야 53장대로 하신 분을 고대해야지요. 그렇게 한 분이 누가 있습니까? 누가복음 2장에 보면 나오지요. 시므온 그리고 과부 된지 84년 된 여 선지자 안나가 아기 예수를 안고 “주제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29절) 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이사야 53장에 의하면 메시야가 오게 되면 비로소 우리가 왜 스스로 구원되지 못하는 죄인인가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를 죄인 되게 하신 분, 내 대신 찔리고 상한 그분이 오기를 고대하는 사람들이 있었단 말이지요. 그것이 예수님 오시기 전의 성도라면, 이미 예수님 오시고 난 뒤에 사도 바울이 교회라고 부르게 될, ‘너는 그리스도의 몸이야’ 라고 부를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이미 십자가 진 그 십자가의 의미를 자기의 존재와 결부시키는 사람, 그 사람이 진정 오실 메시야를 기다리는 하나님의 구원 받은 백성입니다.

십자가의 의미를 알아서 그 앞에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게 된 즐거움. 좀 이상하지요? 자기가 죄인인 것을 깨닫는 데서 오는 어떤 희열과 기쁨. 바로 그것을 위해서 그리스도를 떠나지 않지요.

제가 성경공부 할 때나 우리교회에서 설교할 때도 늘 하는 이야기입니다. ‘제발 예배에 빠지지 말고 좀 오세요.’ 라고. 왜? 복음을 들어야 자기 죄인 됨을 압니다. 만약 복음을 안 들으면 여러분은 훌륭하고, 대단하고, 이 세상에서 잘 난 사람 됩니다. 그러면 그 기쁨이란 것은 영적인 기쁨이 아니고 자기 잘난 맛에서 나오는 기쁨이기 때문에, 이것은 라캉의 이론에 의하면 ‘상징계’에서 노는 것이 돼요.

‘상징계’의 특징이 뭐냐 하면, 처음에는 그 상징과 자기 욕망이 일치 된다고 생각했는데, 얼마 안 가서 이게 합치가 안 되고 뭔가 다르다는 것을 알 때, 거기에서 결핍을 느끼면서 또 합치된 것을 찾기 위해서 헤매게 되는 것입니다.

‘딱 저 사람이 내 아내야’ 라고 여겼는데, 이것이 헐거워지지요. 이제 적당한 사람 없는가 또 찾아다닙니다. 도시의 사냥꾼처럼. ‘저 사람은 딱 내 남편이야’라고 여겼는데, ‘아니야. 다른 남자로 바꿔야지.’ 이렇게 헐거워 진다구요. 이게 모든 것이 다 그래요.

그래서 마음속으로 간음한 것도 ‘간음죄다.’ 라는 이 말은, 결국 어떤 인간도 최종적인 실체와 자기가 합치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전부다 헐거워집니다. 맨날 ‘실제계’ 실제계라는 말은 거룩을 말합니다. 완벽한 거룩, 완전한 의. 완전함에 늘 지적을 받습니다. ‘네가 붙들고 있는 너 자신이 과연 너와 합치되었다고 생각하느냐’고 늘 지적 받지요.

그래서 심지어 라캉이 이런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두려워하는 것은 두려움이 아니고 진정한 기쁨이다.’ 이런 이야기했어요. 복음도 모르는 철학자가 이런 소리를 했어요.
이런 것은 라캉을 인용하는 철학자의 입에서 나오지를 않아요. 그럼 누구냐? 바로 라캉을 볼 때, 복음적인 사람은 그 사람의 이야기 중 복음적인 것을 끄집어내지요.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뭐 눈에는 뭣만 보인다고.’ 복음을 아는 사람은 이것이 복음적이냐를 보고, 복음을 모르는 사람은 땅의 것을 생각해서 그 사람의 이론이 얼마나 정확하냐 그런 것을 봅니다.

어쨌든 사도 바울은 뭐든지 그리스도 십자가 중심으로 보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오신 것은 모든 이론을 다 부수고 오직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그것을 참된 권세다 그렇게 봅니다.

