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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Re..20050307 부산강의-칼빈의 교회론강의마태복음

Re..20050307 부산강의-칼빈의 교회론

이름 : 한윤범(IP:)

20050307 부산강의-칼빈의 교회론
(강의:이근호 목사)

127페이지부터 시작합시다. 127페이지에 뭐가 있느냐 하면, 밑에서 여덟 번째 줄에 교회관에 대해서 있습니다.

[조직신학의 고속도로]에 거기 보면 교회에 대해서 교회론을 쓰면서 뭐부터 출발했느냐 하면, '남은 자' 개념부터 출발했지요. 그러니까 교회론 다시 전에 여러분들이 아시나 모르겠습니다만 교회론을 할 때는 반드시 ‘그리스도론’이 구축되어 있어야 되고, 이 그리스도론으로부터 그냥 교회론 가면 안 돼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서 그리스도로부터 그리스도 몸이 나올 때, 그리스도와 그리스도 몸이 달라요. 그리스도 몸이 나올 때 이 몸은 이미 역사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올 때부터 역사성을 갖게 되어 있다면, 어떻게 묵시성이 역사성과 결합될 수 있느냐? 그 문제가 해결이 돼야 됩니다. 그 해결의 과정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이라 할 때 마태복음에서는 성령으로 잉태했다 해서 성령이 거하는 곳으로 역사성을 갖게 되는 거죠. 성령의 거하는 곳에 새로운 몸이 등장이죠. 이 새로운 몸은 기존의 아담에 속한 몸과 대결구조, 대립되는 구조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임한다는 성령은 종말의 영 아닙니까? 종말의 영이 오게 되면 기존의 아담에 속한 모든 몸에 대한 고발과 정죄와 부정의 의미가 거기에 담겨 있다 이 말이에요. 그것도 모르고 예수님의 몸이 하늘에 있다면, 우리는 어디 있느냐? 그것 가지고 논쟁을 하는데 예수님의 몸이라 하는 것은 우리의 몸을 부정하는 그러한 역할을 하고 있는 거지, 존재론적으로 어디에 있느냐? 이렇게 묻는 것은 그 자체가 역사와 묵시의 결합을 몰라서 그래요. 역사 같으면 묻지요. 예수님 지금 어디 있습니까? 역사적 같으면 팔레스타인 있을 때는 대한민국엔 없었지요. 분명히 없었지요.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있을 때는 유다지방엔 없었어요.

역사성을 갖고 역사성 속에서 몸이라 부를 때는 하나의 실존적인 실제적인 육체에 제한된 키 얼마, 몸무게 얼마 나간다는 제한된 그런 규격이 있고, 그 규격 속에서 표현하는 거예요. 역사 속에서. 그냥 묵시 속에서 몸이라 할 때는 아담을 대신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그러한 인간적인 하나님 형상으로서의 역할을 누가 해내느냐의 새로운 몸이 등장합니다.

어디에 공간을 점유하느냐를 가지고 몸이라 하는 게 아니고 제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다운 면모와 역할을 사명을 감당하느냐? 라고 물으면서 몸이라는 말을 사용한다고요. 이걸 도대체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없어요. 왜 그러냐 하면, 자꾸 역사에서 묵시로 구원받으려고 하기 때문에 그래요. 종교적인 현상인데.

묵시에서 역사로 결합을 하자. 이렇게 되면 사상이 성경적이 아니고 초자연적이죠. 다시 말해서 영적이다 이 말이죠. 인간에서 나온 발상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몸을 부정하고 고발한다. 이러면 성경적이죠. 처음에 왜냐하면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 형상 아닙니까? 처음에 인간을 만들 때는 흙에 속했기 때문에 흙에 속했다는 것은 공간을 점유하는 실제적인 물체, 사물이지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라. 사물적인 요소를 요합니다.

이것을 그때그때마다 부정을 하는데 뭐로 부정을 거부하느냐 하면, 아브라함 같은 경우에는 이삭을 가지고 이스마엘을 거부하잖아요. 언약을 가지고 기존에 속한 인간의 몸의 혈통을 부정해버려요. 내가 원하는 인간은 이스마엘이 아니고 뭐다? 이삭이다.

그러면 이삭은 어디서 나왔는가? 이삭을 어디서 나왔느냐하는 것을 가지고 사라의 몸을 사라의 잉태를 과학적으로 현미경으로 들여다봐서 거기서 배태하는 성장과정, 태아 이런 것들 아무리 조사해 봐야 이삭이 왜 거기서 나왔는지 몰라요. 이마 사라의 태는 죽었지요. 죽었다는 말은 사물로서 더 이상 새로운 사물이 나올 수 있는 가능성은 완전히 박탈당한 거예요. 사물로서 폐지당한 거예요.

그러면 이것은 사물은 사물인데 새로운 사물을 생산할 수 없는 죽은 거죠. 근데 여기에 새로운 창조가 나오는데 그 새로운 창조는 바탕은 죽은 사래의 태에서 바탕을 한다 할지라도 새로운 창조는 조금이라도 사래의 태의 기운이라든지 생명력을 필요로 합니까, 필요로 하지 않습니까? 일체 필요로 하지 않죠. 요구하지 않는다고요.

이게 묵시의 위력입니다. 이게 놀라운 위력이에요. 사람이 구원받는 것이 아들 권세 되는 것이 사람 혈통이나 육으로 나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로 난 자라 할 때 이게 완벽한 묵시적인 능력입니다. 그것은 사래의 태가 죽어야 되듯이 우리가 지금 펄펄 살아도 사실 죽은 것으로 간주돼 있어야 돼요.

지금 늦게 오신 분들에게 이야기해 드립니다. 그리스도의 몸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그리스도 몸이 다르다는 거지요. 그리스도의 몸은 인간의 몸과 또 다르다 이 말입니다. 인간의 몸은 역사성을 가지고 공간성을 가지고 일정한 공간을 점유하고 이 지점에 있으면 저 지점에 없는 그러한 육체적 사물성을 띠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이라 할 때 과연 인간다운 인간, 언약에 합당한 인간이냐 하는 그런 활동력을 가지고 인간으로 간주하는 거예요.

백날 건장하게 밥 잘 먹고 튼튼하게 있어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거기에 하나님의 언약이 담겨 있지 않으면 허구로 보지, 인간으로 안 봅니다. 에이, 이거 허구 아이가. 이게 무슨 인간이야. 니, 죽어라. 해서 몇 년 뒤에 죽잖아요. 어떤 사건을 만들어서 죽는다 말이죠. 항상 죽을 때 하나님께서 사건을 만들어요.

이은주 씨가 죽을 때 사건이 있었지요. 주홍글씨라는 영화를 찍었잖아요. 차라리 조용한 데 시골 농사지었으면 그렇게 안 죽었을 텐데. 꼭 자기의 욕망대로 원하는 대로 다 해줘요. 마귀가 그렇게 해주겠지요. 영화 되고 상영하는데 결국 영화 때문에 죽고, 이것 받쳐 죽고, 스트레스 받아 죽고. 이렇지요.

내버려두지만 그 내버려두는 이유가 너무나 운명이 확정적이기 때문에 내버려두는 거예요. 내버려둔다 이 말은 뭐냐 하면, 백날 가봐야 갇혀있다 이 말입니다. 흙이니까 백날 흙에서 탈출해봐야 흙에서 끝나는 것은 선고가 내려졌잖아요. 선고가 내려졌기 때문에 원하는 대로 해보는 거예요. 자유의지를 가지고 마음껏 시켜보는데 거기서 끝이지요.

인간의 사물성, 흙으로 된 이것을 하나님께서 묵시가 역사를 만날 때는 역사의 협조를 구하는 것이 아니고 역사가 니 없이 일이 안되는 게 아니라 부정해버리지요. 그래서 천주교에서 말하는 마리아가 무흠 상태에서 잉태했다는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겁니다. 마리아는 무흠 상태에서 예수님을 잉태한 게 아니고 성령으로 잉태한 거지, 마리아의 무흠 상태에서 오염이 없는 상태에서 구원되는 게 아닙니다.

