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3:14-16 (계 3: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
Re..계 3:14-16 ( 미지근함 )
이름 : 이근호(IP:)
미지근함
2006년 7월 9일 설교 본문: 요한계시록 3:14-16
(계 3: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계 3: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계 3: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모든 것들은 다 의미를 잃고 사라져야 합니다. 우리가 평생에 걸쳐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 상관없이 십자가 앞에 서면 다 무효가 됩니다. 그리고 남은 것은 그 주님의 십자가를 우리가 또 지게 된다는 사실 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을 갑자기 고안해낸 아이디어가 아니라 ‘창조의 근본’이신 예수님께서 창세 전부터 계획 잡아 놓은 일입니다.
이 십자가 원리에 부합되지 아니하는 자는 예수님과 영원히 함께 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토하여 내치리라’고 보는 것은,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거절하고 배척하고 거부하고 싶은 대상자들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이라는 것이 이래도 흥, 저래도 흥, 하는 식으로 인간들의 기분에 놀아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에게는 단호한 고집이 있습니다. 거부해야만 하는 자는 마땅히 거부하십니다. 어떤 이를 주님께서 토해 내칠 때는 그만한 원리가 작동했기 때문입니다. 그 원리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오늘 본문 14절에 나오는 ‘창조의 근본’이라는 원리입니다. 사람들은 평소에 생활하면서 ‘창조의 근본’을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자기가 여기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신께서 자기를 만들어놓은 것이기에 새삼스럽게 다시 창조의 근본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이제 생각할 것은 오직 창조 이후 변화만 생각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 변화가 무엇이냐 하면 바로 발전과 진보를 위한 변화입니다.
그런데 끝까지 ‘창조의 근본 원리’를 가지고 인간에게 문제 삼겠다고 하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뜻은 이렇습니다. ‘창조의 근본’도 모르는 인간은 사정보지 않고 토해 내치신다는 겁니다. 함께 동거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보호 아래에 두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창조의 근본’은 모르고 오로지 ‘인간의 근본 본성’에만 집착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본성이란 바로 ‘미지근함’입니다. 인간들은 더운 물과 찬 물을 섞듯이 자꾸만 모든 것을 자신을 위하여 섞어버립니다. 그 한복판에는 오로지 ‘내가 살아남는 것이 나의 최종 존재 이유’라고 외치고 있는 중입니다.
인간이 근본은 예수님 위주가 아닙니다. 자기 위주입니다. 열왕기상 18:21에 보면,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 하니 백성이 한 말도 대답지 아니하는지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왜 사람들은 바알과 여호와 하나님 사이에는 머뭇머뭇 거릴까요? 그것은 ‘창조의 근본’보다 ‘인간의 근본 본성’대로 처신하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이렇게 되면 여기에는 그 어떤 ‘창조 근본’의 원리가 발생되지 않습니다. ‘창조의 근본’ 원리가 없으면 예수님과 영원히 동거할 수 없어 토해냄을 당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창조의 근본 원리’와 ‘인간들의 생존 원리’가 어떻게 다르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야고보서 2장에 보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더나아가서 ‘믿음이 있노라고 할 것이 아니라 행함을 통해서 믿음이 진짜로 있음을 나타내 보여야 한다’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행함과 오직 신앙인만이 특수하게 보여줄 수 있는 행함에 어떤 차이점이 있는가를 살려볼 차례입니다. 우선 야고보서 2장에서 신앙인만이 보여줄 수 있는 행함의 예를 다음 두 가지로 듭니다. 하나는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신앙이 있다고 인정받는 대목이요, 다른 하나는 기생 라합이 이스라엘 정탐꾼을 무사히 살려보낸 경우입니다.
둘 다 인간들이 자랑하는 윤리나 도덕에서 나온 행함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과 상관이 있을까요? 그것은 일방적인 하나님의 약속과 상관있습니다. 기생 라합은 정탐꾼에게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듣기는 소문에 의하면 그 진로를 막는 모든 민족으로 사정없이 다 진멸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으로부터 인도함을 받는 이스라엘이 이번에는 자기가 살고 있는 여리고성 마음에 까지 침투한 것을 봐서 그 여호와 하나님의 공격이 임박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기생 라합으로서의 할 수 있는 오직 하나의 행함이란 그 정탐꾼에게 호의를 베풀어서 그 여호와 하나님의 전쟁 중에 살아남는 일입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여호와 하나님에게 “살려 주세요”라는 고백을 하는 겁니다. 얼마나 놀라운 고백입니까! 즉 자기 종족이나 자기 땅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을 전제로 할 때만 나올 수 있는 외침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 앞에는 그동안 자신이 신경 써서 행한 모든 업적과 공적이 다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자진해서 자백하고 있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합당한 신앙에서만 나올 수 있는 합당한 행함입니다. 만약 신앙이 없는 자라면 이런 고백이나 행함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신앙이 없는 자들은 자기 존재성이 우선이기에 기존의 존재를 발전시키기 위해 계속해서 자기 자신의 의로움과 착함에 투자를 퍼붓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다음과 같은 마음자세로 무장하게 됩니다. “누구든지 나를 나쁜 사람으로 몰아세우면 용서하지 않겠다!”입니다.
