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6월 19일 지옥의 하나님 p042 약속을 위한 전쟁
대구 6월 19일 지옥의 하나님 p042 약속을 위한 전쟁
이름 : 이근호(IP:)
대구 6월 19일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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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교회(IP:220.♡.176.141)
08-01-20 20:44
daegu060619
06 대구강의 8 - 지옥의 하나님 11
06,06,19 강의 이근호, 정리 손하진, 구득영
◈ 여호와 전쟁 - '약속'을 위한 전쟁 !!
오늘은 교재 42페이지부터 시작하겠습니다.
** 5.여호와의 전쟁 - [약속을 위한 전쟁] 전쟁은 시작되었다. 하나님과 악마와의 본격적인 전쟁이다. 약속에 의하면 앞으로 인류역사는 패가 갈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두 패 사이에는 원수지간이 되며 동시에 치고 침을 당하는 결과가 빚어진다는 것이다. 한쪽은 여자의 후손들이고 다른 한쪽은 뱀의 후손들이다.
여기에 보면, '원수지간' 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러니까 두 패가 서로 서로 원수라는 것이다. 이렇게 원수라는 것이 있어야 '화목'이 성립되는데, 이러한 원수지간에 놓이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화목하심' 이라는 말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하나님의 적이었습니다" 라는 것이, 일단 이것이 확실하게 정립이 되어있어야, 그 다음에 화목케 했다는 것이 성립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된 것은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일부러(?) 말이다.
◈ 먼저 하나님과 원수임이 드러나야 화목의 의미가 !!
왜 그렇게 하셨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원수로 있다는 것을 보다 명확히 함으로서, 이러한 하나님의 화목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본래 구원정신을 이 원수에게 그냥 무상으로 제공해서, 그렇게 구원받은 자들로 하여금 화목제물을 찬양토록 하기 위한 게 하나님의 계획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에게,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라는 것을 이야기하면,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원수가 된 것을 그냥 순하게(?) 받아들여야 되는데, 자꾸만 "나는 하나님의 원수가 아니다" 라고 버티면,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원수가 되게 하셨는데, 우리는 'NO!' 라고 하면,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 현대철학 - 우린 하나님과 원수가 맞잖아 !!
그런데 이것이 철학에 보면, 여기서 철학이라는 것을 왜 언급하는고 하니까, 특히 고대나 중세철학을 보면, 이렇게 하나님과 원수가 아닌 것으로, 즉 하나님과 친하게 지내는 것으로, 여기에 치중을 하고 철학이 전개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현대철학에 들어와서는 하나님과 원수임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하는데, 즉 드디어 철학이 이제 자기 정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 포이에르바하는 - 신은 인간이 투사한 것 !!
이것이 최근의 일인데, 심지어 포이에르바하는 "신이라는 것은 인간이 투사한 것이다" 라고 주장해서, 즉 신은 인간이 만들어내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자기의 이상향을 그냥 비추어서 그렇게 한 것이라고 했지만, 그러나 그는 신을 공격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현대철학은 무엇을 알았는고 하니, 철학이 이렇게 인간위주로 나오면 반드시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고 하니, 그 이전에는 인간위주로 나오더라도 신은 신대로 따로 관념으로 남아있어서 서로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철학에서는 인간이 인간위주로 나가게 되면, 이것은 반드시 신을 원수로 취급해야 된다는 식으로, 그렇게 거의 입장이 굳어져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라는 말이다.
그러니 인간이 인간다워지려고 한다면 신과 인간은 서로 원수지간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물론 옛날에는 '신 따로 인간 따로', 이렇게 해서 그냥 둘 다 서로 간섭하지 않고 따로 사이좋게 지내자고 했는데, 그런데 지금은 그것이 아니라 신을 공격해야만 가장 인간답다는 쪽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신을 공격해야 인간답다고 말이다.
◈ 석가모니는 인간해방론자 !!
사실 이러한 깊은 인간에 대한 이해가 B.C. 4세기, 5세기에 이미 불교에서 나오는데, 이 불교가 누구하고 싸우느냐 하면 힌두교하고, 즉 브라만교하고 싸운다는 것이다. 이 브라만교는 철저하게 신 중심인데, 흔히들 범신론이라고 하고 말이다. 사실 이것이 범신론이라고 하기보다도, 신이 통치하는 세계에서 인간은 자연의 일부로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 그것이 힌두교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신에 종속된 인간에 대해서 반대해서 인간해방을 부르짖고 나온 사람이 있는데, 그것이 누구인고 하면 바로 '석가모니' 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는 '인간 해방론자' 라는 것이다. 지금 불교와 과학과 철학이 서로 손을 잡고 서로 친하게 지내는 것이, 그 이유가 이미 그 뿌리가 힌두교에서 나올 때 모두 다 나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가 초창기에 약간이나마 융성한 것은, 그 당시에 힌두교에서 이야기하는 신의 질서, 즉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 라는 카스트 제도의 4계층을 석가모니가 뒤집어버린다는 것이다. 신이 아닌 인간중심으로 해서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은 신이 만든 질서중심이 아니라 인간중심이라는 것이다.
◈ 불교 - 질서는 자기가 만들기 나름 !!
그러니까 이 질서라는 것 자체를 없애버리는 것인데, 질서를 '공(空)'으로, 또는 '무(無)'로 돌려버린다는 말이다. 불교에 의하면 질서는 자기가 만들기 나름이라는 것이다. 만약에 질서가 있다면, 거기에 복종해야 하고, 그 질서에 복종하지 않으면 인간은 벌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 벌은 '업(業)'이 되어서 우리 인간에게 재앙으로 다가오고 말이다. 그러니 그것을 벗어나자는 것이다.
불교는 이러한 사고방식을 벗어나서, 즉 이 '업(業)' 이라는 것은 자기가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내 질서는 내가 만든다" 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해방이라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이 불교에 대해서 막연하게 여겨서 어렵게들 생각하는데, 그러나 사실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 정작 자기 자신으로부터 해방이 문제 !!
불교가 무엇인가? 신에 대해서 인간해방을 선언한 것이 석가모니인데, 그런데 석가모니가 인간해방을 부르짖으면서, 일단 이렇게 해서 신에게서는 해방이 되었는데, 그런데 석가모니가 좀 더 알아보니까, 정작 인간 본인에 대해서는 해방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신으로부터는 일단 벗어났는데, 계급도 벗어나고 말이다. 그래서 민중들로부터 인기를 얻었지만, 그러나 정작 본인이 자기 자신으로부터는 해방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석가모니가 그 원인을 추적을 해보니까, 즉 인간 본인에게 무엇이 있어서 그렇게 자신에게서 해방이 안 되는지 말이다. 그 이유는 자기에게 계속해서 '욕심' 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런데 이 욕심이 '방향성'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방향성을 말이다. 그래서 이 인간의 욕심이라는 것이, 계속해서 "나로 하여금 나이고자 한다" 라는 것이다.
