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060703 [지옥의 하나님 p.43-49]
Re..060703 [지옥의 하나님 p.43-49]
이름 : 손하진(IP:)
daegu060703
2006.07.03 대구강의[지옥의 하나님 p.43-49] 이근호 목사님
0 ‘노아의 전쟁’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노아의 전쟁’부터 시작하면서 성경을 여러 번 아무리 해석을 해도 사람들에 한계가 있는 이유가, 한계점이 있는 이유를 제가 그림으로 한번 그려보면 A라는 사람이 여기 있고 B라는 사람이 다른 여기에 있을 때 A라는 사람이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고 B라는 사람은 생활에 바빠서 책 한자 본 적 없고 학력도 뒤떨어지고 공부라는 것은 잘 모르고 그렇게 살았던 사람이예요. A라는 사람이 볼 때 B라는 사람의 그 모든 것이 자기의 넓은 학식 속에 전부 포함이 된다 이래 보는 겁니다. 그 사람이 알고 있는 것은 다 아니까. 실제로 시험을 치면 이 사람보다 더 나오니까.
1 그러니까 B라는 이 사람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A라는 사람이 다 포섭할 수 있다, 다 포함한다 할 때 B라는 사람은 A라는 사람에게 무조건 배워야겠죠. 그런데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이 A라는 사람의 일방적인 생각일 수가 있거든요? 그런데 B라는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고 A라는 사람은 공부를 많이 했다. 그것을 인정한다. 그것은 인정해요. 그런데 B라는 사람은 그렇게 안하고 자기가 알고 있는 것과 A가 알고 있는 것과 일정 부분 공통점은 있을 수 있지만 A라는 사람이 자기가 모르는 것을 다 안다고는 할 수 없다 이래 되는 겁니다.
2 A라는 사람은 그렇게 보지 않고 A 자신 속에 B가 다 포함되어있다라고 생각하는데 B라는 사람은 A라는 사람이 자신하고 공통점이 있지만 A라는 사람이 자신에 대해 온전하게는 다 알 수 없다라고 할 때 제 3자 C가 볼 때 이 둘 중에 어느 것이 타당성이 있다고 봅니까. A의 견해가 맞을까요, B의 견해가 맞을까요. 제 3자인 C라는 사람이 볼 때 지금 21세기 들어와서 점차 B쪽이 진리에 가깝다는 이런 것들이 많아요. 워낙 사회가 다원화되다 보니까 D도 있고 E도 있고 F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잖아요. 일정 부분 공통점은 있지만 축구를 좋아한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야구를 좋아 한다 싫어한다는 또 다른 차이점 생기기 때문에 이렇게 된단 말이죠. 자 이것이, 방금 그림으로 그린 이러한 사고방식이 성경해석에 여지없이 그대로 반영이 됩니다.
3 어떤 사람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1000번을 읽었다고 합시다. 읽고 읽고 읽고. 그그런데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한번도 못 읽은 사람도 있을 것이잖아요. 그렇다고 할 때 이 1000번 읽은 사람이 한번도 못 읽은 사람의 지식을 다 포섭할까요 아니면 B의 생각처럼 일정 부분 공통점만을 가지고 있을까요. 어느 쪽입니까. 역시 오늘날 추세는 B의 생각에 가깝고 1000번을 읽었든 10000번을 읽었든 오늘날은 일정 부분 공통점은 있을 수 있지만, 동의하는 점은 있을 수 있지만 1000번 읽었다고 해서 온전히 모든 걸 다 안다고는 할 수 없다는 쪽으로 추세가 그렇게 되어갑니다. 자 그러면 방금 제가 쉬운 예를 들었습니다. A하고 B하고 사람이 다른 걸 들었습니다.
4 그러면 좀 더 어려운 걸 해봅시다. 같은 사람인데, A라는 같은 사람인데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을 2번 읽었을 때 받았던 어떤 느낌이 있을 것 아닙니까. 자 그리고 10번 읽었을 때 받은 느낌이 있지요? 2번 읽었을 때가 1998년도이다 하고 10번을 읽었을 때가 2006년도라고 할 때 2006년도의 사고방식이 1998년도의 사고방식을 전부 다 포섭할까요? 아니면 일정부분 공통점만 가질까요? 2006년도에 10번째 읽은 그 느낌이 1998년도 2번째 읽은 느낌을 온전히 장악할 수 있느냐 이 말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장악할 수 있겠어요? 두 번째 읽고 세 번째 읽었을 때 첫 번째 읽은 느낌을 온전히 포함할까요, 아니면 일부만 가지고 올까요?
5 옛날에는 한 사람이 10번 읽었으니까 2번 읽었을 때를 다 능가하고 충분히 그것을 다 안다고 하는데 오늘날에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오늘날의 철학은 뭐냐 하면 사건 위주의 철학이기 때문에 2번 읽을 때의 그 때 그 당시의 느낌은 그 뒤 아무리 재현하려고 해도 재현이 안 된다는 겁니다. 똑같이 반복이 안 됩니다. 10번 읽었다 하지만 사실 이 10번 읽었다 하는 자체가 의미 없어요. 왜냐하면 2번에서 10번이니까 8번을 더 읽었지만 성경책을 한 번 볼 때마다 전에 못 느꼈던 새로운 느낌을 가지고 동시에 뭘 손해 보느냐 하면 처음에 봤던 짜릿한 느낌을 다시 재현할 수 없고 그걸 잃어버린다는 거예요.
6 이것이 인간들의 성경해석에 있어서 문제점인데, 오늘날 성경해석에 있어서의 이러한 문제점이 있어요. 이 문제를 거론하는 해석학은 아직도 리쾨르라든지 가다머라든지 하이데거라든지 많은 세계최고의 해석학자들이 와도 이 문제를 해결 못합니다. 해결할 수 없어요. 그래서 현대 포스트모더니즘에서 [크로마톨로지]라는 데리다의 그런 글도 있지만 해석학은 뭐냐 하면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을 근거로 해서 지금이 더 우월하다고 그렇게 장담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그 때 그 때 달라요. 간단한 말로 그 때 그 때 다르다. 100번을 읽든지 1000번을 읽든지 그 때 그 때 다르다는 겁니다.
7 자 이러한 그 때 그 때 다른 새로운 느낌을 받은 데서 그걸로 족하지 과거보다 더 나은 느낌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는 이 사고방식, 그걸 가지고 성경해석에서 오늘날 많은 현대인들이 이렇게 입각하게 되면 지금 우리가 노아를 하는데 노아를 알아서 노아가 이해했던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의 뜻을 그 노아 이후에 나오는 모세가 노아의 그것을 포섭할까요? 아니면 공통점이 있을까요? 자 성경책이 있는데 여기 노아가 있고 그리고 모세가 있는데 따로 여기 제 3자인 우리가 있어요. 노아와 모세를 이해할 때 모세를 알 때 노아를 거저먹기로 아는 겁니까, 아니면 모세를 아는 것만으로 노아를 아는 것이 모자라고 노아를 또 따로 알아야 우리가 노아, 모세 둘 다를 안다는 것. 어느 쪽이 맞아요?
8 모세 알면 노아 다 아는 겁니까? 이게 상당히 중요한 문제예요. 모세는 하나님의 계시를 추가적으로 받았으니까 노아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월등하게 안다라는 말이 맞느냐 이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노아와 모세 가운데서 모세의 입장에서 노아를 바라보면 노아의 모든 것도 같이 풀린다. 이렇게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모세에 대해서 알려면 그 뒤에 나오는 다윗에 대해서 알면 모세, 노아, 아담까지 다 안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다윗 이후에 누가 나오느냐 하면 예수님이 나오는데 예수님을 알면 다윗, 모세, 노아, 아담 몽땅 다 챙길 수 있다는 이런 논리 있잖아요.
