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어떤 분의 일기장과 오용익 목사님의 반론
[일반] 어떤 분의 일기장과 오용익 목사님의 반론
이름 : 이근호(IP:)
어떤 사람의 일기장1
나는 생판 기독교도 예수도 십자가도 들어본 적도 없는 사람이다. 우연찮게 성경을 읽게 되었다. 이것도 사람들이 진리중의 하나라고 하는 것이니 끝가지 읽어보기로 작심했다. 처음부터 펼치고 보니 창세기 1장에 천지창조에 관한 기록이 죽 나온다. 하나님이 세상도 나도 창조하셨다는 사실이 희한하게 믿어진다. 2장을 보니 남자와 여자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도 나온다. 처음 듣는 이야기다. 그것도 믿어진다. 3장에 보니까 마귀 때문에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동산에서 쫒겨났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어찌 이런 일이. 다 믿어진다. 출애굽기 민수기 신명기 어렵지만 모르는 이야기 빼놓고 알아듣는 이야기는 그런대로 다 믿어진다. 계속해서 읽다보니 어려운 부분들이 많이 나온다. 다 읽기로 작심했으니 어려운 부분들은 다음에 읽기로 하고 건너뛰면서 읽어나갔다. 드디어 신약에 오니 예수님이 나온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저를 믿는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이 나온다. 너무나 믿어진다. 그 다음에 계속 읽다 보니까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다는 이야기와, 하나님께서 이렇게 이렇게 살라고 하는 명령하는 말씀들이 줄줄이 나온다. 맨 끝에 가니 천국과 지옥이야기가 나오면서 무서운 심판이야기가 잘 알아듣지도 못할 소리로 나온다. 그래도 대충은 알 것 같다. 아침이 부옇게 밝아 온다. 읽은 것을 대충이라도 정리해보자.
1. 하나님이 천지와 사람을 창조했다.
2. 난데없이 찾아온 마귀의 유혹을 받아서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타락을 하게 된다.
3.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는 일을 시작한다. 우선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서 시작한다.
4. 그리고 이스라엘백성들이 그 일에 실패하자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 예수를 직접 보내주셔서 세상구원을 이룬다. 십자가를 나 대신 지시고 그 공로로 성령을 주심으로 하나님을 믿게 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도 한다.
5. 하나님께서 내게 무엇을 원하시는지에 대한 결론이 나온다. 구원은 나에게 너무나 확실하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다 이루었기에. 그러나 아직 남은 것이 있다. 이제는 내가 구원받은 자답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사명이 남아 있다. 그동안의 나태하고 게으른 삶을 청산하고 이제부터 사명감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겠다고 다짐 또 다짐한다. 어찌 하나님이 구원만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을까? 나같이 구원받은 사람들을 통해서 죄악된 이세상을 구원하는 일에, 그리고 세상을 처음 에덴동산같이 아름답게 만드는 일을 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겠는가? 그것이 비록 십자가 지는 고통일지라도 말이다. 예수님처럼!(*)
(반론)
고린도후서 5:16에는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 되어 있다.
사도바울에 따르면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두가지 안목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는 육체대로 아는 것, 그리고 하나는 영(성령)으로 아는 것이다. 육체대로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은, 내 육체의 지혜를 동원해서 하나님도 알고 예수님도 알고 십자가도 알고 교회도 알고 영생도 알고 사명도 알고, 무엇이든 자기 육체의 것을 동원해서 내 앞의 대상을 파악한다. 성령이 와서 도와주었다고 본인이 우겨도 형편은 달라지지 않는다.
흡사 사람이 사람을 만나서 사귀고 알아가는 것처럼. 그런데 이런 안목 가지고는 절대로 하나님도 예수도 십자가도 교회도 영생도 사명도 그 모든 신령한 것에 대해서 일체 접근조차 허용되어 있지 않아서 조금도 파악 할 수 없다는 것이 성령받고 나서의 사도바울의 안목이다(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혀 알아보지 못한다, 육체대로는 전혀).