그 다음에, 이런 수고를 쭉 한다고 하고 10장을 넘어갑시다. 그 뒤의 이야기는 바로 “내가 지금 그런 입장에서 너희에게 다가간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너희들은 그것을 뭘로 본다? 나의 영적인 일을 모르고 육적으로 보기 때문에 뭐라고 하는가 하면, ‘편지 쓸 때는 굉장히 힘 있게 보이더니만 실제로 대해보니까 말도 시원찮고 그러네.’ 이 따위 식으로 육체로 평가하는 것입니다.

우리교회 나오는 김대식 씨를 보면 목소리가 너무 좋아요. 쫙 깔리는 것이. 그렇데 실제로 봐도 중후해요. 만나본 적 있지요? 없어요. 그분은 십자가마을 수련회에 참석을 못합니다. 왜냐하면 돈이 없어서. 너무 너무 가난하기 때문에.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해 드릴게요. 뭐냐 하면, 어떤 청년이 다른 청년에게 제 책을 주면서 복음을 전했더니, 그 청년이 제 책을 보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쪽 회사에 속한 사람들이 그 얘를 이용해 먹는 기획사가 있어요. 그 얘는 기타치고 노래하는 가수인데, 그 기획사가 고소하기를 내 [지옥의 하나님]하고 전부다 고소를 하려고 한 거예요. 고소가 됩니까? 그게. 누구 누구를 지적해서 명예훼손을 했으면 몰라도 [지옥의 하나님]에서는 모든 인간들이 지옥 간다는 그것이 고소거리가 됩니까?

그래서 그 사람들이 [지옥의 하나님] 책을 자신들은 어려워서 모르니까 김진홍 그쪽에 가서 이 책이 어떤 문제가 있는가를 평가해 달라고 했데요. 제가 그 소리 듣고 기뻐했어요. ‘그런 기회를 통해서 책이 또 읽혀지는구나.’ 하고.

하여튼 육체로 생각하는 사람 때문에 미치겠어요. 십자가라는 것은 모든 인간의 허물과 죄를 고발하는 것인데, 그러면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알면 되지, 더 이상 뭘 또 거기서 이것을 딛고 위대한 사람, 착한 사람 되려고 왜 그런 짓을 하느냔 말이지요. 죄인이라고 지적하면 그런 줄 알면 될 터인데.

고린도후서 11장을 봅시다.
2절에 보면 “중매”한다는 말이 나오지요. 이 이야기가 역시 이사야 54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사야 54장 먼저 봅시다. 이제 이렇게 이사야를 보는 이유는 아까 모세로부터, 선지자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내야 한다고 했지요.

이사야 54장 4-5절에 보면 “두려워 말라 네가 수취를 당치 아니하리라 놀라지 말라 네가 부끄러움을 보지 아니하리라 네가 네 청년 때의 수취를 잊겠고 과부 때의 치욕을 다시 기억함이 없으리니 이는 너를 지으신 자는 네 남편이시라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시라”

여기에 “너를 지으신 자는 네 남편이시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여인은 어떤 여인입니까? 54장 1절에 보면 유명한 말이 나옵니다. “잉태치 못하며 생산치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이것이 갈라디아서에도 나오는 이야기 아닙니까? 두 언약을 이야기하면서 나오지요. 여러분들은 잘 기억 안 나겠지만 목사는 기억납니다.

잉태치 못하고 생산치 못한 여자는 사무엘상에 나오는 한나에 의하면 사무엘 낳기 전에 구박을 많이 받았지요. 왜냐하면, 자식을 못 낳으니까 저주를 받았다는 거예요. 자식 못 낳는 여자는 저주받은 것이란 말이 어디에 나옵니까? 창세기에 나오지요. 아비멜렉 가문에 태가 닫히지요. 그럴 때 누가 기도했습니까? 아브라함이 기도하니까 자식을 낳게 되었잖아요.

그러니까 자식이 없다는 것은 곧 저주 받은 여인이고, 축복을 받으면 다시 하나님의 기운이 작동해서 자식을 낳는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이사야 54장에 보니까 하나님의 진짜 백성이 잉태치를 못해요. 그러니까 남들 보기에는 저주 받은 모습이지요.

여기에서 어려운 것이 뭐냐 하면, 구원 받은 성도는 착한 사람이 아닙니다. 저주 받아야 될 사람의 대표자지요. 뭘 대표하는가? 저주 받을 자가 마땅히 저주 받아야 된다는 사실을 남편 새로 만나서 새롭게 인식하게 된 사람들이 성도입니다.

