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060619 대구강의[지옥의 하나님 42-44p.]
Re..060619 대구강의[지옥의 하나님 42-44p.]
이름 : 손하진(IP:)
2006.06.19 대구강의[지옥의 하나님 42-44p.] 이근호 목사님
0 “5. 여호와의 전쟁”. 여기 42페이지에 “전쟁은 시작되었다. 하나님과 악마와의 본격적 전쟁이다.” 여기 이렇게 되어있는데 여기 보면은 ‘원수지간’이죠, 원수지간. 그러니까 이게 원수라는 거예요. 원수라는 게 있어야 ‘화목’이라는 게 성립이 됩니다. ‘원수지간’에 놓이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화목하심’이라는 말자체가 의미가 없어요.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하나님의 적이었습니다라는 것이 일단 이것이 확실하게 정립이 되어있어야 화목케 했다는 것이 성립이 되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된 것은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신 겁니다.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1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원수로써 있다는 것을 명확히 함으로써 하나님의 화목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본래의 구원의 정신을 이 원수에게 그냥 무상으로 제공해가지고 이들로 하여금, 구원받은 자들로 하여금 화목제물을 찬양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원수가 되었다는 이것을 제가 이야기할 때 하나님의 원수된 것을 그냥 순하게 받아들여야 됩니다. 나는 하나님의 원수가 아니다라고 자꾸 버티면, 하나님이 원수되게 하셨는데 우리가 원수 아니다라고 하면 이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잘못된 인식을 하고 있는 거거든요?
2 그런데 이게 철학에 보면, 철학이라는 것을 왜 언급하냐, 철학에 보면 고대, 중세철학에 보면 이 하나님의 원수가 아닌 걸로, 하나님과 친하게 지내는 걸로 여기에 치중을 하고 철학이 전개됩니다. 그런데 현대철학에 와서는 하나님과 원수임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데까지 철학이 이제는 제 정체를 드러내기 시작했어요. 이게 최근의 일입니다. 최근의. 심지어 포이에르바흐는 신이라는 것은 인간이 투사한 것이다, 인간이 지어낸 것이다, 인간이 자기의 이상향을 그냥 비추어서 한 것이다라고 했지만 그대로 포이에르바흐가 신을 공격하지는 않았어요.
3 그런데 현대철학은 뭘 알았느냐 하면은 철학이 인간이 인간위주로 나오면 반드시, 전에는 인간위주로 나오더라도 신은 신대로 따로 관념으로 남아있는 것이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현대철학에서는 인간이 인간위주로 나오면 이것은 필히 신을 원수 취급을 해야 된다라는 것으로 거의 굳혀져 있는 그런 입장에 있어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라는 거예요. 내가, 인간이 인간다우려면 신은 나의 원수가 되는 것이죠. 옛날에는 신 따로, 인간 따로 그냥 둘 다 간섭안하고 따로 지내자 이러했는데 지금은 그게 아니라 신을 공격해야만 가장 인간답다 이런 쪽으로 나갑니다. 신을 공격해야 가장 인간답다는 거예요. 이러한 깊은 인간 이해가 B.C. 4세기, 5세기에 이미 불교에서 이런 게 나옵니다.
4 불교가 누구하고 싸우냐 하면은 힌두교하고 싸우거든요. 브라만교하고 싸운다고요. 브라만교는 철저하게 신 중심입니다. 흔히 범신론이라고 하지요. 쉽게 말하면 범신론이라고 하기보다도 신이 통치하는 세계에 인간은 자연의 일부로써 살아가고 있는 게 그게 힌두교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인간 해방을 부르짖은 게 누구냐 하면 바로 석가모니예요. 인간 해방을 부르짖는 거예요. 인간 해방을. 지금 불교에서 불교와 과학과 철학이 이렇게 손을 잡고 서로 친하게 지내는 이유가 바로 그 뿌리가 힌두교에서 나올 때 이미 나왔던 겁니다.
5 그래서 불교가 초창기에 약간 융성한 것은 그 당시의 힌두교, 신의 질서, 즉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 이 카스트제도의 네 계층을 석가모니는 뒤집어버려요. 인간 중심으로. 신이 만든 신 중심이 아니라. 그러니까 뭐냐. 질서라는 것 자체를 없애버리는 거예요. 질서를 ‘공’으로, 또는 ‘무’로 돌려버리는 거예요. 불교에 의하면 질서는 내가 만들기 나름이라는 말이죠. 질서가 있고 거기에 복종해야 하고 만약 질서에 복종안하면 우리는 벌 받는다, 그 벌은 ‘업’이 돼 가지고 우리에게 재앙이 온다라는 식의 사고방식을 벗어나서 ‘업’이라는 것은 내가 생각하기 나름이고 내 질서는 내가 만든다 이말이죠. 인간해방이예요. 인간해방. 그래서 불교라고 할 때는, 여러분들이 불교란 뭐냐 할 때 어렵다 하는데 어려운 게 아니예요.
6 신에 대한 인간 해방을 선언한 것이 석가모니입니다. 그런데 인간 해방인데 거기서 석가모니가 인간 해방을 부르짖으면서 신에 대해서는 해방을 했는데 석가모니가 좀 더 알아보니까 인간 해방된 본인에 대해서는 본인이 해방이 안 되잖아요 그죠? 신은 일단 벗어났어요. 계급도 벗어나고 그래서 민중들로부터 인기를 얻었지만 본인은 본인으로부터 해방이 안 되는 거예요. 그 원인을 추적하는 겁니다. 그 원인을 추적해보니까 자기에게는 뭐가 있냐 말이죠. 자기가 계속 욕심이 있는데, 욕심이라는 것이 방향성을 띠고 있습니다. 인간의 욕심이라고 하는 것은 계속 ‘나’로 하여금 ‘나’이고자 하는 이것으로 인하여 욕심을 걷어내고 비워내고 아무리 노력해도 그 비워낸 욕심없는 ‘나’가 또 욕심을 생산하는 체제가 되니 나중에 보면 결국 이게 ‘나’이고자 하는 ‘나’자체를 없애버려요. ‘무아사상’.
7 그래서 인도의 불교가 중국에 넘어가죠. 중국에서는 이것이 ‘나’자체를 없애버리는, ‘무아’라고 하지요, 그러한 참선, 선불교, 대승불교로 발전을 합니다. 그리고 나 자신을 없앰으로서 모든 진리를 종결시킬려고, 해답을 지울려고 하죠. 그것이 조계종으로 넘어오죠. 어쨌든 간에 인간이 하나님과 원수됨이라는 것은 그냥 소극적으로 하나님 나한테 간섭하지 마소 이렇게 나오는 정도가 아니라 이제는 신을 공격하는 것을 통해서 인간됨이 되는 거죠.
8 그래서 여기서 현대철학의 하나의 공식을 적어보면 ‘신(성)을 공격하는 것 자체가 인간성이다’ 이렇게 보는 거죠. 그러니까 인간이 있고 신이 있고 해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신이라는 존재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고. 이게 인간다운 게 아니고 신(성)을 공격하는 것 자체가 인간성이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는 그 모습이라는 말이죠. 계속해서 뭔가 신적인 것을 빼내야 되요. 찌꺼기니까. 인간 속에 남아있는 신적인 것을 빼내버리는. 빼내버리면 남는 건 뭐가 있을까요. 그만그만한 인간들의 집합, 인간들의 사회 공동체로 남죠. 신은 날아가버리고 그만그만한 인간들끼리 뭉치는 거예요. 미래에 대한 진보도 인간들끼리 꺼집어 내고 월드컵에서 인간들끼리만 즐거우면 그만이고. 이런 것이 오늘날 우리가 알 필요가 있느냐 이렇게 생각도 하겠지만.