천주교는 놀랍게도 역사와 묵시를 통합하려고 했어요. 이게 바로 가장 이단적인 사고방식 아닙니까. 역사와 묵시를 통합해서 눈에 띠는 손에 잡히는 그러한 그리스도의 몸을 만들고자 했는데 그쪽을 누가 따라가려 하느냐? 현재 개신교가 다 따라가지요. 거기에 대한 중심적인 핵심이 뭐냐 하면, 하나님은 인간을 통해서 한다는 인간을 통해서 사상이에요. 거기에 신조를 집어넣어서 하는 겁니다.

교회라 하는 것은 그리스도 몸이라고 이야기해줘야 돼요. 교회를 그냥 문자적으로 해석해버리면, 교회라 하는 것은 원어상 집회, 모임 그뿐이에요. 아무 그 외에는 없습니다. 교회란 모임. 새부산교회 같으면 새부산모임. 그 의미 밖에 없거든요. 그러니까 교회라 하는 것을 맨 날 원어분석하고 백날 해도 그냥 모임이지, 그 모임이라 하는 것은 모일 때만 모임이고, 흩어질 때 무슨 모임이 아니잖아요. 자기 집에 있는 데 무슨 모임입니까? 자기 집에 혼자 있더라도 구원이 될 때에는 교회로 구원된다 하지 말고 그리스도 몸이기 때문에 혼자 있어도 구원받습니다.

교회 다니다가 어떻게 일이 있어서 교도소에 혼자 독방에 있다. 그 사람은 구원받겠나? 구원받지요. 왜? 교회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몸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런데 그 사람이 출소해서 다시 모였다. 그러면 또 교회 되는 거예요.

교회라 하는 것은 교회되자 라는 건 말이 안 되고, 교회라 하는 것은 결과물에 불과하지요. 무슨 말이냐 하면, 교회란 목적물이 아니고 결과물이다. 목적물이 아니기 때문에 뭐, 교회를 목적의 일의 대상으로 삼으면 된다, 안된다? 목적물이 아니기 때문에 교회를 대상으로 삼으면 안돼요. 결과물이기 때문에. 똥 누기 위해서 밥 먹는 이런 바보 같은 사람이 없어요.누잖아요. 결과물이잖아요. 배고프다. 아, 똥 눠야겠다. 밥 먹어야겠다. 그건 말이 안 되고, 배고프면 밥 먹기 위해서 밥 먹는 거지 똥 누기 위해서 먹는 건 아니란 말이죠.

그리스도 몸이니까 교회가 된다는 거지요?
-몸이니까 모이기에 힘쓰면 되지요. 하나니까. 모이기에 힘써야 되지요. 모일 때 그러니까 이렇게 되는 겁니다. 삼촌, 조카, 올케, 시누이, 모일 때만 가족입니까? 아니잖아요. 각각 서울, 부산, 대전, 목포, 어디 찍고 하와이, 어디 살아도 살아야 되는데 자주 모이면 좋지요. 정드니까. 모일 때를 모임이라 하는 거예요. 그 모임을 다른 말로 하면, 교회라 한다 이 말입니다.

오늘 아침에 그런 글을 썼습니다만. 어제 대구에 눈이 많이 왔어요. 부산도 눈이 좀 온 것 같아. 어제 대구에 눈이 많이 왔는데 그래서 식구들이 말려서 교회에 못 왔다고 결석보고서 같은 것을 올렸는데. 제가 이랬어요. 앞으로 눈 많이 오면 오지에 아동들에게 사랑의 도시락 배달하듯이 내가 가면 될 것 아닌가? 앞으로 눈 와서 못한다 하면 이쪽에 예배 주최 측에서 가주면 되는 거예요. 사랑의 배달, 도시락. 그러면 그 모임은 뭡니까? 교회 아닙니까? 그 집에서 모이면 되거든요.

교회를 생각하지 않고 그리스도 몸을 생각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내가 성도를 만날 때 헌신해야 되고, 봉사해야 된다. 라는 의식이 강렬해지고요. 교회를 위해서 해야 된다고 하면 교회라 하는 것은 이게 소유물이 되어 버려요. 하나의 사업이 돼버린다고. 그러면 손가락으로 자기 눈 찌르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스스로 파멸의 길을 걷습니다. 왜냐하면 소유기 때문에.

누가복음 14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모든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버리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그런 예수님의 말씀 같은 것들이 나중에 사도 바울의 교회론에서 어떻게 해석되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전에 대구에서 그런 강의 했지요. 예수님의 말씀은 그냥 말씀으로 받아들이면 안 되고 반드시 뭐하라 했습니까? 사도 바울이나 사도들의 해석을 어떻게 예수님 말씀을 해석했는가 봐서 그 해석을 우리가 봐야 된다. 이렇게 이야기했지요.

그렇지 않으면 서신서를 뭐 때문에 줬습니까? 예수님의 하신,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는 그 말을 니가 두벌 옷을 가지지 말고, 지갑이나 그런 것 갖지 말고 전하라 이 말씀. 이 말씀을 예수님이 이야기할 때 산상설교에 이야기할 때 그것이 사도 바울에서 또 사도 베드로에서 사도 요한에서 그것이 어떻게 예수님 말씀을 해석 했던가 해석된 게 있잖아요. 그 해석을 받아들여야지. 지가 뭔데 예수님 말씀을 직접 해석합니까? 말이 안 되지.

그것 때문에 논란이 많습니다. 인터넷에. 니는 바울 말이 최고데, 예수님 말이 최곤데 이렇게 하면서 ....
-그거는 김세윤 교수가 거기에 대해서 잘 정리해 놨어요. 김세윤도 그전에 FF 브루스가 얘기했지만 그게 뭐냐 하면 이거에요. 사도의 말씀이 사도의 말이 아니고 예수님의 말씀이다 하는 그게 잘 안 받아들이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경 자체가 장난삼아 쓴 줄 알고 사도가 잘된 편지, 골라서 쓴 줄 알지만 성령께선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참고로 이야기해서 이사야에 보면 장차 영인 성령이 오게 되면 성경을 확정하는 주체자가 성령입니다. 왜냐하면 종말의 영으로서 합당한 방언, 합당한 계시는 인간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종말의 영이신 성령께서 자기 몫으로 확정지어 버려요. 그래서 베드로후서에 보면 성령으로 확정되었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어쨌든 그 이야기 좀 더 해봅시다. 예수님의 말씀을 사도가 해석한 그걸로 받아들여야 됩니다. 왜냐하면 전체가 성경이니까. 그렇다면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했을 때에 교회라 하는 것이 하나의 새로운 소유로 등장 못하게 하는 가장 큰 이유가 뭐냐 하면, 교회 앞에 모든 소유를 버리면 교회되느냐? 그거는 말이 안돼요.

그래서 초대교회 보면 유무상통했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도 유무상통하면 교회 되는 줄 알고 박태선이 같은 그런 게 생기잖아요. 나중에 박태선 자기 가족들이 다 가져갔지만. 교회에 소유를 버리는 게 아니고 소유를 버리되 그리스도 몸에게 버려야 돼요. 이게 자꾸 교회와 그리스도 몸이니까 교회로 대체하자 이렇게 나오면 큰 일 납니다.

흔히 이걸 모르기 때문에 나오는 잘못된 해석이 뭐냐? 고린도전서 해석이에요. 고린도교회는 교인인데 교회 잘되라고 개혁하는 게 고린도전서다. 아니에요. 고린도교회는 교회가 완전한 게 아니고 모임인데 무슨 완전해요. 하나님 은혜로 그리스도 몸이 완전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거기에 들락날락 많이 해요. 많이 축출하고 잘라내고 많이 그럽니다.

왜냐하면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않고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 고린도전서 입장에서, 그리스도 몸의 입장에서 그게 어떻게 실효성 있게 모습을 드러내는가를 그 증거물로 에베소, 빌립보, 골로새 이런 게 다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이 교회 모임을 통해서 이런 식으로 드러나는 겁니다. 거기에 세례라는 말도 나오고 하는데. 그러니까 고린도전서가 참 무지무지하게 어려워요. 어려운 것도 나중에 또 할 시간이 있겠고.

