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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요한계시록 3:9-13 (계 3:9) 『보라 사단의 회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거짓말하는 자들설교요한계시록

Re..계 3: 9-13 (사단의 모임)

이름 : 이근호(IP:)

사단의 모임

2006년 7월 2일 설교 본문: 요한계시록 3:9-13

(계 3:9) 『보라 사단의 회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거짓말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저희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계 3:10)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계 3:11)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계 3:12)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계 3:13)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교회의 기둥같이 쓰여 지는 사람들이 곧 성도라고 하십니다. 기둥이 되었다는 말은 성전에 포함된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에 포함되지 못하는, 즉 기둥이 되지도 못하는 사람도 있다는 말이 됩니다. 이로서 사람이라고 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 그 기둥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새겨지게 된다는 겁니다. ‘이름’이란 단순히 명찰하나 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이 그 사람의 평생과 운명을 완결적으로 지배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이름이 다름 아닌 주님의 이름이기에 그 주님의 운명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됩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바뀌고,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뀌듯이 오늘날 성도들은 자신의 이름은 빠지고 주님의 이름으로 사는 인생이 됩니다. 원래 인간의 이름은 ‘아담’이었습니다. 흙에서 나왔지만 이제는 하나님에 의해 살아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그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위배하니 그 이름대로 도로 흙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성전의 기둥같은 사람들의 운명은 주님에 의해 확정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이 기둥같은 사람들은 그냥 가만히 곱게 생을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쉬지 않고 싸우고 인내하고 환란을 당하면서 사는 삶입니다.

어떤 분들은 괴로워하기를, 예수님을 잘 믿는대도 불구하고 환란이 닥쳐온다는 겁니다. 성도에게 환란이 안 오는 것이 아니라 그런 환란이 오더라도 생명의 면류관이 더 소중함을 그런 환란 가운데서 더욱 더 깊게 알게 되어지는 삶을 갖게 됩니다. 아무리 큰 역경이 오더라도 생명의 면류관의 중요함을 부인하지 않는 것이 기둥 같은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이처럼 사람이라고 해서 다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이 보시기에 기둥같이 쓰여지는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이나 타인을 평가내리면서 경제적 조건을 가지고 내리는 경우가 빈번합니다. 즉 “나라는 인간의 가치란 내가 가진 돈으로 판정난다”는 겁니다. 본인도 그런 식으로 보고, 타인들도 그렇게 보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자신이 갖고 있는 생명의 면류관의 가치는 훼손되는 겁니다. 바로 사단의 모임에서 노리는 바가 이런 것입니다. 즉 “당신이 알고 있는 생명이라는 것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중요한 것은 당신이 얼마나 큰 부자인가 하는 겁니다. 이 가치만이 사회에서 사람이 사람답게 대우받는 유일한 기준입니다”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누가복음 12:15에 보면,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경제적 관점말고 다른 관점으로 사람을 보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만약 어떤 사람이 이러한 예수님의 관점 말고 다른 관점으로 자기 인생을 살면 이 사람은 평소에 사단과 싸우지 않는 인생이 되고 마는 겁니다.

이런 사람은 결국 성전에 있는 기둥처럼 ‘생명의 면류관’을 사수하겠다는 싸움을 평소에 벌리지 않는 것이 되고 만약에 이런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환란이나 유혹이 들이닥치면 금방이라도 사단이 모임에 합류할 사람입니다.

예를 들면, 한국에 있는 교회들의 교인수가 저마다 3명, 5명, 좀 크다 싶으면 20명 가까이 된다면 신학교를 졸업한 목사들이 말씀을 전하는데 있어 교인수를 가지고 교회됨을 측정하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하지만 다들 수 백명씩 교인을 확보해 있고 자기 건물을 갖고 있다면, 만약 신학교를 졸업해서라도 수 백명씩 교인들이 없고, 자기 건물이 없는 목사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는 목사도 아니구나”라고 생각할 공산이 큰 겁니다. 즉 큰 교회가 생명의 면류관의 가치를 훼손하는 유혹이 된다는 말입니다.

사단의 모임에는 어떤 사람이 모일까요? 그것은 성령받지 못한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그렇다면 성령받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점이 무엇일까요? 사도행전 5:3에 보면 그 한 예가 잘 나와있습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교회라는 것도 그저 평범한 인간들의 모임이기에 얼마든지 속일 수 있다고 믿는 겁니다.