◈ 문제는 내 욕심이 가지는 방향성 !!
인간이 가지고 있는 욕심의 방향성, 즉 "나로 하여금 나이고자 한다" 라는 것으로 인해서, 이 욕심을 걷어내고 비워내고, 또 그렇게 제 아무리 노력을 하고 노력을 해도, 그렇게 해서 비워낸 욕심 없는 '나'가 또 욕심을 생산하는 체제가 되어버리니, 나중에 보면 결국에는 '나'이고자 하는 '나' 자체를 없애버린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무아사상(無我思想)' 이고 말이다.
나중에 이 인도의 불교가 중국으로 넘어가는데, 그래서 중국에서는 이러한 '나' 자체를 없애버리려고 하는, 즉 '무아' 라고 하는데, 그러한 참선을 통해서 선불교인 대승불교로 발전을 하는데, 그리고 그렇게 '나' 자신을 없애버림으로서 모든 진리를 종결시키고 해답을 지우려고 하는데, 그것이 조계종으로 넘어온다는 것이다.
어쨌든 간에 인간이 하나님과의 원수됨이라는 것은, 그냥 소극적으로 "하나님, 나한테 간섭하지 마소" 라는 정도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신을 공격함으로서, 그것을 통해서 인간됨을 이야기하자는 것이다. 신을 공격함으로서 말이다.
◈ 신성을 공격하는 것 자체가 인간성이다 !!
그래서 여기서 현대철학의 하나의 공식을 적어보면, 좀 어려운 말인데, "신성을 공격하는 것 자체가 인간성이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여기에 인간이 있고 저기에 신이 있어서, 그렇게 해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신이라는 존재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아니라 신성을 공격하는 것 자체가 인간성이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인간은 계속해서 뭔가 자기 속에 있는 신적인 것을 빼내어야 되는데, 그것들은 찌꺼기이니까 말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 인간 속에 남아있는 신적인 것을 빼내버리면, 남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 있을까? 고만고만한 인간들의 집합, 즉 인간들 사회에서의 공동체가 남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신은 그만 저 멀리 날아가 버리고, 고만고만한 인간들끼리 뭉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미래에 대한 진보도 인간들끼리 모여서 끄집어내면 되고, 월드컵에서도 우리 인간들끼리만 즐거우면 그만이고 말이다. 아마도 여러분들은 지금 속으로 생각하기를, 이것을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머리 아프게 굳이 알 필요가 있느냐고 하겠지만, 그러나 그게 아니라는 말이다.
◈ 이젠 나폴레옹은 그만 !!
여기서 "신성을 공격하는 것 자체가 인간성이다" 라는 말은 무엇을 거부하는고 하니까, 예를 들어서, "나폴레옹은 영웅이다" 라고 하면 지금은 기분 나빠하지만, 그러나 옛날에는 좋아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그게 아니란 말이다. "나폴레옹 지까지 것이 뭔데, 나도 얼마든지 나폴레옹이 될 수 있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제는 누구 하나 모델로 잡지를 못하는데, 그러니 지금은 어느 누구를 특정모델로 잡지 말고, 신을 공격하는 그 인간성 자체를 인간의 됨됨이로 보자는 것이다.
손하진씨가 20시간에 걸쳐서 녹취한 '서양철학사 1강'을 보면, 그 내용이 무엇인고 하니, '존재'는 그만 날아가 버리고 '본성'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즉 '인간성' 이라는 '본성'이 중요하고, 이 '본성'이 현대철학에서는 무엇으로 되는고 하면, 항상 '사건화'가 된다는 것이다. 사건화 말이다. 그러니 "어떤 특정인간을 본받아라" 라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제는 그런 소리를 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 진리란, 사건과 의미로서 !!
요즘은 "인간 위에 인간 없고, 인간 밑에 인간 없다" 라고 하기 때문에, 과거의 그런 구닥다리 같은, 어느 특정인간을 본받으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제는 사건이 중요한데) 지금 자기에게 주어지는 모든 사건들은 자기로 하여금 그 자체가 참된 인간이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사건들인데, 그 다음에 무엇이라 하는고 하니, 거기에다 '의미'를 갖다 붙이면, 그것이 바로 '진리' 라는 것이다. (즉, 사건에다 의미를 같다 붙이면 진리라는 말이다.) 바로 이것이 알랭 바디우의 철학에 나온다는 것이다.
다시 말씀드리면, "지금 내가 왜 이것을 하는가? 즉,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라고 하면, 이것이 모더니즘에서는, 여기에서 먼저 모더니즘을 좀 알아야 하는데, 이 모더니즘이라고 하는 것은, 근대의 질서체제를 부수는 것이 모더니즘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김석수 교수의 강의에 잘 나오는데, 근대를 부수는 것이 모더니즘이라고 말이다.
◈ 왜 로맨티스트인가?
이 모더니즘에서는 음악이나 미술에서 낭만주의가 나오는데, 여기서 이 낭만주의가 무엇인고 하니까, 이것은 어떤 자기 외곽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이 의미라는 것은 자기가 여기 살아있다고 하는 자체가 의미가 된다는 것이다.
◈ 모더니즘 - 이 세상의 중심은 철저히 나 중심 !!
그래서 모더니즘에서 이 세상의 중심은 철저히 자기 중심이라는 것이다. "나 자체가 중심이다" 라는 것이다. 그런데 포스트모더니즘은 무엇이 중심인고 하니, "나만이 중심이 아니고 너도 중심이다" 라고 하는 '다원주의'가 나올 때 그것을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김석수 교수의 말에 의하면, 포스트모더니즘이 한 갈래가 아니라 여러 갈래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무엇인고 하면, 아무튼 극단적으로 한번 나가보자는 것인데, 즉 인간주의를 극단주의로 한번 가보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가보면 결국 남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도대체 의미가 무엇인가?" 라고 하는 것이 남는다는 말이다. 들뢰즈는 결국 여기 '의미'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이 의미를 어떻게 말하는고 하니, 그 모든 의미를 하나님의 언약에다 담아서 우리에게 준다는 것이다. 즉 우리에게 의미라는 것은, "언약에 담긴 이것이 바로 네가 존재하는 의미이다" 라고 하면서 우리에게 안겨준다는 것이다.
◈ 중세, 근세 - 의미는 하나님과 사이좋게 지내는 데서 !!
이것이 참 어려운데,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잘 들어보세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의미를 언약을 통해서, 즉 약속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었는데, 그런데 중세나 근대철학에서는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의 언약을 통해서 의미가 온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코키우스나 언약을 좀 언급했지 그 이전에는 언약을 이야기조차 하자 않았다는 것이다.
다시 한번 더 말하자면, 중세나 근대철학에서는 하나님의 언약을 통해서 의미가 온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나' 라는 존재가 하나님과 원수지간이 아니라, 서로 사이좋게 잘 지내면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말이다.