과연 이런 마음 자세 속에, 십자가의 의미가 담겨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십자가란 모든 인간을 그 앞에서 의가 없음을 폭로시키는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그 십자가 앞에서 주님에게 “살려 주세요”라는 회개와 겸손 외에 다른 취할 태도라는 것은 나올 수가 없는 법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평소에는 사람들 앞에서 자기 스승이신 예수님을 자랑하고 시인했지만 막상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자,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사실을 두고 볼 때에, 참되게 예수님을 이해하는 사람은 십자가 앞에서 어떤 태도를 갖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창조의 근본이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그 십자가를 가지고서 예수님의 모든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십자가를 믿게 하시는 자만에 예수님과 하나가 된 참 아들인 것을 알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 사건으로만 이야기하시는 하나님의 취지로 인해 우리에게 인간적인 원리가 사라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우리교회
11-05-31 22:37
020강-계3장13-16(미지근함)-rev060709
설교:이근호 목사님
요한계시록3장13절에서 16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402페이지입니다.
『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아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졌다. 라는 그것으로 이 세상에 충분히 심판주로서 행세해도 된다 라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졌다는 말은 어떤 인간이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지냈는지 십자가 앞에서는 의미 없는 것으로 전부 다 싹쓸이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장마에 비가 왔을 때 지저분한 것들이 한꺼번에 다 쓸려 내려간 것처럼, 우리가 윤리나 도덕이나 찾고 있고 내가 착했느냐 못했느냐, 잘 살았느냐 못 살았느냐, 부자냐 가난하냐, 그러한 요건들이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 앞에서는 그게 다 논쟁거리가 되지를 않습니다.
의미 없는 거예요. 그런 거 다 무시당합니다. 아까 찬송가에 보면 「내 주의 지신 십자가 우리는 안질까 」이 가사의 의미는 이겁니다. 주님께서 십자가 졌을 때 그 앞에서 우리가 내세운다는 것은 이제는 의미 없는 것이고 주님이 지신 십자가가 나에게 덮쳐지는 걸로, ‘그걸로 만족해라’ 라는 말입니다. 그걸로 내가 살았다는 뜻도 되고 그걸로 내 인생은 확정됐다는 뜻도 되고.
내가 어떻게 살든 간에 하나의 십자가로서 작용한다는 결론을 맺은 것도 됩니다, 모든 일은 그르치다는 것이 십자가 앞에서 싹 없어졌다는 것은 우리 인생의 무거운 짐을 다 벗게 합니다. 다 벗어버리게 하는 겁니다. 그 십자가 지신 분이 계시록의 사도 요한에게 계시를 내렸습니다. 그중에 한 토막을 우리가 보고 있습니다. 십자가 지신 분이 뭐라고 하느냐 하며는, 「네가 이같이 덥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라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십자가 지신 분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토하여 내친다는 것은 안에 있던 건데, 더 이상 안에 두고 보기가 곤란해서 입을 통해서 바깥으로 추방시켜버린다는 뜻이에요. 너는 내 안에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것입니다. 너는 내 속에 들어올 수가 없다는 겁니다. 미지근하면. 왜 그렇게 예수님께서, 십자가지신 예수님께서 추방명령 같은 식으로 이야기 하시는가? 토해 내칠 때는 원칙이라는 것이 거기에 작동했다는 뜻입니다.
그냥 내친다는 것이 아니고 토해 내치면 ‘왜 저를 토하십니까?’ ‘무슨 근거에서 저를 토하십니까?’ 이렇게 따질 때에 너는 내 속에 함께 있을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러 이러한 것 때문에 있을 수 없는 거야, 그래서 토한다, 알았어? 가거라. 주님께서 그 사람과의 분리를 선언하는 겁니다. 저는 ‘십자가를 아십니까’라는 글을 쓰면서 이 대목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한국교회에 대해서 역겨워하신다는, ‘역겹다’는 토하고 싶다와 같은 뜻입니다. 그 역겨운 이유가 예수님과 함께 있으려면 예수님 안에서 작용하는 원리라는 게 있습니다. 그 원리가 일치가 되어야 주님과 함께 있는 건데, 주님과 함께 있다고 우기면서 함께 있는 원리에 위배되면 울렁증이 있어가지고 생리적으로 밖으로 쏟아져 나갈 수밖에 없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거역하는 거, 거부하시는 주님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이 본문 대하기 전에 얼마나 숙지하고 그걸 명심했는가 생각해봐야 합니다.
