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광주 강의(06. 6. 23) 16-1
Re..광주 강의(06. 6. 23) 16-1
이름 : 서경수(IP:)
광주 강의(06. 6. 23) 16-1
자, 오늘 강의 시작하겠습니다.
고린도후서 10장부터 해 봅시다.
고린도후서 10장부터 성경에서 제일 어렵다고 할 수 있는 부분이 나와요. 그것이 뭐냐 하면, “육체”인데, 육체에 대해서 나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6절에 보면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리스도를 육체대로 알지 않는다는 말은, 예수님이 현재 실존하는 것, 예수님의 계심이 우리 인간들이 육체를 갖고 있는 것처럼 그런 식으로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 예수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눈에 안 보이면 없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눈에 안 보여도 계십니다.
우리는 눈에 안 보일 때 사람을 험담하고 눈에 보이면 헤헤거리면서 언제 욕했냐는 듯이 입을 다무는데, 예수님께는 그것이 통하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든 안 보이든 우리가 예수님께 어떤 혜택을 받았는가를 다 아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육체대로 알지 않는 거예요. “육체”라는 한계에 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5장 16절에 보면, 우리들도 지금 그러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고린도전서 공부할 때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런 이야기 했지요. ‘지금 우리가 육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하나다.’
인간의 육체는 공간적인 제한이 있어서 멀리 있으면 안 보이지요. 이것은 떨어져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두 사람이 밭을 갈다가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합니다. 분명히 떨어집니다. 그런데 영으로는 여러분과 내가 같이 있다고 바울이 말했습니다. 이것이 대단한 표현입니다.
육체는 각자 주민등록 번호가 다 다릅니다. 그러나 영으로는 같은 주민등록 번호를 갖게 되지요. 생명책에 같이 있다는 말입니다.
육체로 있는 것과 영으로 있는 것을 구분했습니까? 구분했으면 ‘우리의 모임은 육체로 모이지 말고 영으로 모입시다.’라는 말이 성립이 되지요. 육체로 모이는 것이 뭔지 모르고, 영으로 모이는 것이 뭔지 모를 때는, ‘육체로 생각하지 맙시다.’라는 말도 의미가 없어요.
그러나 성령을 받은 사람은 육체로 있다는 것이 뭘 의미하는지 알고, 영으로 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육체로 모이지 말고 영으로 모이자는 말이 성사가 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고린도후서 10장 들어가지 전에 쉬운 것부터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24장 잠시 봅시다.
13-15절을 보겠습니다. “그 날에 저희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25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촌으로 가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저희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
예수님이 영으로 계시기 때문에 육체가 없는 것입니까? 아니지요. 육체가 있지요. 육체가 있으니까 두 사람이 걸어가는데 예수님이 동행해서 세 사람이 되었잖아요. 무슨 이야기냐 하면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가 자기 옆에 어떤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몰랐어요? 분명히 알았지요. 다만 예수님인지는 몰랐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의 예수님은 어떤 예수님입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이잖아요. 부활하신 예수님이어서 육체가 없다는 것이 아니고, 육체는 있지만 부활하신 육체지요. 그러면 이 예수님의 육체는 육으로 아는 것입니까, 영으로 아는 것입니까? 영으로 아는 거지요.
그러니까 영으로 안다는 말을 육체가 없다고 이야기하면 안 돼요. 언제든지 육체로 전환될 수 있는 그런 영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에도 나와요. 거기에 보면 사도 바울에게 주께서 곁에 서서 이야기했다고 했습니다. ‘바울아, 힘을 내. 네가 가는 길을 내가 이미 알고 있다. 너의 가는 길을 내가 앞서 간다. 그렇기 때문에 너는 내 길을 뒤 따로 오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자신이 개척해서 길을 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먼저 앞서서 가십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걷는 것도 마찬가지지요.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을 때 그는 자신의 믿음을 믿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믿음도 믿지 않았어요. 그는 예수님만 바라보면서 갔습니다. 예수님만 보고 갈 때 ‘나는 지금 예수 믿고 있다’라는 생각도 안 들었다는 말입니다.
오늘 강의의 주제가 그것입니다. 자신의 믿음을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 믿음을 믿으면 자신이 주인공이 됩니다. 왜 그러냐 하면, 육체의 관계에서는 나를 바라봐야겠지만 영적인 관계에서는 나를 바라보는 그 순간에는 영적인 관계가 잊혀지고 사라져요.
엠마오 사건을 다시 한 번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지금 제가 엠마오 사건을 거론한 이유는 단지 두 제자가 길을 가는데 예수님이 같이 걸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17절부터 보면 예수님과 이야기를 주고받고 하지요.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고 예수님이 물었고, 그들이 대답하기를 ‘나사렛 예수라는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는데, 이 분은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라고 바랐다. 그리고 어떤 여자의 말이 그가 무덤에서 살아났다더라.’는 이야기를 서로 했다는 것입니다.
