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광주(060526) 15-2 고후 6장
Re..광주(060526) 15-2 고후 6장
이름 : 서경수(IP:)
광주 강의 15-2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고린도후서 6장 7절을 봅시다.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이런 일들을 내가 꾸밀 수 있습니까? 내가 꾸밀 수 없지요. 이 이야기는 결국 우리로 하여금 나 중심으로 시작하지 말고 은혜 사건 중심으로 세상을 다시 보라는 것을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나를 가지고 움직이는 사건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건이 은혜의 사건이란 것입니다. 그 은혜의 사건이 뭔가? 이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나와 함께 있기 때문에, 나는 일으킬 생각도 없었는데 함께 계신 예수님이 자꾸 나를 가지고 이런 사건들이 유발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 우리가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 중심으로 생각한다는 자체는 같이 계신 분 예수님의 생각과는 아주 동떨어진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이것을 철학적은 용어로 “환상”이라고 합니다. 철학에서 “환상”이란 개념이 오늘날 라캉 이후에 굉장히 중요한 개념으로 등장합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인간은 매일같이 환상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라캉의 이론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꼭 독수리 눈알 같은 이런 이론이 있어요. “기표” “기의” 이런 어려운 용어들이 있는데,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A라는 지점에서 내가 이렇다고 생각 하더라도 B라는 지점에 오면 이것이 내가 택했던 의미는 미끄러져 버리고 다른 의미가 여기 실리는데, 여기 다가오는 것이 뭔가? 새로운 즐거움, 기쁨(영어로 jolliness라고 하는데)이 담기고, 그 순간 지나간 것은 뭐냐? 하나의 고통과 회한, 아픔 이런 것이 오는 거예요.
그래서 라캉은 말하기를 ‘인간은 아무리 기뻐도 그 기쁨은 곧 고통과 후회와 권태로움과 짜증으로 변하고 새로운 즐거움과 기쁨을 담기 위해 또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B지점에서 C지점으로 오면 어떻습니까? 전에는 그렇게 좋던 것이 시들해져서 또 새로운 기쁨을 찾지요. 그러니까 전체의 고리가 결국 순간순간 ‘나’라는 것을 구축하는데 ‘나’라는 것이 결국 뭐냐 하면, 내가 환상을 심는다는 것이 아니고, ‘나’라는 자체가 결국 허구이고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라캉은 이야기합니다.
이것을 “상징계”라고 합니다.
‘상징’이란 말은, 내용물과 표상이 맞지를 않아요. 태극기가 대한민국이 아니잖아요. 대한민국을 상징하지만 태극기안에 들어가서 살지는 못하잖아요. 만약 다른 국기를 만들었다면 태극기는 찢어버려야 하지요.
그러면 “상징계”와 대비되는 것이 뭔가? “실제계”인데, 이 실제계는 항상 우리를 약 올리기 위해서 완벽하고 완전한 것으로 약을 올리지요.
그러니까 A지점에 오면 우리는 완전한 기쁨을 느낍니다. ‘한 달 월급 300만원 받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이제 300만원 받는다. 이제 더 이상 욕심은 없다’고 했다가도 몇 시간 지나지 않아서, ‘적어도 수입이 350만원은 돼야 골프를 마음대로 치지.’ 이렇게 되지요. 그러니까 350만원은 결국 이 순간 상징을 약 올리는 ‘실제계’가 되지요.
제가 방금 수입을 가지고 이야기했지만, 인간은 이것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선에 대해서도, ‘나는 착한 사람이야. 아니야, 나는 아직도 부족해. 더 착할 수도 있을 거야.’ 하면서 더 착한 사람을 찾습니다. 이것은 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사람을 10명 죽었으니까 나보다 더 악한 놈 있으면 나와 봐. 뭐 유영철이 22명 죽였다고.’ 이렇게 항상 나를 약 올리는 ‘실제계’에 끌려 다니는 환상이지요.
라캉의 이러한 환상 철학이 있고 난 뒤에 사람들은 자신이 들통 났다는 것에 대해 아쉬워하지만 해결책은 없어요. 라캉도 해결책이 없다고 하면서 ‘이것이 인생이다.’는 것입니다. 죽을 때까지 이렇게 옮겨가면서 사는 것이랍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살다가 방주 안에 못 들어가잖아요. 그렇지요?
지금 제가 라캉 철학을 이야기했지만 이런 철학이 오늘날뿐만 아니고 방주 시절 방주 밖에 있었던 사람도 똑같이 살았을 것 아닙니까. 노아도 마찬가지였을 것인데, 노아에게는 난데없는 물체, 방주를 만들라는 언약이 있으므로 말미암아 노아는 방주에다 자기 운명을 다 걸었습니다. ‘올인’이라고 하지요. 몽땅 다 걸었어요.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사건이란 말이지요. 낯선 새로운 사건이지요.
지금까지는 ‘있음’이란 존재에서 ‘내 존재를 뭘로 채울까’하다가, 내가 지금 무슨 사건에 직면해 있느냐? 사건 위주로 일생을 살아갑니다. 주님이 주신 어떤 사건이 날 기다리고 있는가? 그전까지는 ‘내가 이러한 존재인데 앞으로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가? 얼마나 더 훌륭해야 하는가? 더 성화되어야 해.’라는 식으로 ‘나’라는 존재가 완벽을 기할 수 있는 쪽으로 갔다면, 이런 존재에서 출발하는 그런 철학은 때려치우고, 앞으로 나는 어떤 사건을 대하게 될까? 이것에 대해서는 알잖아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는’ 그런 사건을 대할 때까지 지금은 희미하나마 주님의 희미한 사건들이 뚝뚝 터지는 것입니다.
그 사건이 진짜 주님이 일으킨 사건인지, 아닌지는 어떻게 압니까? 그것은 성경을 보면 알지요. 성경 말씀이 왜 있습니까? 이 성경 말씀을 보게 되면, 사도 바울이 성경 말씀대로 사건이 터집니다.
예를 들면, 4절에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군으로 자천하여”라고 했는데, 그러면 이 사건이 하나님이 주신 사건입니까? 아닙니다. 아니에요. 그런 점에서 여러분들의 주의를 요합니다.
은혜란 것은 샌드위치처럼 짝을 이뤄야 한다고 했지요? ‘하나님의 일군으로 자천했다.’는 것은 ‘내가 일군 되겠습니다.’라는 사건이 아니라, 그 뒤에 “환란과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겸하여 같이 나와야 해요. ‘이렇게 어렵지만 이 어려움 주신 것이 하나님이 날 대신해서 고난 받으시고 돌아가신 것을 깨닫게 해 주셨구나.’ 이렇게 같이 주님의 은혜와 능력이 와서 ‘그래, 나는 남에게 욕먹지만 아름다운 이름이요, 남들은 속인다고 말하지만 나는 참된 것을 말하고, 내가 시시한 자 같으나 하늘나라에서는 유명한 사람이고, 징계를 받으나 죽임 당하지 아니하고’ 이런 고백이 십자가 중심으로 일어나지요.
