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계 3: 7- 8 (빌라델비아 교회)
Re..계 3: 7- 8 (빌라델비아 교회)
이름 : 이근호(IP:)
빌라델비아 교회
2006년 6월 25일 설교 본문: 요한계시록 3:7-8
(계 3:7)『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계 3:8)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예수님은 자신의 교회에 대해서는 따로 규정을 내리십니다. 만약 이 교회 규정을 무시하고 교회에 대해서 달리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주님의 교회가 아님에 틀림없습니다. 그 규정 중의 하나가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즉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주님의 이름을 배반치 않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교회에 나올 때, 비록 적은 능력자라고 큰 능력자로 만들어 줄 것이라고 내심 기대함으로 나옵니다. 만약에 계속해서 적은 능력자로 머물러 있다든지 아니면 도리어 점점 더 적은 능력자로 변하면 주님에 대해서 반감을 갖고 곁을 떠나기 마련이지요. 우리 주님은 인간들이 이런 심보를 갖고 있음을 잘 아시고 이런 점도 감안해서 교회됨의 다른 기준을 내세우신 것입니다. 즉 ‘적은 능력으로도 주님의 이름을 배반치 않는 자’가 참 교회라는 겁니다.
만약에 작은 능력을 받으면 주님을 배반하고 큰 능력을 받으면 주님께 감사하는 교회라면 그런 교회는 애초부터 주님과 상관없는 교회입니다. 그래서 참된 교회의 교인들은 하나님의 공평성을 이런 능력 소유의 비례에 따라 찾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에 근본이 있음을 압니다.
그것이 바로 다윗의 열쇠로만 열린다는 다윗의 문의 기능입니다. 이 다윗의 문은 인간에 의해서 열어진다든지 아니면 닫히는 문이 아닙니다. 즉 열어달라고 요청한다고해서 열리는 문도 아니요 닫아달라고 요청한다고해서 닫히는 문이 아닙니다. 인간들의 그 어떤 요구로부터 자유롭다는 점에서 하나님은 참으로 공평하게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교인들도 때로는 교회에 꼬박꼬박 다니는 자기 신세가 처량하고 한심스럽게 느낄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유치하게도 느껴지고 자립심이 상실된 성인이 아닌 것처럼 모욕감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도리어 용기 있게 하나님마저 믿지 않는 자들이 부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은 히브리서 9:27에 보면,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지금 교회도 안다니고 자기 멋대로 사는 사람들 머리에는 심판과 저주가 그림자처럼 졸졸 따라 다니게 하시는 그 공평함이 있다는 겁니다. 마치 모든 인간이 결국에는 죽어야 되는 그 공평함처럼 말입니다. 이런 공평함 중의 하나가 바로 다윗의 문이 발휘하는 공평함입니다. 즉 오로지 선택받은 자인지 아닌지 만을 가려내는 기능을 하는 문의 공평함말입니다.
이런 문은 인간의 의도와 노력과 행함이 작용하지 않기에 ‘보이지 않는 문’이 됩니다. 만약 ‘보이는 문’이 구원의 문이라면 인간들은 각종 지혜와 애씀과 정성을 다 집어넣어서 그 문을 열어제치고자 할 것입니다. 시간이나 공간적으로 특정 사물로 존재한다면 인간들은 기어이 그 문을 점령하고 말 것입니다.
실제로 인간들은 교회라는 것을 만들어서 그것은 시간적이고 공간적으로 점유하여 사람들을 천국으로 데려가는 여행사 노릇을 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진짜 구원의 문은 결코 인간들이 제조하거나 포착할 수 없는 문입니다. 그 예가 구약 다니엘 5장에 나옵니다.
거기에 벨사살이라는 왕이 등장하는데 아주 건방진 왕입니다. 그는 잔치상을 베풀면서 술잔과 그릇들을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제사드렸던 그 그릇들로 사용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모든 것에 대해서 우습게 본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정도는 자기에게는 가지도 노는 그런 신에 불과하다는 것을 대외적 알리고자 한 겁니다.
그런데 그런 건방진 술판에 갑자기 사람의 손이 나타나서는 맞은 편 벽을 후벼 파면서 글씨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 광경을 본 벨사살 왕은 얼굴이 졸지에 창백해졌습니다. 혼이 나갈 지경이었을 것입니다. 이 손의 존재는 인간들이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도저히 포착해 낼 수 없는 손입니다.
즉 하나님의 모든 활동은 절대로 인간들이 예상하지 못하는 양상으로 전개됩니다. 그래서 인간들의 모든 행함의, 가능성을 배제해 버리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선택입니다. 벨사살 왕에게 나타난 글씨는 ‘데겔 데겔 메네 우바르신’입니다. 이 뜻은 ‘끝났다, 끝났다, 부족하다. 그리고 페르샤 나라’라는 겁니다. 그 날 밤에 벨사살 왕은 죽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참된 교회란 인간들의 예상을 항상 비켜가는 방식으로 나타나기에 기존에 인간의 노동의 집약체로 세워지는 교회는 반드시 멸망받게 됩니다. 당연히 멸망당해야 하고 소멸되어야 합니다. 인간들의 전도 노동, 기도 노동, 예배 참석 노동, 봉사 노동이 한데 모아져서 형성된 교회는 그 안에 인간의 가능성과 포부가 우굴우굴거리기에 반드시 저주받을 교회입니다.