우리는 여기서 그 차이점을 알아야 되는데, 사실 그 차이가 생각보다 어렵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면, "아, 주님께서 약속을 구원을 받은 자로서 나에게 의미를 주셨구나. 그렇다면 나는 이제 구원받은 사람이네" 라고 나오는 것이 바로 근대 신앙관이라는 것이다.
◈ 모더니즘 - 신은 신성으로, 인간은 인간성으로 !!
그런데 이것이 모더니즘에 넘어오면 어떻게 되는가? 그것이 '존재'가 아니고 뭐가 되는고 하니, '본성'이고 곧 '인간성'이라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신은 신이 아니고 '신성'으로 변하고, 인간은 '인간성'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 '존재'가 아니라 '본성'이 되면서, 이제 여기서부터는 인간세계 자체가 질서 자체를 거부해버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교회란 질서도 거부하고, 국가란 질서도 거부하고, 그렇게 해서 드디어 낭만주의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소위 말하는 'Romanticism' 말이다. 이 낭만주의가 점점 더 나아가서 하이데거에 오면, 이 '본성' 이라는 것은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니, "나는 인간성이 있다" 라고 해도 믿어주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즉 남들이 자기에게 인간성이 있다고 이야기해주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고, 이것이 모더니즘 뒷부분에 '카프카' 같은 경우에 실존주의가 나오는데, 이 실존주의가 무엇이냐 하면, 남이 자기에게 "야, 이근호 당신 인간답네" 라고, 그런 말을 해도 정작 본인은 "에이, 나는 그런 소리 듣기 싫어" 라고 한다는 것이다.
◈ 이것이 지금 나, 나,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러니 중요한 것은, 남들이 자기보고 훌륭하고 착하다고 아무리 이야기를 해주어도, 정작 자기에게는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지금 자기가 살아가고 있는 것, 즉 밥 먹고 오줌싸고, 그리고 이렇게 강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지금 나에게 말이다. (과거처럼 그렇게 남을 의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것이 지금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라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아니, 사람을 칭찬해도 한두 번이라면 듣기 좋지, 자꾸만 들으면 칭찬도 싫증이 난다는 것이다. 그 차이점을 이해하시겠죠? (이렇게 너무나도 철저하게 자기 중심이라는 것이다.)
◈ 박지성의 Strange Goal !!
예를 들어서, 대한민국이 프랑스와 비기고 토고를 이겼는데, 그러니 대한민국 사람들은 태극전사들에게 기대를 건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태극전사 11명 가운데 모더니즘적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렇게 이야기할 것인데, "나는 누구누구를 이겨서 의미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축구를 하는 그 자체가 나에게 재미가 있고, 나에게 의미가 된다" 라고 말이다.
무슨 뜻인지 알겠지요? 남들이 자기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그런 것은 이제 그야말로 귀찮고, 그것은 철이 없을 때 일이고, 이제 철이 들게 되니, "칭찬을 해도 그만, 칭찬을 안 해도 그만" 이라는 것이다. 즉 "이제는 모두 다 싫다 싫어" 라고 한다는 것이다. 순간 순간 그냥 공을 차는 것, 그 자체가 재미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예를 들어, 박지성이 프랑스전에서 한 골을 넣었는데, 그것을 '앙리' 라는 놈은 '멍청한 골'을 넣었다고 했는데, 그래서 외신에서는 'Strange Goal', 즉 '이상한 골' 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든 어떠하든 간에 박지성 자기에게는 괜찮은 골로서, 이것이 자기에게 의미가 되면, 남들이 무엇이라고 하든지 간에 상관이 없고 자기한테는 기쁨이 되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자기에게서 일어난 사건으로, 즉 자기가 공을 차서 한 골을 넣었다는 사건은 자기한테 무엇이 되는가? 자기에게 의미를 준다는 것이다.
◈ 중요한 것은, 내가 나로 계속해서 남는 것 !!
이렇게 사건이 자기에게 의미를 주게 되면, 그 의미를 알아서 행복한 그 순간에는 '신'도 필요 없고, 심지어 무엇도 필요 없는고 하면, 주위에 인간들도 필요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남는 것은 무엇인가? 이 '나' 라는 것에서, '나'에게 계속해서 의미가 되는 그 어떤 사건들이 벌어지게 되고, '나'는 '나'로서 계속해서 남는다는 사실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이야기를 여러분에게 하니까, 성경하고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상관없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왜 그런고 하니까,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라고 할 때,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너는 나의 원수야" 라고 할 때, 우리는 "맞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라고, 그렇게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원수됨 - 절대적인 자아의 절대적 존재의 의미 !!
그러면 어디까지 알아야 하는가? 제가 방금 길게 설명한 것을 모두 알게 될 때, 이 '하나님의 원수됨' 이라는 것이 궁극적으로 절대적인 자아의 절대적 존재의 의미라는 것이다. 여기까지 도달하는 것을 겨냥해서, 애초부터 하나님께서는 "너희들은 나의 원수이다" 라고, 그렇게 규정짓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를 하나님의 원수로 규정짓고 나면, 그 다음에는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의 원수가 아닌, 즉 하나님으로부터 유일하게 원수가 아닌 분이 등장하는데, 그래서 "예수님은 도대체 어떤 분인가?" 라고 질문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은 자신의 존재나 자신의 본성, 그런 것으로 규정짓는 분이 아니라, 예수님은 자기에게 주어지는 그 사건에서 '의미'를 찾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앞에서 말한 것과 똑같다는 말이다.
◈ 예수님과 광야의 무법자와의 만남 !!
예수님이 광야에서 누구를 만났는고 하니, 성령께서 일부러 주선을 해서 예수님이 광야에서 마귀를 만났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마귀를 만났을 때, 이 마귀는 기존 인간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존재의 의미를 가지고 예수님께 설명하는데, 즉 "당신이 진짜 메시야라면 돌이 떡 되게 하세요" 라고 말이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거부하는데, 왜 거부하는가? 예수님은 지금 자기가 금식기도를 하기에, 즉 떡을 먹지 않는 가운데서 기도하는 것 자체가 지금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지시한 사건이란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 자신이 결정한 사건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마귀는 무엇이라고 하는가? "당신이 원하면 돌덩이가 떡이 될 수 있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당신이 가지고 있는 당신의 자발적인 의지와 당신의 이성과 모든 것들을 다 활용해서, 당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당신의 독립적인 결정권을 가지고서 메시아답게 한번 굴어 보세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지금 당신은 배가 고프잖아. 그러면 돌이 떡 되게 할 수 있는 능력도 있고, 자격도 있는 것을 내가 아니까, 지금 배고프니까 돌이 떡 되게 해보세요. 당신은 메시아답게 행동을 하세요" 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무엇이라고 했는고 하면, "지금 내가 나답게 무엇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라는 것이다. 즉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게 아니라 말씀으로 산다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산다고 대답을 하니까, 그 다음에 마귀가 예수님의 대답을 그대로 이어받아서 하는 말이, "시편 91편의 말씀에 의하면, 메시아가 높은데서 떨어질 때에 천사가 와서 받아준다고 하지 않습니까?"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 예수님의 태도 - 나도 말씀에 순종할 뿐 !!