이런 아니니아와 삽비라 같은 인간들이 모인 곳에 사단의 모임입니다. 주님을 속일 수 없는 분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주님도 속이고 인간도 속일 수 있는 대상으로 보는 겁니다. 거기에 비해 성령의 모임이란 하나님에게 자신의 잘남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성령님의 탄식’소리를 듣고 싶어 모인 모임이 성령의 모입니다.

로마서 8:24-27에 보면,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참으로 자신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함부로 신에게 기도하면서 다가갑니다. 이런 인간들 중에서 미리 아시고 불러내시는 그들에게는 특별히 성령님께서 탄식하시면서 친히 기도하셔서 모든 것이 합력을 선이 되는 조치를 취해주십니다. 즉 ‘보이는 소망’이 결코 참된 하나님이 원하시는 소망이 아님을 일깨워주십니다.

참으로 오늘날 사람들에게 성령님의 탄식을 증거한다는 것은 마치 골짜기에 수북이 쌓여있는 해골들에게 설교하는 것과 같습니다. 시신들에게 말을 해봤지 못 알아 먹는다는 것은 지극히 옳은 상식입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 벌떡 일어나는 기적이 있을 것을 내다보시고 성도들에게 십자가의 능력을 증거하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군대입니다. 사단의 모임과 싸워야 합니다. 오늘날의 사단의 모임이 바로 ‘한국 교회’입니다. 눈에 보이는 그들의 큰 부흥이 결코 주님의 성전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사람이라고 다 같은 사람이 아님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1-05-26 16:46

019강-계3:9-13(사단의 모임)-rev060702

설교;이근호 목사님

하나님의 말씀 요한계시록 3장9절에서 13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402페이지입니다. 제가 읽습니다.

『보라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아멘.』

성경에 보니까 인간이라 다 같은 인간이 아니네요. 오늘 성경에 보니까 성전에, 하늘나라 성전에 기둥같이 쓰시는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기둥으로 쓰임을 받는다는 것은 거대한 성전, 하나님 계시는 집에 그 인간들이 포함이 된다는 겁니다. 여기 보면 ‘기둥같이 세우리라’ 했는데, 보통 교회에서 기둥이라 하는 말은 어디에 쓰느냐 하면 주로 십사님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교회 기둥같이 쓰시는 집사님’ 이라고. 기둥 빠지면 집이 무너진다 이 말이거든요. 제대로 돈 좀 내라 이거예요. 기둥이 빠져버리면 교회가 무너지니까 집사 됐으면 돈 푼이라도 내놔라 이 말이죠. (안 내놓으면 교회 무너지니까) 그런데 오늘 보면 성경에 기둥 같은 사람은 돈 푼이나 내는 사람을 기둥이라고 보는 게 아니라 환란 때를 진리와 함께 굳게 잡고 환란을 잘 견디는 사람을 기둥이라고 돼 있어요.

아무나 기둥이 아니라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되려면 환란이라는 것을 당해야 되고 그 환란을 이기는데 하나님의 진리로써 버텨낼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을 바로 하나님의 기둥 같이 쓰겠다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저에게 그런 소리 많이 해요. ‘예수 믿는데 왜 어려움이 닥칩니까?’ 그런 질문 할 때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해요. ‘그런 어려움도 못 이겨 성도라 할 수 있습니까?’ 어려움이 온다는 것을 탓할 게 아니라 이제는 거뜬히 이겨낼 수 있구나, 그런 인간이 되었구나, 그걸 기뻐하고 자랑스러워하고 감사해야 될 문제지, 환란 오는 걸 가지고 자꾸 시비 걸고 하나님께 대들고 그러시면 안 됩니다.

