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20050321 부산강의-츠빙글리
Re..20050321 부산강의-츠빙글리
이름 : 한윤범(IP:)
20050321 부산강의-츠빙글리
(강의:이근호 목사)
정시에 시작하게 되어서 다행스럽습니다.
오늘은 츠빙글리에 대해서. 교재 몇 페이지냐 하면, 129페이지. 시대적으로서는 루터보다 앞선 사람입니다. 츠빙글리 이 사람의 생각을 들어봅시다. 왜냐하면 사람은 여러 가지 자기 견해를 드러낼 자유가 있기 때문에 츠빙글리의 생각을 공부해 보면 같은 성경을 봐도 이런 아이디어로 또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성경관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츠빙글리의 마음 속에는 이런 선입관이 들어있어서 성경을 그런 식으로 파악하는구나. 하는 그 점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츠빙글리 연대가 나와 있죠. 1484년에서 1531년. 상당히 개혁주의 가운데서 제일 이른 사람이죠. 츠빙글리 신학의 핵심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에 대한 하나님에 의한 예정론입니다. 츠빙글리 신학은 하나님의 예정론입니다. 뭔가 허전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츠빙글리의 핵심은 섭리론, 예정론이라고 보면 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예정하셨다. 모든 것을 예정했다하니까 이것은 그의 철학적 관점은 스토아학파와 상당히 닮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요. 참고적으로 스토아학파의 주장은 뭐냐 하면, 물질로부터 포함해서 모든 것은 신의 예정에 의해서 움직인다. 물질의 움직임, 낙엽이 떨어지는 것, 전부다 신의 예정에 의해서 움직인다. 서두르지 마라. 어떤 어려움이 와도 그걸 감내해라. 운명이니 팔자니 그런 거니까 그걸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다. 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스토아학파의 윤리관이라는 것은 이게 신의 예정된 것을 인간이 그걸 극복하고 이겨내려고 할 때부터 문제가 생겨요. 남한테 피해를 주게 된다는 거죠. 남을 피해주니까 그냥 바람 부는 대로 물결 떠가는 대로 그것이 인간의 삶이다. 모든 것은 다 제자리로 가게 되어 있다. 하는 그러한 겁니다.
어쨌든 상당히 스토아학파의 그러한 철학 같은 것은 그게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물론 인간의 머리에서 나왔지요. 인간의 머리 속에는 아아, 저런 것도 들어있구나. 범죄한 인간의 머리 속에는 저런 것도 들어있구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예정이고 물결 흐르는 대로 살아가자 하는 그것이 결국 하나님 보시기에 영광 받을 만한 그러한 생각은 아니다 하는 것을 명심을 해야 됩니다.
우리가 두루두루 공부를 해야 될 이유가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우리가 곡해할 수가 있어요. 뭐, 이 정도면 하나님께서 놀라 자빠질 훌륭한 믿음이 아니겠나. 이렇게 생각하는데 스토아학파의 사고방식이라든지 동양의 철학 같은 걸 보면, 도대체 내가 예수님 알고 세상을 안다고 주장했던 그 주장들이 전혀 예수님하고 상관없는 사람들 머리에서 그게 다 나오니까. 내가 하나님 뜻도 아닌데 뜻이라고 철학만 해도 알 수 있는 것을 마치 성령 받아야 알 수 있다고 거짓말로 교인들에게 우긴 것이 되지 않을까 스스로 반성이 될 수가 있어요.
그래서 자유주의 신학에서는 아예 반성을 하지 않습니다. 하지 않고, 거 봐. 성령을 이렇게 십자가 같은 것, 예수 그리스도 몰라도 신에 의해서 인간은 이렇게 좋은 쪽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다만 일반대중들이 바쁘다보니까 먹고살다보니까 교육을 못 받아서 그런데, 헤겔 철학에 교양이 없어 그런데, 교육만 받으면 꼭 예수 찾지 않더라도 교회를 찾지 않더라도 상식선에서 신이 원하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살 수 있다는 그런 쪽으로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해요. 그걸 합리화하기 위해서 성령이라는 성령의 역사라는 것으로 이렇게 나간 겁니다.
그러면 츠빙글리가 어떤 신학이론을 내세웠을 때는 뭔가 그 당시의 시대에 신학에 대해서 못마땅했기 때문에 자기 나름대로의 신학을 전개했거든요. 그건 아니야. 하는 식으로 뭔가 배척하고 이게 하나님 뜻이야! 라고 나름대로 내세운 게 있을 게 아닙니까?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사람이 어떤 누구 사상을 안다는 것은 그 차이점을 안다는 거예요. 그 차이점을 분석 파악하고 말미암아 이쪽의 주장과 양쪽을 다 알 수 있는 그러한 계기가 됩니다.
여기에 보면, 129페이지에 보면,
[그의 사고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철학적 논리와 범신론적인 방식으로 접근을 했다.]
루터하고 차이점이 뭡니까? 루터는 하나님의 계시인 그리스도로부터 출발했다. 루터는 이렇게 주장했고.
[하나님의 초월성과 섭리에 대한 반성에서 시작한다. 다시 말해, 예정과 자유의지와 공로의 전반적인 운영은 섭리에 의존한다.]
그것이 츠빙글리의 차이점이 되는 겁니다. 츠빙글리의 예정론이 그럼 어디서부터 이렇게, 아까 제가 이야기한 무엇을 거부하고, 그게 아니고 이거다. 츠빙글리가 이런 식으로 나오면 기존의 섭리론하고 별 차이가 안 나잖아요. 그런데 츠빙글리가 얼른 들으면 기존의 다 아는 이야기를 되풀이하느냐 이렇게 듣겠지만 뭔가 그쪽은 아니야 강하게 반발하면서 자기 나름대로의 신학을 전개하는데 그게 재침례하고 연관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129페이지 밑에서 다섯 번째 줄에.
[신앙보다 하나님의 예정이 앞서기 때문에] 요 대목입니다.
참, 아주 미묘하죠. 신앙보다 하나님의 예정이 앞선다는 말이 도무지 무슨 뜻입니까? 무엇을 의도해서 이런 발언을 한 거죠? 신앙보다 하나님의 예정이 앞선다. 그것은 바로 츠빙글리가 반대하는 신앙이라는 것은 뭐냐? 재침례파들이 주장하는 신앙. 그 신앙을 반대하는 거예요.
재침례파들은 뭐라고 주장했습니까?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하나님이 계시고 인간이 여기 있다면,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세례, 침례지요. 성령으로 세례를 주게 되면 인간에게 뭣이 발현되는가? 뭐로 나타나느냐 하면, 신앙이라는 게 나와요. 따라서 물로 세례 준다는 것은 침례 준다는 것은 신앙인에게만 줘야 되지, 신앙인 아닌 사람에게는 줘서는 안 된다. 하는 것이 재세례파입니다. 영세 받은 것, 천주교에서 받은 것 소용없다 이 말입니다.
왜 그거는, 전에 또 여러분들이 잊어버렸겠습니다만 천주교에서는 개인적인 은혜가 옵니까, 안 옵니까? 안 오지요. 천주교에선 집단적으로 은혜가 옵니다. 교회를 통해서 은혜가 오지, 교회 말고 나 개인인데 하나님의 특별한 혜택 좀 주소. 하면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서 가. 교회 가란 말이야. 신부가 있는데 나한테 와서 자꾸 난리야. 빨리 교회 등록해. 해서 성만찬하고 그래서 은혜 받아. 은혜의 수단을 줘버렸는데 뭐 또 은혜를 받아. 이렇게 된 거예요.
천주교에서는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이 제사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안 그러면 예배, 미사지요. 제사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제사 안 드리고 따로 특별대우 받으려고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어요. 감독이 선수를 특별로 해서 이동국이 너, 말이야. 특별히 전술 이야기할게. 이러한 것은 본프레레 감독이나 그렇게 하지, 다른 선수들 알면 기분 나쁠 것 아닙니까? 이동국이만 스트라이커고 우린 축구선수도 아니냔 말이죠. 여차하면 저거 형, 동생이 죽일 수도 있어요. 편애하면.
