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06 서울 경기(의존교회) 영화 1-1
Re..06 서울 경기(의존교회) 영화 1-1
이름 : 이장우(IP:)
06 서울 경기(의존교회) 영화 1-1
06. 2. 13 강의 이근호목사
(몇 사람이 늦게 와서 강의와 다른 여담이 녹음이 되었습니다. 그대로 녹취하여 올립니다.)
베드로전서에서 개인적인 자기 덕을 추구하다가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서 나의 덕을 챙기는데서 벗어나서 남까지 챙기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렇게 되면 나와 남이라는 경계의 울타리가 허물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나만 챙기는 것에서 나보다 타인을 챙겨야 되는 과정은 제자의 선택과 그 제자가 나중에 사도로 바뀌는 것에서 볼 수 있습니다.
12제자로 있을 때는 이 자체가 이스라엘 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12사도가 되어 버리면 이들이 이스라엘의 모체가 되면서 12제자와 동일한 과정이 확산이 됩니다. 그러면 12사도란 무어냐? 나라와 경계가 허물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이제 사도는 나 어떻게 구원받습니까가 아니라 이제는 예수님께서 챙겨놓은 제자들을 위해서 나 무엇을 포기해야 됩니까? 나라는 존재의 경계가 어떻게 허물어져야 합니까? 하는 그런 사람이 되러버린 것입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스데반 집사 같은 사람입니다. 나와 타인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것입니다.
어제 집사 임직을 했잖아요! 집사 임직을 했으면 나만 교회 나왔다 이러면 안 되고, 지난주에 왔던 분이 오늘은 왜 안 왔지? 하면서 누구에게 물어볼 것도 없이 이것은 아예 경쟁적으로 전화를 하든지 찾아가든지 해서 저 이번에 새로 된 집사인데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하면서 자발적으로 가서 묻는 것입니다.
나의 경계가 허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집사가 됨으로 새로운 도전이 시작이 된 것입니다. 나만 챙기면 되는 것에서 왜 남까지 챙겨야 하는가 하는 새로운 반발심이 나올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본인이 그런 반발심을 느낄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이 집사 되어가지고 한 것 뭐있느냐고 시비 걸려고 티격태격 하는 가운데서 그것을 새삼 느낄 수도 있고 어쨌든 경계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어떤 집사가 직분을 맡게 되면 안 챙겨도 될 사람까지 새롭게 챙겨야 될 임무가 성령으로 인하여 주어지게 됩니다. 전에는 나 때문에 울었던 내가 이제는 내 때문에 우는 것이 아니라 타인 때문에 속상하고 우는 그런 사랑의 범주에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손해가 아니냐 하겠지만, 그러나 남들이 모르는 세계에 참예되었다는 것이 이익입니다. 남들은 알 수가 없지요! 자기 밖에 모르는 세계이지만 그러나 그 세계란 나까지 포기되는 그런 세계이기에 그 세계에 하나님께서 집어 넣어준 그 자체가 그 사람에게는 하나의 축복이라고 여겨집니다.
마치 아들이 하나만 있다면 모든 부모의 사랑이 자기에게 다 집중되어 쏟아집니다. 기분이 좋습니다. 그런데 동생이 태어납니다. 그러면 그동안 알지 못하였던 임무가 주어집니다. 내 직장 나갈 때에 너는 동생을 돌보라는 것입니다. 새로운 임무가 주어지면서 나는 무엇이며 동생은 무엇이냐?
나는 동생 안에서 무엇이냐? 나의 울타리에 머물러 있던 나의 선에서 넘어서서 동생에게 나는 무엇이냐? 동생 입장에서 나를 비추어보는 범위가 새롭게 넓혀진 것입니다. 남이 나를 볼 때 나는 어떤 인간이냐 하는 범위가 넓어지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부모가 집에 와서 보고 너 동생 라면까지 끓여주었구나! 너 형답다! 만약 동생이 생겨나지 않았다면 너는 아들답다는 것은 되지만 너는 형답다는 말은 듣는 기회를 갖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동생이 태어나서, 엄마가 새롭게 임무를 부여해서, 어설픈 동생의 밥까지 챙겨주게 됨으로, 동생과의 관계에서 새로운 자아의 범주가 넓어지는 것입니다.