잉태치 못한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길 수 있는 사람, ‘그래, 나는 저주받아도 싸. 지옥가도 당연해.’ 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진짜 구원된 남편을 만난 사람들에 한에서만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얼마나 어려워요?

예수 믿는 사람이 농사가 잘 안 됐다. 돼지를 키우는데 돼지가 죽었다. 이것 때문에 주님에게 대들고 반발하고 그러면 안 돼요. 이것은 성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을 지라도, 포도나무에 소출이 없을지라도 나는 구원의 하나님으로 즐거워하며.’(합3:17)

그렇다면 자기가 못난, 부족한 것을 통해서 뭔가 즐거움이 나왔다는 것은 내 남편 있다는 뜻이에요. 내 남편이 있고 그 남편은 현재 남들 보기에 내가 저주받았다고 하는 그것마저 극복할 수 있는 남편이라는 것입니다.

“잉태치 못한 자여” 그 다음에 뭐예요? “노래할지어다”
이것이 완전히 육체를 극복한, 자기 육체조차도 능가한 사람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육체로 봐서는 너보다 뛰어난 것이 없지만 영적인 남편이 옴으로 말미암아 내 모든 육체의 한계를 뛰어넘어 나는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었다. 그리고 신부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중매하려고 한 거예요. 고린도후서 11장 2절에서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그 다음 3절에 보면, “뱀이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케 한 것 같이” 이렇게 되어 있는데, 여기서 뱀이 하와를 유혹할 때, 이 뱀은 마치 뭣과 같은가 하면 여인들이 유혹받고 싶어 하는 남편처럼 행세했다는 것입니다.

전도서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지혜를 깨닫는 자가 남자 중에는 천명에 한 명 있었는데, 여자에게는 없다(전7:28)’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요즘에는 서울대학 수석도 여성이고, 사법고시 수석도 여성이고 여성들이 많은데, 전도서에서는 왜 이런 말을 하는가 하면, IQ나 공부 실력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고, “여성 = 유혹에 약한 존재”로 보고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남성보다는 여성이 유혹에 약하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여성에게 유혹이 더 강해서가 아니라, 유혹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성들을 약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약한 여성을 남성이 보호해야 한다고 합니다.

제가 남성의 입장에서 여성들을 보면서, 여성과 남성의 차이점이 뭔가 보니까 여성들은 잘 울어요. 그것이 제게는 굉장히 신기하게 보입니다. 분명히 남자 같으면 울음이 안 나오는데, 저는 아버지 돌아가셔도 울지 않고, 울지 않는데, 제 아내는 남의 장례식에 가서 다른 사람이 울면 따라 울어요.

이것은 말릴 수가 없어요. 아마 여성은 그렇게 눈물을 흘려야하는 존재인가 봐요. 그런데 그것이 남성들로 하여금 어떻게 보여 지는가 하면, 보호 본능을 유발시켜요. 저 눈물을 닦아 주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이렇게.

여성들은 무슨 일이 잘 안 될 때 울면 일이 풀리고. 남성들 같으면 우는 것이 전략이 될 수 있겠지만 여성은 전략이 아니라 그냥 자연스러운 현상이니까, 남자들은 “그래, 그래 해 줄게” 이렇게 보호를 받게 돼요.

그래서 여기에서 여자가 유혹받기 쉬운 존재로 태어났다는 말은, 여성은 홀로 존재하는 자가 아니고, 여성이 있다는 것은 반드시 그 배후에 남성이 있어야 한다는 그러한 관계성으로 인해여 창조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남편이란 말은, 반드시 남편 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남자, 여자의 관계를 통해서 구현할 수 있지요. 다시 말해서 여성이 뱀에게 유혹 받았다는 말은, 예수님이 남편일 때만 든든하다는 뜻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남편이 아니라면 항상 모든 인간은 뱀의 유혹에 계속해서 넘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남편으로 했을 때, 그러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4절에 보면,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여기에서 “잘 용납하는구나”라는 말은 비꼬는 말이지요. ‘잘 논다. 잘 놀아.’ 이런 식이란 말이지요.