오 목사님 내외분이 길을 가는데 제가 곁에서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진지하게 하십니까? 하고 물으니까, ‘이근호 목사라는 사람이 대구에 계신데 광주까지 와서 복음을 전한다’는 이야기를 했다는 것입니다.
지금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의 모습이, 예수님을 지금까지는 육체로 보는 것입니다. 왜 육체로 보느냐 하면, 자신들이 육체기 때문에 그래요.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영적인 관계를 집어넣습니다.
26-27절에 보면,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우리가 사도 바울의 서신을 공부하면서 구약의 모세로부터 결부되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했지요. 예수님의 하는 일이 그냥 예수님 개인의 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되고 구약에 있는 모세와 선지자와 결부를 시켜야 예수님의 해석이 올바른 해석이란 것이 나오잖아요. 누가 그렇게 해석했는데요? 예수님 본인이 그렇게 했어요. 빌립 집사도 이디오피아 내시를 만날 때 뭐라고 했습니까? 이사야를 폈는데 거기에다 뭘 집어넣었어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집어넣어서 그리스도를 끄집어내지요. 이사야를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고.
다시 이야기 할까요.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을 때, ‘야, 베드로가 물 위를 걷는구나. 물 위를 걸어서 예수님께 나아갔구나.’ 이렇게 해석하면 잘못된 해석입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걷는 것을 통해서 우리는 뭘 끄집어냅니까? 예수님의 능력이 그에게 임했다는 것을 끄집어낼 수 있어야 해요.
모세 이야기를 하면서도 모세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어떻게 일했는가를 보면서 그리스도를 끄집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것이 참 어려운데, 어떤 분이 글에 ‘하나님의 은혜로 몸이 아픈 사람이 건강을 얻었다.’고 할 때, 이것을 반박하려면 ‘예수님께서 어떤 일을 했습니까?’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24장 31절을 보면, “저희 눈이 밝아져”라고 되어 있지요. 저희들의 시력이 좋아졌다는 말입니까? 백내장이 끼어 있었는데 나아서 밝게 보았다는 것입니까? 백내장에서 나아 보게 된다면 이것은 육체로 아는 것입니다. 영은 반드시 외부의 능력이 와야 육이 영이 되는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백날 공부해도 영이 안 돼요. 육으로 난 것은 육으로 끝나요. 옆에 같이 동행해도 예수님인줄 모르고 같이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육입니다. 우리의 육을 인정해야 돼요. 하지만 외부에서 오는 영이 임하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영으로 우리와 함께 계신다.’가 되지요. 그럴 때 우리의 육체를 영이라고 합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해 봅시다.
영이라는 것은 예수님과 우리가 육체 아닌 관계로 관계 맺어진 것을 영이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이 이야기했지요. 우리는 육체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같이 있다고 했지요. ‘고린도교회 교인들아, 내가 멀리 떠나 있지만 영으로는 너희와 함께 있다.’는 말을 아주 대범하게, 서슴없이, 일반인들에게 이야기하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 그런 말을 했어요.
예를 들어, 제가 현재 광주에 있습니다만 대구 우리교회 교인들보고 하는 말이 ‘여러분, 제가 지금 광주에 와 있지만 여러분들과 함께 있습니다.’라고 하면, 육체로 생각하면 이렇게 되지요. ‘아, 멀리 있지만 우리들에게 신경을 쓴다는 말이구나. 비록 몸은 광주에 가 있으나 대구에 있는 우리들을 걱정하는구나.’ 이런 식으로 이해하지요. 그런데 그것이 아니지요.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를 보세요. 그들도 예수님을 걱정했잖아요. 하지만 그것은 영이 아닙니다. 육체입니다. 관심을 보이는 것과 영과는 달라요. 영은 눈이 떠져야 가능한 것입니다.
영이 있을 때는 엠마오 두 제자가 예수님과 헤어져 안 보여도 예수님과 헤어진 것이 아닙니다. 영이 되었으니까 예수님께서 그들을 다루는 것을 알고 그들이 그것을 인정하겠지요.
영으로는 헤어짐이란 것이 성립이 안 됩니다.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았기에 이제 예수님이 곁에 계시지 않아도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는 말을 하지요. 늘 예수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가 동일하게 그렇다는 것입니다.
지금 신학이 ‘육체에서 영으로 다가가는 방법’을 이야기하려니까, 제가 신학을 볼 때 참 괴심하고 밉고 그래요. ‘목사들아, 신학자들아! 믿음 없으면 혼자 믿음 없으면 되지 왜 믿음도 없는 것이 믿음으로 위장해서 유포하는가?’ 말이지요.