마귀가 말하기를, "예수 당신이 말씀대로 산다고 하니까, 그러면 말씀대로 하자. 그 말씀이 당신으로 하여금 당신답게 될 수가 있는 어떤 요건을 만든다" 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로 하여금 나답게 되는 것, 그리고 예수님으로 하여금 예수님답게 되는 것이 말씀이다" 라고, 마귀는 그렇게 또 다시금 시도를 했다는 것이다.
(시 91:12) 저희가 그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것을 또 무엇이라고 보느냐 하면, "그러한 말씀에 대한 적용조차도 내 소관이 아니고 하나님 소관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말씀이 말씀다운 것을 내 쪽에서 시험할 수 있는 권한은 나에게 없다" 라는 말이다. 그러니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은 그런 시험을 거쳐서 확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은 그냥 말씀으로 주어지는 그 자체이고, 그 자체로서 이 땅에서 이루어질 문제이지, 예수님께서, 예수님 자신이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도록, 즉 저쪽 바깥에 있는 말씀을 전환시켜서 자기 말씀으로 바꿀 수 있도록 말이다.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세 번째로 마귀가 "모든 것을 다 드리겠습니다" 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그만하고 떠나라. 다만 하나님만 경배해야 된다" 라고 하면서 마귀를 떠나보낼 때, 그때 누가 오느냐 하면, 지금까지 다 지켜보았다는 듯이 박수를 치면서 천사들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것을 마태복음에 보면, 천사들이 마치 관람석에서 둘러앉아서 구경하고 있다가, 모든 것을 다 마치고 난 뒤에 무대에 올라와서 힘을 돋아주면서 먹을 것을 예수님에게 바친다는 것이다.
◈ 하나님과 원수가 아닌 자의 특징은? - 언약만 생각 !!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까, 예수님께서 생각하는 진짜 하나님과 원수가 아닌 사람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면, 하나님의 말씀과 언약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진짜 하나님의 원수가 아닌 메시야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 결국 싸움은, 모든 인류와 예수님 한 분 !!
그렇다면 우리 교재 42페이지에서 '하나님과 원수의 싸움' 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누구와 누구의 싸움인고 하니, 모든 인류와 그리고 한 분이신 예수님과의 싸움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과 서로 원수지간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다시 한번 여러분에게 당부합니다만, "나는 원수가 안 될래" 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원수라는 것을 명심해 달라는 것이다. 그것을 기정사실로서 그냥 받아들이면 되는데, 그런데 자꾸만 "나, 하나님과 원수가 되기 싫어. 이젠 바르게 살래" 라고 하면서, 자꾸 그렇게 나오면 정말 곤란하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만 빼고 모두가 다 원수이다" 라고, 그렇게 말씀하시면 우리는 그렇게 원수인 줄로 알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는 "아하, 이래서 내가 하나님의 원수였구먼" 라는 것을 마구 들추어짐을 당하면 되고 말이다. 그렇게 해야 사실 편하고 옳은 것인지, 자꾸만 자기가 원수가 아닌 것으로만 여기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 이름과 이름이 서로 전쟁을 !!
이렇게 모든 인류와 예수님 사이가 원수지간인데, 이것을 전에는 무엇이라고 했는고 하니, 예수님의 이름과 우리 아담의 이름, 즉 아담에 속한 전 인류가 지닌 이름과 예수님이 갖고 있는 하나님의 이름 사이에 전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름과 이름이 서로 말이다. 그 다음에 이 전쟁은 서로가 서로를 치게 되어있고 말이다.
여기서 교재 42페이지를 한번 보자.
** 중립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말은, 인간에게는 반드시 누구나 적이 있게 마련이며, 그리고 그 적들로부터 침범을 당하는 경우와 상대방을 반드시 쳐야 하는 운명을 필히 떠 안게 되었다는 말이다.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것인데, 교재 43페이지를 계속해서 보자.
** 바로 이 산 자와 선악 지식을 고수하는 자 간의 전투가 인간 세상 안에서 개시되었다. 참된 산 자의 모습은 창세기 6장 에녹에서 드러났다. 그는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 곁으로 간 사람이다. 거기에 비해 나머지 사람은 다 죽었다. 그렇다면 에녹에게 생명을 부여하고 동행하신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 에녹의 동행과 노아의 동행의 차이점은?
이 부분이 좀 어려운 대목인데, 노아는 누구의 후손인가? 그는 에녹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사실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인데, 그런데 이 노아 이름의 뜻이 무엇인고 하니, "땅을 안식한다"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이미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했고, 그런데 그 뒤에 나오는 노아도 하나님과 동행했는데, 이렇게 다같이 동행을 했다면,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나라로 갔는데, 그런데 다같이 하나님과 동행한 노아는 왜 그렇지 못하고 죽었냐는 것이다.
노아는 분명히 죽었는데 어디에서 죽었는가? 이 땅에서 죽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은 생명이 있는가? 아니면 죽음이 있는가? 분명히 생명이 있다는 것이다. 에녹과 같은 경우에는, 그 생명이 본인소유가 되어서 그냥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나라로 곧장 날아갔지만, 그러나 이 노아가 품고 있는 생명은 노아 본인의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노아가 지닌 이 땅, 즉 노아 이름이 '안식'이니까, 이 노아가 지니고 있는 생명의 관계가 땅까지, 그렇게 이 땅에 박히면서 땅이 새로운 화목의 상태에 돌입되는 그런 땅으로 전환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 에녹은 좋겠다. 죽지 않고" 라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누가 좋고 누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에녹이 신나겠지만 말이다.
◈ 노아 - 안식을 보여주는 역할극 !!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갔으니 좋겠지만, 그러나 사실 에녹은 본인만 산다는 (축소된) 역할을 했을 뿐이고, 하지만 노아는 노아가 갖고 있는 본인의 생명은 본인의 생명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땅을 안식케 하는 역할을 감당했는데, 노아의 이름이 '안식'이니까, 이 땅에 어떤 희망을 주고 땅의 안식을 제공하는 그런 역할극을 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노아는 이 땅에서 죽지만, 그러나 노아가 이렇게 죽음으로 땅은 안식을 얻는 혜택을 입는다는 것이다.
◈ 여호와 전쟁 - 화목이 원수의 세력 안으로 침투하는 과정 !!
