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개의 고원]
[ 천개의 고원 ] 질 들뢰즈 ․ 펠리스 가타리 공저 김재인 역 새물결(서울:2001)책의 제목에서 나타나 있듯이 지형적으로 세상 만사를 탐색한 책이다. 고원이란 산 정상 부분에 있는 평평한 판을 말한다. 일단 안정되어 있어 보인다는 뜻이다. 이런 숱한 안정된 판들의 양상으로 구성되어 있는 현 세계라는 것이다. 각자 독립되어 있기에 독자적인 질서를 포획하고 우뚝 서 있다.하지만 처음부터 그랬을까? 마치 지구가 처음부터 오늘날 지구 모습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분출하는 용암과 공중에 날리는 시커먼 화산재와 지진으로 인하여 쩍쩍 갈라지는 땅 조각들로 혼잡을 이루는 무정형의 시대에서 ‘지층’이 등장하면서 안정을 찾아 가는 것처럼 오늘날의 사회 양상이라는 것도 원초적인 혼돈성을 품고 있다고 보고 있다.그런데 저자는 안정의 양상인 ‘지층’을 가지고 ‘신의 심판’이라고 말한다.(p. 86, p 118) 그것은 뭐든지 형식을 지니고 질서를 품고 있다는 것은 그 집단 자체 내에서 독보적인 원칙과 법으로서 계속해서 주위에 걸려드는 무형적인 사건들과 사물들을 규합하고 통제하고 지배하고 종속시키려는 시도를 신께서는 획책하게 된다는 것이며 이 세상 안에 지금 신으로부터 심판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증거들이다.따라서 지층화되지 않는 상태가 신의 심판이 아직 감행되지 않는 상태를 말하는데, 그 상태는 곧 혼돈의 상태이다. 진정 생명의 흐름이란 곧 신의 손길 그 자체이며 신의 손길을 포획해서 지층화 시키고 특정 질서에 포획시켜 그 흐름을 강제로 차단하는 것은 신께서 시도한 심판 행위이다.이것이 무엇이냐 저것이 무엇이냐로 규정 당하기 전의 상태, 이것이야말로 참된 질서라는 것이다. 소리의 흐름이든, 빛의 흐름이든 그것은 그 자체로 이 세상의 본질이다. 바로 이러한 상태로 이 지구는 끊임없이 이러한 신의 심판을 벗어버리고 달아나려고 한다. (p 86) 그것이 탈지층화이고 탈코드화이고 탈영토화이다.하지만 신은 바닷가재요 심판관이다. 날카로운 집개를 가지고 쪼개고 쪼개고 붙이고 또 붙인다. 이 쪼갬과 붙임을 한꺼번에 표현한 용어로서 ‘분절(分節)’이라고 한다. 이 분절은 이중분절로 진행된다. 이것은 신의 심판 능력이다. 그저 욕망만 있고 아무 것도 없는 (기관이나 질서나 조직이나 아무 것도 없는 무정형의) 불안정한 입자 상태에서 준- 안정적인 분자 단위(질적인 성질을 비로소 갖게 되는)로 질서 잡히는 변화가 발생되면 이것이 첫 번째 분절이다.이것을 비유적으로 아랫 지층 위에 생긴 윗지층이라고 말한다. 지형적인 용어를 저자들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지층이란 퇴적물이 쌓여 눌림을 받지 아니하면 형성되지 않는 법이다. 일단의 지층이 나타났다는 말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각가지 유형의 사물들이 구별되기 시작했다는 말인데, 이 웃지층에서는 각가지 독자적으로 것들로 달라지는 변화들을 두 번째 분절이라고 말한다.지질적인 용어로 표현하자면, 첫 번째 분절을 퇴적 작용이라고 한다면 두 번째 분절은 습곡작용이다. 그런데 첫 번째 것을 ‘실체’라고 오해하면 안 되고 두 번째 분절을 ‘형식’이라고 오해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도리어 각각은 따로 실체와 형식, 둘 다를 갖는다. 형식이란 실체라는 재료에 원칙과 질서를 부여한 것을 두고 말한다.단지 두 번째 분절이 첫 번째 분절보다 더 경직되어 있어 변화의 조짐이 훨씬 줄어들어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도곤 족 사람들에게 있어 팔꿈치나 무릎이 없다고 보고 있다. 우리가 보기에 있더라도 그들에게는 의미가 없는 것이다.그런데 대장장이가 다루어야 될 도구가 도입되면서 그 도구를 사용해야 될 필요를 느낀 대장장이 도곤 족 사람들은 비로소 자신에게 팔꿈치나 무릎이 새로 발생된 것으로 알게 된다. 그들은 대장장이 일을 위한 노동을 시행하기 위해 고유한 관절을 가진 새로운 형태의 인간이 되어야 했다. 