에스겔에 보면 이런 말이 있어요. 하나님이 유다 나라 거짓 선지자에게 벌을 내리시기를 ‘너희들은 구원될 자를 구원 안 됐다고 이야기하고, 구원 안 된 자를 구원 받았다고 거짓말을 한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 당시 목자들이 믿음이 없기 때문에 진짜 구원 받은 사람은 적으로 간주하고, 구원과 거리가 먼 사람을 형제로 여기고 이런 왜곡된 현상이 일어나요.
지금 고린도후서 10장 들어가기 전에 누가복음의 엠마오를 보고 있습니다.
이 엠마오 이야기를 다시 한 번 해 보겠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예수님이 동행했다는 말은 예수님이 부활해서 그냥 놀러 다니시는 것이 아니라 육적인 자기 사람들을 영으로 만드는 일을 하시면서 지금도 활동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예수님이 와서 영의 한 영역 안에 같이 있지 아니하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그것은 엠마오의 두 제자 이야기고 사도 바울의 이야기와는 관계없는 것 아닙니까? 사도 바울이 그런 이야기했습니까? 라고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인데, 고린도전서 6장 15절에 보면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 나와 있지요.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를 생각하면 이해되지요?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말은, ‘지체 되어야 해. 열심히 기도하면 지체로 간주해 줄게.’ 이것이 아니에요. 지체란, 사지(팔, 다리) 즉, 떨어질 수 없는 사지가 된 거예요. 예수님의 몸에 달려서 어디를 가도 같이 가고, 살아도 같이 살고 이렇게 함께 있는 덩어리라는 것이지요. 이것을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합니다.
이런 표현이 얼마나 대범한 표현입니까? 그리스도의 덩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그리스도에 붙어있는 외향, 외면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 되었으니 너는 너의 것이 아니라 내 것(주의 것)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그렇게 보고, 사도 바울도 그렇게 보면 우리고 공부하려고 하는 고린도후서 10장 이야기는 결국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그리스도의 몸이 된 사람에게만 전하는 편지, 이미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한 영을 받아서 전부 다 한 몸이 된 사이. 그래서 함께 울고 함께 웃는다고 하잖아요. 이것을 그리스도의 한 지체, 형제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참 대범한 표현이에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것을 실제로 안 보고 비유라고 여깁니다. ‘좋게 이야기해서 적당히 그런 식으로 표현했겠지.’ 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것은 어느 정도로 무서우냐 하면, 마태복음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누가 내 형제요 모친이냐?” 그리스도의 형제는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보고 이야기하기를 “누구든지 처나 자식이나 아비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하늘나라에 합당치 않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지키려고 해 보세요. 못 지키지. 왜 못 지킵니까? 우리는 육체이기 때문에 육체가 자기 바깥을 뛰어 나와서 남의 육체를 사랑해요?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단 말입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육체는 영이 될 때 영 되신 주님께서 자기 몸의 지체를 활용해서 이 말씀을 성취시키지요. 이것이 거룩이란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는 누구나 거룩한 성전이에요. 주님께서 자기 지체를 통해서 예수님의 이웃 사랑의 진가를 보이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단독으로 떨어져 나가서 ‘나는 이제 예수 믿었으니까 새 사람 되었다. 이제 나라는 육체를 가지고 이웃 사랑할래.’ 이것은 사기이고 거짓말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이란 것을 모르기 때문에 이런 소리 나옵니다.
지날 주일 설교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산상설교도 못 지키는 인간이 사도 바울의 명령법을 지킨다고? 그런 사기가 어디 있느냐.”고 했습니다. 오른 눈이 범죄하거든 그 눈을 빼버리라는 말씀도 못 지키는 인간이 온유와 양선과 자비를 논해요? 그러니까 사도 바울의 명령은 쉽게 보이고, 예수님의 산성설교는 아주 어렵게 생각해서 그것은 제쳐두고, 이런 것은 그리스도를 육체로 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있고, 내 육체가 있는데, 내 육체가 그리스도의 말씀 지켜서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될 수 있다. 이것은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하시는 일은, 우리의 육체를 흐물흐물 없애 버리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에 붙어 있는 지체로 확인시키는 그런 작업을 지금도 살아 계셔서 하고 계십니다.
너는 이제 육체가 아니야. 육체 있는데요? 그것 있더라도 너는 영이야. 왜 영인데요? 그리스도와 네가 함께 있다는 것을 네가 영으로 알게 되었잖아. 이것이 영이고 영적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고난 받을 때 함께 고난 받고, 그리스도의 형제와 함께 고난 받는 거예요.
자, 여기에서 약간 더 어려운 것을 해 봅시다.
지금까지 한 것도 어려운 것이지만 대충 알았다고 치고, 모른다고 하면 자존심 상하니깐.
그러면 예수님께서 육체에서 우리를 영으로 전환시킬 것 같으면 우리를 아예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지 말고 거기 있을 때 영으로 만들지 왜 지금 와서 육체로 고생시켜 놓고 영으로 바꾸는가?