아! 형 노릇도 가능한 나, 새로운 나의 면모를 발견하게 되는 새로운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베드로후서에서 말하는 믿음에 덕을 덕에 자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형제우애를 형제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는 것입니다. 이까지 넓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넓어지는 것은 예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우리 속에 담아두고 비축하여 주셨다는 것을 타인의 관계 속에서 주님의 무한한 사랑의 능력을 체험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바라기는 지금 시간이 되었는데 모이는 사람이 보이지 않아서 객소리를 늘어놓았습니다. 집사님이 계셨으면, 안 나오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서 미리 전화를 하는 좋은 실습일 것입니다. 집사 되고나서 첫날부터 시작이 되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여자 집사님들은 목사님의 사모님이 그동안 얼마나 심하게 마음고생을 하셨는가를 아마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집사다워야 그렇게 체험을 하지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아니겠지만 우리가 몰랐던 그런 속 앓이를 했었구나! 우리는 어리광과 짜증만 내었는데 남 챙긴다는 것이 이게 장난이 아니구나! 그래서 안 보이시는 분이 오면 이제 오십니까하면서 챙기시고 집사님들 아시겠지요! 그것이 본인에게 축복이라는 이야기를 드리고 이제 오늘 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이 조직신학의 고속도로라는 긴긴 강의를 저와 함께 또 주님과 함께 이렇게 하였는데 핵심적인 것을 어느 정도로 알고 있는지 건방지게 한번 측정을 해 보겠습니다. 다음 두 가지 중에 어느 것이 맞는지 알아맞히어 보시기 바랍니다. 둘 중에 하나가 정답입니다. 여러분 어린아이들도 한번 알아맞히어 보세요!
1. 내가 죄를 지으면 주님이 용서 해주신다.
2. 주님은 용서 해야만 한다.
내가 죄를 지으면 주님이 용서해 주시는 분이다. 이것이 우리가 지금까지 성경의 복음을 아는 진리이냐? 아니면 주님은 너를 용서 하셔야만 한다는 것인가? 3번은 없습니다. 예수님을 알고 하나님을 알고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오늘 밤에 죽어도 천국에, 부활의 새 세계에 갈수 있습니다.
지금 제가 건방지게 여러분이 예수님을 누구신지 얼마나 알고 있는지를 측정해 보는 것입니다. 내가 죄를 지으면 예수님은 용서 해주시는 분이다. 이런 주님인가 아니면 주님은 용서 해야만 한다. 어느 것이 맞습니까? 정답은 2번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왜 1번이 정답이 아닌가 물으실 것입니다. 왜 1번이 정답이 아닌가 하면, 내가 죄를 지으면 주님께서 용서 해주신다는 말은, 내가 죄를 짓는다는 어떤 조건이 먼저 있어야 비로소 주님은 용서해 주시는 주님으로 계실 수 있다는, 내가 죄 짓는 행위를 해 주어야 용서 해 주시는 주님이 되신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죄 짓는 행위를 하지 않으면 주님이 어떤 분인지를 모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내가 죄를 짓든지 무엇을 하든지 내 쪽에서 무엇을 시도하는 것이 먼저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주님께서 너 죄를 지었느냐 내가 너를 용서할게 그러면 내가 주님을 믿습니다. 이런 식으로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겠느냐는 이 말입니다.
그런 주님을 잘 못된 주님입니다. 그런 주님은 애초에 계시지 않는 주님이라는 것입니다. 고마운 것은 용서 하셔야만 되는 주님이 진짜 주님이시고 고마우신 주님이신 것입니다. 주님은 그냥 용서 해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사람이 제일 괴로울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자기가 실수 하였을 때, 잘못하였을 때에 제일 괴롭습니다. 내가 이런 죄를 지었는데 주님께서 용서 하실까? 하면서 그 다음에 차후 적으로 이런 죄를 주님께서 과연 용서 해주실까? 하면서 내 죄 뒤에다 주님을 같다 붙여버리면 그 예수님은 어떤 예수님인가 하면 나에게 예속되어 나에게 놀아나는 예수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장난감이 되어 버립니다.