주님은 자비로우시다, 주님은 누구든지 용납하신다. 주님은 누구든지 안아주신다, 주님은 끄덕이면서 다 감싸주신다. 예수님을 그냥 마음 편한 이웃집 영감 정도? 그렇게 편하게 생각했는데 주님이 이렇게 성깔 있다는 걸 첨 알았어요. 주님 성깔 있어요. 용납할 수 없는 자는 용납 않겠다는 겁니다. ‘함께 있을 수 없다면 나가라’ 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한 토해내는 원칙을 발휘하신 그 근거가 뭐냐 하면,
오늘 본문 14절 끝에 보면,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이래 돼 있다고요. 창조의 근본이신이가 가라사대 토한다. 이래 나온 겁니다. 주님께서 어떤 사람을 ‘나 너하고 안 놀아’ 하고 토해내실 때는 어떤 원리가 작용하느냐 하면, 창조의 근본 원리에 위배됐기 때문에 나는 너와 동거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창조원리의 근본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 스스로 자인하는바지만 우리가 언제 장사하면서, 농사지으면서, 직장에 다니면서 창조의 근본에 대해서 생각합니까? 안 하잖아요. 손님 오면, ‘어서 오세요.’ ‘뭘 드릴까요?’ 이러지 ‘창조의 근본에 대해서 아십니까?’ 이것은 길거리에서 ‘도를 아십니까?’와 똑같은 거예요. 창조의 근본이라는 것을 우리가 생각 안 하죠. 왜냐하면 창조의 근본이라는 것은 이미 자기가 존재하고 있다는 자체가 ‘창조 끝’으로 우리는 간주하거든요.
이미 창조된 거, 설마 버릴까? 이미 신이 창조했다면 나는 이미 신의 딸이고 아들이다. 그렇다면 이왕 만든 거 버릴 리가 있겠는가? 그러니 더 이상 창조를 생각할 필요가 없다. 창조의 근본은 놓치고 뭐만 생각하느냐 하면, 창조의 변화만 생각해요. 변화만. 그 변화라는 것이 뭐냐, 보다 더 발전한 것, 진보한 것, 어제보다 더 나은 내일, 소망하는 것, 그저 변화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기껏 변화한다는 게 뭐냐, 오늘 본문에 의하면, 섞이고 섞여서 미지근해지는 겁니다. 주석가들은 말하기를 라오디게아 교회 근처에 보면 유명한 온천이 있다는 겁니다. 펄펄 끓는 온천. 그런 것에 빗대어서 뜨겁다고 이야기하고 그 온천물이 너무 뜨거워지고 닭 백숙할 일도 아니고 이러니까, 에베소에서는 아주 차가운 물이 나온답니다. 차가운 물을 뜨거운 물에 섞어서 적당하게 온천욕을 할 수 있도록 시설이 돼있어서 그걸 빗대어서 비유로 이야기한다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말하기를, 차갑다하는 건 냉담하다. 주님에 대해서 냉정한 거죠. 주님께서 차갑든지 뜨겁든지 분명히 하라는 말은 네 정체를 나타내라 이 말이죠. 네 본성이 뭔데? 너는 누구편이야? 자꾸 재촉하고 다그치는 의미가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신앙이 있다는 것은 예수님에 대해서 예수님이 창조의 근본이신 것에 대해서, 근본이신 주님을 알게 되었다는 자체에 대해서는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마치 온천처럼 부글부글 끓은 마음 자세로서 주님을 생각하면 그건 뜨거운 참된 신앙이고 예수님께서 창조의 근본이시라고 이야기해도 ‘뭔데? 어쩌라고~!’ ‘그게 뭐~야!’ (ㅋ) ‘그게 내 돈 버는데 보탬이 돼? 저리 안 갓?’ 냉담한 그걸 차갑다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우리가 이걸 알아야 되요. 창조의 근본이신 분이 토해내신다는 말을 하신 것은 것은 창조 때부터 토할 사람 따로 있고, 자기가 삼킬 사람이 따로 있다는 것을 분명히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시는 거예요. 왜냐면 창조 때부터 관여하신 분이기 때문이에요. 이것은 주님께서 자기 자식과 남의 자식을 구분할 줄 안다는 겁니다. 자기 속에 마귀의 자식이 들어있으면 울렁증이 생겨 본능적으로 토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히브리서 12장에 보면, 자기 백성과 아닌 자를 분명히 구분한다는 것이 나와요. 12절, 13절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은 아들이 있겠느냐, 아들은 아버지께 징계 받는 것이 정상적인 참여과정이라는 겁니다.