그러니까 ‘나는 서럽다’가 아니라, 서러움 속에서도 서러움을 안 느낄 정도로 기쁘다는 것이 같이 겸해서 나와야 합니다. 이것을 제가 함축해서 이야기한 것이 뭐냐 하면,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아는 순간에 이런 것이 한꺼번에 터져 나옵니다. 내가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나는 이유 없이 죄인이고, 날 때부터 죄인 안 된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계속 죄인으로 살 것이며, 죽을 때까지 죄인으로 살 것이란 것을 미리 알았다는 기쁨, 희열 이것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눈치 챘다는 그런 즐거움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지금 이 순간에는 아는 것 같지만 언제 잊어버리는가 하면 ‘나 있음’에서 출발할 때 다 날아가 버립니다.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이 오지. 그러면 성경 말씀대로 견디란 말인가? 그것은 믿음이 좋은 사람이나 해당되는 것이지 나는 믿음 안 좋기 때문에 견딜 맘 없습니다.’
이처럼 ‘나 있음’에서 출발하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반항과 반발 이런 것이 막 터져 나오지요. 자신이 죄인이고 예수님이 대신 죽으셨다는 것은 생각 안하고, 마치 용기 있게 자신이 전진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가자! 우리 힘으로 할 수 있어.’ 이런 식으로.
우리는 어떤 시련을 당해도 쌉니다. 당연한 거예요.
여기에서 한 마디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러면 목사님, 환란과 매 맞음 이런 것이 꼭 있어야 합니까?’ 라고 묻는데, 그렇지 않아요. 무수한 사건들이 우리를 찾아 왔고, 그냥 기쁨이 되어 넘어갔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우리가 그 때는 내가 죄인인 것을 알기 때문에 비록 환란과 궁핍이 왔지만 기쁨과 감사로 마중을 나갔어요. 그런데 갑자기 죄인이 아니라 ‘나 있음’에서 생각하니까 똑같은 환란과 어려움을 당하는데 괴로움과 고통으로 다가와요.
나에게 문제가 있었지 내 주변의 사건이 문제가 아니에요. 늘 똑같은 사건이 있었어요. 어떤 때는 ‘그까짓 것 대충 넘어가지 뭐’이렇게 하다가, 어떤 때는 아주 민감하고 예민하게 대처하고 반응하고 이렇게 변화되는 것이 뭐냐 하면, 내 위치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가치 있는 인간이라고 착각하고 욕심을 부렸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제 14절을 봅시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이렇게 되어 있지요.
여러분에게 제가 1시간 동안 이야기 했습니다만 또 이런 대목 나오면 이 말씀을 이런 식으로 해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절대 불신자와 함께 해서는 안 되는구나.’ 이렇게 해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방금 여러분들이 이런 식으로 해석하려고 했지요?
이 뜻은, 내가 빛이고 의에 속했기 때문에 그 속에서 나를 찾지 말라는 말이지요. 나의 입장에서 나를 찾지 마시고 빛의 입장에서(어둠의 입장이 아니고) 그리고 의의(불의가 아니고) 입장에서 내가 이미 붙잡힌바 되었기 때문에, 거기에서 ‘나’라는 것을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나’가 있느냐? 그것은 의를 위해서 내가 있고, 빛을 위해서 내가 있는 거예요. 나를 위해서 빛이 있고, 나를 위해서 의가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제 좀 이해가 되십니까?
나를 위해서 의가 있고 나를 위해서 빛이 있는 것이 아니고, 빛 때문에 내가 여기 있는 거예요. 빛과 어둠이 함께 하지 말라는 말은, ‘내가 빛 되게 살아라’는 말이 아니고, ‘나는 어디에서나 빛임을 잊지 말라’는 말입니다. 빛에 속했음을 잊지 말라는 것이지요.
어둠에 속한 사람은요 ‘나는 어둠에 속했다’고 하지 않습니다. 어둠에 속한 사람은 빛이 빠져버려요. 그래서 ‘나는 나다.’ 이렇게 나옵니다. 이것이 어둠에 속한 거예요. 앞에 빠져버리고 ‘내가 있으니까 내 위주로 살거야. 누구든지 날 건드리면 난 가만 안 있어.’ 이것이 어둠입니다.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은 이렇고.
그런데 은혜를 받은 사람은 ‘나 있음’을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왜? 대신하여 죽으신 분이 있기 때문에, 그분과 함께 동거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그냥 빛 된 분과 함께 있으므로 빛이라는 사실을 알지요.
불신자가 신자에게 “넌 누구냐?”고 물으면, ‘나는 없고 주님과 함께 있어.’ “어허, 네가 누구냔 말이야?” ‘나는 없다니까. 주님이 함께 계신다니까.’
불신자에게 “넌 누구냐?”고 물으면, ‘나는 이러이러한 자야.’ 라고 답하지요. 이것을 존재에 따른 속성이라고 합니다. 나는 직업이 무엇이며, 성별은 무엇이며, 부모는 뭐하는 사람이며, 키가 몇이며, 몸무게가 몇이며 ---. “Who are you?” 할 때, 나는 이런 직업, 나이 등 나라는 존재에 대해서, 있음에 대해서 있음을 채우는 그런 것들을 쭉 나열하지요. 이것은 ‘있음’이 있고, ‘있음’을 채우기 위해서 후차적으로 이런 것들이 들어오잖아요.
그런데 빛의 자녀는 그게 아니에요. 내가 있고 빛이 있는 것이 아니고, 빛이 있었기에 내가 생긴 거예요. 빛이 있었기에 빛을 증거하는 내가 후차적으로 뽑혀 나온 겁니다.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신 것은 다윗 이야기하면서 했지요? 다윗이 들에서 양을 치고 있을 때, 기어이 호출해서 기어이 기름 부어서 왕 되게 하지요.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디에 숨어도 미리 아신 자는 반드시 불러냅니다. 광주에 있든 함평에 있든 관계없이 불러내요.
그 다음에 뭡니까? 의롭다 하시는 것은 우리 소관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이미 불러내실 때부터 의롭게 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것도 이미 결정된 사항이기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빛에 의해 있기 때문에 빛의 자녀와 어둠의 자녀가 이미 적(소속)이 다르다는 사실, 완전히 차이 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같이 사업하지 말라, 결혼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고, 너와 나는 주님이 갈라놓았기 때문에 나도 내 마음대로 안 되고 너도 네 마음대로 안 된다는 것이지요.
중세 때 주류 신학자가 있고 비주류 신학자가 있었어요. 비주류 신학자들은 이름도 거의 없어요(알려지지 않았어요). 주류 신학자는 뭐냐 하면, ‘신이 존재해서 우리가 존재한다.’ 이것이 주류 신학자들입니다. 안셀무스, 토마스 아퀴나스, 어거스틴 이런 사람들이지요. 그러나 비주류는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신은 존재하지 않는 방식으로 우리를 존재케 하신다.’ 이렇게 했어요. 그러니까 주류에서 튕겨 나오지요. 소수의 신학자들이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신은 존재하지 않아야 된다. 왜? 존재하는 것은 다 알도록 되어 있는데, 우리가 알도록 되어 있는 것이 존재라면 우리가 아직 모르는 것은 신 바깥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아는 것을 통해서 구원 받는다고 하면 모르는 바깥에 있는 신을 알 수가 없다. 따라서 신은 항상 숨겨진 채, 모르는 것이라야 한다.’ 는 것이지요.
여기에서 ‘모르는 것이라야 한다.’는 이 말은, 아는 것이 존재하고 존재하는 것이 아는 것이기 때문에 모르는 신이 있다는 말은 존재하지 않는 신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존재하지 않는 신이 우리를 지금 존재케 하는 그런 힘을 주시는 살아있는 신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어거스틴, 토마스 아퀴나스 이런 사람들은 이 말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요. 칼빈도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요.