그렇다면 참된 교회는 어떤 양상으로 세워집니까? 다윗의 열쇠라는 것이 힌트입니다. 인간이 세운 교회와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시는 교회의 차이는 사울왕과 다윗왕과의 차이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선택했습니다. 동시에 사울을 버리기에 선택했습니다. ‘버림의 선택’이 전제되지 않다면 진정한 ‘선택’의 의미는 없습니다.
즉 “나는 너를 선택한다. 어느 정도냐 하면 절대로 저 자들을 기어이 선택해주지 않을 정도로 너를 선택한단 말이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열면 닫을 자 없고 닫으면 열 자가 없는 다윗 문의 특징입니다. 이 다윗 문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하늘 나라도 없습니다. 이 말은 곧 다윗을 선택한 그 동일한 선택이 없는 사람은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일은 처음부터 이랬습니다. 가인의 제사를 거부하신 이유는 아벨의 제사만은 특별히 차별나라 선택함의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함입니다. 가인의 제사의 거부가 아니면 아벨 제사의 받음이 선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벨 본인의 능력의 출충함에 따른 것이라고 오해될 것이 뻔합니다.
사울왕은 이스라엘을 자기 소유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기 밖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을 이해못하고 마치 자신이 이해한 방식으로만 하나님이 일하셔야만 하는 분으로 오인했습니다. 그런 사울에게 골리앗을 앞에 세우는 사울왕의 한계는 곧장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소년 다윗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구원받지 사울의 본래의 모습을 그 다윗을 잡아죽이고자 하는 적개심으로 절정에 이릅니다.
우리도 평소에 예수님을 얼마나 미워합니까? 자신이 예상한 대로의 인생살이가 아니라고 얼마나 원망합니까? 하지만 참된 교회라면 주님에 의해서 ‘남은 자’의 은혜를 알게 됩니다. 사람에게 포착되지 않고 예상 외로 주시는 그 은혜로 우리가 천국을 가고 있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것은 주님이 그저 주시는 은혜임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잊고 삽니다. 우리의 애씀과 행함이 주님의 주신 은혜를 흐려놓지 않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1-05-11 14:59
018강-계3장7-8,(빌라델피아 교회)-rev060625
설교:이근호 목사님
하나님 말씀은 요한계시록 3장7절에서 8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402페이집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아멘.
하나님께서 이렇게 저렇게 이야기하시는 것은, 사람이 생각하는 교회와 주님이 생각하는 교회는 엄연히 다르다는 이야깁니다. 오늘 본문 같은 경우에 작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이름ㅇ르 배반하지 않았다고 주님께서 칭찬을 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작은 능력을 가기고도 주님을 배반치 않아야 이게 교회입니다. 라는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상당히 깊이 있는 의미가 있지요? 왜냐면 작은 능력이 왔을 때는 사람들은 주의 이름을 배반할 수밖에 없는 그러한 약점을 지닌 것이 인간이라는 것을 주님께서는 빤히 아시는 겁니다. ‘큰 능력 같으면 배반치 않겠습니다.’ 이거는 누구나 다 받아들이는 거예요. 그래도 교회 올 때 작은 능력이지만 큰 능력으로 변환시켜달라고 철야하면서 빌잖아요.
이것 작은 것 가지고는 못살겠으니까 큰 것 주시면 하나님 살아계심을 믿습니다. 하는 그러한 증거물을 얻기 위해서 열심히 빈다 이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인간들의 요구조건을 들어주지 아니하시고 너는 지금 교회 되려하느냐 마려하느냐는 식으로 나오십니다. 역으로 치고 나오시죠. 너 진짜 교회 되고 싶어 하는 거야 마는 거야? 식으로 하신 말씀이 작은 능력을 가지고 배반치 않아야 그게 교회지 적은 능력에는 삐지고 큰 능력은 헤헤거리면서 주님께 영광 돌리고 찬양 돌리는 것, 이거는 교회랄 수가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잘 것 없는 존재로 만들었다는 것이 결코, 우리가 주님을 배반해도 할 말 없다, 라는 논리는 아니다 이 말이죠. 하나님이 나를 보잘 것 없이 전락시킨다할지라도 그렇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 주의 이름인 것을 믿어야 교회답다는 겁니다. 진짜 교회는 그래야 된다는 겁니다. 사람이 넉넉하다고 해서 하나님을 잘 믿는 게 아니에요. 아담은 부족함 없는 곳에서 하나님을 배신했습니다.
우리는 자꾸 핑계를 대는데, 천국에 넣어주시면 배반치 않겠습니다, 하는데. 에덴동산 같은 곳에 들어가도 인간은 인간의 마음이 달라지지 아니하면 항상 언젠가는 배반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능력을 어떻게 보느냐 하며는, 하나님의 성도가 아니라면 배반할 수밖에 없는, 배반해도 용인해주는 그런 작은 능력가지고서도 배반치 않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을 지옥 가는 인간들아 똑똑히 봐라, 그걸 자랑스러워하고 싶어서 교회라는 것을 깨우는 겁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보잘 것 없는 존재로 전락했다고 궁시렁 궁시렁 거리면서 ‘나 이제 교회 그만 다닐래’ 주님 믿어봐야 생기는 게 없더라. 이익 본 게 뭐가 있는데? 하는 식으로 도망친다면 지금 주님이 설정해놓은, 규정해놓은 교회라는 것에 해당사항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교회 다니고 있는 우리들도 가끔 이런 생각이 들어요.