그런데 내가 어떤 행동을 하는지와는 상관없이 우리 주님은 어떤 주님인가 하면, 용서해야만 하는 주님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에 나의 어떤 행동과 상관없이, 내가 이런 죄를 지었으니 내가 어떻게 될까? 이제 나는 큰일 났다. 큰 저주를 받을 거야! 지옥에 가게 될 거야! 안절부절 하는 것과 상관없이, 내가 어떤 고민에 빠졌는가와 상관없이, 예수님은 그것과 상관없이 우리를 용서하신다! 이렇게 되어버릴 때에 여기는 평안과 행복과 마음의 기쁨이 충만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런 분이셨구나! 예수님이 나와 관계될 때만 나의 예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나와 관계 되지 않더라도 예수님은 용서 해주시는 분이신 것을 알 때 예수님은 안정감이 있고 너무나 든든한 것입니다. 나의 불안과 흔들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너무나도 든든한 것입니다.
이러면 우리는 모든 마귀의 시험으로부터 해방된 것입니다. 긴긴 시간 동안에 강의를 해오면서 이제 고속도로가 요금을 받는 지점까지 다 왔습니다. 아직 교회론과 성령론이 조금 남아있습니다만 이 긴긴 강의를 해오면 대부분 강의 끝나는 부분에 몽땅 같다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태복음 끝나면 마태복음 끝나는 순간부터 마태복음 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요한계시록 끝났습니다. 책거리 합시다. 박수 치는 순간부터 요한계시록 안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긴긴 고속도로를 어린천사들과 함께 멀리하지 않고 제 혼자 하면서 달려왔는데 이렇게 달려오면서 전에는 이랬는데 이제는 달라졌다는 무엇이 있습니까?
고속도로를 시작하기 전에는 내가 무슨 죄를 지으면 주님께서 용서 해주시는 분이신줄 알았는데 이제는 바뀌었어! 내가 어떤 형편에 있든지 용서는 주님께서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고유한 일인 것입니다. 내가 죄를 지었다. 그때 부랴부랴 주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고맙게도 주님은 처음부터 용서 해 주시는 분으로 오신 것이 하나님아버지로부터 받은 필수적인 그분의 임무라는 것을 알 때에 우리는 비록 흔들리지만 주님은 흔들림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우리에게 큰 기쁨이 되는 것입니까!
어째든 이 강의를 하면서 오늘 이런 정리가 됩니다. 예수님을 바로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거래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잘하면 복을 주고 못 하면 벌주는 그런 분이 아니라 예수님은 꾸준히 자기 할일만 꾸준히 하실 뿐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모라자고 부실한지 그것을 책하시지 않으시고 주님은 꾸준히 자기 할일만 꾸준히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을 믿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이 시간에 예수님께서 꾸준히 하시는 일중에 무엇이 있느냐 하면 이 교제 308페이지를 보면 영화에 대하여 라고 나와 있습니다. 영화라고 하는 것은 영광스럽게 변한다. 변모된다는 것이 우리가 요청하여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해같이 천사같이 영광스럽게 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이 영광스럽게 되는 것은 누구 몫이라고요? 누가 할일이라고요?
흔들리지 않으시는 예수님이 그냥 우리에게 해 주시는 일입니다. 그런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내가 이런 행동을 했는데 영화롭게 해 주실 건지 아닌지 하는 그런 초조함도 없어야 합니다. 우리가 초조 한다고 해서 해주고 초조하지 않는다고 해서 안 해주고 하는 그런 예수님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런 예수님을 믿어야 됩니다.
우리가 무엇을 더한다고 해서 더 잘해주시고 소홀히 한다고 해서 소홀히 대하여주는 그런 주님을 믿어버리면 내 행동 따라서 작았다가 커졌다가 하는 요술쟁이 같은 예수님은 가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분이 안라 우리가 어떻게 행동을 하든가 간에 예수님은 꾸준히 자기 할일을 하시면서 우리에게 퍼부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그런 예수님을 믿어야지 아침 다르고 저녁 다른 그런 변덕쟁이 예수님을 믿어버리면 그것은 마귀의 시험에 홀딱 빠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적용하기 위하여 아까 이야기 한 집사 이야기 다시 해봅시다. 그동안 교회에서 자기만 챙기다가 그동안 안 보이는 교인들을 챙기는 자기의 경계선을 넘었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것까지는 좋습니다. 나는 최선을 다해서 봉사를 하는데 그 봉사를 받는 분이 집사가 그것밖에 못 하는가 하면서 온갖 안 좋은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삐지는 것입니다. 에이 더러워서 안한다. 집사 포기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교회 보면 집사 포기하겠다는 사람이 줄을 섰습니다. 저 집사 안하겠습니다. 특히 주일 오후에 기도시키면 저 자살합니다하는 그런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아마 올해 몇 분 돌아가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기도시키면 죽겠다는 사람, 부담 되어서 못 나오겠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게 무어냐 하면, 바로 예수님은 기도 잘하나 못하나 그냥 예수님인데 예수님께 충실히 잘해야 예수님이 기뻐하지 않겠느냐는 자기 행동여하에 따라서 주님이 기뻐하고 아니 기뻐한다는 이상한 예수님을 상정하니까 그런 이상한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욕을 얻어먹어도 자기 일을 하셨는데 왜 우리는 욕을 얻어먹으면 자기 일을 중지하려고만 하는 것인가 하는 겁니다. 그런 자에게 성령이 임하게 되면, 주님께서 변덕쟁이가 아닌데 내가 평소에 변덕쟁이였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하여 집사를 세우신 것입니다.