한국 교회가, 어떤 사람은 저와 대화를 할 때 대화가 안 되는데 그 이유가 뭔가 하면, 나는 한국 교회를 이단이라고 간주하고 말을 하는데, 상대는 잘만 하면 개혁하고 바르게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한국 교회를 이야기해요. 그러니까 이야기가 안 되는 거예요.

이근호 목사 당신은 자꾸 한국 교회를 이단이라고 하는데 왜 이단이냔 말이지요. 바르게 하려고 하고, 옳은 설교 하려고 얼마나 노력하고, 잘못된 부분을 개혁하려고 애쓰는데 왜 이단이냐는 것이지요.

제가 보기에는 이왕 있는 교회를 몽땅 버리려고 하니까 너무 아쉬워서 그런 말을 하는 것으로 저는 이해를 합니다. 광주 시내 뾰족탑 있는 것이 다 이단인 것 같으면 내가 생각해도 너무하지 않느냐 이 말이지요.

제 주장은, 십자가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다 이단입니다. 갈라디아서 1장 8절에 나오잖아요.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천사라 할지라도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이것은 교회가 천개가 있든 만개가 있든 양보할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월드컵에 출전한 선수들이 굉장히 많아요. 100명도 훨씬 넘습니다. 그 중 대한민국 선수는 11명 뿐입니다. 그런데 다른 나라 선수들을 자꾸 우리 선수라고 우기는 거예요. 제 주장은 그들이 축구선수인 것은 맞는데, 우리 편은 아니라는 말이지요. 우리 편과 다른 편의 차이는 뭔가?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했으니까 그 기준을 갖다 대자는 말이지요.

그런데 저쪽 사람들은 뭐냐 하면, 기준을 없애버리고 많은 교회가 있으니까 이 교회를 잘 하면 이왕 있는 교회 다 천국 간다고 격려를 해 주고 긍정적으로 바라보자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일반 목사들이 절에 다니는 사람 교회 데려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습니까? 새벽마다 기도하지요, 심방 가지요, 취직 시켜주지요 --- 이렇게 교인 한 사람 만들기 위해 얼마나 애를 많이 썼습니까. 그런데 그런 식으로 데려온 목사도 이단이고, 온 사람도 이단이라고 하면 그동안 수고한 것이 너무 아깝잖아요.

예배당하나 짓는데 집을 얼마나 팔아야 되고, 돈을 얼마나 내야 합니까? 보통 수십억 들어요. 다 귀한 돈이잖아요. 이렇게 힘들여서 큰 교회 만들었는데, 이들에게 이단이라고 하면 그동안 돈 내고 수고한 것이 아깝잖아요. 그러니까 이단이란 소리 하지 말고, 이런 식으로 바꾸시면 이단 아닙니다. 이런 식으로 해 달라는 것이지요.

저는 그렇게 하지 말고, 이단이라고 해 놓고 시작하자는 것입니다. 이단인데, 웬 은혜인지 십자가가 왔다는 식으로 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쪽에서는 이것이 아니고, 이단은 아니고 잘 해 보려고 하는데 십자가 은혜로 정말 잘 되었다. 이런 식이예요.

한국 교회 강단에서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이단이다), 십자가가 너희 눈앞에 보이거늘 누구 너희를 꾀더냐? 라는 그 복음, 성도는 십자가 안에 있고 세상 사람들은 십자가 밖에 있다고 전하는 그 복음을 강단에서 전하게 되면 이거는 누가 와도 그렇게 해서는 목회가 안 됩니다. 다시 말해서 목회, 교회가 불가능해요.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교회가 불가능하게 하는 방식이 복음적 방식인데, 교회가 불가능한 방식 말고 가능한 방식으로 고치면, 교회는 되는데 문제는 이 교회가 다른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지옥 가는 이단입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방식은 다 불가능한 방식입니다. 여리고 성 무너지는 것도 불가능하지요, 홍해가 갈라지는 것도 불가능하지요, 성경에 나오는 하나하나가 다 불가능해요. 심지어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을 뭐라고 합니까?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 누가 할 수 있습니까? 안 되거든요. 그런데 주님은 된다고 하세요. 어떻게 되는가? 낙타를 바늘구멍으로 통과시켜요.