그러니까 천주교에서는 베드로의 구원을 주는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모든 능력은 바로 베드로의 반석 위에서 출발하는 겁니다. 베드로는 사도권을 갖고 있고. 사도권이 마치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하고 야곱이 요셉에게 축복하듯이 그 사도권은 축복이라는 것을 통해서 전수 전달이 돼요. 사도에서 속사도로 속사도에서 그 다음에 주교 쪽으로 자꾸 전달되는데 전달하는 매체, 어떤 채널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 채널은 바로 제사입니다.
성스러운 제사를 통해서 하는데 그 제사 중에서 핵심 부분이 뭐냐 하면, 성만찬. 이 떡은 내 살이요, 이 잔은 내 피다. 라는 명백하게 그렇게 규정을 했다는 겁니다. 얼른 들으면 천주교의 상투적인 고집, 미신, 그걸로 들리겠지만 한 10초만이라도 여러분이 신부라고 생각해 보세요. 신부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거부되겠습니까? 안 그러면 이런 복음적인 진리를 알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생각이 들겠습니까? 여기서 제가 천주교라 하고 제가 이야기해 볼 테니까 잘 들어보세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과 떡이 예수님의 피가 되고 예수님의 살이 된다는 것을 사람들은 안 믿습니다. 그걸 천주교가 인정합니다. 그런데 안 믿는 것을 믿는 것이 축복 아닙니까? 그렇지요? 대부분 사람들이 유월절이 지나간 걸로 여깁니다. 그러나 유월절을 지켜야 구원받는다고 하는 안산홍 집단의 입장에서는 남들이 보기는 보아도 믿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것을 믿게 된 것이 얼마나 영광스럽겠습니까?
그 사생아 같은 목사들, 개신교들, 자기에서 나와 놓고는 오히려 자기들 보고 우리 천주교를 공격하는 그 사생아 같은 출신도 불분명한 저거들끼리 계시 받았다고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저런 사이비한 집단으로 모여서 거기서 목사질 해서 하나님의 뜻이 믿음으로 어떻고, 뭣이 어떻고, 우리들끼리 은혜를 받았다고.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분명히 고린도전서 11장에서 이것은 내 살이고 떡이다. 그리고 내가 올 때까지 이럴 기념하라 규정을 했으면, 그리고 그 사도권이 분명히 교회란 사도에 의해서 터 위에 세워진다면, 일단 개신교들이 우리 천주교의 그걸 인정해 줄 것 같으면 그들을 형제라고 간주하지만 형님 되시는 장자 되는 장자라 하면, 대한예수교 합동측 비슷하죠. 장자 되는 이걸 부인하는 이상은 용서가 안 되지요. 그저 불쌍히 여겨서 돌아오기만 고대할 뿐이지 그들에 동조할 필요가 없다 말이죠. 기본이 안 돼있다 말이야.
세상에 이 살과 떡이 기본인데 여기서 은혜가 나왔는데 이걸 우리가 하는 대대로 역사와 전통을 함부로 개인이 이렇게 삼손처럼 무너뜨릴 수 없는 거거든요. 역사와 전통이라는 것은 수차례 검증 받고, 수차례 확인하고. 마리아 숭배하는 것도 이건 한 사람의 아이디어가 아니라 계속해서 그것이 같은 성령 받은 공동체에서 그건 정말 꼭 성경에 없더라도 성경에 유사한 진짜 진리답다고 확인하고 또 확인해서 한 건데, 그런 것을 욕한다는 것은 철딱서니 없는 짓이라고 이해는 하지만 그러나 탕자가 돌아오기만 기다리는 그러한 심정이 신부의 심정이에요.
그래서 은혜라는 것은 이미 확정된 거예요. 은혜라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거예요. 없는데 저쪽에서 신앙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이 신앙은 이거는 천주교가 안 준, 천주교에서 나온 전통 말고 따로 하나님께서 성령을 줬다는 것이 이것은 하나님 자체에 모순이라는 거죠. 어떻게 살과 피를 그걸 인정하지 않는데서 어떻게 성령이 오느냐 말이죠. 성령이라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그걸 전파하고 그걸 적용시키는 게 성령의 역사지.
말씀에 분명히 이 살과 떡은 주님의 것이다, 주님이 여기 있다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주님의 것이다. 이 살과 떡을 먹는 자만이 하늘나라의 기업을 잇는다. 확정되었으면 모든지 출발해도 그것부터 출발해야 되지 않느냐 이 말입니다. 그게 천주교 신부들의 개신교가 아무리 떠들어도 눈 깜짝도 하지 않는 확신이 있는 그들의 담보지요. 최고 담봅니다.
오스카 쿨만 같은 신학자는 개신교 신학자지만 요한복음을 설명하면서 뭐로 설명하느냐 하면, 요한복음을 성만찬으로 설명해요. 어떻게 설명하느냐 하면, 요한복음이 기록연대가 후대다. 이거는 초대교회가 어느 정도 무르익었을 때 나온, 이미 마태, 마가, 누가 정도는 얼추 전부다 대부분 사람이 다 알고 있는 사항에서 이미 마태, 마가, 누가에 있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님의 어떤 행적을 갖고 있는지, 어떤 기적을 다 알고 부활, 십자가 다 아는 상태에서 뭐 때문에 후대에 사도 요한을 통해서 요한복음이라는 또 따로 추가해서 그런 복음서를 준 이유가 뭐가 있겠느냐?
그건 딴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요한복음의 주제가 아주 유독 독특하게 드러났기 때문에 그렇다.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성만찬을 우리가 왜 해야 됩니까? 하는 그 사실, 물음에 대해서 답변하기 위해서 요한복음이 기록되었다는 겁니다. 사도님, 성만찬을 우리가 왜 해야 됩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이미 떠나버리고 승천하고 난 뒤에 구름타고 올라가시고 난 뒤에 다시 예수님이 구름 타고 재림할 때까지에 어떻게 교회를 유지하고 부지할 수 있느냐? 그것은 교회가 행하는 성만찬 안에 예수님의 공관복음의 모든 기적이 성만찬과 연관되어서 재해석하면서 받아들이면, 그 사람은 주께서 오실 때까지 구원될 사람이다. 제가 빨리 이야기했지요.
예수님의 모든 기적을 무엇과 연관시킨다? 현재 교회에서 행하고 있는 이벤트로 벌이고 있는 성만찬의 의미와 연관해서 해석해 주어야 그게 옳은 진리다 이 말입니다. 가나 혼인잔치에 뭐가 나옵니까? 포도주 나오잖아요. 가나 혼인잔치의 포도주 비유가 다른 복음서에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안 나오지요. 안 나온다 말이지요.
왜 다른 복음서에 안 나옵니까? 다른 복음서에는 아직까지 초대교회가 무르익지 않아서 성만찬이 상례적으로 정기적으로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반교인들에게는 그때에는 뭐가 다급하냐 하면, 마지막 올 때에 고난과 악마의 시험과 그리고 시련, 핍박받는 것, 이게 급했습니다. 빨리 재림을 이야기하고 주께서 곧 오신다, 이 점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십자가가 급작스럽게 예수님의 부활과 재림에 대해서 교회에게 강조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마태, 마가, 누가복음의 그 흐름은 굉장히 급작스럽게 십자가로 갑니다. 대속을 빨리 끝내고 나머지는 뭐냐? 참아라, 참아. 그걸로 됐다 이 말이에요.
이렇게 되었는데 사람이 참아라, 참아라 해도 한두 해지, 아예 올 생각을 안 하네. 그러니까 교회에서, 그러면 예수님께서 너무 길다 말이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부활하고 난 뒤에 곧 오시 마 하면, 마태복음에 보면, 곧 오신다 이 말이거든요. 깨어있어라! 도적 같이 오신다. 달란트 비유라 하지요. 곧 타국에 갔다가 곧장 오고, 지혜로운 다섯 처녀가 기름 준비하고, 전부다 이 말은 뭐냐 하면, 급작스럽게 온다. 급작스럽게. 심지어 너희들이 살아있을 이 시대에 오지, 니 죽고 난 뒤에 천 대, 만 대, 후대 이천년 뒤에 온다는 그런 뉘앙스는 전혀 찾아 볼 길이 없어요. 급작스럽게 온다 이 말이지요.