9 ‘신(성)을 공격하는 것 자체가 인간성이다’는 이 말은 뭐를 거부하느냐 하면 예를 들어 지금은 나폴레옹이 영웅이다 그러면 기분 나쁜 거예요. 옛날에는 좋아했어요. 이제는 기분 나쁜 거예요. 나도 나폴레옹된다 이래거든요. 누구 하나 모델을 못 잡아요. 지금은 모델 잡지 말고 신을 공격하는 그 인간성 자체를 인간의 됨됨이로 보자는 말이죠. 여기 하진씨가 녹취를 한 내용(서양철학사 1강 참조)을 보면 뭐냐 하면은 ‘존재’는 날아가 버리고 뭐가 중요하냐 하면 ‘본성’이 중요하죠.
10 ‘인간성’이라는 ‘본성’이 중요하고 이 ‘본성’이 현대철학에서는 뭐로 됐느냐 하면 항상 ‘사건화’되요. ‘사건화’. ‘사건화’된다고요. 특정 인간을 본받아라 라는 것이 없어요. 그런 소리하면 안돼요. 요즘 인간 위에 인간 없고 인간 밑에 인간 없다고 하기 때문에 그런 소리하면 안돼요. 특정 인간을 본받으라는 게 아니라 지금 나에게 주어지는 모든 ‘사건’들은 나로 하여금 내 자체가 참된 인간이다 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사건’들로, 그 다음에 뭐라 그러냐 하면 ‘의미’를 갖다 붙이면 그것이 바로 진리다 이말입니다. 알랭 바디우의 철학에 나오죠 이게. 다시 말씀드리면 지금 제가 왜 이렇게 제가 왜 이걸 하는냐.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11 모더니즘에서는, 모더니즘이라고 하는 것은 근대의 질서체제를 부수는 게 모더니즘이예요. 잘 나오지요? 김석수 교수의 강의에서 말이죠. 근대를 부수는 게 모더니즘이예요. 모더니즘에서는 음악이나 미술이나 낭만주의가 나온다고요. 이 낭만주의가 뭐냐하면은 이것은 어떤 내 외곽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의미’라고 하는 것은 내가 여기 살아있다고 하는 자체가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더니즘은 세상의 중심은 내가 중심이예요. 내 자체가 중심이예요. 그런데 포스트모더니즘은 뭐가 중심입니까. 나만 중심이 아니고 너도 중심이라고 하는 다원주의가 나올 때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교수의 말에 의하면 포스트모더니즘이 한 갈래가 아니라 여러 갈래라고 해놨잖아요.
12 그게 바로 뭐냐 하면 극단적으로, 인간주의를 극단주의로 가보는 겁니다. 가보면 남는 게 뭐냐. 도대체 ‘의미’가 뭐냐 바로 이게 남아요. 들뢰즈는 결국 여기에 초점을 맞춥니다. ‘의미’란 뭐냐. 그런데 성경에서는 그 모든 ‘의미’를 하나님의 언약에 담아서 우리에게 ‘의미’는 이게 네가 존재하는 ‘의미’ 라고 우리에게 안겨주죠. 잘 들어보세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의미’를 언약을 통해서, 약속을 통해서 주었는데 중세, 근대철학에서는 뭐냐 하면은 언약을 통해서 ‘의미’가 온다라고 이야기한 게 아니고 내가, 나라는 존재가 하나님과 원수지간이 아니고 좋게 지내면 되잖아라고 나왔다고요.
13 그 차이를 알아야 되요. 그 차이가 어려워요. 뭐냐 하면은 아 주님께서 약속을 구원을 받은 자로서 나에게 의미를 줬구나, 그렇다면 나는 구원받은 사람이네 라고 나온 것이 근대 신앙관이예요. 그런데 그것이 모더니즘에 의해서 넘어오면 어떻게 된다고요? 그게 존재가 아니고 뭐가 된다고요? ‘본성’, ‘인간성’이고 ‘신’은 신이 아니고 ‘신성’으로 변해요. ‘신’은 ‘신성’으로 변하고 ‘인간’은 ‘인간성’으로 변한다고. 이제 ‘존재’가 아니고 ‘본성’이 되면서 이제 여기서는 인간 세계자체가 질서 자체를 거부해버려요.
14 교회란 질서도 거부해버리고 국가란 질서도 거부해버리고 낭만주의로, Romanticism으로 나간다고요. 이 Romanticism이 점점 더 나가면 하이데거에 들어오면 드디어 ‘본성’이라는 것은 그냥 가만 있는 것이 아니고 ‘나는 인간성이 있다’ 해도 안 믿어줘요. 남이 나에게 인간성이 있다고 이야기해주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고 모더니즘 뒷 부분에 가면 카프카 같은 경우 실존주의가 나옵니다. 실존주의가 뭐냐 하면은 남이 나에게 ‘이근호 당신 인간답네’ 그 말해도 나는 듣기 싫어. 중요한 것은 남이 나보고 훌륭하다, 착하다 얘기해도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밥먹고 오줌싸고 하는 그리고 이 강의하고 하는 모든 것이 이게 지금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이게 중요하다 이말입니다. 그 차이를 이해하셨어요?
15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이말이죠. 사람을 칭찬해도요 한두 번 듣기 좋지 자꾸 하면 칭찬 이것도 싫어요.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나에게. 한국이 프랑스와 비겼다. 한국이 토고를 이겼다. 대한민국 사람은 당신 태극전사들에게 기대를 건다. 하지만 그 태극전사 11명 가운데 모더니즘적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렇게 얘기할 겁니다. 나는 누구누굴 이겨서 ‘의미’있는 게 아니고 축구하는 자체가 나에게 재미가 있고 나에게 ‘의미’가 된다 이말입니다. 뭔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남들이 나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그런 것은 이제 귀찮아. 그건 철이 없을 때는 그렇게 되지만 철이 나면 이제는 칭찬해도 그만 칭찬 안해도 그만 이제 다 싫어 다 싫어.
16 순간 순간 공차는 것, 그냥 공차는 것 자체가 재미가 되는 거예요. 이게 뭐냐.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요. 그래 되면 박지성이가 ‘Strange goal’, ‘이상한 골’을 한 골 넣었잖아요. 그걸 남들은 ‘멍청한 골’이라고 그랬어요. 앙리라는 사람은 ‘멍청한 골’을 넣었다 그랬어요. 외신에서는 ‘Strange goal’, ‘이상한 골’이라 그랬어요. 이상하든 어떻든 간에 박지성 자기한테는, 자기한테는 괜찮은 골로 이게 ‘의미’가 되며 남들이 뭐라든 자기한테는 기쁨이 되잖아요. 그러면 그것은 자기에게서 일어난 사건, 자기가 공을 차서 넣었다는 모든 사건을 자기한테 뭐가 됩니까. 자기한테 의미를 주죠. 자기한테 의미를 주면 더 이상 ‘신’도 ‘의미’를 안 그 순간에 그 ‘신’도 필요없고 심지어 뭐도 필요없냐 하면 주위에 인간들도 필요없고.
17 남는 것은 나라는 것에서 나에게 계속 의미가 되는 어떤 사건이 벌어지고 나는 나로서 계속 남는다는 이 사실이 중요하다 이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이야기를 여러분들 제가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니까 성경 이야기하고 상관없다고 생각하지만 상관없는 게 아니예요. 왜 상관없는 게 아니냐 하면 지금 하나님의 원수라 할 때 하나님께서 ‘너는 원수야’ 할 때 ‘맞습니다 원수입니다’ 이래 가지고는 안돼요. 안 돼고 이런 것을 제가 방금 길게 설명한 것을 다 알 때 ‘하나님의 원수됨’이라는 것이 궁극적으로 바로 절대적인 자아의 절대적 존재의 의미, 여기에까지 도달하는 이것을 겨냥해서 애초부터 하나님께서는 ‘너희들은 나의 원수’라고 이렇게 규정짓는단 말이죠.