우리 주님은 덩치 큰 낙타를 바늘구멍으로 넣는 작업을 하고 계십니다. 어떻게? 복음만 전하면서.

그런데 저쪽 사람들은 바늘을 크게 만들어서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해요. 누구나 다 들어가도록. 복음을 비켜서라도 다 들어가도록. 교회 와서 세례 받고 성찬식 참석하면 다 천당 가는 것으로. 이것은 몽땅 이단입니다.

다른 영, 다른 복음, 다른 예수 전부 같이 나오잖아요. 이것이 뭐냐 하면, 뭐가 약령이며, 뭐가 다른 예수냐? 그것은 복음이 다를 때는 다른 영이고, 복음이 다를 때는 다른 예수입니다. 전부 다 예수, 예수해요. 사단들이 심지어 고린도후서 11장 13절에 보면,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해요.

14절에 보면,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낙타를 바늘구멍 속으로 집어넣는 일을 한다면 사단도, 아까 사단이 하와를 유혹하잖아요. 지금 예수님의 남편이 아닌 사람은 모두 사단의 유혹 속에 빠져든 사람입니다. 따라서 사단이 하와를 유혹할 때, 이 활동이 지금도 계속 됩니다.

여러분, 가인의 동생 이름이 뭐지요? 아벨이지요. 아벨이란 뜻이 뭔가 하면 ‘허무’입니다. 정말 이름 잘 지었어요. 아벨은 가인에 비해서 너무 허무한 인생을 살았어요. 그런데 가인은 아주 화려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창세기 4장을 보면 거대한 도시를 이루었고, 그 도시는 바로 마귀가 광야에서 예수님께 제공하겠다고 제시한 그 도성입니다.

광주를 봐도 그렇고 대구를 봐도 그렇고 현재 이 세상에는 무엇을 건설하기 위함입니까? 도시 문명을 건설하기 위해서 월드컵도 하고 다 하잖아요. 지금 몇 시입니까? 지금부터 다 모여 있다고. 경기 시작하면 다 졸다가 한 골 넣으면 ‘대 ~한민국’하고 떠들고. 화장실에 가는데 2시간씩 줄 서고. 그게 도대체 뭡니까?

이러면서 그곳에 가는 이유가 뭔가?
제가 언젠가 그런 이야기 했어요. 사람들이 구원 받기를 싫어해요. 자기 힘으로 구원되기를 원하지 누가 구원해 주는 것을 원하지 않아요. 구원해 준다고 하면 도망갑니다.

구원하겠다는 것이 요즘 얘들 밥 먹이는 것 하고 똑같아요. 숟가락 들고 따라다니면서 밥 떠먹이고 아이들을 계속 도망 다니고. 먹여줘도 안 먹어요. 왜냐, 그들에게 익숙해진 유혹이 따로 있어요. 그들의 육체를 즐겁게 하는 유혹, 그것은 왜 그런가 하면, 그들이 유혹을 원해서가 아니라 이미 마귀와 친구가 된 이상은 마귀의 굴레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마귀를 벗어나서 천하의 죄인인 예수님과 한 통속이 된다? 이것은 죽었으면 죽었지 이것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힘으로는 육체가 영이 될 수 없습니다. 니고데모가 아무리 찾아와도 육체가 영이 될 수 없어요. 성령이 와야 돼요. 니고데모는 천국을 보기를 원했지만 예수님이 제시한 것은 천국이 아니었습니다. ‘독생자를 주셨으니’ 자기 자신입니다. 천국을 보고 싶어 하는 자에게 예수님은 초라한 자기 몸을 내 비치면서, 내가 아니면 넌 구원 못 받는다는 것입니다.

네가 선생인데, 선생이면 뭐하냐? 아무리 구약 성경을 달달 외워도 소용없어요. 지금 눈 앞에 보이는 예수님을 모르는데. 이것은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도 마찬가지에요. 같이 이야기하면서도 몰라요.

그래서 예수님을 육체로 알면 안 돼요. 예수님의 사진 이런 것 다 거짓말입니다. 그것은 육체로 아는 거예요. 구름 사진 찍어서 이것이 예수님 얼굴이다. 수염이 나고 눈빛이 날카롭고 -- 이런 것은 다 육체로 아는 거예요.