오는데 지는 늙어 가는데 안 오더라 이 말이지요. 안 오니까 교회에서 부인하지는 않지만 궁시렁궁시렁 말이 많은 거예요. 그러니까 또 거짓 선지자해서 안 오니까 또 어떤 놈이 나타나느냐 하면, 왔다 해서 지가 메시아다 해서 설쳐대는 놈 있어서 이거 뭐, 질서가 말이 안돼서 할 때 사도 가운데 제일 나이 어린 사람이 누굽니까? 요한이, 다른 사람, 선배들은 다 퇴장해 버렸지요. 순교해서 다 죽어버렸으니까.
나머지 남아 있는 요한이 교회를 생각해서 요한계시록 일곱 교회 나오지요. 장래를 생각해서 주께서 오시는데 사실은 영적으로는, 육적으로는 부활 안 됐고, 영적으로 이미 주님과 함께 있은데, 그 있다는 증표가 우리 모일 때 말하는 떡과 포도주다. 이렇게 나온 거예요. 왜 떡과 포도주가 재림하실 때까지 주께서 함께 있다는 증표가 됩니까? 라고 했을 때는 예수님은 처음부터 떡과 포도주 가지고 모든 것을 지금까지 해온 것이다.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가나 혼인잔치에 포도주 댔지, 요한복음 6장에 보면 뭘 뗍니까? 떡을 떼지요. 그리고 요한복음 6장 54절에 보면,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않는 자에게는 뭐가 없다? 영생이 없다. 분명히 예수님께서 십자가 이전부터 떡과 살에 대해서 그걸 먹는 자에게는 주님이 바로 애초부터 원했던 그 현상이 떡과 살을 떡과 잔을 마시는 자에게 함께 공유하는 식으로 재림 때까지 자기 백성을 지키고 보호한다. 이렇게 봐야 요한복음 제대로 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초대교회에서 재림, 재림하는데 그들의 재림은 마태, 마가, 누가 쪽으로 볼 때 재림은 무슨 재림이냐 하면, 그들은 육체를 가지고 있으니까 역사적 재림이죠. 역사적으로 재림해서 들어온다 이 말이에요. 마태, 마가, 누가복음은. 그런데 요한복음 1장부터 보면, 역사성이 날아가 버리고 묵시성이 가깝지요. 처음부터 성령의 세례 언급하면서 주의 영이 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현재화에 강조점을 두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의 현재화.
그것이 요한복음의, 그러니까 역사적으로 니고데모가 말하잖아요. 내가 다시 태어나야 하늘나라에 갈 수 있습니까? 할 때에 성령이 있으면 된다. 그러니까 공관복음, 마태, 마가, 누가 같으면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고 내, 다시 올게. 이렇게 되는 거예요. 성령이 있는 자는 이미 하늘나라에 거주하고 있는 자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어떻게 그걸 믿습니까? 하니까 네가 이스라엘의 선생이면서 그것도 모르느냐? 타박을 주면서 뭐로 보느냐 하면, 역사적으로 온다는 쪽이 아니라 아예 이 세상은 어두움이고 어두움 속에 빛이 이미 왔다. 심판은 이미 개시되었느니라. 나를 빛을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느니라. 이렇게 되는 거예요. 역사성보다도 현재성에 강렬하게 그렇게 요한이 복음을 기록해야 될 이유는 자꾸 지체되니까 재림이. 뭔가 그들로 하여금 신앙을 붙잡아 둘 필요가 있었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그게 방금 제가 이야기한 오스카 쿨만의 요한복음에 대한 의견입니다. 그러한 생각도 우리는 알고 있어야 되죠. 결국 전에 여러 번 강의 했는데 그런 신학이 결국 무엇을 위한 신학입니까? 교회를 위한 신학이지요. 결국 교회를 위한 신학이에요. 오스카 쿨만의 그런 신학도. 천주교도 물론이죠. 교회 빼놓고 무슨 은혜가 오느냐 이 말이죠. 말도 안 되는 소리지.
거기에 대해서 초창기에 반발하는데 반발하는 첫째 이유가 뭐냐? 교회를 위한 신학은 아닙니다. 라고 반발하는 게 아니고 교회가 썩었다고 반발하죠. 교회가 썩었다고 반발하는 그 배후에는 어떠한 의도가 있습니까? 제대로 된 교회는 우리가 접수한다. 이런 의도가 강하죠. 제대로 된 교회.
그럼 여기서 자연적으로 천주교와 개신교의 싸움은 어떤 싸움이겠어요? 교회가 썩었다. 윤리, 도덕적으로 썩었다. 신부들 썩었고, 교황도 매수하고 매직하고 돈 주고 성직을 사니까 그 성직이 무슨 성만찬이냐? 썩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공의로운 하나님이기 때문에 썩은 교회를 그냥 방치하지 않고 바로 우리를 통해서 썩은 교회를 고발하고 징치하라고 이 가운데서 새로운 교회로 정말 하나님이 원하는 교회로 우리를 들어 사용했다. 이렇게 정당화하면서 뛰어나온 게 개신교 아닙니까?
둘 다 논쟁을 할 때에 그 초점이 어디에 모이느냐 하면, 교회론에 모이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좋다. 우리 둘 다 이야기하자. 어떤, 어떤 식이 될 때 제대로 된 하나님이 원하는 교회냐? 그럼 규정을 한번 지어보자. 규정짓기에 나가는 거예요.
개신교에서 하는 이야기는 그겁니다. 성령 받아서 신앙이라는 반응을 나타내는 그들의 집합체가 바로 교회라고 규정하자. 이렇게 나온 거예요. 그게 오직 믿음으로. 오직 믿음으로는 거짓말이에요. 오직 교회만인데 다만 그 교회라는 것은 신앙인에 한해서 교회가 된다는 겁니다. 제가 지금 취지를 여러분들이 생뚱맞게 무슨 소리하고 있는지, 이해를 못하고 있는 눈들을 하고 계신데. 진도가 너무 나가버렸는가요? 한번 정리해 봅시다.
그건 이해하시죠. 천주교와 개신교의 차이점이 하나는 교회를 붙들고 하나는 교회를 부정하는 게 아니고 진짜 하나님이 원하는 교회를 하겠다는 데는 동의하는데 문제는 진짜 교회가 천주교가 아니고 개신교인데 개신교에의 근거는 뭐냐? 뭐 때문에 있다? 신앙이 있다는데 있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천주교에서 주장하는 게 뭡니까? 신앙에 근거해서 교회가 돼야 참된 교회로 보고, 천주교는 뭐냐 하면, 전통이거든요. 그런데 전통 속에 뭐가 포함되어 있느냐 하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다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럼 뭐가 빠져요? 지금 개신교는 신앙인데 천주교는 전통 아닙니까? 지금 개신교가 필요할 때 뭐가 빠집니까? 뭐가 빠져요? 뭐가 빠집니까? 이쪽에. 이게 빠지지요.
천주교 입장에서 신앙이 빠져도 괜찮아요. 왜 괜찮으냐? 하면, 전통 쪽으로 여기서 뭐가 오냐 하면, 전통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은혜의 수단 아닙니까? 신앙은 행함으로 얻습니까, 은혜로 얻습니까? 이건 천주교에서 주장하는 것 아닙니까? 신앙은 은혜로 얻지요.
아니 천주교에서 행함으로 신앙 얻는다 하는 게 누가 있습니까? 그건 아마 농땡이, 신부가 공부 하나 못하는 신부 있잖아요. 사업하는 신부들, 저질 신부들, 그런 사람들이야 하겠지만, 천주교에서 자기 신부수업하면서 졸지도 않고 좀 들었던 인간은 속으론 안 그렇더라도 겉으로는 오직 은혜로 신앙이 와요. 지금 모든 천주교 교리서 보세요. 전부다 구원은 은혜로 되어 있지요. 행함으로 되는 게 아니고 은혜로 와요.