성경을 아무리 파헤치며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도 알 수 없고(요한복음 2장의 니고데모와 사도바울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성경의 박사들이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대자연에 깃들어 있는 창조의 질서를 아무리 헤집고 파헤쳐 봐도 모르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베드로는 완벽하게 창조의 질서마저 초월하는 식으로 물위를 걸었지만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다).
더 나아가 “육체대로 아는” 하나님지식이, 예수님(영)이 가지고 계신 하나님지식과 서로 충돌해서 일어난 사건이 십자가 사건(고전 2:8)이기에, 도리어 십자가의 영이 오게 되면 인간의 육체에서 비롯된 모든 지혜 - 예수 믿어서 구원받고 싶은 마음, 성령받고 사람답게 살고 싶은 마음, 하나님 뜻대로 살아서 신령하게 살아드리고 싶은 마음, 이 타락한 세상을 바로잡아서 좋은 세상 만들고 싶은 마음, 큰 욕심 안 부리고 소박하게 살면서 가정에 충실하고 직장에 충실하면서 살고 싶은 마음, 대자연의 이치인 창조의 질서를 잘 연구해서 사람들을 하나님의 치유방법으로 건강하게 해주고 싶은 마음,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섭리이니 다 하나님의 뜻대로 될 터이고, 나는 평생 죄만 질 터인데 왜 설쳐댈 필요가 있으랴.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난리칠 것이 아니고, 주님이 어떻게 일하시나 구경하면서, 주님 오실 때까지 그저 감사하고 기뻐하면서 살자 - 는 모든 인간의 마음과 그 마음을 쏟아내는 육체 자체를 죄악된 육체로 규정당하고 고발당하게 된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안목(지혜)은 십자가에서만 나온다고 한다.
왜 그래야만 할까? 왜 십자가는 인간의 모든 지혜를 헛되게 만드는 것일까? 여기가 중요하다. 모든 육체를 죄악에 가두고, 거기서 끄집어내는 일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하나님의 지혜)로만 되어서 십자가지신 아들의 공로만 높여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란다.(갈 1:4-5)
십자가에서 영의 안목으로 성경을 보면 이렇게 보인다.
성경 순서상 1장의 창조가 먼저이고 그다음 인간의 타락,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손길, 이런 식으로 인간중심 구원중심으로 보면 창세기 3장 15절의 약속은 인간의 구원을 위한 장치가 되지만, 십자가에서 예수님 중심으로 보면 창조와 마귀의 유혹과 인간의 범죄, 이 모든 인간의 역사와 그 역사를 자아내는 이 세상은,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시는 예수님의 영광을 위한 도구가 된다. 이 점이 육체의 안목과 영의 안목의 갈림길이다.
유일하게 아들의 영광만을 높이기 위해서 천지와 인간과 모든 만물이 창조되었으며(골로새서 1:16), 유일하게 아들의 영광만을 위해서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살게 되었고,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서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고 생명나무로부터 차단되어 죄 아래 놓이게 되고, 아들의 영광을 위해서 창세기 3장 15절의 약속을 이 세상에 내려주시고,
아들의 영광을 위해서 이 지상의 모든 육체가 오직 약속의 능력 외에 어떤 인간의 지혜로도 구원되지 못하는 죄아래 있음과 오직 약속만으로 구원됨을 증거하시고(인간은 하나님의 언약에서 완벽하게 배제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구약이다-이근호 저, 하나님의 선택 참고),
아들의 영광을 위해서 그 약속 그대로 이루실 아들이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시고, 그 약속대로 이루실 것과 아울러 모든 육체는 한사람도 자력으로 죄아래서 나올 수 없다는 것을 말씀과, 표적으로 증거하시고, 그 약속대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 약속을 다 이루시고,
그 약속(십자가의 피공로)으로 지옥과 천국을 만드시고, 그 약속(십자가의 피공로)대로 마귀와 함께 지옥 갈 자와 천국 갈 자를 다 확정하시고, 그 약속대로 택한 백성에게 성령주심으로 결코 정죄함이 없는 약속 안에 있는 생명의 세계(십자가의 영원한 속죄가 계속 작용하는)로 옮겨놓으시고,
그렇게 십자가의 공로만으로 부르시는 내막, 하나님의 지혜를 알게 하사 영으로 그리스도를 아는 자들에게 십자가만 자랑하고, 증거하는 일을 하게 하시고,
그 약속대로 불택자에게 성령 안주시고 마귀의 유혹에 그냥 넘어가게 하사 십자가 안에 담긴 내막을 모르도록, 그냥 육체의 안목으로 이생의 보람을 찾고, 신을 찾고, 하나님 찾고, 예수 찾고, 십자가 찾고 교회 찾아서, 자기 육체의 자랑으로 일생을 헤매면서도 그것을 신앙심인줄 착각하고 있다가 지옥가게 하심으로 이 세상을 종결짓는다는 것.