이 당시 그렇게 많은 신학자들이 있었지만 십자가를 이야기 하는 신학자들은 없었어요. 루터가 좀 십자가를 이야기 했지 다른 사람들은 말한 적이 없어요. 어떤 구절에 보면 루터가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나는 어거스틴으로부터가 아니라 아예 사도바울부터 바로 왔다.’ 이렇게 해요. 왜냐하면 십자가는 사도 바울이 이야기했거든요.
이상스럽게 사도바울이 십자가를 이야기했는데, 사도바울은 십자가 중심으로 이야기했는데 후세 사람들은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면, ‘아, 십자가처럼 겸손하라고 하는구나.’ 전부 이렇게, ‘나라는 인간이 구원 받으려면 십자가 본받아서 겸손하게 살고 주님 섬기면 되는구나.’ 이렇게 해석하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십자가를 이야기했는데, 다른 사람은 십자가를 보면서 자신이 뭔가를 해야 되는 십자가인줄 알고 그렇게 해석하더란 말이지요. 후대 부분의 신학자들이.
그래서 신학 책을 보게 되면 참 답답하지요. 그것을 전라도 말로 “깝깝하다”고 합니다.
저는 TV를 거의 안 보는데, [웃찾사]를 보니까 “형님 뉴스”라는 것이 나와요. 거기 보면, ‘인간이 인간다워야 인간이지’라는 그 유명한 말을 전라도 말로 하니까 그것이 얼마나 우스운지---.
‘인간이 인간다워야 인간이다.’ 이것이 출발이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이것이 결국은 ‘있음’이에요. 내가 있으니까 신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신과 신이 있을 때, 이것이 만든 것이 [다빈치 코드]에서 종교란 이름의 오락입니다. 오락이 뭡니까? 있는 나를 즐겁게 하는 것이지요.
라캉의 이론에 의하면 현재 불교를 믿다가 기독교로 옮기는 이유가 뭡니까? 기독교가 나를 더 즐겁게 해 주기 때문에. 이 사람은 언제 다시 불교로 돌아갈지 아니면 천주교로 갈지 알 수 없어요. 이런 노선 따라서 즐겁게 해 주겠다는 것이 요즘의 사이비 교회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면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결국 사도 바울이 사람을 안 기쁘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일군이 아니라, 십자가가 있다면 더 이상 우리가 무슨 기쁨을 더 얻을 자격이나 되냐는 것입니다. 십자가 기쁨으로 만족해야지 이곳저곳 옮겨 다니면 안 된다는 말이지요.
성도가 아무리 옮겨 다녀도 어디를 가더라도 우리는 누구한테, 주의 은혜가 십자가 은혜가 주어져서, 여기에서 무슨 사건? 우리를 위한 사건이 아닙니다. 빛이 빛이 되는 사건, 의가 의가 되는 사건을 우리를 사용해도 이것을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이것이 고린도후서 6장의 이야기입니다.
궁극적으로 성경의 본 뜻을 알아야 되니까 이제 이해되십니까? 아까 의의 병기라고 했지요.
사도 바울이 지금까지 6장에서 한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이 함께 있음을, 그분이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시고 은혜를 주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도구로써 우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는 빛과 어둠이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없어요. 빛과 어둠이 공통점이 없고, 의와 불의가 공통점이 없습니다. 왜 없는가? 십자가 사건은 감춰진 사건이기 때문에, 원래 사건이란 사건을 당한 당사자만 느끼게 되어 있지 다른 사람은 못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십자가 사건이 터진 입장에서는 아무리 십자가 속에 들어가려고 애를 쓰고 악을 쓰도 함께 할 수가 없습니다. 분리됩니다.
계속 말씀을 봅시다. 16절입니다.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두루 행하여” 사건을 일으켜서, 주님께서 계속 사건을 일으켜요.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이것이 요한복음5장 17절에 나오는 말씀인데, 주께서는 계속 사건을 일으켜요. 주님을 그냥 ‘있음’으로 보면 안 됩니다. 왜? 있음이란 것은 주님이 여기 있게 되면, 내가 만약 여기 있게 되면 지금 대구에 내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여기 광주에 존재하면 대구에 존재하지 않는 겁니다. 사람이 한쪽에 존재한다는 것은 다른 쪽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주님께서 만약 육체적인 존재로 광주에 와버리면 대구에는 없어요. 그러나 성령은 존재에 관한 문제가 아니고 사건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고넬료에게도 베드로를 만나라고 이야기했고, 같은 시점에 베드로에게도 고넬료를 가서 만나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성령입니다. 왜냐하면 동일한 사건을 일으킬 수 있으니까.
광주에도 약간 비가 오고 대구에도 비가 왔어요. 구름과 바람의 덩치가 크니까 그렇지요. 바람이란 것은 잡을 수가 없지요. 성령이 바람같이 일하시기 때문에 그 바람을 맞은 사람, 사건을 맞은 사람만 알고 다른 사람은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이 십자가 사건을 일으키는 것이 뭐냐 하면,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라는 것을 알려 주는 사람 따로 있고, 전혀 이것이 감춰진 비밀이 되어 알지 못하는 사람 따로 만들고 그래서 빛과 어둠을 쫙쫙 갈라놓고 분류시키는 작업을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다니시면서 하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작년이든 올해든 항상 사건을 통해서 뭘 느끼는가 하면, ‘아하, 주께서 행하셨고 나는 주의 백성이구나. 주가 내 안에 계시는구나.’하는 것을 깨닫게 하는 사건들이 일어나지요. 그리고 그 사건은 반드시 우리를 죄인으로 만들고, 죄인으로 만드는 이유는 내가 ‘나 있음’ 중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의 모든 고민을 가만 보면, 고민하는 당사자가 누구입니까? ‘나’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했거든요. 예수님은 고민 안 하고 있는데 내가 왜 고민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자기중심으로 생각하는데 우리는 얼토당토않게 내 중심으로 생각하니까 나로부터 고민과 걱정과 염려가 일어나서 나 있음으로부터 시작해서 나에게로 막 달려들고 찌르고 난리를 칩니다.
고린도전서 6장 19절을 다시 한 번 봅시다.
[비타 골드 500]은 진짜 비타민이 있다고 알려진 것이지요? 몇 병 마셔도 된다고 했지요?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이것까지는 우리가 동의를 해요. 그런데 그 다음에 동의를 안 해요. 다 같이 봅시다.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왜 이 점에 대해서는 우리가 동의를 못합니까?
성령께서 오시면 이 몸이 내 것도 되고 성령의 것도 되고 이런 성령은 없어요. 성령이 오시게 되면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내 것이라고 행사할 수 있는 권리가 박탈되었습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성령께서 온전히 접수를 다 했어요. 성령이 오시면 그 순간부터 더 이상 우리는 우리 것이 아니에요. 우리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하는 걱정, 근심도 내 것으로 돌리면 안 됩니다.
그런데 걱정, 근심이 내 것이기 때문에 걱정, 근심이 생기거든요. 이게 남의 몸, 예수님의 몸인데 걱정을 왜 내가 합니까? 참 이상한 일이지요? “눈이 침침해.” 그 눈이 누구의 것인데 우리가 걱정을 해요. 눈이 침침할 때, ‘주님의 눈이 침침하구나.’ 이러면 되는데, “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이제 내 눈이 침침하구나. 이제 내가 점점 망가지네.” 이렇게 되니까 괴로운 거예요. 이것이 바로 죄인들의 기본적인 모습이에요.