방금 이 말씀, 「작은 능력 가지고도 주를 배반하지 않았으니 네가 참 교회다」듣기는 참 좋지요. 약간은 위로가 되는데 속에서 부아가 치밀어 오르죠. 적은 능력가지고도 배반 않는 것을 칭찬하시는 것은 좋은데, 세상 사람들 신나게 교회도 안 나오고 노는 것 보니까 무지무지 부러운 거예요. 그래서 어떤 부아나 울먹임 같은 것이 치밀어 오르는 겁니다.
칭찬 받는 건 좋지만 그 칭찬이 세상 것 얻지 못한 괴로움을 다 보상해주지 못하더라 이 말이죠. 이왕 교회도 다니고 큰 능력 갖고 싶은 것이 인간의 마음이지 ‘적은 능력가지고도 배반 안 했으니 잘했다,’ 그걸로 우리 마음이 차십니까? 그걸로 속 다 풀리십니까? ‘에이, 고작 칭찬이 이겁니까?’ 힘들어 못살겠네, 그런 속셈이 저절로 나오죠.
과연 하나님이 공평한 하나님이냐 그 부분에서 히브리스 9장27절에 이런 말씀 있어요.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런 말씀 나옵니다. 얼마나 하나님이 공평하신지 교회도 안 나오고 예수님도 안 믿고 절에 가면서 마음 판에 자기 욕망을 펼치면서 마음대로 살고 하나님 존재 십자가 앞에서도 양심에 가책도 없이 오히려 하나님 안 믿는 것을 인간승리라 간주하면서 한껏 뛰노는 그들이 그에 비해서 비 오는데 꼬박꼬박 교회 나오는 우리는 왠지 억울한 느낌이 들고 고생을 사서하는 것 같기도 하고 화가 나고 ‘누가 세상 놀 줄 몰라서 못 노나’ 하는 식으로 그렇게 생각이 드는데 하나님께서는 바깥에 뛰노는 사람에게 엄연히 죽음이 오고 그들에게도 공평하게 심판이 주어집니다.
심판의 불꽃, 지옥의 불꽃이 그들의 머리를 떠나지 않아요. 그런 점에서 얼마나 공평한 지 몰라요. 정말 하나님께서는 일을 제대로 하시는 분입니다. 칭찬받을 때 고마운 줄 알아야지 저쪽이 망아지처럼 뛰노는 것을 부러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을 공평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공히, 심판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집니다. 제가 하나님이 공평하다고 말을 던지는 이유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7,8절 말씀 가운데 오해하는 사람들이 참 많이 있었어요.
어떤 사람이냐 하면, 오늘 본문 7,8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천국의 문을 만들어놓고 넣어줄 사람에게 열어주고 안 열어 주어야할 사람에게는 문을 두드려도 안 열어주는, 구원시킬 사람만 구원시키고 구원 시키지 않는 사람에게는 철저하게 거부하는 이런 주님으로 나오니깐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공평치 못하다’ ‘하나님이 신사답지 못하다’ ‘하나님의 정의답지 못하다’라는 투덜거리는 소리가 많이 나오는 거예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하나님은 공평하게 심판을 주시고 공평하게 예수 잘 믿는 사람도 죽이시고 못 믿는 사람도 죽이십니다. 사람이 죽는 것은 하나님이 이미 정해놓은 일이에요. 하나님이 죽인다고 정해놓은 일을 어떤 위대한 위인이 그걸 변경시킬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하나님은 일을 공평하게 하시는데 그 공평하게 일 하시는 일이 뭐냐, 구원할 자만 구원하고 구원시키지 않을 사람은 구원하지 않는다, 이것도 같은 공평에 넣어줘서 생각을 해 주시라 이 말입니다.
같이, 대단히 공평한 것 중에 하나가 이어줄 사람은 이어주고 배척할 사람은 배척하는 이것이 주의 뜻입니다. 그러면 어떤 식으로 공평하게 천국에 넣어주느냐, 당신은 공평하다고 우기는데 무슨 그런 공평이 다 있냐, 그러면 모든 사람을 천국에 다 넣어줘야지 어떤 사람은 배제시키고 어떤 사람은 넣어주는 그런 공평이 다 있느냐, 지금 무슨 근거에서 그렇게 큰소리치느냐, 라고 하신다면
오늘 본문 7절에 보면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이렇게 돼있습니다. 여기에 열쇠 하나 나옵니다. 다윗의 열쇠는 어떤 용도냐 하면 다윗의 문을 여는 용도입니다. 다윗의 문은 특수한 문이라서 이 문은... 없어요! 없다는 게 문제예요.
우리 교회에 문이 있잖아요. 앞뒤로 두 개 있다고요. 그런데 다윗의 문은... 없어요. 없는 게 문 역할을 하는 거예요. 뭔가 사람이 있으면 따집니다. 왜 오늘 하얀 옷을 입고 왔습니까, 왜 빨간 옷을 입고 왔습니까, 따질 수 있어요. 하얀 옷들이 있잖아요. 빨간 옷들 있잖아요. 키가 큰 사람이 있다 말이죠. '당신은 왜 허우대가 커!‘ 사람이 뭐가 있으니까 따지는 거예요.