오직 십자가에서 흘린 피로 이루신 약속(새언약)을 기준삼아서! 따라서 여기에 어떤 인간의 육체의 자랑이 조금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사도바울의 그리스도에 대한, 그리스도의 일을 한다고 하는 자기에 대한, 그리스도께서 주신 안목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 안목으로 이런 담대한 주장을 한다.
고린도전서 2:2 ‘내가 너희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힌 것 외에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갈라디아서 1;8-10 ‘그러나 우리가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에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그리고 그의 담대한 선포는 육체의 안목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약속(십자가의 피의 능력)에서 나온 것임이 그대로 그의 일생에 담겨져서 발산된다. 육체대로 알지 않고 영으로 예수를 알게 된 사도의 일생을 보면서 구원받은 성도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기준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고린도후서 12: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
성령으로 예수를 알고 나서 더 이상 자기 육체조차 육체대로 알지 않는 안목이 열렸다는 뜻이다. 더 이상 자기 육체에 하등의 기대도 걸 수 없으며, 또 기대하지 않아도 될 만큼 자기 육체에 개의치 않으며, 그 육체의 자랑을 일삼는 세상 돌아가는 꼴과, 교회 돌아가는 꼴조차 개의치 않으며 그저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그 피의 공로가 완벽함을 증거하는 그 점이, 사도가 자기 일생으로 제시한 구원받은 성도로서의 그리스도의 일을 하는 자로서의 기준이었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께 가보자. 그리고 거기서 예수님의 이 탄식을 들어보자.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십자가에서 버려진 예수님의 죽음을, 곧 나의 죽음 내 육체의 죽음으로 파악하지 못하는 자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만이 생명이 된다는 이점도 파악 되지 않은 자이다. 예수님의 용서를 환영할라치면, 예수님의 피가 규정하는 대로 무조건 자기육체의 죄인됨을 인정하고 자기를 부인해야 할 것이 아닌가? 어떻게 십자가의 피를 자랑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내놓을 수 있는지. 그렇다면 그는 육체의 안목으로 본 욕망의 화신을 가지고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다고 사기치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런 자는 아직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보지 못한 자가 아니겠는가.
벧후 3: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년이 하루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약속은 어떤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간절히 사모하라 그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노라
자기 육체에서 품어져 나오는 욕망과 그 욕망을 부추기는 마귀의 유혹을 자기 힘으로 잠재울 자 누가 있겠는가? 성령 안에 있는 십자가의 능력은 오늘도 성도의 육체를 확실하게 죽이신다. 그것만이 십자가공로로 인한 완벽한 치유이다. 그래야 내 육체(죽음)로부터 자유하게, 사도처럼 담대하게 이 세상에서 조차 하늘나라에 계신 예수님만 바라보는 영의 사람으로(생명) 건강하게 살아갈 것이 아닌가?
고린도후서 13:8,9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 우리가 약할 때에 너희의 강한 것을 기뻐하고 또 이것을 위하여 구하니 곧 너희의 온전하게 되는 것이라
정말 건강한자 누구인가? 이정도로 십자가의 피에(진리)에 매인 사람이 건강한 사람이다. 이런 안목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십자가에서만 생산된다.
* 고린도전후서 강의를 다 듣고 소감
광주모임이 시작된 지 일년 반 남짓 되었다.