그리스도 몸은 뭐냐? 결과적으로 교회기 때문에 교회라고 이야기하면 안 되고 목적 자체는 그리스도 몸이니까. 그리스도 몸이라 하는 것이 목적이 교회 만드는데 있는 게 아니고 역사적으로 인간 몸에 대한 고발과 정죄에 있다. 그리스도 몸 안에는 의가 있고 인간 안에는 죄가 있다. '엔 그리스도', '그리스도 안' 그리스도 몸이라는 말은 '그리스도 안'이라는 말을 대체한 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그리스도가 그리스도 몸이 될 때 역사성이 갖고 있을 때 뭐로 되느냐 하면,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그리스도 몸이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성령을 통해서 잉태했기 때문에 성령에 의해서 그리스도는 역사성을 갖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성전은 어디 있느냐 하면, 바로 역사성을 갖고 있는 우리 육체 속에 성령이 있는 사람은 그 안에, '예수님의 집'이라고 표현했는데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해요. 예수님의 집으로서 우리를 가지고 있는 거예요. 우리 몸이 성전이다 이 말이죠. 성령이 임하는 성전이다 이 말이죠. 그 안에 그리스도가 함께 있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이걸 역사성 쪽으로 생각해서 내가 그리스도 몸이니까 그럼 내 행동 하는 것도 완벽하지 않느냐? 이렇게 나온다 말이죠. 내가 그리스도 몸이라 할 때는 역사적 입장에서 몸이라고 한 게 아니고 공간적 한 지점을 점유하는 육체적 살점 갖고 있다고 몸이라 하지 않고, 주님이 성령 안에서 활동한다 해서 그리스도 몸이라는 표현을 했는데 그 몸이라는 표현이 있다고 해서 그걸 공간적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몸이라고 있으니까. 그 몸이 이 몸이니까 그러니까 내 몸둥아리는 예수님 몸이니까 내가 하는 행동, 내가 사업을 하든지 목회를 하든지 나는 완전하잖아.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 있잖아. 그래 된다 말이죠.

그리고 그것보다 더 무서운 이야기는 오늘날 이 이야기는 거의 99.99%가 주장하는 게 뭐냐 하면, 역사적 몸은 자랍니다. 자라죠? 씨앗이 나무가 되고 나무가 열매를 맺잖아요. 자라잖아요. 안에 생명이 있으니까. 그리스도 몸이 자라난다는 거예요. 내가 보기에 미친놈이야 완전히. 그리스도 몸이 자라난다는 거예요. 어떻게? 성화되어서. 99.99%가 다 이렇게 주장해요.

이런 묵시성을 알지 못해서 예수님의 완전성이 활동하는 그 자체를 몸이라고 표현한다는 걸 모르고, 기존에 애가 어른 되고 점점 자라, 이걸 염두에 두고 그러니까 예수님의 생명이 들어왔으니까 예수님의 생명이라 하는 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생명이 아니고 에네르기, 기, 동양철학에서 말하는 기죠. 기가 들어와서 생명력이죠. 생명이 아니고 생명력이죠. 그 사람은 생명과 생명력을 혼동하고 있습니다. 생명력이 있어서 점점 더 말씀이 들어오면 자라난다는 거예요. 기가 자라듯이 몸이 자라듯이. 그래서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성화를 바르면 인물도 좋아진다 하는데. 인물도 좋아지고 시력도 좋아지고 변비도 없고.

인물이란 세월이 가면 망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원빈이고 고소영이고 해도 나이 먹으면 꼴 보기 싫어져요. 그리고 인물이란 이발하면 좀 낫고 이발 안하면 못 생기고 그런 거예요. 잠언서에 보면 노인의 면류관은 백발에 있다. 그때 그랬지요. 그러나 새로운 마지막 때 가오면 예수님의 몸이 오면 인간의 몸은 지가 백발이 됐든 염색을 했던 관계없이 그 자체가 이미 흙으로 확정적이요 부정해 버려요. 그 백발입니다. 백발 부정해버려요. 그 자체를. 전 총체를 부정해 버립니다. 거부해 버려요. 부정해 버리는 거예요.

인간의 몸 가지고 자라난다 하는 이런 사고방식 자체를 전부다 부정해버리는 겁니다. 인간의 몸이 자라나는 것은 일종의 영과 육을 결합시키는 영지주의적 사고방식 때문에. 이걸 이쪽에 고발한다고 생각 안하고 결합한다는 거예요.

혈육이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하나님 뜻으로 난다 할 때에 혈육과 사람의 뜻이라 하는 것은 어떻게 영적인 도움이 안 됩니다. 그러면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그러면 이삭이 어떻게 사라의 몸에서 잉태를 했느냐? 사라가 전혀 도움이 안 되고 아브라함이 도움을 준 적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비아그라 두 알 먹고 하지 않았습니다. 도움이 안 됩니다. 이거는 뭐냐? 하나님께서 때가 되매 말씀을 성취할 때가 되매 약속을 성취할 때가 되매 그 약속을 주매 하나님의 일방적인 능력으로 없던 이삭이 태어난 거죠 뭐. 그런 거야? 예. 그런 거죠 뭐.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우리가 왜 구원받았습니까? 때가 되매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시고 야곱처럼 사랑하는 자로서 사랑 받기 위해서 때가 되매 태어났고 때가 되매 거듭나게 하시고 때가 되매 부르시고 때가 되매 영화롭게 하셨잖아요. 그렇게 하셨잖아요. 하셨다 이 말입니다. 역사를 초월하잖아요. 예수 믿는 나는 애초에 없었어요. 없었는데 하나님의 언약이 임하니까 예수 믿는 이근호가 되고 예수 믿는 여러분이 있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예수 믿는 여러분 된다 하는 것은 그전에 태어날 때부터 없었던 거예요. 역사 속에 있는 우리가 아무리 교회 다니고 구원받고자 해도 그거는 상관없는 자기 취미활동이에요.

지금 오늘날 교회 가장 문제점이 뭐냐 하면, 교회 다니는 게 취미라는 사실이에요. 이거는 어느 교회 할 것 없이 마찬가지에요. 교회가 취미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자기가 다니고 싶으면 다니고, 말고 싶으면 말고 그 권한은 자기한테 있다는 겁니다. 마치 단골 미장원 하나 정해 놓고 다니듯이 그저 머리 잘나오면 그땐 대충 다니다가 머리 좀 못나오면 한바탕 싸우고 다른 미장원 가는 것처럼.

제가 광주 가서 이런 강의하니까 광주 목사님들이 굉장히 웃던데. 웃는 게 이해되지요. 목사가 예배 마치고 난 뒤에 목사의 성적표가 뭐냐 하면, 보통 성적표 수우미양가 받잖아요. 목사의 목회 성적표가 뭐냐 하면, 헌금 개봉할 때입니다. 오늘 얼마 나왔느냐? 많이 나오면 오늘 수다, 수. 그런데 헌금 적어 나오면 양, 가. 얼마나 초조한지, 그 헌금 개봉.

또 목사님들이 웃는 것은 그렇게 이야기할 때 웃었는데 뭐냐 하면, 토요일에 설교 준비 많이 해 놨잖아요. 아침에 딱 눈 와 버렸어. 여기 김 집사 안 나오고 최 집사 안 나오고 화가 나서 설교할 마음이 안 나는 거예요. 화딱지 나서. 나는 되게 준비를 많이 해서 오늘 이러면 은혜 받을 거라고 준비를 되게 많이 해놨는데. 아침에 목사 지 혼자 나와 있고 중요한 사람 다 빠져버리고 공짜로 점심 먹을 사람만 앉아 있고. 이거는 화가 나서 준비한 건 대충 기계적으로 사무적으로 하기는 하는데 씩씩거리면서 설교를 하니 결국은 뭐냐? 예배 때려치워버리고 빨리 점심 먹읍시다. 이런 식이라. 그러니까 목사가 선동한 셈이 되는 거지요.

그럴 때 하나님께서 목사를 가르치고자 일부러 눈 오게 하신 거예요. 니가 백날 해도 결국 그리스도 몸에서 헌신하는 게 아니고 교회가 그 순간 자기 소유물이 돼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교회란 것이 하나의 교회를 그리스도 몸을 역사화한다는 이게 얼마나 이러한 유혹이 평생 우리가 역사적 실체를 갖고 있는 이상 계속 유혹으로 끝까지 가는 거예요. 계속 스스로 그걸 거부해야 되지요.