하늘나라 성전에 기둥이 되는 중요한 이유는, 여기에 그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그렇게 기록돼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기록돼 있다는 말은 이것은 일반인들, 특히 아마추어 같은 사람들에게는 이해가 잘 안 될 텐데, 이름이 기록됐다는 말은 명찰 하나 달랑 달았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이름이 기록됐다는 것은 앞으로 그 사람의 팔자와 운명을 그 이름에 담겨있는 코스대로 이끄신다는 뜻을 갖고 있어요. 이름을 새겨버리면 저주받은 팔자는 날아가 버리고 새겨진 이름에 한정돼 있는 새로운 축복의 노선을 가야될 사람, 가고야 말 사람, 반드시 가게 되는 사람, 그게 이름을 새긴다는 겁니다.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죠? 야곱의 인생, 야곱의 이름에 있는 더러운 속성, 저주받은 속성은 날아가 버리고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축복된 인생의 길이 그에게 주어진다는 겁니다.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뀌죠. 사래에서 사라로 바뀝니다. 이름이 바뀐다는 것은 그냥 호적등본 할 때 이름 등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나에게 이름을 주신 그분에 의해서 지배당한다. 그런 뜻입니다. 내가 내 인생을 주관하지 않는다 이 말이죠.

인간을 지어놓고 ‘아담’이라고 지었습니다. 이름이 사람이란 뜻이에요. 살아있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죄짓고 난 뒤에는 이름대로 흙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하나님이 이름가지고 장난치시는 겁니까? 처음에 이름을 아담이라고 할 때는 흙에서 나왔다는 뜻에서, 좋은 뜻에서 아담이라고 지은 겁니다. 이제는 흙 같은 인생은 끝났다. 이제는 흙에서 벗어난 새 생명이다. 그런 이름인데 아담이 죄를 지으니까 “그럴 줄 알았어, 다시 돌아가! 이름대로 놀아야지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가야지” 라는 식으로 돌이키고 맙니다.

인간이라 하는 것은 자기 이름의 굴레를 못 벗어나는 거죠. 여기 기둥같이 쓰시는, 하늘나라 기둥같이 쓰신다는 말씀을 제가 다시 말씀드리면, 사람이라고 다 같은 사람이 아니에요. 인간이라고 다 같은 인간이 아닙니다. 하늘나라 성전에 참여되는 사람 있고 그 성전에 참여 못하는 사람 따로 있습니다.

우리 노회, 별로 노회가 크지는 않습니다만 노회 목사님들 만나면서 제가 마음속으로 늘 괴로움이 있어요. 복음도 잘 알고, 설교도 제대로 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흠잡을 데 없는 반듯한 생활 하시는데 문제는 교인이 없어요. 교인이 없어 생활이 아슬아슬해. 그래서 그분들을 보면서 “차라리 당신들하고 나와 같이 죽읍시다” 그런 생각이 드는데 이게 욕하는 게 아닙니다.

사도바울 소원이 죽는 거였거든요. 참 죽음이라는 건 비참해요. 죽는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다 비참한 거예요.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그렇게 구질구질하게 이런 가게 말고 번듯한 고딕체 교회 건물도 없이, 교회 없는 건 용납되는데 교인 없는 건 용서가 안 되잖아요. 이럴 때 가슴이 쓰리고 아리지만 그러나 성경말씀에 누가복음에 보면 「사람의 생명은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이 한 말씀가지고 위로 받습니다. 피차가…

사람의 생명이라는 것은 소유의 넉넉함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이죠. 여기 생명이라는 새로운 개념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뭐냐 사람을 볼 때 경제적 측면으로 보고 구성하는 것은 그거는 반칙이다 이 말입니다. 반칙. 예수님이 인정하지 않은 사람이 사람입니까? 저는 사람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그냥 굴러가는 흙덩어리다 이렇게 보지요.

예수님이 알아주지 않는 인생은 무효입니다. 예수님께서 경제적 측면에서 “네가 인간답구나,” 경제적 조건에 따라서 너는 사람답다, 너는 사람답지 못한 나쁜 놈이다. 이렇게 규정짓지를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그런 측면으로 사람을 봤다면 경제적 측면으로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을 보는 사람은 주님 보시기에 성전 기둥같이 쓰지 못하는, 성전에 들어가지 못하는, 하나님 이름이 새겨지지 못하는, 쉽게 말해서 구원받지 못하는 인간이죠.

그건 하나님이 인정 않는 인간입니다. 경제적 측면으로 평가하는 자체를 우리는 다시 구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 입장에서 구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경제적 점수를 가지고 사람의 점수를, 우열을 논한 게 아니라는 이야기를 오늘 본문에서 동일하게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환란의 때를 인내하고 견딜 수 있는 사람 같으면 그 사람은 내가 성전 기둥같이 쓰마, 이건 인생을 새롭게 보는, 인생이 무엇인가 세상이 무엇인가 새롭게 우리에게 보여주는 하나의 관점인 것입니다. 그런데 기둥같이 쓰시는 이분들의 인내가 무슨 인내냐 하며는, 여기 11절에 보면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이렇게 돼 있습니다.