이사야 53장을 봅시다.
오늘 이사야 53, 54장을 좀 깊게 보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고린도후서 11장이 이사야 54장과 관련된 것이 나와요.
이사야 53장 9절을 보면,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무덤이 어떻게 되었다고요?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예수님께서 악인의 반열에 들어가셨습니다. 이렇게 되므로 의로운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인간들의 모든 육체적 성경 해석법이 전부다 엉터리가 되어버렸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을 현상 수배하는데, 키 170, 나이는 33살, 성별은 남자, 황인종. 이런 자를 찾으면 신고하라고 했단 말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봐도 그런 사람이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얘라. 키 130, 몸무게 32. 그러니까 일본말로 갠또를 잘 못 잡은 거예요. 메시아의 요건을 잘 못 잡은 거예요. 메시아는 어떤 분이다. 의로운 분이다. 메시아는 구름타고 오시기도 하고 거창하게 말 타고 오시기도 하고, 또 불의 심판자로 오신다. 이러한 요건들을 갖추어서 현상 수배 나섰는데, 메시아를 찾기 위해서--
그런데 예수님은 의로운 분으로 오신 것이 아니고 죄인들과 술 마시고 계시고, 남들은 회개하고 금식하는 시간에 술 마시고 있어요. 그리고 구름 타고 오거나 말 타고 온다고 했는데 기껏 노새를 타고 온 거예요. 화려하게 등장할 줄 알았는데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어요. 그리고 불 심판이 있을 줄 알고 세례 요한이 기다리고 있는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고 -- 이런 식으로 활동하시니까 세례 요한도 ‘오실이가 당신입니까?’ 하고 물었어요.
메사아가 오셨는데 자진해서 죄인이 됨으로 말미암아 의인 중에서 메시아를 찾고자 하는 모든 시도는 다 허사가 되고 말았어요. 지금도 신학자들은 의인 가운데서 예수 찾기를 하고 있습니다. 2,000년 동안 계속 하고 있습니다. 삼위일체란 것을 통해서. 예수님은 왜 의로운가? 그것 찾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왜 죄인인가? 이것을 찾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은 어떻게 해서 의로운가? 이것을 찾다 보니까 들고 나온 것이 ‘하나님은 지옥 갈 사람은 선택하지 않았다.’ 이런 논리가 나오는 겁니다. 왜? 하나님께서 지옥 갈 사람을 미리 선택해서 지옥을 보낸다면 그 사람이 죄 짓는 것은 누가 죄 짓게 했어요? 그 사람을 지옥 보내기 위해서는 죄가 있어야 지옥 보낼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죄 짓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고, 결국 하나님이 죄인이 되니까 그럴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거스틴도 그렇고, 칼빈도 그렇고 그럴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바보들아. 그럴 리가 없는 그 장소에 메시아가 있어요.
제 새로 나온 책 제목에 대해서 오해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그 목사의 잘못은 간단하다]고 하니까 내가 목사 비판하는 것을 전문으로 하는 줄 아는데, 그것이 아니고, 저는 책 제목을 [끝없는 용서]로 하자고(하! 고상하다) 두 번이나 말했습니다만, 이 책은 출판사 사장님이, 목사에게 한 맺힌 사람들이 책 읽어보다가 결국 히브리서 말씀에 젖어들도록 하자고 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제 이야기는 자본주의 사회가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번 수련회에 한 번 들어보세요. [그 목사의 잘못은 -- ] 이 내용을 보면, 낙도에 가서 장화를 집어던지면서 왜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느냐? 마누라는 영양실조로 병에 걸리고, 딸은 엄마 아프다고 병간호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물에 빠져 죽고, 도대체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낙도까지 와서 죽도록 충성하는데, 왜 하나님이 나를 안 도와주십니까? 할 때, 그 목사의 잘못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그렇게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일인 줄 몰랐다는 것입니다.
이 목사의 잘못은 자기 나름대로 육체로 생각한 예수 그리스도를 먼저 염두에 두었기 때문에, 이렇게 희생하면 육체의 관점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을 얻을 것이라는 계산으로 흥정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목사도 문제지만 이 목사를 배태한 한국 기독교 전체가 문제에요. 교회가 교회를 망친다니까요. 한국교회에서 가르치는 그 예수가 가짜 예수이기에 그 예수가 진짜 예수인 줄 알고 진짜 예수님에 대해서는 욕설을 퍼붓고 ---
반대급부로 뭔가 돌아올 줄 알았어요. 이렇게 열심히 하면 뭔가 될 줄 알고 그렇게 한 거에요.