천주교에서 주장하는 행함이라는 것은 일단 은혜에서 나타나는 발현되는 열매를 가지고 행함이라 한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천주교 주장이나 오늘날 개혁주의 주장하는 인간이나 똑같은 거예요. 똑같은 거. 뭐 알지도 못하면서 천주교 공격한다고.
그런데 그 은혜라는 문제, 그럼 천주교에서 주장하는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이거랑 똑같아요. 왜 신앙이라는 말을 왜 표시를 안 내느냐 하면, 신앙이라 하는 것은 은혜주면 나타나는데 오히려 천주교 입장에서 신앙이라는 자체가 의심스러운 거예요. 결국 천주교의 눈으로 볼 때 개신교가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하는 그것이 결국 무엇을 탈락시키는 겁니까? 하나님의 은혜, 은혜라고 하지만 오히려 그들이 은혜를 탈락시키는 게 돼요.
왜? 은혜를 줘서 신앙 얻었으면, 그 다음부터는 은혜 떼버리고 나 신앙 가졌다. 나, 신앙 가졌다. 나, 신앙 가졌잖아. 그래서 너도 신앙 가졌어? 우리끼리 모여서 진짜 교회 해보자. 이게 오히려 의심스러운 거예요. 이것 자체가 뭐로부터 끊어졌다? 은혜로부터 절단된 하나의 양상일 수가 있다는 거예요. 그게 하나의 몸부림, 은혜로부터 절단된 양상이에요.
천주교에서 은혜로 오는 수단은 오직 전통. 그 전통 안에는 뭐가 들어있다? 성경도 들어있어요. 왜냐? 성경이라 하는 것은 하늘출판사에서 책 제본해서 툭 던져서 머리에 혹뿔나는 게 그게 성경이 아니고 성경이라고 정한 것이 어디서 한 겁니까? 초대교회에서부터 회의해서 한 거예요. 회의 할 때 어떤 장소 정해서 우르르 모여서 성경은 하나님 말씀, 이렇게 정했습니까? 사회자 필요하고 점심 준비하고 과반수로 할까요, 2/3 할까요? 그러한 성경은 하나님 말씀이다를 정하기 위한 그 예비절차도 전부다 어디서 나온 거예요? 전통에서 다 나온 거잖아요. 그래서 나온 결론이 성경은 하나님 말씀이다. 이렇게 된다 말이죠.
이 말씀으로 선언한 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통해서 이렇게 한 것이기 때문에 이걸 선언한 인간들은 부정할 필요가 없죠. 성경은 하나님 말씀이라 했는데 그 말씀이라 한다고 해서 니, 성경 부정하지. 이렇게 나온다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다 말이죠. 그래 내가 성경 인정할게. 무슨 인정한다는 놈이, 인정한다는 니가 계시 맞잖아. 아주 억지를 부리는 것밖에 안되니까.
천주교에서는 성경을 통해서 은혜가 오고, 아까 교회 제사제도가 전통이니까 그 전통 안에는 성경도 포함되고, 그래서 제사 지내면, 제사만 지내는 게 아니고 뭘 전합니까?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도 전하잖아요. 그래서 천주교나 성공회나 또 그리스도 정교회, 이런데 특징이 뭐냐 하면, 아무리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더라도 성경 본문 잡는 것은 다 스케줄에 따라서 정해져 있어요. 물론 거기서 말씨, 토씨, 이거는 융통성이 있지만, 핵심 주제 이런 것은 그대로 다 해야 됩니다.
마치 부산의 서부교회가 백파교회인가 있지요. 그 교회가 자기 지점이 있는 지점들 교회 그 본문해서 그대로 해서 주일학교교사까지 그걸 세뇌시켜 하는 것처럼 천주교도 그렇게 한 이유가, 백파교회 죽은 사람한테 물어보세요. 왜 그렇게 하냐 하면, 내가 하나님께 계시 받았는데 그 계시 받은 것을 남한테 이렇게 나눠주고 동의하는 게 어떤데. 조용기하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조용기 설교하면서 딴 데 동영상해 가지고 그대로 하는 것도 마찬가지거든요. 이거 천주교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결국 무슨 중심입니까? 교회중심이에요. 전부다. 오직 교회를 통해서만 하나님께서 은혜가 온다 말이에요. 그러니까 만약에 오직 신앙으로 해서 교회 갔다가 또 여기서 신앙 나온다면 누가 용서 안 해요? 천주교가 용서 안 하는 것이 아니고, 갈라져 나온 그 원판 되는 교회가 용서하지 않지요.
지금 광성교회가 이런 모습 아닙니까? 광성교회가 노회를 탈퇴하려고 하니까 그 청년들, 250명이 노회 탈퇴 못하겠다고 나오거든요. 그러니까 광성교회가 내분돼버렸어요. 청년들하고도. 나가라 했거든요. 결국 나가라하는 말은 뭐냐 하면, 결국 교회문제가 아니라 교회 부동산문제지요. 이 지붕하고 유리창 전부다 우리 돈 냈다. 청년들 니가 돈 냈나? 누가 돈 많이 냈는가, 누가 주식을 많이 갖고 있는가? 결국 그 문제입니다.
이거 복잡한 문제기 때문에 좀 더 나가 봅시다. 신앙으로 해서 이렇게 할 때 방금 제가 천주교 입장에서 이렇게 했습니다.
그러면 이 개신교 입장에서 어떻게 반박해야 됩니까? 천주교에서 그래 나왔다면, 개신교는 어떻게 반박해야 됩니까? 개신교는 아까 건성으로는 이렇게 해요. 썩은 교회라서 깨끗한 교회를 해왔다. 이렇게 되죠. 그러면 천주교가 말하기를 너희들이 말하는 깨끗함이 뭐냐? 우리는 신앙이다. 니들이 말하는 신앙은 어디서 왔는가? 은혜로 왔다. 그럼 은혜로 왔다면 우리 전통으로 올 것 아니냐? 아니다. 우리는 뭐로 왔다? 성령을 통해서 왔다.
성령을 통해서 신앙이 왔고 그래서 신앙인들이 모여서 교회된다. 이게 개신교 아닙니까? 개신교 주장이거든요. 그러면 성령에서 신앙이 왔다 이 말은, 그럼 신앙이 왔으면 그 신앙 이 사람한테 있다가 다른 사람에게 옳깁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성령이 따로 신앙 줍니까? 다른 사람에게 따로따로 주죠. 그러면 이 신앙이 와버리면 이 신앙은 이 사람 것이 되죠. 이 사람 것이 된다 말이죠.
그럼 천주교에서 할 말이 있죠. 신앙이 있다가, 무슨 말이냐 하면, 천주교 신부라면, 야, 개신교 목사들아, 우리가 타락했다고 우리가 범죄 했다고 교회가 썩었다고. 그래 인정할게. 그런 신부들 있는 것 인정하는데, 사람이 한번 신앙 있더라도 타락할 수 있는 문제 아니냐? 그러면 개신교 목사, 너희들 주장에 의하면 한번 성령 받고 신앙이 있는 사람은 두 번 다시 천주교가 범죄 한 것처럼 두 번 다시 일체 그 교회에서는 뭐가 없어야 됩니까? 일체 타락도 없어야 되고 범죄도 없어야 비로소 자기주장이 정당화 되죠. 이해하시겠어요?
그런데 만약에 너희들처럼 전통이 아니라 성령께서 직접 신앙을 주었고 그 신앙이 누구 소유가 된다? 인간 소유, 개인 소유가 되고, 그 아가페, 개인이 모인 교회가 돼서 만약에 여기서 범죄 한다든지 타락한다든지 이게 생겨버리면 이것과 천주교와의 차이점이 뭐냐 말이에요.
