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20060620b 부산강의-라캉(2)
Re..20060620b 부산강의-라캉(2)
이름 : 한윤범(IP:)
20060620b 부산강의-라캉(2)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첫 번째 아래층을 제가 다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아래층을 다시 한번 설명하겠습니다. S란 기표라 했지요. 그러면 주체란 뭐냐? 주체는 쪼가리진 것은 주체 밖에 없으니까 이게 구분되지요. S에서 S'인데 S'라 하는 것이 현재 내가 기표의 흐름에서 결국은 타인이 알고 있는 기표란 말이죠. 이 기표가 그것도 역시 쪼가리진 겁니다. 지금 나는 항상 무정형이죠.
이 타인의 요구에서는 이 무정형이 이제는 일시적으로 뭐로 바뀌느냐 하면, 무의식 동일 하에서는 쪼가리진 주체가 되었어요. 하여튼 베란다에서 뛰어내리지 말라하니까 일단 안 뛰어내리는 거예요. 안 뛰어내리니까 이것은 뭡니까? 안 뛰어내린 자살하지 않은 아줌마로서 남은 거예요.
여기에 이제 이 타인의 요구와 타인의 기표와 나와 어떻게 결합하느냐 하면, 여기서 메시지가 와요. 타인과 요구와 내가 제일 아래층에 이게 제일 밑바닥입니다. 밑바닥에서 위로 올라갑니다. 제일 밑바닥에서 남는 이것이 의식으로 나오거든요. 그러니까 분리된 주체가 타인과 어떻게 되느냐? I, 동일화되는데 여기에 I가 동일하라고 요구하는 요구가 여기 주어집니다.
요구가 주어지면 요 경로가 하나는 타인의 그러면 어떻게 되란 말입니까? 뛰어내리지 말란 말이야. ‘뛰어내리지 마’가 기표지요. 단어 아닙니까? '어어'도 그것도 단어에요. 이거 여러분 이해되지요. 이거 지금 단어 아니에요. 이렇게 하고 뛰어내려 버린다고. ‘어어’한다고.
지금 라캉이 제가 다 큰 우울증 아줌마가 베란다 뛰어내리는 걸 이야기했지만 사실은 이건 애들한테는 가장 적당해요. 애들은 단어를 어떻게 합니까? 단어 한창 배울 때 뭐라 합니까? '어어' 이렇게 하면 어어 그러면 안돼. 애들은 다 들어요. 어어라고. 이쁘다, 이쁘다 하면 이쁜 것이 좋은 줄 알아요.
제가 지금 애를 얻는 게 애를 얻는다는 말은 상상계 또는 상징계, 복잡한 실재계 어려운, 나중에 또 시간 있으면 해드릴게요. 라캉의 이론이 어려워서. 지금 쉽게 한다고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뛰어내리지 마. 했잖아요. 뛰어내리지 마라는 명령을 기표, 나를 덮고, 이 경로가 이 사람이 타인이, 남편이 야, 나는 안 뛰어내리잖아. 뛰어내리지 말라고 방향이 그냥 이렇게 나오죠. 기표는 이렇게 가지만, 방향은 타인의 방향은 맞지요.
이걸 뭐라고 하느냐? 이걸 가지고 나는 향유하고 싶은데 향유를 하는 뭘 한다? 금지한다. 제재를 하는 거예요. 인간의 향유란 말은 뭐냐 하면, 지난 시간 참석 안했지요. 지난 시간의 강의를 들어봤습니까? 못 들었어요?
지난 시간 레비나스 했잖아요. 인간은 어항 속의 물을 골라잡는 것이 아니고 그 물을 뭐한다 했습니까? 그 물을 향유하지요. 그걸 요소세계. 요소비료의 요소가 아니고. 암모니아 아니고. 우리는 세상을 결정하는 게 아니고 우리는 세상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건으로서 요소로서 포함되어 있다 이 말입니다. 어항 속의 금붕어는 자기가 물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물속에 있음으로서 즐긴다 하지요. 향유라 하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레비나스와 라캉이 의견이 같은 거예요. 강의 한번 들어보세요.
향유를 다시 이야기할게요. 내가 지금 선풍기를 하지만 만약에 에어컨 있으면 에어컨 틀지 선풍기 틀겠습니까? 그러니까 이건 뭐냐 하면, 내가 결정하는 것 같지만 사실 선풍기 밖에 없으니까 내가 향유, 즐기는 거예요. 그런데 정전되어서 꺼져버리면 나는 어떻게 됩니까? 정전돼버렸는데 내가 발전소 만든 것도 없고. 할 수 없지, 뭐. 이렇게 하거든요. ( ) 이런다 말이에요. 그냥 나는 요소에요, 요소. 덥다. 빨리 켜자. 하나의 요소라니까. 우리가.
이런 개념 차이가 우리는 이런 공부를 안 했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 사람들처럼 자꾸 평범하게 되는 대로 살다보니까 이런 걸 안 따지는데, 우린 따져야 되는 게 우리는 설교자잖아요. 인간들이 그냥 일주일 내내 세상 사람들과 어울리다 보면 그때 그냥 몰려 다녀요. 그러다보면 뭐냐 하면, 무엇이 옳은지 하나도 모르고 그냥의 인간의 욕구, 욕망, 탐욕, 성질나는 대로 그대로 온다고. 그걸 난도질해야 돼요. 도배질해줘야 돼요. 분리를 해줘야 돼요.