18 이렇게 원수로 규정되고 나면 그 다음에 뭐냐하면 원수가 아닌 인물, 하나님으로부터 유일하게 원수가 아닌 분, 예수님은 어떤 분이냐라는 것이 등장하죠. 예수님은 자신의 존재, 자신의 본성 이게 아니라 예수님은 자기에게 주어지는 그 사건에서 ‘의미’를 찾는 분이예요. 똑같아요. 광야에서 예수님이 누굴 만났냐 하면 성령께서 일부러 주선을 해가지고 예수님이 광야에서 마귀를 만나죠. 마귀를 만날 때 마귀는 기존의 인간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존재의 ‘의미’를 가지고 설명을 하죠. 당신이 진짜 메시야라면 돌이 떡 되게 하세요 라고 했잖아요. 그럴 때 예수님께서는 뭐냐 하면은 그걸 거부해요.
19 거부를 하는데 왜 그러냐 하면 예수님은 지금 내가 금식기도하고 떡을 안 먹는 가운데 기도한다는 이 자체가 지금 하나님께서 나한테 지시한 ‘사건’이란 말이죠. 이건 내가 결정한 ‘사건’이 아니고, 그런데 마귀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네가 원한다면 돌이 떡 될 수 있다라고 왜 네가 갖고 있는 너의 자발적인 의지와 너의 이성과 모든 것을 활용을 해서 너의 유리한대로 너의 독립적인 결정권을 가지고 메시아답게 굴어 봐라는 얘기예요. 배고프잖아. 그러면 돌이 떡되게 할 수 있는 능력도 있고 자격도 있는 것 아니까 배고프니까 돌이 떡되게 해라. 그래서 너는 너답게 메시아답게 행동을 하라 이말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뭐라 했느냐 하면 지금 내가 나답게 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고 사람이라는 것은 떡으로 사는 게 아니라 말씀으로 산다고 했거든요.
20 말씀으로 산다고 하니까 그 다음에 마귀가 그걸 그대로 이어받아가지고 말씀에 의하면, 시편 92편인가에 보게 되면 말씀에 의하면 메시아가 높은데서 떨어질 때 천사가 와서 받잖아요. 그러니 마귀가 또 시도한 거예요. 네가 말씀대로 산다고 하니까 그럼 말씀대로 해보자. 그 말씀이 너로 하여금 너답게 될 수 있는 어떤 요건을 만든다는 거예요. 나로 하여금 나답게 되는 것. 너로 하여금, 예수님으로 하여금 예수님답게 되는 것. 그렇게 시도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또 그걸 뭐라고 보느냐 하면은 그런 말씀에 대한 적용조차도 이건 내 소관이 아니고 하나님 소관이라는 겁니다. 말씀이 말씀다운 것을 내 쪽에서 시험할 수 있는 권한은 나한테 없다 이말이예요. 하나님을 시험하지 마라 이말이예요. 하나님의 말씀은 시험을 거쳐서 그 다음에 확정되는 게 아니다 이 말입니다.
21 말씀은 그냥 말씀으로 주어지는 그 자체고 그 자체로 이 땅에 이루어질 문제지 내가 말씀을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 저 쪽 바깥에 있는 말씀을 전환시켜서 내 말씀으로 바꿀 수 있는 그래 볼 필요가 없다 이말입니다. 세 번째가 마귀가 ‘모든 걸 다 줄게’ 할 때 예수님은 ‘떠나라, 다만 하나님만 경배해야 된다’ 하고 마귀를 보낼 때 그 때 누가 오느냐 하면은 지켜보았다는 듯이 박수치면서 누가 나타나요. 마태복음에 보면 천사들이 다 지켜보고 마귀가 떠나고 난 뒤에 천사들이 와서 힘을 돋아주면서 먹을 걸 갖다 주잖아요.
22 이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생각하는 진짜 하나님과 원수 안 된 사람의 특징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과 언약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자신이 존재한다는 이것이 바로 진짜 하나님의 원수가 아닌 진짜 하나님의 메시아의 모습이죠. 그렇다면 여기 42쪽에서 ‘하나님과 원수의 싸움’이라 이렇게 하는 것은 결국 누구와 누구의 싸움이냐 하면 전인류와 그리고 한 분 예수님과의 싸움이죠. 서로 원수지간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여러분에게 당부합니다만은 원수 안 될래가 아니라 이미 원수예요. 여기 그 점을 기정사실로 그냥 받아들이면 되요. 나 하나님 원수 안 될래, 이젠 바르게 살래 자꾸 이래 나오시면 곤란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 빼고 원수라 그러면 원수인 줄 알면 되요. 그리고 앞으로는 이래서 원수였구나라는 것을 들추어짐을 당하면 되는 거예요.
23 그래야 옳은 겁니다. 자꾸 원수 아닌 걸로 여기면 안 됩니다. 전인류와 예수님 사이사 원수인데 이걸 전에는 뭐라고 했느냐 하면 예수님의 이름과 우리 아담의 이름, 아담에 속한 전인류와 예수님이 갖고 있는 하나님의 이름과의 이름과 이름 싸움으로 이제 전쟁이 일어난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 다음에 이 전쟁은 서로가 서로를 치게 되어있어요. 치게 되어있어서 여기 42쪽 중간에 나옵니다. 이 말은 “누구나 적이 있게 마련이며 그리고 그 적들로부터 침범을 당하는 경우와 상대방을 반드시 쳐야 하는 운명을 필히 떠안게 되었다는 말이다.”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거죠. 43쪽 봅시다. “바로 이 산 자와 선악 지식을 고수하는 자 간의 전투가 인간 세상 안에서 개시되었다. 참된 산 자의 모습은 창세기 6장 에녹에서 드러났다.” 여기 약간 어려운 게 있어요.
24 창세기 6장 에녹에서 드러났는데 “그는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 곁으로 간 사람이다. 거기에 비해 나머지 사람은 다 죽었다. 그렇다면 에녹에게 생명을 부여하고 동행하신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이 대목인데. 노아가 누구 후손입니까. 에녹의 후손이예요. 당연한 이야기인데. 노아 이름 뜻이 뭐지요? ‘땅을 안식한다’는 뜻의 이름을 지녔는데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나오는 노아도 하나님과 동행했지요. 동행했는데 그러면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나라로 갔는데 같이 하나님과 동행한 노아는 분명히 죽었어요.
25 분명히 죽었다고요. 어디서 죽었어요. 이 땅에서 죽었지요. 그러면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은 생명이 있습니까, 죽음이 있습니까. 생명이 있죠. 에녹같은 경우에는 생명이 본인 소유가 되어가지고 그냥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나라로 갔지만 이 노아가 품고 있는 생명은 노아 본인의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노아가 지닌 이 땅, 노아 이름이 ‘안식’이니까 이 노아가 지니고 있는 생명의 관계가 땅까지, 땅에 박히면서 땅이 새로운 화목의 상태에 돌입되는 그런 땅으로 전환되는 계기를 마련합니다. 그러니까 ‘아, 에녹은 좋겠다. 죽지 않고’ 이러지 마시란 말입니다. 누가 좋고 누가 나쁘다는 게 아니라 개인적으로 에녹이 신나겠지요.
26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갔으니 좋겠지만 다만 에녹은 본인만 산다는 역할을 했을 뿐이고 노아는 노아가 갖고 있는 본인의 생명은 본인의 생명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땅을 안식케 하는 노아의 이름이 ‘안식’이니까 땅에 어떤 희망을 주고 땅의 안식을 제공하는 그런 역할극을 하라고 이 땅에서 죽으면서, 노아는 죽고 땅은 안식을 얻는 그런 혜택을 입는다 이말이죠. 이것을 아주 함축적으로 이야기하면 주님의 화목이 원수라는 그런 세력 안에 점점 더 깊이 지금 침투하는 과정이 지금 우리가 공부하는 ‘여호와 전쟁’과정 전체입니다. 또 성경 전체의 줄거리고요. 하나님의 그 화목이 이미 원수가 된 이 세상에 점차 점차 파고 들어가는 거예요. 파고 들어가서 기어이 이 땅 자체를 구원해내고 새로운 걸로 완전히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드는 그런 작업을 계속해서 쉬지 않고 하시는 거예요.