그런데 다윗의 문이라 하는 것은 없어요. 없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넣어주고 어떤 사람은 안 넣어주는 거야, 어디 그런 불공평한 문이 다 있어? 라고 따질 수 없는, 따질 대상이 안 되는 문입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다윗의 문은 없습니다. 천국을 통하는 문은 없습니다. 없는 문이 문 역할을 해서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거예요.
‘없다’는 말을 여러 번 강조했는데 그 없다는 하나의 예를 다윗의 문은 어떤 식으로 없느냐, 그 예를 제가 드려보겠습니다. 다니엘서 5장9절에 보면 ‘벨사살’왕이 여호와 하나님을 장난치면서 모독하는, 의도적으로 여호와 하나님 씹기를 취미로 여기는 그런 벨사살 왕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술판을 벌이고 잔치판을 벌이는데 여러 가지 술잔도 많고 그릇도 많은데 의도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에게 바치는 술잔 제물을 바치는 그 술잔과 도구들을 자기 잔치판에 쫙 깔아놓았습니다.
이 말은 ‘나는 여호와를 꺾었다’이 말이죠. 여호와를 꺾었으니까 여호와가 받을 영광보다 더 높은 영광을 받아야 돼, 여호와 하나님은 나보다 하수야 하수. 내가 가지고 노는 거야 하는 식으로 건방을 떨면서 잔치를 배설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여기서 까불다가 얼굴이 파랗게 창백하게 질려버렸어요. 왜 그러냐면 사람의 손에서 손목까지만 나오는 형체가 벽을 파면서 글씨를 쓰고 있거든요.
벽을 후비면서 손가락이 자기가 잔치판을 벌이고 있는 맞은편 벽에다가 글씨를 벨사살 왕과 그 주객들이 보란듯이 쓰고 있더라 이 말이죠. 지금 우리교회 예배드리고 있는데 이쪽 벽에 손가락이 나타나가지고 써 보세요. 조는 게 어디 있습니까. 기절합니다. '엄마야~‘ 하면서 기절하고 자빠져가지고 귀신 나오는 집이라고 날뛸 겁니다. 귀신 나와요. 귀신이 없다고 하니까 안 나오는 거지 원래 성령이란 불을 받은 곳이 교회입니다.
성령에 의해서 한바탕 노는 게 교회입니다. 오순절 성령이 괜히 온 겁니까? 베드로가 옥게 갇혔을 때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옥에 갇혔을 때 천사가 나와서 그 이중 삼중 문을 다 부수고 지진 일어나서 옥문 울타리가 다 넘어졌어요. 성령이 천사가 열심히 활동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손가락이 나와서 벽에 글을 쓸 때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습니다.
그렇게 촐랑대고 여호와 하나님 존재에 대해서 불신하고 모욕하고 야유하고 여호와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요샛말로 ‘예수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이렇게 야유하고 모욕하과 조롱하고 얕잡아보고 상대적으로 자기를 위에 높이고 자존심이 한껏 높아있는 인간들만의 공간과 그 시간 때에 보이지 않는 분이 글씨로써 자기 정체를 드러냈습니다.
사람이 어떤 대상이 있으면 특정 공간이 있고 그 시간대가 있기 때문에 따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짧은 손은, 글씨를 쓰는 여호와의 손은 어느 시간대에 또 나타날 줄 모르고 어느 공간에 점령할지 몰라요. 이것 잡으려하면 안 잡힙니다. 잡히지 않아요. 예수님께서 문이 닫혔을 때에 ‘똑!똑!’ ‘누구십니까?’ ‘나 예수님인데 문 좀 열어줘’ 이렇게 들어오는 게 아닙니다.
문이 닫혀있어도 그냥 들어갔어요. 공간적 점유를 초월하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 손이에요. 보이지 않는 손이 천국의 문의 역할을 하는 이유는 심판받는 인간들이 좋은데 가려고 교회 자신해서 나오는 인간들 다 거부한다. 다 집에 가라, 이 말이죠. 너희에게 포착당해서 구원시키는 그런 하나님은 애초에 그런 하나님은 없었어요. 인간들의 공간적인, 시간적인 점유에 의해서 포착당해서 그래서 사람들이 시키는 대로 움직여서 구원시켜주는 그런 하나님은 없습니다. 그것 가짭니다.
교회 자리에 은혜 받는 자리가 따로 있는 게 아니에요. 괜히 앞자리에 앉아봐야 제 침만 튀길 뿐이지. 어느 시간대에 은혜 되는 기도하는 시간은 없어요. 오죽했으면 쉬지 말고 기도하라 했습니까. 아침 아홉시 새벽 다섯 시에 기도하라는 것 없어요. 쉬지 말고 기도하세요. 이것은 인간들이 뭐라고 착각을 하느냐 하면, 어떤 특정 공간 특정 시간 특정 임무를 내가 포착하면 그것이 나에게 구원으로 전이된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 그게 바로 인간들이 시작한 교회입니다. 인간들이 출발한 교회예요.
저는 몇 십 년 전에 글을 하나 썼는데 ‘교회소멸론’이란 글을 썼습니다. 지금부터 제목을 바꿉니다. ‘교회 멸망론’입니다. 교회는 멸망해야 됩니다.(이러니 이단이라는 소리를 들으시죠. ㅋ) 멸망의 대상이 되는 교회라면 반드시 주께서 멸망시키고야 맙니다. 멸망이 될 교회라면. 멸망될까봐 안타까워하는 교회라면 그거는 처음부터 멸망 되도 괜찮은 교횝니다. 가짜교횝니다.