내가 잘해주면 저쪽에서 잘해주겠지! 하면서 안일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잘해주는데 저쪽에서 악으로 돌아온다는 것도 있구나! 그런데 나는 참지 못하고 성질대로 하면서 에이 때려치우라! 집사 안한다. 내가 봉사 하고 싶어서 하나! 해 줘도 값을 못 받는데 왜 해! 이런 식으로 자기 본색을 드러내는 그런 일이 없기를 우리 의존교회 집사님들에 간곡히 부탁합니다.
다시 이야기 합니다. 내 행동과 관계없이 예수님은 든든한 분으로서 그냥 자기의 일로 용서를 해주시는 것입니다. 변덕쟁이인 자기 자신을 믿지 마시고 변덕이 없으신 예수님을 믿을 때에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는 것이 굉장히 쉽지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변덕쟁이 나를 믿는,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항상 변덕쟁이일 뿐인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변덕이 없으시고 한결같이 자기 일에 충실하신 그 예수님의 충실하심을 믿는 자가 구원을 얻습니다. 그 충실하게 이루시는 일 가운데 우리를 영광스럽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두 글자로 ‘영화’라고 하였습니다.
자기 일에 충실하신 것입니다. 자기 일에 충실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주님께서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믿음이 없는 사람은 내가 이렇게 나쁜 짓을 하였는데 나를 영광스럽게 해줄까 하면서 또 자기행동하고 주님의 일을 엮어서, 내 행동이 이렇기 때문에 영광이 안될꺼야라고 생각하는 것은 잠시 또 믿음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이쯤 되면, 시간이 이정도 되었으면 저의 취지를 대강 아시겠습니까? 아하~ 그러니까 내 행동과 상관없이 예수님이 일하신다는 것이 믿어지는 것이구나!
여러분 영광스럽게 하시는 것이 주님의 일인데 그렇다면 현재 우리 인간이 영광스럽게 어느 정도까지 영광스럽게 되는가 하는 그것이 궁금하지요!
지금까지의 강의를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영광스럽게 합니다. 우리의 행동과 상관없이 예수님이 자기 몫이기에 영광스럽게 하십니다. 그 다음에 어느 정도로 영광스럽게 하느냐 이것은 바로 예수님의 영광처럼 영광스럽게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영광스러운 것처럼 우리를 영광스럽게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어제도 잠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마는 요한계시록 1장을 제가 잠시 읽어보겠습니다.
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14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15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16 그 오른손에 일곱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이것이 사람의 몰골입니까? 엄청나고 희한한 모습입니다. 사도요한이 전에 예수님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전혀 아닙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나타나신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기존에 있던 인간의 코 눈 입 이런 것들은 완전히 해체되어 버립니다.
완전히 어디 갔는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예수님이 부활하시기 전의 그 초라한 모습은 온데간데없는 것입니다. 성형수술 해도 이정도로 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대단한 변화입니다. 베드로와 같은 경우에는 얼마나 놀랐던지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얼굴이 해같이 변하는 것을 보고서 놀라서 엎어진 것입니다.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로 모를 정도입니다.
지금 요한 계시록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요한이 너무 놀라서 죽은 자 같이 엎드려졌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영광의 세상의 어떤 부귀영화와 족히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축복을 예수 믿는 자에게 주님께서 자기 몫으로 그냥 해주시는 것입니다.