기둥같이 쓰시는 특징이 무엇이냐 물으신다면 주께서 주신 생명의 면류관을 그 어떤 경우에도 그걸 시답지 않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소중하게, 고귀하게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은 이 세상에 어떤 환란이 오더라도 생명의 면류관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너 자신과 다른 사람을 볼 수 있느냐, 라고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는 것을 구분하는데 있어서 경제적인 요소들은 하나의 요소가 될 수 없다 이 말입니다. 경제적으로 어렵다고해서 죽어라, 지구를 떠나거라, 이럴 수 없다 이 말입니다. 번듯한 자기 교인도 없고(자기 교인? ^^) 사모님이 버는 것으로 살아나가는 그런 사람이라도, 생명은 소유의 넉넉함에 있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주시는 것이라 귀하게 여기는 사람은 누가 그 사람을 비웃겠습니까, 야유하겠습니까,

성경은 누가복음16장에서 오히려 반대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높임을 받는 것은 하나님께 미움 받을 각오를 해라, 이 말이죠. 사람에게 높임을 받고 칭찬을 받을 때는 화가 있으리로다. 누가복음 6장인가 7장인가 보면 나오죠. 사람이 칭찬할 때는 ‘너는 죽은 줄 알아라’ 이 말이죠. 오히려 사람이 너를 미워할 때, 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겁니다. 왜냐면 인간의 비참함을 느끼거든요.

사람이 자기를 비참하게 느낄 때 그때만 생명의 면류관의 고귀함이 그때 부각이 됩니다. 그때 떠올라요. 방금 제가 이 본문을 가지고 사람을 볼 때 경제적 요건을 가지고 함부로 평가하지 마세요, 라고 제가 분명히 언급했습니다. 예수님의 관점에서 생명의 면류관을 돈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관점에서 인생을 살아달라고 제가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여기 본문 10절, 11절에 보면 성전에 기둥같이 쓰시는 특징이 싸운다는 거예요. 환란과 인내도 싸우는 겁니다.

요즘 교인들이 싸우지를 않습니다. 특징이 싸우지를 않아요. 어떤 때는 나 혼자 싸우는 것 같은 느낌이… 물론 제가 싸우는 게 남들 보기엔 시답지 않은 걸 가지고 싸우는 것으로 보입니다. ‘기차에서는 휴대폰 나가서 전화하세요.’ ‘식당에 갈 때마다 두리번거리며 담배피우는 사람 있나 감시해야하고, 주인 불러 재떨이 치우세요, 국민 보건 위생에 좋지 않습니다. 이런 시답지 않은 것으로 싸우는 거 별 의미 없지요?

정작 싸워야할 것은 뭐냐, 그런 싸움이든 이런 싸움이든 안 싸운다는 것은 뭔가 문제가 있어요. 그것은 자기 소유만 챙기면 남들과 나의 차이점을 싸움이라는 것을 통해서 드러나게 돼 있는데 안 싸운다는 것은 자기 즐거움에 도취돼있고 과연 내가 누구냐를 묻지 않는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특징이 있어요.

이러한 이야기가 어디 나오느냐 하면, 바로 목숨과 생명의 면류관을 먼저 설명해 드리겠는데요, 우리가 산다는 것은 사실, 짐입니다. 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했는데,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벗으려 하면 주님께 가야 되요. 그래야 무거운 짐이 벗어지는데 ‘내게로 오라’했으니까 주님께 가야되는데 주님은 지금 어디 있느냐 하면, 하늘나라에 가 있거든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죽어서 빨리 나에게 오너라, 그런 뜻이에요. 똑같은 뜻입니다. 왜냐하면, 산다는 자체가 짐입니다. 자기가 짐을 지고 있고 특히 남들에게 짐이 되요. 내가 살아있다는 자체가 남들에게 짐이 됩니다. 모이는데 있어서 제일 고통스러운 게 뭐냐 하면, 하루 스물 네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 젊을 때는 이런 고민을 할 줄이야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60되고 70 돼 보면 시간 보내는 거 이거는 고역입니다. 고역. 차라리 밭에 나가 밭일 하라면 밭일 했지, 집에 가만히 있으라 하면 차라리 약 먹고 죽는 게 제일 편하다할 정도로 힘든 거예요. 왜 힘드냐, 그것은 평소에 자기 적이 없어요. 자기의 적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님이 있으면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뜻인데 주님께서 가신 길을, 주님께서 평소에 싸워왔던 그 싸움을 이제는 네 안에서 계속해서 반복되면서 싸움이 이루어지면서 주님 계시는 곳으로 간다. 이런 뜻이거든요.