그분은 욥기도 몰라요. 황무지에 비가 내리는 것도 주님이 하신 것이고, 밀물이 몰려오는 것도 누가 하신 것입니까?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이지요. 하지만 그렇게 하신 분이 누구예요? 주께서 밀물이 오도록 했어요. 그리고 그 밀물 때 건너가도록 배치하신 것도 주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고.
그 목사는 알아야 해요. 비록 딸이 죽었지만 그 딸이 신앙인이라면 사나 죽으나 영 안에 있잖아요. 육체 같으면 죽음이 있지만 영 안에는 더 이상 죽음이 없어요. 살아도 산 것이고 죽어도 산 것이에요. 이것을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나사로를 보세요. 살아 있잖아요. 무덤에 있는데도 불러내니까 살아서 나오잖아요. 살아 있잖아요. 이것을 기적이라고 하면 기분 나쁘지요. 이것은 실제상황인데.
홍해 갈라진 것 “믿습니다.” 라고 해 놓고, “죽어도 살겠고”라는 말씀은 안 믿고, 믿는 것을 골라잡아 믿습니까?
육체로 안다는 것은, 현재 자기가 육체로 배워 알고 있는 모든 기준에 의해서 세상을 보는 것을 육체로 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준이 뭔가 하면, 죄인으로서의 기준 아닙니까. 그런데 그 죄인 속에 누가 섞여 들어왔습니까? 이사야 53장 9절에 보니까 예수님이 밀고 들어와서 합류했어요. 침노하는 자가 천국을 가져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밀고 들어와서 그 죄인과 함께 있음으로 말미암아 소위 진짜 구원 못 받은 육체들은 예수님을 못 찾아요. 숨바꼭질을 하는데 찾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원히 비밀이에요. 오죽 했으면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했겠습니까. 마태복음 13장에도 그런 말씀이 나오고, 요한계시록 2, 3장에도 나오지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는 말을 들을지어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는 말이지요. 이것은 우리가 지금 공부하려고 하는
고린도후서 10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체로 아는 것은 그동안 쌓았던 죄의 인식으로 예수님을 믿으려고 하니까 다 실패로 끝나는 것입니다. 차라리 이렇게 하세요. 죄인인데 구원하시려고 그냥 들어오신 거예요. 그러면 그 순간부터는 내 힘으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분을 주님께서 자진해서 들어와서 믿게 되었다. 이런 은혜를 유지하면 그것이 영적인 관계입니다.
이렇게 될 때, 왜 예수님이 죄인으로 들어와야 되는가? 그 때부터 죄가 무엇인가를 본격적으로 알게 되는 계기가 마련됩니다.
이사야 53장은 고린도후서 11장 할 때 보고요,
이사야 53장에 보면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이 1절에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아무도 못 믿는데 못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일방적으로 그냥 침투해서 싹 낚아채서 ‘너는 내 사람이야’ 하고 구원해 버립니다. 엠마오의 두 제자도 낚아 채인 것입니다. 지금도 이런 방식으로 주께서 구원합니다.
그리고 고린도후서 5장 16절에 보니까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이제는 예수님을 육체대로 알지 않는다.
죄인의 반열에 예수님이 죄인으로 들어와 버린다. 들어와 계시니까 예수님이 안 계시는 이 바깥에는 누구를 찾고 있습니까? 의인 중 최고의 의인, 완벽한 의인이 메시아일 것이다. 예수님은 완벽한 의인일거야. 도덕적인 의를 찾았지요? 완벽한.
만약 지금도 이런 식으로 예수를 믿는다면 이런 자를 신자로 간주할 수 없어요. 완벽한 의를 추구하면 할수록 우리는 점점 예수님 없는 곳으로 다가갑니다. 이것을 철학적으로 이야기하면, 완벽한 의를 추구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하면, ‘우리가 완벽한 의인이 되고 싶다’는 고백입니다.
사람이 뭘 하고 싶다는 것은 자기 내심이 밖으로 튀어나온 거예요. 사람들은 내가 누구냐를 보지를 않습니다. ‘내가 누가냐?’ 보다 ‘내가 뭘 하고 싶다’가 자꾸 나옵니다. 먹고 싶다, 여행하고 싶다, 울고 싶다, 16강에 올라가는 것을 보고 싶다. 그런데 16강에 올라가는 것을 보고 싶어 하는 너는 누구냐? 내가 누구냐를 이야기 안 해요. 거저 자기 욕망을 배출하고 발현하는 그 일에만 신경 쓰지, 내가 누구냐에 관심 없습니다.