이것을 아주 함축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주님의 화목이 원수라고 하는 세력 안에 점점 더 깊이 지금 침투하는 과정, 그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공부하는 '여호와 전쟁'의 전체과정이라는 것이다. 또한 바로 그것이 성경전체의 줄거리이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그 화목이 이미 원수가 된 이 세상에 점차 점차 파고 들어간다는 것인데, 그렇게 파고 들어가서 기어이 이 땅 자체를 구원해내고, 그렇게 해서 완전히 새로운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드는 작업을 계속해서 쉬지 않고 하신다는 것이다. 오늘날 21세기에 그런 침투조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바로 저와 여러분이고 말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나는 구원받았다. 신난다" 라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어두운 세상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즉 계속 침투조의 임무를 띠고서 계속해서 파고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사명을 우리가 놓쳐버리게 되면, 우리는 우리 존재의 의미를 외부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기 자신에게서 찾기 때문에 드디어 포스트모더니즘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인데, 그런 것을 모르면 우리는 "왜?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데, 하나님 당신이 왜?" 라고 하는 것이 대번에 나온다는 것이다. "예수 당신이 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데, 예수 당신이 왜?" 라고, 그렇게 따지고 나온다는 말이다. (물론 알아도 튀어나오겠지만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이 더럽다는 것은 나도 잘 안다. 또 교회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도 알아. 그래서 난 이제부터는 교회에 안 나가" 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꾸어 말하면, "이제는 이웃이고 가족이고 뭐고 모두 다 귀찮아. 단지 내 몸만 챙기면 그만이야" 라고 하는데, 인간이 사명감이 떨어지면 바로 그렇게 나온다는 말이다.
◈ 당신, 포스트모더니스트 맞지?
소위 십자가를 안다는 사람 가운데서도, 또는 목회자가 십자가를 안다고 본인이 그런 이야기하면서도, 이런 시험에 들 가능성이 굉장히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성경공부시간에 자꾸만 철학을 이야기하는 것은, 본인은 복음이라고 하는데, 그런데 막상 뜯어보면 철학이라는 것이다. 무슨 철학인고 하니, 자기 의미만 챙기는 포스트모더니즘 철학 말이다. 그런 것을 제대로 좀 알자는 것이다.
그래서 남한테 봉사한다든지 하는 이웃에 대한 역할, 그런 것은 전혀 없고 "나, 십자가로 구원받았다. 그래서 내 마음대로 산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을 공부해보면, 그것이 바로 오늘날 현대의 포스트모더니스트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즉 자기 존재의 의미를 위해서 모든 것이 다 있다고 보는, 그것이 예수이든 하나님이든 간에 말이다. 자기 존재의 의미, 혹은 존재의 보람을 위해서 다들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그 사람의 특질이 특별히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전 세계의 분위기가 그렇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지금 온 세상의 분위기가 말이다. 그렇게 된 것이 자본주의 사회인데, 그것은 다른 이야기이니까 여기서 하지 더 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 노아의 전쟁에 대해서 !!
이제부터 교재 43페이지에 있는 '노아의 전쟁'을 살펴보도록 하겠는데, 이 '노아의 전쟁'은 노아 이전과 노아 이후를 서로 비교해 봐야 되는데, 그렇다면 이 노아 이전에는 무엇이 없었는가? '심판'이 없었다는 것이다. 대규모적인 전체에 대한 심판이 말이다. 다시 말해서, 전 인류에 대한 심판이 노아 이전에는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심판이 없었다" 라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바로 악이 마음껏 배양되도록 방치하는 기간이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이 세상의 딸들과 하나님의 아들들과 자유롭게 혼인을 하고, 아무튼 "니 마음대로 한번 살아봐라" 라고 하는, 즉 마음껏 악이 배양하고 번성하도록 방치하는 그 기간이 바로 노아 이전의 시기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면, 앞으로 올 모든 하나님의 전쟁에 있어서, 반드시 이렇게 배양된 죄가 없으면 심판이 없다는 것을 여기에서 미리 이야기를 해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죄가 배양되지 않으면 심판은 있을 수 없다" 라고 말이다.
이렇게 죄는 계속해서 퍼져나가야 되는데, 마치 곰팡이처럼 말이다. 여름철에 흰 빵에 곰팡이가 펴서 자고 아침에 일어나면 온 빵에 모두 펴져 있듯이, 이렇게 온 천지에 죄가 번성하고 충만해야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죄가 충만하면 할수록, 점점 더 심판의 정당성과 당위성은 갈수록 강렬해지고 말이다.
◈ 노아에게 있어서 '하나님과 동행'의 의미는?
그런데 이렇게 죄가 번성할 때, 어떻게 노아는 그 죄의 번성에 동참하지 않았는가? 그것은 바로 그는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이다. 그 이전 에녹과 같은 경우에는,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이 어떤 내용도 없이 죽지 않고 그냥 하늘나라로 간 것으로 보았지만 노아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여기 노아의 때에 오면,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그냥 이 지상에서 수직적으로 하늘나라로 갔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노아는 이러한 동행을 통해서, 수평적으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과 이런 동행이 없는 사람이 어떤 차이가 나는가를 가지고서, 이미 심판 이전에 심판의 기준이 분류되는 흔적을 남긴다는 것이다. 죄가 번성하는 가운데 말이다.
◈ 노아시대 - ① 죄가 번성해야하고 ② 의인을 남겨야 !!
그러므로 노아시대의 특징이라는 것은, 첫째는 죄가 번성해야하고, 둘째는 무엇인가? 이렇게 번성하는 가운데 하나님과의 동행을 통해서 의인을 남기는데, 이렇게 의인을 남겨서 이미 심판 이전에 심판이 개시된 상태의 심판이, 즉 나중에 외재적인(?) 심판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죄는 번성해야 되고, 거기에서 나중에 심판으로부터 면제될 사람은 따로 그 안에서 분명하게 싹이 터서 그 안에 잠재돼 있어야 된다는, 이러한 두 가지의 다른 노선이 이미 심판하기 이전에 진행되는데, 이것이 다음에 오는 심판들과 모든 심판들의 하나의 기준점이 된다는 것이다.
◈ 하박국 -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
예를 들어서, 하박국 같은 경우에 유다 나라의 심판을 선포하는데, 이 유다 나라의 심판의 날이 3년 뒤에 오게 되어있는데, 그 심판을 하는 주체자가 누구인고 하면, 그것이 바로 바벨론이라는 것이다. 이방나라 바벨론이 쳐들어와서 유다 나라를 멸망시킨다는 말이다.
그때 그 하박국에 무슨 이야기가 나오는가? 누가 사는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고 말이다. 그것은 노아가 언약을 믿는 것과 마찬가지로, 마찬가지로 하박국에서는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다.
(합 2: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리고 바벨론이 3년 내에 쳐들어와서 멸망시킨다는 것이, 그것이 3년 내에 부흥한다는 것으로 되어있는데, 즉 3년 내에 모든 하나님의 언약이 드디어 실체화가 되어서 모두 다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진짜 하박국 선지자의 말이 맞구나. 정말 심판을 받아야 마땅하구나" 라는, 이러한 모든 것이 다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하박국 같은 경우에 무엇을 의지하면 안 되는고 하니까, "외양간에 소가 있는가, 없는가?" 그리고 "포도나무에 소출이 있는가, 없는가? 무화과나무에 잎이 있는가, 없는가?" 라는, 그런데 관심을 두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큰일난다는 말이다. 비록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포도나무에 소출이 없다 할지라도, 그리고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다고 할지라도,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리라" 라는 것이다. 즉 오직 여호와의 이름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 이제 땅에서 탈출하라 !!