그리고 실제로 생깁니까, 안 생깁니까? 생기는 이유가 뭐냐 하면, 여기서 또 이 교회가 회의해서 이놈, 이단들아. 해서 개신교 교회 자체 내에서 이단과 정통을 계속 분열, 분열을 획책해야 될 필요가 있는 겁니다. 그걸 가지고 칼빈은 무슨 교회라 하는가? 그걸 교회를 치리한다. 교회 증표 중에 치리하는 게 있죠. 싸우는 전투하는 교회 있지만 치리하는 것도 있잖아요.
그 치리했다는 말은 처음부터 오기 전에 치리한 게 아니고 처음부터 심사 받아서 온 게 아니고, 처음에는 뭐로 봤다? 형제로 봤잖아요. 형제며 처음에는 뭘 동의했습니까? 우리는 다 같은 성령 받은 사람이고 우리의 신앙은 믿음도 하나이요, 몸도 하나이요, 소망도 하나이요 다 이렇게 고백했잖아요.
그런데 세월이 지나서 3,4년 지나고 나니까 그쪽에서 니 믿음은 믿음도 아니고, 니 소망은 소망도 아니고, 니 하나님은 이단이고 이런 식으로 갈라졌다 말이죠. 갈라지니까 그렇다면 교회 갈라질 때 기준이 있을 거고, 그 기준을 새롭게 정할 때 그 기준이 너희들이 그렇게 천주교를 공격했던 전통이 아니냐 이 말입니다. 반박해 보세요. 반박이 됩니까? 반박 안 됩니다. 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천주교에서 나오면서 신앙 고백하죠. 개혁주의가 두 가지 노선이 있어요. 하나는 청교도 노선, 웨스트민스트 쪽이고, 네덜란드 개혁주의에서는 돌트 신앙고백과 하이델베르그 신앙고백 그게 네덜란드 개혁주의에서 그걸 주장하는 겁니다. 청교도에서는 웨스트민스트하고. 네덜란드 쪽은 신학적이고, 청교도에서는 경건한 생활 위주로 신학을 하는 겁니다. 나중에 워필드까지 나가지요. 그게 미국 쪽으로 가요. 네덜란드 개신교 개혁주의 따로 장로교 따로 저쪽 영국이 맨 미국이니까 영국에서 건너간 미국의 장로교 따로. 한국에 온 개혁주의는 뭡니까? 네덜란드가 아니고 미국에서 오고. 바빙크 쪽은 네덜란드죠. 아브라함 카이퍼 쪽도 네덜란드 쪽의 개혁주의 성향을 띠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개혁주의가 다른 신학교파와 차이점이 뭐냐? 차이점은 없어요. 다만 장로교라는 정치제도 때문에. 정치제도라는 말은 전통이에요. 박아론, 이 사람 책에 증거 하는 게 있습니다. 뭘 증거 하는지 압니까? 전통적 개혁주의를 증거 해요. 다시 말해서 정치제도를 증거 하는 사람이에요. 그 사람은. 총신 출신들은 다 배웠어요. 그래서 박아론을 쌍권총을 찬 카우보이라 하는 거예요. 이단들 때려 부수고 이단들 쏴 죽이는 아주 정의의 사나이, 정의의 건맨이라고 이렇게 칭송하지요.
박아론 교수가 주장하는 것은 새벽기도 신학. 새벽기도 신학은 아까 이야기한 경건주의, 워필드, 새벽기도 모르면서 새벽 동틀 때 그 은은한 분위기에서 무게 잡는 신앙 잡는 그게 얼마나 아름다우냐! 그걸 영으로 본 거예요.
그러나 예수님의 영은 뭐냐? 피 흘리는 실제는 몸체가 그게 영이에요. 예수님이 모든 고난 받는 모습이 영적이에요. 다른 영은 흐물한 새벽안개, 이게 영이 아니에요. 실제로 매 맞고 채찍 맞는 그게 영이에요. 그걸 보면서도 믿는 자 있고, 그걸 보면서 못 믿는 자 있어요. 실감나. 손가락 쑤시면 뚝뚝 떨어지는 살점, 이 살점이 영이에요. 이게. 그거 말고 다른 영이 없어요.
사마리아 여인은 물동이 이고 메시아 만났다고 했습니다. 또 같은 예수를 봐도 사마리아 여인처럼 눈이 열려야 가능해요. 예수님은 말하기를 내가 배부르다 했어요. 언제 식사했습니까? 나 배 되게 부르다, 지금. 와요? 하니까 내가 사마리아 여인을 만났거든. 이게 얼마나 육적이 아니고 얼마나 놀라운 영적입니까? 사마리아 여인을 만났다고 해서 배가 부르다 하는 거예요.
봐라. 내 양식은 저게 양식이다. 얼마나 영적이에요. 이건 뭐 상징적, 비유적 그게 아니고, 그 자체가 상징적 비유도 아니고 신비로운 것도 아니고 그냥 영이에요. 성경에서 예수님의 육체 자체를 영이라고 해요. 왜냐하면 거기서 구원의 능력이 나오거든요. 권세가 나오고.
어떤 교수는 말하기를 예수님의 피 찍어 구원받는다고? 에라, 예수의 피 한 바가지 뒤집어써라. 영적이 아닌 사람은 예수님의 피 한 바가지 뒤집어써도 그냥 옷만 버리지 소용이 없어요.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구원한다는 것이 왜 영적이냐 하면, 그 안에 대대로 내려오는 어린양의 하나님의 약속이 담겨 있거든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담겨 있다고요. 영을 본다는 것은 컴컴한 밤에 귀신하고 만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자신의 관계가 형성되어 있음이 믿어질 때 그게 영적인 겁니다. 그러니까 구원 받는데 복잡할 게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어제 아침에 제가 설교하면서 그걸 무시험 합격이라고 했는데. 그냥 시험도 안 쳤는데 통지서 날아왔어요. '축 합격!' 필기시험 이름도 안 썼는데 아들 이름 다 알아서, 축 합격. 구원에 뭐가 필요한데요? 이런 게 왜 필요한지 모르겠어요.
지금 제가 이야기한 지금까지 강의한 것에 의하면 천주교에서 공부한 것, 개신교에서 반박 못합니다. 반박 못하는 이유가 뭐냐? 반박 안 되는 이유를 알아야 돼요. 재침례교에서는 이렇게 했어요. 신앙인이 성령 와서 신앙인이고 신앙인이 인간되었기 때문에 두 살 때 본인이 예수 믿음으로 입을 열어서 고백 안했잖아요. 그런 인간 같으면 다시 한번 유아세례 받았더라도 다시 커서 또 받아야 돼요. 두 차례 받아야 돼요. 그게 바로 재침례교 주장 아닙니까?
그렇다면 재침례교 주장이라면 두 차례에 끝나는 게 아닙니다. 나중에 스무 살 때 타락했다 서른 살 때 하면 다시 누가 왔어요? 다시 성령이 왔기 때문에 또 받아야 돼요. 앞으로 천 번을 받아도 소용없어요. 백만 송이 장미다? 백만 번 받아보세요. 그게 되는가?
그래서 츠빙글리는 공격하기를 신앙보고 예정론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예정론은 신앙보다 앞선다. 요 짧은 문장, 츠빙글리가. 신앙은 중요한 게 아니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예정이 중요한 것이지 신앙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놀라운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이 안 중요하면 뭐가 형성이 안 됩니까? 교회가 형성 안 되지요. 개신교에 의하면 교회라 하는 것은 신앙인들이 모여야 되는데 신앙고백을 츠빙글리가 무시해 버리니까 또 무시 안 하면 세례 다시 받아야 되니까 그게 문제 있어요. 교회 자체가 문제 있어요.
츠빙글리, 당신의 예정은 뭐냐? 바로 신앙이 없는 사람에게도 구원되는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야, 놀라운 이야기이에요. 신앙이 없는 사람에게도 구원될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서. 왜? 하나님의 예정은 인간의 신앙하고 상관이 없기 때문에. 놀라운 이야기를 한 거죠.