그런데 평소에 싸우지를 않았으니까 누구하고 싸워야 될지, 무엇에 대해 싸워야 될지 적이 없어요. 그런데 성경에 보니까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고 마귀들과 싸움이다 말이죠. 제가 방금 어려운 말 쉽게 얘기하면 이렇습니다. ‘죽을 때까지 전도하며 삽시다’ 이런 뜻이에요. 주님을 증거하며 삽시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간에,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간에 예수님을 증거하고 삽시다.

그런데 예수님을 증거 한다는 것은 경제적 측면에서 나를 바라볼 때 이게 돈으로 안 돌아와요. 평소에 우리가 싸움 하지 않은 이유는 경제적 측면에서 살아보려고 애를 쓰다 보니까 일단 어느 정도 돈이 있다 싶으면 남하고 싸울 필요가 없거든요. 그런데 사람이라는 것은 생명이라는 것은 경제적 측면이 아니고 소유의 넉넉함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말이죠. 그냥 살아가는 것은 그냥 우리 힘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여기서 주님께서 우리 속에 계신다는 것은 뭔가 새로운 싸움을 평생 해야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부과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싸움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9절에 봅시다.『보라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이렇게 돼 있습니다.

‘회’라는 것은 모임을 이야기합니다. 사단의 모임이 있다는 겁니다. 우리의 싸움은 무슨 싸움이냐 하며는, 성전에 기둥같이 쓰시는 사람들의 싸움은 악마의 싸움입니다. 사탄과의 싸움입니다. 지금 이 세상에 사탄의 모임 있다는 게 눈앞에 보입니까? 관심 없다고요?(ㅋ 그냥 속으로 묻는 겁니다.) 사탄의 모임이 있다는 것을 평소에 관심을 두려면 자기를 경제적 여건으로 바라보지 않을 때만 나오는 현상이에요.

‘저 사람 따르다 얼마 챙겼나?’ 이런 식으로 인생을 살게 해버리면 악마는 없어요. 다만 나를 사기 치는 사람만 악마지, 나 돈 버는데 방해하는 것만 악마지 영적으로 악마란 없다, 이 말이죠. 내 돈만 받아주면 악마도 할배라 하겠다.(ㅋㅋ) 이렇게 경제적 요건으로만 인생을 살아가게 되면 주님이 그렇게 이야기한 악마라든지 오늘 본문 사탄의 모임, 나와는 별개라, 관심이 없어요. 무슨 엉뚱한 소리 하나, 이런다 말이지요.

사탄은 반드시 성령의 모임을 공격하게 돼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시비 걸려는 것이 아니고 사탄의 일은 예수님을 못 믿게 하는 거예요. 못 믿게 해서 우는 사자와 같이, 어떻게 하든 택한 자라 할지라도 기어이 지옥에 보내고자 활동을 멈추지를 않고 있습니다.

돈만 있으면 전부야, 인생 권력만 있으면 전부야, 장로님 기도하신 대로 명예만 있으면 그게 최고야, 이런 식으로 하는데 우리는 ‘에고 그래요? 돈 얼마 생기는데요?’ 한평생 살면서 돈 얼마 생기는가만 따지니까 저 사람이 나와 예수님 관계를 끊고자 하는 수작인지 그런 거 관심도 없고 그저 이용할 꺼리만 있으면 이용해 먹겠다는 거예요.

방송에 보니까 어떤 다단계에 37살 먹은 아주머니께서 6억을 투자해가지고 다 날렸다는 거예요. 6억 투자했는데 자기에게 돌아온 것은 점수 126점만 남고 그대로 다단계로 다 날렸다는 겁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느냐고 구속해야 된다고 고함치는데 내가 보기엔 사기 당한 그 사람부터 구속해야 되요. 평소에 관심사가 유혹을 하라고 자기 배를 째는 것과 똑같아요. 날 유혹해주어요~! 하는 것과 똑같아요. 그거는.