9 그래서 성경해석할 때는 예수 그리스도로 들어가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다윗, 모세로 관통해버리고 이후에 나오는 스데반 집사, 사도 바울 이것도 관통해버리는 그렇게 성경해석을 하면 옳다 이것이 ‘계시의 점진성’, 이 점진성이라는 용어가 좀 적당치가 않지요. 그걸 가지고 안 되니까 ‘만개한다’. 이래도 뭔가 좀 부족하고. 자 ‘점진성’이라고 하는 것은 ‘점진’하기 때문에 지나간 것은 이제 잊어버려도 좋다 이래 되어버려요. ‘점진성’이니까 이만큼 왔으니까. 그러니까 점점 더 1층에서 2층, 2층에서 3층 자꾸 올라가니까 올라간 부분만큼 아래층은 이미 다 안다고 생각하고 이렇게 올라간단 말이죠. 그런데 이러한 해석이 옳을까요? 이 해석에 있어서 겉으로 보면 이 해석이 맞아요.
10 그리고 예수님도 이런 해석을 제안했습니다. 어디서 제안했는가 하면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더 위대한 사람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 보다 위대한 이가 없다고 칭찬했던 세례 요한보다 더 많은 걸 알고 있다고 하시죠.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하면 예수님 세대에 이미 들어와 버리면 지난 것, 몰랐던 것까지 한꺼번에 알기 때문에 신앙도 거저먹을 수 있다, 거저 다 안다고 할 수 있다 이래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은 예수님 생각이고, 우리가 볼 때 예수님의 전체를 알면 방금 그 말에 동의되는데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서 부분적으로 아는데 부분적으로 아는 것 가지고 아담도 알고 노아도 알고 모세도 알고 다윗도 알 수 있다 이렇게 주장할 수 있느냐 이 말입니다.
11 우리가 죽을 때까지는 예수님을 부분적으로 알잖아요. 그렇다면 우리가 다윗도 다 안다, 모세도 다 안다. 노아도 다 안다 이렇게 할 수 있느냐 이 말입니다. 이것은 상당히 곤란하단 말이죠. 방금 제가 한 이러한 난제들을 한꺼번에 하면 어떻게 되느냐. 이렇습니다. 여기 예수님 출발한다는 이 말은 맞아요. 예수님이 알고 있는 것부터 출발한다는 말보다도 예수님의 십자가로부터 출발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옳은데요. 왜 그러냐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로부터 출발하게 되면 우리가 노아, 모세, 다윗, 아담을 이렇게 알고자 하는 이 ‘나’, 현재 있는 ‘나’자체를, ‘예수님 저는 노아도 알고 다윗도 알고 싶습니다. 예수님도 알고 싶습니다’하고 다가오는 자체를 십자가에서 이걸 공격하는 기능을 하고 있는 겁니다.
12 이러한 성경해석학을 지금까지 아무도 내놓은 적이 없다 이 말이죠. 데리다도 그렇고 아무도 내놓은 적이 없어요. 해석자 자체를 공격하는 해석이 돼버리면 해석 자체가 출발점부터가 시동이 안 걸리니까 이런 해석이 나올 수가 없어요. 이런 해석학을 주장할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면 큐티를 하는 사람이 ‘목사님 어떻게 합니까?’ 물으면 ‘이렇게 하세요’ 이러면 되는데 ‘큐티 그것 해가지고 뭐 할라고’ 이렇게 되면 큐티 하려는 사람의 기를 팍 죽여 나버려요. ‘큐티 해서 뭐하는데’. 그런데 진짜 예수님의 해석은 뭐냐 하면 바로 이런 식이예요. 이렇게 퉁명스러워요.
13 ‘노아 알아서 뭐할 건데’, ‘날 알아서 뭐할 건데’ 이런 식으로 나온단 말이죠. 자 그런데 이 십자가중심으로 오늘 ‘노아의 전쟁’에 대해서 해석에 들어갑니다. 이제부터 ‘노아의 전쟁’을 하는데. 노아에 대해서 해석할 때 십자가중심으로 노아에 대해서 해석한다는 것은 우리는 제 3의 중립지대에서 예수님이 노아를 어떻게 해석하냐를 쳐다보는 입장이 아니라 그 관람하는 우리조차도 공격을 하는데 이것이 중요합니다. 왜 우리가 노아에 대해서 공부하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노아에 대해서 공격할 때 그 공격하는 그 안에 누가 들어 있느냐 하면 바로 우리 자신이 들어있다 이 말입니다. 지금 제가 초반에 길게 이야기했는데 길게 이야기한 것을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노아에 대해서 알고자 할 때 이미 노아의 죄 속에 우리가 포함돼 가지고 노아와 더불어 손을 잡고 십자가로부터 공격을 받을 준비를 하면서 노아에 대해서 우리가 해석을 해야 이 해석이 옳다 이 말입니다.
14 목사님들이 설교하면서 다윗을 폈다. 다윗을 볼 때 다윗이 알고 있는 하나님 뜻이 뭐냐 이렇게 다가서지 말고 다윗이 모르고 있는 그것에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서 다 모르니까 다윗이 모르고 있는 것을 우리도 현재 모르고 있다는 같은 입장에서 다윗이 당하는 그 자리에 서서 우리가 십자가에서부터 당하는 공격을 흔쾌히 그걸 수용할 자세로 해서 성경해석을 해주셔야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럴 때 생기는 게 뭐냐. 비로소 이 전쟁이라는 개념에 우리가 충실할 수가 있어요.
15 손하진 성도님께서 수고를 하셔서 철학 강의를 녹취해서 자꾸 올리시면 한자도 빠뜨리지 않고 주욱 다 읽어요. 얼마나 꼼꼼하게 녹취를 했는지 오자가 두 개 내지 세 개밖에 없어요. [목사의 잘못은 간단..] 그 책의 오자가 서른 개가 넘으니까. 글자하나 안 빠뜨리고 그대로 읽습니다. 제가 평소에 물었잖아요. 공부하면서 어떤 걸 느꼈습니까. 세 분 다 입을 다물어요. 뭐 철학인데 잘못을 따집니까 그 뭐 그냥 철학인데. 진짜 철학일까. 아니면 진짜 자기 사상이 안 들어가 있을까. 굉장히 궁금했었어요.
16 그런데 생생하게 녹취된 걸 쫘악 보면서 그 철학하시는 분이 노아나 다윗이나 모세의 자리에 본인이 안 서 있다는 겁니다. 자기는 제 3의 나만의 자리에 따로 챙겨서 서 있는 거예요. 나만의 자리에 챙겨서 신을 논하고 기독교를 논하고 천주교를 비판하고 예수님을 이야기 해봤자 따로 챙기고 있는 이상은 예수님이고 신이고 노아든 간에 그것은 일체 모르게 됩니다. 이 성경을 모른다는 말은 세상에 대해서도 모른다는 뜻이예요. 나는 이런 잘못이 있습니다 라고 비판받을 입장에서 철학을 공부해야 되는데 그렇지 않고 당신이 아는 게 뭐야 내놓아봐. 왜냐. 너하고 나하고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이런 쪽으로 해석하면 상당히 곤란하단 말입니다.
17 그런데 그 분이 강의하는 것 중에서 레비나스 이야기를 하는데 레비나스 이야기는 제가 [타인의 얼굴]강의한 것 녹취한 게 있지요? 봤지요? 거기서 내가 뭘 강조했습니까. ‘잠’을 강조했지요? 이걸 잠시 설명을 해드릴께요. 뭐냐 하면 사람이 누워 자고 있는 모습을 보세요. 자는 순간에 그 사람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그 사람에겐 의미가 없어요. 자는 사람한테는. 우리가 살아있으니까 내가 살아있다는 것에 의미를 두지만 우리가 잠자는 순간에는 누가 와서 코를 베어가도 내 죽는 것을 아까워하겠습니까, 안 아까워하겠습니까. 안 아까워하잖아요. 왜? 자는 사람이 자기 죽는 게 뭐가 아까워요. 자고 있는데.