인간의 창조가 먼저입니까, 하나님의 예정이 먼저입니까? 하나님의 예정이 먼저 있고 예정에 합당한 인간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있는 것을 만들어낸 게 인간이죠. 왜냐하면 그래야 예정된 하나님의 속성을 용도로 한 거죠. 그걸 따라서 츠빙글리는 주장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예정된 사람이라면 이 땅에 어떻게 살든 상관없이 예정되기 때문에 남의 신앙을 이렇다 저렇다 구원 받았다, 천당 간다. 그런 소리 하지 마라. 좀 더 나가면 어떻게 됩니까? 신앙이 있어도 그게 있는지 아닌지 신앙도 아니요, 신앙이 없어도 신앙 아닌 게 아니다.
여기 129페이지 밑에서 열 번째 줄 봅시다.
['하나님의 섭리는 예정 그 자체의 모체이다'고 했다. 그는 이방인들과 세례 받지 못한 유아들이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견해를 비난했다. 신앙보다 하나님의 예정이 앞서기 때문에, 만일 하나님이 유아들을 예정하셨다면 세례 받지 않았다고 해서 이들이 저주받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예정의 교리는 츠빙글리가 재침례파들의 입장을 공격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야곱은 믿기 전에 예정되었다.] 당연한 이야기 아닙니까?
자,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다른 루터나 칼빈 측에서는 이 츠빙글리에 대해서 동의했겠습니까, 동의 안했겠습니까? 동의 안 했어요. 동의 할 수 없어요.
여기 130페이지, 위에서 4번째 줄에 봅시다. 제일 위에.
[예정론에 근거하여 츠빙글리는 구원을 행위에 의존하는 모든 시도들을 논박했다. 이런 점에서 칼 바르트의 예정론은-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된 자와 유기된 자를 동일시하는 사고-종교 개혁적 전통에서 이어지는 예정의 문제를 심화하는 시도로 볼 수 있다. 츠빙글리는 더 담대하게 하늘나라에는 성경의 족장들과 예언자들 그리고 사도들 외에도 프랑스의 선임 왕들과 비 기독교인들도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츠빙글리의 보편주의는 종교 다원주의적 이해에 기초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성에 근거된다.]
자 여기에 대해서 루터 쪽에서는 어떻게 반박할까요? 이렇게 반박하겠지요. 루터 신학에 핵심은 하나님의 주권에 있습니까, 십자가에 있습니까? 십자가에 있죠. 그런데 츠빙글리는 하나님의 주권이 뭐보다 높다고 생각합니까? 십자가보다도 사건보다 더 앞서고 범위가 더 포괄적이고 넓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예정이 십자가보다 더 넓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츠빙글리 이야기를 들어보면 뭘 생각나느냐 하면, 박용기 쪽에 자꾸 거기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들어요.
츠빙글리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 있어야 츠빙글리 그 시대의 아이디어가 아니고 이 시대의 신학을 대하고 신학을 공부하고 성경을 대하는 사고방식 중에 하나로 계속 발현되고 튀어나오죠.
자, 130페이지 중간에 보면,
[고전적인 예정론은 인간이 죄를 범함으로써 타락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이 아담의 타락을 미리 했거나 허락한 데 있었다. 어거스틴에게서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공의로우시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기 때문에 타락한 자를 구원하실 수 있다.]
그런데 어거스틴은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타락하지 않은 자를 심판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예정을 인간의 타락 이후에 생긴 하나님의 자비로운 행동-타락 후 예정-으로 이해했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어거스틴은.
그런데 칼빈 이야기는 좀 있다 이야기하고, 몇 줄 내려가서 츠빙글리 이야기부터 먼저 봅시다. 130페이지 밑에서 여덟 번째 줄에.
[츠빙글리에게서 예정은 신론에 속한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에서부터 예정을 추론했다. 하나님의 지고선으로서 그의 신론의 출발점을 이룬다. 하나님의 지고선(至高善)은 플라톤의 저작을 통해 기독교에 도입된 것이며, 특히 어거스틴에 의해 신학적으로 수용되었다. 츠빙글리는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은혜의 긴장을 잘 알고 있었다. 비록 그는 바울이나 루터의 십자가 신학을 근거로 하나님의 공의와 은혜를 이해하려고 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단순히 그때그때 우발적인 섭리론이나 예정론을 말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여기 131페이지에 결론이 나오지요.
[츠빙글리는 타락 전 예정과 그리고 타락 후 예정에 말한다. 인간의 타락과 비참함 속에 이미 하나님의 정의가 계시된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희생을 통해 인간에게 주어졌다. 그러므로 인간의 업적이나 대리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이 구원의, 기초가 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희생 없이 선택은 불가능하다. 그리스도의 계시 안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결정은 실현된다. 인간의 선택은 명백히 그리스도의 구속에 관련되며, 그리스도에 의해 살려진다. 이것이 츠빙글리가 타락 전 예정에 국한되지 않고, 타락 후 예정을 기독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게 상당히 어려운데 타락 전 예정은 신론적이고, 타락 후 예정은 기독론적으로 본 거예요. 그러니까 배정을 할 때 성부는 뭐까지 담당하느냐 하면, 타락 전 예정까지만 담당하고 타락 후 예정은 누구 역할이다? 예수님 역할로 바뀌어서 하나님의 공의와 은혜가 십자가의 형틀에서 배정받아서 타락 후는 니가 담당하고 타락 전은 내가 담당하고 이렇게 구분했다는 그 이야기입니다. 이런 아이디어도 되네요. 이런 아이디어도 나올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후대 칼빈주의 되면, 어거스틴을 버리고 후대 칼빈주의는 타락 전 예정론을 주장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뭐가 약화된다? 지금 여러분들이 제가 하는 이야기를 그냥 듣고 제가 설명을 해 드릴 테니까 왜 이런 문제의 문제점이 어디서부터 출발되는가를 여러분들이 아셔야 됩니다. 문제점이 뭐냐 하면 지금 츠빙글리와 루터 빼놓고, 칼빈이나 천주교의 성례론, 이 모든 것이 어디서부터 출발하느냐 하면, 특히 칼빈, 츠빙글리 두 양반은, 하나님의 속성은 뭡니까? 은혜성과 공의성을 어떻게든 이 둘을 모순되지 않고 구속사를 통해서 처리하려는 그러한 경향이 많아요.
그러니까 타락 전, 칼빈 때는 처음에는 타락 후 예정 아닙니까? 하다가 후반에는 타락 전 예정 아닙니까? 츠빙글처럼 타락 전은 성부가 담당하고 타락 후에는 성자가 담당해서 하던 간에 이 예정론 전부다가 무엇을 설명하려 하느냐 하면, 하나님은 이런 분이다. 라고 하나님은 이렇게 은혜로우시며 또 공의로우시며 우리가 보기에는 둘이 마찰되지만 하나님한테는 마찰되는 것이 아니고 이것이 전혀 모순점이 없다. 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렇게 설명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논조가 십자가 중심으로 볼 때 뭐가 문제입니까? 공의성도 아니고 은혜성도 아니고 뭡니까? 하나님의 속성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겠다는 거거든요. 그런데 십자가 입장에서는 뭡니까?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지요. 십자가 지신 예수님의 아버지가 하나님인 거예요. 여러분, 그 차이점을 좀 더 이야기해 봅시다.
츠빙글리나 칼빈이 바보가 아니에요. 지금까지 그들이 알았던 모든 신학을 연구하고 비합리성과 속성을 알고 난 뒤에 이런 이야기를 하거든요. 그러니까 칼빈 같은 경우에 츠빙글리를 용납 못합니다. 왜 용납 못하느냐 하면, 이방인들도 구원 받고 신앙이 없었던 사람도 구원받는다 하니까 이거는 칼빈의 입장에서는 용납 안 되지요. 용납 안 되면서 용납 안 된다고 하면 안 되고 이렇게 하기 때문에 그건 엉터리다. 라는 주장을 해야 된다고요.
주장하니까 칼빈 쪽에서 점점 뭐로 나옵니까? 타락 후 예정론에서 타락 전 예정론이 나올 수밖에 없는 거예요. 처음부터 아예 구원될 자와 구원되지 않을 자를 구분했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그런데 구원에 대해서는 츠빙글리의 생각은 그렇게 두 쪽으로 나누면 안 된다는 거죠.