제가 지난 주일날 설교를 하면서 인간에게 두 개의 자아가 있다고 이야기했다고. 하나의 자아는 따라 잡는 자아. 하나의 자아는 안 잡히려고 도망치는 자아. 그 둘 사이에서 간격을 메우기 위해서 나오는 그게 행함이에요. 부지런히 따라가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는 막 도망하는 거예요. 아무리 잡아도 잡히질 않아요.
성경에서 흰옷을 입은 사람에게는 자기도 흰옷 입은 사람 되려고 무진 노력하는기라. 더럽히지 않으려고 바른 행동해서. 이것은 생명책에 이미 리스트가 기록되었다는 그 의미와 내가 흰옷 입으려고 애쓰는 것과 이게 모순되어 안 맞는 거예요. 그렇게 해석하면 그게 잘못된 해석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두 개의 자아가 있다 할 때 교인들 얼굴 보면 전부다 새파랗게 되어 있어요. 왜? 평소 살아가는 게 그거거든요. 내 욕망하는 것은 내가 행함을 동원해서 따라잡으려고. 따라잡는데 도움 될까 싶어서 교회 나왔는데. 교회 나오면 행운을 얻어서 주께 도움 받아서 내가 따라잡을 새로운 나의 번듯한 자아, 현재 부족한 실망스런 자아를 빨리 벗어나서 내가 원하는 자아를 따라 잡으려는데, 그 행동 중에 하나가 뭐냐? 기도하기고, 교회 나아주기고, 돈 아깝지만 헌금하기 이거다 말이죠. 따라잡으려고.
그런데 따라잡으려고 거기 가보면 헤헤거리면서 내가 찾는 자아는 또 저만큼 가 있는 거예요. 참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나중에 지치게 되니까 주여, 제가 열심히 살려고 했는데 힘들어서 이것 밖에 못하겠습니다. 그 전체를 뭐라고요? 행함이라. 그런 행함 할 때 그런 사람이 뭐 된다? 생명책의 리스트에서 명단에 없는 사람이에요. 지워버린다는 것은 명단에 없다는 거예요. 처음부터 명단에 없는 사람이에요. 생명책의 명단에 없는 사람은 마지막 날에 유황불에 들어가요.
하늘의 생명책은 뭐냐? 영원히 잡지 못하는 타인의 음성이죠. 라캉의 이론에 의하면. 영원히 잡히지 않는 타인의 목소리지요. 그게 왜 그러냐 하면, 생명책의 명단 작성한 것은 아버지께서 이미 아신 자를 찾으러 오신 아버지하고 아들 사이의 관계지, 내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아닌데도 불구하고 선악과 따먹고 신처럼 되려고 하다보니까 계속 잡히지도 않는 걸 잡으려고 이 짓하고 있는 거예요.
실컷 하다가 행함 하다 안 되니까 나도 열심히 하려고 했는데 안 되데요. 나, 지옥 보내면 하나님 책임? 이렇게 하고 있다고. 주님께서 그런 놈 지옥 보내기. 최선을 다한 놈 지옥 보내기.
그런데 그걸 몰랐는데 성경책 펴 놓고 사데 교회 흰옷 입은 사람 있다고 하니까 그 흰옷 입었다는 게 언어 아니에요? 개념 아닙니까? 기표 아닙니까? 아, 흰옷을 입어야지. 그게 뭐냐? 이층에 나오는 타인의 욕망이에요. 무슨 말이냐 하면, 내가 무엇을 욕망해야 됩니까? 를 쪼가리난 주체가 묻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묻도록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타인의 욕망이라고.
이걸 가지고 이층을 가지고 상상계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환상계. 환상하는 거예요. 아래층은 뭡니까? 이거는 동일화 노선이에요. 타인은 뭐라고 동일화하느냐 하면, 니, 나와 같아져야 돼. 라고 요구하면서 이 노선 따라가서 타인의 기표를 제공하지요. 뛰어내리지 마. 어, 그러면 안돼. 뛰어내리지 마. 라고 기표를 가지고 뛰어내리지 않고 있는 나 자신에 대해서 요구하지요.
참, 이 내용을 보면 뭐가 생각나느냐 하면, 십자가 옆에 있는 강도가 생각납니다. 강도가 한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 재미있어요. 강도질을 한 사람이 동일한 두 사람이지요. 동일한 강도짓을 했으면 강도질 할 때는 똑같은 마음을 가지고 강도질했을 것 아닙니까? 사람 죽이고 빼앗자. 살인강도니까.
그런데 예수님 앞에서는 동일한 마음이 아니더란 말이죠. 이상스럽지 않습니까? 여러분. 왜 강도질할 때는 같은 마음인데 예수님 앞에서는 달라지느냐? 그거 하라고 주님께서 둘 사이에 십자가 선 거예요. 뭐냐 하면, 예수님은 가만있지요. 그냥 십자가란 기표로 보죠. 아버지여, 들려오는 거야. 들어보니까, 아버지,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야기하더란 말이죠. 그 기표를 보고 그 십자가 밑에 백부장도 믿었고 그 기표를 듣고. 분명히 그거는 남들 보기에는 예수님 혼자 중얼거리는 이야기인데 구원받아야 될 영생주기로 작정된 강도 입장에서는 뭡니까? 타인의 기표의 자기한테 나와 같이 되라는 요구였다 말이죠.