오늘도 주께서 이렇게 보내셨구나. 놀라운 기적이다. 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주신 말씀 가지고 같이 은혜를 나누고 이러면 될 텐데. 이거 오늘 김 집사, 또 안 오네. 나오신 분들은 오늘 내 .... 안 그러면 핑계만 하여튼 핑계만 있으면 안 오려고 반항한다. 또 안 온다. 자존심 상하는 게 .... 아이구, 저게. 오늘 박 집사님 또 안 오네. 그 사람은 평소에 안 그러던 사람인데 미치겠네. 나중에 또 10분 늦게 오면 다시 해야 되고. 맨 날 이 싸움하다 흐름 다 깨버리고 내가 준비한 것도 ....

목사님 이야기 아닙니까?
-이게 내 이야기만 아니고 누구나 이야기인데 놀라운 사실은 설교하면서 이러한 생각의 교차가 1초에 열 번도 더 계속 교차하면서 그것을 부정해 가면서 설교해야 되는 거예요. 부정해 가면서. 그래서 강의보다 설교가 더 어려운 거예요. 계속 그런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스스로 싸우는데 1초에 몇 번씩 싸우는 거예요. 그래서 나중에 파김치가 되지요.

결국은 결론은 뭐냐 하면, 주의 은혜가 아니었으면 이 복음 못 전했다는 거지요. 내 설교 실력으로는 되는 게 아무것도 없다. 왜? 실력대로 하면 교회가 소유물이기 때문에 내 원대로 하는데. 끝나고 나면 이게 참, 주님께서 간섭해야 구원이 되지, 이게 뭐, 교회되는 건 그건 나중이고 나부터 구원되지, 주님의 은혜 없으면 한시도 안 되는구나 하는 걸 깨닫지요.

그게 바로 지금도 역시 '남은 자' 개념이라 그러니까 그리스도 몸이라 하는 것은 어떤 실체를 말하는 게 아니고 구약에서 남은 자 개념이 구약에 했던 것이 신약에 종말에 그대로 다 적용되는 그 현장에 나타난 결과물이 뭐다? 이게 교회다. 계속 들쑥날쑥 이에요. 저 사람 만큼은 천하에 복음 안다 했는데 5년 후에 가보면 절에 가 있고. 신학교 때 복음 같이 했고 기뻐했던 사람들. 나중에 10년 뒤에 만나면 완전히 이단 되어 있고. 교회 장사하고 있고. 이게 남은 자 개념은 개인구원이 아니고, 여기까지 결론 내려 봅시다.

남은 자 개념은 개인을 구원하기 위한 개념이 아니고, 그리스도 몸을 위해서 여기 남은 자 개념이 여기 들어가야 됩니다. 왜 개인은 안 됩니까? 개인은 흙이거든요. 개인은 부정당해야 돼요. 누구로부터? 그리스도로부터 부정당해야 될 몸이기 때문에 개인구원을 위해서 성경은 일체 한 마디도 거기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말입니다. 몽땅 어디다 적용시킨다? 그리스도 몸을 위해서 적용시켜요. 어떤 개념이든지, 율법 개념이든, 의의 개념이든, 땅 개념이든, 하늘 개념이든, 언약 개념이든, 어떤 개념이든 그리스도 몸과 결부시켜야지 개인구원과 결부시키면 큰일 납니다.

특히 예정론. 그리스도 몸 안에서 예정되어 있어요. 개인구원을 위한 예정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개인은 부정당해야 되거든요. 마지막 때 모든 인간은 이스마엘 이에요. 모든 인간은 죽은 사래 태에 불과한 사라와 같은 죽은 몸에 불과한 거예요. 죽고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나는데 그 피조물은 그리스도에게 종속된 지체로서의 몸이기 때문에 그 새로운 몸은 개인적인 몸이 아니고 그 안에서 날마다 내가 죽노라 했으니까 그리스도 몸을 위해서 개인이죠. 그 일을 할 때 어떻게 하느냐? 마지막에 성령께서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개인구원이 만약에 성립 돼버리면 성령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예수님이 행한 일을 개인구원을 위해서 적용시킨다. 이런 논리에 빠집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지금부터 공부하려고 할 127페이지의 칼빈의 교회론입니다. 이 칼빈의 교회론이 이제 문제를 아시겠지요. 성령조차도 개인구원을 위한 성령. 이것은 생뚱맞은 거예요. 엉뚱한 거예요. 이건 성경적이 아니에요.

127페이지 밑에서 여덟 번째 줄에 한번 봅시다. 그래서 교회는 없다고 생각하시고 내 자체가 그리스도 몸이라면 다른 지체에 봉사한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마음이 편해요. 교회는 아예 없어요. 그리스도 몸 밖에 없는데 같은 그리스도 몸으로서 말씀 전하는 은사로서 말씀 전하면 되는 거예요.

[교회관에 있어 루터와 캘빈의 교회관의 차이는, 루터는 창조적 정신을 가졌고, 캘빈은 조직적 정신을 가졌다는데 있다.]

여기 창조적 정신이란 말은 없는 데서 생긴다. 뭔가 있으면서도 계속 교회가 없는 거예요. 교회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없는 교회에요. 왜냐하면 계속 창조가 되려면 있어도 계속 없는 쪽으로 되돌아 가 있어야 계속 창조라는 게 담아 있거든요.

참, 이것도 이것까지 설명하려면 복잡한데 이왕 나온 김에 우리 알아갑시다. 하나님이 한번 창조하신 그 다음에 승리하십니까, 계속 창조하십니까? 그 논쟁이 아직도 저 현대신학에서는 무지무지하게 큰 논쟁으로 벌어지고 있어요.

한번 창조하고 손떼었느냐, 아니면 계속 창조하느냐? 계속 창조한다면 그게 무슨 다 이룬 거냐? 그래서 한번 창조해 놓고 이제는 시계태엽 감아 주면 저절로 가는 것처럼 저절로 이 자연세계가 자력적인 하나님이 주신 능력으로 돌아간다 하는 것이 기존의 신학자들과 모든 철학자들의 합치된 의견입니다. 라이프니찌, 헤겔, 모든 신학자, 판넨베르그, 모든 신학자. 자체 내에서 잘 돌아가고 있다.

그럼 신은 뭐냐? 신은 자체적으로 잘 돌아가는지 감시하는 역할 하는데 그걸 가지고 섭리라고 해요. 섭리하신다. 그러면 섭리한다는 말을, 왜 창조란 말은 왜 안 썼느냐 하면, 창조라 하면 항상 없는 데서 새로이 만들어야 창조인데, 있잖아. 있는데서 관리하실 때는 창조라 하지 않고 섭리라 해야 된다. 그러나 이 세상에 한번 보세요. 있어도 없잖아요. 죽잖아요. 얼마 전에 태어난 사람, 얼마 전에 죽었잖아요. 없잖아요.

섭리란 용어가 처음부터 그런 뉘앙스를 가지고 만들어진 겁니까?
-그렇죠. 왜냐하면 신학과 철학의 만남. 철학이 먼저 아닙니까? 철학은 있음의 존재에서 시작하잖아요. 존재가 어떻게 움직이는가? 그것은 신이 있기 때문에 신이 외부에서 작용해서 움직인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그게 섭리거든요. 모든 종교, 모든 철학인데 그런데 거기에다가 유대교에 오늘날 기독교하고 접목이 되면서 신의 섭리론, 창조와 섭리로 나눠지죠. 창조하신 것은 한번 창조로 완성했고 그 안에서 섭리하신다는 것이 정설로 이어져 온 겁니다.

설교하면서 창조론 생각하면서 섭리론 하면 용어에 대한 혼동이 되면 안 되거든요?
-이런 용어를 쓸 때 용어 자체 가지고 따지면 곤란해요. 왜냐하면 우리는 용어의 산물이기 때문에 우리가 쓰는 용어도 정확한 용어란 없잖아요. 상징적이고 은유적이기 때문에. 다만 설명을 해줘야지요. 용어를 쓸 때 사람들이 그 용어에 대해서 선입관이 있을 것 아닙니까? 이게 아니고 이겁니다. 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어요. 모든 용어가 다 그런데. 용어 제대로 써서 구원되는 건 아니니까.