이 영광이 얼마나 좋았으면 주님께서 네 육을 죽이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겠습니까? 이것은 껍데기입니다. 리콜 대상인 것입니다. 고장 난 것입니다. 수리 점에 가야하는 것입니다. 지금 육체 때문에 고민한다는 자체가 예수님의 부활 앞에서는 도대체가 나올 수가 없는 사고방식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고난과 장차 올 영광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자는 반드시 이 땅에서 고난을 받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것을 조금이라도 슬퍼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장차 올 영광은 지금 너희들이 당하는 고난과 족히 비교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로 비교할 수가 없는가 하면 이것은 베드로사도가 베드로 전서에서 이야기 하였듯이 도무지 말로 문자로 이 지구상의 어떤 글자로도 표현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시로도 표현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감탄과 감탄 이외에는 표현할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그 초라한 사도바울이 삼층 천에 올라가서 보고 온 뒤에 내가 보고 온 것은 형언할 길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말로 표현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어린이에게 묻습니다. 태양이 밝습니까? 촛불 열개가 밝습니까? 그때 무어라고 대답을 합니까? 족히 비교가 안 됩니다. 그렇게 대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양천구 신월동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영광은 장차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부어줄 영광과 비교한 다는 것이 나쁜 것입니다. 그 정도로 비교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여러분들이 성경을 보면서 찾아낼 수 있어야 됩니다. 성경보고 찾아내라고 하면 잠만 자다가 침을 흘려서 성경만 다 적시지 않습니까? 교회 간다고 시어머니에게 얻어맞은 멍 자국만 만지고 있지 성경에서 이런 것을 찾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 다니는 바람이 무엇입니까? 교회 다니는 희망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족히 비교할 수 없는 그 영광의 나라가 장차가 아니라 이미 예수님께서 현재적으로 이루어주시고 지금 그 속에 포함 되어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이미 첫째 부활에 참예되어 있다면 왜 우리가 몸이 아프고 피곤하고 나의 영광이 이렇게 어설픕니까? 그러면 바울사도가 고린도후서 4:1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여기 보면 우리의 겉 사람은 후패한다고 합니다.
후패한다는 것은 너무 썩어서 훅 불기만 하면 날아가는 그런 상태입니다. 사람이 10대 20대면 피부가 팽팽하다가 40대 50대가 되어 보톡스 주사를 맞아도 결국은 만지기만 하여도 부스러지는 바삭 마른 종이처럼 부서져내려 앉는 것입니다.
어떤 공상과학 영화에 보면 주인공하고 나쁜 사람하고 싸움을 하는데 그 나쁜 놈들이 기계인간인데 너무 너무 싸움을 잘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주인공이 기계 인간을 당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이길 수가 없을까 하고 있는데 마침 그 싸움을 싸우는 현장에 액화질소 영하 200도 까지 내려가는 그런 물질이 있어서 그것에 기계인간을 넣어버리니 그 힘자랑 하던 기계인간이 꽁꽁 얼어붙어 버린 것입니다. 그것을 이단옆차기로 날려버리니 그 힘센 기계인간이 얼음조각처럼 부수어져 내리는 것입니다.
그때 생각한 것이 후패한 인간은 만지기만하면 와르르 무너져내려버리는 것입니다. 아무리 피부를 가꾸고 어떻게 애를 써도 이 몸은 무너질 날만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저의 머리를 보십시오! 옛날에는 안 그랬는데 저의 머리 정수리 부분이 훤해집니다. 여러분들이 애를 먹여서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 교체를 하기 위하여, 겉 사람과 속 사람을 일찍 교체하기위하여 이렇게 놀라운 축복을 주셔서 머리털이 뽑히게 하시는데 저는 그것도 모르고 지금 약을 발라서 후패하지 않으려고 몸부림 치고 있습니다. 농담인줄 알아야지^^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서 그 보조 행위, 병행되는 행위가 되는 후패케 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지금도 날마다 우리를 해체시키고 부수는 일들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신자가 아닌 사람은 왜 이럴까? 왜 이렇게 피부는 쭈그려질까? 해답도 모르고 진리도 모르고 누가 내 인생을 이렇게 망치는지를 모르기에 왜 이럴까? 왜 이럴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학교에서 손들고 물어보세요! 선생님 왜 인생은 늙고 죽습니까? 예야 네가 어디서 그런 심각한 문제를 질문하느냐? 그런 것을 커서 알아라! 답변도 안 해주고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 고린도후서 4장에 보니 이것을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의 겉 사람을 부수어 버리고 우리이 속 사람을 새롭게 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우리의 행위와 관계없이 주님께서 그렇게 일방적으로 일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도화지 삼아서 자기의 그림을 그리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을 가지고 자기의 조각품으로 쓰기 위하여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의 몸은 왜 후패하여야 하는가?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니 우리의 몸이 처음 만들어질 때에 흙으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흙으로 만들어졌으니 부수어져서 흙으로 돌아가게 하시는 것이 예수님이 열심히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너무 슬퍼하거나 노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일 잘하신다. 이 몸을 흙으로 돌리시구나!