그걸 어떻게 아는가? 네가 나와 함께 어디가 있어라? 오늘밤 낙원에 있어라. 이게 뭐냐? 은유지요. 한 덩어리, 한 존재다 말이죠. 모든 환유의 변화가 여기서 환상은 환유인데, 환유의 변화가 드디어 중지, 멈추는 기간, 그거는 진짜 진리에 도달하는 거죠.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한테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은 것은 자기도 알아요. 자꾸만 자아가 분열되고 또 욕망하고 분열하는데 더 이상 욕망할 것 없는 마지막 최종적인 멈추어야 될 지점이 뭡니까? 물은 거예요. 그건 예수님이 안 가르쳐주지요. 왜냐하면 그 진리를 위해서 니가 지금 동원돼야 되고 지금 나를 죽이는 역할을 해야 되는데 이야기를 안 해 줘요.
그건 지가 생각하는 자아는 아닙니다. 지가 생각하는 타인의 욕망은 아마 빌라도가 원하는 것은 뭐냐 하면, 아마 로마 황제 쯤 되는 거지요. 그죠? 로마황제가 최고였으니까. 그래서 자기 속에 뭐가? 황제가 돼야 돼. 최고가 돼야 돼. 타인의 목소리가 들려 왔을 거란 말이죠.
제가 지금 어른을 예를 들지만 애들한테는 아주 이게 본질적이에요. 니는 말이야 피아니스트 돼. 니는 피아노 잘 쳐. 아이고, 우리 애 피아노 잘 쳐. 그래서 피아니스트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어른들이니까 목사님, 그런 이야기하면 난 거부합니다. 하지만 애들한테는 아주 직접적이지요.
또 한 노선은 이거 내려와서 어디로 갑니까? 이쪽으로. 이쪽 영역은 뭡니까? 쪼개진 내 영역이죠. 내 영역에 와서 이게 동일시되죠. 하여튼 어떤 능력이 온다는 것은 양쪽으로 갈라지든지 어떻든지 간에 실제로 의식으로 보면 이렇게 갈라지지 않지만 구조로 보면 하나는 기표 쪽으로 가고 한 쪽은 동일 되고. 어느 쪽으로? 쪼개진 주체로 들어가고 이 주체가 기표를 만나서 일시적인 타인과 동일시되는 거예요. 안 뛰어내리는 거예요. 그러면 뭐라고 합니까? 잘했어, 여보. 잘했어. 이 말은 ‘나처럼 되기를 잘했어.’에요. 내가 요구한대로 잘했어. 이게 동일시. 이해되지요. 이해되잖아요.
그 다음에. 어려운 거예요. 위층에 올라갑시다. 이게 바로 방금 한 상징계에요. 상징계는 기표를 통해서 언어를 통해서 자기와 일치시켜서 일시적으로 그 상징의 굴복하고 복종함으로서 그 사회질서에 적응하는 것을 상징계라고 합니다. 아시겠습니까?
상상계는 뭐냐? 상상계는 자기 내부에서 상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상징계는 타인의 지배와 힘과 능력이 있어야 돼요. 그런데 상상계는 뭐가 있느냐 하면, 타인이 하는 몸부림, 움직임은 있지만 타인이 억압하고 요청하는 건 없어요. 왜냐하면 상상이니까.
아, 나는 한 100평짜리 아파트에 살았으면 좋겠다. 지 자유지요. 실례합니다. 방금 상상했지요? 당신을 망상 죄로 체포합니다. 이거는 미래에 그런 게 있는 줄 모르겠지만 현재는 그런 게 없잖아요. 아, 상상이 죕니까? 상상에서 상징으로 바뀌는 게 어떠냐 하면, 아, 저 아가씨 이쁘다. 이거는 상상입니다. 만지고 싶다. 이것도 상상이에요. 만졌다. 이건 상징이 되는 겁니다. 타인의 기표와 연결되지요. ( ) 이거 왜 만져? 하지요. 적개를 느끼게 되지요. 치한범으로. 이게 상징계에요.
그래서 나는 내가 상상했다고 하면 안돼요. 왜냐하면 이 세상은 상징계에요. 이 세상은 상징계만 있기 때문에 그 상징계의 질서에 복종하지 않으면 체포됩니다. 상징계는 뭐가 지배하느냐 하면, 법이 지배하는 거예요. 이게 또 산상설교와 연관되지요. 산상설교에는 상상계를 용납하지 않아요. 마음속으로 간음한 것도 용납이 안돼요.
그러나 이게 실제 유대교에서는 상상계는 용납이 돼요. 무조건 간음 안 하면 되는 거예요. 간음하더라도 이혼장 써주면 돼요. 그러니까 법이라 하는 것은 놀랍게도 이게 치환이 돼요. 치환이 되서 법이 권력자, 전두환 같은 놈이 나와서 법 바꿔. 법을 바꿔서 하는 거예요.
이번에 FTA 같은 경우에는 재벌 좋으라고 법을 바꾸는 거거든요. 이것은 재벌이 좋은 거예요. 재벌이 좋아야 우리가 또 사니까. 재벌 덕에. 재벌에게 이익하기 위해서 미국과 자유무역협정을 맺는 겁니다. 법을 바뀌는 거예요. 관세를 낮추는 겁니다. 수출 잘 될 수 있도록 관세를 낮추는 겁니다. 그래서 돈 안 되는 것은 외국의 관세 없는 물건들이 들어와서 돈 안 되는 것을 도태시키는 그 법이 FTA 법이에요.
지금 10년 전만 해도 학교에서 중국산 조기 먹을래, 한국산 조기 먹을래? 하면, 애들은 한국산 조기에요. 다 한다고. 개들은 한국산 굴비 좋은 것만 알지 돈 비싼 것은 모르거든요. 10년 전만 해도 한국의 어민들 살리기 위해서 중국산 아무리 헐어도 안 먹고 하겠다고 하잖아요. 요새 어떻습니까? 중국산 얼마나 찾습니까? 심지어 붉은 악마 그것도 중국에서 번데기, 고등어, 하여튼 중국산 아닌 게 없어요. 우산, 헐다하면 중국산이에요. 컴퓨터에 들어가는 내장, 중국산 들어간다고. 옛날에는 애국주의, 이데올로기 때문에 그걸 의도적으로 거부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찾습니다. 저부터 찾아요.