그 다음에 고전 6:20을 보면,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네 것이 아닌 것을 믿느냐는 말입니다. 네 몸이, 네 있음은 날아가 버렸다는 것을 믿느냐는 것입니다. 네게 어떤 일이 벌어지든 간에 그것은 네 것이 아니니까 그것에 대해 가볍게 생각하는 그것이 바로 은혜 받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다시 고후 6장을 봅시다.
우리가 오늘 공부하면서 놓치지 말 것은 첫째 사도 바울이 이야기한 ‘성도란 무엇인가?’ 하는 것만 아시면 여러분들은 100% 다 아신 것입니다. “성도는 내 것이 아니구나.”
17절을 보면,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이것은 주님께서 오늘날 우리 자신들에게 하시는 말씀 같아요.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주님 보시기에 우리를 스스로 내 것이라고 여기는 순간부터 주님의 몸 된 나를 내 소유로 등기 이전시키는 나쁜 버릇이 있어요. 그럴 때 이 말씀을 보면서 ‘아, 내 몸이 내 것이 아닌데 왜 자꾸 내가 염려하고 걱정하는가?’ 이것을 다시 한번 이 말씀을 보면서 깨닫게 되지요.
6장 16절을 보면,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지요. 주님이 우리 가운데 거하게 되면 누가 행합니까? 우리가 행합니까, 주님이 행합니까? 주님이 행하지요. 주님이 행하게 되면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부정한 것을 따로 분류시킵니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하면, 여러분들이 피곤하시고 집중력이 떨어지는 것 같은데, 이렇습니다.
지금 우리가 어떻게 느꼈던 상관없이 이 몸이 주님의 몸이잖아요. 그것을 어떻게 아는가 하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가 내 죄를 대신 처리하기 위해서 죽었다는 것을 알잖아요. 이렇게 안다는 것은 이미 기적이 임한 것입니다. 기적이 이미 왔어요. 기적이 오게 되면, 이미 우리 속에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 다음에 어려운 것이 뭐냐? 그리스도가 계시게 되면 그리스도는 직접 뭘 행하잖아요. 우리와 의논해서 행하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일을 행하시잖아요. 그 행하시는 일이 뭔가 하면, 우리로 하여금 부족한 것을 따로 떼게 하는 거예요. 부족한 것을 따로 떨어지게 하는데 문제는 우리 자신이 자꾸 ‘있음’부터 출발을 하니까, 라캉에 의하면 ‘있음’은 뭘 의미하는가 하면, 결국 즐거움을 원해요.
우리는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고, 내 입맛에 맞는 즐거운 거리, 골프나 야구, 혹은 축구 등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원해요. 그런데 우리 속에 누가 있습니까? 부족한 것을 떼 내려는 주님이 계시잖아요. 이 주님께서 말씀을 가지고, 사건을 가지고 우리가 부족한 것으로부터 이미 떨어진 존재인 것을 네가 깨달으라는 식으로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일을 이 말씀대로 하셨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가 불신자와 같이 놀지 말자는 것이 아니고, 불신자와 같이 붙어서 이야기를 해도 우리는 신자예요. 왜? 주님께서 함께 있어서 나의 있음으로 해서 내가 구원되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한다면, 다시 말해서, 나는 죄인이며 오직 이 죄인 됨을 깨닫게 하시는 분이 주님인 것을 안다면 우리가 어떤 불신자와 함께 있더라도 그것이 따로 떨어져 있는 셈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잘못 이해하면, ‘나는 불신자와는 일 안해. 혹시 교회 다니십니까?’ 이렇게 나오는데, 그것이 아니에요. 이 이야기는 우리보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책 전부가 불신자에게 하는 이야기입니까, 신자에게 하는 이야기입니까? 신자에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신자보고 하는 이야기가, 너는 이미 부정한 자가 아니야 라는 것을 깨우치게 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부정한 자들과 함께 있더라도 떨어져 있구나 라는 것을 느껴서 예수님을 증거하는 도구로 그 현장을 삼는다는 것입니다. 이해되십니까?
술집에 가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술은 마시지 마세요. 뭣 하러 술을 마십니까? 술집에 갈 수도 있어요. 같이 노래 부를 수도 있습니다. 술집에 가서 같이 노래 부르더라도 남들 보기에는 수군수군하지만 그래도 빛의 자녀에요. 이것을 만약에 술집에 안 가고, 노래방에 안 간다고 해서 빛의 자녀라고 행세를 하게 되면 이것은 다시 나의 있음을 “또 있음”을 주장하는 것이 돼요. 주여, 어떻습니까? 저 장하지요? 이렇게 되면 갑자기 ‘나 있음’이 부각이 되요. 이것은 자신이 죄인인 것을 잠시 망각한 상태에요.
‘주님, 제가 가치 있는 존재지요? 내가 술집에도 안 가고, 노래방에도 안 가고 제가 얼마나 가치 있는 사람입니까?’
‘네가 그렇게 대단하고 가치가 있으면 내가 왜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었나? 십자가 앞에서 네가 무슨 가치가 있어.’ 그런 이야기입니다.
7장 1절입니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 방주 안에 들어온 사람, 우리가 - “두려워하는 가운데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이 말씀대로 하십니다. “깨끗케 하자”는 말은, 철저하게 우리로 하여금 죄 안 짖게 하는 것이 아니고, 철저하게 우리로 하여금 죄인 되게 하셔서 모든 일을 주님의 은혜로 돌리게 하는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은혜 받은 이 시대에 은혜다운 은혜입니다.
하나님보시기에 깨끗하다는 말은, 주님의 공로에 흠집이 생기지 않는 것이 가장 깨끗한 것입니다.
여러분, 어려운 이야기 다시 할게요. 깨끗하다는 의미가 뭐냐 하면, 두 가지 예를 들 테니까 둘 중 어느 것이 깨끗한가를 맞혀 보세요. 1) 교실이 있는데 학생이 부지런히 청소를 했습니다. 그래서 2/3는 깨끗하고 1/3은 약간 더러운 채 남아 있습니다. 2) 선생님께서 청소를 100% 깨끗하게 했는데 1/3을 더럽혀 놓았어요. 둘 중 어느 것이 깨끗한 것입니까? 상당히 어려운 문제지요?
이 대목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은 자기 있음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내가 최선을 다해 깨끗하게 바르게 살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할 청소를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여전히 내가 있어요. 그런데 주님께서, 주님께 공로가 있지요. 성도 안에는 주님의 공로가 가득 찼잖아요. 십자가 공로가 있지요? 화목제물이 있잖아요. 화목제물을 더럽히는 것은 뭡니까? 나의 행함을 주장할 때 더럽히는 것이 되지요? 그래서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주님의 화물제물을 모독하고 더럽히는가 하면, ‘나는 착합니다. 나는 훌륭합니다. 나는 선합니다.’ 이럴 때 더렵혀지는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이 성경 구절을 내가 청소하는 식으로 이해한다면 완전히 이렇게 생각하는 그 자체가 뭘 더럽혀요? 진짜 주님의 은혜를 갉아 먹는 쥐새끼 같은 거예요. 오랜만에 공식적으로 ‘새끼’라는 욕을 합니다.
주님께서 물에서 건져 놓았는데, 건져 놓았으면 “감사합니다”라고 하면 될 것을 가지고, 물에서 건져 놓았는데 막 헤엄치는 흉내를 내더란 말이지요. 이게 무슨 꼴입니까? 치매현상도 아니고. 물에서 건져 놓았는데.