이 새로운 형태의 인간은 그 전에 인간상과 비교해 볼 때 상대적으로 ‘표현’에 해당된다고 말할 수 있고, 그 전의 인간은 ‘내용’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따라서 특정 사물이나 사건이 항상 내용이고 특정 사물이나 사건은 항상 표현에 해당된다는 말은 성립될 수 없고 서로가 서로를 상대로 해서 전후 대비해 볼 때, 1차 분절은 모두 ‘내용’에 해당되고, 2차 분절은 모두 표현에 해당된다고 말 할 수 있다. 2차 분절이란 1차 분절 위에 새로운 기능과 용도에 적응하기 위해 새롭게 형성된 의미라고 보면 된다.새로운 기능과 용도란 개별적으로만, 혹은 단독적인 의미를 발산하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으로 하나가 되어 여럿이 뭉쳐야 비로소 고유한 의미를 발생되는 식으로 움직이기도 한다. 소속되어 있는 개체끼리 상호 공명(共鳴)한 효과이다. 이 새롭게 발생된 의미가 표현이다. 표현한다는 것은 언제나 신의 영광을 노래하는 것이다.(p 93) 모든 지층은 신의 심판이기 때문에 동물과 식물, 서양란과 말벌뿐 아니라 바위나 심지어 강 그리고 지구에서 지층화된 모든 것이 노래를 부르고 자신을 표현한다. 즉 심판을 통해 벌리시는 신의 활약상과 존재함과 솜씨에 대해 피조세계는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이러한 경향은 자연세계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피조물의 일종인 인간의 신체로부터 시작해서 온 사회형식에 다 퍼져있다. 이것은 저자들은 ‘거대 지층군’이라고 한다.(p122) 도구-손이라는 짝과 언어- 얼굴이라는 짝이 바로 그 증거들이다.손이라는 형식은 내용층에서 단순한 형식이다. 하지만 표현층에 와서는 도구라는 활성화된 형식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표현층에서의 실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손이다. 이것이 도구에 기여한다. 이런 식으로 내용과 표현을 구분 짓지 아니하면 손이 지닌 진정한 의미를 제대로 파악해 낼 수가 없는 것이다.손은 과거의 앞 발이었다. 앞으로 이동하고 뭔가 쥐기 위한 도구였다. 물론 원숭이들에게 오늘날에는 여전하다. 원숭이라는 유기체가 몸체에서 삐져나와 보여주는 앞 발이라는 이름의 나름대로 손은 원숭이 세계라는 영토화에서는 그저 앞 발 기능 뿐이다. 하지만 인간의 손은 거기서 탈출한 결과이다. 이 탈출을 ‘탈영토화’라고 한다.기존 세력권에서 벗어난다는 말이다. 달리 말해서 기존 코드(법과 규칙, 규례, 원칙)을 벗어나 탈코드화 되었다는 말이다. 탈영토화는 필히 재영토화로 치닫게 되는 조건이 된다. 이로서 새로운 의미 지도가 펼쳐진다.입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원래 입은 먹는 기계였다. 말하는 기계로서의 입은 이미 신체를 떠난 비신체적 현상이다. 이것이 바로 ‘표현’이다. 머리와 얼굴을 비교하면 분명해진다. 머리는 신체의 일부이지만 얼굴(표정)은 신체로부터 탈영토화된 표면이다. 그 얼굴에 달려있는 말하는 기계로서의 입은 내용층에서는 음성을 발산하기에 시간적으로 순차적으로 하나씩하나씩 기호가 벌어진 입을 통해 쏟아져 나온다.하지만 기호나 언어는 그런 선형성(線型性)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초선형적으로 작용하게 된다. 명령하고자 하는 잉여적 본질을 드러내고 이것을 위해 음고와 음색과 음조, 그리고 사람의 안면 표정까지 동원된다는 점에서 표현층이란 형식으로 분석할 수 없는 대상이다.예를 들면, “물!”이라는 말이 어떤 음색과 고저가 부가되느냐에 따라 “물 가져와!”에 해당될 수도 있고 “물 조심해!”라고, 혹은 “엄마 물 좀 주세요 고추가 너무 메워요”에 해당되는 표현일 수도 있다. 명령은 반드시 응답을 요구하게 된다. 명령은 ‘선고’ 즉 ‘사형선고‘이다. (p211) 저자들은 이런 명령이 인간 세계에서 도주를 유발하는 요인으로 보고 있다. 훈육받지 않으려면 내 앞에서 도주하라는 것이다. 물론 새로운 창조를 위한 도주이다.언어나 기호가 이처럼 명령으로 의사소통에 나선다는 것은 ‘권력의 배치’와 질서부여를 위함이다. 질서에는 두 가지 종류의 질서가 있다고 저자들은 주장한다. 