한 30년, 20년 전에 통일교 제품 먹지 말라고 난리 났습니다. 지금은 맛있으면 다 사먹습니다. 왜냐하면 통일교라고 상표를 단 것은 좀 거부반응이 나타나지만, 똑같은 상품인데 예를 들어서 멜론바 먹는데 통일교 교인이 하는 슈퍼의 멜론바나 맛이 똑같잖아요. 비비큐 치킨집이 있는데 치킨집이 치킨 맛있으면 되지, 그게 뭐, 실례합니다만 어느 종교 다니십니까? 그거 물어보고 사지 않잖아요. 상호보니까 여호와증인이 운영하는 거예요. 모르지요. 그거는 예를 들어서 그런 거고. 이게 다단계 암웨이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고 다 마찬가지입니다. 종교, 그런 거 따지지 않잖아요. 그냥 얼맙니까 하고 사는 거예요.
그래 사놓고 아이고, 이게 여호와증인이 하는 거구나, 하지만 그것도 한두 번 어기면 스스로 지가 법을 바꿔. 이게 상징계에요. 상징계 이해하겠습니까? 직접 관계. 상징계는 하여튼 법과 연관 지어서 자기 옹호하는 것, 자기 의로움을 챙기는 게 상징계에요. 그래서 이 세상은 무슨 계다? 상징계다.
그런데 라캉은 세상은 상징계인데 세상을 둘러싸고 두 가지 세상이 있다. 하나는 상상계가 있고, 실재계가 있다. 현재 이 세상은 무슨 계라 했습니까? 상징계인데 이 상징계를 절대적으로 쑤시고 들어오는 거예요. 상징계가 안고 있는 모순점을 치고 들어오는 게 실재계에요. 이걸 라캉은 거룩한 하나님. 완벽한 법이에요. 양심이죠.
그런데 상상계는 뭐냐 하면, 이거는 완벽한, 같이 옆에서 상징계를 쑤시는데 상상계는 뭐냐 하면, 완벽한 욕망이죠. 니 꼴리는 대로 해라. 이게 상상계에요. 그래서 어느 게 더 원초적입니까? 더 어린애 같은 순수한 상상계에요.
어린애들은 자기 욕망이 시키는 대로 육체가 시키는 대로 그대로 해요. 그런데 이게 나중에 커서 법체계에 들어가면 하고 싶어도 참아야 돼요. 인내해야 돼요. 인내하는데 인내가 항상 뭘 나타내느냐 하면, 결핍을 나타냅니다. 이게 스트레스에요. 스트레스라니까. 매일같이 상상계가 나한테 쪼인다고. 바꿔, 바꿔. 니는 주특기가 뭐야? 치환. 치환 알지요. 대체하는 것. 사람이 같은 꿈을 꾸면 지겨워요. 지금 노인네들 문제가 무슨 문제냐 하면 24시간 보내는 게 제일 힘들고, 할 일 없는 목사들 시간 보내는 게 제일 힘들어요. 미치는 겁니다. 제일 힘들어요.
이거 하다보니 누가 요청하던데. 우리교회 집사님이 왜 십자가마을 사람들은 장소를 정해놨으면 한번 답사를 해야지 왜 안 오느냐고 짜증을 내시는데, 언제 한번 와 보세요. 위치도 알고 하니까 한번 오세요. 미리 한번 가보고. 저는 강사니까. 내가 만약 강사 아니고 주관하는 사람 같으면 가보겠어요. 자기들 절차니까. 그게 상징계입니다.
상상계는 그때 가보면 그때 안 갈지 모르지만 하여튼 안 가고 싶다. 이게 상상계에요. 상징계하고 달라요. 우리 교인들은 여러분 교인들은 맨 날 상상계하고 상징계 사이에 갈등하면서 교회 옵니다.
그래서 우리교회 조 장로님은 그걸 미리 제거, 아까 말했지만 욕망을 거세하기 위해서 뭐냐 하면, 우리 오늘 오신 것은 주께서 인도하셔서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제발 억지로 왔다고 생각하지 말고 주 은혜인 줄 알라고. 아예 기도하면서 거세. 이게 라캉 공부하면 다 나옵니다. 거세라니까. 제발 당신의 즐거운 대로 아이, 오늘 그냥 피곤한데 좀 쉬지. 에이, 인터넷이나 듣지. 다른 게 있더라도 제발 그런 생각하지 말고, 거세. 이거 영적인 싸움이에요. 정말 피곤한 영적인 싸움입니다.
상상계가 뭔지 알겠지요. 상상계는 순진무구하게 내가 지어내지도 않았는데 내가 그렇게 되고 싶은 것, 모든 거예요. 이쁜 것, 그냥 이쁘다 하는 것. 이거 상상계에요. 이쁘다 해도 남의 마누라 이쁘다 하면 안 됩니다. 그거는. 법에 어긋나요. 그거는 뭡니까? 성추행이 되는 거예요. 싸워야 되는 거예요. 이게 상징계에요.