사람은 자기 노동이 집약된 것은 포기를 못해요. 그런데 개척교회라는 것도 자기 노동이 집약된 것입니다. 자기 헌금한 것 기도한 것, 설교한 것, 심방해서 사람 끌어 모은 것, 당신 하나 꼬시려고 얼마나 공들여서 잠 안자고 기도했다고 이런 식으로. 이런 기도노동, 헌금노동 전도노동, 예배 참석한 노동, 이런 노동들이 집약된 교회는 멸망시키는 것이 하나님 뜻이에요. 멸망당해야 됩니다. 왜?
사람들 눈에 포착되니까. 공간적 점유, 시간적 점유가 가능하니까. 교회는 거품입니다. 세상의 친목단체는 애쓰면 붙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한 번 빠지려하면 확 빠져버리고 마치 영구같아. ‘교회 없~다’ 교회 없는 거예요. 교회 있다하면 교회 내가 참석 않으면 그 교회 없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포착이 없으면 아예, 없는 걸로 간주해요. 그 점을 주님께서 노리는 겁니다.
벨사살왕 이야기 다시 해봅시다. 벨사살 왕 자기 코앞에 여호와 하나님은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믿는다는 사람들은 자기한테 포로 되어 있습니다. 자기 똘마니가 돼있습니다. 그리고 마르독신이 자기 신입니다. 그리고 자기 앞에 보이는 것은 뭐냐, 여호와 하나님께 과거에 제사 드렸다는 과거 유물 같은 그런 것들만 지금 술판에 하나의 도구로서 진열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저와 여러분이 벨사살 왕이라고 생각해봅시다. 왕이여! 예수 믿으세요. 이렇게 나오면 우리는 뭐라고 합니까, ‘웃기네, 참 웃기네’ 그런 하나님 있다면 내가 믿을게 내가. 시키기 전에 내가 알아서 믿을게. 지금 내가 여호와 하나님을 안 믿는다는 말은 그 신은 없다는 이야기예요 결국. 내가 안 믿는다는 건 그 신은 없다는 이야깁니다. 왜? 내 시간적이고 공간적인 시각에서 포착이 안 되니까 없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은 얼마나 공평하신지 모든 사람이 죽는 시간에 정확하게 죽게 돼 있습니다. 죽음 이상으로 정확한 게 뭐냐, ‘죽은 뒤에는 심판이 있으리라.’ 정확하게 포착됩니다. 이것은 인간의 이해도를 능가하는 거예요. 인간이 포착할 수 있는 그 가능성을 능가하는 겁니다. 난데없는 손이 나타나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는 글자가 나왔어요. 해석을 못합니다. 얼굴 시퍼렇고 벌겋게 돼가지고 똥을 싸는지 오줌을 싸는지 분간도 안 됩니다 지금. 거기에 신경 쓸 새가 없어요.
한 마디로 말해 ‘나는 죽었다’예요. 문제는 저 글씨가 무슨 뜻이냐 이 말이죠. 분명히 글씬데, 글씨 뜻을 묻기 위해서 소위 잘났다는 인간들 다 모았습니다. 그 사람이 믿음이 있습니까? 믿음 없는 인간이 어떻게 그 글씨를 해석할 수 있습니까. 다니엘을 불렀습니다. 이것 풀면 이 나라에서 세 번째로 높은 사람 되게 해줄게. 풀어줘. 토지 영토의 반을 줄게. 기껏 벨사살 왕이 내세운 게 눈에 보이는 눈에 보이는 권력과 눈에 보이는 토지 이것만 죽자고 지니고 있는 거예요. 이것만 죽자고...
다니엘은 그걸 초월했습니다. 공간과 시간을 초월한 사람이에요. ‘그거 안 줘도 내가 풀게!’ 데겔: 끝났다. 데겔: 끝났다. 메네: 왜 끝났나? 부족하기 때문에. 우바르신: 그리고 바벨신:페르샤 당신나라는 파산하고 다른 나라로 넘긴다. 당신 시대는 끝났다, 그 이야기예요.
그리고 그날 밤에 벨사상 왕은 죽었습니다. 왜? 「사람에게 죽는 것은 한번 정하신 것이고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얼마나 공평하신지… 얼마나 공평하신지…, 지금 교회 안 나오고 주무시고 있는 사람 그거 부러워하지 마세요. 주무신 그에게, 우리에게 적용된 동일한 말씀이 그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사실에 우리는 박수를 보내야 되요.
축구 16강 안 들어갔다고 그것가지고 짜증낼 필요 없습니다. 그런 것 16강 가가지고 천당지옥 결정할 것 아닙니다. 주의 말씀대로 된다는 것에 대해서 박수를 보내야 되요. 이런 기쁨을 얻고자 교회 나와야 됩니다. 이런 기쁨을 같이 누리고자 교회 나와야 되요. 교회 오는 보람이 어디 있느냐 하면, 내 가능성이 전혀 무시된다는 즐거움. 나의 능력이 전혀 무시된다는 즐거움. 나의 자존심이 공중분해 된다는 그 기쁨.
나 자체를 해체시켜준다는 그 능력을 맛보기 위해서 교회 나와야 되요. 나라는 인간 자체가 완전히 먼지가 돼버린다는 사실. 먼지가 되고 말씀에 의해서 다시 조립된다는 즐거움. 이 즐거움이 없으면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교회는 날마다 붕괴해야 되고 멸망 돼야 되고 교회는 소멸돼야 되요.