그러니까 츠빙글리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예정은 하나님의 속성과 관련되어 있지, 어떻게 구원받는가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서 구원된다. 이런 소리해서는 안 된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서 속성이 만들어지고 그 속성에 의해서 구원이 된다. 이건 말이 되지만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서 구원된다. 이런 소리하면 안 된다 이 말이에요.
아이고, 목사님, 그거나 저거나 시끄러워 죽겠다. 제가 보기에는 별 탈도 없어 보이고 뭐, 심각하지도 않은 그 소리나, 이 소리나 마찬가지 소리인데 뭐 중요하냐? 천당 가면 되지 이렇게 생각되는데. 이들한테는 그리고 현재 이쪽을 따르는 사람들이 이런 점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 중요하냐 하면 진짜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이 제대로 된 하나님이냐? 이게 아주 걱정되는 거예요. 십자가 지신 그 분이 하나님이고 그분 아들의 하나님 있습니다.
그림을 하나 그리겠습니다. 지금 이 사고방식을 그림으로 그리면 쉽네. 복잡하게 할 것 없이. 예수님이 아들이고 그 아버지가 하나님이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일단 예수님을 안다는 사람들의 걱정거리가 뭡니까? 예수님한테 주신 또 하나님을 알아야 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십자가가 지신 것은 하나님의 공의부분이 강조된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사랑 부분이 강조되었는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서 여기 일차, 속성에 대해서 이차, 속성의 모순점이 없는 삼차, 삼차에 걸쳐서 하나님 알아야 될 것 아닙니까? 이런 숙제가 남아 있잖아요.
그런데 성경적으로 말해서 예수님 안에 들어있어요. 예수님이 하나님이고, 그 예수님 안에 아버지가 들어있다 말이지요.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들어있는 거예요. 따로 속성 같은 게 없다 말이죠. 우리가 예수님 알면 다 안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도 알아야 되고 그 다음에 뭘 알아야 되고? 속성론적으로 또 하나님 알아야 되고. 이게 무슨 횡포입니까? 지도 모르고 남도 모르고 교인들 다 죽이게 만들고. 이게 무슨 부질없는 짓이에요.
분명히 고린도전서에서 말했잖아요. 십자가는 세상 지혜와 다른 구원의 지혜라고. 십자가가 구원의 능력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쪽에 하나님 따로 아는 사람은 이렇게 생각한다고. 아, 내가 구원받는 것은 십자가로 구원받고, 구원이라는 개념을 자기 천당 가는 개념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인간이 여기 있잖아요. 구원이란 말이 뭔 뜻이냐 하면,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지혜를 두고 이야기하거든요. 지혜 속에 들어가면 되는데 이리로 들어가면 되는데 이리로 안 들어가고 이것도 알아차리고 성부도 알아 챙겨서 자기 구원을 자기가 종합하려고 한다고. 이게 칼빈이고 이게 츠빙글리에요. 지금 나온 게. 이게 교회론 이렇게 나오고. 천주교도 마찬가지고.
이게 다 그 잘못이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바로 교회론에서부터 시작되었어요. 교회라 하는 것이 사람들 무리 아닙니까? 사람들 무리니까 그 사람들에 대해서 자기 정체성, 내가 누굽니까? 에 대해서 답변을 해줄 필요를 느끼는 거예요. 교회는 이런 겁니다. 어떤 게 교회입니까? 예수 믿는 사람은 교회입니다. 그럼 예수 믿는 사람이 교회 같으면 예수 안 믿는 사람은 지옥 갑니까? 지옥 갑니다.
하니까 츠빙글리가 화가 나서 예수 안 믿는 사람도 천당 갈 수 있다. 이렇게 된다 말입니다. 그러니까 칼빈 쪽에서 츠빙글리 하는 쪽이 예수 안 믿어도 천당 갈 수 있다 하는데요? 츠빙글리 사람은 인간의 신앙, 믿음, 예수님 믿는 믿음보다도 예정이 먼저기 때문에 믿음 표시 안 나도 믿음을 안 가져도 주께서 예정하면 구원받는 겁니다.
츠빙글리의 이론이 어떤 점에서 유리하냐 하면, 엄마 뱃속에서 죽은 아이들, 태어나자마자 죽은 애들, 두 살 애들 말도 못하는 두 살이 뭡니까? 육 개월 된 애들 해서 야, 니, 예수 믿나? 예수 믿어? 앙 울어버리죠. 그런데 그 아이가 차사고 나서 죽어버렸을 때 천당 갔을까요, 지옥 갔을까? 그때는 츠빙글리가 적당하죠. 그때그때 달라요. 그 한 마디면 끝나버려요. 그런데 어린아이들만 그때그때 다릅니까? 츠빙글리는 그렇게 보지 않고 노인도, 어른들도 마찬가지에요. 그때그때 달라요.
츠빙글리에게 중요한 것은 구원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속성이 중요해요. 하나님의 속성을 아는 자가 구원 받아요. 구원이 중요한 게 아니고. 츠빙글리 입장에서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이 결합되어서 나온 거예요. 그래서 초반에는 타락 전에는 성부가 담당하고 타락 후에는 성자가 담당해서 공의도 만족하고 사랑도 만족하고. 됐다! 하나님의 속성 다 만족했잖아요. 그리 알면 하나님을 아니까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구원받는다. 모든 것이.
우리가 이러한 츠빙글리의 논조에 대해서 그럼 이걸 이렇게 주장하는 교인들도 있고, 여러 가지 있을 수가 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 뭔가 답변을 해야 되고 반박을 해야 되겠죠. 이게 복음적이 아니라고.
그래서 제가 129페이지, 츠빙글리 바로 밑에 이렇게 했죠.
[츠빙글리는 그의 '섭리론'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스콜라주의적으로 사고한다는 비판적 평가를 받아 왔다.]
이제 쭉 들어보니까 상당히 스토아학파적이고 철학적이죠. 유신론적인 철학적인 뉘앙스가 강하죠.
여기 131페이지 봅시다. 131페이지 밑에서 열 번째 줄에.
['선택은 신앙의 귀결이 아니라 신앙이 선택의 귀결'이라고 간주하면서 선택되지 않은 자들은 믿을 수 없다고 했다. 신앙은 선물이 신앙의 선행은 인간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열매를 맺는다.]
좀 어려운 게 있는데, 제가 질문 하나 던지겠습니다. 천주교에서 볼 때 신앙은 뭐냐 하면, 신앙 자체가 행함의 일종입니다. 그런데 개신교에서는 뭐라고 봅니까? 행함은 따로고 신앙 따로죠. 개신교에서 뭐라 합니까?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해서 그 믿음은 어디다 포함 안 됩니까? 행함에다 포함 안 시키는 그런 쪽으로 신앙을 따로 떼어내지요. 따로 떼어 논 논지가 어디에 근거해서 따로 떼어 놓습니까? 행함은 인간에서 나오지만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여기서부터 주어진다 이 말이죠.
그런데 츠빙글리 입장에 의하면 츠빙글리는 인간의 행함을 인간의 자리에서 나오는 행함이라 이렇게 굳이 주장할 필요가 없다는 거죠. 그렇게 구분할 필요가 없다는 거죠. 인간이 행함이 됐든, 믿음이 됐든 상관없이 전부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함 속에서 이루어지는 거다 말이죠. 그런데 너희들은 자꾸 이거는 행함이고 저거는 섭리다 이렇게 둘로 나누느냐 이 말이죠. 그 말 들어보니 그 말도 맞는 거예요.
오줌 누는 것은 하나님 접근에 포함 안 되는 겁니까? 그것도 은혜 아닙니까? 오줌 누는 것은 자기 속에서 나온 거니까 자기 행함이고, 예수님 믿는 것은 그건 하나님 은혜고. 그렇게 구분하지 말란 거죠. 그러면 개신교에서 츠빙글리 보고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러면 오줌 누면서 구원받나? 뭔가 구분해야 될 것 아닌가? 그렇다면 개신교에서 말을 바꾸어야 되죠. 인간에서 나온 것은 행함이고, 이러지 말고 무엇을 고백하느냐에 따라서 신앙이냐, 아니냐가 또 구분되잖아요.