그런데 상징을 참으면서 어디로 합니까? 끊임없이 욕망이 일어나니까. 욕망도 나쁜 게 아니지. 라캉의 이론에 의하면 나쁜 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생물학적 세포의 구조가 약 200조 개의 구조가 세포의 외침이라니까. 생식기가 왜 달렸습니까? 하고 싶어 달린 거예요. 위는 왜 있습니까? 먹고 싶은 거예요. 침은 왜 있습니까? 목마른 걸 보여주는 거예요. 눈물은 왜 흘립니까? 슬퍼서 우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울지 말라고. 이거 사람 환장할 일이에요. 눈물 나는데 울지 말라고. 남자들이 여자 보고 울지 말라고 하는데, 여자들은 눈물이 남자 보다 많이 나와요. 호르몬상. 그걸 욕망이라 하는데. 울고 싶은 것도 욕망이라니까.
하지만 영부인이 울고 있으면 안 되잖아요. 왜? 청와대에서. 카메라 보고 있는데 엉엉 옆에서 막 울면 안 되잖아. 참아야 되는데. 그게 뭡니까? 상징계에요. 그래서 상상계는 혼자서 상상하지만 상상계가 없는 게 아니고 있어요. 그게 상징계라서 참아야 됩니다. 이게 화딱지 나지요.
하지만 항상 뭐로 가요? 어서 상징계에서 도망쳐서 혼자 있을 때는 상상계로 가는 것이 그게 나쁘다고 그게 바로 니가 모순이라고 지적하는 것이 실재계. 그게 실재계라니까. 절대적인 것. 그래서 인간은 실재계에서 환장하는 거예요. 하고 싶은데 못하게 말리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내가 황제다. 그런데 내 상상해 보니까 이쯤해서 신하 열 명 죽이고 싶다. 상상이죠. 그런데 황제기 때문에 자기가 법이잖아요. 황제가 자기가 법을 만들잖아요. 자기 꼴리는 대로 열 명 죽여 버려요. 그런데 그 황제가 잠을 자는데 무의식 속에서 꿈 에서 니, 신하의 가족들은 생각 안 하나. 니는 니 즐거움만 하나. 라고 지적받죠. 이게 무슨 계입니까? 실재계죠. 실재계가 있잖아요. 어느 속에서? 무의식 속에서. 지금 무의식 속에서는 이 세 가지가 다 있어요. 그런데 실제 세계는 뭐 밖에 없다? 상징계 밖에 없죠. 이제 이해되십니까? 이게 라캉의 이론이란 말이죠.
그래서 베트남 전쟁에서 중대장이 명령을 내립니다. 베트콩 마을에 가서 베트콩 여자나 부녀자를 죽여라. 이게 성경에 나오잖아요. 사무엘상에 나오죠. 죽여라 했다고요. 그러면 이거는 법이잖아요. 상징계잖아요. 실제로 총 들고 뿡야뿡야 안 한다니까. 진짜 총알 갖고 댕겨 쏘잖아요. 제가 지금 중요한 이야기합니다. 방금 공부한 게 무슨 세계? 무의식세계죠. 무의식세계니까 목사님, 강의해봐야 실제와 관계없는 무의식입니다. 그게 아니라니까.
지금 라캉이 화를 내는 것은, 라캉이 현재 기존의 모든 철학과 거기에 화를 내는 것은 자기 이론에 대해서 관심 있고 화를 내는 것은 뭐냐 하면, 그거는 무의식세계고 나는 콩나물 파는 장사인데 뭐라 합니까? 그게 아니라 군인이 총을 쏘는 것은 자기는 명령 받았다 하는 거예요. 아니라니까. 명령 받았다는 상징계에 속하는 거지요.
나중에 총 쏘고 보니까 죽이는 나나 죽는 당신이나 참 더럽다. 전쟁 통 아니었으면 친하게 술 먹고 노래방 가서 노래 할 사이인데 이게 뭐 전쟁 통에 미안합니다. 하고 쏴 죽였다고. 쏴 죽여 놓고 그게 양심의 가책이 되겠지요. 그게 양심이 가책이 안 되면 이거는 나, 백 명 죽였다고 자랑하며 다닙니다. 물론 20대 철없었을 때 자랑했을 거예요. 나, 훈장 봐라. 연금 탔다. 이렇게 하지만 나이 60, 70 되면 아이고, 그때 국가가 시켜서 했지, 내가 지금 같으면 안 하지. 라는 생각이 든다 이 말이죠.
결국 이거는 지금 라캉이 무의식을 이야기하지만 실제로 뭐냐 하면, 왜 인간은 이렇게 행동하느냐? 실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왜 목사는 설교를 이렇게 하고 왜 교인들은 교회 오는가? 실제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우리 지금까지 공부한 공부가 다 그런 거예요. 실제 이야기에요.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문제를 안 들키려고 합니다. 이게 위층에 보면, 원하는 게 뭐지? 참, 이게 어렵다. 자, S. 참으세요. 중요한 거니까. 여기 A죠. 밑에는 알았다 생략하고. 동일화. 아래층은 상징계, 위층은 상상계. 여기서 묻습니다. 항상 이쪽에서 와요. 왜? 난 쪼개졌으니까. 뭐라 하느냐 하면, 네가 원하는 게 뭐지? 라고 물어요.
누구한테 묻는가? 쪼개진 나에게 물어요. 요거 참, 아까 잘못했는데 쪼개진 나와 A와 A의 기표를 듣는 쪼개진 나. 항상 쪼개진 납니다. 타인의 쪼개진 주체에 대해서는 이야기 안 하고 지금 쪼개진 나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니까. 물론 타인도 쪼개졌습니다만 여기선 그걸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고 A가 쪼개진 나에게 묻는 거예요. 쪼개진 나에게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요.