복음 전하는 교회에 사람들이 와서 그냥 가버리는 이유가, 자기는 뭔가를 얻고 싶어서 왔는데, ‘네가 누구냐?’ 이런 식으로 나오니까 서로 소통이 안 되는 거예요. ‘우리는 죄인입니다.’ 이렇게 되면, 내가 뭔가 하고 싶어 하는 것도 다 죄가 되기 때문에 앞으로 뭔가 하고 싶다는 말을 할 수가 없잖아요. 죄를 남발하는 것이 되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하고 싶다’는 말을 뭘로 바꾸는가 하면, ‘뭐가 착한 일입니까?’라 바꿔요. 왜? 진작 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그것이 언제쯤 이뤄진다? 내가 착해질 때 이뤄진다는 그런 공식을 자기가 품고 있습니다. 내가 착해지면 착해지는 만큼 내 소망하는 것이 점점 거기에 보너스, 혹은 상급으로 내게 주어진다는 개념이 있어요.
사람이 의를 추구할 때는 진짜 의가 좋아서가 아니라, 자기 하고 싶은 것을 의롭다는 것을 바탕으로 쟁취하기 위한 욕망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의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의를 추구할 때 그 사람은 점점 더 자기가 죄인인 것을 잊어버리지요. 내가 얼마나 의로운가 하면, 올바른 것을 추구할 정도로 나는 의롭다. 그러니까 올바른 것을 추구한다는 것은, 이미 올바른 것에 대한 인식이 있고, 그것이 살아 꿈틀거리니까 나는 의인이다. 라고 자기 정립을 하고 싶은 거예요.
권사님은 올바른 일을 하고 싶어요, 나쁜 일을 하고 싶어요? 이 두개의 질문이 다 잘못 된 거예요. ‘-- 하고 싶다’가 들어 있기 때문에 이것이 잘못 된 거예요.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습니다.’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새삼스럽게 뭔가를 하지 않더라도 구원해 주신다고 그렇게 입이 달토록 이야기를 해도, 계속 뭘 하겠다는 거예요. 십자가를 믿으면 다시는 저주가 없습니다. 저주가 없다는 말이 얼마나 좋은 말입니까? 밥을 먹어도 저주가 없고, 잠을 자도 저주가 없고, 심지어는 벼락 치는데 전주 밑에 있어도 저주가 없고, 벼락 맞아 죽어도 저주가 아니고. 어떤 경우에도 저주가 없다고 그렇게 신신 당부해도 대문 밖에 나가면 들꺽 겁을 내고, 벌벌 떨고, 저주받을까 싶어서 행동을 조심하고 --
얼마나 예수님을 못 믿으면 늘 초조와 불안과 근심과 걱정에 벌벌 떨고 있습니까? 저주가 없다는 말은 아무 의미 없는 것이 돼요. 육체로 사는 사람은 기껏 믿는 것이 자기 육체밖에 없어요. 그런데 영적 사람은, 나를 향해 예수님께서 무슨 약속을 했는가를 관심을 두면서, 그 약속에 방긋 웃으면서 너무 즐거워하고, 저주가 없다는 말에 기뻐하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 같은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저주가 없음을 알기에 비록 육체에 가시가 있고, 매를 맞고, 시험을 당하고, 강도의 위험과 굶주림이 와도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 때문에 저주가 없다는 것이 항상 유효하다는 것을 전하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에게 육체로 보지 말자, 우리끼리도 육체로 보지 말고 항상 영으로 보자는 이야기를 고린도후서 10장에서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0장을 나가봅시다.
2절에 “우리를 육체대로 행하는 자로 여기는 자들을 대하여 내가 담대히 대하려는 것 같이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나로 하여금 이 담대한 태도로 대하지 않게 하기를 원하노라” 3절에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이것이 뭐냐 하면, 우리가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힘”이라고 했는데, 그 힘이 뭐냐 하면, 5절에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누구에게 복종케 합니까?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참 재미있지요?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에게 복종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사람들이 갖고 있는 하나님 개념은 위대한 개념이고 거룩한 개념이고 대단한 분이고 훌륭하신 분이고 착하신 분이고 자비로운 분이고 의로운 분이고 이런 하나님에 대해 자기들은 동의하고 있다는 거예요.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은, 개 코나 인정해라. 너희들이 알고 있는 그런 하나님은 죄인 속에 숨어든 그 하나님을 너희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해서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을 위대하게 하면 자기도 위대해 지고, 하나님을 거룩케 하면 자기도 거룩해 지고, 하나님을 착하게 보면 자기도 착한 사람 되거든요. 왜? 하나님을 그런 식으로 봤기 때문에 자기도 얼마나 훌륭하냐 그 말이거든요.
좋은 친구 사귀면 자기도 좋은 사람 되는 줄 알고, 공부 잘하는 친구 사귀면 자기도 공부 잘 하는 줄 알고, 부잣집 아들과 어울리면 자기도 부잣집 아들이 된 것 같은 그런 착각에 빠지고 싶어 하지요.