고린도전후서 강의를 다 들었다. 고린도후서 마지막 구절
고린도 후서 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의 무리와 함께 있을 찌어다” 까지.
하나님은 예수님 중심으로, 십자가 중심으로만 일하신다는 것이 사도가 본 영의 세계였다. 십자가를 증거하는 일에, 그렇게 아들을 높이는 일에는, 하나님이 성도를 팍팍 밀어준다는 것. 그리고 그 일이 되도록 우리를 죽이고 또 죽인다는 것도.
십자가에서 시작해서 십자가를 통해서 십자가로 종결되는 정갈함.
그리고 육체의 뼈까지 발라내지는 후련함!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개인적으로 힘든 일을 많이 만났다. 당연 불평도 많이 했고 원망도 많이 했다. 강의 마지막 주간에도 그깟 3000원 때문에 마음고생을 했다. 그 삼천 원의 마음고생이 사도바울의 삼층천과 비교되면서 나는 또 울고 싶은 마음이 되었다. 나는 정말 목사하고 싶지 않다. 점점 더 이 일이 못할 짓이라는 생각이 들어간다. 왜 목사가 되었을까 후회도 많이 했다. 설교의 한계가 오면 자진해서 물러나야 한다는 소리. 누가 이런 소리를 했는지, 그런 소리 한 사람이 얄미울 때가 많았다(^^).
고린도 교회는 엉망이다. 그 엉망인 교회를 누군들 성한 교회로 만들고 싶지 않겠는가? 우리 눈에 보이는 세상의 교회들도 다 엉망 같다. 누구인들 그런 교회를 성한 교회로 개혁하고 싶지 않겠는가? 목사라면 이일에 발 벗고 나서는 것을 하나님의 일로 당연히 여기지 않겠는가? 누가 그 엉망진창 속에서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빈틈없이 일하시는 예수님을 보겠는가? 누가 그 엉망진창을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라고 보겠는가? 그러나 사도는 본다. 영의 안목으로. 십자가의 안목으로.
강사목사님은 초장부터 그런 싹을 자르고 들어갔다. 성경은 교회를 개혁하는 일에 사용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고, 사도바울도 그런 일을 한 것이 아니고, 다만 주님이 교회가운데서 살아 계시고 일하신다는 것을 증거했다. 어떻게? 성령 안에서. 무슨 일로? 십자가의 복음만 증거하는 일로. 왜? 교회를 사람들이 보기에 번듯하게 세우는 그런 일을 안 하시고. 사람들을 교회로 좀 더 많이 모으는 그런 일을 안하시고. 창조질서를 잘 살펴서 사람들을 치유하는 그런 일을 안하시고. 사람들을 경건하게 훈련시켜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자 만드는 그런 일을 안하시고.
십자가만이 산자와 죽은 자를 가르는 기준으로서의 약속이기에.
이 기준 외에 다른 기준은 있을 수 없기에. 십자가 안에 있는 교회라면 이 기준을 흐리게 하는 어떤 짓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 사도의 진리사랑이었고 교회사랑이었다고.
예수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는 십자가만 자랑하라고 부름받은 영이기에.
육체가 발산하는 죽음이 품어내는 욕망의 모습들, 그것을 바라보는 세상의 눈총조차 일체 개의치 않으면서. 왜? 너무나 넉넉해서. 십자가의 용서가!
강사목사님의 마지막 말
한국교회의 어떤 점에 대해서 고친다는 발상자체가 틀렸다. 이단으로 간주하고 시작하자는 것. 그래야 복음만의 능력으로, 이사야 54장 1절처럼, 갈라디아서 4장 28절처럼 약속에서만, 십자가의 능력으로만 교회가 출산될 것이 아닌가! 라는 것. 그래야 예수님만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
이 근호 목사님이 수고하셨다.
다음 달부터는 요한일서를 공부하기로 했다. 끝이 없다. 은혜는.
서 경수 목사님은 녹취하느라 계속 수고하신다. 끝이 없다. 은혜는.
목사된 것을 후회하는 것조차 능가하는 이 큰 은혜로,
목사가 아니어도 좋으니
그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영으로 건강하게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