목사님은 창조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면서 섭리란 표현을 종종 쓰십니까?
-그렇지요. 그렇게 해야지요. 그런데 섭리란 말을 보통 쓸 때는 그렇게 쓰지 않고, 한번 됐는데 설마 하나님께서 무로 돌릴 필요, 이 섭리란 말로 설명돼버리면 반드시 뒤에 나오는 게 뭐냐 하면, 섭리를 하시는데, 이게 토마스 아퀴나스 때 했어요.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런 사상이에요. 토마스 아퀴나스의 예정론이 이거 아닙니까? 일 단계, 이 단계 작용하는 거예요. 일 단계에서는 윗사람들이 노는데, 천사와 하나님이 노는 데고, 이 단계는 인간을 통해서 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공장주고 이거는 공장지원이고. 이런 식으로 전에 글에도 나와 있어요.

루터도 맨 마찬가지로 그런 뉘앙스를 주긴 줘요. 그런데 루터는 여기서 남보다 더 강하게 이야기했죠. 하나님이 섭리한다는 것보다도 지금도 하나님께서 계속 이 안에 창조한다는 거죠. 계속 창조한단 말이죠. 그럼 창조가 다 이루었다 하는데 창조가 계속 이루어질 수 있느냐? 다 이루어졌기 때문에 계속 이루어감이 성립이 된다. 이렇게 보는 거지요. 창조라는 것이.

이게 존재에서 시작하면, 하나님의 관계에서 출발하면 이게 이해가 되는데. 자꾸 '있다' 어떻게 키울 것이냐?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면 이게 잘 이해가 안돼. 그거는 좀 들어가서 봅시다.

섭리란 말이, 제가 이야기하는 건 이겁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했다, 다 이루었다 이 말은 창조된 것부터 출발해서 하나님을 알아선 안 되고, 역시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이구나. 이런 쪽으로 알면 된다 이 말입니다. 간단하잖아요. 홍해가 왜 갈라졌느냐? 창조하신 하나님이니까 창조의 능력을 발휘하는 게 당연하지. 이렇게 생각하면 될 건데. ‘있는’ 홍해 갈라졌잖아요.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있는 홍해 갈라졌으니까 창조가 아니고 섭리잖아. 이렇게 생각한다고요. 자꾸 있는 홍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해되십니까?

존재가 아니고 관계다 이 말씀입니까?
-그렇지요. 그런데 그 관계가 창조하시는 하나님이 다 말이죠. 하나님이 창조했다는 것이 야, 우리 있잖아. 로 생각하지 말고 역시 하나님은 창조하는 솜씨를 갖고 있어. 라고 하나님의 속성 쪽에서 생각해 버리면 문제될 게 없다 이 말입니다. 그걸 믿는 게 여리고성 무너지는 것 아닙니까? 여리성이 어떻게 무너졌는지 아무리 연구해 보세요. 있는 여리고성의 두께는, 높이는 백날 해도 소용없어요. 근데 하나님이 손댄다면 하나님은 없는 데서도 만들어내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여리고성은 있다는 것과 상관없이 무너진다면 무너질 거라고 생각하면 무너져버리잖아요. 요단강도 마찬가지에요. 요단강이 흐르는 데 저걸 막으려면 몇 톤의 힘이 필요하나? 이렇게 생각하지 말고 없는 빛도 만드는데 요단강이야 갈라지게 하시겠지 하면 갈라지는 거예요.

그러면 화이트헤드의 과정신학하고 좀 이렇게 공통점이 있는 것 아닙니까?
-아아, 과정신학은 항상 ‘있음’이에요. 과정신학의 있음인데 그 있음은, 과정신학은 과정을 존재보다 앞세운다 이 말이죠. 그런데 화이트헤드의 글에 보면, 과정을 존재보다 앞세운다 해서 존재를 없애는 게 아니란 말이죠. 만약에 내가 이렇게 소리를 하면 소리가 가잖아요. 소리는 파 아닙니까? 과정 아닙니까? 하지만 공기란 존재가 없으면 소리가 안 들어가잖아요. 존재를 흔들어버린다는 뜻에서 과정신학이에요. 존재 자체를 흔들어버리고. 화이트헤드가 시비 거는 것은 왜 존재를 키우려고 하느냐? 있는 존재를 단단한 존재를 더 키우려 하느냐 말이죠. 그 과정을 있는 것을 흔들어버리는 건데, 과정인데 이렇게 보는 거예요. 그 화이트헤드는 불교사상과 동일하게 되죠.

그래서 여리고성 같은 게 무너짐이 전부다 없는데서 생겨나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창조과정을 가졌고, 칼빈은 조직적 구성을 가졌다. 조직이라는 것은 뭔가 있으니까 잘 다듬어보자는 식입니다. 창조라 하는 것은 항상 밑바닥에 뭐다?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늘 전제로 깔자 이 말입니다. 어제 교회가 우리교회가 아니고 다음 주일되면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이 말이죠. 아무도 몰라요.

[뿐만 아니라 루터는 불가견적인 교회로 그리스도와의 통일을 모색한 것에 비해서 캘빈은 가견적인 교회를 강조해서 기강을 잡으려고 했다.]

[불가견적인 교회]
흔히 용어 자체가 무슨 불가견적인 교회라고 되어 있죠. 그런데 보통 개혁신학에서는 불가견적 교회라고 용어를 그렇게 쓰지만 뭐로 주로 씁니까? 무형교회, 유형교회죠. 그런데 무형교회, 유형교회가 이 용어 자체가 이게 문제되고. 왜냐하면 교회 자체가 무형이에요. 이 말이 사기를 치고 있는 겁니다. 가정에 유형가정이 있고, 무형가정이 있습니까? 도대체 신학자들이 병신이야, 병신. 바보들인지 안 그러면 얍삽한 인간들인지 분간이 안 되는데.

가정이라 하는 것은 관계로 따지는 것이지요. 그걸 무슨 관계? 혈연관계라 하지요. 퇴니에스(Ferdinand Julius Tönies, 1855~1936. 독일의 사회학자. 주요저서 [게마인샤프트와 게젤샤프트](1887))라는 사회학자가 말하는 이 세상에는 두 가지 사회가 있어요. 하나는 혈연사회가 있고 하나는 이익사회가 있다. 혈연사회는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던져진 자기가 선택할 수 없는 어찌 할 수 없는 내가 아버지를 고를 수 없잖아요. 떨어진 존재지요.

어떤 사람은 나는 왜 배용준처럼 될 수 없느냐 하는데, 지 아버지가 배용준이 아버지가 아닌데 배용준이 아니지 그래. 니 아버지, 니 엄마를 생각해 봐라. 니 엄마, 니 아버지가 배용준이 엄마, 아버지 아닌데. 니가 있지.

'나는 왜?'라는 질문 자체가 혈연사회에서는 이야기가 안돼요. 나는 누구 집안이라고 이거는 '왜'라고 물음 자체가 성립 안 되는 것이 혈연사회에요. 어머니 왜 날 태어나게 했습니까? 자체가 물음이 성립 안돼요. 왜냐하면 이익이라는 것은 자기가 '왜'라는 것을 물으면서 이익을 골라 선택할 수는 권한이 있지만 혈연사회에서는 ‘왜’라는 것이 성립 안 된다니까.

왜 어머니 왜 날 태어났습니까? 라고 물으면, 똑똑한 엄마는 이렇게 물을 겁니다. 똑똑한 철학을 아는 엄마는 아들보고, 니가 왜 나는 엄마는 왜 날 태어나게 했습니까? 라고 니는 니한테 왜 묻는데? 너 자신을 부정하면, 어머니, 왜 나를 태어나게 했습니까? 이 말은 자기 자신을 부정한건데 자기 자신을 부정한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나는 '왜'라는 말을 질문을 던졌느냐? 라고 왜라고 자기한테 찔러야 돼. 그 말은. 쓸데없는 소리했네. 미안합니다.

타인을 향하여 '왜'라고 물을 때는 반드시 왜라는 질문을 먼저 자기한테 물어보고 타인에게 질문을 던져야 된다 말이죠. 왜 예수님은 저를 구원했습니까? 이거는 성립이 되지요. 나는 '왜'라는 답변을 해야 되는 그런 질문은 성립이 될 수 없는 겁니다. 나는 왜 입을 벌려서 말을 하느냐? 이거는 정신병자 돼야 돼요. 이건 말도 안 되거든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왜'라는 질문을 할 수 없는 게 인간이에요.