이렇게 물을 수 있는 게 뭐냐 하면, 인간은 세포로 되어 있잖아요. 그러면 분명히 상상하는 게 있는데 어려워요. 잘 들어보세요. 상상하는 것을 우리가 제한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나는 이것까지만 상상해야 되겠다. 안 되지요. 내가 그런 생각을 다 하다니! 이거는 화들짝 놀라지요. 상상하는 것이 다 욕망으로 드러나지 않아요. 상상하는 것 중에서 세포의 외침이니까 상상하는 것 중에서 타인,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고 묻는 순간에 상상한 것 중에서 규격이 잡히고 아, 이거 상상해. 이거 상상해야 되고, 이거는 원해야 되는 거구나. 지적을 받게 되는 거예요.
제가 아까 했잖아요. 뭐 먹을래? 먹고 싶긴 한데 뭘 먹을지 모르는 거예요. 피자 먹을 거 .... 아, 피자! 피자 먹고 싶어. 이렇게 되는 거예요. 또는 피자 말고 뭐 있는데? 김밥 .... 아, 김밥. 이러거든요. 결국 인간은, 제가 아까 어렵다는 이야기 했는데, 인간은 기표라는 것을 자기가 알지 못해요.
세종대왕 이야기했죠. 컴퓨터 모른다고. 그런데 컴퓨터 이야기를 세종대왕에게 했을 때 그것은 컴퓨터 있다는 말, 예를 들어서 세종대왕님? 왜 그래? 컴퓨터 있습니다. 라고 했다면 이 말은 뭐냐 하면, 당신이 지금 뭐를 하고 싶어요. 컴퓨터? 이런 뜻이에요. 이게. 왜냐하면 지금 나는 뭔가 하고 싶어 하는 거예요. 왜? 세포가 지금 울부짖고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하고 싶어. 끊임없이 하고 싶어 하는 게 있어요. 그런데 뭔지를 누가 이야기 안 해 주니까 몰라요. 내가 뭘 원하는지 누구 가르쳐 주기 전까지는 몰라요.
그런데 교인들도 마찬가지에요. 여러분, 성경에 보니까 사데의 흰옷 입은 사람만 구원받습니다. 맞아. 흰옷 입어야 돼. 이왕 성도 천당 가기 위해서 흰옷 입어야 돼. 성경에서 기표, 타인의 기표죠. 흰옷 입은 사람만 구원된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그때 예를 들어서 흰옷 말고 어린양의 피로 구원받습니다. 맞아. 나는 구원받아야 돼. 라고 어린양의 피라는 기표가 성경책에 있을 때 그 기표가 날아 들어올 때 내가 여러 가지 하고 싶은 게 있는데 지금 이 시간 끝나고 예식장에 가고, 이 시간 끝나고 축구 봐야 되고, 이 시간 끝나고 누구 만나고 하고 있는데 목사님께서 어린양의 피로 구원받는다는 소리 할 때, 맞아. 지금 그런 것 제쳐놓고 지금 어린양의 피로 구원받아야 돼.
나의 상상이 뭐로 규정됩니까? 나의 상상이 타인 기표로 인하여 구획이 되면서 그게 하나의 나의 욕망으로 규정이 되는 거예요. 목사님, 구원받고 싶어요. 뭐로? 어린양의 피로 구원받고 싶어요. 그거 누가 가르쳐 줬어요? 목사님이 이야기했잖아요. 목사가 어디 있는데? 성경책에.
이 상상이 이런 드디어 욕망을 상상이 욕망되는 것이 아니고, 상상이 욕망되려면 타인이 뭐를 요구하느냐로 기표로서 이야기할 때 되는 거예요. 꼭 물어보고 오는 게 아니에요. 니, 뭘 먹고 싶어? 이렇게 묻는 게 아니고, 나는 자장면 먹는다. 이런 것도 되는 거예요. 괜히 동생이 옆에 놀고 있으니까 형이 있다가 나는 TV봐야지. 나도 볼 거야. 나는 SBS 볼 거야. 나는 KBS 볼 거야. 형이 TV 보자 소리하기 전까지는 KBS 보겠다는 욕망이 무정형으로 있어요. 그냥 있었는데 그게 딱 다가오니까 상상화 돼요.
상상으로 굳혀주는 두 개의 노선이 있습니다. 그 노선을 한번 그려 볼게요. 아까 동일화 노선, 상상의 노선.
밑에 에스에이. 아 참, 잘못했습니다. 주체가 아니고 이미 여기는 그냥 기표 A입니다. 하여튼 쪼가리 없는 것은 무조건 기표 A입니다. 기표 A가 있고 여기 그냥 I가 있고. 타인이 있는데 타인이 여기서 요구를 해요. 니, 뭘 먹고 싶으냐? 뭘 하고 싶으냐?
제가 아까 했지요. 현대인들은 뭐만 한다고? 내가 누구냐는 관심 없다고. 자꾸 뭘 하고 싶은 거예요. 나, 돈 벌고 싶어. 아파트 사고 싶어. 차 바꾸고 싶어. 하고 싶어, 하고 싶어. 이거는 자기 세포가 몸부림치는데. 하필이면 차냐? 할 때 몰라. 그냥 몰라 해요. 몰라 하면 안돼요. 이미 다른 사람이 차를 갖고 있으니까 그런 거예요. 아마 저 토고 같은 데는 TV 없는 데는 TV 갖고 싶을 거예요. 차보다도. 차는 엄청나니까.