27 오늘날 21세기에 그 침투조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바로 저와 여러분 같은 성도입니다. 성도는 ‘나는 구원받았다, 신난다’ 이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이 어두운 세상에 빛과 소금으로써 계속 침투조의 임무를 띠고 계속 파고 들어가는 겁니다. 이 사명을 우리가 만약 놓쳐버리면 우리는 우리 존재의 의미를 외부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내 자체에서 찾기 때문에 이제 포스트모더니즘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아까 포스트모더니즘을 그렇게 이야기한 거예요. ‘왜?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데 왜? 하나님 당신이 왜?’ 대번 나온다고요. 대번 다온다고. ‘예수 당신이 왜? 내 하고 싶은 대로 하는데 예수 당신이 왜?’ 이렇게 나온다고. ‘세상이 더럽다는 거 나도 안다. 세상 더럽다. 교회가 다가 아니다는 거 나도 안다. 나도 교회 안 나간다.’
28 전부 다 가족이고 뭐고 다 귀찮아. 단지 자기 몸만 챙기면 그만이야. 이게 사명감이 떨어지면 이렇게 돼요. 소위 십자가를 안다는 사람 가운데 또는 목회자가 십자가를 안다고 이야기하면서도 이런 시험에 들 가능성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래서 목사님들에게 자꾸 철학을 이야기하는 것은 본인은 복음이라고 하는데 뜯어보면 철학이라는 거죠. 무슨 철학? 자기 의미만 챙기면 남한테 봉사한다든지 남에 대한 역할 이런 게 전혀 없고 ‘나 구원받았다, 십자가로. 그래서 내 마음대로 산다.’ 이거는 포스트모더니즘을 공부해버리면 이게 오늘날 현대 포스트모더니트예요.
29 자기 존재의 의미를 위해서 모든 게, 예수고 하나님이고 자기 존재의 의미, 존재의 보람을 위해서 있다고 보는 거예요. 이것이 그 사람의 특질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세계 분위기가 그렇게 되어있어요, 세계 분위기가. 다 그래 간다고. 그렇게 된 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건 딴 이야기이기에 여기서 하지 않겠습니다.
30 자 ‘노아의 전쟁’은 노아 이전과 노아 이후를 비교해 봐야 되는 데 노아 이전에는 뭐가 없느냐 하면 심판이 없어요. 전 대규모적인 전체에 대한 심판이 없습니다. 전 인류에 대한 심판이 노아 이전에는 없어요. 그럼 심판이 없다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악이 마음껏 배양되도록 방치하는 기간이었습니다. 세상의 딸들과 하나님의 아들들과 혼인을 하고 뭐 니 마음대로 살아봐라. 마음껏 마음껏 악이 배양하고 번성하도록 방치하는 기간이 노아 이전의 기간입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앞으로 올 모든 하나님의 전쟁에 있어서 반드시 배양된 죄가 없으면 심판이 없다는 것을 여기서 미리 이야기하는 거죠.
31 배양된 죄가 없으면. 죄가 배양되지 않으면 심판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는 거예요. 죄는 계속해서 퍼져나가야 되요. 마치 곰팡이처럼. 여름에 흰빵에 곰팡이가 펴서 자고 아침에 일어나면 확 펴져있듯이 온 천지에 죄가 번성하고 충만해야 되요. 죄가 충만하면 할수록 점점 더 심판의 정당성, 당위성은 갈수록 강렬해지겠지요. 따라서 죄가 번성할 때 여기서 노아 같은 경우에는, 그러면 왜 노아는 그 죄의 번성에 동참하지 않았는가.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했어요. 하나님과 동행했다.
32 그러니까 전에 에녹 같은 경우에는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이 그냥 어떤 내용 없이 죽지 않고 그냥 하늘나라로 갔다 이렇게 봤지만 여기 노아의 때에 오면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그냥 이 지상에서 수직적으로 하늘나라로 갔다 이렇게 보는 게 아니고 이 동행이라는 것을 통해서 수평적인 이 세상에서 동행하는 사람과 하나님의 동행이 없는 사람과 어떤 차이가 나느냐를 가지고 벌써 심판 이전에 일종의 심판기준이 분류되는 그런 흔적을 남깁니다. 죄가 번성한 가운데서. 첫 번째는 죄가 번성하고 두 번째는 뭐냐. 번성하는 가운데 하나님과의 동행을 통해서 의인을 남기는, 의인을 남겨서 이미 심판 이전에 이미 심판이 개시된 상태에서 심판이, 나중에 외재적인 심판이 벌어지는 겁니다.
33 이 죄는 번성해야 되고 거기에서 나중에 심판으로부터 면제될 사람은 따로 그 안에서 분명히 살리셔서 그 안에 잠재돼 있어야 된다. 이 두 가지의 다른 노선이 이미 심판 이전에 진행되는데 이것이 다음에 오는 심판들, 모든 심판들의 하나의 기준점이 되는 겁니다. 예를 들면 하박국 같은 경우에 유다 나라의 심판을 선포하지요. 유다 나라의 심판을 선포하는데 그 심판의 날이 3년 후면 오게 되어있는데 이 하박국 같은 경우에 심판을 하는 주체자가 누구냐 하면 바로 바벨론이예요. 바벨론이 쳐들어와서 유다 나라를 멸망시킨단 말이죠.
34 그 때 그 하박국에 무슨 이야기가 나옵니까. 누가 살아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박국에 보면은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이말이죠. 바벨론이 3년 내에 이 나라에 쳐들어와서 멸망시킨다는 것을, 3년 내에 부흥이라는 말이 3년 내에 모든 하나님의 언약이 드디어 실체화가 되어 다 드러난다 이말이죠. 진짜 하박국 선지자의 말이 맞구나. 정말 심판받아야 마땅하구나. 이 모든 게 다 드러나는 거예요. 하박국 같은 경우에 전적으로 뭘 의지하면 안 되냐 하면 외양간에 소가 있느냐 없느냐. 그리고 포도나무에 소출이 있느냐 없느냐. 무화과나무에 잎이 있느냐 없느냐. 그런데 관심두면 안 되는 거예요. 이건 큰일 나는 거예요.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그리고 포도나무에 소출이 없다 할지라도,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다 할지라도 중요한 것은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여호와의 이름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35 하박국 정도에 오게 되면 노아 같은 경우에는 에녹과 달라서 땅의 어떤 안식을 줬는데 하박국에 오면 땅의 안식조차도 이제는 거기에서 탈출을 시도해야 되요. 땅이 더러워졌으니까. 노아 이후에는 땅도 더러워졌으니까 탈출시켜야 되요. 또 탈출시킬 때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리라’는 그러한 공식이 또 적용되는 겁니다. 그러한 원형들을 우리는 ‘노아의 전쟁’에서 찾아낼 수 있어야 되요. 설교자들이 왜 이걸 찾아내야 되냐 하면 이걸 찾아내야 6장, 7장, 8장, 9장을 설교하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까지 설교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누가 설교를 한다 하면 들을 때 뭘 듣느냐 하면 그 사람이 그 본문을 가지고 십자가를 얼마나 잘 뽑아내는가 그걸 주시합니다. 십자가가 과연 말이 되도록 뽑아내느냐. 창세기를, 구약이면 구약, 신약이면 신약 어떻게 뽑아내는가를 제가 유심하게 관찰합니다. 감시하는 건 아니고. 왜요. 나도 배워야 하니까.