그런데 왜 흙으로 돌아가는지를 모르는 사람은 참 불쌍한 사람이고 지옥 갈 사람입니다. 그런데 같이 흙으로 돌아가면서도 흙으로 돌아가는 이유는 예수님의 다른 몸이 준비되어 있기에 내 이 몸은 철수되어야 하고 철거되어야 하는 것이구나! 그러니 이 몸은 흙으로 돌아가야 되고 흙으로 돌아가면 우리에게 새로운 몸이 주어진다. 그 몸이란 예수님의 영광의 몸이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 몸은 흙에서 만든 몸이 아니라 하늘에서 만든 몸입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의인들은 하늘에서 해같이 빛난다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 믿는 우리들은 하늘나라에서 태양과 같이 눈부시도록 빛이 난다고 합니다. 그때에는 천사와 같아진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이 천사처럼 되면 어떻게 될까요? 천사는 늙지도 않지요! 천사는 빛이 나지요! 광채가 나지요! 천사는 아픈데도 없지요! 천사는 오래 살지요! 특히 하늘나라에서 살지요!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은 그 천사보다 더 멋진 모습으로 영원토록 죽지 않는 상태에서 마음껏 즐거움과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 교회가 아니면 어디서 이런 있는 현실을 이야기 하겠습니까? 세상이 이야기 하는 것은 이 부서지는 흙을 가지고 아깝다고 서로 싸우고 하는 것이 세상 이야기라면, 교회에서는 그것이 무엇이 아까운가? 우리는 다른 몸이 있는데 하면서 당당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만약 어린이 여러분의 집에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빵이 산만큼 있다면 여러분의 손에 있는 맛없는 건빵하나 친구에게 줄 수도 있습니다. 건빵 그것 하나줘! 그래 가져가! 야 너는 마음씨가 곱구나! 마음씨가 고운 것이 아니라 우리 집에 가면 그것보다 훨씬 맛있는 것이 있다고 하면서 그런 건빵 하나 줄 수가 있겠지요! 그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그 약속을 믿게 되면 그 약속이 내 속에서 현실상황이 되고 실제가 되어서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얻고자 하는 것에 대하여 얻지 못하였다고 마음이 아프거나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이야기 한 것을 정리해보면,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어떻게 해 주신다고 하였습니까? 영광스럽게 해 준다고 하였습니다. 하늘의 천사처럼 해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그 영광스러움은 예수님의 부활처럼 우리가 곧 그렇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두려워하거나 걱정을 하거나 근심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미래가 확정되어 있기에 장래가 확정되어 있기에 그렇습니다. 이 땅에서 어떤 일과 사건이 일어난다고 해도, 내가 잘하면 영광스럽게 해주는 것이 아니고 내가 못한다고 영광이 깎아지는 것이 아니고, 내가 잘 하는가 못하는가에 상관없이 예수님께서 자기가 아버지께 받을 일이기에 이루어내신다는 것이 믿어지는 사람에게는 그 영광이 그대로 자신의 영광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 우리는 하나의 도화지이고 예수님은 우리의 몸을 가지고 자신의 솜씨를 마음껏 발휘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 솜씨를 보고서 잘하십니다. 박수를 치면서 성경 말씀대로 잘 되어 갑니다. 역시 예수님은 든든하십니다. 그런 마음을 여러분이 가져 주셔야 됩니다. 여기 까지는 여러분이 잘 아시니 안심이 됩니다.