그러면 왜 열쇠는 다윗의 문이냐. 다윗이란 사람은 이 사람은 선택된 사람입니다. 선택은 반드시 배척을 배후로 한 선택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특정인을 선택했다는 말은 ‘나 너 선택 안 해줘,’ 그런 뜻이에요. ‘나 너 미워할 거야’라는 게 무슨 뜻이냐 하며는 ‘너는 이리와~!’ 이런 뜻이에요. 하나님은 첨부터 일을 그렇게 해요. 인간이 타락하고 난 뒤에 반드시 일을 그렇게 합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가인이 동생하고 잘 지냈습니다. 언제 가인이 동생과 틀어졌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아벨을 싸고 돌 때에 형이 틀어진 거예요. 안색이 변했다 했습니다. ‘왜 하나님은 나의 제사를 안 받아줍니까?’ 하나님 뜻은 이겁니다. 아벨을 선택한 의미를 강하게 하기 위해서는 저 놈의 제사를 받아줄 필요가 없는 거예요. 가인의 제사를 안 받아줌으로 말미암아 이쪽이 빛이 난다니까요. 특징이 빛이 나요.
제사 지내면 천당 다 간다. 이러면 선택의 빛이 없어지죠. 제사 지내는 건 소용없잖아요. 제사를 하던 기도를 하던 소용없다 선택된 사람만 구원받는다. 이래야 주님의 선택은 빛이 난다는 겁니다. 그래야 인간의 시간적 공간적인 포착에 의해서 구원에 이를 수가 없지요. 하나님의 일방적인, 돌발적인 나타남. 출몰함. 출몰이죠 출몰. 갑자기 출몰한 그것이 나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겁니다.
다메섹에 내려가던 사도바울 같은 경우에 사도바울이 다메섹 내려가면서 만날 하늘 쳐다봤습니까? ‘지금쯤 나올 때쯤 됐는데... 분명히 이쪽인데...지금쯤 주님께서 나타날 때 됐는데...,’ 이랬습니까? 사도바울이 자기가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은 주님이 자기를 구원하는 그 손길은 자기의 예상의 능력 안에 들어있지 않기 때문에 그동안 예상한 자기 영역을, 거기에 집착했던 이 죄. 이게 바로 죄인의 괴수가 되는 거예요. 이게.
내가 아는 식으로 구원될 걸, 그렇게 예상했던 그것이 바깥에서 일방적으로 선택하신 그 은혜를 모독한 게 되요. 그게 모독하나 게 된다고요. 사도바울의 이러한 고백은 로마서 11장에 그대로 나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구원받는가? 행함으로 구원받는다? 아니다! 그럼 뭐냐! 남은 자만 구원받는데 그 남은 자는 은혜로만 구원받는다. 그 대목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로마서11장5절에 보면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은혜가 은혜 되게 하기 위해서만 하나님께서는 일합니다. 은혜가 행함으로 전환되는 일은 마귀의 일이지 하나님을 그런 일을 한 적이 없어요. 처음도 은혜요 끝도 은혜요. 처음도 은혜요 끝도 은혜라는 것은 인간들에게 포착되지 않은 방식으로만 돌발적으로, 돌발적으로 주께서는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교인이 50명 되더라도, 썰물 빠지듯이 싹 빠지더라도 놀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50명 다음주에 확, 들어올 수가 있거든요. 들어와도 놀라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만 주님께서 빠질 때는 빠지고 들어올 때는 들어오고 그것조차 우리한테 의논하지 않는 주님이라는 것을, 그것조차 왜 그렇게 하느냐, 그럴 때 그것이 은혜가 은혜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은혜’라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우리 쪽에 도착한 은혜를 성경에서는 무슨 개념으로 하냐면 성경에서는 ‘은사’라는 개념으로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교회에서 교인들은 은사로서 활동하는데 이 은사로 하는 것이 바로 우발적이고 돌발적이에요. ‘집사님 청소 좀 해주세요.’ 청소담당 이사로 선임을 했다 이 말이죠. ‘김 집사를 청소담당 이사로 임명하노라’ 그런데 설거지 담당 이사로 해놓고는 하기 싫더란 말이죠.
‘미쳤나 나 혼자 하게’ 그런데 그것도 처음에 설거지 담당 이사라 할 때는 ‘주여 이것도 은혜입니다.’ 할 때 자기는 이것도 하나님 주신 은혜인 줄 알았는데 슬그머니 하기 싫을 때는 자기가 억지로 해서 하는 줄로 오해 했죠. 그 다음주에는 ‘아무나 설거지하나? 나한테 특별히 설거지 은사기 때문에 맞겼지’ 그게 또 은혜가 되는 거예요.
‘에구 집사님 애 많지요? 신경질나지 않습니까? 남들 노는데 혼자 하니까.’ 아닙니다. 모든 게 은혜입니다. 라는 걸 그때서야 할 수 있는 겁니다. 지금 우리 교인들 그런 은혜 받을까 싶어서 덜덜덜~ 도망치려고 하고 있어요. 은혜라 하는 것은 항상 내 소유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은혜가 내 소유가 되어버리면 은혜의 주인이 예수님이 아니고 은혜를 소유한 내가 주인이 돼가지고 그 다음부터는 자기가 교주 돼버려요. 교주.