그런데 그것도 문제 해결 안 돼요. 그런다고 문제해결 되는 게 아니고 더 꼬이게 만듭니다. 무엇을 고백하느냐?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면 신앙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 않으면 신앙 아니다. 이렇게 이야기해도 또 문제가 돼요.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같이 고백해도 니가 고백하는 고백은 신앙이 아니고 내가 고백해야 신앙이 돼버리거든요.
131페이지 밑에서 다섯 번째.
[루터와는 달리 츠빙글리에게서 그리스도의 인간성은 신성에 대한 지나친 강조 때문에 뒷전으로 밀려난다.]
그러니까 츠빙글리는 예수님의 인간성, 십자가 죽음과 고난과 아픔, 이런 것은 시시한 거예요. 별 중요하지 않아요. 다만 예수님이 속에서 뭐가 있다? 하나님의 자비성과 하나님의 속성, 공의로움과 자비로움, 그것이 내려앉는 것, 하나님의 속성이 중요한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껍데기고 그 안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속성, 공의로움과 그리고 자비, 사랑, 그것이 더 중요한 겁니다.
그래서 성만찬 논쟁에서 유명한, 츠빙글리의 성만찬 논쟁이 뭡니까? 이것은 살이고 떡이다 할 때에 예수님이 실제로 임재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루터 쪽에서 주장하잖아요. 이 성만찬 할 때 주께서 임재 한다. 츠빙글리가 말하기를 그건 상징이다. 임재 하기는 뭘 임재 해? 그건 상징에 불과한데. 그냥 폼 잡는 거다. 아무것도 아니다 이 말이죠.
132페이지 봅시다.
[츠빙글리는 루터처럼' 말씀과 성령'의 순서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 '성령과 말씀'의 순서로 이해했다. 특히 그에게는 성령은 외적인 수단(예를 들면 세례나 성만찬)과 동일시되지 않는다. 그러나 츠빙글리는 성령과 외적수단을 급진주의자들처럼 과격하게 분리시키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건 중요한 문제 아니니까 그냥 넘어갑시다. 밑에 이야기는 제가 아까 이야기한 거고요.
132페이지 밑에서부터 청교도가 나옵니다. 132페이지 중간에 보면,
[츠빙글리의 영향은, 청교도들에게는 '내적 확신', 다시 말해 '성령의 확신 교리'로 이어진다. 청교도들은 성경의 명령에 따른 경건한 도덕생활을 준수했고]
그러니까 아까 루터는 말씀이 먼저고 성령께서 그 말씀을 가지고 적용한다 하는 게 루터교라면, 청교도에서는 말씀의 문자적인 신학적인 해석이 아니고 청교도니까 네덜란드 개혁주의와 다릅니다. 아까 구분하라 했지요. 제가 지금 청교도 이야기합니다. 네덜란드 개혁주의 말고, 청교도들은 경건생활이 중요하지요.
그러니까 말로만 입술로만 하는 것이 능력이 아니고 실제로 행동으로 옮겨줘야 능력이다 이 말이죠. 그게 성령에 의해서 뭔가 달라져야 되거든. 사람이 성령을 받았다면 다른 면모를 보여줘야 되는데 그 다른 면모를 성령의 열매라고 보는 것이 청교도들의 주장들입니다.
[사치와 허례허식을 반대했다.] 청교도들은.
그 다음에 청교도 이야기 계속해 봅시다. 132페이지 밑에서 여섯 번째.
[청교도는 어떤 면에서 영국 교회의 화려한 예전과 로마주의적 복권적 경향을 반대하고 나섰던 다양한 그룹들로 볼 수 있고, 이들 가운데는 캘빈, 츠빙글리 그리고 유럽의 복음적 재침례파적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함께 공존하고 있었다.]
청교도가 정치제도니까 자기 성향들을 보였겠죠. 초 교파적이다 말이죠.
[모든 궁극적 권위를 성경에 둠으로써 교회와 정치, 사회의 문제를 개혁하려고 했던 개혁주의 영성을 잇는 운동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청교도의 특징을 정의해 봅시다. 지금 청교도하고 있으니까. 츠빙글리 신학을 그렇다고 하고. 청교도의 특징을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지요. 하나는 경건주의, 경건주의 말고 경건성. 경건주의라 하면 독일의 그거니까, 경건성. 경건성을 성령의 열매로 봅니다.
두 번째는 뭐냐 하면, 경건성에서 나온 건데 사회개혁프로그램. 사회개혁프로그램이니까 결국은 경제문제, 정치문제, 사회적인 문제, 문화적 문제, 모든 면에 있어서 경건한 모습으로 사회를 변화시키자 하는 그러한 추동력, 드라이브. 밀어붙이려는 그런 성향이 강하지요. 청교도들이. 그것이 어디에 포함됩니까? 경건생활 중 일부로 포함되지요.
이러한 청교도에 충실한 사람 중에 한 사람이 바로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설교집이에요. 에베소서 강해, 영적 생활 이런 것.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영적 생활 할 때 제가 아까 영적이란 뭐라 했습니까? 예수님의 고난 받음이 영적이라 봤는데, 로이드 존스의 영적 생활 할 때 영적은 그게 아니고, 사회가 개혁되는 걸 영적으로 본 거예요.
사회개혁을 저는 육으로 보거든요. 육으로 보는데 영은 어디에만 영이다? 예수님의 육이 영으로 본 거예요. 저는 예수님의 육체 실현 곧 영이에요. 그리고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그 사람만이 영적으로 지배받은 상태고. 영이 아니고 영적으로 지배받은 상태고, 영은 예수님의 영광스런 육, 그게 영이에요.
예수님의 영이라는 것은 육과 영이 분리해서 영이 나온 게 아니고 우리 육과 예수님의 육과 분리해서 예수님의 육을 영이라 한다 이 말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성경적으로. 육 따로 신비적인 영 따로 있는 게 아니고 그것은 육에서 지어낸 상상력이고, 우리의 육과 아담에 속한 육과 예수님의 육과 대비해서 우리 육은 육이고, 예수님의 육은 영이다 말이죠.
성령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영적 생활을 할 때 그 예수님의 영적 생활은 성령에 의해서 영적 생활은 바로 예수님의 고난 받는 그 생활 자체가 육체로 인해 고난 받는 예수님 육체로 아픔을 느끼는 그 자체가 주님께서 보여주는 영적 생활이에요. 이 세상으로서 시련 받는 그런 거예요.
그 대신 이 세상에는 예수님 오시기 전에 또 오시고 난 뒤에 이 세상은 뭐로 되어 있습니까? 육과 영이라는 이분론에 의해서 마귀가 만든 신학이 형성되어 있지요. 육과 영. 육은 쇠퇴하지만 영은 변함없이 영원하다. 이러한 스토아학파적인 그런 사고방식이 있기 때문에.
내가 보기에는 이 두 개 자체가, 그러니까 니고데모가 어떻게 하면 하늘나라에 갑니까? 영적인 하늘나라 생각을 했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니가 어떻게 하늘나라에 갑니까? 하는 사고방식 자체도 어디에 속해 있다? 예수님 보시기에는? 육에 속한 이유가 뭐냐 하면, 니고데모가 아담에 속했기 때문에. 아담에 속한 인간은 육이에요. 아무리 영적인 생활을 해도 육이 되고, 영은 예수님 몸에서 나온 것만 그게 영이고, 나머지는 다 육이고 그렇다 이 말이에요.
따라서 청교도의 그건 다음 시간에 해야 되겠네요. 사회개혁프로그램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잘 들어보세요.
여기 들어있는 것은 개인적인 경건 아닙니까? 개인적인 경건에서 사회개혁은 사회적인 경건 아닙니까? 어떻게 될 수 있습니까? 이 사람은 된다 했거든요. 이 사람들이 청교도들이 개인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