하박국 정도의 시절에 오게 되면, 노아 같은 경우에는 에녹과는 달라서 땅의 어떤 안식을 주었는데, 그런데 하박국 시절에 오면 땅의 안식조차도 말이 안 되고, 이제는 거기에서 탈출을 시도해야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땅이 더러워졌으니까 말이다. 노아 이후에는 이렇게 땅이 더러워졌으니 또 탈출을 시켜야 되는데, 이렇게 탈출시킬 때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리라" 라는 공식이 적용된다는 것이다.
◈ 설교비평의 기준 - 본문에서 얼마나 십자가를 잘 뽑는가?
그러한 '원형'들을 설교자들은 '노아의 전쟁'에서 제대로 찾아낼 수 있어야 되는데, 설교자들이 왜 그런 것을 찾아내야 되냐 하면, 그것을 찾아내야만 창세기 6장, 7장, 8장, 9장 등등을 계속해서 설교하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까지 설교가 가능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저는 다른 사람의 설교를 들을 때 무엇을 듣는고 하면, 그 사람이 그 본문을 가지고 십자가를 얼마나 잘 뽑아내는가, 그것을 주시한다는 것이다. 십자가를 과연 말이 되도록 뽑아내느냐를 말이다. 구약이면 구약, 신약이면 신약에서, 이 십자가를 어떻게 뽑아내는가를 유심히 관찰한다는 것이다. 물론 감시하는 것은 아닌데, 왜냐하면 본인도 배워야 하니 말이다. "아하, 이 본문에서 십자가가 이렇게도 나올 수 있구나" 라고 말이다.
만약 십자가가 여기에 있다면, 구약성경의 경우에 창세기 7장, 8장에서 그러해야하고, 그리고 노아의 때라면, 저는 박사교회 있을 때는 창세기 7장, 8장에서 이런 경로를 통해서 뽑아냈는데, 그런데 어떤 분은 7장, 8장을 가지고 십자가를 이야기하더라는 것이다. 제가 말하는 경로 말고 혹시 다른 경로가 있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결국 십자가에 도달하지만 이 경로 말고 다른 경로를 주시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이 경로가 그 다음에 진행되는 창세기 9장, 10장, 11장 등등, 그리고 뒤에 나오는 출애굽기 등과도 서로 모순되지 않게 말이다. 그것이 서로 모순되지 않는 상태에서 십자가로 돌아가는지, 아니면 뒤에 나오는 출애굽기와 전혀 다른 상태에서 십자가를 뽑아내는지를, 그야말로 배우는 입장에서 관찰해본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하는고 하니,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면, 지금의 창세기 8장만 가지고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는 출애굽기 12장에서도 설교해야되니 말이다. 그럴 때 창세기 8장에서 이야기하는 십자가와 출애굽기 12장에서 이야기하는 십자가가 동일한 십자가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비록 그 경로가 서로 다르다고 할지라도, 한 경로 안에서는 같은 십자가가 나와야만 된다는 것이다. 물론 경로가 서로 다를 수는 있는데, 그런데 그렇게 경로가 다르다고 할지라도, 자기가 정해놓은 그 경로 안에서는 동일한 십자가가 나와야 말이 맞지 않느냐는 것이다. 왜냐하면, 동일한 설교자가 설교하기 때문에 말이다.
그런데 그 설교자가 설교를 하면서 창세기 8장에서는 십자가를 이렇게 해놓고는, 출애굽기 12장에서는 다른 길로 가버리면, 그러면 "저 사람은 십자가를 뽑아내는 것이 너무 억지다. 너무 무리수를 둔다. 뭔가 앞뒤가 안 맞다. 언뜻 끝에 들으면 십자가를 아는 사람 같은데, 그런데 그 앞에 있는 본문하고 안 맞으니, 저 사람은 다른 본문 가지고 엉뚱한 소리를 할 가능성이 있다" 라는 의심이 드는 것이다.
그러한 설교에 대한 평은 저 자신의 설교에 대한 동일한 평일 수가 있는데, 아니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하는데, 과연 같은 노선을 견지했는가 하고 말이다. 그것은 바로 성경 전체를 제대로 십자가 안에서 다 담아내는 그러한 복음 정신 안에서 설교를 할 수 있는가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성경공부는 바로 이런 점에서 검토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 노아전쟁에서 무지개가, 무지개에서 십자가가 나와야 !!
이 노아의 전쟁에서 십자가가 나오기 이전에 무지개가 먼저 나와야 되는데, 이렇게 무지개가 나오고 나서, 그리고 나서 이 무지개에서 십자가가 나와야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노아의 전쟁에서 마지막에 무지개로 끝났다는 것은,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이 무지개라고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경우에 오게 된다는 것이다.
어떤 경우인고 하니, "이 땅에 비가 내렸다. 이렇게 비가 왔는데, 그 비는 어떤 비인고 하면, 심판의 비이다. 그런데 이런 비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무지개언약'을 통해서, 이 죽음의 비 속에서도 생명의 무지개로 탈바꿈시키는 원칙으로서 이 땅을 다스리겠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무지개언약' 이라는 것이다.
◈ 방주 안의 언약물이 보여주는 것은?
다시 말해서, 이 노아의 전쟁에서 이렇게 무지개까지 이어지는 것을 일관성을 가지고 어떤 모순점이 없이 쭉 끌어와야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노아 방주가 그러한 역할을 하게 되는데, 이 노아 방주 안에는 '언약물'이 들어가게 되고 그 외부에는 방주가 있는데, 그런데 그 방주 안에는 구원을 받은 노아의 8식구가 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방주와 언약물의 관계를 통해서, 즉 제 3자인 노아의 8식구가 구원받는 것, 이것이 바로 저주받은 이 땅을 대체할 바로 그 땅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방주와 방주 안에 있는 언약물 안에서 무엇이 나오는가 하면, 그것은 바로 용서받은 땅, 또는 새 땅, 즉 언약의 땅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언약의 땅의 이미지가 방주와 언약물 속에서 수립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여기서 정결의 의미는?
이것이 레위기까지 이어지는데, 그래서 이 레위기에 보면, 거룩한 동물과 거룩하지 않은 동물로 나누어지는데, 다른 말로 하면 정결한 것과 정결하지 않은 것으로 나누어진다는 말이다. 여기서 이 '정결'의 의미는, 제사에 쓰여지는 것은 정결한 것이고, 그리고 제사에 쓸 수가 없는 것은 정결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도 전혀 우리 인간에서 나온 게 아니라, 즉 (우리와 같은 입장에 있는) 노아의 8식구는 따지지 말라는 것이다. 그들은 제3자이기 때문에 말이다.