히브리서 12장 8절 9절,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징계 받고 살자 이 말입니다. 징계는 징계대로 받고 살기는 사는 대로 살자 이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참 아들에게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것은 자기 아들로 하여금,
피곤한 손과 연약한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히12:12-12』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바보등신 되는 거 싫어해요. 그래서 자기 아들로 하여금 징계를 통해서 하나님 아들답게 세우기 위해서 징계를 내리시는 겁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일관성 있는 일은 토해내치는 일에도 동일하게 작용해서 토해낼 수밖에 없는 자는 기어이 토해내시는 겁니다.
‘제발 좀 나가줘! 나에게서 나가줘!’이렇게 되는 겁니다. 누가복음 22장에 보면 예수님의 겟세마네기도 내용이 기록돼 있는데요, 저는 그 대목을 보면서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에서 땀방울이 핏방울 되게 기도했다는데요, 저는 기도 내용이 굉장히 궁금했었어요. 도대체 예수님은 어떻게 기도하시는지...예수님은 주기도문만 하시는지, 남북통일을 위해서 기도하시는지, 기도내용은 결론적으로 이어였습니다.
아버지와 저와 하나된 것 같이 아버지께서 찍어놓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 예수님 안에 내가 저희 안에 있게 하여 주옵소서. 그거 기도하려고 땀방울이 핏방울 되게 기도하시고 그걸 위해서 십자가의 잔을 마셔야 된다는 것을 위해서 기도하시고. 그게 기도내용이에요.
우리들은 예수님의 기도내용을 알았으면 그대로 접수해야 될 텐데, 그리고 왜 접수해야 되느냐 하면, 창조의 근본이신 주님께서 하신 기도거든요. 창조의 근본이신 주님께서 그런 기도 했다는 것은, 그 기도가 우리 속에 들어온다는 것은 이로써 주님과 나와 타인이 아니라 한통속이 되어서 같이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같은 원리 원칙하에.
그래서 우리 기도는 어때야 하느냐 하면, 나를 때릴지라도, 심지어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주님 안에 주님은 내 안에 있게 하여 주옵소서. 이런 기도가 우리 입에서 솔솔 흘러 나와야 됩니다. ‘주님이여, 함께 있게 하여 주옵소서’ 저는 오늘 본문 15절에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라고 돼있는데 여기, 행위에 대해서 오늘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믿음이냐? 아니면 행위냐? 아니면 반반 섞느냐,(ㅋㅋ) 섞으면 또 미지근하게 된다는. 예수님께서, 하나님 원하시는 창조의 근본 행위가 어떠한 행위냐? 그건 믿음에 따른 행위다 이렇게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는데요, 좋습니다. 믿음에 따른 행위가 어떤 행위냐? 이것은 오늘 본문에 의하면 이렇습니다. 창조의 근본 원칙을 모르면서 하는 행위, 이 행위는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행위고,
창조의 근본이 드러나는 행위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행위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만약에 창조의 근본 원리 원칙에 안 들어있는 행위를 보여주면 그 사람은 주님께서 구역질나서 토해내침을 당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해야 되요. 하나님 안에 있는, 예수님과 함께 있는 사람, 그러니까 하나님의 자녀죠? 하나님의 자녀만이 내 비칠 수 있는 행위가 어떤 행위며, 일반인들,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들,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
예수님을 믿지 않은 사람들, 정녕 창조의 근본을 모르는 사람들이 낼 수 있는 행위가 어떤 행위냐, 두 가지 행위를 대비하고 비교해보면 그 내막이 드러나겠지요. 궁금하지 않습니까? (무지 궁금함다,ㅋ) 보통사람이 끄집어낼 수 있는 행위하고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이 우리 안에 있을 때 하는 행위를 서로 대비함으로써 무엇이 미지근하고 무엇이 뜨거운 모습이냐를 궁금해 할 수 있다 이 말이죠.
일반인들이 행할 수 있는 그걸 윤리? 윤리라 하고요. 그걸 규범을 잡는 것을 도덕, 도덕이라 합니다. 그러니까 이 도덕과 윤리는 이것은 성령 받은 사람이 아니라 성령 받지 못한 사람들이 최후까지 기어이 내뱉을 수밖에 없는 것이 윤리와 도덕입니다. 이런 윤리와 도덕을 소위, 기독교에서 말하는 섞어보려고 하는 것, 이것이 바로 미지근한 거예요. 열왕기상18장에 보면 엘리야시대 나오는데, 엘리야가 백성들에게 유명한 말 합니다.