자기가 천하게 교만한 자가 돼버립니다. 우발적인 상황을 모르고. 바로 그런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다윗의 열쇠라는 게 중요하죠. 다윗 시대에 방금 제가 이야기한 그런 자가 있었습니다. 누구냐면 사울 왕이에요. 다윗의 열쇠가 뭐냐 하는 것은 사울 왕이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살았느냐를 대비해야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자기가 왕이 되고 난 뒤에 그 다음부터 이스라엘 왕은 가지 소유가 된 겁니다. 자기 소유가 된 거예요.
자기 소유가 되면 하나님도 어떤 일을 할 때는 나에게 물어보고 일하지 나를 부끄럽게 일할 일은 없을 것이다. 왜? 내가 왕초니까. 내가 최고니까.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내가 이스라엘 왕이니까 왕 시켜줄 때는 의미가 있었으니까 하나님이 나라는 노선을 통해서 백성을 통치한다. 그래서 이 백성은 내 소유가 된다. 이런 식으로 자기가 착각을 한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런 교만한 사울 앞에 누구를 등장시켰냐 하면, 사울이 자기 예상 밖의 어느 날 장수 그 장수 이름은 골씨 집안인데 골리앗이라는 장수입니다. 그 장수가 등장할 때 전부 다 ‘음메~ 기죽어’ 하고 꼼짝 못했어요. 왕은 돼 놨지, 감당은 못하지, 부끄럽기도 하고 쭈구러지기도 하고 난처하기도 하고, 백성들은 ‘사울 왕이여 뭐하십니까? 이스라엘을 지킵니까, 뭐합니까,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지도자 값을 해야지’
뒤에서 조롱대기도 하고. 그럴 때 누가 등장한다? 다윗이 등장하죠. 다윗이 등장할 때 다윗은 그 골리앗을 볼 때 자기가 평소에 어릴 때부터 놀던 사자 아류에 지나지 않은 겁니다. 쪼그마한 어린 애가. 건방지게 사람을 보고 사람 취급을 안 해요. 어릴 때 사자 잡을 때 조그마한 돌멩이로 잡았는데 그 사자와 같은 동물이에요. 왜? 할례 받지 않기 때문에.
사자 다루듯이 다루어야 된다. 던져버리니까, 만국의 여호와 이름으로 던져버리니깐 그 인간이 죽었어요. 죽었을 때 여기서 돌발사태가 벌어집니다. 사울은 천천이로되 다윗은 만만이라. 갑자기 모든 인기가 다윗에게 쏠립니다. 가인이 제사를 드리는데 안 받으니까, 안 받고 동생이 제사 드릴 때 받으니까 갑자기 관심사가 제사 받는 동생에게 미음으로 다가가듯이 그때부터 사울 왕은 새로운 돌발적인 요인이 다윗이라는 소년에 대해서 모든 전력을 다하여 걔를 추적해서 잡아 죽이는 것을 목표로 삼고 살았던 것입니다.
지금 교회를 세우고 개척교회를 하고 신학교 나와서 목사가 된 사람들이 결국 노린 게 뭐냐, 교회를 자기 교회 만들고 예수를 죽일 때까지 죽이는 거예요. 이유는 단 한 가지, 왜 예수님은 나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저 교인을 교인 만들기 위해서 십년동안 정성 다했는데 저 교인은 오늘부터 왜 교회 안 나오느냐는 그 이야깁니다. ‘그 목사의 잘못은 간단하다’라는 유명한 책에 보면 나와요.
어떤 젊은 목사가 순교한다고 낙도에 가가지고 낙도 사람들 봉사하고 참 완벽한 목자로서 신앙적인 예수 같은 삶을 살겠다고 갔는데 사모님이 무슨 잘못이 있어서 고구마만 먹다가 영양실조가 됐어요. 영양실조. 먹을 게 없어서 영양실조가 된 거예요. 딸 하나가 있는데 여상 나와 가지고 서울에 취직했거든요. 엄마가 영양실조 돼가지고 중풍이 걸렸습니다. 딸이 효심이 많아요.
어머니 제가 혼자 서울에서 잘 지내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어릴 때 아버지께 배운 대로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서 내려가겠습니다. 그래서 그 딸이 직장 그만두고 엄마 봉양하겠다고 내려와 한번씩 봉양하고 가다가 갑자기 썰물 밀려와가지고 갑자기 죽었어요. 애 옷가지와 장화만 남고 애는 죽었어요. 마누라 중풍걸렸지요. 멀쩡한 딸 여상 갔다가 생활비 보태준 딸 죽어버렸지요.
그 장화 새벽기도 재단에 던지면서 ‘하나님 내가 뭘 잘못했는데 이런 벌을 내리십니까?’그 장화가지고 재단에 던지는 것은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로마 군병이 따귀 때리는 동일한 노선이에요. 동일한 노선이었습니다. 그 사람의 딸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 일이라는 사실을 왜 그 목사는 진즉에 몰랐었냐 말이죠. 그 마누라 중풍병자 만드는 것이 열심히 하나님 일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게 보이지 않는 손입니다.