18 여기에 레비나스가 아주 결정적인 인생을 보는 진리라고 하는 것을 끄집어낸 거예요. 사람이 살아있으니까 살고 싶어 하는 거지 잠 잘 때 되면 지금 누가 코를 베가고 목을 베가도 자기한테는 하나도 아까울 게 없지요. 왜요? 자고 있으니까. 사람이 아깝다, 분통터진다, 정말 죽고 싶다, 화난다 이런 경우가 언제입니까. 이게 의식이 살아있을 때 나오는 거잖아요. 그런데 사람이 늘 의식이 살아있으면 이런 것들이 어떤 의미가 있는데 사람들은 낮에 이렇게 까불고 촐랑대다가 밤 되면 자잖아요. 잘 때 누가 들고 가서 절벽에 자는 채 밀어가지고 ‘아이고 죽는다’할 것도 없이 분통 터뜨릴 시간도 없이 죽어버리면 그 사람이 평소에 분통 터뜨리고 아깝다, 죽고 싶다, 널 사랑한다 했던 이 자체가 의미가 없잖아요.
19 그러니까 레비나스 이야기는 뭐냐 하면 인생이라는 것이 의미가 없는데 의식이 있으니까 의미가 있는 걸로 되어버려요. 의식이 있으니까. 원래 의식이 없는데 죽은 상태인데, 잠은 죽은 상태 아닙니까. 레비나스가 인간의 실존을 ‘잠’이라고 봤는데 죽은 상태라는 거죠. 의식이 없으니까 죽은 상태 이것이 원래 인간인데 잠시 의식이 있으니까 여기서 뭘 끄집어 내냐. 의미가 뭐냐, 삶이란 뭐냐, 신이 뭐냐, 천국이 어떠냐 이런 소리가 나오더라는 겁니다. 의식이 있으니까. 사실은 의식 자체가 잠자는 시간에 의미가 없다면 이 전체도 뭐가 없다는 말입니까. 이 전체도 의미가 없다 이 말이죠.
20 그러니까 레비나스를 공부하고 레비나스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은 뭐냐. 그냥 의미가 없는 거예요. 그냥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된 거예요. 살아도 헛되고 죽어도 헛되고 자체가. 우리가 모든 의미를 해체시켜버리고 나라는 것도 없애버리자 이 말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누가 반발을 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지금 우리는 ‘노아의 전쟁’을 통해서 그걸 반발하고자 합니다. 어떻게 반발하느냐. 왜 레비나스 당신이 그게 의미가 없느냐 하면요. 레비나스가 뭔가 알려 할 때 자신이 죄인의 입장에 서는 것이 아니고 ‘뭐 하나 알아볼까? 의미 없네. 죽는 것도 의미 없네. 잠자면 그만이네. 그럼 잠자자. 잠자다 누가 죽어도 애달프다 안 하면 그만이지 뭐. 그럼 고민이 뭐가 있느냐’ 이래 된다 이 말이죠. 그런 식으로 만약에 해석한다면 노아에 있어서 노아를 어떻게 알까 이렇게 하면 레비나스 꼴이 나요.
21 그러면 노아 알아놓고 노아가 그렇게 한 게 나한테 무슨 의미야 이래 된단 말이죠. 그렇게 하면 철학 교수나 레비나스 같은 사람은 자기가 노아의 입장에 안 섰기 때문에 십자가로부터 당하는 게 없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하는 자체가 이게 죄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어요. 이 점에 대해서 김석수 교수님하고 둘이서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아무도 평생 이런 이야기를 해준 적이 없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대신 해줬으면 좋겠어요. 십자가로부터 죄인이라는 입장에 안 서 있는 거예요.
22 ‘노아의 전쟁’에서 제일 힘든 것은 이 전쟁이 우리를 계속 죄인으로 몰아넣는 전쟁이예요. 그럼 우리는 반발하지요. 노아를 알려고, 하나님을 알려고, 예수님을 알려고 하는데 왜 내가 이렇게 되어야 되느냐. 그렇게 되면 ‘전쟁’ 해석이 안돼요. 노아의 세 아들은 노아 속에서 나와요. 노아 안에서 노아의 세 아들이 나와요. 그런데 노아의 세 아들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세 아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이 세 아들을 통해서 작용합니다. 노아에게 작용하던 것이 그대로 세 아들에게 작용하지요. 그럼 노아는 분해되어 없어져버리고 이것이 세 아들로 구체화됩니다. 노아에게 준 그 은총이 무어냐에 대해서 노아는 몰라요. 마치 우리가 모르듯이.
23 우리가 노아에 대해서 모르듯이 노아도 하나님의 은총이 뭔지를 몰라요. 다만 자기가 알고 있는 것만 알 뿐이죠. 전쟁을 통해서 당신하고 나하고 공통점이 있다는 사고방식이 모조리 다 부러지면서 노아라는 A라는 사람은 B라는 예수님한테 다 포섭이 되어있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노아를 통해서 뭘 알아야 되느냐 하면 당신하고 나하고 공통점이 있다는 이런 기본적인 사고방식을 벗어버리고 주님은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다 알고 있는 거예요. 내가 지금 발걸음을 이쪽으로 갈지 저쪽으로 갈지 다 알고 있어요. 이걸 다 안다는 말은 뭐냐 하면 앞으로 이런 계획이 있다는 말이 아니고 네가 무슨 짓을 해도 은혜가 필요하고 용서가 필요한 죄인이라는 것을 네가 옮긴 발자국을 통해서 들추어내고야 말리라는 거죠.
24 너의 죄와 주님의 은혜를 네가 어느 방향으로 가든지 간에 거기서 반드시 들추어내는 거예요. 발자국을 옮길 때마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와 내 죄를 동시에 다발로 주님에 의해서 우리는 들춤을 당하는 대상이 된다 이 말이죠. 그래서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해봅시다. 노아는 ‘무지개언약’인데 ‘무지개언약’은 특징이 ‘무지개언약’을 할 때 반응이 두 가지 있어요. 첫 번째 반응이 ‘나는 홍수로는 멸망되지 않는다’는 이 반응. 두 번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땅을 보존시킨다’, 하나님께서 물로써는 심판하지 않겠다는 것과 같은 말이예요.
25 이렇게 나오면 참 좋은데 첫 번째 뭐냐 하면 여기서 ‘나’가 나와요. ‘나’가. 그런데 ‘무지개언약’은 ‘나’하고 상관없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도 땅을 홍수로 멸망시키지 않고 땅을 보존하기 위해서 ‘나’를 죽일 수가 있어요. ‘나’를 죽이면서까지 땅을 보존하고 홍수로써 멸망하지 않게 하신다고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 후손들을 보면 ‘나’는 이게 똑 튀어나와요. 같은 언약 속에 있었는데 ‘내’가 나와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무지개언약’이 담고 있는 그 뜻을 가지고 ‘나’를 향하여 전쟁에 나서죠. 이게 뭐냐 하면 바벨이죠. 바벨탑 사건이죠.
26 ‘무지개언약’과 바벨탑 사건이 어떻게 연관이 되느냐 하면 여러분들 비가 많이 왔을 때 그래서 어떤 집이 침수가 되어가지고 그 집에 자고 있던 노인네가 죽었습니다. 그럴 때 그 노인네에게 죽기 직전에 그 가족들한테 ‘무지개언약’을 이야기했다면 그들이 무슨 느낌이 드느냐 하면 왜 다른 사람들한테는 ‘무지개언약’이 땅을 보존한다,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푼다 그렇게 이해되는데 왜 ‘나’는 그렇게 느끼지 않고 왜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를 죽이느냐 우리 부모님을 침수당하게 하느냐라는 어떤 분노 같은 것이 있지요? 분명히 생깁니다.
27 다른 예를 들어볼께요. 나한테 사기치고 돈 뺏고 도망간 놈이 있어요. 그런데 그 놈이 그 돈 가지고 미국 가서 재벌 되어버리고 사기당한 나는 그 사기당한 그 돈이 있어야 사는데 없어서 노숙자가 될 때 그 때 노숙자가 된 사람에게 ‘무지개언약’ 하면 기분 좋겠습니까. 사기 쳐서 미국간 그 사람은 벼락 맞아죽고 그 사람이 갖고 있는 돈이 나한테 뺏어간 돈이니까 그것이 내게로 다시 돌려질 때 그 때 비로소 우리는 기분이 좋지요. ‘아 하나님 살아계시는구나’. 그런데 마태복음에는 뭐냐 하면 선인과 악인에게 하나님은 햇빛과 비를 내리잖아요.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평소에 뭐하고 있느냐 하면 분노하고 있는 거예요. 왜 악인과 선인에게 공평하게 취급하느냐. 시편에 나오잖아요.