하나님이냐? 바알이냐? 언제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거리느냐, 하나님이 하나님이면 하나님 따르든지, 바알이 하나님이면 바알을 따르든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왜 머뭇거리느냐! 라고 굉장히 다그쳐요. 다그칩니다. ‘너희 정체를 폭로하라!’ 이 말입니다. 믿음에 대한 행함에서 유명한 것이 한국에 기독교 들어오고 난 뒤에 아직까지 써먹고 있는 것이 야고보서 2장에 나오는 겁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이건 한국 기독교 역사 150년 지금까지 써먹고 있어요. 야고보서 2장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니까 다른 건 믿음이라고 곱표치고 믿음이라고 하지 마라 말이죠. 행함을 통해서 그 믿음을 보이라! 이 말입니다. 만약에 행함이 가짜면 믿음도 가짜고 행함이 진짜면 믿음도 진짜라는 겁니다. 행함을 통해서 진짜 믿음인지 가짜 믿음인지 확실히 드러난다는 겁니다.
성령 받지 않은 일반인들이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윤리, 도덕을 가지고 믿음의 행함이라고 하면 그거야말로 가짜예요! 여기 행함에 대한 믿음에 대해 오해할까 싶어서 두 가지를 뽑아 놨어요. 진짜 믿음이 있는 한 가지 예는 뭐냐 하며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이삭을 드린 그 행위와 여리고에 있던 기생 라합이 하나님의 사자를 접대해서 다른 길로 거짓말해 빼돌린 것, 이것 가지고 의롭다함을 받았다 말이죠.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의롭다하는 것도 이삭을 산 제물로 바치는 그걸 통해서 ‘네가 행함을 보니까 진짜 믿음이 있구나’ 라고 환영받았고, 기생 라합의 경우도 자기 민족과 국가를 배반하고 자기 종족을 배반하고 이웃나라 스파이를 몰래 감추어서 무사히 자기 나라로 귀환케 하는 그 행함을 통해서 정말 믿음이 있구나, 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야고보서에 말한 행함이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고 했을 때,
진짜 믿음이나 아니냐 하는 것은 어느 행함에 종속돼야 하느냐면 기생 라합의 행함에 합류해야 되고 자기 아들을 죽인 아브라함의 과감한 행동에 합류할 때만 창조의 근본에 나타난 행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사례의 특징이 뭐냐 하면, 아브라함이나 기생 라합이나 자기의 자체적으로 축적된 윤리 도덕을 주님 앞에 내놓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기생 라합의 경우에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성을 정탐하러 왔을 때,
지붕 밑에 몰래 숨겼습니다. 그리고 잡으러온 경찰관 빼돌려놓고 나중에 이야기 나누는 게 뭐냐 하면, ‘왜 우리를 숨겼느냐?’ 물으니까 ‘당신의 이스라엘 여호와 하나님의 솜씨의 활약상을 봤다’는 겁니다. 여호와 신에 대해 받아들이지 않는 나라에 대해서는 혹독하게 진멸해버리고 멸망시켜버리는 그 능력에 대해서 자기가 혼이 나갔다는 겁니다. 정신이 나갔다는 겁니다.
살아있구나! 저 여호와 신만이 진짜 살아있구나! 그렇다면 그 다음차례가 누구냐 하면, 자기가 살고 있는 자기민족 차례예요. 이스라엘 정탐꾼이 자기에게 왔다는 말은 곧 처들어 온다는 뜻이거든요. 그러면, 기생 라합이 하는 말이, ‘살려주세요!’ 이렇게 이야기해요. 살려주세요, 라고 나온 거예요. 인간의 윤리 도덕의 특징은 뭐냐 하면, 어떤 누구도 나를 나쁜 여자 나쁜 남자로 몰아세운다면 용서하지 않겠다, 그런 성격을 갖고 있어요.
인간의 윤리도덕이라는 것은 왜 갑옷 갖추듯이 갖추느냐 하면, ‘나는 나쁜 사람이 아니다.’ 는 거예요. 아담이 타락하고 난 뒤에 특징이 뭐냐 하면, 자기 의가 안에서 양성해요. 양송이 배양하듯이. 무슨 행동을 하든지 간에 안에서 자기 의를 자꾸 키워내는 일을 해요. 그것을 거룩한 행함이라고 자꾸 남한테 보여줍니다.
제가 설교 처음에 뭐라 했던가요? 「내 주의 지신 십자가 우리는 안질까?」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졌다는 것은, 자기가 아무리 자기 의를 키우고 자기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우겨도 이미 십자가 앞에서는 다 들통나는 사안이 아니냐 이 말이죠. 조사하면 다 나오는 거예요. (ㅋㅋ) 조사하면 다 나와요.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는 것은, 그동안 우리가 지켜왔던 나의 착함, 윤리 도덕과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예요.