만약 어떤 사람이 '나는 라면을 먹는다.' 할 적에 다른 사람이 시비걸기를 '니, 왜 자장면 안 먹고 라면 먹어?' 이러면 말이 돼요. 이건 질문이 성립이 되는데. '나는 라면 먹는다.'는 말을 왜 니가 건방지게 해. 이건 말이 안 되잖아요. 말이 안 되지요? 이씨, 건방지게 나는 라면 먹는다는 말, 할래, 안 할래? 이건 말이 안 되지요.

나는 예수님을 증거 한다 할 적에 이씨, 왜 예수님을 증거 해. 증거 하지 마. 이건 말이 안 되잖아요. 니가 부처님을 증거 해. 이건 말이 되는데, 예수님을 증거 하지 말고 부처님을 증거 해. 이건 말이 되는데, 왜 예수님을 증거 해야 돼. 이런 식으로 비판하면 안 되지요. 흔히 양무리마을에서 저를 비판할 때 이렇게 비판하고 있어요. 니, 씨, 와 라면 왜 니가 먹는다고 해. 이런 식으로 비판하고 있어요. 그게 정신병 환자 수준이지.

<욕망의 고속도로>라 해서 제목 달아서 비판하는 걸 보면 이렇게 질문한다고. 니가 왜 예수님 증거 해. 입을 다물고 있지 왜 증거 해. 이렇게 비판하고 있다고. 반드시 비판은 성경에서 나와야 돼요. 성경적으로 이럴 때 성경에 합당하다 이렇게 돼야 하는데, 나는 노란 옷을 좋아한다. 그러니까 너는 이단이다 이러면 안 되거든요. 다시 한번 그런 걸 보면서 비판은 성경적으로 해야 된다는 것을 다시 한번 인식을 해 주셔야 됩니다. 그 사람이 증거 하는 것이 성경적으로 증거 한 것이 옳은가? 이래야 돼요.

여기서 무형교회, 유형교회가 말이 안 됩니다. 교회 자체가 무형, 유형을 따질 수 없어요. 가견, 불가견을 또 따질 수가 없습니다. 교회 자체가. 그러니까 루터가 불가견 교회라 하는 것은 교회가 가견 교회가 있는데 불가견 교회가 옳다는 말이 아니고, 교회 자체가 불가견라 하는 것은 교회 속성을 덧붙이는 것뿐이에요. 그냥 교회라고 해도 되는데 그냥 불가견 교회라고 하는 것이 더 확실해서 붙이는 거예요. 그러니까 유형교회라고 붙이는 이것이 문제가 되지요. 차라리. 교회가 마치 유형가정이다. 라고 가정을 유형가정이라고 억지로 붙이는 자체가 오히려 수상하죠. 이게 문제성이 있는 겁니다.

[기강을 잡으려고 했다.]
칼빈은. 그것은 아까 이야기했죠. 왜 기강을 잡으려고 했습니까? 신약에서 뭐로 돌아가려고 한다? 신약을 포기하고 구약의 성전을 구체화시켜 보려고 인간의 힘으로 다시 건설해 보려는 그러한 비신앙적 태도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겁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성전 곧 교회를 인정하시는 곳은 자기의 말씀이 선포되어 들리며 그 말씀을 지키는 곳이다. 그곳에만 하나님의 영광이 머무신다. 하나님이 계시는 교회가 사람이나]

지금 이 이야기는 여러분들이 신학교 때 많이 봤습니다만 결국은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는 현장, 그게 결과적으로 나타난 것이 교회다 이렇게 보죠.

127페이지 제일 밑에서 두 번째.
[어디든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들리는 그곳에 하나님의 교회가 있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했다. 캘빈이 말씀과 교회를 결부시키고 그 교회의 표지로서의 말씀의 강조는]

야, 이게 조금 문제네요. 말씀과 교회를 결부시킬 필요가 없어요. 말씀과 교회를 결부시키는 게 아니고 말씀이 먼저고, 결과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교회가 될 때는 결부란 말이 성립할 필요가 없지요. 결부는 따로따로 있는데 둘이 붙인다는 거니까 그렇게 필요 없다 이 말이에요.

128페이지.
[루터와 같이 말씀과 성령을 결부시킨다.]

그것은 왜냐하면 성령은 말씀을 성취하는 당사자이기 때문에 그렇지요.

[너희 자신의 경험을 살려서 말씀 없이 성령을 자랑하는 일이 불합리한 것은, 성령 없이 말씀만 내세우는 일이 어리석은 것과 마찬가지임을 알아야 된다.]

그러니까 루터는 말하기를 자신의 경험을 가지고 말씀을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다. 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어떤 인간도 경험 없이 되는 인간이 없는데 그러면 뭘 내세우는가? 경험 없는 성령만이 하는 일로 자랑해야 된다. 이런 말이거든요.

여기 한번 봅시다. 루터한테 시비 걸고 싶은 사람은 이 말 한 마디 가지고도 얼마든지 시비 걸 수 있지요. 왜냐하면 성령을 성령으로서 말씀이 전파된다 하는 이러한 사고방식을 너는 어디서 배웠느냐? 너는 돗대냐?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성령으로 말씀을 간다는 것은 이건 너의 경험에 불과하잖아. 라고 할 때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을 우리가 어떻게 비판할 수 있느냐 하면,

루터가 지금 증거 하자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증거 하자는 것이 아니고, 말씀과 성경을 증거 하자는 건데, 이 사람은 달을 보자 하는데 달을 보지 않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다 시비 거는 거예요. 손가락이 짧으니, 굵으니 시비 거는 거예요. 이것이 옳다, 그르다 이전에 이미 이 사람은 무슨 증거가 안 됩니까? 같이 성령의 일을 증거 하고자 하는 생각은 없이 비판하고자 하기 때문에 이것은 누굴 전해요? 사람을 증거하고, 사람과 사람을 대비하려고 하기 때문에 이 자체가 예수님을 증거 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사이비다. 사이비가 요런 결론에서 등장하는 거예요.

성령에 의해서 말씀은 전파됩니다. 했을 때에, 동의합니다. 이러면 될 문제인데, 나도 그거 참, 말씀은 성령에 의해서만 됩니다. 동의하면 되는데 그게 아니고, 성령에 의해서 말씀 되는 니, 그거 어디서 배웠는데? 라고 한다는 자체가 주를 안보고 산을 보는 거죠.

그래서 순복음교회든 어디든 간에 어디 합동측이든 천주교든 간에 성령이 임하면 교파와 관계없이 구원받아요. 왜냐하면 침례교가 뭘까 이렇게 연구한 게 아니고, 성령께서 그 목사의 말 중에서 복음적인 말을 활용해서 받아들이면 이거 감리교에 있든 침례교에 있든 그 말씀이 야, 그 말씀 맞다. 십자가만이 구원하는구나. 물론 그 십자가의 의미는 그 목사의 의미와 달라요. 성령이 임할 때에 십자가만이고, 목사는 십자가 해서 무슨 수작을 할지 그건 따로 노니까. 다른데도 불구하고 본인은 구원받고 목사는 지옥 가고. 그런 일이 생긴다 말이죠.

그러니까 어느 교단이 이단이다는 소리가 어느 교단이 자동적으로 이단이다라는 소리를 할 수 없지요. 모든 교단이 이단이다는 말이 옳지요. 모든 교단이 이단인데 다만 이단 안 당하게 하는 것은 교단을 유지하는 사람의 책임이 아니고, 성령께서 택한 자는 이단 되지 않게 한다. 이렇게 해야 역시 그것도 성령님에 대한 증거죠. 주님에 대한 증거 돼요. 만약에 어느 교단만큼은 주의를 기울여서 이단 되지 않게 한다. 이렇게 돼버리면 결국은 그것은 주님을 증거 하는 교단이 아니고, 자기 교를 증거 하는 교단이기 때문에 증거 면에서 사이비가 돼버린단 말이죠.