28 하나님 믿지 않더라도 건강하고 잘 먹고 잘 살고 죽을 때 고난이 없고 이게 전부 다 ‘무지개언약’때문입니다. ‘무지개언약’. 우리가 ‘무지개언약’을 안다 해놓고 막상 ‘무지개언약’속에 있으면서 우리는 불쑥불쑥 하나님께 분노와 불평과 화를 내고 있단 말이죠. 왜 같이 살아가면서 왜 나쁜 놈들은 잘 되고 계속 당하는 사람은 억울하게 처박히게 해가지고 망치게 만들고 왜 그렇게 합니까. 제가 말합니다. 그건 ‘무지개언약’ 때문에 그래요. 그런 ‘무지개언약’이라면 때려치워라, 그 놈의 ‘무지개언약’. 이것이 바로 우리가 노아를 안다, 예수님을 안다, 우리 하나님을 안다, 무지개언약을 안다, 안다 안다 할수록 우리 속에서 나오는 것이 뭐냐 하면 분노와 불평과 하나님 불공평하다는 이런 것들이 막 나오는 거예요.
29 또 하나를 예를 들면 한나하고 브닌나라는 여자가 있을 때 왜 브닌나에게는 아들이 있고 왜 하나님 잘 섬기는 한나에게는 아들이 없습니까. 왜 자식이 없어요. 지금 우리 아는 사람 가운데 시험관 아기한다고 오천만원 들여 가지고 자식 없는 사람 많아요. 시술을 열 번해가지고 다 실패했어요. 그런데 교회 잘 다녀요. 교회 잘 다니고 좋다고 해요. 믿음 좋은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믿음이 좋은지 자식 놓으려고 오기가 있는 건지 모르겠습니다만은 이게 전부 다 뭐냐 ‘무지개언약’을 몰라요. 우리는 성경보고 ‘무지개언약’인가? 아멘, 할렐루야 넘어갑시다 그 다음에 이제 모세 알자. 지금 우리는 성질 급해가지고 진도 나가기 바쁘지 실생활에 있어서는 ‘무지개언약’에 대해서 막상 당하면 이것은 화딱질나고 기분 나쁜 일로만 여겨진다고요.
30 왜 악인을 도와주는지 왜 김정일을 안 죽이는지, 북한의 인민들이 그렇게 고생해도 김정일을 왜 안 죽이는지, 아웅산 테러해가지고 그 때 죽었던 사람들 가운데서 교회장로 많았습니다. 뛰어난 하버드대 출신들 많았어요. 얼마는 죽었어요. 얼마는 다치고 이랬다고요. 그런데 김정일은 버졋이 살잖아요. 그게 왜 그렇습니까. ‘무지개언약’ 때문에. 우리가 ‘무지개언약’에 대해서 알기는 뭘 알아요. 하나 하나 따져보면요 아 우리가 ‘무지개언약’조차 제대로 모르는구나. 제대로 안다는 말은 뭔가 하면 이걸 아니꼽게 여기지 않고 사는 거죠.
31 또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무지개언약’을 설명하기 위해서. 어떤 사마리아인이 길을 가는데 거기에서 강도만난 사람이 있었어요. 자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누구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그랬죠? 강도만난 사람이 거반 죽게 되었지요? 그러면 강도만난 사람이 거반 죽게 되었을 때 그 강도만난 자를 안 돌봤던 레위인하고 제사장이 욕 얻어먹을 이유가 뭐가 있습니까.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욕 얻어먹을 이유가 없지요? 자기는 안 도와줬을 뿐이지 강도는 아니잖아요. 지금 책임추궁을 누구한테 해야 됩니까. 그 강도한테 해야지 안 도와줬다고 해서 제사장이나 레위인한테 하면 안 되잖아요. 자기가 강도질한 게 아니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누가 이웃이 되겠느냐’ 해가지고 강도한테는 문제 삼지 않고 안 도와줬다는 것 때문에 문제 삼는다 이 말이죠.
32 왜 사람들이 그 점에 대해서 난해하게 생각하느냐 하면 지금 ‘무지개언약’자체가 저 사람이 강도를 만났든 자기 책임이 아니든 간에 그냥 도와준다는 차원을 이해 못하면 ‘무지개언약’의 기본도 이해 못한 게 되요. 그 ‘무지개언약’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아무도 없어요.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그 예수님이 어떤 분이냐를 앞장 세워서 보여준 것이 누구냐 하면 사마리아인이예요. 와서 들어다 모시고 비용이 없으면 내가 완전하게 치료할 때까지 더 주겠다. 이것은 오버입니다. 오버. 이것은 뭔가 오버한 거예요. 예수님을 이해할 때 뭔가 우리가 기대한 메시아가 아니라 그 이상으로 우리한테 무작정 베푸는 분이라는 것을 그걸 이해한다면 우리가 남을 대할 때 상대방이 나를 쳤든, 우리집에 불을 질렀든 간에 그 원수마저 우리는 사랑해야만 되는 책임을 갖고 있는 거예요.
33 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해버리면 이거는 이방인보다 더 나은 게 뭐가 있느냐 적어도 네가 하나님의 아들 같으면 어느 정도 되어야 되느냐 하면 악인과 선인에게 비를 내리듯이 원수마저 사랑해줘야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답다는 거예요. 이게 마태복음 5장에 나오죠? 이것은 아무도 못합니다. 아무도 못하는 데서 끝나는 게 아니고 그게 제 힘으로 안됩니다 하는 것을 저를 상대로 해서 전쟁을 벌이는 식으로 지금 하나님께서는 노아나 그 뒤의 사건들을 우리한테 퍼붓는 거예요. 이게 ‘노아의 전쟁’이예요. 그래서 우리는 아이고 나는 못합니다 하고 기어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기어들어가도 계속 끄집어내가지고 왜 못해 왜 못해 하고 계속 공격해댄다 이 말이죠.
34 그런데 우리가 철학공부를 하게 되면 그런 것을 놓치죠. 하나님이 나를 공격한다는 그걸 놓쳐버리고 알려고 애를 썼는데 얼마나 대견합니까 이런 식으로 자기를 변호할 가능성이 많죠. 자 그 다음 바벨탑 봅시다. 땅의 일원성을 깨는 것이 바벨탑 사건이예요. 땅은 노아언약으로 하나가 되어있습니다. 하나가 되어있는데 그 노아언약 속에 있는 하나의 내용에 대해서 아직까지 미지수예요. 몰라요. 그런데 그 하나됨에 대해서 사람들은 무엇으로 하나 되어 있느냐 하면 자기 이름을 통해서 새로운 하나를 추구했습니다. 그게 바벨탑을 쌓아서 우리 이름을 하늘과 땅 끝까지 해서 흩어짐을 면하자는 거예요. 우리는 하나의 단결력으로 뭉쳤습니다 라는 것을 증거하는 거예요.
35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바벨탑을 공격하는 이유가 땅의 하나됨이 너희들의 이름의 하나됨에서 구축되는 것이 아니고 너희들이 아직 알지 못한다는 뭔가 모르고 있다는 그 ‘무지개언약’에 따라서, ‘노아언약’에 따라서 이 세상은 하나로 유지가 된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그것도 모르고 우리 이름을 하나되게 하자고 탑을 쌓고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하나를 어떻게 합니까. 흩어버리죠. 흩어버리면 그들은 언어가 하나이기 때문에 힘을 합쳤던 것이 언어를 분산시킴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하나가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하나가 안 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땅의 분할이예요. 땅의 분할. 어떻게 분할됩니까. 언어에 따라서, 종족에 따라서 땅이 분할된단 말이죠.