공자 맹자는 얼마나 착한 사람입니까. 석가모니는 또 얼마나 착한 사람입니까. 강감찬, 강감찬은 태어날 때 신화로 태어났어요. 꿈에 계시 받고 태어난 겁니다.(ㅋ) 을지문덕, 주몽, 그 인간들 전부 다, 박혁거세 알에서 태어나고(ㅋ...녹취자의 시조입니다.) 대단한 사람들이에요. 조사하면 다 나와요. 주님께서 산상설교 몇 마디로 하는 게 아니라 아예, 병고치고 물 위를 걷고, 그런 식이 아니고 십자가를 가지고 다 이루었다고 들이대시는 이유는,
우리가 스스로 훌륭한 존재라고 각인하고, 스스로 자기에게 납득시키고, 나는 대단한 사람, 나는 훌륭하게 살았어, 나는 조심스럽게 인생을 살아왔어, 내가 완전하지는 않지만 아마 주님한테 책망 받을 일은 없을 거야, 이런 식으로 자기 방어하면서 살아왔던 그 모든 것, 거기서 나온 행함이란, 십자가의 의미를 희석시키는, 십자가를 모독하고, 십자가 지심을 우습게 보는, 자기 의가 거기서 튀어나온 겁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어떤 인간도 자신이 갖고 있는, 그동안 모아 놓은, 저축해 놓은, 곱게, 곱게 포장시켜 놓았던, 귀하게, 귀하게 저장해놓은 인간의 윤리와 도덕에서 나온 자기 의는 그거는 오히려 마귀의 짓이지 예수님에 의한 성령의 짓이 아닙니다. 야고보서 2장에 보면 마귀도 하나님의 존재를 안다고 했습니다. 마귀도 믿고 떤다. 했습니다.
기생 라합의 같은 경우에 어떻게 그런 믿음이 생기는지 ‘사장님, 제발 우리 부모와 형제와 저희 가족들은 살려주세요. 저는 목숨 걸고 민족과 동족을 배반했습니다. 제발 살려주세요.’ 얼마나 겸손한지… 바로 이것이 예수님 십자가를 알게 돼서 자연스럽게 나올 수밖에 없는 행함이에요 이게. 그게 행함이다 말이죠.
하나님의 약속에 맞닥뜨릴 때, 그 약속을 보면서 전적으로 자기 의라는 게 필요가 없고 오직 주님이 주신 약속의 능력만이 나를 구원할 뿐이지 내가 품속에 숨겨 놓은 그러한, 한평생 살아왔든 충성히 봉사했든, 그런 실적들이 전혀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는 그 자체가 바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창조의 근본의 원리입니다. 창조의 근본이 있는 반면에 인간의 근본이 따로 있어요.
바로 인간의 근본이라는 것은, 쉽게 말하면 ‘나는 여기 존재한다.’ 내가 확신한 것은 내가 여기 존재한다는 이것뿐이라는 겁니다. 데카르트는 말하기를, 진리가 무엇이냐,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고 있는 이 물음은 딴 건 다 의심해도 진리가 무엇이냐, 이것이 볼펜일까? 이것이 마이크일까? 라고 의심해 대고 있는 이 자아만큼은 도저히 의심할 수 없다. 그래서 내가 진리다. 이게 인간의 근본입니다. 이게 인간의 근본이라니까요.
하나님도 안 보이니 믿을 수 없어, 예수님 십자가 못 박혔다고 목사가 고함질러봐야 그게 눈에 안 보이니 믿을 수 없어, 성령이 역사해야 성령의 사람입니다. 라고 이야기해봐야 믿을 수 없어, 성경에 기록돼봐야 과거 동화책, 나를 사랑한다 해봐야 사기 한두 번 당한 것도 아니라서 그 사람도 믿을 수 없고, 결국은 내 주먹? 깨물면 아플 수밖에 없는 아픔, 내 육체, 내 몸뚱아리, 내 주먹.
이거 외에 모든 것은 하나의 개연성이고 그냥 ‘한번 믿어볼까?’ 하는 식이지(ㅋ) 결국 궁극적으로 거기에 헌신할 가치가 없다. 이게 타고난 인간이 근본이에요. 교회 다니는 사람들에게 제일 큰 시험이 있다면 하나님이 과연 있을까 없을까를 측정하는 면에서 방금 제가 이야기한 인간의 근본, 나를 살찌우고 나를 부~자되게 만들고, 나를 남에게 튀게 만드는 흔적들이 계속 주어지고 기적들이 주어지면 그때 눈에 안 보이지만 하나님이 있는 것 같아. 라는 식으로 한번 믿어볼까? 가 나오고.