하나는 한 지점으로 끌어당기는 식으로 언어를 사용하는 전제군주적 질서가 있다면 다른 하나는 카리스마적인 사랑과 감정에 설득당해서 그 질서로부터 도주하기 위한 질서가 바로 그것이다. 저자들은 그 예를 구약 역사를 통해서 증명한다.구약의 신은 사랑과 보호와 감정으로 호소하는 신이다. 이 신은 기존의 모든 위협과 명령과 협박에서 오는 위험들을 짊어지고 탈출해 나가는 신이다. 신이 스스로 살해당하는 동물이 된 것이다. (p237) 모든 명령으로부터 벗어남이다. 히브리인들이 이 신을 따라 나선다. 이것은 신이 인간 세계를 배반하는 몸짓이다.신은 자기 얼굴을 인간 세계에 보여주지 않는다. 이 얼굴 돌리기에 합세한 자가 곧 예언자들이다. 일찍이 자신을 외면한 신을 외면한 가인은 죽음을 피해주는 기호로써 보호 받으면서 탈영토화의 선을 따라 탈출이 감행된다. 이것은 일종의 유예된 형 집행이다. 이런 배신과 배반의 분위기가 가득 찬 체계를 가지고 신은 새로운 계약에 나선다.새로운 신의 정의를 알기 위해 긍정적인 배반자가 되도록 조치하시는 것이다. 요나 선지자가 그러하고 모세가 그러하다. 모세는 말년에 배반이라는 위대한 찬송가의 말들을 받는다.(p 239) 선지자와- 사제와는 달리 예언자는 근본적으로 배반자이다. 따라서 예언자는 신에게 충실했던 자들보다도 신의 명령을 더 잘 실현한다.요나는 자기의 죽음 대신 박 넝쿨이 시들어 죽어야 계약이 갱신됨을 알게 된다. 스스로 도주가 가능했던 삶의 죽음의 경계선이 이제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서 새로 지정된다. 이런 배반의 체계를 보편적으로까지 밀어붙인 사람이 바로 예수님이다.사람들은 예수님에게 그가 신의 아들임을 증명할 수 있는 기호를 요구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지정해 놓은 경계선 밖으로 뛰쳐 나가 도주해 버린다. 사람들은 말한다. 예수가 신을 배반했기에 신은 그를 버렸다고! 하지만 신은 바로 그 예수님의 배반의 얼굴로서 계약을 갱신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몰랐다. 예수님은 단순히 반(反)-기표적이 아니라 후(後)-기표적이었다.이러한 도주는 거시정치에는 모순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지만 개인적으로는 무의식적 욕망의 산물이다. 대중 운동은 계급의식을 깨부수면서 진행된다. 그 운동은 항상 변이의 과정 중에 놓여 있으며 형태적 본질을 갖지 않는다. 여기에 비해 국가는 항상 구성원들을 포획하려 한다. 즉 지배 영토적 공간을 확보하고자 하는 것이다.포획은 욕망의 흐름을 축적(저장貯藏)개념으로 작동한다. 축적에 해당되는 것은 토지와 노동과 화폐이다. 국가는 이 축적에 의거하여 원시 욕망의 기계적 흐름을 종속시켜 단일 코드에 묶어 초코드화시킨다. 그들을 노예와 시키는 것이다.이런 고대 국가의 초코드화의 균열을 비집고 봉건제, 군주제, 자치도시 등 탈코드화의 양상이 일어난다. 이것은 종속이 아니라 예속을 의미한다. 고대 국가에서 통용되던 노예란 상급 단위가 인간을 통제하여 그를 기계의 일부분으로 취급하는 것이고, 예속이란 상급 단위가 인간을 기계와 연관된 주체로 취급하는 것이다.근대 국가에 들어와서는 주체자인 인간이 스스로 돈의 노예가 되고 예속화 되도록 자진해서 기계가 되겠다고 나서는 시기이다. 왜냐하면 기계란 자본, 곧 가치를 품고 있는 귀한 가변자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 나 할 것 없이 남들로부터 자기 존재의 가치가 자본적으로 넉넉함을 널리 선전하고 싶은 것이다. 그래야 이 사회에서 배제당하지 않고 쓰임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새로운 종류의 기계적 노예화를 시도한다.예를 들어 TV 시청자의 경우 TV 기계의 한 부품으로서 TV에 접속된다. 그렇게 되면 그에게는 TV와 분리될 자율권은 없다. 단지 자신이 접속해 있고 같은 몸체처럼 움직이고 있는 ‘나=TV'가 보다 더욱더 자신을 만족시키고 행복케 하는 훌륭한 기계이기를 원할 뿐이다. 더불어 함께 기계이고 싶다는 것이다.요즈음 청소년들에게 있어 휴대폰과의 관계를 이를 대변한다. 만약 휴대폰을 능숙하게 다룰 줄 모르거나 혹은 그 휴대폰을 생활화하지 않는 청소년이 있다면 이 세계에서 배제된다. 기계와 공존하고 공멸하는 세계가 된 것이다.