갑자기 분위기가 따운 된 것 같은데, 사탄과 성령은 같이 있습니다. 그게 사도행전 5장에 보면 나옵니다. 사도행전5장3절에 사탄과 악마가 같이 나오는 대목이 있습니다.『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왜 하나님이 지시한 대로 따르지 않고 땅값을 속이고 헌금했느냐, 이 말이거든요. 그래서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 부부가 한 날 한 시에 같이 죽고 말았어요.

이것은 뭐냐 하면 사도행전 초대교회 때, 성령의 모임이 있는데 악마의 모임에서 악마는 뭘 보느냐 하면 성령의 모임이 아니고 인간적인 모임이라고 의미를 희석시키고 생명의 면류관의 중요한, 예수님 이름의 중요함, 기둥같이 쓰시는 사람들이 복음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까지 버리는 그 중요함을 시시하게 여기도록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 마음속에 침투한 거예요.

내가 헌금 얼마나 한 줄 아나? 인간들끼리 속고 속는 마당에 교회? 교회가 어딨어! 그냥 인간들 모임이지. 라고 헌금을 했는데 그게 베드로한테 걸려 너에게 사탄이 임해가지고 나를 속임이 아니고 성령을 속이는 것이기 때문에 너를 죽여버린다는 겁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 성령의 모임은 분명히 있습니다. 두 세 사람이 모이는 곳에 내가 너희와 함께 하겠다는 말이 빈 말이 아니에요. 허투루 듣지 마세요. 괜히 해본 소리가 아닙니다.

그 모임도 있고 악마의 모임도 있습니다. 악마의 모임은 어떤 사람이 모이냐면 아나니아와 삽비라 같은 사람이 모인 곳이 악마의 모임이에요. 악마의 모임은 그 안에 지남철이 있어가지고 서로 잡아당기고 잘 이루어지게 돼있습니다.

성령의 모임도 지남철 역할이 있어가지고 서로 자기들끼리 탁탁 땡겨서 성령의 인도함을 받은 사람은 자기들끼리 모이게 돼 있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것은 악마이 모임이 따로 있다는 거예요. 더욱더 중요한 건 성령의 모임이 있다는 겁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같은 사람이 모이는 그 모임이 사단의 모임, 악마의 모임입니다.

어떤 부흥사가 와가지고 여러분들이 가난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가난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가난한 것은 첫 째, 겨자씨만한 믿음이 없어서 가난합니다. 둘 째, 야곱처럼 별미를 안 갖다 바쳐서 가난한 것입니다. 세 번째, 교회에 시간 바치고 땅바치고 시간 바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이렇게 해서 부흥이 됐다 합시다.

거기에 감동 받고 갖다 바칠 때 이거는 다단계에 바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바로 그런 사람들 모임입니다. 나를 바라볼 때 경제적 측면에서 인간으로 바라보는 그런 사람들의 모임이 사단의 모임이에요. 교회 옴으로 말미암아 경제적으로 풍성해진다는 것을 기대하고 그래서 지남철에 끌리듯이 자기들끼리 땡겨서 축복받기 위해서 모이는 집단. 아나니아와 삽비라같은 모임이 악마의 모임입니다.

그걸 길게 얘기했지만 그걸 네 자로 하면 ‘한국교회’ 성령의 모임은 로마서 8:26절에 나오는 것처럼 성령의 탄식 소리를 듣고 모이는 사람들입니다. 로마서 8장26절에 보면 성령께서 탄식하며 기도하는데 탄식하는 이유는 뭐냐 하면,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다 이 말입니다.

사도바울은 이야기하기를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니 우리는 보이는 소망을 고대한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철이 있습니까? 우리는 날 때부터 철이 없어요. 만 날 아나니아와 삽비라 같은 기도를 하고 있다는 말이죠.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탄식이라는 말이 일종의 울림증이에요. 간절히 기도하신다는 거예요.