옛날 저도 20대 때, 그 때는 교회 안 다닐 땐데(그 때 교회 다녀도 마찬가지겠지만) 내 친구 하나가 자기 아버지 어머니가 내 친구를 얼마나 끔찍하게 생각하는지 자기 아들에게 못 줘서 환장을 한 부모가 있었어요. 요즘도 그런 부모들이 더러 있어요. 그러니까 자기 아들하고 놀아주는 우리 친구들을 그렇게 퍼 주는 거예요. 우리는 속으로 쾌제를 부르지요. 돈 한 푼 없이 2박 3일 대접받고도 기분이 좋아서 또 뭐해 줄꼬, 또 뭐해 줄꼬? 우리는 기타치고 라면 끓여 달라고 하고 ---. 지금 생각하면 좀 미안하지만 그런데 그 부모는 그것이 좋은 거예요. 우리는 가정에서는 천대받는데 그 집에 가면 잘 해 주니까 자꾸 그 집에 가는 거예요.
이것이 인간들의 종교성이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어디로 빠졌는가는 생각 않고 자기가 지금 어디를 향해 다가가는가에 높은 점수를 매겨 달라는 거예요. 교회 나와 줬으니까 얼마나 착하냐는 말이거든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게 아니에요. 그리스도를 모르면 호되게 당한다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그렇게 위대하다고 칭송하는 하나님에게 그리스도에게 복종하지 않는다고 호되게 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리스도한테 복종하기가 싫어요. 왜 그러냐 하면, 그리스도가 계시는 곳이 나를 죄인 만드는 곳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는 늘 십자가가 있잖아요.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 다가서면 나는 졸지에 색깔이 시꺼멓게 변해서 죄인이 됩니다.
고후 10:5절에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이렇게 되어 있지요.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는 모든 이론들은 인간들을 낮추게 하는 것입니까, 높이게 하는 것입니까? 전부 높여 주는 거예요. 그 대표적인 것이 뭐냐, 불교 아닙니까. 불교는 도를 닦은 자기 자신이 크게 높아지는 거예요. 자신이 전적인 죄인이란 사실은 절대로 하지 못합니다. 왜 죄인이란 생각을 못 갖는가 하면, 자기가 아무리 죄인이고 싶어도 자기 속에서 착한 양심이 나오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지요. 심지어, “나는 죄인이야.” 라고 하면서, 죄인이라고 하는 나는 얼마나 착하냐?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죄인인 것을 모르는데 나는 아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 앞에서 ‘나는 죽을 죄인이구나.’ 그렇게 알게 될 것인데, 이것을 믿는 것이 아니고 연구하는 거예요. 이런 것들이 다 높아진 거예요. 이런 높아진 이론에 대해서 초대 헬라철학부터, 다음 부산 강의가 마지막인데, 지난주까지 한 것이 뭐냐 하면, 라캉에 대해서 했어요.
이 강의를 음성으로 듣는 분에게는 아쉬운 점이 있는데, 그림을 볼 수 없어서 그래요. S, S'로 기표가 있지만 아무것도 혼돈된 상태에서 여기에다 딱 걸고 거기에서 깨어진, 쪼가리난 주체로 내려오는데, 이게 오늘날 나는 뭐가 된다, 의사가 된다, 나는 판사가 된다, 이런 기표, 타인들이 갖고 있는 개념을 하나 딱 걸려고 하는데 이것이 자꾸 미끄러집니다. 나는 피아니스트? 아니야, 의사? 그것도 싫어. 나는 공무원? 아니. 이렇게 자꾸 미끄러지니까 이것을 하나 딱 걸어서 현재 주체로 삼는 이러한 것, 이러한 과정에서 밑에는 타인의 요구에 내가 일치시키는 일치성과, 윗부분에는 내가 뭘 원하는가는 하나도 모르는데 남들이 뭘 원하는가? 라고 물을 때 비로소 여기에서 욕망이 생긴다는 이론입니다.
이 세상에 음식이 수천, 수만가지가 있는데, 엄마가 물어요. 얘야, 너 뭐 먹을래? 피자 먹을래, 짬뽕 먹을래? 라고 물을 때, 나는 ‘피자’라고 잡을 수 있단 말입니다. 내가 뭘 원하는지 몰라요. 그런데 남들을 보니까 이런 식으로 살아가고, 이런 것을 가지고 있고, 이런 것을 즐기고 하니까 ‘나도 저것 할래.’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생전 중국음식점에 가본 적도 없고, 먹어본 적도 없는 얘에게, 처음 중국집에 가서, “너 뭐 먹을래?” 라고 하면, 중국집에서 뭘 만드는지 몰랐는데, 메뉴판에 보니까, 자장면 3,500원, 짬뽕 4,000원 , 탕수육10,000원, 볶음밥 4,500원 이렇게 쫙 있으니까 ‘나는 볶음밥 먹을래.’ 라고 지적을 합니다. 이미 지정된 가운데서 자기가, 그 지정된 것이 나에게 뭐라고 하는가 하면, “넌 무엇을 욕망해?, 넌 무엇을 원하고 있어?” 라고 저쪽에서 묻는 거예요.