36 땅이 분할되면서 ‘노아언약’의 하나됨이 세상의 민족과 민족들 간에 전쟁을 유발시키는 이유와 원인을 제공하게 되는 겁니다. 그럼 이 땅에 전쟁이 있어야 됩니까, 없어야 됩니까. 전쟁이 있어야 되죠. 전쟁이 있어야 ‘노아언약’의 하나됨이 부각이 되잖아요. 이게 바벨탑과 ‘노아언약’과의 관계입니다. 전쟁을 시도하기 위해서 전쟁의 씨앗을 던져버립니다. 일종의 시비 거는 거죠. 그 시비 거는 게 뭐냐 하면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을 선택해서 자기 나라말고 다른 언어를 쓰는 엉뚱한 나라에 집어넣어 버려요. 원래 그 쪽 지역이 아닌데 다른 지역에 살던 아브라함을 이 쪽 팔레스타인 지방에 심음으로 말미암아 전쟁을 개시하는 겁니다.
37 아브라함이 가는 곳에 이미 전쟁이 있었어요, 없었어요. 전쟁이 있었어요. 그게 9족속이 있었는데 4족속과 5족속이 패를 나누어서 전쟁에 들어갔지요. 전쟁에 들어가는 데 그 전쟁에 휘말리게 된 사람이 누구냐 하면 바로 아브라함의 조카 롯입니다. 약속의 사람인 아브라함과 연관돼 있는 사람인 롯이 지상의 전쟁에 가담함으로 말미암아 자연적으로 하나님이 지상 전쟁에 가담하는 형식을 취하게 되었습니다. 하나의 통로 제공이 되는 거죠.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가는 곳마다 전쟁이 벌어진다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가시는 곳마다, 하나님의 계시가 떨어지는 곳마다 거기서 전쟁이 일어난단 말이죠. 그 전쟁의 이유는 뭐냐. 무지개언약인 ‘노아언약’의 일원성과 인간들이 생각하는 자기중심, 언어중심의 일원성과 이게 차이가 나기 때문에 그 차이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 전쟁을 일으킨단 말이죠.
38 모든 인간은 인간이 전쟁하기 이전부터 하나님의 ‘노아언약’ 안에서 이미 하나였습니다. 하나였는데 사람들이 이걸 오해 해가지고 하나니까 하나로 뭉치는 것이 어떻습니까 하는 이렇게 큰 오해를 했단 말이죠. 주님의 하나라고 하는 것은 은혜의 하나, 은혜 주심의 하나인데,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하나인데 인간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자기중심적으로 하나를 추구하기 때문에 계속 언약에 대해서 도발적인 원수 노릇하는 그 하나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한 걸 간단하게 정리해보면 이 지상에는 개인과 개인마다 민족과 민족마다 월드컵축구도 그렇지만 모든 것이 전쟁이 일어나야 되요. 전쟁이 일어나는 이유는 뭐 때문이라고 했습니까. ‘노아언약’에 주신 그 사랑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야만 하는 겁니다.
39 그러니까 전쟁이 없는 걸 이상스럽게 여기고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아주 정상적으로 여겨야 되요. 이걸 철학적으로 이야기하면 개별자는 남들을, 타인을 전부 다 자기의 적으로 간주한다는 거예요. 적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항상 만나도 투쟁하듯이 만나고 일단 좋게 지내지만 나중에 이용가치가 없을 때는 곧 전쟁이 일어나요. 부부도 마찬가지죠. 이것이 왜 그렇게 되느냐. 그것이 ‘노아언약’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노아언약’이 뭐냐. 나에게 비록 원수처럼 느껴지더라도 하나님은 그를 사랑한다는 것을 우리가 수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화딱질 나서 전쟁을 일으키는 겁니다. 끊임없이 전쟁이 일어나요. 싸우고 경쟁이 일어나고. 이걸 모르고 다윈은 마치 생존경쟁이라고 진화론적으로 잘못 해석한 거죠.
40 ‘노아언약’을 제대로 아신다면, 아시는 분이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니까. 예수님 같은 경우에는 전쟁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그들의 전쟁에 의해서 스스로 희생물이 되심으로 말미암아 도리어 그 전쟁을 이겨버리는, 전쟁을 통합해버리는 그러한 기초를 주님께서 몸소 마련했지요. 그 다음에 44쪽 봅시다. “아브라함의 전쟁”. ‘아브라함의 전쟁’은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전쟁이죠.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가계, 가문, 가족과의 전쟁이죠. ‘노아의 전쟁’은 아브라함을 보내가지고 민족과 민족들 자체를 전쟁을 유발시키고 모든 민족이 서로 적으로 삼아서 대혼란을 일으키는 전쟁이라면 ‘아브라함의 전쟁’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가계, 가문, 그 가족에 대한 전쟁을 벌이는 겁니다.
41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했어요. 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합니다. 노아는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보니까 몰랐어요. 아브라함이 자기는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자기 자식이 어떤 자식이 나올지는 자기는 몰랐기 때문에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한 거예요.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스마엘이라는 자식이 나오죠. 한 쪽은 없어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자식은 이스마엘이죠. 이스마엘이고 이삭은 없어요. 이삭은 없는 사람이예요. 이삭은 아브라함이 낳지를 안했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육신의 가계와 전쟁하기 위해서 하나님에 의해서 투입된 하나님의 용사 같은 역할을 하고 있죠. 이삭은 없는데서 생겨나는 거예요.
42 이미 사라가 태가 죽은 상태에서 이삭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은 세상의 인간적인 민족과 민족의 전쟁 차원이 아닌 영적인 전쟁에 이미 돌입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 혼자, 아브라함 본인은. 사라도 마찬가지지만. ‘노아언약’에 의해서 민족과 민족들 간에 서로가 차별과 투쟁이 계속해서 벌어지게 되는데 거기에는 낯선 인물 아브라함의 가정이 투입됨으로 말미암아 민족과 민족 간에 전쟁이 일어나고 거기서 비로소 하나님은 자기 이름의 효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아비멜렉 같은 경우에 왜 그 가문의 여자들이 임신을 못했느냐.
43 그 이유는 단 한 가지 아브라함의 아내를 건드릴 뻔했기 때문에, 건드릴 뻔한 그 이유 때문에 저주받아서 여자들이 자식을 못 놓죠. 한번 물어봅시다. 아비멜렉 가문에 그 동안 여자들이 자식을 놓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노아언약’ 아닙니까. ‘노아언약’. 지금까지 했잖아요. 그런데 난데없는 아브라함의 가족이 들어오니까 아비멜렉 여자들이 애기를 못 낳잖아요. 그 때 아비멜렉 추장이 뭐라고 합니까. 내가 뭐를 잘못했는데 아기를 못 낳게 됩니까. 내가 뭘 잘못했는데. 아비멜렉 추장이 지금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아브라함의 가치를 같은 레벨로 본거예요. 너나 내나 똑같지.
44 같은 레벨로 보니까 아브라함의 언약에 뭐가 들어있냐 하면 노아언약이 포함되었는데 아비멜렉이 하나님도 안 믿는데 노아언약을 알 리가 있습니까. 모르잖아요. 다만 모른다는 이유 때문에 아브라함 가족을 시시하게 봤는데 아브라함의 여자를 건드릴 뻔했기 때문에 갑자기 ‘노아언약’이 갖고 있는 전쟁의 기능이 아비멜렉 가문에 퍼져서 갑자기 그들은 여자들이 임신을 못하지요. 그건 뭐냐 하면 패배지요. 그죠? 패배 아닙니까. 갑자기 패배당한 거예요. 그럴 때 그들이 누구한테 호소했습니까. ‘아이고 아브라함님, 당신을 몰라 뵙습니다’하고 기도를 부탁해서 기도를 해주니까 다시 아비멜렉 가문의 여자들이 태가 열려서 임신을 했지요? 그러면 그 와중에서 그들이 안 게 뭐예요.