‘네 기도하는 내용이 틀렸어 너 인생 그렇게 사는 게 아니야’ ‘그렇게 살면 성전의 기둥같은 인간이 아니야’ ‘생명의 면류관은 그렇게 돈으로 바꿀 수 있는 게 아니야’ ‘예수님의 피로 흘려서 주신 것이 돈으로 환산되는 것이 아니야,’ 탄식의 소리가 듣고 싶어서 오는 사람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그게 성전이에요.

여기서 하나 주의 할 것은 뭐냐 하며는, 성령께서 모이는 사람들은 완전하다든지 완벽하다든지 돈을 생각 않는다든지 세상을 안 좋아한다든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아나니아아 삽비라 이야기했지만 그들이나 이들이나 똑같아요. 단지 다른점이 있다면 인간의 가락이 그렇고 평소에 가정교육이 그렇고 사회에서 들은 상식들이 친구에게 배운 것들, 예수님 관심 없어요. 오직 나에게만 관심을 두면서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는 것이 인간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불신자든 신자든 가리지 않고 우리는 똑같다는 것을 명심해야 되요. 다만 차이점이 뭐냐 하면, 그래서는 안 되잖아, 그건 아니잖아, 라는 탄식소리가 어떤 기준점을 가지고 제시될 때, 그 기준점은 바로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라는 이 성경말씀이 기준점이 되어서 우리에게 늘 키질해 가는 거예요.

사람 사는 게 그렇게 사는 게 아니다, 인간은 그렇게 사는 게 아니야, 성전 돼야지, 기둥돼야지, 이런 식으로 탄식하는 거예요. 성령님께서 간구하심으로 말미암아 성도한테는 어떤 혜택이 주어지느냐 하며는 성도가 어떤 기도를 하든 하나님께서는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는데 어떤 코스로 이루시느냐 하면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들을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를 영화롭게 하시는 그 작업을 성령님 단독 작업으로서 그걸 우리에게 혜택을 주십니다. 그 효능과 효과를 우리에게 줘버려요.

다만 우리가 느끼는 것은 뭐냐 하면, 이건 아니다 하는 것을 평소에 느끼잖아요. 성령의 탄식소리를 느낀다는 것. 제가 아까 노회 목사님들 이야기했는데, 복음을 전할 때 교인들이 싫어하더라 이 말이죠. 싫어할 수밖에 없죠. 그들이 원치 않는 것을 이야기하니까요. 그들은 경제적 측면을 가지고 재평가 받고 싶은 겁니다. 나 돈 있어, 대우해줘 나 사람답게 살련다.

돈이 사람답게 사는 걸 만든다, 사람답게 만들어 달라고 교회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목사님께서 복음대로 하니까 듣기 싫은 거예요. 듣기 싫으니깐 어느 교회라고 다르겠느냐, 축복 받았다는 간증집회가 난무한, 이렇게 했더니만 부자 됐다는 사례들을 나열하는 교회로 가버린 거예요. 하나님 하시는 일과 하나님 뜻이 무엇이냐를 누가 독점하고 있느냐 하면, 성령께서 독점해가지고 조금씩, 조금씩 감질나게 우리에게 나누어주십니다.

이렇게 나눠줘 가지고 결국 성도에게 남은 것은 뭐냐 하면 성령님이 아니었으면, 또는 주님이 아니었으면, 우리 주님이 아니었으면 구원될 수도 없는 죄인이구나 라는 것을 그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가 날이 갈수록 더 커진다 이 말입니다. 인생이라는 것은 짐이지만 생명은 황홀함이에요. 황홀함. 거지같이 없어도 구원받잖아요.

아무것도 없는데 구원받는다는 게, 영생 얻는다는 게 공짜로 얻는 이 재미가 보통이 아닙니다. 그거 느끼는데 2.5초, 3초 가면 많이 가는데 성령께서 2.5초를 감질나게 조금씩, 조금씩 주시는 것은 바탕에 이미 근거가 있어요. 그 근거가 에스겔서 37장에 보면 나옵니다. 에스겔이 어느 골짜기 가서 보니까 사람은 없고 해골만 가득하게 있어요. 해골. 하나님과 에스겔 선지자가 그 해골들을 보는 거예요.