다시 한번 정리해보면, "이것은 정결하다, 이것은 정결하지 않다" 라는 것은 노아 8식구가 머리 맞대고서 회의해서 결정된 사항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정결하다고 하면 정결한 줄 알면 되고, 이것은 불결하다고 하면 불결한 줄 알면 되고 말이다. 이것을 먹으면 자기가 정결해지든지 불결해지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미 노아 8식구는 다 빠져있고, 여기서 거룩한 것인지, 거룩하지 않는 것인지는 방주와 언약물 사이에서 자기들끼리 해결할 문제라는 말이다. 다만 여기에서 언약이 완성되면, 그 혜택을 8식구가 누리는 방식이란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모르면 모세언약에서의 제사법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제사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정결한 것이고, 제사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부정하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되는고 하면, 노아의 식구가 지금은 8명에 불과하지만 나중에 모세언약에서는 바로 이것이 이스라엘이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정결한 언약물이 이스라엘 백성 속에 들어가게 되면, 그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을 수 있는 것이 정결한 것이 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을 수 없는 것은 부정한 것이 된다는 말이다.
◈ 제물의 인간화 - 이스라엘 자체가 언약의 제물로 !!
이것은 곧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이제는 제물 문제가 아니라 이스라엘 자체가 언약의 제물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교회를 넘어서' 라는 책에서는 '제물의 인간화' 라고 했고 말이다. 이렇게 제물의 인간화인데, 사실 이것을 '인격화' 라고 하면 좀 곤란하고, "제물이 인간으로 되었다" 라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제물로 되었다" 라는 말이다.
그때부터 이스라엘은 무엇이냐 하면 거룩한 백성, 즉 거룩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출애굽기에서는 이것을 '언약백성' 이라고 하는데, 이 언약백성이란 말은, 여기서는 항상 백성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항상 그들 안에서 언약이 튀어나와야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내리신 언약이 말이다. 그러니 사실상 노아에게 노아의 8식구는 의미가 없고, 이 노아 8식구를 통해서 언약이 튀어나와야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외부로 튀어나와야 되는데, 그 튀어나온 언약이 땅을, 즉 노아와 그 후손들이 차지할 그 땅을 지배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그 땅을 지배하는 새로운 질서로서 제공된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무엇인고 하면, "네가 어려서부터 악하기 때문에 다시는 물로서 심판하지 않겠다" 라는 것인데, 사실 이것이 참으로 어렵다는 말이다.
◈ 다시는 물로서 심판하지 않겠다 - 이제 언약의 대상으로만 !!
이렇게 "다시는 물로서 심판하지 않겠다" 라는, 이것이 바로 '무지개 언약' 인데, 이런 무지개 언약의 특징은 무엇인고 하니, 이 무지개는 물과 관련이 되어있는데, 비가 오고 난 뒤에 말이다. 이렇게 물로서는 심판하지 않겠다는 것이 무지개 언약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면, "이미 너희들은 내가 사람취급을 하지 않겠다" 라는 것이다. 단지 언약의 대상으로서만, 즉 물로서는 심판하지 않겠다는, 바로 그런 입장에서만 다루어지는 존재로 보겠다는 말이다.
여기서 머리가 좀 아픈데, 생각을 좀 해보세요. 예를 들어서, 사람을 볼 때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라고 하면, "예, 천성은 입니다" 라고 하면, "나는 당신의 이름이 천성은 이든지 누구든지 관심이 없고 다시는 주먹으로 때리지 않을 사람으로 여기겠다" 라는 것이다. 그러면 천 목사님은 "저 사람이 자기 생각만 하고 앉았네. 내 생각은 안 하고 나를 무엇으로 보나" 라고 하면, 상대방은 "나는 너를 때릴 수 있지만, 내가 스스로에게 내린 약속이 바로 너를 주먹으로는 때리지 않겠다" 라고 것이다.
그렇게 하고 나서 엄마손 고무장갑(?)을 하나 준다는 것이다. 그러면 천 목사님은 "아니, 저에게 고무장갑은 왜 줍니까?" 라고 하면, 상대방은"다시는 주먹으로 때리지 않겠다는 표시입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너는 주먹으로 맞아도 싸지만, 내가 나한테 맹세해서 너를 때리지 않겠다" 라는 것이다.
◈ 도대체 인간은 왜 안 되는가?
다시 말해서, "너는 그 어떤 경우라도 내 언약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절대로 못 벗어난다. 이미 죽은 존재이기 때문에 말이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너는 어떤 경우라도 다음에 오는 차기 언약의 증표를 드러내는 도구로 존재할 뿐이지, 너의 독자적인 주장이라든지 주의(ism)라든지 하는, 그런 것은 이미 나에게는 물 건너간 것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무지개를 건너간 것이니까, 그러니 이제 그런 이야기는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니, 이것도 좀 어려운데, 우리 인간들은 "우리들도 좀 생각해주셔야지, 즉 우리 처지도 이해해주셔야 되지 않습니까?" 라고 하는데, 그러나 그것은 이미 노아 이전에 인간들의 악이 무엇인지 다 드러났는데, 즉 죄가 이미 번성했기에 말이다. 그렇게 죄가 번성할 때 이미 벌써 다 알아봤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는 온갖 악들은 이미 벌써 다 나왔다는 것이다. 이렇게 다 나왔기에, 그래서 그것을 홍수로서 심판해버렸고 말이다. 그렇다면 이제 새삼스럽게 인간에게 나올 것이 없는데, "니, 이제 정신 좀 차렸나?" 라고 말이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생각하는 것이 악하기 때문에, 그렇게 태어날 때부터 악한 인간에게 무슨 기대를 거느냐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전에 물 심판을 했을 때, 그때는 잘 몰라서 그랬는데, 이제부터는 개과천선해서 정말이지 잘하겠습니다" 라는, 이따위 소리는 이제 더 이상 필요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미 어려서부터 악하기 때문에, 즉 우리는 지금 당장 주님께서 지붕이 무너지게 해서 죽게 해도 전혀 할 말이 없다는 것이다.
◈ 무지개 언약이 도구로서만 존재하는 세상 !!
다시 말해서, "너희들은 어려서부터 악하기 때문에 이미 물로서, 즉 홍수라는 담요를 가지고 너희의 입을 막아서 죽여버렸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무지개 언약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 이 세상이 어떻게 되든지 간에 이 무지개 언약이 제 값을 하고 도구로서만 존재하는 세상이 드디어 전개된다는 것이다.
◈ 왜 멍석을 깔아야 하는가?
저는 그것을 멍석을 까는 것에 비유를 하는데, 그렇다면 왜 그런 멍석을 깔아야 하는 것인가? 여기서 좀 더 깊이 들어가겠는데, 마치 씨름판에서는 멍석을 깔지 않으면 씨름이 이루어지지 않듯이, 그래서 반드시 멍석을 깔아야 되는데, 그렇다면 이 멍석에는 무엇이 들어있다고 있는가?