하여튼 마귀는 예수님을 육체로 변경시키기 위해서 온갖 수작을 다 부립니다. ‘예수 믿으면 이런 효과 본다. 효과 있으면 예수 믿고 없으면 믿지 마라.’ 전부 거짓말을 하는데, 예수님은 우리를 죄인으로 만들면 그것이 예수님 효과입니다. 딴 게 없어요.

예수님이 우리에게 쌀 한 포대 더 주고, 빵 몇 개 더 주고. 이것이 예수님이 주신 축복이 아니라, 나를 죄인으로 들통 나게 하는 그것이 예수님의 역사입니다.

제가 아까 말했지요. 어떤 목사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왜 내 딸을 죽였습니까?’라고. 딸 죽이는 것이 예수님의 일인 것을 그 목사가 좀 알았으면 좋겠어요. 자기 마누가 영양실조 걸려서 빌빌거리는 것이 주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을 좀 알았으면 좋겠어요.

사도 바울은 얼마나 고생했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이 예수님 부인했습니까? 아닙니다.

여기 15절을 다시 보면,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여기에서 ‘큰 일이 아니라’는 것은,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보편적인 현상이라는 말이지요.

그리고 이것이 교회라고 해서 마귀가 침투 안 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선점하지요. 기독교 문화로 도배를 해도 마귀는 얼씨구나 하고 들어옵니다. 기독교 문화로 방어할 수 없습니다. 다른 말로하면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해도 마귀가 침투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마귀의 유혹을 못 이깁니다.

주님께서 성도에게 마귀의 유혹 가운데 두신 것은 성도로 하여금 죄인 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작전입니다. 아까 그 목사처럼. 그 봐 너 죄인 맞잖아. 그 목사가 구원 받은 자라면 알겠지요. 딸 죽었다고 이게 무슨 행패야. 마치 얘들 가지고 있는 과자를 빼앗으면 얘들이 뭐라고 합니까? 땅바닥에 앉아서 막 울고 행패를 부리지요. 그 목사가 그 짓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사도 바울은 떼를 쓰고 행패를 부리지 않았는가? 안 했지요. 23절에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바울이 수고를 넘치도록 했는데, 그 결과가 뭡니까? 보너스를 받았습니까? 아닙니다. 수고했는데 옥에 갇히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고, 거짓 형제의 위험, 이것은 배신당하는 것입니다.

배신당하는 것으로 말하자면 저도 할 말 참 많습니다. 복음을 실컷 전했는데 ‘왜 나의 잘남을 안 알아주는가?’ 이렇게 나옵니다. 왜 나를 잘났다고 인정 안 해주는가? 나는 당신이 죄인이라고 이야기했는데 저쪽에서는 나 훌륭하지요? 라고 하면서 자신을 인정해 달라는 거예요. 동문서답하고 있더란 말이지요.

27절에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아마 사도 바울의 어머니가 살아 있었다면 환장할 것입니다. 자기 자식이 예수를 믿어서 완전히 사람 버려놓았어요.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염려할 수밖에 없지요. 모든 교회에 마귀가 다 들어와 있으니까. 어느 교회 할 것 없이 전부다 마귀가 차지하고 있으니 염려되지요.

그 마귀가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바울은 이단이다. 거짓 사도다.’ 이것이 11장에 나오지요.

그래서 두 번째 편지에서, ‘내가 이단이 아니고 그들이 이단이다.’고 썼습니다.
교인들은 헷갈리지요. 서로 이단이라고 하니까. 그러면 가위 바위 보로 정할까요?

그것이 12장에 나옵니다. 가위 바위 보를 해서 누가 이단인 것을 정하는 것이 아니고, ‘누가 약하면서도 자기 권리를 안 주장하면서도 오직 복음 전하는 것 그 자체를 즐거워하는 자가 누구냐’를 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12장에 나오는 내용인데,

11장 20절을 먼저 봅시다. “누가 너희로 종을 삼거나 잡아먹거나 사로잡거나 자고하다 하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하면, 너희 자체가 마치 뱀을 불러들일 만한 그런 성향을 가지고 예수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너는 진짜 사도와 사도 아닌 자를 구분도 못하는 그런 판단력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거짓 사도들이 너희들을 지배하고 잡아먹고 사로잡고’ 이 대목을 볼 때, 저는 상상을 해 봐요. 김 집사님 붙들고 뜯어먹고, 잡아먹고, 푹 삶아서 고아먹고 --
이 표현은 마치 이리가 사정없이 탐욕스럽게 먹이를 뜯어 먹는 장면을 연상케 하잖아요.