36 이 본문에서 십자가가 이렇게도 나올 수 있구나. 만약 십자가가 여기 있다면 구약성경 창세기 7장, 8장 노아 그 때라면 나는 전에 박사교회 있을 때는 창세기 7장, 8장에서 이런 경로를 통해서 뽑아냈는데 어떤 분은 7장, 8장을 가지고 십자가를 이야기하더라. 이 경로 말고 혹시 다른 경로가 있을 수가 있거든요? 결국 십자가에 도달하지만 이 경로 말고. 과연 중요한 것은 이 경로가 그 다음에 진행되는 창세기 9장, 10장, 12장, 출애굽기 이런 것과 모순되지 않게, 이게 모순되지 않는 상태에서 십자가로 돌아가느냐, 아니면 뒤에 나오는 출애굽기와 전혀 다른 상태에서 십자가를 뽑아내느냐를 배우는 입장에서 관찰해보는 거예요. 관찰해 보는 이유가 뭐냐 하면 지금 창세기 8장만 가지고 설교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나중에 출애굽기 12장도 해야 될 것 아닙니까.
37 그럴 때 창세기 8장에서 하는 십자가와 출애굽기 12장에서 하는 십자가가 동일한 십자가여야 된단 말이죠. 경로가 다르다 할지라도 한 경로 내에서는 같은 십자가가 나와야 된다 이말 입니다. 경로가 다르다 할지라도 자기가 정해놓은 이 경로 안에서는 같은 십자가가 나와야 말이 맞잖아요. 제 말 맞지요? 설교자가 늘 같은 설교자가 이야기하기 때문에. 그런데 그 설교자가 설교하면서 창세기 8장에서는 십자가를 이렇게 해놓고는 출애굽기 12장에서는 딴 길로 가버리면 그러면 저 사람은 십자가를 뽑아내는 것이 너무 억지다, 너무 무리수를 둔다, 뭔가 앞뒤가 안 맞는다. 언 듯 끝에 들으면 십자가를 아는 사람 같은데 그 앞에 있는 본문하고 안 맞으니까 저 사람은 그러면 또 다른 본문 가지고는 엉뚱한 소리를 할 가능성이 있다라는 의심이 들 수가 있어요.
38 그러한 설교에 대한 평은 내 자신의 설교에 대한 동일한 평일 수가 있습니다. 과연 같은 노선을 견지했는가라는. 그것은 바로 성경 전체를 제대로 십자가 안에서 다 담아내는 그러한 복음 정신 안에서 설교를 할 수 있느냐 하는 그걸 의미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공부는 바로 이런 점에서 검토가 되어야겠지요. ‘노아의 전쟁’에서 ‘무지개’가 십자가까지 나오기 이전에 ‘무지개’까지 나와야 되요. ‘무지개’가 나오고 ‘무지개’에서 이게 나와야 되요.
39 노아의 전쟁에서 마지막에 ‘무지개’로 끝났다는 말은 ‘무지개’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 오느냐 하면 이 땅에 비가 내렸다. 비가 왔다. 그 비는 어떤 비냐 하면 심판의 비다. 그 비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무지개언약’을 통해서 죽음의 비 속에서 생명의 무지개로 이렇게 탈바꿈시키는 그런 원칙으로 땅을 다스리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게 ‘무지개언약’입니다. 그래서 ‘노아의 전쟁’에서 ‘무지개’까지 이어지는 이것이 일관성을 가지고 어떤 모순점이 없이 쭉 끌어와야 되겠죠. 이것은 바로 뭐냐 하면 노아 방주가 그 역할을 합니다.
40 노아 방주에서 그 역할을 하는 데 노아 방주 안에 들어있는 것이, 노아 방주 안에 언약물이 들어가고 외부에는 방주가 있죠? 그 안에 구원받은 노아의 8식구가 들어있습니다. 그렇다면 방주와 언약물의 관계를 통해서 제 3자인 노아의 8식구가 구원받는 것, 이것이 땅이 저주받아서 이 땅을 대체할 땅이죠. 그렇다면 이 방주 안에 이 방주라는 것과 언약물 안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바로 용서받은 땅 또는 새 땅, 언약의 땅이 등장하죠. 언약의 땅의 이미지가 방주와 언약물 속에서 이것이 수립이 돼야 됩니다. 이것이 어디까지 이어지느냐 하면 레위기까지 이어집니다. 레위기에 보면 뭐냐 하면 거룩한 동물과 거룩하지 않은 동물로 나누어집니다. 그렇지요?
41 정결은 뭐냐 하면 제사에 쓰여지는 것은 정결한 거예요. 뭐가 정결하지 않느냐. 제사에 가입될 수 없는 것은 불결한 것입니다. 이것도 우리 인간에서 나온 게 아닙니다. 우리 노아 식구는 따지지 마세요. 제 3자이기 때문에. 다시 한 번 정리해봅시다. 이것은 정결하다, 이것은 정결하지 않다라는 것은 노아 8식구가 머리 맞대서 회의해서 결정된 사항이 아니다 이말입니다. 이게 정결하다면 정결한 줄 알면 되요. 이건 불결하다 그러면 불결한 줄 알면 됩니다. 이걸 먹으면 내가 불결해지고 그런 게 아니예요. 이미 노아 8식구는요. 빠져있어요. 빠지고. 여기서 거룩하냐 거룩하지 않느냐 하는 것은 방주와 언약물 사이에 자기들끼리 해결할 문제란 말이죠. 다만 여기서 언약이 완성되면 그 혜택을 8식구가 누리는 그런 방식이죠. 이걸 모르면 모세언약의 제사법을 이해 못해요.
42 제사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정결한 것이고 제사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부정한 겁니다.부정한 건데 왜 그러냐 하면은 나중에요. 지금 8식구지만 나중에 모세언약에서는 이스라엘이 되요. 이 정결한 언약물이 이스라엘 백성 속에 들어가 버리면 이스라엘 백성이 먹을 수 있는 것이 정결한 것이 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을 수 없는 것은 부정한 게 되요. 이것은 곧 무엇을 뜻하는냐 하면 이제는 제물 문제가 아니라 이스라엘 자체가 언약의 제물이 되어야 된다는 겁니다. 이걸 [교회를 넘어서]라는 책에서는 이렇게 되어있어요. ‘제물의 인간화’.
43 ‘제물의 인간화’. 인격화라고 하면 좀 곤란하고. 제물이 인간으로 됐다는 게 아니고 ‘인간이 제물화 됐다’ 이말 입니다. 그 때부터 이스라엘은 뭐냐 하면 ‘거룩한 백성’,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출애굽기에서 이걸 ‘언약백성’이라 그래요. ‘언약백성’에서는 항상 ‘백성’이 중요한 게 아니고 늘 그들 안에서 ‘언약’이 튀어나와야 된다는 거죠. ‘언약’. 하나님 내리신 ‘언약’이 튀어나와야 되요. 노아의 8식구는, 노아에게 노아의 8식구는 의미없어요. 노아 8식구를 통해서 ‘언약’이 튀어나와야 되요. 외부로 튀어나와야 되요. 그 튀어나온 ‘언약’이 땅을, 노아가 차지할, 노아의 후손들이 차지할 그 땅을 지배하는 거예요. 그 땅을 지배하는 새로운 질서로써 제공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뭐냐. ‘네가 어려서부터 악하기 때문에 다시는 물로서 심판하지 않겠다’. 이게 참 어려워요.
44 보세요. ‘다시는 물로서 심판하지 않겠다’. ‘무지개 언약’의 특징은 ‘무지개’는 물과 관계되어있어요. 비가 오고 난 뒤에. 물로서는 심판하지 않겠다는 게 ‘무지개 언약’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뭘 보여주냐 하면 이미 너희들은 내가 사람취급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단지 언약의 대상, 물로서는 심판하지 않겠다는 그런 입장에서만 다루어지는 존재로 보겠다 이말입니다. 머리 아프죠. 생각 좀 해보세요. 어려운 문젠데. 사람을 볼 때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천성은’이라고 하면 ‘당신 이름이 천성은 이든 누구든 난 관심없고 다시는 주먹으로 안 때릴 사람으로 보겠다’ 이 말이거든요.