그래서 demand, 요구하는 게 올라가요. 올라가서 뭘 형성하느냐 하면, 쪼개진 나와 네모에다가 디맨드, 요구, 요구사항. 타인이 요구한 거죠. 이게 올라가요. 올라가서 쪼개진 주체, 이거 마름모꼴. 이걸 가지고 결핍. 뭔가 요구하는 것과 쪼개진 나와 결핍이 생겨요. 그 결핍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타인의 요구죠. 이게 똑같은 거죠. 똑같은 것이 쪼개진 주체에서 하나의 요구로서 되고. 이게 올라가요. 이게 내려가고. 그 다음에 요게 중간에 쪼개진 것이 A의 결핍. 이렇게 봅시다. 이것이 항상 이렇게 요구하는 거예요.
다시 설명해 보겠습니다. 지금 타인이, 나는 생각할 때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나는 항상 뭐다? 쪼개진 주체다. 쪼개진 주체에 항상 주위에는 누가 얼쩡거린다. 타인이 있다. 애들한테는 부모님이 있잖아요. 부모님이 항상 나에게 이야기를 하죠. 뛰어내리면 안돼. 공부해야 돼. 항상 명령하죠. 그래서 들뢰즈는 모든 단어는 다 명령이다. 방향이 이렇게 바뀝니다. 그런데 동일시에서 밑바닥 남는 건 뭡니까? 쪼개진 주체와 그리고 타인이 요구하는 것과 동일시, I. 동일시되는 거예요. 밑에 있는 것은 동일시화 되는 거예요.
위에는 뭐냐 하면, 이게 상상계에요. 이건 욕망이 어떻게 파생되는가? 마찬가지로 욕망이 먼저 내가 여기서 요구를 해요. 요구하는 것이 어디로 가느냐 하면, 기표로서 타인의 기표가 요구하죠. 쪼개진 내가 이 요구와 결핍된 내가 목말라요. 사마리아 여인 같이 콸콸콸콸. 그때 예수님이 다가가서 뭐라 하느냐 하면, 내가 너한테 줄 물이 있는데, 니가 원하는 물 말고 내가 줄 물이 있는데, 이것은 안 맞아요. 왜냐하면 그 여자가 상상도 못하는 걸 주기 때문에. 항상 성경은 그래요. 성경에선 상상도 못하는 걸 줘요. 예수님은. 우리가 예상한 것은 절대 안줘요. 홍해가 갈라져서 건너갈 줄은 꿈에도 상상 못했어요. 아무도 모든 사람도 상상 못했어요. 다만 지팡이를 대니까 갈라질 줄 어떻게 알았어요? 두 번 다시 해 보세요. 갈라지나. 안 갈라지지요. 하여튼 우리 상상으로 안 돼요.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을 때 설마 물 위를 걸을 줄 몰랐어요. 물 위를 걸어서 만날 이게 없었어요. 그냥 주님만 바라봤는데 어, 내가 미쳤지. 왜 물 위를 걷지. 할 때 물에 빠져버렸어요. 신앙이라는 것은 기적입니다. 예수님 십자가 믿음으로 나에게 저주가 없다고 믿어지는 것은 이거는 선물이고 기적이죠. 이걸 어떻게 목사님 보고 믿게 해 달라 요구하는 것은, 지가 이미 예상하는 거기 때문에 그거는 깨어져야, 십자가 앞에서 그 예상을 포기해야 되죠. 그리고 본론을 이야기해야 돼. 그러니까 너는 지옥 가야 돼. 이야기 할 수밖에 없어요.
요구사항이 헐떡거리면서 어디로 가느냐 하면, 타인이 오는 기표를 매달리죠. 그런데 이것이 디맨드가 이런 식으로 만납니다. 그래서 나는 타인과 내가 저 밑바닥에 내려가면 뭐가 있냐? 일치되려고. 나는 저 사람처럼 아파트 갖고 싶어. 당신 몇 평인데? 30평. 나 30평 아파트 갖고 싶어. 맨 날 남들이 갖고 싶은 것. 난 페라리, 8억 짜리 페라리 차 사고 싶어. 괜히 갖고 있으니까 갖고 싶어. 어린아이들이 많이 합니다. 형 것 줘. 니 것 있잖아. 형 것 줘. 결국 동일한. 이게 뭐냐? 상상하는 욕망. 형이 갖고 있는 욕망이 결국 나와 쪼개진 내가 타협을 시키는 거예요. 이거 이해되겠지요.
그 다음에 이게 타인의 요구사항이 기표가 되지만 타인과 나 사이에 결핍을 통과해서 여기에 동일한 타인이 요구하는 기표에 복종하게 돼요. 상당히 간단하지요. 여기서 간단하지만 밑의 차이점 항상 욕망은 타인에 의해서 결핍을 느낀다는 겁니다. 여기서 결핍을 느끼면서 두 가지, 아까 제가 스트레스라 했지요.
사실 스트레스가 두 가지의 현상이 있어요. 하나는 분열증, 하나는 신경증. 두 가지의 경우가 생긴다. 현재 있는 상징계에서 이것 밖에 없어요. 아까 스트레스라 했지요. 스트레스가 아니고 분열증 아니면 신경증이죠.
분열증이라는 것은 쪼개진 나에게 관심이 있어요. 뭐냐 하면, 하녀한테 내 방 청소하세요. 아줌마 청소했어요? 그래요. 몰래 쓰레기 놓고 아줌마, 청소했는데 쓰레기가 있어요? 또 하세요. 아까 청소했는데. 이번에 화장실 청소하세요. 했는데요. 몰래 벽 깨고, 화장실에 벽 깨진 게 있단 말이에요. 화장실 청소 왜 제대로 못했어요. 이거 뭡니까? 왜 나는 맨 날 갓 쪼개진 주체가 되서 계속 목마른 나를 짜증낼 때 이게 신경증이에요.