지금 목사들이 교회를 뜯어 먹어도 ‘할렐루야!’ 이러고 있어요. 이단인 줄도 모르고. 심지어 뺨을 칠지라도 해해거리고 있더란 말이지요. 그 이단에게.

그러면 사도는 어떤가?
사도는 그냥 섬기고, 염려하고, 기도 해주고, 값없이 오직 복음만 전하는데.

그러니까 가짜는 군림하는 자이고, 진짜는 섬기는 자이고.
그런데 인간들의 심리는 섬기는 자는 가짜로 보고, 군림하는 자는 진짜로 보고.
환장할 노릇입니다. 그러니 염려 안 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자랑한 것이 뭐냐 하면,
사람들은 자기를 내세우고, 위장하고 하면서 자기의 성과, 성과라는 것이 뭐냐 하면 일반 교인들이 육체로 그렇게 되었으면 하고 기대하는 것 있잖아요. 하나님의 기적이 이러이러해야 기적이다. 이렇게 우리교회가 부흥 될 때 하나님 살아 계시다. 고 하는 나름대로의 인간들의 욕망이 있다고요. 이런 욕망들을 가짜들이 미리 체크를 해서 내가 바로 그런 욕망을 실제로 실행시킨 그런 위대란 주의 종입니다. 라고 나오니까, 사람들이 대 환영을 하는 것입니다.

장로들이 목사 뽑을 때 이력서도 보고 하잖아요. 그것은 다 좋아요. 좋은데, 장로들이 묻는 게 뭐냐 하면, ‘목사님 오셔서 얼마나 부흥시키고, 얼마나 헌금 나오게 할 것인가?’ 이것을 묻는다니까요. 당신이 와서 얼마나 이 교회를 부흥시킬 것인가? ane고, 그것을 요구해요. 그 장로들은 이 교회 세운다고 자기 집을 팔았고, 땅도 팔았고, 자식들 줄 것도 아끼고 절약해서 지었는데 당신이 와서 부흥시키지 못하고 껍질만 남으면 내 위신이 말이 아니니까 내가 당신을 채용할까 말까를 결정하는 것은 내가 세운 이 교회에 당신이 와서 꽉꽉 채울 것을 원한다. 이런 식이니까 그에 짝짜꿍이 되어서 ‘제가 와서 2년 내에 300명 채우겠습니다.’ 이렇게 나옵니다.

화평교회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내가 어떻게 세운 교회인데 이상한 목사가 와서 본토박이는 하나도 없고 멀리서 2시간씩 걸려서 나오는 사람이나 있고 ---

그들이 오히려 이단을 요구하고, 이단을 주의 종으로 간주하고 상대적으로 주의 목자를 천대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여기에서 분통을 터뜨리는 거예요. 고린도후서의 편지가. 악마와 주의 종도 분별 못해서 되겠느냐는 것이지요.

그래서 30절에서 “내가 부득불 자랑할지니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왜 약한 것을 자랑할까요? 약한 것을 자랑하면 자기의 겸손을 자랑하는 것이 되는데 왜 약한 것을 자랑할까요? 그리스도가 다 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말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보라고. ‘내 봐라. 약하잖아. 그래도 나 구원 받았잖아.’ 이런 뜻입니다.

이게 육체로 하면 안 보입니다. 영에 속한 성도 같으면 동감을 나타내요. ‘그래 저 사도가 이야기하는 주님이 어떻게 내가 생각한 주님과 똑 같노.’ 하면서 동감할 것이고, 그렇지 않은 자는 ‘주님이 살아계시면 너를 강하게 해야지.’ 이렇게 나옵니다. 저쪽에서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면 왜 빌빌거려요. 왜 몸이 약해. 건강해야지.