45 그러면 천성은 목사님이 ‘저 사람이 자기 생각만 하고 앉았네. 내 생각은 안 하고 나를 뭘로 보나’. ‘나는 너를 때릴 수 있지만 내가 스스로에게 내린 약속이 뭐냐. 너를 주먹으로는 때리지 않겠다’라고 하고는 고무장갑을 주는 거예요. 그러면 ‘아니 목사님 나한테 고무장갑을 왜 줍니까’. ‘다시는 주먹으로 때리지 않겠다’. 이 말은 너는 주먹으로 맞아도 싼 거지만 내가 나한테 맹세해서 너를 때리지 않겠다는 겁니다. 이것은 너는 어떤 경우라도 내 언약에서 벗어나지 않는단다. 절대로 못 벗어난다. 이미 죽은 존재이기 때문에. 어떤 경우라도 다음에 오는 차기 언약, 언약의 증표를 드러내는 도구로 존재할 뿐이지 너의 독자적인 어떤 주장이라든지 어떤 주의라든지 이것은 이미 나한테는 물 건너간 거예요.
46 물 건너간 건데 그걸 다른 말로 하면 ‘무지개’를 건너간 거다. ‘무지개’를 건너간 거예요. 이미 그런 이야기는 나한테 하지 말라는 거죠. 그 이유가 뭐냐 하면요. 좀 어려운데. 우리 인간들도 좀 생각해야 되지 않습니까. 우리 처지도 이해해줘야 되지 않습니까. 이렇게 되는 그것은 이미 노아 이전에 인간들의 악이 무엇인지 죄가 이미 번성했잖아요. 번성할 때 다 알아본 거예요. 악이 온 땅에 번성할 때 벌써 다 알아본 거예요. 인간에서 나올 수 있는 온갖 악들은 벌써 다 나왔어요. 다 나왔는데 그것을 물로서 홍수로서 심판해버렸잖아요. 그렇다면 새삼스럽게 인간에게 나올 게 없어요. 그래서 너희들은 태어날 때부터 뭐다? 생각하는 것이 악하다. 태어날 때부터 악한데 뭘 인간에게 기대를 걸어요.
47 잘 해볼께요. 전에는 물 심판했는데 우리가 몰라서 그랬는데 이제부터는 개과천선해서 잘해 볼께요. 이 딴 소리는 이제 할 필요없는 거예요. 이미 어려서부터 악하기 때문에 지금 주님께서 지붕 무너지게 해서 우릴 죽여도 우린 할 말이 없어요. 우리는 어려서부터 악하기 때문에 이미 물로써, 홍수로써 너희를 죽여버렸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무지개 언약’입니다. 이제 세상이 앞으로 어떻게 되든 간에 ‘무지개 언약’이 제 값을 하는 그런 도구로서만 존재하는 그러한 세상이 드디어 전개되는 겁니다. 그게 뭐냐. 저는 멍석 까는 것에 비유합니다. 왜 그런 멍석을 까느냐.
48 제가 방금 멍석 깐다고 했죠. 씨름판에서 멍석을 깔지 않으면 씨름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멍석을 깔아야 씨름이 이루어집니다. 멍석을 까는데 이 멍석에는 뭐가 들어있다고 있습니까. 인간은 어려서부터 악한데, 악한데 왜 살려두느냐.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을 전개하기 위해서 이걸 ‘무지개 언약’으로 악한 것을 덮어버려요. 그래서 이 멍석은 결국 뭐냐 하면 은혜의 멍석이죠. 이 은혜의 멍석은 인간은 이미 죽은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의 잘잘못과 선인과 악인과 상관없이 주어지는 멍석이예요. 따라서 이 은혜의 멍석 안에 뭐가 들어있느냐 하면 햇빛을 주시고 선인과 악인에 관계없이 비를 내리시고 그리고 욥기에 보면 황무지에 뭐가 내리고? 비가 내리고.
49 마태복음 6장에 보면 악인과 선인에게 뭘 주시고? 호흡을 주시고 비를 내리시고 햇빛주시는 자비로운 하나님. 이 자비는 우리가 자비 맞습니다 이렇게 평가하는 것이 아니고 상관없어요. 그냥 자비라고 하면 자비인 줄 알아야 되요. 그냥 주시는 거예요. 바빙크는 이걸 뭐라 그러냐 하면 ‘일반은총’이라고 합니다. ‘일반은총’이라 하면 문제가 되요. ‘일반은총’이라는 것은 마치 우리가 무슨 은총을 받을 자격이 있는 줄로 생각되는데 그게 아니고 사실은 ‘일반은총’은 말이 안 되고 이것은 그냥 하나님의 ‘노아언약’이예요. 노아언약. ‘노아언약’, ‘무지개 언약’에 의해서 그냥 주시는 거예요. 모든 인간에게 그냥 주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기서 인간에게 묻지 않고 그냥 주었기 때문에 인간의 선악과 상관이 없지요.
50 예를 들어서 선을 행하면 복을 받고 악을 저지르면 벌을 받는다. 이것과 상관없지요? 상관없습니다. 왜냐하면 악한 자라도 죽을 때는 고난이 없고 부자로 잘 살고 악한 자라도 병이 없고 얼마든지 있고 어떤 사람은 열심히 수고했는데 모든 성과는 남이 다 가져가버리고. 우리 인생을 살면서 그런 일 안 많습니까. 우리 주위에 친척들 보면요 일은 열심히 했는데 놈팽이같은 남편이 와서 다 빼앗아가는 그러 경우 많잖아요. 참 많이 있다고요. 하나의 예이지만 병든 시어머니를 며느리가 보살폈어요. 무려 40년 동안 보살폈는데 며느리가 자기 자식 공부 다 포기하면서 시부모 섬기면서 시어머니 명을 따라서 삼촌들, 고모들 공부를 다 시켜놨다고. 그래서 삼촌, 고모들이 똑똑하거든요?
51 시어머니가 죽으면서 유산을 남겼단 말이죠. 유산을 남기니까 이 시어머니가 며느리 정성을 알면 마땅히 우리 상식 같으면 어떻게 해요. ‘얘야 며느리야 네가 고생했으니까 이 땅은 너 해라’ 이렇게 나올 거잖아요. 그런데 인간이라는 것이 어떠냐 하면 실껏 봉양받고서는 ‘너는 맏며느리로서 할 도리 다 했지 뭐. 해놓고는 뭘 바라나?’ 나무라고. 그 막대한 유산을 며느리는 자식들 공부도 못 시켰는데 며느리가 돌봤던 시동생, 시누이들에게 시어머니가 죽으면서 유산으로 물려주는 유언을 했을 때 제 3자가 봤을 때 얼마나 억울하게 느껴지겠습니까. 억울하지요. 이게 억울하다하는 것은 뭘 모르느냐 하면 바로 ‘무지개 언약’을 모르기 때문에 억울한 거예요.
52 이제 좀 이해 되십니까. 아 무지 억울하다. 이게 ‘무지개 언약’을 모르기 때문에 억울한 거예요. 돈이 그 쪽에 간다 할지라도 중요한 것은 자기에게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믿음이 있거든 돈이 아니라 뭐라도 다 빼앗겨도 그 사람은 손해 안 난겁니다. 축복받은 거예요. 그 이야기가 여기 나옵니다.
53자 은혜의 멍석 위에서 은혜를 아는 그런 족속인 셈족(야벳은 일단 여기에 넣죠. 나중에 빠지지만)과 자기의 힘에 의해서 은혜의 은혜됨을 차버리고 은혜같은 소리하고 있네, 힘이 있어야 살지라고 힘을 의지하는 새로운 함과 가나안이 있습니다. 어느 쪽이 융성할까요. 이 쪽 함과 가나안이 상당히 힘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이 쪽이 주도를 이루고 셈 이쪽은 나중에 보면 희미해져요. 초창기에는 아브라함이 양이 번성하고, 야곱의 양이 번성하고 요셉이 도와줘가지고 번성하고 이랬지만 결국에는 심판이 있기 전에 뭐가 번성해야 되요. 악이 번성하게 되니까 이 악한 쪽이 번성하게 됩니다.