그게 아니고 분열증은 반대에요. 상대방을 찾아다녀요. 어머나, 저 옷 너무 좋다. 집에서 응원하는 것보다 밖에 나가서 같이 응원해야지. 항상 대상, 상대방의 요구를 찾아다니는 걸 분열증이에요. 저쪽이 나를 삼키고 나를 감탄하기를 저쪽이 나를 지배하기를 끊임없이 요구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좋은 목사님 다 찾아다니는 것은 분열증, 자기 집에 목사 심방 안 온다고 짜증내는 것은 신경증. 확실한 예는
인간은 이 둘로 상징계에서 뭐 때문에? 쪼개진 주체가 늘 우리 앞에 얼른거리는 타인의 요구에 의해서 메울 수 없이 결핍 때문에 생긴 증세가 두 가지 증세 외에는 없다는 것이 라캉의 결론입니다. 이 긴긴 강의 결론이 이거에요. 두 가지 경우 밖에 없는 거예요.
그런데 저는 이 결핍을 뭐로 봅니까? 이걸 가지고 행함이라고 행함. 인간의 행함은 신경질 내서 하든지 아니면 허황된 것을 찾아다니는 끊임없이 자기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쇼핑하고 쇼핑하고 또 쇼핑하고, 이 교회 다니고 저 교회 다니고 또 다니고. 계속해서 자기 욕망을 달성할 수 있는 끊임없이 어떤 대상을 찾아다니는 파랑새를 쫓는 희망과 비전과 꿈을 좇는 이게 분열증이죠. 그게 에스에이죠.
그 다음에 뭡니까? 왜 날 욕망을 안 채워주느냐고 짜증내는 것, 맨 날 찾아와 달래. 이거는 신경증. 이 두 가지 증세가 이게 무의식에서 있는 게 아니고 어디에도 있다 했습니까? 실제세계에 있는데 그걸 라캉은 뭐라 하느냐 하면, 자본주의사회라. 다시 말해서 모든 인간은 어느 사회에 속했다? 자본주의사회에 속했다. 라는 말은, 모든 인간은 돈 없어서 신경질 내든지, 돈을 찾아 헤매는 환자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참, 이런 공부를 해야 됩니다. 여러분이 목사니까 예를 듭니다만 목회자가 설교를 하든 집에 있든지 간에 목사님 교회 교인 몇 명입니까? 두 명입니다. 목사님 교회는 몇 명입니까? 세 명입니다. 나는 열 명인데롱. 나는 열 명이지롱. 최고다. 우리나라 최고다. 전부다 한 명, 두 명 인데 저는 열 명이라 우리나라 최고되었어요. 신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나라 최고 목사가 한국 있으면 되겠느냐 미국가야지. 뭡니까? 분열증이죠.
미국 백 명 있는 교회 있다 합시다. 갔는데 거기서 열 명 있는 교인들이 두 명 됐다. 왜 하나님은 날 사랑하지 않습니까? 무슨 증? 신경증. 결국은 이것은 라캉이 위대하다는 점은 뭐냐 하면, 이것이 인간이라는 거예요. 여기서 어떤 개선책이 내지 않는 게 위대하다는 거예요. 뭘 계획한다든지 이걸 바꾼다든지 회개한다든지 이게 없어요. 그냥 개선책이 없어요. 이렇게 평생을 그냥 가는 거예요.
근데 주님께서도 마찬가지에요. 가는데 주님께서는 회개하라. 주님이 말한 회개라 하는 말은 뭐냐 하면, 지금 너 스스로 힘으로 회개할 수 없어요. 이것은 뭐냐 하면, 회개하라가 아까 이야기한 십자가 강도, 회개하라가 그게 능력이 되어서 우리로 하여금 나는 회개해야 되는구나. 라는 걸 깨닫게 되는 거죠. 결국 이것은 뭐냐 하면, 에스에이. 타인이 만든 말씀 위에 사는 거예요. 내가.
예수님이라는 타인이 만들어진 피조물이 나에요. 이것이 창세기 1장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너를 지었다. 이겁니다. 이게 골로새서 1장에 보면, 내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예수님의 형상대로 만든 거예요. 그래서 우리 것이 아니고 주의 것이다. 이게 에스에이에요.
하지만 라캉의 이야기는 우리 옛사람 그대로에요. 끊임없이 목마른. 이게 사마리아 여인과 안 맞잖아요. 그리고 아까 이야기한 가나 혼인잔치에 누구라고 했습니까? 예수님 어머니, 마리아. 포도주가 떨어졌다, 애야. 나와 무슨 상관있습니까? 나와 무슨 상관있습니까를 그런 측면에서 우린 예수님을 대해야 돼요.
예수님은 나와 상관이 없어요. 주님이 상관있어서 나를 구원한거지, 나에게 상관있는 예수님이라서 나를 구원하러 오신 게 아니다 이 말이죠. 나는 주님의 증인이지, 나 잘났다고 증인하라고 주님 갖다 붙인 게 아니다 이 말이죠. 따라서 진짜 주님의 디맨드, 요구사항이 있다면 이 말씀을 관심 있는 사람, 복음에 관심 있는 사람만이 저는 성도라고 그렇게 주장하고 싶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께서 나와 무슨 상관있느냐고 말씀 하실 때에 남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우리자신의 실체를 다 알기에 우리보고 이야기하는 줄 믿습니다. 십자가의 증인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걸 증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바로 십자가를 증언하고 주님의 은혜로만 구원되는 것을 증언할 수 있는 강도 같은 사람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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