인간은 어려서부터 악한데, 그렇다면 그렇게 악한데 왜 살려두시는가?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을 전개하기 위해서, 즉 무지개 언약으로 악한 것을 어릴 때부터 덮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멍석이 결국 무엇이냐 하면 '은혜의 멍석' 인데, 이 은혜의 멍석은 인간은 이미 죽은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의 잘잘못과 선인과 악인, 그런 것에 상관없이 주어지는 멍석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은혜의 멍석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고 하니까, 햇빛을 주시고 선인과 악인에 관계없이 비를 내리시는데, 그래서 욥기에 보면 황무지에 비가 내리고, 마태복음 5장에는, 악인과 선인에게 호흡을 주시고, 비를 내리시고, 햇빛주시는 자비로운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마 5: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그런데 이 자비는 우리가 "하나님, 그것은 자비가 과연 맞습니다" 라고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우리의 생각과는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이것이 자비이다" 라고 하면, 우리는 그냥 자비인 줄로 알면 된다는 것이다. 그냥 그저 주시는 '자비' 말이다.
◈ 과연 일반은총인가? 아니면 노아언약인가?
이것을 카이퍼는 '일반은총' 이라고 주장을 했는데, 그러나 이렇게 일반은총이라고 하면 문제가 되는 것이, 이렇게 일반은총이라고 해버리면, 그것은 마치 우리가 무슨 하나님의 은총이라도 받을 자격이라도 있는 줄로 생각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일반은총은 말이 안 되고, 이것은 하나님의 '노아언약' 이란 것이다. 노아언약, 즉 무지개 언약에 의해서 그냥 주시는, 즉 모든 인간에게 그냥 주신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것을 인간에게 묻지 않고 그냥 주셨기 때문에, 인간의 선악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선을 행하면 복을 받고 악을 저지르면 벌을 받는다" 라는 것과 상관이 없다는 것인데, 왜냐하면, 악한 자라도 죽을 때 고난이 없을 수 있고, 얼마든지 부자로 잘 살고, 병이 없고 말이다. 그런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고, 반면에 어떤 사람은 열심히 수고했는데 모든 성과는 남이 다 가져가 버리고 말이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그런 일들이 많다는 것이다. 우리 주위에 친척들 보면, 일은 열심히 했는데 놈팽이 같은 남편이 와서 다 빼앗아 가는 경우도 있고 말이다.
◈ 이 며느리가 진정 억울한 이유는 !!
이것은 하나의 실례에 불과하지만, 병든 시어머니를 며느리가 무려 40년을 봉양했는데, 이 며느리는 자기 자식의 공부도 다 포기하면서 시어머니를 섬겼다는 것이다. 그리고 시어머니 명을 따라서 삼촌들과 고모들의 공부를 다 시켰고 말이다. 그래서 삼촌과 고모들이 똑똑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어머니가 죽으면서 유산을 남겼는데, 이 시어머니가 며느리의 정성을 안다면 우리의 상식 같으면 어떻게 할까요? "며느리야, 네가 고생했으니까 이 땅은 너 해라" 라고, 이렇게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라는 것이 어떠한고 하면, 실컷 봉양을 받고서는 "너는 맏며느리로서 할 도리를 다했다. 그러니 뭘 더 바라는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그 막대한 유산을, 며느리는 자식들 공부도 제대로 못 시켰는데, 그런데 그 며느리가 돌봤던 시동생과 시누이들에게 유산을 물려주라는 유언을 했을 때, 제3자가 봤을 때 얼마나 그 억울하게 느껴지겠느냐는 것이다. 사실 억울한데, 그런데 이것이 억울하다는 것은, 그것은 바로 이 무지개 언약을 모르기 때문에 억울해한다는 것이다.
이제 이해가 좀 되는가요? "아, 무지 억울하다" 라는 것은 무지개 언약을 모르기 때문에 억울하다는 것이다. 엄청나게 많은 돈이 그 쪽으로 간다고 할지라도, 중요한 것은 자기에게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믿음이 있거든, 돈이 아니라 그 무엇이라도 다 빼앗겨도 그 사람은 손해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축복을 받았다는 것이다.
◈ 셈과 야벳과 함과 가나안, 과연 어느 쪽이 더?
그 이야기가 여기에 나오는데, 미리 이야기를 좀 해보자면, 은혜의 멍석 위에서 은혜를 아는 족속이 등장하는데, 그것이 곧 셈족인데, 야벳 족속은 일단 여기에 넣어주는데, 물론 나중에 빠지지만 말이다. 이렇게 자기의 힘에 의해서 은혜의 은혜됨을 차버리고, "은혜 같은 소리하고 있네. 힘이 있어야 살지" 라고 하면서, 힘을 의지하는 새로운 함 족속과 가나안 족속이 있다는 것이다.
과연 어느 쪽이 융성하겠는가? 이쪽 함과 가나안이 상당히 힘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여기가 주도를 이루게 되고, 반면에 셈 족속이 있는 쪽은 나중에 보면 희미해진다는 것이다. 물론 초창기에는 아브라함의 양이 번성하고, 야곱의 양이 번성하고, 그리고 요셉이 도와줘서 번성하고 그랬지만, 그러나 결국에는 심판이 있기 이전에 무엇이 번성해야 하는고 하니까, 그야말로 악이 마구 마구 번성하게 되니까, 그래서 함 족속과 가나안 족속이, 즉 악한 쪽이 번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 은혜의 멍석에서 버섯이 움트듯 !!
다만 제가 여기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 은혜의 멍석, 즉 은혜언약은 그냥 말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고, 진짜로 은혜를 받은 족속이 이렇게 등장했다는 말이다. 다같이 악한 사람이지만, 은혜를 아는 희한한 족속이 여기에서, 즉 은혜의 멍석에서 하나의 버섯이 움트듯이 그렇게 나왔다는 것이, 그것이 정말로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등장하는 것이 노아의 식구들인데, 그런데 이 노아의 식구들이 둘로 나눠진다는 것이다. 노아가 받은 은혜를 아는 식구, 즉 이것은 셈과 야벳이고, 그리고 다른 한 쪽은 노아가 받은 은혜를 모르는 식구, 즉 함과 가나안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해서 둘 사이에서, 누가 이 은혜의 멍석에 합당한가를 놓고서 전쟁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노아의 전쟁' 이후의 전쟁이고 말이다.
그러므로 여기 이 노아의 전쟁은 사실 노아가 한 전쟁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이 하신 전쟁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노아 이후의 전쟁은 점차 하나님이 개입하면서, 그것이 인간이라는 도구를 앞장세워서 인간적인, 즉 실체적인 면으로 바뀌는 것이 노아 이후의 전쟁이고 말이다.
◈ 에녹과 노아의 차이점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