128페이지 위에서 네 번째.
[그런데 제도적인 교회 권위를 강조하는 캘빈은 성례전이나 목회직과 마찬가지로 말씀도 교회에 속한다고 말한다는 것은 루터와의 다른 점이다. 그것은, 참된 성경과 거짓 성경을 구분하는 권한과 권위가 교회에 속했으며]

벌써 뭔가 이상하죠. 칼빈은 이상하죠. 그러니까 이거는 뭐냐 하면, 칼빈이 걱정하는 것은 이겁니다. 직접적인 성령을 받았다 주장해 버리면, 이것은 재침례교나 쯔빙글리나, 나중에 쯔빙글리는 다음에 합니다만 이 대목은 천천히 합시다. 우리가 빨리 가면 안돼요. 중요한 대목이니까. 그런 것처럼 칼빈이 생각하는 것 보세요. 지나 개나 계시 받았다 하면, 어느 것이 진짜인지 옳은지 알 수가 있느냐 이 말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루터가 말하기를 니가 그거 알아서 뭐 하려고? 알겠다는 그 자체가 수상하잖아요. 그러니까 자꾸 유형교회, 눈에 보이는, 그러니까 눈에 보인다고 해서 유형교회가 아니고 조직을 만들 때 눈에 보이지요. 몇 명에서 몇 명까지는 우리 편. 저 사람은 우리 편 아니고, 이렇게 된다고. 이게 자꾸 조직교회, 그러니까 교회를 위한 신학, 조직, 유형교회를 생각하다 보니까 확인을 해야 된다. 이단인지 삼단인지 확인을 해야 되겠다 하니까 확인 할 기준도 만들어야 되니까 그 기준은 어떻게 하느냐 하면, 대다수가 옹호하는 쪽이 아무래도 진리에 가깝다는 기존의 법, 정치논리가 거기에다 개입이 돼요.

현재 [지옥의 하나님]이 벌써 몇 달 전부터 나온다, 나온다고 소리했는데 제가 지난번에 전화를 하는 가운데서 이번 주에 인쇄에 들어간답니다. 인쇄 들어가면 나올 거예요. 그 책에 제일 먼저 첫 페이지에 보면, 제가 소제목을 좀 달아보려고 했는데, 소제목이 뭐냐 하면, 이런 소제목이 달려 있어요. <때 묻은 관행>

때 묻은 관행이 뭐냐 하면, 정치력 발휘. 한국교회가 100년 이상 되니까 정치력이 발휘가 되지요. 정치라 하는 것이 뭐냐 하면, 다수의 의견과 그리고 여론을 조사하는 거예요. 여론을 듣는 게 아니고 여론을 조성하는 겁니다. 목사가 큰 교회 목회하는 목사들을 정치를 많이 해야 돼요. 뭐냐 하면 대세가 지금 흐름이 어떠냐? 그걸 잡아서 대세 쪽에서 원하는 대로 해주면 말썽의 소지가 적지요. 만약에 모험을 걸었다가는 자기한테 불리하게 작용하면 표가 적어버리면 쫓겨날 수가 있기 때문에.

그래서 항상 교회 내에 현재 나에 대한 인기도, 이런 게 누구 편, 이런 걸 심방하면서 부교역자 시켜서 나에 대한 계속 인기도를 유지하려고 하는데. 바로 그것이 어디에 핑계 대고 그런 짓을 하느냐 하면, 칼빈의 교회론, 교회목회론 가지고 근거를 대서 그런 짓을 하는 거예요. 진리와 비진리는 교회에서 결정해야 되지 개인의 의견을 묻는 게 아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엉뚱하게 교회 헌법에 보면, 양심의 자유란 게 있어요. 그것도 신앙의 자유가 아니고 양심의 자유, 그게 무슨 말입니까? 강도사 시험 칠 때부터 얼마나 그게. 이게 아닌데, 뭐가 아닌데. 왜 신앙의 자유가 아니고 양심의 자유냐 말이죠.

분명히 성경에 보면 신앙의 자유로 되어 있죠. 신앙적으로 자유다 말이죠. 왜 신앙적인 자유가 되느냐 하면, 신앙이라 하는 것은 선물이기 때문에 자유가 되죠. 이것은 남한테 눈치 봐서 얻은 게 아니고 배워서 되는 게 아니고, 하늘에서 성령을 통해서 주신 선물이기 때문에 역사 속에 있는 한 이 선물을 좌지우지 못한다는 뜻에서 이게 자유 아닙니까. 그래서 신앙은 자유다 이 말이죠.

그러면 신앙의 자유가 되어야지 왜 양심의 자유란 말을 왜 하느냐? 이건 윤리성을 가미하겠다는 거죠. 그런데 윤리라 하는 게 뭡니까? 결국 남한테 피해를 적게 입히는 거잖아요. 그게 윤리 아닙니까? 지 혼자 살면 옷 벗어도 괜찮지요. 근데 대낮에 잘 생기지도 못한 게 돌아다니면 안 되잖아요. 남한테 피해를 주잖아요. 신경 쓰게 만드니까.

왜 사회가 성적인 것에 대해서 성적인 상업화되는 걸 막느냐 하면, 사회라 하는 것은 다른 데 신경 쓸 게 많은데 그런 비생산적인데 신경 쓰면 안 된다 이 말이죠. 그런데 사회가 만약에 아이를 적게 낳는다. 그러면 비아그라도 선전해야 되고, 심지어 콘돔도 공익광고를 해서 터줘야 돼요. 터줘야 거기에 자극 받아서 성적으로 관심을 해서 애를 많이 생산하도록 유도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사회의 정체라 하는 것은 피해를 최소화시키려는데 그게 목적이 있습니다. 밴덤의 자유론, 밴썸이라 하지요. 밴썸의 자유론, 공리주의가 그거에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에요. 다가 아닙니다. 최대로 많은 다수가 행복할 때 그게 최대 다수의 행복이다 이 말이죠. 소수는 죽으라 하는데, 정치라 하는 것은 다수의 의견을 모으는 것 아닙니까? 조성하는 것 아닙니까?

진리라 하는 것이 똑같은 성경 말씀은 없고, 너 어떻게 봤는데? 질문, 1번, 2번, 3번. 3번. 니는? 나도 3번. 니는? 2번. 3번 두 표, 2번 한 표. 그 다음 니는? 3번. 3번 세 표 나왔다. 그래서 교회라 하는 것이 결국 개인적인 다수의 의견을 통합해서 그걸 진리를 삼아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지옥의 하나님]이란 그 책에도 그렇게 써놨어요. 그 어떤 교회가 있다면 그 교회에 있어서의 신론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그 교회에서 제일 돈 많이 내고 영향력 있는 사람이 갖고 있는 신론에 다른 사람이 동조하는 식의 임시적인 신론이 된다. 왜냐하면 돈 많은 장로가 헌금 제일 많이 내는 장로가 권세 센 장로가 갖고 있는 삼위일체. 그 장로, 삼위일체 알고 있을까마는 하여튼 나름대로 삼위일체 있을 것 아닙니까? 철없는 부교역자가 삼위일체 배웠다고 까불다가는 쫓겨나는 거예요. 짜식, 어디서 삼위일체 배워가지고? 신학교 배웠는데요. 까불지 마. 이 교회에선 그 삼위일체 안 통해. 우리 장로님의 삼위일체가 최고야. 날아가는 거죠.

바로 결국 교회를 위한 신학이라 하는 것이 양쪽 그런 식의 교회가 처음부터 성경적이 아니었잖아요. 성경에서 안 나오는 교회가 세워지면 그 교회는 성경을 핍박하게 되어 있습니다. 반드시 핍박하고 그 사람을 고난 받게 만들고 예수님 믿는 사람을 성경 찾는 사람을 싫어하게 만들고 그렇습니다. 그렇게 됩니다.