이제 그 다음 이야기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영광스럽게 해 주시는데 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영광스럽게 하지 못하느냐 하는 것을 이야기 해 드리고자 합니다. 교회 행사가 있으면 온 교회가 다 피곤하여 다 축 처지는 것입니다. 후패하는 육신을 가지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방금 이야기하기를 예수님께서 우리를 해와 같이 빛나게 해 주신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면 왜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 빛나게 하지 못하는가? 왜 예수님이 다 해주셔야 하는가 그기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왜 우리는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지 못하고 예수님께서 해 주셔야 되는지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사람은 자기가 하는 것을 항상 자기 것이 되지 남의 것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이유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내가 착하면 내가 착하지 착한 일도 하지 않는 내 옆에 있는 사람이 같이 착하여 지는 것은 인간 세계에서는 없습니다.
내가 혼자 잘나서 구원받고 내가 혼자 잘나서 복 받는 것이지, 내 복이 남의 것이 되고 내 구원이 남의 구원이 되는 것인 우리 사람에게는 없습니다. 그것을 어려운 말로 개별자라고 합니다. 어린이 여러분의 노트에 쓰면 어린이 여러분도 잘 모르고 어른들도 잘 모르는 말입니다.
자 여기에 떡이 있습니다. 이 떡을 내가 먹으면 누가 배부릅니까? 떡을 먹는 내가 배부르지 먹지 않은 내 친구가 배부른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얼마나 고마운 분이신지,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하시고 영화롭게 되신 것은 예수님 혼자만의 영광이 아니라 예수 믿는 우리 모두에게 영광스럽게 하는 솜씨가 예수님께만 있기에 우리는 예수님만 믿습니다. 나는 못하니까 믿습니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못하는 것을 알기에 예수님만 믿고 의지합니다. 목숨 걸고 의지합니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나쁜 사람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여러분들이 착하면 그것이 여러분의 착함이 됩니다. 여러분들이 의롭게 행동하면 여러분들이 의롭게 됩니다. 자꾸 이런 식으로 가르칩니다. 아닙니다.
진짜 이것은 어려운데 주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하신 그 착한 일이 예수 믿는 사람에게 넘어갈 때에 그것은 예수님만이 하실 수가 있습니다. 내가 떡을 먹고 배부를 때에 옆 사람은 배부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내가 떡을 먹을 때에 옆 사람도 배가 불러지게 될 때에 그것을 착한 사람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실컷 떡을 먹었는데 옆 사람이 배부르지 않았다면 하나님 보시기에 그것은 예수님보다 못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하신 것이 남의 것이 되는데 너는 왜 네가 한 것이 너에게만 해당되고 남에게 못 넘어가는가? 그러니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가면 다른 사람의 죄도 지고 가신다는 이것이 아버지의 뜻이지, 저도 착한데요. 저도 훌륭한데요. 다른 사람을 몰라요! 이것은 하나님이 원래 원하시던 그런 착한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은 나는 착합니다. 하여도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이 어려운 것이 지나갔는지도 모르겠지요? 예수님과 우리를 비교해 볼 때에 예수님은 어떤 일까지 하시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자신이 착한 일을 하신 것이 남에게까지 넘어갑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무리 착한 일을 하여도 그것이 남에게 넘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하나님이 원하였던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기에 우리는 탈락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만이 합격이고 우리가 하는 것은 불합격인 것입니다.
제가 강도이야기 하고 마치겠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를 졌던 강도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는 아무것도 착한 일을 한 것이 없이 평생 나쁜 짓만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 어떤 마음이 들었는가 하면 물론 하나님께서 그런 마음을 주셨지만, 옆에 계신 예수님의 덕을 내가 볼 수 있다는 그런 마음이 생겼습니다.
자기 옆에 계신 예수님의 착함이 바로 나의 착함이 될 수 있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믿음이 있습니까? 보통 사경회하면 이런 때에 아멘하면서 메아리가 쳐야 하는데, 예수님이 하신 일이 나의 착한 일이 되어진다는 것을 강도는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날 밤에 그 강도는 예수님과 함께 천국에 갔습니다.
이것이 사실입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예수님만 믿어야 됩니다. 어려운 말을 한다고 해서 훌륭한 사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어렵고 쉽고 가 아니라 사실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방금 제가 이야기 한 것은 예수님의 착함이 나의 착함이 된다고 하였지만 오늘 이야기 한 예수님의 영광도 누구의 영광이 됩니까? 역시 우리의 영광이 되었다고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예수님이 얼마나 고마운 분인지, 이 세상의 어떤 무엇보다, 온 천하보다 예수님의 이런 고마움을 아는 여러분들이 바로 천국의 아들이요 딸인 것입니다. 조금만 떡 먹고 합시다.
녹취 060621 이장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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