만약에 있는 것이 빠져나가고 변화가 없을 때는 ‘믿음? 개 코다!’ ‘내가 오십 년 믿었지만 개 코더라!’ (개 코로 만들어버리시는 주님) 그냥 교회 놀러 다니고 점심 먹으러 다니는 거 말고 개 코나 아무것도 없더라. ‘속지 마! 내가 오십 년 선배야!’ 내가 다 해봤어, 역시 남는 것은 꼬집으면 아픈 내 육체뿐이야. 이게 인간의 근본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자연스럽게 살아남기 위해서, 창조의 근본은 아예 없지요. 내가 있다는 것만 관심두기 위해서는 타협해야 되고 아부해야 되고 협상해야 되고 양보할 건 양보해야 되고, 우길 건 우겨야 되고, 이러한 것들이 섞이고 섞이니까 오늘 본문처럼 미지근한 거예요. 찬물과 더운 것이 섞여가지고 모든 것이 혼합과 혼동 미지근함 그것만 남아 있다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10장에서, 예수님께서 전도하는 대상에게 이렇게 얘기했습니다.「너의 발걸음도 내가 다 헤아리고 있고 너의 머리카락도 내가 다 헤아리고 있으니까 네가 하찮게 여기는 머리카락, 심지어 너 자신이라도 관심 없이, 우리가 밝을 때 발걸음 세는 거 관심 둡니까? 내가 360걸음 걸었지, 하면서 걷습니까? 그렇게 걸으면 편집증환자죠. 우리는 무심코 걷잖아요.
우리가 무심코 하는 행동들조차도 주님께서 다 파악하고 있다는 겁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머리카락 센 사람 누가 있습니까, 사람들이 놓치고 있는 거, 사람들이 잊고 있는 것까지도 주님께서는 세심하게 헤아리기 때문에 하물며 참새도 주께서 기르는데 참새보다 귀한 너희일까 보냐. 라고 주께서 당부하시면서 그 다음에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 앞에서 인자를 부인한 자는 나도 너를 부인하겠고, 사람들 앞에서 인자를 시인하는 자는 너를 시인하겠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 당시 제자들은 무슨 뜻인지 이해를 못했어요. 눈에 보이는 예수님과 함께 있으니까 ‘너희 선생 누구야?’ ‘우리 선생님 여기 계십니다.’ 쉽게 시인하기 때문에 자기들은 그걸 시인이라고 보는 거예요. 나를 시인해야 나도 너희를 시인 하겠다 하니까, ‘당신들 스승 누굽니까?’ ‘예수님’ ‘누구 따라다닙니까?’ ‘예수님.’ 직업도 버리고 가족도 버리고 누구를 추종해요? ‘우리 예수님’ 라고 마음 놓고 옆에 있는 예수님 소개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본색이 어떨 때 들통 나느냐면 예수님 십자가 질 때입니다. 그때 사도베드로는 그것도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삼진 아웃이에요.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예수님 보는 앞에서 부인했습니다. 그것도 혹시나 사람들이 날 의심할까 싶어서 한 마디 더 보탰죠. ‘나는 저분을 저주한다’ 했습니다. (아...주여...ㅜ.ㅜ.) 이게 인간의 근본입니다.(녹취자의 근본)
이것이 인간의 근본이거늘, 그런데 기생 라합이 주님 앞에서 여호와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의 존재를 그분한테 완전히 일임했다는 거죠. 이것은 일반인들한테서 나올 수 있는 행함이 절대로 아닙니다. 일반인들에게서 나올 수 있는 행함이 아니에요. 주님이 그 안에 있고 기생 라합이 주님 안에 있기에 주님 오기 전에 여호와 하나님을 먼저 만난 겁니다.
지금 여러분 속을 들여다보세요. 여러분 안에 누가 계십니까? 여러분 속에는 어떤 원리가 작용하고 있습니까? 일반인들이 다 할 수 있는 그런 원리십니까? 그러면 주님한테 내쫓김을 당합니다. 그걸 오늘 본문에서 ‘토해내치리라’ 했습니다. 차갑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고 도대체 너의 정체가 뭐냐 말이죠. 언제까지 머뭇머뭇하겠느냐 이 말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구원시킨 원리는 딴 게 아니라 ‘내 주의 지신 십자가 우리는 안질까?’ 이거예요.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가 평소에 자신의 값어치를 높이기 위해서 쏟아 부은 모든 착한 행동들이 십자가 앞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고 쓰레기보다 더 못한 거예요. 우리는 나쁜 남자예요. 우리는 나쁜 여자들입니다. 처음부터. 쑤셔보면 다 나와요. 주님이 다 수사하셨습니다. 다 아시고, ‘에라, 십자가 피로 씻음 받아라!’ 이래서 십자가의 원리가 우리 속에 박혀있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바칠 때 주여 제가 뭘 잘못했기에 내 손으로 제 아들을 죽여야 됩니까? 이렇게 반발한다면 일반인들도 행할 수 있는 윤리도덕 레벨의 행함이에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주님의 약속이 그러하기에, 다시 말해서 주님께서 내 안에 역사하고 내가 주님 안에 주님께서 나를 통해서 뭔가 일을 하시고자 하는 것 하나가 내가 내 아들을 잡아야 된다는 일이다 말이죠.