이제 해답 나왔습니까?
제가 답변을 달면 이렇게 달고 싶어요.
회개가 뭔지 몰라요. 예수님을 육체로 아는 거예요. 성령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거꾸로 한다는 것을 몰라요. 예수님 계신 세계가 십자가 세계 아닙니까. 이 십자가는 세상 사람들이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았잖아요. 그러면 예수님과 함께 모인 사람은 어떤 기질을 가지고 있는가 하면, 세상 사람들이 다 하기 싫은 것, 되기 싫은 것, 절대 되고 싶지 않은 것 이런 것이 여기에 다 꽂히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이 기피하는 여기에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고, 그리스도의 성도가 있다면 이 성도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는, 바로 이들이 현제 추구하고 목적하고 원하는 것이 결코 그리스도의 뜻이 아닌 것을 알지요.

지금 사도 바울은 뭐라고 합니까?
나는 강하다, 아니면 약하다? 나는 약하다. 약한 나도 주님에 의해 강해 졌는데, 너희들은 강한 것을 더욱 더 강하게 하려고 하니까 그리스도가 소용이 없어요. 그리스도의 공로를 점점 더 갈아먹는, 말만 그리스도지 사실은 자기의 모든 것을, 약자가 되기 싫어하고 강자가 되려는 자기 욕망의 화신들입니다.

이런 욕망의 화신들에게 주님께서는 주의 종들을 어떻게 보느냐? 욕망의 강자를 추구하는 그들에게 약자를 파견하므로 말미암아 진짜 그들을 장악하고 있는 사단의 일군의 정체를 드러내는 것이 주님의 전략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전략이기 때문에 세상에서 이단들이 활동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박수를 보내야 합니다. 왜? 그들이 자꾸 강한 것을 추구할 때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된다는 것이 더욱 감사하게 되잖아요.

그리고 그 사람들이 강해지는 것과 예수님이 강한 것이 어떤 차이가 있느냐를 사도 바울이 약해지면 약해질수록 점점 더 차이성이 잘 나타날 수가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말이 좀 어렵지요?

무슨 말인가 하면, 저쪽에서 강한 것을 자랑할 때에 같은 질의 강한 것으로 자랑하면 어느 쪽이 사단인지 구분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저쪽에서 강한 것을 가지고 나올 때에 사도 바울은 그쪽에서 말하는 강한 것에 비해서 너무 약한 것을 가지고 가면서 진짜 강한 것을 내세웁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12장에서 ‘내가 부득불 자랑하는데 너희들 셋째 하늘에 올라가 봤나?’ 이렇게 나옵니다.

이것이 의미가 있어요.
조금만 더 하고 쉽시다.

4절에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다’고 했지요.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까 말을 해야 됩니까, 말 못합니까? 말 못하지요. 천국에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까 어떻게 그것을 옮깁니까? 옮기지 못하기 때문에 어떻게 옮겼느냐 하면, 사도바울은 이렇게 매 맞고, 쪼다 되고, 약해도 ‘나 괜찮아’라는 말로 표현한 것예요. 이해되십니까?

자기가 받은 천국의 기쁨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말할 수 없기 때문에 말 안하는 것이 더 말할 수 없는 것입니까, 아니면 말할 수 없는 것을, 자기의 점점 더 약하지는 것을 통해서도 기뻐하는 것이 말할 수 없는 것인지, 어느 것이 더 강한 뜻이 되요? 바보 되고, 쪼다 되는 것을 통해서도 그 가운데서 허허하고 웃을 수 있는 정도로 말할 수 없는 것은 너무나 좋았다는 말입니다.

그것도 그냥 한 것이 아니라, ‘내가 부득불 자랑한다.’ 이것은 안 해도 될 이야기를 합니다. 하도 저쪽에서 이단들이 설치니까, 강한 것을 자랑하니까.
한 마디로 게임이 안 됩니다. 숫돌이 하고 브라질 대표팀 하고 축구하는 것하고 똑같은 거예요. 도무지 게임이 안 돼요.

사도 바울은 삼층천에 올라갔어요.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자기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신뢰할 만 하다는 것이며, 믿으면 저주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신 그 십자가 복음 안에서는, 그것을 믿는 자는 이 땅에서는 굶어 죽어도 행복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나처럼 굶고 매 맞아도 복이다.

조금만 쉽시다.

(2006. 7. 14. 13:51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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