나물이나 미역 같은 것을 데친다고 하지요. 미역 데칠 때 굉장히 은혜로워요. 미역을 물에 데치면 미역이 축 쳐지지요. 물끼가 묻어 있지만 미역은 힘없이 축 쳐져서 건져 놓고, 또 건져 놓고 하는데, 왜 우리는 미역처럼 되지 못하느냔 말이지요.
만약에 미역을 물속에서 데쳐서 건져 놓았는데 축 쳐져있지 않고 빳빳하게 있다면 이런 미역은 버려야 해요.
100% 예수님의 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다 자기 행함을 주장하면 어떻게 됩니까? 100%가 아니고 주님은 99% 나머지 1%는 내가 했다. 이렇게 나오는 것이 바로 은혜의 은혜로움을 손상시키는 부정한 것이 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지금 내가 청소하겠다고 하는 것은 ‘어두움’이지요. 이 어둠은 어디에서 출발한다고 했습니까? 있음. 어둠은 자기 있음에서 출발하잖아요. 그런데 성도라 할지라도 설교 들을 때는 모든 말씀에 동의하는데 시간이 좀 지나고부터는 또 ‘내 있음’이 나오면, ‘내가 열심히 말씀 듣고 기도했는데 왜 배가 고픕니까?’ 이렇게 나오지요. 그러나 사도 바울은 열심히 복음 전하면서 굶고, 헐벗고, 매 맞고 했어요. 그러면 바울은 뭡니까?
사람은 자기 있음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열심히 성경공부하고 뭘 해도 자꾸 있음이 등장하게 되면 그 ‘있음’으로 인하여 빛 아닌 ‘어두움’을 내 몸에다가 심는 식이 되지요. 그런데 주님 하는 일이 뭐라고 했습니까? 빛과 어두움이 함께 하지 못하기에 어두움을 추방 하지요. 이제 이해되십니까? ‘어디 부정한 것이 들어와’ 하고 쫓아내지요. 그러면서 ‘너는 죄인이야’라는 식으로 공격하지요.
여기에서 ‘죄인이야’라는 말은, 나쁜 짓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네가 그런 발상을 한다는 자체가 너 자신이 마치 훌륭한 사람이라고 여기는 그 발상에서 나온 것이란 말입니다.
이 이야기를 제가 십여 년 전부터 글로 썼어요. 여러 군데 글을 썼는데 도대체 개혁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알아듣지 못해요. 총신 교수들, 목사들이 이해를 못해요. 그들은 있음에서 청소하는 식으로 해요.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하면 어떻게 답변할 것입니까? 만약 15년 동안 죄 안 짓다가 16년째 죄 지으면 어떻게 됩니까? 75년 동안 예수 믿다가 한경직 목사처럼 죽을 때 ‘예수 믿는 놈 미친놈이다.’라고 한다면 그 사람 지옥 갑니까?
이런 질문에 그들은 아무 답변을 못합니다. 답변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이 기껏 내 놓는 것은 ‘예수 믿는 사람은 죄 짓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현재 착한 짓이라고 하는 것이 다른 나라에서는 나쁜 짓이 될 수도 있어요. 그리고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잘못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본인 스스로 착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남에게 얼마나 큰 상처와 피해를 주는 나쁜 짓이라는 것을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 안하고 자기 입장에서 생각하는 거예요.
제가 이런 강의를 하면서 우려스러운 것은, ‘목사님, 제가 하는 것은 성령의 일로 무조건 선한 일이 되겠네요?’ 라고 할까봐 걱정됩니다.
여러분들은 이미 죄인이기 때문에 선할 생각을 하지 마세요. 새삼스럽게 선한 것이 없어요. 오히려 죄인이 죄인으로 드러나게 하는 그 관계성이 선한 거예요. 의로운 거예요. 그 의가 여러분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화목제물이라고 했습니다. 화목제물로 말미암아 우리는 더욱 죄인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노아 때는 방주가 있으므로 말미암아 그들은 뭘 가지로 놀아야 합니까? 방주라는 물체가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내가 그동안 가지고 있는 구원 기준, 윤리, 도덕이 아무짝에도 소용 없다는 것이 밝혀지듯이 오늘날에는 무슨 사건입니까? 십자가잖아요. 내가 예수님을 죽였습니까? 안 죽였잖아요. 그 때 우리는 태어나지도 않았어요. 그냥 2,000년 전의 사건이 내 앞에 등장한 거예요. “야, 너. 너 대신 내가 죽었어!” 너 대신 내가 죽었다는 말은, 그 사건이 등장하는 순간부터 우리의 모든 것이 죄가 됩니다. 나쁜 짓을 해서 죄가 아니고, 십자가 사건이 등장하는 순간부터 십자가 외에는 다 죄가 됩니다. 이제 풀리네.
십자가 사건 빼놓고 다 뭐라고요? 다 죄예요. 그래서 지금도 성도에게는 십자가에서 나온 사건들이 일어납니다. 그것을 당신이 어떻게 아는데? 십자가에서 나온 사건은요 반드시 나로 하여금 십자가를 깨닫게 하는 사건으로 다시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십자가 사건이라고 알고 있는 사건이 ‘나, 앞으로 훌륭한 사람 되어야겠네.’ 이렇게 나온다면 이것은 예초부터 십자가에서 나온 사건이 아니고, 자신이 자기 있음을 보호하려는 어둠에서 나온 것입니다.
성도에게도 이런 것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우리에게는 사건을 통해서 추방시키고, 주님의 공로에 손대지 마라. 더러운 발로 어디 주님의 공로를 짓밟아. 값으로 산 것이기에 너의 것이 아닌데 왜 너의 것을 끼워 넣어. 라는 식으로 사건이 터지게 합니다. 이제 이해되십니까? 동의를 안 하시는 것 같은데, 나도 모르겠다.
사도 바울이 왜 지금이 은혜 받을 때라고 이야기했는가를 아셔야 합니다.
이제 약간 넘어갑시다.
7장 10절을 봅시다.
중간의 이야기는 왜 그냥 넘어가는가 하면, 중간에는 사도 바울의 개인적인 감정을 이야기해 놓았어요. 내가 참 너희를 보고 상당히 근심을 했는데 지금은 위로를 받았다. 그런 사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것이 연결되려면 10절부터 봅시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이것도 일반교회에서 일반교수들이 또 오해를 해요. 이것을 가지고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면, 구원을 직선 도로로 생각해요. 천국이라는 최종 목적지를 향해 지금 길을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으로 가기 위해서는 회개가 있어야 하는데, 회개가 안 나오니까 주께서 그때그때 근심을 주셔서 회개하고 구원으로 가고 이렇게 하신다는 거예요.
이것은 그런 뜻이 아니고 “주님의 뜻대로”라는 대목이 있지요? 주님의 뜻은 우리보고 물어보고 뜻이 정해집니까, 주님 뜻대로 자기 뜻을 세웁니까? 우리보고 묻지 않고 그냥 주님의 뜻대로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뜻대로 되었다면 그 사람은 이미 구원 받은 사람이에요. 다만 주님의 뜻대로 구원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이 사실을 증거해야 할 자들입니다.
아까 우리의 있음은 무엇 때문에 있다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증거하기 위해서 있다고 했지요.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증거할 자이기에 우리로 하여금, 우리는 백날 성경 배워도 매일 ‘나 있음’ 중심으로 살지 않습니까? 딱 깨놓고 말해서. “나는 왜 교인이 5,000명이 안 됩니까? 한달 수입이 왜 5,000만원 안 됩니까? 나는 골프 치면 안 되는 사람입니까” 이런 식으로.