그렇다면 나는 주님의 도구기 때문에 나는 나쁜 사람이니까 주님한테 쓰임 받는 그것으로 ‘의의 종’이 되는 거죠. 나의 의가 아니라 ‘주님의 의가 이렇게 있더라.’ 라고 남한테 보여주고 알려주는 그러한 도구로 쓰임 받는다면 자기 아들 죽일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걸 가지고 야고보서에는 뭐라 하느냐면 이게 바로 진짜 믿음에 따른 행함이라고 한 겁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창조의 근본이란 것은 우리는 몰라요. 우리는 육체의 근본밖에 몰라요. 창조의 근본은 누가 아느냐 하면 예수님만 알아요. 골로새서 1장16절에 보면 예수님은 창조보다 먼저 나신 자요, 모든 만물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그분을 위하여 창조되었다, 라고 돼 있습니다.
창조의 근본이신 분이 오셔서 누가 자기 백성인지 아닌지 그분은 너무나 잘 압니다. 누가 내 아들인지 가짜인지 사생자인지 다 알아요. 사생자가 교회에 있을 때 주님께서는 토해서 내 쫓아버립니다. 내어 쫓는데 그 내쫓는 원리가 뭐냐 하면, 십자가를 들이대면서 너 힘으로, 너의 의로움으로 네가 구원되지 못하는 걸 네가 아느냐? 라는 식으로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들이대시면서 그 십자가를 이제부터 우리가 지고 가도록 요청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여, 제가 무엇이 잘못되었기에 나로 하여금 나쁜 사람으로 몰아넣습니까? 아, 용서 안 된다, 정말 용서 안 된다, 나 정말 착한사람인데 나를 나쁜 사람으로 몰다니, 라는 식으로 반발한다면 그거는 주님과 함께 천국에 살 수 없는 사람입니다. 내가 이런 사건 저런 사건을 통해서 졸지에 나쁜 사람이 되었구나, 그래, 그것이 나의 본색이구나,
기생 라합을 생각해보자, 창녀잖아. 그런 창녀도 그 수많은 사람 중에서 구원받은 사람은 창녀 한 가족밖에 없었습니다. 금메달깜입니다. 주께 구원된다면 창녀면 어떠며 깡패면 어떠냐 말이죠. 구원만 될 수 있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 십자가의 그 의미, 그 깊은 뜻이 우리 속에 창조의 기본으로 뿌리로 있을 때 그때 우리는 주님께 토해내치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영원히 천국에서 살 수 있는 아주 특수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겁니다.
진짜 끝으로 한 마디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여러분께 다가설 때에 왜 나쁜 일 하느냐, 왜 착한일 조금밖에 못했냐 그것을 따지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우리가 지어낸 가짜 예수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착각해서 가짜로 만든, 이것은 일반 교회에서 그렇게 만든 거예요. 가짜예요. 진짜는 일체 묻지 않고 십자가의 공로를, 십자가에 모든 것을 걸었느냐를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마지막 때에 마귀는요, 기적과 능력을 통해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겠다고 우는 사자와 같이 기적과 능력으로 찾아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이 아주 재미있어요.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인다」 했어요. 명언입니다. 명언. 마귀가 잡아먹으려고 모여요. 깍깍~ 깍깍? 마귀가 깍깍거리는 가는 모르겠습니다만, 모입니다. 중립지대는 없습니다.
중립지대란 없고 우리가 십자가를 놓치는 그 순간에 마귀가 와가지고 ‘자, 지난주에 네가 얼마나 착한 일 했나 보자’ 깍깍 거리면서 십자가를 놓친 우리에게 달려들어서 우리로 하여금 불안하게 만들고 힘들게 만들고 자기 윤리 도덕과 자기 의에 스스로 포위되게 눌리게 만드는, 정신병환자를 만들어내는 겁니다. 십자가 없는 곳에는 마귀가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고 찾아오게 돼 있어요. 항상 십자가의 원리라는 이것이 첨이요 끝인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교회를 오래 다녔다고 그것이 신앙에 합당한 행함이 아니라 늘 십자가 지심 앞에 우리의 모든 가치는 소실되고 사라진다는 것이 신앙인 줄 압니다. 우리가 잘 살았든 못 살았든 그것을 문제화시키지 아니하고 십자가 사랑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