교회라 하는 것을 유형교회를 주장하게 되면 그 조직에 따라서 역사가 생기고 그 역사도 같이 뭐가 돼요? 신성화되면서 그 역사가 만드는 전통도 하나의 하나님의 뜻으로 계시로통합되면서 천주교로 닮아지겠죠. 그러면 개신교의 의미가 완전히 사라지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거기에 대해서 누가 환멸을 느끼게 되느냐 하면, 복음을 아는 사람들이 물론 환멸을 느끼겠지만 그보다 우선해서 과학적인 지식으로 양심, 그땐 신앙이 아니지, 양심의 자유를 부르짖는 사람들로부터 점차 한두 명씩 교회를 떠나기 시작합니다. 양심의 자유 부르짖으면서 떠나게 되면서,

현재 영국 같은 데는 정기적으로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 가운데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100%라면, 전체 영국의 자기가 스스로 기독교신자라는 사람이 62%랍니다. 62% 중에서 교회에 나오는 사람이 7%에요. 62*0.07=4.34 전 국민의 4~5%만이 정기적으로 교회 나와요. 그러니까 이거는 뭡니까? 현재 영국의 노인 인구가 10%가 넘거든요. 우리나라도 지금 10% 되려고 하는데. 노인들 중에서 반은 골프 치러 가고 반은 교회 나온다 이 말입니다. 왜? 죽을 때 다 되었으니까 교회 나와야 될 것 아닙니까? 지옥이 기다리고 있는데. 그러니까 젊은 놈은 거의 안 나온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앞으로 점차점차 그렇게 됩니다. 앞으로 한국교회가 그렇게 돼요. 지금 아직도 한나라당 견제하는 것처럼 보수주의가 견제하니까 하나님께서 복 줘서 강남에 땅 사놓은 놈들이 그런 식으로 축복의 하나님 믿기 때문에 교회에 헌금이 돈이 들어오니까 교회 유지되는데 앞으로 그런 미신이 다 끊어지면 이런 꼴 나는 거죠. 가는 교회 막차해서 목회하겠다는 사람들, 막차 탄 거예요. 사양산업 ....

신학교 하려 하면 다른 과를 해야 되죠. 유아교육과. 목회과 하지 말고, 상담학과, 사회복지과. 이런 거. 거기다가 또 지점토, 꽃꽂이 딱 하고, 레크레이션, 실용음악과까지 포함해서 그렇게 해야 유지되니까. 나중에 그것도 나올 거예요. 국화빵 굽는 과, 붕어빵 굽는 과. 이런 거.

그러니까 지금 칼빈의 이야기를 가만히 보니까 오늘날 일이 아니고, 옛날 개신교 처음 태어날 때부터 이미 문제성을 갖고 있었지요. 왜냐하면 그 당시 사람이나 오늘날 사람이나 마찬가지거든요. 별다른 인간 없고 쭉 마찬가지에요. 처음에 그런 아이디어가 있다면 지금도 그런 아이디어가 있다는 것이 동일하게 되어 있다 이 말이에요.

[전통과 그 전통을 보존하고 있는 교회의 권위를 말했다. 또 지상에서 맬 수도 있고 풀 수도 있는 열쇠의 권한도 교회에 속하며 그것이 교회의 권위]

그러면서도 칼빈은 이런 천주교 같은 소리를 하면서 칼빈은 다만 뭘 이야기한다? 천주교는 풀 수도 있고 멜 수도 있는 그 권한을 말한 천주교는 전통을 옹호하는 천주교지만, 우리 칼빈주의 교회에서 풀 수도 있고 멜 수도 있는 것은 뭐냐 하면, 성령과 결합된 교회라 이렇게 주장한 거예요.

성령에 의해서 말씀만 바로 전하는 그런 교회이기 때문에 천주교는 아니지만, 우리 전통교회는 풀 수도 있고 멜 수도 있는 권한이 있어야 되지 않겠느냐? 그래야 성경에 있는 마태복음 16장 말씀이 이 교회에 성취가 돼야 하니까 풀 수도 있고 멘다는 말씀이 허공의 말씀이 아니고 실제로 벌어지려 하면 실제로 돼야 되니까 그 실제 된 교회가 이 개혁주의 교회 말고 또 있겠느냐 말이죠. 왜? 우리는 말씀만 옹호하니까.

그러니까 이런 겁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교회니까 키워주소서. 이거에요. 간단히 말해서. 우리 복음 잘 전하지요. 그러니까 우리교회 버리면 안돼요. 이거에요. 더 미워요.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밉다고 더 미워요. 이런 놈들이 더 밉다니까.

성경의 모든 말씀은 그리스도 몸 안에서 이루어져요. 풀든지 메든지 그리스도 몸 안에서 이루어지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은 사도 바울에서 어떻게 해석했는가를 봐야 됩니다. 사도 바울 서신에서, 사도 요한 서신에서 어떻게 했는가?

사도 요한은 어떻게 교회를 설명했는가 하면, 교회라고 말하지 않고 놀랍게도 '생명'이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이거는 사도 요한은 관계이야기해요. 니가 관계에 있느냐? 성령 안에서 생명이 있는 자 같으면 우리가 눈으로 본 바요 들은 바요 하는 주님의 사랑 안에 생명이 있는 자는 어떤 교회를 만들라가 아니라 그 사랑 안에 있는 자는 두려움이 없나니. 그 말입니다.

이 두려움 하는 것이 자꾸 환상을 만들어내니까 두려움인데, 확정된 것을 모르면 자꾸 두려움이 확정된 말씀을 안 믿으면 자꾸 두려움이 생겨요. 자꾸 개인을 생각하면 두려움이 생긴다 이 말이죠. 주님은 나를 안 보는데 자꾸 나는 나를 보니까 내 속에 두려움이 생긴다 말이죠. 니, 흙이야 하면, 아멘, 죽겠습니다. 이러면 그만인데 흙인 줄 아는데 어떻게 키워줄 건데요. 또 이렇게 자꾸 자기 자신을 생각하니까 그 다음부터 두려움이 생기는 거죠. 흙이면서도 안 죽는 방안이 뭘까? 흙이면서도 흙을 지연할 수 있는 어떤 수가 없을까? 그러니까 성경 말씀이 그 사람한테 해당이 안 되지요.

좀더 읽어봅시다.
[그는 성직자의 선택의 방법으로서 교회회중 또는 성직자들 혹은 어떤 개인의 권위에 의하는 세 가지 길을 말하고 누구든지 합당한 사람이 선택되고 또 회중의 동의를 얻으면 합법적인 성직자가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선거에 있어서 다른 목사들이 반드시 주관하여 대중이 온당치 못한 일을 못하도록 감시할 것을 말한다. 이것은 그의 귀족주의적 과두 정치의 공화국 정치사상과도 상통하는 교회 정치론이다. 이것은 만인성직론을 토대로 하여 교회 회중의 권한을 강조한 루터의 견해와 차이가 있다.]

만인제사장 날아가 버렸어요. 끝나버렸어요. 없습니다. 왜? 칼빈의 개혁주의는 뭘 감시하라? 감시자가 따로 있어요. 올드보이처럼. 누구야, 너? 15년 동안 군만두만 먹게 하는 놈, 누구야? 하는 것처럼 감시하는 하나님과 성도 사이에 감시자가 새로 높은 지위가 그걸 목사로 세워야 된다. 이 말입니다. 그 목사는 회중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소속이 노회에 속했다고 보지요. 노회가 높은 자리 아니라고 하면서 높은 자리 행사 다 하면서 파견해서 성도를 감시할 수 있는 파견근무자가 돼버려요.

[캘빈은 목사직의 계급적 구별을 정죄하지 않고 오히려 필요한 것으로 말한다. 중세의 교황 제도의 실패는 교인들과 교회의 머리되는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그르친 데 있었다. 즉 목회자가 그리스도의 자리를 빼앗으려 하지 않고 온당한 관계를 보존하는 한 그는 그리스도의 권위를 부여받는 것으로 보았다.]

어느 목회자 치고 나, 그리스도입니다. 라고 하는 놈은 그건 노골적인 이단, 문선명 말고 또 누가 있습니까? 다 뭐라 합니까? 다 나는 주의 종이라 하잖아요. 주의 종이라 하는 것은 두 명이어야 된다, 한 명이어야 된다? 달랑 한 명이어야 된다고 주장하잖아요. 주의 종이. 다들 그렇게 주장합니까? 가만 있노?

지금 개신교 교회에서 뭐라 합니까? 자기를 주의 종이라 하는 것은 배타적으로 남들이 주의 종 되면 돼요, 안 돼요? 남들은 주의 종이 되면 안 돼요. 교회에 주의 종은 한 사람 밖에 없어야 돼요. 교회는 주의 사자가 한 사람 밖에 없어야 돼요. 여러 사람이 되면 싸움이 일어나서 안 돼요. 그래서 부교역자는 주의 종입니까, 아닙니까? 아닙니다. 그건 비서지요. 주의 종을 보좌하는 비서지요.

바로 이것이 마태복음 22장에 어긋나지요. 마태복음 22장에 뭐라 되어 있습니까? 누구든지 너희를 지도자라고 해서는 안 된다. 지도자는 그리스도만이 지도자고, 누구든지 너를 아비라 하지 마라. 아버지는 하나님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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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