아까 라캉을 이야기했는데 우리는 항상 새로운 자극을 받아요. 우리가 그런 욕심을 부리는 것이 아니고, 견물생심이라고, 보면 욕심이 생깁니다. “야, 그림 좋다. 우리 집에 걸어 놓았으면” 이런 마음이 생긴다니까요. 그림이 왜 거기 있어서 공연히 사람을 탐나게 만들어요. 이게 우리 육신의 모습이거든요.
그러니까 우리는 ‘있음’이니까 주님을 증거하지 못하잖아요. 그 때 근심과 회개를 통해서 나는 이렇게 죄인이었는데, 나 밖에 몰랐는데 주님의 십자가의 피의 뜻대로 나는 구원되었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근심과 회개라는 것을 준다는 말입니다.
이게 맞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앞에 생략하고 넘어간 대목이 뭐냐 하면, 내가(사도 바울이) 너희들 때문에 고민을 많이 했는데 지금은 내가 기쁘다.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왜? 지나고 보니 그것이 주님의 뜻이었구나. 교회에 다툼이 있었어요. 그래서 근심을 많이 했어요. 성도들이 철도 없이 왜 저럴까? 그렇게 열심히 가르쳤는데 그것도 모르고. 이렇게 하다가, “이야, 그런 다툼이 우리에게 근심을 낳게 만들고, 그 근심이 있어야 우리 스스로가 죄인인 것을 잊었고 주님을 근심케 했구나.” 이런 회개가 나오더란 말이지요.
구원 받았기에 회개가 나온다는 말은 제 말이고, 회개해야 구원 받는다는 것은 저쪽 사람들의 주장입니다. 이해되시지요?
“세상 근심은 사망에 이르는 것이니라”(고후7:10)
세상 근심이 왜 사망에 이르는가 하면, 주의 뜻이 거기에는 없기 때문에, 주님 주신 사건만 있고 사건의 의미는 오지를 않아요. 왜? 십자가 은혜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사건은 신자든 불신자든 똑같이 당합니다. 하늘에서 비가 오는 사건이 있잖아요. 이것은 신자에게만 따로 내리는 것이 아니에요. 누구에게나 내리는데, 그것이 주님의 은혜로 내린다는 것을 신자만 알아요. 불신자들은 몰라요. 비가 내리려면 흠뻑 내리지 왜 조금 내리다 말아. 이렇게 불평을 한다고요. 왜? 불신자는 나 있음 중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보니까 이것이 불신자 이야기가 아니고 결국 우리가 평소에 살아가는 우리의 본 모습이에요. 어떤 분이 전화를 해서 그런 이야기하는데, 아주 애통해 하면서 하는 말이, 남편이 음주운전으로 걸려서 회사에서 나오게 되었어요. 그런데 법이 바뀌어서 이제 음주운전 한 번으로는 안 걸리고 두 번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왜 하필 내 남편은 한 번에 걸려서 쫓겨나야 했느냐는 것입니다. 무지무지하게 억울한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한 번이건 두 번이건 너는 그런 것을 요구할 권리가 없는 죄인인 것을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제발 법 좀 바뀌게 해 달라고 요청할 수 있는 그런 입장에 우리가 놓여 있지 않아요. 법이 바뀌든 안 바뀌든 어떤 일이 일어나도 우리는 범사에 감사하라고, 그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 그런 식으로 법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좀 확대시키면, 왜 나는 부모님이 재벌이 아닌가? 왜 우리 부모님은 미국 사람이 아닌가? 미국으로 망명한 북한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은 북한에서 태어나서 중국으로 갔다가 중국에서 미국 대사관으로 뛰어 들어가서 어려운 과정을 거쳐 미국으로 가게 되었는데, 이렇게 하지 말고 처음부터 미국 부모 만나서 미국에서 태어났으면 북한에 갈 일도 없고 고생하고 걱정할 일도 없고 얼마나 좋습니까? 시나리오를 그렇게 짜면 안 될까요?
이게 뭐냐? 내 있음 중심으로 생각하니까 내가 주인공이 되어서 그런 시나리오를 짜는 거예요. 그런 시나리오가 바로 예수님을 죽게 만든 것입니다. 내가 만든 시나리오가 하나님의 시나리오와 너무 달라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맞아 죽고 주님은 다시 부활하시고 우리를 용서하시고 그런 것입니다.
우리는 내 것이 아니에요. 이것을 방주 사건,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알게 된 것입니다.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러나 십자가 사건 없이 교회를 수 십 년 다녀도 나를 위한 예수, 나를 위한 하나님, 나를 위한 교회, 나를 위한 목사 --
교회에서 어떤 문제가 있으면 ‘왜 목사가 나를 안 알아주는가’ 하는데, 목사는 당신 알아주는 것이 아니고 목사의 임무는 그리스도의 복음만 전하면 되는데 그것 하면 됐지 뭘 더 원해요. 목사가 누구를 기쁘게 해서도 안 되지만 누구를 쳐서도 안 돼요. 누구를 골라잡아 치는 표적 수사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있음을 목사가 동조하는 것입니다. 목사는 어떤 있음도 인정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있음만 증거해야 합니다.
어떤 있음도, 잘 났든 못 났든 상관없어요. 어떤 있음을 겨냥해서 설교할 이유가 없다는 말입니다.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증거하는 대로 증거해야 되지 누구를 위한 설교 이런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목사 자신을 치는 설교를 해야 되요. 마늘밭 망친 사람을 치지 말고 나를 치는 설교를 해야 되요. 이제 속 시원하게 해결 되었습니까?
8장을 봅시다.
8장부터 9장까지는 헌금에 관한 깊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제가 전체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기존 교회에서 헌금을 어떻게 가르치는가 하는 부분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들은 고린도후서 8, 9장에 대해서 굉장히 달달 외우듯이 잘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헌금 이야기기 때문에.
기존 교회의 사고방식은 이렇습니다. 자발적으로 내는 풍선한 헌금이 은혜 받은 증거라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8, 9장을 근거로. 그들이 내린 결론이 뭐냐? 자발적으로 풍성한 헌금이 은혜 받은 증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억지로 한다든지, 풍성하지 못한 헌금은 은혜를 안 받은 증거라는 것입니다.
은혜를 안 받았으면 고린도후서 6장에, ‘지금 은혜 받을만한 때’라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은혜를 받은 증거가 헌금이잖아요? 그런데 구원은 받았지만 은혜를 풍성하게 못 받게 되면 그만큼 헌금을 못하는 거예요. 따라서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거에 비례해서 은혜 받았음을 말로 하지 말고 헌금을 많이 하면 은혜 받은 것이 되는 거예요. 기존교회가 고린도후서 8, 9장을 이런 식으로 해석합니다.
지금이 은혜 받을 때니까 여러분 중에 누가 은혜를 많이 받았느냐 그것은 누가 헌금을 많이 했느냐로 판가름이 난다는 것입니다. 물론 무식한 목사 같으면 그냥 돈 많이 내라고 하겠지만, 유식한 목사들은 그렇게 하지 않고, 퍼센트를 따져요. 적게 한 사람 중에 퍼센트를 따지는데, 적어도 십일조는 기본이고, 구약에 보면 최소한의 헌금이 십일조에요. 십에 2조도 받치고 3조도 바치는데, 그것은 구약 율법 시대의 이야기고, 신약 은혜의 시대에는 최소한 이것보다는 더 드려야 은혜 받은 자의 표식입니다.