54 다만 제가 여기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은혜의 멍석, 은혜의 언약은 그냥 말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고 진짜 은혜 받은, 다 같이 악한 사람이지만 은혜를 아는 희안한 족속이 여기서 은혜의 멍석에서 하나의 버섯 움트듯이 나왔다는 것, 이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중요한 사실이예요. 노아의 식구들도 둘로 나눠집니다. 노아가 받은 은혜를 아는 식구, 이것은 셈과 야벳이죠. 노아가 받은 은혜를 모르는 식구, 이것은 함과 가나안이죠. 이 둘 사이에 누가 은혜의 멍석에 합당하냐를 놓고 여기서 전쟁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게 바로 ‘노아의 전쟁’ 이후의 전쟁이죠.
55 ‘노아의 전쟁’이라는 것은 사실 노아가 한 전쟁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신 전쟁이죠. 그런데 노아 이후의 전쟁은 점차 하나님이 개입하면서 그것이 인간이라는 도구를 앞장세워서 인간적인, 실체적인 면으로 바뀌는 것이 노아 이후의 전쟁이죠. 에녹과 노아의 차이점이 뭐라 했습니까. 에녹의 동행은 그냥 죽음을 보지 않고 날아간 동행이라면 노아의 하나님과 동행이라는 것은 이 땅에게 언약의 희망을 심어주고 노아는 여기서 죽고 그냥 희망은 살아남는 식으로 생명을 보여주는 그러한 차이점이 있다면 노아와 노아 이후의 차이점은 뭘까요? 노아는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노아를 살려주는 그런 식이라면 노아 이후에는 은혜를 아는 그런 실질적인 인간 족속이 등장해서 이 족속을 중심으로 은혜냐 비은혜냐가 충돌을 일으키는 식으로 전개되는 그런 스토리가 노아 이후의 스토리가 된다 이말입니다.
56 이러한 제 주장과 이론에 항상 존재하는 것은 뭘까요. 그것은 심판과 죄라는 겁니다. 이것이 항상 전제로, 배경으로 깔려 있습니다. 심판과 죄를 빠뜨리면 잘못하면 철학이 되어버려요. 철학 같으면 뭐냐. 노아는 뭐로 구원을 받았느냐. 노아 이후는 뭐로 구원받았느냐. 맨날 구원만 생각하는 거예요. 심판과 죄가 없으면 내 구원받으면 됐지. 이것은 인간들이 아까 자기 절대적인 의미만 찾는 그런 현재 포스트모더니즘 사고방식이 성경의 해석에 개입되면 이런 잘못된 해석이 나오는 겁니다. 다위처럼 우리도 신앙생활 잘 하면 구원받는다 이런 소리하는 것은 여전히 자기절대성이 남아있기 때문에, 아까 그것 때문에 철학 이야기했지요? 현재는 뭐밖에 없다고요? 나에게 의미가 있음 그러면 끝난 거라고. 하나님이고 교회고 예수고 언약이고 다 귀찮은 거예요. 나만 편하면 최고인 거예요.
57 그런 해석이 나오도록 그런 식으로 십자가가 해석되는가를 설교하시는 분들을 통해서 혹 행여나 이런 식의 십자가 복음이 나올까봐 우려되어서 들여다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잘못된 십자가 복음을 접하고 목사님 오늘 설교 좋았습니다. 이제는 전 제 맘대로 살랍니다라는 것이 나올까봐 그런 식으로 잘못된 십자가로 오해의 소지를 주는 식의 설교가 돼서는 안 된다 이말이죠. 그걸 가로막고 그건 엉터리입니다라고 할 수 있는 다른 노선, 그런 제대로 된 십자가 노선을 섞어넣는 그런 설교냐를 제가 보는 거죠. 그런 설교를 볼 수 있도록 사이트에 좀 남겼으면 좋겠어요.
58 제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은 기껏해야 십자가마을에 나오는 사이트의 박기삼 사장님 설교, 이상봉 목사님 설교, 그 다음에 서경수 목사님 설교, 김달원 목사님 설교, 정판옥 목사님 설교, 이장우 목사님 설교, 글로 남기는 손성식 목사님 글도 보고, 손무성 목사님의 과거에 했던 설교들을 보면서 행여나 십자가 복음을 전하면서 그러니까 개판되자, 이런 포스트모더니즘적인 것과 그런 것이 나올 수밖에 없는 그런 것이 흘러가는 그런 십자가가 될까봐 염려에서 그러는 거예요.
59 왜냐하면 내 자신에게도 내 자신이 스스로 돌아보는, 내 자신의 설교도 동일하게 비판이 되니까. 자 그러면 노아 이후의 전쟁을 다시 한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이 은혜의 멍석이 있는데 은혜의 멍석에서 이제는 하나님이 개입하는 방법이 그냥 노아 때는 ‘방주 만들어라’ 이렇게 개입했지만 이제는 그런 식이 아니라 다른 말로 하면 ‘아브라함아 네 아비 집을 떠나라’, ‘네 아비 집을 떠나라’는 그 이야기나 ‘방주 만들어라’는 이야기나 동일한 언약을 위한 테제예요. 이걸 오늘날 적용시키면 ‘목사님 신앙생활 어떻게 합니까’. 그럼 제가 할 말은 그것밖에 없어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 하세요’. 이 말 밖에 못하는 거예요. ‘아니 먹을 때 어떤 걸 먹고 개고기나 어떤 거는 먹지 말고 이렇게 규정을 정해달라’. 그런 게 없어요.
60 일요일날은 교회나오고 토요일날은 뭐하고 이런 게 없어요. 주일성수라든지 헌금은 몇 퍼센트 해야 된다든지 이런 게 없다 이 말이죠.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노래방에 가서 노래를 부르든지 뭘 하든지 주의 영광을 위해 하라, 복음을 위해 살아라’. 그 이외는 할 말이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일을 할 때 규정을 정해놓고 하는 경우는 ‘옛언약’에 해당하는 것이고 ‘새언약’에서는 뭐든지 ‘사랑’으로 해야 되거든요. 사랑으로. 그러니까 이게 일반 심리, 심리교육학 하고 달라요. 얘가 떠들 때 얼마만큼 때려야 합니까. 때리나 안 때리나 주의 영광을 위해서 하세요. 때리지 말라가 아니예요. 또 때려라는 말도 아닙니다. ‘때리든 안 때리든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 이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차를 몰 때 과속하지 말까요?’. ‘과속을 하든 안하든 관계없이 주의 영광을 위해서 하세요’. 이 말밖에 못하는 겁니다.
61 그 말은 뭐냐, 뭐든지 ‘사랑’이 빠지면, 주에 대한 사랑이 빠지면 그건 뭘 해도 주의 뜻이 아니다는 거죠. 과속을 안 하고 침착하게 차를 몰아도 그건 주님의 사랑이 빠지면 아닌 거예요. 그런데 이 ‘사랑’이란 말이 뭐냐. ‘새언약’에서 나오는 ‘사랑’이기 때문에 아직 옛날 노아 시대에는 ‘사랑’이라는 것이 여기까지 안 됩니다. 사랑이라는 것이 언제 나오는가 하면요 인간의 사랑, 인간의 주님에 대한 사랑이 죄악으로 폭로될 그 때에 등장하는 것이죠. ‘그 사랑은 아니야 이놈아, 그건 아니야, 그건 니가 한 사랑이지 주님이 은사로 준 사랑이 아니야’라는 것이 실제로 죄악된 흔적으로 나와야 그 때 아 주의 사랑은 따로 있구나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 아닙니까. 그 때까지는 기다려야 되는 겁니다. 그 때까지는 기다려야 되요. 성경해석에서. 그것은 신약성경에 나올 겁니다. 신약성경 십자가에서 나올 거고. 여기서는 뭐냐 하면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일을 하실 때 어떤 특정 종족을 분류시켜서 일하신다 이 말입니다.