그게 뭐냐, 큰 능력이 아니고 작은 능력이에요. 나를 보잘 것 없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인데 남들 보기에는 보잘 것 없는 나를 망치게 만드는 작은 능력이고 그런데 오늘 본문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그 작은 능력으로도 하나님 이름을 배반치 아니했다.」이게 보이지 않는 능력이고 손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이런 이야기 합니다. 내가 자랑할 것은 하나밖에 없다. 뭐냐! 「내가 약한 중에 우리 주님이 강하심이라.」
쉽게 말해서 약하디 약한 나도 살잖아. 약하고 죄 짓고 사람 많이 죽인 나도 천당 가잖아. 천국 가잖아! 얼마나 공평하냐 이 말입니다. 사람이 보이는 것을 가지고 구원받을 것 같으면 잘난 사람 똑똑한 사람 재벌 이런 사람들이 천당에 먼저 갈 거예요. 하나님은 너무나 공평하셔서 모든 사람이 심판받아야 되고 지옥 가야되지만 보이지 않는 선택이라는 것을 통해서 오직 자기가 골라낸 사람만 구원하시는데 그 구원의 문이 뭐냐, 다윗의 문이요 그것이 다윗의 열쇠가 되는 겁니다.
인간의 가능성, 인간의 능력으로 구원되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 구원되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 작은 능력으로도 자기를 선택하신 주님이 사랑을 배반하지 않고 배신하지 않는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주여, 배신하지 않게 하소서-녹취자) 환란과 곤고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어떤 것이라도 그리스도 사랑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이 말이죠.
교회가 오직 하나님의 선택과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해서 은혜로 움직이는 교회 같으면 어떤 사람이 떨어져나가느냐 하면, ‘날 좀 알아주세요.’ ‘나의 큰 위대한 능력을 무시하지 마세요.’ 자기 큰 능력 위대한 능력 알아달라고 요청한 사람. 그런 사람은 반드시 떨어지게 돼있는 겁니다. 그런 사람이 떨어지고 적은 능력으로도 주님을 사랑하는 교인들이 아직 남아있다면 아직까지라도 그 교회는 교회입니다.
태풍이 불어도 여전히 교회고, 아직까지 교횝니다. 그러나 반대로 잘난 사람은 남고 못난 사람은 못났다고 떨어지면 처음부터 그 교회는 그 교회 바깥에 진짜 교회가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대로 적은 능력으로도 주님을 배신하지 않았다 이 말은 우리 자신이 내 것이라고 여기지만 내것을 채우기 위해서 이리 꼬이고 저리 꼬이고, 자기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그렇게 애를 쓰는 겁니다.
세상적인 값어치라 하는 것은 오래 가는 것이고 빛나는 것이고 그런 거지만 주님의 가치라 하는 것은 바로 보이지 않는 그분에 의해서 내가 일방적으로 뽑혔다는 그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것이 참된 교회요. 이 다윗의 열쇠는 열 사람이 없습니다. 아무도 열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면 누가 여느냐, 이 다윗의 열쇠는 다윗이 열어야 되는데 그 다음에 최종적으로 선택된 다윗이 누구냐, 마태복음 16장에 보니까 바로 예수님께서 그 다윗의 열쇠를 가지고 다윗의 문을 열어서 죽음에 있는 자기 백성을 끄집어낸다는 거예요. 주님께서 부활하셔서 부활의 능력으로 다윗의 열쇠를 사용하여 이미 죽음 속에 있는 자기의 백성을 끄집어내니까 그 어둠의,
죽음이라는 강력한 세대가 하나님의 백성을 따라 붙으려고 아무리 잡아도 부활의 능력이 죽었다가 살아난 능력이기 때문에 그 주께서 붙잡은 능력을 따라 잡을 수가 없어요. 기어이 빠져나와서 털어버리고 그들만 구원한다는 그것이 바로 다윗의 열쇠를 가진 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라고 나옵니다.
예수님이 왜 다윗의 열쇠냐!? 왜 석가모니는 안 되는가? 왜 공자는 안 되는가? 예수님만이 죽었다가 부활했거든요. 부활했잖아요! 알잖아요? 예수님만 부활했거든요. 그분만이 부활하셨고 그분만이 십자가에서 내 죄를 용서하신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십자가 밑에 있던 로마 백부장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로마 십자가 신도중에 한 명이고 ‘저분의 죽으심은 어려운 죽음이고 나는 저분을 믿는다.’ 이거예요.
저분의 죽으심은 우리 죄 때문에 죽으신 것이고 그걸 믿었어요. 그리고 다시 사흘 만에 부활하고 난 뒤에 제자들이 찾아올 때 제자들은 이것이 인간들에 포착되는 구원받는 방식이 전혀 아니고 오직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의미를 알아서, 그 십자가의 피로 용서됨을 알아서, 그 진리를 알게 하는 사람만 구원된다는 그것을 그 뒤에 교회라는 사람들은 알게 되었습니다. 바라기는, 여러분 자기 자신은 보잘 것 없지요. 우리 교인은 다 보잘 것 없어요. 전부 다 한 달 수입이 이천만원 안 됩니다. 다 보잘 것 없어요. ㅋ 차~암 보잘 것 없지만 그 보잘 것 없는 가운데서 십자가의 공로를, 은혜를 잊지 않는 ‘남은 자’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보이지 않는 손길이 보이는 교회를 뛰어넘어서 영원한 선택으로서 그저 행함이 아니라 그저 주시는 은혜로서 은혜를 이끄시는 주님의 은혜를 다시 한 번 감사합니다. 은혜로 시작한 것을 나의 자존심으로 끝내지 않도록 날마다 예상치도 못한 일들 중에서 우리 자존심을 해체하고 부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