저자들은 주름진 공간으로부터 매끄러운 공간으로 유쾌한 탈주를 권한다. 유목민들처럼 늘 탈출과 탈출을 반복하기를 원한다. 그것이 경직된 삶이 아니라 유연한 삶이고, 이 유연한 삶이 본디 대자연의 원질은 무정형적인 욕망의 본성에 합치된다고 보고 있다.(평가) 저자들의 주장은, 그동안 물질로부터 발생된 인간성을 염두에 두지 않고 관념만 따지던 철학계나 일반 학문에 부실함을 밑바닥부터 뒤엎어버렸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 정확한 관념을 추구한다는 것이 결국 권력과 자파 세력 규합이라는 정치형태로 이어져 날카로운 철책선을 저마다 둘러치는 전제군주들만 낳은 것이다.관념에 의거한 질서만 따지게 되면 소위 ‘나만의 나의 전공분야’라는 것이 따로 생겨난다. 실은 그 모든 것이 신의 심판인 것을 왜 모르냐고 저자들은 다구치고 있는 것이다. 정당이 그러하고, 국가가 그러하고, 공장이 그러하고, 학교가 그러하고, 교회가 그러하고 법원이 그러하고, 군대나 병원이나 감옥이 그러하고, 각 상가나 영업장과 재벌과 기업들이 그러했다. 심지어 아파트 동마저, 각층의 가정마저 그러했다.따라서 ‘나의 전공분야’라는 것이 결코 용납될 수 없고 도리어 인간의 본질은 발생학에서 말하는 무정란(無精卵) 상황으로 돌아가 있어야 한다. 혼돈의 상태, 아직 팔이 될지, 척추가 될 지 심장이 될 지 신경조직이 될 지 정해진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그 원초적 무정형(無定型)에서 인간의 본질을 다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분자나 원자 세계에서 작용되는 물리적, 화학적 법칙들이 냉정하게 여전히 우리 신체 안에서 여전히 작렬하고 있다면 진정한 ‘고른 판’은 그곳만의 세계이며 추상적인 관념의 세계일 수 없다는 것이 저자들의 생각이다.무형의 물질에서 분화가 일어나 이미 인간이 되었다고 해서 원초적 그 무형의 힘이 사라져버린 것이 아니라 도리어 지금도 끊임없는 분화와 분화를 유발시키는 그 막을 수 없는 대자연의 기본 흐름에 순응해야 한다는 것이다.하지만 왜 의미라는 것이 인간 위주로 수립되는가에 대해서 저자들은 알지 못하고 있다. 즉 표현이라든지 내용이라든지 실체라든지 형식이라든지 하는 구분도 모두 인간들에게는 주위 사물이나 사건에 대해서 나름대로 의미를 제공할 정당한 권리가 있음을 전제로 한 구분이다.즉 예수님은 이 세상의 사물과 사건에 대해서 어떤 의미를 내리고 있는가를 저자들은 고려하고 있지 않다. 저자들은 이미 인간들이 평소에 의미를 가지고 (=과학적 성과들) 신의 행위에 담긴 의미와 연결을 시도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런 방식은 마치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 예수님을 찾아와 대화를 시도하는 사고방식에 불과하다.예수님의 답변은 간단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다.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가 없다.”이다. 저자들은 자꾸만 포기하면서 무엇마저 포기해야 하는지를 모르고 있다. 그것은 십자가 앞에서 서서 세상을 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영으로 전달되는 진리는, 이 우주 안에서 일어나는 사물과 사건들이란 모두 십자가 복음을 증거하기 위한 배치하는 것이다.결국 저자들에게는 십자가 사건의 독보성을 발견되지 않는다. 그들이 아는 예수님은 십자가 지기 위해 일하신 예수님이 아니라 그저 한 때 십자가 지셨던 예수님일 뿐이다. 모든 것을 뭉개기 위한 신의 심판이 아니라 십자가 의미만을 온 우주를 덮게 하시려는 모든 것을 뭉개시는 신의 심판인 것을 그들은 이 책이 쓰여졌을 때까지 여전히 모르고 있다.“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을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한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고린도후서 10: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