45 그 전에 아브라함을 만나기 전에는 뭡니까. ‘내 마누라가 아이 놓는 것은 내 정력이지’라고 느꼈던 것이 아브라함을 만나고 난 뒤에 뭘 느꼈어요? 내가 아브라함 만나기 전에 평소에 아이 낳는 게 그게 누구 덕이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노아언약’ 덕택이라는 것을 최초로 접선이 가능한 그런 시점을 맞이한 것예요. 이게 성경해석에서 해석되어야 됩니다. 마치 느부갓네살이 자기는 마르둑 신을 믿었기 때문에 승리한 거라고 한 거예요. 여호와를 이겼다고 한 거예요. 그런데 다니엘이 침투되니까 느부갓네살 왕이 뭘 알았습니까. 다니엘이 사자굴에 들어갔다가 나옴으로 말미암아 뭘 알았어요. 이 세상을 통치하는 신은 마르둑 신도 아니고 자기도 아니고 누구란 말이죠? 바로 자기 부하인 다니엘과 함께 있는 여호와라는 그 신에 의해서 이 세상 모든 세계가 다 지배받고 있는 겁니다. 이것이 바벨론으로부터가 아니라.
46 참 이런데서 성경해석이 어려운데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다니엘이 사자굴에 들어가게 한 동기가 뭐냐 하면 뭘 만들었습니까. 금 신상을 만들었잖아요. 그 신상을 하나님께서 만들도록 유도한거예요. 왜 유도했냐 하면 그들이 자기의 본색을 드러내서 금 신상 만들 때 그 신상은 제일 위에가 무슨 나라? 바벨론. 제일 아래 나라는 뭡니까. 예수님의 나라, 인자의 나라가 오기 직전까지의 모든 나라가 발목에 있어요. 로마뿐만 아니고 그 뒤 모든 나라. 인자의 나라, 뜨인돌이 날아와서 태산을 이루는 태산에 해당되는 인자의 영원한 나라가 올 때까지 직전까지의 나라가 발목에 있는 나라잖아요. 이런 금 신상이 있고 금 신상을 만들므로 말미암아 다니엘의 세 친구가 절 안 해가지고 당했지요? 그리고 다니엘이 사자굴에 간 이유가 뭐냐 하면 기도하지 말라하는 그 법령을 어겨서 들어갔잖아요.
47 하나님께서 이렇게 불신자, 마귀에 속한 사람을 자꾸 이용해요. 이용해가지고 금 신상을 만들게 합니다. 그 금 신상 만드는 것에 터치하지 안는 이유는 무슨 언약 때문에 그렇습니까. ‘노아언약’ 때문에 금 신상을 만들든 무슨 짓을 하든 다 나둬요 그걸. 지금 김정일이 까불든 말든 가만 나눈다고요. 그걸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해를 해야 돼요. 사기꾼들이 활개치고 불신자들이 까불고 절 짓고 사기쳐가지고 큰 예배당 짓고 전부 다 ‘노아언약’이 다 봐줘요. 다 봐주는데 그렇게 하는 이유 가운데 그렇게 해야 거기서 십자가의 고난이 나오니까 이것이 진짜 ‘새언약’ 아닙니까. 그러니까 ‘노아언약’을 보라 이 말은 ‘범사에 감사하라’ 이 말입니다.
48 여러분들 야구나 축구나 프로레슬링 등의 스포츠에서 교체멤버가 있잖아요. 우리 성도는요. 이 세상 책임지는 사람이 아니고 교체멤버들이예요. 저 이렇게 전하다가 죽고 또 다른 사람이 전하다가 터치하고 들어가고. 앙리 빠지고 누구 대신 들어가고 지단 빠지고 누가 대신 들어가듯이 내가 다 하는 게 아닙니다. 교체하는 거예요. 교체하는 거. 성경해석이 굉장히 어려워요. 이런 것까지 찾아낼려고 하면 무지무지 어렵다고. 아브라함으로 다시 가봅시다. 아비멜렉은 그 동안 자식을 잘 낳았던 것이 ‘노아언약’때문이라는 것을 꿈에도 생각 못 했습니다.
49 그런데 아브라함을 만나고 난 뒤에 잘 나오던 애가 안 낳는 걸 봐가지고 이것은 아브라함을 건드린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과 함께 있는 하나님을 건드리고 그 하나님이 그 전에 ‘노아언약’을 통해서 자기들에게 애를 잘 낳도록 축복을 주시고 은혜를 주셨다는 것을 그 때 처음으로 알지요. 그 뒤에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믿었는지 안 믿었는지 그건 성경에 안 나오니까 모르겠는데 그렇다면 그런 노아언약의 혜택을 받고 있는 근거라면 왜 아브라함을 중간에 보냈느냐. 그것은 아브라함이 안고 있는 아브라함의 자식이 있어요. 아브라함의 가계 속에 두 개가 있어요. 아브라함은 육과 영의 기초가 됩니다. 그런데 육은 이스마엘이예요. 자식이 있겠다고 믿어라 해서 믿겠다고 해놓고는 엉뚱한 이스마엘을 낳아버린 거예요. 그 다음에 진짜 노선은 없어요.
50 아브라함에게는 그런 영적인 자식을 낳을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사라의 태가 죽고 난 뒤에 나온 거예요. 그것은 아브라함 자식이 아니예요. 이것은 아브라함 가계에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는 겁니다. 이스마엘은 앞으로 누구하고의 짝이 되느냐 하면 이삭과 짝이 되어서 노아언약으로 지금 보호받는 이 세상 안에서 하나님의 새로운 언약을 주기 위한 그러한 하나의 커플로서 이스마엘 집단과 이삭 집단이 같이 나란히 여기서 작동을 해야 되요. 또 나옵니다. 이스마엘 집단이 아니고 또 뭐가 나오냐 하면 에서 집단이 나오죠. 에서는 나라 이름이 뭡니까? 에돔이죠. 그러니까 뭔가 하나 일하자마자 툭 툭 집어던지는 거예요 저쪽에서. 툭 툭 나오는 거예요. 그리고 또 나와요.
51 나중에 요셉이 나오고 요셉 집단 이것도 툭 떨어져나가요. 유다와 이스라엘의 관계에서 북쪽 이스라엘은 떨어져 나가버려요. 이게 뭐냐. 전쟁이예요 전쟁. 하나 하나 전쟁에 의해 떨어져 나가야 된다고. 이것은 바로 우리가 성경을 볼 때 우리 자신이 주님으로부터 지적받기 위해서 성경해석을 해야 된다는 것을 제가 언급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 자신이 성경을 볼 때 ‘나 성경 알아야지’가 아니고 ‘어떤 죄가 있습니까?’ 지적받기 위한 접근이 되어야겠죠. 그렇다면 이게 툭 툭 떨어져 나갈 때부터 그냥 떨어져 나간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미지수로 남아있는 하나님의 언약의 본질 때문에 이스마엘이 떨어져 나가는데 이스마엘이 떨어져 나갈 때 ‘나’라는 것이 이스마엘로 단정 지어져서 죄와 더불어서 떨어져 나가야 되요.
52 떨어져 나가야 이 세상에 아들은 누구밖에 없습니까? 아들은 오직 누구밖에 없어요? 오직 예수님밖에 아들이 없어요. 아브라함의 자손은 오직 한 사람밖에 없습니다.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이삭도 아니고 야곱도 아니고 요셉도 아니예요. 하나님의 약속을 이룬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하나 남은 자 만들기 위해서 도중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전부 다 떨어져 나가요. 떨어져 나갈 때 그냥 떨어져 나갔구나 이러면 안 되고 떨어져 나갈 때 갖는 죄를 지금 우리가 쥐고 있지요. 우리가 지금 쥐고 있어야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만 바라봅니다. 나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고. 내가 바로 이스마엘이며 내가 바로 에서이며 거기에 있을 때 비로소 나라는 인간을 죄인으로 몰아넣으신 그 주님의 언약만 사모하고 믿게 되는 겁니다.