라캉의 뛰어난 점이 뭐냐? 우리는 보통 내 욕망에 의해서 내가 뭘 선택한다고 생각하잖아요. 라캉은 그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이미 제한된 타인들의 욕망 가운데서 ‘나는 저 타인의 욕망을 내 욕망으로 잡을래.’라고, 그쪽에서 강요를 해서 내가 취득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라캉은 ‘나’라는 인생은 없다는 거예요. ‘나’라는 생각 자체가 ‘오인’ 잘못 된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상상을 하는데, 이 상상하는 것을 ‘상상계’라고 하는데, 이 상상이 실제 세계에 오면 이것이 뭘로 바뀌는가 하면, 남들이 입고 있던 여러 가지 상징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되어 있어요. 그것을 ‘상징계’라고 합니다. 상징계인데, 상징계에서 만족을 하는데, 그것에서 만족 못하고 더 큰 욕망하는데 그것이 ‘실제계’.
상징계에 만족 못하고, 왜냐? 내 상상은 상징보다 더 많이 상상하니까. 예를 들어서 내가 지금 대리가 되었다. 대리가 되면 만족합니까? 언제쯤 과장 되나? 하고 상상하잖아요. 하지만 현실은 대리지요. 나는 과장 되고 싶어 상상하는데 현실은 대리지요. “네가 안 되는 것을 왜 욕심을 내?” 라고 지적하는 계가 있는데 이것이 ‘실제계’입니다.
현실은 무슨 계 밖에 없다. 상징계 밖에 없는데 우리 마음속에는 뭐가 있습니까? 상상계와 실제계가 항상 구박을 하고 있고, 지적을 받고 있고, 지적 받아서 또 상상하고 --
그래서 결국은 남들에게 후달리는, 남들이 요구하는 대로 살아가고 자기의 것은 하나도 없다는 이것이 라캉의 이론입니다.
이것이 제대로 육체대로 하는 모습이지요? 이것이 육체의 사는 모습입니다.
( )가 있는데, 무슨 색깔을 좋아하는지 나는 몰라요. 보니까 내 마음에 딱 맞는 색깔이 있었어요. 상징계는 법이거든요. 자기는 신이 되고 싶고 의롭게 되고 싶어요. 그런데 뭐가 어떻게 될 때 의롭게 되는지 나는 몰라요. 그런데 막상 세상에 나와 보니까 이런 것이 의롭고, 이런 것이 의롭다고 하니까 거기에 같이 동조하면서 사는 거예요. “대~ 한민국” 같이 동조할 때 의롭고, “Japan”을 외치면 나쁜 놈이 되고 얻어맞지요.
일반 윤리학에서 가치가 있다는 것은,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들에게 나눠줄 수 있는 것이 적게 나눠주는 것보다 가치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오래 가는 것이 짧은 것보다 더 가치 있어요.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고 하잖아요. 오래 가는 것은 가치가 있고 짧은 것은 가치가 없는 거예요. 예수님은 몇 살 살았습니까? 33살. 그러니까 예수님은 남들 보기에 무가치한 거예요.
현제 윤리 세계에서는 우리가 납득이 되는, ‘아 맞아’ 나 혼자 누리는 것보다 많이 나눠주는 것, 예를 들면 ‘사랑’ ‘평화’ 이런 것은, 즉 나눠주는 것은 가치 있고, 내가 소유하는 것은 덜 가치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의 영생은 누구한테만 줍니까? 택한 자에게만 주지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이것도 가치 없다고 자꾸 시비를 거는 거예요.
이것만 하고 이번 시간 마칩시다.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사람들이 찾고 있는 모든 이론과 학문, 그 속에서 인간이 의롭게 되려고, 하나님이 의롭다고 하면서 자신이 의롭게 되려는 모든 시도를 피해서 오히려 반대로 ‘저러면 안 돼. 저러면 망하는 거야. 저것은 죄인이야.’ 라는 그 속에 섞여 들어와서 사람들이 육체적으로 알려고 아무리 애를 쓰도 모르는 그런 곳에 계십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우리 같으면 “예수님 내 놓아라”고 데모 했을 거예요. 그러나 이 사람들 데모 안 합니다. 겁나지요. 왜? 자기가 죽으니까.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도 마찬가지지요. 자기가 죽는 것이 두려웠을 것이고. 그런데 이런 죄인들에게 찾아 오셔서 그들과 함께 합세함으로서 비로소 세상이 알지 못하는 진짜 의와 진짜 영생은 그리스도가 주심으로 얻기 때문에 그 제자들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되지요. 이것이 바로 영적인 세계라는 말입니다.
좀 쉽시다.
(2006. 7. 6. 10:27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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