이러한 목사의 설교에 대해서, ‘아이고 부끄럽습니다. 은혜 받은 노력을 할게요.’ 이렇게 나오면 아직도 성도인데, 만약 이런 설교를 한 목사에게 대들면 이런 사람은 예초부터 구원도 안 된 불신자가 되는 겁니다.
목사들은 교회 헌금을 이야기할 때 절대로 헌금 위주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헌금 하라고 하는 ‘나’(목사)를 이 교회에 계속 권위 있는 거룩한 주의 종으로 인정이 가능한 것으로 유발할 수 있는 설교냐를 따지는 거예요.
목사들한테 이런 말을 해야 되는데, 목사들이 이런 소리 들으면 기절합니다. 내가 그렇게 꼭꼭 감춰둔 것을 어떻게 알았지. 이렇게 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어떤 설교를 하든지 간에 그 설교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설교한 당사자가 이 교회에 계속해서 여전히 월급 받고 권위를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를 더욱 더 증명해 주는 설교가 나온단 말이지요.
그러니까 헌금 설교를 하면, 누가 은혜를 많이 받아 헌금을 많이 했습니까? 경쟁을 위발해서 더 많이 거둬 내는 것도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경대로(고후8, 9장을) 설교한 나를 공격한다면 그 사람은 악마에 속한 사람이기에 치리하는 것이 주의 뜻이다. 이렇게 나옵니다.
이런 사람을 치리함으로 누가 권위가 높여집니까? 목사의 권력은 더욱 더 굳혀 지겠지요. 이것을 노리고 설교하는 겁니다.
목사의 심보를 여러분들이 잘 아셔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같이 공부하시는 목사님들께 수 천 번 이야기했어요. 뭐냐 하면, 제발 설교할 때는 교인들이 ‘당신이 이런 식으로 설교해야 이 교회에 오래 있을 수 있겠지. 그런 것을 노리고 설교하지.’ 라는 식의 오해가 있을 수 있는데, 설교자는 이런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서 설교하면서 목사 자신이 그 말씀으로 자신을 치는 설교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 교인들이 말씀에만 관심을 두지, 평소 목사님을 존경했던 사람은 그렇지 않은데 목사에 대해 좋지 않게 생각했던 사람들은 ‘오늘 저 말씀 또 나를 치는 설교네.’ 이런 오해의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목사가 스스로 나도 이 말씀에 의해 침을 당합니다 라는 것을 보여줘야 합니다.
이렇게 하려면 고린도후서 8, 9장을 기존교회 식으로 설교해서는 안 되겠지요. 풍성한 헌금이 은혜 받은 증거라는 식으로 설교해서는 안 되겠지요. 그런데 주석을 보면 다 이런 식으로 해석해 놓았어요. 풍성한 헌금이 은혜 받은 증거고, 만약 헌금이 적게 나오면 은혜 안 받은 증거로 봅니다.
그리고 어떤 목사는 여기다가 더 완벽한 논리를 구축한다고 ‘은혜 받은 액수만 은혜가 아니라 1) 먼저 은혜를 받았고 2) 은혜에 보답을 하고, 이렇게 둘로 나눕니다. 이렇게 나누는 이유는, 목사가 은혜를 줬는데 목사를 우습게보지 말고 존경하라는 뜻입니다. 받았으면 가만히 있지 말고 내 놓아야지. 사람이 염치가 있어야지. 이렇게 해서 고린도후서 8, 9장을 설교하는데,
정말 성경에는 어떻게 되어 있는지 봅시다.
고린도후서 8장 5절에 “우리의 바라던 것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
9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을 기존교회에서 설교를 한다면, 교회당이나 교육관 지을 때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여러분들이 부자 같으면 이번 기회를 통해 가난하게 되시기 바랍니다. 집 있는 사람은 집 팔고 전세로 가고, 나머지는 교회 헌금해야지 그렇게 하지 않은 사람은 은혜 안 받은 사람이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헌금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헌금을 통해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헌금을 뽑아내기 위해서 은혜를 동원하는 것이 아니고, 헌금을 통해서 은혜를 아는 것입니다. 어떻게 아는가 하면, 예수님이 부요하신 분인데 가난하게 되셔서 빠져나온 것이 뭡니까? 은혜잖아요.
그러면 현재 성도가 가난하단 말입니까, 부요하단 말입니까? 부요하단 것이지요. 그런데 그 부요한 것은 빠져나온 은혜 덕분이지요. 그러면 고린도전서 6장에 의하면 우리가 누구의 것입니까? 우리의 것이 아니고 모두가 주님의 것이잖아요. 주님이 주신 은혜지요. 은혜가 되면 우리는 뭘 해야 되요? 우리는 부요함을 느껴야 된다는 말이지요. 왜냐하면 돈을 내는 것은 자기가 넉넉할 때 내는 것이니까. 가난할 때 내면 아깝잖아요.
주님이 가난하게 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부요하게 되었지요. 이것이 시소 법칙입니다. 널뛰기도 마찬가지인데, 한쪽이 내려가야 한쪽이 올라가지요. 같이 올라가면 시소가 붕 뜨잖아요. 둘 다 내려가면 시소가 부러져요. 한 사람이 내려가야 한 사람이 올라가게 되어 있어요.
현재 예수님이 가난하게 되었다는 말은 우리가 돈 한 푼 없어도 부요한 자란 말입니다. 고린도후서 6장 10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관점을 바꾸라는 이야기입니다. 헌금을 통해서 관점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액수가 풍성한 것이 문제가 아니고, 내가 복음을 위해서 돈을 낸다는 것은 ‘나는 부자입니다’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부자가 예수 열심히 믿어서 부자가 된 것이 아니라, 이 부자는 가만히 있는데 가난하게 되신 분에게서 튕겨 나와서 부자가 된 거예요.
우리는 부자 된 높은 위치에서 나보다 가난하게 된 예수님을 늘 바라보는 그런 관점을 여러분이 갖고 있는가 그 말입니다.
사람은 항상 자기보다 잘 사람 사람을 바라봅니다. 정몽준이 얼마를 가지고 있고, 삼성그룹 이건희씨가 얼마나 부자이고 이런 것을 바라봐요. 이런 관점이면 자신이 100억을 가졌다고 해도 가난해요. 이건희도 마이크로 소프트 사장 빌 게이츠와 비교하면 게임도 안 되거든요.
전도서에 보면 사람의 욕망은 채워도 채워도 배가 고파요. 배 고프다는 이야기는 히딩크 감독한 한 이야기입니다. 4강도 배 고파요.
사람이 아무리 가져도 가진 것으로 만족함이 없다고 전도서 3장에 나옵니다. 요즘 오후예배 때 전도서를 하기 때문에 전도서에 나오는 구절을 좀 압니다.
사람이 아무리 가져도 만족함이 없어요. 채울 수가 없어요. 따라서 부자 되려고 아무리 애써도 소용이 없어요. 그것은 더욱 자신을 비참하게 만들 뿐이에요.