지금까지 에스겔이 전도하고 말씀 전했던 대상이 누구냐 하면, 시체들이었습니다. 제가 신학교 교장이라면 목사 될 사람들 실습할 때 교회 강단에 세우지 말고 장례식장에 데려갔으면 좋겠어요. 공동묘지나 납골당에 가가지고 그것도 부실부실 장맛비 올 때 밤12시쯤 되었을 때 가서 세워놓고 설교하라고 시켜봤으면 좋겠어요. 수준이 또라이 수준이지만 하여튼,

무슨 말이냐면 교인들이 당신 말을 알아들을 거라고 기대한 자체가 잘못 됐다 말이죠. 죽은 사람보고 설교했어요. 죽은 사람, 해골이 못 알아듣는 것은 당연한 거예요. 알아듣는다면 시신이 벌떡 일어나는 것과 동일한 기적이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이 묻습니다. “엘리아야 이 해골들이 살겠느냐?” 다짐하듯이 묻습니다. 해골입니다. 죽었습니다. 뼈다구입니다. 못 삽니다. 그러나 주의 말씀이 임하니까 조립되면서, 구성되면서 나중에 뭐가 됐는가? 그게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백성, 그 정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 그 정도가 아닙니다. 뭐가 됐느냐, 하나님의 군대가 됐어요. 하나님의 군대. 군대의 특징은 싸움이에요. 싸움. 무슨 군대냐, 너희들은 죽었다. 너희는 죽었고 우리는 살았다,는 겁니다. 죽음과 생명은 분명히 있다는 것을 증거 하는 그런 군대예요. 사람이라서 다 같은 사람이 아니고 산 사람 따로 있고 해골인 사람 따로있다는 겁니다.

해골인 사람의 특징이 뭐냐, 경제적 요건을 생각해서 인생이 무엇이냐 책정한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아나니아 삽비라 그런 사람들. 오늘 보는 ‘사단의 회’라는 것은 자칭 유대인이라고 하지만 유대인도 아니고 인간들이 뭘 원하고 뭘 좋아하느냐 인간들이 좋아하는 것을 보충하고 그걸 채워주고 기쁘게 해주는 친목 모임을 만든 거예요. 하나님 이름 빙자해서. 쉽게 말하면 한국교회 보면 되는 겁니다.

성령을 받은 스데반 집사라든지 이런 사도들을 보면 모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요. 그냥 그 사람들은 에스겔처럼 시체를 보고 증거하고 그들이 구원받으면 그걸로 자기의 고생한 보람을 느끼고 또 다른데 가서 사람들을 주의 이름으로 구원케 하시고 또 거기서 고갈 느끼고 하면서 결국 하는 소리가 ‘어서 이 몸이 떠나서 주님 계시는 하늘나라 가고 싶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 인정해주는 사도는 그렇게 살아갔거든요.

물론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그런 걸 느낍니다. 그런데 제가 당부한 것은 여러분들이 제가 이 사도 이야기를 듣고 내 자산 다 버리고 떠도는 나그네처럼 살아야 되는가? 그게 아니고 심지어 사도바울이 그렇게 살았다 할지라도 본인이 이야기했지요? 내가 이렇게 흠 없이 살아도 내가 의롭기 때문이 아니고 십자가로 인하여 의롭다 하거든요. 그 십자가가 하루에 2.5초라도 조금씩, 조금씩 주어지는 사람이 된다는 것, 그런 대상이 되었다는 것.

이건 바로 어떤 경우라도 생명의 면류관을 포기하지 않을, 버리지 않을, 기둥같은 사람들입니다. 바라기로는 저와 여러분들도 진짜 교회, 기둥같은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이 좋은 건 아는데 저건 아니야, 인생을 저런데다 목숨 건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야, 진짜 우리 생명은 예수님의 샘물 같은 보혈이 내 죄를 씻어주는 이것 십자가라는 이 샘물이 「모든 죄를 씻으면 정하게 되겠네」이 샘물이 우리한테는 영원한 기쁨입니다.

누가 뭐래도 「샘물과 같은 보혈은 임마누엘 피로다.」「이 피로 죄를 씻으면 정하게 되겠네.」 이거는 어떤 경우라도 포기할 수 없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남들 사는 것처럼 살아야 사람대우 받는 것은 누구보다 절실하게 잘 느끼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희들에게는 좋은 일 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령의 탄식소리도 함께 느낍니다. 눈에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라고 하신 말씀, 우리가 생명의 사람이고 성령의 사람이기에 우리에게 심어준 하나님의 생명 같은 말씀인 줄 알아 그 말씀 잊지 않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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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