53 이스라엘 나라가 둘로 나눠지고 난 뒤에 십자가에 직접 가담했던 족속은 유다 지파입니다. 그래서 이름이 뭐냐. 유다 나라예요. 창세기 끝에 야곱이 유다를 축복할 때 어떻게 축복했습니까. 최고로 축복했지요? 그러니까 최고로 축복을 했다는 것에 대해서 유다 지파는 저희는 능히 이해했다고 보는 거예요. 이해를 했다고 하는 그들이 바로 죄인이예요. 그리고 신명기 끝에 보면 유다 지파가 배반자입니다. 유다 지파가 메시아를 배반한다고 예언되어있어요. 그렇다면 우리가 신명기나 야곱의 축복을 해석하려들 때 우리도 그들과 함께 축복받는다고 하는 축복과, 한번 해봅시다. 축복이 분명히 축복이예요. 야곱은 12지파를 축복했습니다. 신명기에도 마찬가지고.
54 그 축복을 자기한테 축복했다고 생각하면 이건 잘못된 해석이예요. 이 축복은 누구한테 한 거냐 하면 예수님한테 축복해가지고 예수님이 죄인된 우리를, 왜 죄인인데? 주님의 축복을 내 축복이라고 착각했던 그 죄인있죠. 주님의 축복을 내 축복이라고 착각했던 그 죄인을 예수님의 자기 공로로 그냥 우리를 불쌍히 여겨줌으로서 이 예수님 받은 축복을 우리 축복되게 하는 것. 이런 해석이 구약 성경에 개입되어야 되는 거예요. 이건 전쟁의 승리자가 전리품을 불쌍히 여겨서 전리품을 거저 주는 은총으로 제공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신분 자체가 통째로 예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축복된 것이지 우리가 예수님을 이해해서 알아서 성경말씀을 100독을 해서 축복받은 사람은 이 세상에 한 명도 없습니다. 성경 보게 되면 우리은 오해하고 착각하고 내 중심으로 생각하고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55 그러면 이제 본격적으로 ‘아브라함 언약’을 시작을 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데리고 다니실 때 그 데리고 다니시면서 나타난 사건들을 보면 하여간 아브라함이 가는 곳이 사건이 안 터지는 곳이 없습니다. 사건이 터지는데 특히 제일 큰 사건이 뭐냐. 이 사건을 통해서 누굴 만나느냐 하면 멜기세덱을 만나요. 이 멜기세덱 해석이 어려워서 젖을 먹는 사람은 이해가 안 된다고 했어요. 적어도 딱딱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사람만 멜기세덱 해석이 된다고 히브리서에 나오죠.
56 딱딱한 것을 먹을 수 있다는 말은 딱딱한 것을 먹으면 고통스럽지만 그러나 고통스러우면 고통스러울수록 깊은 맛이 우러난다 이 말입니다. 멜기세덱을 할 때는 자기 자신의 어떤 주장 같은 것을 기대했다가는 멜기세덱을 이해 못하는 어린 애 같다 이렇게 볼 수 있죠. 멜기세덱의 위치와 의미가 뭐냐 라고 할 때 철저하게 우리로 하여금 무가치하게 만드는 분이 바로 멜기세덱입니다. 심지어 누구까지 무가치하게 하냐 하면 아브라함까지 무가치하게 만드신 분이 바로 멜기세덱입니다. 철저하게 무가치하게 만들어요. 그러면 어떤 식을 이렇게 하느냐 하면 전쟁이 벌어질 때 318명의 병사를 이끌고 자기 조카 롯을 구원하러 전쟁에 개입하게 됩니다.
57 아브라함이 전쟁하려는 이유는 조카가 그들의 포로가 되어있기 때문에 개입해 들어가는 겁니다. 전쟁에 들어가는 데 여기 아브라함이 하는 전쟁에 배후에서 승리케 하시는 분이 나와요. 승리케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죠.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있기 때문에 이 전쟁을 인간 민족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쟁으로 전환시키는데 여기에 멜기세덱이 등장해버리면 조카를 구원하는 아브라함 전체와 멜기세덱과의 여기에서 새로운 관계가 수립됩니다.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요. 아브라함 밑에 뭐가 들어있냐 하면 9족속이 있어요. 9족속이 다 들어있단 말이죠. 아브라함 전체와 멜기세덱으로 대변되는 하나님과의 계약이 성립됩니다.
58 이 전쟁에서 멜기세덱에 종속되지 아니하면 절대로 이 세상은 저주받는다, 승리는 없다, 하나님의 축복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한 전쟁이 이 멜기세덱 전쟁이예요. 아브라함이 대변자가 되어서 아브라함 밑에 있는 모든 이방족속부터 해서 조카 롯까지 인류의 모든 것이 아브라함 책임 하에 멜기세덱과 여기서 계약에 들어가는 거예요. 여기서 계약 조건이 뭐냐 하면 멜기세덱이 갖고 있는 그 가치만이 아브라함 세계 전체에 녹아나도록 하는 그런 계약에 들어갑니다. 멜기세덱의 이러한 계약이 창세기 14장에 나오죠.
59 멜기세덱의 이러한 계약이 없으면 그 뒤 15장의 하나님과의 계약이 성립이 안 됩니다. 여기 15장 끝에 한번 봅시다. 15장 19절에 “곧 겐 족속과 그니스 족속과 갓몬 족속과 헷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르바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의 땅이니라 하셨더라” 나오죠. 그들의 운명은 누구 손에 달렸습니까. 아브라함의 손에 달린 거예요. 이러한 시각을 찾아낼 수 있어야 되요. 아하 이방민족이 까불어도 전부 다 누구 손에 있다? 아브라함 손에 달렸구나. 왜 그러냐 하면 아브라함이 계약을 맺었어요. 맬기세덱의 맹세가 자기의 영역권에 다 녹아지도록 계약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처음부터 창세기 12장에 보면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아브라함을 건드는 놈들은 저주받는다는 이것을 성사시킨 거예요. 하나님이.
60 이 ‘아브라함언약’을 아냐 모르냐가 어디서 중요한가 하면 여호수아 전쟁이죠. 여호수아 전쟁에서 이방 민족들은 열심히 이스라엘을 되받는, 여호수아에게 달려드는 그런 역할을 해야 됩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전쟁에 승리하는데 그냥 승리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붙이시매’ 전쟁이 필요한 거죠. 하나님께서 ‘붙이시매’. ‘붙이신다’는 말은 뭔가 하면 붙이게 하시는 그 주도자가 따로 계시다는 거예요. 여호수아가 아니고 뭔가 주도자가 따로 있는 거예요. 따로 있는데 그 따로 ‘붙이시는’ 취지가 뭐냐 하면 멜기세덱의 그 언약의 취지를 살리기 위한 목적으로 붙이게 되는 겁니다.
61 멜기세덱의 언약의 취지를 살리게 되면 여호수아가 어떠한 땅을 얻고 어떠한 전리품을 얻었든 간에 몽땅 누구한테 다 돌려지는가 하면 십일조를 비롯해서 여호와 하나님께 전부 다 갖다 바쳐야 되요. 그걸 구체화한 것이 바로 신명기 ‘모세언약’입니다. 그걸 받아 챙기는 분이 제사장이죠. 그래서 히브리서 7장에 보면 레위지파의 제사장은 철저하게 아브라함의 허리에, 아브라함에 종속된 레위지파여야 한다는 거죠. 아브라함이 알고 있는 그 멜기세덱을 모르면 레위지파의 제사장은 십일조의 의미를 모른다는 거죠. 십일조를 올라가면 최초의 십일조 다른 말로 최초의 제사장은 누구냐. 아브라함이잖아요.