성경은 뭐냐 하면, 헌금을 하라고 한 이유는 ‘너희들은 부자이다’라는 것입니다. 남들 보기에는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고, 남들 보기에는 가난한 자 같으나 실상은 부요한 자란 것입니다. ‘부자니까 좀 쓰라’ 이 말입니다. 주께서 주셨는데 그 정도 돈 못 내 놓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자이기에 우리보다 더 가난한 자를 내려다 봐야 해요. 시소가 올라갔으니까 내려다 봐야 해요. 그러면 주께서 가난하게 되셨고 주님의 가난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부자 되었어요.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고 부자가 된 것은 주님이 가난하게 됨으로 말미암아 부자 된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돈을 내더라도 부자의 입장에서 돈을 내면, 이것을 일본말로 ‘기마이’라고 하지요. 내도 기분이 썩 좋아요. 그러나 ‘못 살겠다. 가난하다. 월급이 이것밖에 안 되나’ 이런 사람은 ‘교회 가서 또 돈 내나?’ 이렇게 된다고요. 이런 사람은 자기가 부자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고, 자기보다 더 가난한 사람을 내려다 볼 줄 모르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목사가 만약 이런 식으로 설교한다면 목사의 월급이 인상될 가능성은 없지요. 목사 당신 말대로 하면 주님 가난하게 되셔서 당신은 이미 부자가 되었다고 했으니 더 돈을 바라지는 않겠지?
서울에 어떤 침례교회 목사가 집사님께 전화해서 월급 올려달라고 했어요. 연봉 6,000만원 받는데, 그러면 월급이 500만원 아닙니까. 교인이 80명인데. 그런데 돈이 모자라는 거예요. 왜? 그 80명 교회를 아들에게 물려주려고 아들을 미국에 유학 보냈는데 그 학비 때문에 월 500만원으로는 모자라는 거예요.
목사 나이 69살, 이제 1년 남았는데, 1년 후에 아들이 공부마치고 돌아오면 그 아들에게 교회를 물려줄 계획을 세우고 계속 공부를 시켜야 하는데 돈이 모자라니까 월급은 따로 주고 아들 학비를 달라는 거예요. 이런 계획을 세워 추진 중인데 교회가 약간 술렁이게 되었어요. 술렁거려도 돈 때문에 술렁거리지 복음 때문에 술렁거리는 것은 아니에요.
그렇다면 반대하는 교인들을 목사가 치리하면 그만 이예요. 목사 말 어기면 저주받아. 예, 알겠습니다.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목사 설교가 헌금 더 나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런 설교하는 목사에게 대항하면 그것이 저주받을 짓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설교를 한다고.
목사가 설교를 할 때는 그 말의 내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를 알아달라는 것입니다. 나를 계속해서 신처럼 황제처럼 모셔야 한다는 말입니다.
지금 이것이 보통문제가 아닙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기에 제가 그 교회에서 나오라고 했어요. 나오면 일단 돈은 안 들잖아요. 그 사람은 자꾸 돈을 내면서 불평을 하고 있어요.
예수님이 가난하게 되셨기에 어떤 인간도 예수님보다 가난한 사람은 없어요. 따라서 어떤 사람도 헌금 안 낸다는 것은 말이 안 돼요. 다 은혜 받았기에 헌금을 해야 됩니다. 왜? 부자이기 때문에.
9장 6절 봅시다.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이 말은, 사람이 행한 대로 거둔다는 말이 아니고, 뭘 해도 거둬진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말을 해도 적게 심었으니까 당신은 적게 거둔다는 식의 오해를 할 공산이 큽니다.
많이 내서 많이 받는 식이면 이것은 헌금이 아니라 주식투자입니다.
뭐든지 사람은 적든 많든 불평하지 말고 다 내 놓을 것이 있다. 적으면 적은 대로 많으면 많은 대로 내 놓을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억지나 인색함이 아니라.
‘억지나 인색함’은 나의 있음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의 부요함이 있어야하는데 나가 있으니까 나의 있음만 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있음의 관점으로 남의 있음을 봅니다. 그렇게 되면 내 있음과 남의 있음의 내용을 비교하고 그런 마음을 가지고 헌금을 하면 ‘인색함이나 억지’가 되는 것입니다.
이럴 것이 아니라, 주께서 가난하게 되심은 우리를 부요케 하기 위함이다. 이것은 주님 때문에 부요하게 되었는데 남 볼 것도 없어요. 내가 부요한 만큼 내 놓는 것이지요. 부요하니까.
그 다음 구절부터는 액수나 비율 이런 것이 없지요.
부자는 씀씀이기 편안하게 써져요. 여유가 있기 때문에.
우리 성도가 아무리 망해도 십자가 죽기까지는 안 망합니다. 그래서 스데반 집사는 돌에 맞아 죽어도 여유가 있지요.
스스로 자기를 사수할 이유가, 그런 힘든 일을 할 필요가 없어요.
그런데 여기서 하나 주의할 것은, 내가 부요하다고 생각할 그 순간만 헌금을 해 줘야 인색함이 아니고 자발적이 되는데, 내가 부유하게 느껴지지 않을 순간에 성경 말씀대로 지켜야 된다고 하면서 과분한 헌금을 하면 그것은 ‘자기 의’가 되어서 돈 내고 욕먹는 미친 짓을 한 것이 됩니다. 그럴 때는 헌금을 하지 마세요.
마지막에 어려운 것을 좀 더 해야 되는데 참으세요.
주님의 십자가 사건에 도달되지 아니했는데도 불구하고 헌금을 해 버리면 이 헌금은 십자가 사건을 모독한 것이 됩니다. ‘내가 이만큼 헌금 했는데 왜 은혜 안 주십니까?’ 이렇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은 돈 주고 성령을 사고자 하는 그런 시몬 같은 아주 나쁜 놈이 되요.
헌금이 십자가 사건에서 나온 헌금이 되려면 십자가 사건을 느껴서 진짜 마음에 부요함을 느낄 때 그 때 마음의 작정대로 헌금을 해야지, 돈 쓸 곳도 많은데 우리는 부자니까 헌금해야 된다고 해서 헌금을 덜렁해놓고 시험 들고, 무슨 이런 멍청한 짓이 있습니다. 돈은 돈대로 내고 주님을 또 모독하고.
헌금 액수나 나를 중간에 다 빼버리고 예수님이 하신 헌금이 되려면 예수님 십자가 사건이 떠진 다음에 헌금을 해야 된다니까요.
그래서 우리교회는 헌금 순서가 없어요. 그냥 알아서 십자가 사건이 터지면 하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몇 년 전까지는 십자가 사건이 터지지를 않았어요. 그래서 교회에 돈이 없으니까 우리 장로님이 돈 안 낸다고 하고, 일부에서는 그런 장로님을 ‘장로가 복음 안다고 해놓고 일반 교회처럼 돈으로 운영하려고 한다’ 하면서 대립하다가 서로가 십자가를 알 때 그 때 헌금이 나와요.
제가 장로 같으면 장로님처럼 그렇게 안 합니다. 집집마다 찾아가서 ‘복음 아십니까?’ ‘압니다.’ 잘 걸렸다. ‘한 달에 수입이 얼마니까 헌금 얼마 하세요.’ 일수 받듯이 도장 찍고 일일이 받을 거예요. 그렇게 하면 얼마나 나를 욕하겠습니까? 그런데 저는 그렇게 하고 싶은 것이, 바로 이것이 복음을 위한 것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똑같은 행동을 하더라도 복음의 십자가 사건이 터지지 않고, 목사가 그렇게 시켜서 일수 받듯이 그렇게 하면 나중에 싸움이 일어난다고요. 그렇게 되면 뭐라고 하는 줄 압니까? 하나님 내가 복음을 위해서 일했는데 왜 안 도와주십니까? 결국은 반발을 십자가 지신 주님한테, 자기 대신 목숨을 바친 그분한테 따지고 있다고요. 왜 내 체면과 위신을 세워주지 않느냐고.
죄인이 무슨 위신과 체면을 논합니까? 그것도 자기 대신 피 흘리고 있는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