62 그래서 하나님이 여자의 태가 열리고 안 열리고는 아브라함이 기도해주면 아비멜렉 가문에, 더 쉽게 합시다. 아브라함이 기도해서 애를 낳았다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을 건드렸더니만 애를 못 낫는다는 게 더 중요한 문제라니까요. 소돔과 고모라에 심판이 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과 연관시켜서 심판을 했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생각 안했더라면 거기서 롯이 빠져나올 수 없었습니다. 천사가 롯에게 가질를 안 했습니다. 가더라도 롯이 못 알아봤을 겁니다. 이야기해도 롯이 안 믿었을 겁니다.
63 ‘목사님 현재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갑니까?’, ‘언약대로 돌아갑니다. 언약대로’. ‘그럼 언약을 지킬까요?’, 우리가 안 지켜도 언약이 우리를 사용하고 있는 그런 식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용합니까?’, 진짜 구원받은 사람은 흔히 죄를 짓든지 뭘 하든 간에 항상 주님에 대한 사랑을 잊지 않는 상태에서 움직이고 그렇지 않고 이 세상 불신자들은 뭘 해도 자기에게 의미, 내가 의로울까, 악할까, 나쁜 짓일까, 좋은 짓일까. 맨 날 이거나 따져보면서 나쁜 짓은 안 하고 착한 일만 해야지 이런 식으로 불신자적인 생각으로 나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서로가 서로에게 전쟁, 원수관계에 놓이는 거죠.
64 그렇다면 여기서 셈의 후손과 함의 후손을 하나씩 등장 시켰는데 이 둘 사이를 그냥 가만 두지 않고 이 둘 사이에 원수를 맺죠. 원수를 맺는 데 그런데 이 셈은 하나님의 원수입니까, 원수 아닙니까. 하나님의 원수죠. 예수 그리스도 빼고 다 원수예요. 원수인데 셈족의 특징은 뭐냐. 이 하나님의 원수 속에 누가 투입되요. ‘하나님의 이름’이 투입되죠. ‘여호와 이름’으로 여기에 투입을 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아놓고 누구 이름을 불렸어요.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어요. 그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여 언약대로 이루어지이다’. 이걸 믿으니 아브라함이 뭐가 되었다? 의인된 거죠.
65 이게 어려워요. 노아가 의인된 것은 뭡니까. 아무런 이유가 안 나와요. 노아의 의인된 것은 동행했기 때문에 되었죠. 노아가 의인된 것은 어떻게 의인됐는지 몰라요. 그럼 이유는 어디서 찾느냐. 아브라함에 와야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그 내용물이 차후에, 여러분 노아나 아브라함이나 같은 인간이잖아요. 하나님께서 같은 인간을 다룰 때 차후에 등장하는 인간에는 앞서 등장했던 인간들에서는 미리 알지 못했던 내용들이 점점 증가하면서 등장해요. 노아가 어째서 의인이냐. 몰라요. 모르는데 노아가 어째서 의인이냐는 것을 아는 것은 아브라함이 어째서 의인이 되었어요.
66 방금 이야기했잖아요. ‘믿음’으로 의인이 되었지요.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인되었죠. 그럼 노아는 뭐로 의인됩니까. ‘믿음’으로 의인되었죠. 그게 어디 나오냐. 히브리서 11장에 나오잖아요.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거기에 뭐가 나와요. ‘믿음’의 사람들 리스트가 나오죠. 거기에 누가 포함되어있습니까. 노아가 포함되어있지요? 그러니까 성경해석보세요. 지금 최종 신약의 히브리서 11장, ‘믿음’의 장에 오게 되면 앞에 있던 에녹이 의인된 것도 믿음으로 의인되었고 노아도 믿음으로 의인되었고 그걸 아브라함 때 보니까 아브라함 역시도 믿음으로 의인되었고 그래서 그걸 한꺼번에 잡아서 뭐다? 전부 다 ‘믿음’의 사람이라고 규정하는 거예요. 그러나 만약 창세기 6장에 그냥 노아만 덜렁 하면 ‘노아가 당대에 의인’이라고 하면 그 설교자는 ‘노아는 당대에 의인이었습니다. 여러분, 지금 악이 횡행합니다. 우리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노아처럼 살아야 구원받습니다. 그럼 노아는 어떻게 삽니까. 바르게 살아야 됩니다’.
67 이것은 바로 십자가에 도달하는 경로가 십자가에 이어지지 못하고 도중에 윤리도덕으로 빠져버리는 거예요. 이게 앞뒤가 누적이 되고 차곡차곡 연쇄고리를 이루어야 되는데 고리가 다 떨어져버리면, 앞에 하는 원칙이 뒤에서 커지면서 동일해야 되는데 이건 동일하지도 않고 커지지도 않고 이건 가위가지고 중간에 다 잘라버렸다고요. 잘라내 가지고 인간의 행함이 들어가는 거예요. 노아처럼 살면 되고 아브라함처럼 살면 되고. 그럼 노아와 아브라함과 모순될 땐 어떻게 하느냐. 그건 입다물고 이야기 안하고.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인되었으면 그 믿음의 내막은 노아 때는 안 드러났어요.
68 왜냐하면 노아는 하나님에 의해서 구원받는다 이게 주안점이지 노아 개인적인 믿음이 어떻냐 그게 주안점이 아니었어요. 그것은 점차 점차 아브라함을 통해서 노아자손을 통해서 점차 드러날 숙제로 남겨져 뒤로 미루어져 있었단 말이죠. 아브라함에 와 보면 ‘하나님이 노아와 동행’했는데 아브라함 때 되면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동행’해요. 하나님이 에녹과 동행하다가 아브라함 때 되면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동행’을 한다고요. 이것은 뭐냐 하면은 점차 점차 ‘하나님의 이름’이 점점 더 인간적인 색채를 지니고 인간적인 모습으로 점점 더 가까이 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추상적인 하나님이 인격화되는 시점에 드디어 돌입하는 거예요.
69 인격화되는 시점에 돌입했다는 말은 더 어렵게 이야기하면 하나의 ‘특정 종족’이 되면서 모세에 이르면 특정 종족이 뭐로 바뀌느냐 하면요. ‘특정국가’로 바뀌어요. 특정국가가 되면 나중에 뭐로 바뀌느냐 하면 특정국가가 있을 때 비로소 ‘왕’의 실체가 드러나고 그 왕을 나중에 신약에서는 뭐라 그러냐 하면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왕을 섬기는 백성, 그게 왕국이예요. 하나님의 천국이라고요. 이 개념 하나하나가 전부 다 조금씩 조금씩 인간의 죄의 확산과 더불어서 들어가는 거예요. 이게 개념이 파고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옆에 주위에 있는 미처 들키지 않은 죄들이 발각되면서 죄는 죄대로 들어가는 거예요. 그 죄를 발각시키는, 뱀의 후손들이 갖고 있는 죄를 발각시키는 방법이 뭐냐. 점점 더 인격적인 모습으로 인간이라는 이름의 도구를 통해서 점점 깊이 있게 파고 들어갑니다. 파고들어가서 신약성경에 들러가면 드디어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게 됩니다. 모든 인간을 원수로 만들어버리지요. 그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원수였으며 아담에 속했으며, 오직 하나님의 원수가 아닌 분은 예수님 밖에 없다, 여자의 후손은 예수님밖에 없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다만 아브라함은 점차 자기가 앞으로 가면서 내가 죽을 죄인이라는 사실을 점차 알게 될 것입니다.
70 기도 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어려운 성경 속을 달리고 있습니다. 지혜를 더하셔서 십자가가, 전부터 십자가의 영이 살아 역사했다는 것을 구약의 성도들을 통해서 발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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