62 아브라함이 자기가 얻은 전리품 가운데 십분의 일은 멜기세덱한테 갖다 바침으로 말미암아 그 십일조가 바쳐지는 그 땅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멜기세덱의 은총으로 보호를 해주는데, 제일 중요한 말은 멜기세덱의 은총으로 보호한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그것은 어떤 민족이든 누구든 간에 아브라함에게 축복하면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축복을 받는다는 새로운 축복의 상태를 하나님께서 약속한 겁니다. 이것은 ‘무지개언약’하고 비슷한 거죠. ‘무지개언약’은 나쁜 놈이든 선인이든 다시는 노아의 제물보고 다시는 물로는 심판하지 않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총이고 은혜죠. 그래서 사기꾼이든 나쁜 놈이든 전부 다 잘 먹고 잘 살고 하는 거예요. ‘노아언약’ 때문에.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가 죄짓고 나쁜 짓해도 아브라함과 멜기세덱이 약속 때문에 아브라함을 축복하기만 하면 누구든지 복을 받는 그런 시대에 돌입하게 된 겁니다.
63 이렇게 보니까 하나님께서 일을 하실 때는 인간을 갖고 놀아요. 인간을 완전히 갖고 놀아요. 심지어 마귀까지 갖고 놀아요. 자신의 맹세, 멜기세덱의 맹세를 계속해서 유지시켜주는 그러한 데 도구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그 멜기세덱이 누구냐 하는 거예요. 그 실체가. 그 실체는 여러분 잘 알잖아요. 누굽니까. 예수님이죠. 예수님. 예수님이 멜기세덱의 반차를 쫓아서 오잖아죠. 모든 것이 예수님의 은총을 증거 하기 위한 그러한 배치물들, 적재적소에 배치되는 배치물들로서 이러한 전쟁 구조를 일부러 유발시켜가지고 거기서 그들로 하여금 그 전쟁이 뭐냐 하면 은혜주시고자 하는 전쟁이죠. 하나님의 그리스도의 은혜가 스며들게 만드는 그러한 전쟁에 돌입하게 됩니다.
64 자 그렇다면 이 멜기세덱의 원칙에 의한다면 그 다음에 아브라함의 기도가 해석이 됩니다. 아브라함의 기도가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기도해서 조카 롯이 나왔다고 생각하는데 아니예요. 아브라함은 이제 아브라함 본인 홀로 몸이 아닙니다. 아브라함 밑에는 이삭이 나오고 멜기세덱의 맹세에 의해서 이삭이 나와야 되고 아브라함의 기도의 응답도 멜기세덱의 은총을 이해하는 쪽에서 주어진 거예요. 아브라함이 기도한 것은 멜기세덱의 그 약속의 성취가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서도 유효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롯이 있는 그 동네에다가 하나님께서 집중적으로 포화를 가해요.
65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마저 이길 수 있는 것이 바로 멜기세덱의 맹세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죠. 예수님의 그 약속은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도 그걸 붙잡을 수 있을 정도로 그것을 능가하는 입장에 서서 있다 이 말이죠. 그걸 알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의인이 있는데 어떻게 심판이 감행될 수 있습니까 라는 이런 질문을 던지면서 계속 기도를 연거푸 해댑니다. 기도를 연거푸 계속 해댄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궁극적으로 왜 심판하시려고 합니까 라는 거죠.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해야 아브라함 너의 위상이 더욱 더 부각될 거니까, 심판한다는 겁니다.
66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은 앞으로 계속 심판의 주로서 입장에 계속 서 있어야 되는 겁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가치가 조카 롯과 관계되는 것은 하나는 멜기세덱 전쟁과 또 하나는 소돔과 고모라 이 두 가지로서 드디어 롯의 역할은 끝났어요. 그 뒤에 롯 안 나오죠? 멜기세덱과, 소돔과 고모라 심판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위상이 무엇이라는 것이 이미 다 밝혀졌습니다.
67 그 다음에 문제가 뭐냐 하면 아브라함 자신에게로 들어가요. 아브라함과 롯은 구원자와 구원받은 사람의 위상이 이 두 가지 사건을 통해서 밝혀졌습니다. 이러한 심판 속에서, 하나님의 심판 속에서 아브라함은 구원자가 된다 라는 이것이 이제 아브라함의 가족 속에 그대로 들어가요. 가족 속에 들어가게 되면 이번에는 아브라함 자리가 없어지고 여기에 ‘이삭의 언약’이 투입되죠.
68 이렇게 되면 아브라함 자체가 없어져야 되요. 아브라함이 사라져야 되요. 아브라함은 진공상태가 되는 거예요. 없는 것을 인하여 없는 것이 나옵니다. 없는 것에서 없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그것은 바로 모든 있음에 대한 없음에서의 공격이죠. 계속 이어집니다. 계속해서 있음이 없음을 방해하지 못하게 조정하게 되죠.
69 그렇게 해서 없는 것이 있음을 전면적으로 전부 다 장악하고 새로운 지배체계에 들어가게 되는 ‘이삭의 언약’이 실시되는 데 여기 ‘이삭의 언약’을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47쪽에 보면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창 22:17)”. ‘네 씨가 네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이렇게 되어있죠? 여기 전쟁이 있고 적이 있어요.
70 적이 없는 상태에서 전쟁이 시작되면 적이 생깁니다. 적이 생기는데 그 적이 뭐냐 모든 인간들이 다 적이 되요. 모든 인간들은 다 적이 되고 적이 아닌 것은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언약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전쟁에서 우호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고 모든 인간이 적으로 되는, 인간 자체가 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새로운 전쟁이 이제 시작이 됩니다.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인간과 인간 사이에 서로 적을 만들어버립니다. 적을 만드는데 그 적을 만들게 되는 동기가 뭐냐 하면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같은 형제들끼리 서로가 적이 되는데, 서로가 적이 되면서 동시에 둘 다 하나님의 적이 되는 이런 관계에 집어넣어버려요.
71 그게 바로 이삭의 이야기입니다. 이삭을 다시 한번 이야기하면 이삭은 약속에 의해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약속의 사람입니다. 약속의 사람이라는 것은 ‘아브라함의 언약’에 의해서 태어난 사람이라는 뜻이예요. 그런데 ‘아브라함 언약’에서 지금까지 롯 때문에 아브라함이 있어야 되지만 ‘아브라함 언약’이 이제 누구를 없애 버리냐 하면 그 동안 충실하게 중심역할을 했던 아브라함을 죽여 버립니다. 아브라함을 없애버립니다. ‘아브라함 언약’이라고 해놓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줄기차게 사용하셔놓고 그 사용된 아브라함을 제거시켜버려요.
72 없애버리고 여기 아브라함 없는 상태에서 전쟁에 나섭니다. 이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약속의 사람 이삭이 이러한 사실을 이야기합니다. 이삭이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이삭은 결국 뭘 보여 주냐 하면 오류와 실수와 죄를 몽땅 다 보여주어서 인간 자체를, 아브라함 자체를 적으로 만드는데 하나의 일임을 담당하는 그러한 역할을 하죠. 그래서 우리가 있는 이유는 죄를 유발시키기 위한 중심체로서 여러분과 제가 있는 겁니다. 이삭이 있다는 것은, 약속의 사람이 있다는 것은, 예수 믿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예수 믿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더 발산되고 더 커지게 하는 그런 역할을 하기 위해서 예수 믿는 사람을 이 땅에 심어놓았다 이 말입니다.
73 오류와 실수와 착각과 이런 것들이 이삭을 통해서 이제는 폭발적으로 막 터져 나오죠. 그런데 그렇게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계시를 주십니다. 창세기 25장에 보면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이렇게 되어있죠? 여기 보면 ‘나뉨’이라는 말이 나와요. 두 밎고이 서로 나뉜다 했어요. 나뉨이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이삭이 ‘아브라함 언약’에 대한 오해 때문에 그런 거예요.
74 아브라함 언약을, 축복을 오해 해가지고 내가 축복된 사람이라고 오해한 그 순간부터 이삭은 이미 적과 적을 만드는 실수와 오류와 오인에 주인공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약속의 사람을 보내어서 그 약속의 사람을 통해서 세상을 적과 적으로, 물론 하나님께 둘 다 적이지만, 만드는데 거기에 일 몫을 담당하는 일꾼으로서 하나님께서 쓰신다 라는 것이 ‘이삭 언약’의 동기가 된단 말이죠. 아브라함 같은 경우에는 인간을 구원하는 모티브, 아브라함에게 축복하는 자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