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3:4-6 (계 3:4)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Re..계 3: 4- 6 ( 흰 옷 )
이름 : 이근호(IP:)
흰 옷
2006년 6월 18일 설교 본문: 요한계시록 3:4-6
(계 3:4)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계 3: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계 3:6)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님께서 자신이 세우신 교회이면서도 그 교회 안에 구원될 자와 그렇지 않는 자를 분류하십니다. 이 분류의 기준은 오로지 말씀 뿐입니다. 개인적인 행함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즉 개인적인 능력의 차이로 인하여 구원되고 아니되고가 아니라 인간의 능력을 의지하는 자와 주님의 능력이 임한 사람의 차이에 들추어내는 식으로 말씀은 작용합니다.
오늘 본문의 경우, 두 개의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는 ‘흰 옷’이요 다른 하나는 ‘생명책’이른 말씀입니다. 이 두 개의 말씀을 가지고 천국 갈 자와 지옥을 갈 자를 분류하십니다. 흰 옷을 더럽히지 않는 자가 곧 생명책에서 그 명단이 흐려지지 않는 자라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흰 옷이 흰 옷답게 계속 유지하는 그들이 생명책 기록성을 효력을 계속 드러내게 되는 그런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흰 옷은 무슨 의미이며 생명책은 무슨 의미입니까? 흰 옷이란 인간들이 각자 집에서 개성있게 해 입고 온 옷이 아닙니다. 일괄적으로 외부에서 입혀주어서 입게 되는 그런 옷입니다. 그리고 흰 옷이란 색깔이 있는 옷이 아니라 도리어 전에 색깔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 색깔이 완벽하게 탈색이 되었음을 말해주는 옷입니다.
이 두 개를 종합해보면 이러합니다. 어떤 분이 인간들의 개개인의 개성과 자질과 성격을 깡그리 무시하고 일률적으로 탈색시킨 옷을 입히는데 이 탈색의 과정에서 개인적인 취향은 완전히 거부당한다는 겁니다. 즉 자기 행함과 공로와 능력에 신경 쓰는 사람이 있다면 전혀 천국 백성이 아니다 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옷은 무엇으로 인해 희게 되는 겁니까? 요한계시록 7:14에 보니,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천국에 미리 가 있는 장로는 그들이 입고 있는 옷이 흰 것은 오로지 ‘어린 양’의 피로서 희게 되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이렇듯 ‘어린 양’의 피로 세탁의 효능을 받는 사람은 오직 생명책에 그 명단이 있는 사람에게만 국한 됩니다. 요한복음 6:37-40에 보면,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20:15에 보면,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로서 하나님은 오로지 생명책의 가치와 위력을 온전히 드러내는 양상으로 구원 작업을 전개해 나가시는 겁니다. 생명책의 명단이 구원으로 이어지는 것은 오로지 흰 옷, 즉 ‘어린 양의 피로 씻음받음’ 이 외는 없음을 분명히 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생명책 명단이 희미하게 지워지는 경우를 점을 감안해서 자기 자신의 명단이 생명책 안에 흐려지지 않고 또렷하게 그대로 남을 방안을 검토하게 됩니다. 즉 생명책의 명단 유지에 대해서 자신의 행함의 능력을 발휘해보고자 합니다. 이것은 ‘흰 옷’의 취지와 맞지 않는 사고방식입니다.
인간에게 자아가 두 개가 있습니다. 한 자아는 늘 결핍을 느끼는 자아입니다. 자신의 욕망대로 살지 못함을 늘 한탄하는 자아입니다. 다른 한 자아는 본인이 생각해놓은 완벽한 목표점에 도달한 자아상입니다. 이 두 개의 자아상 사이에는 늘 간격이 남아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두개의 자아상을 일치시켜 보려고 오늘도 부지런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총각이 장가가고자 하는 것이나, 소를 더 많이 늘이고자 하는 것이나 밭을 사고자 하는 것이나 모두 근사한 미래의 자아상과 현재의 자아상을 따라잡아서 일치하려는 애씀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적으로 자신의 자아 바깥에서 벌어지는 일에는 관심두지 않게 마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예복 입기를 원하시는 것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그 천국 잔치 예복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무슨 일을 하셨는가도 관심두지 않습니다. 인간들은 오로지 자기가 멋지게 꿈을 꾸어놓은 자신의 미래상을 따라잡는데 주력합니다.
요한복음 3장에 보면, 어느 날 밤에 니고데모라는 분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 고결하고 순결한 마음씨를 드러내었습니다. 하지만 니고데모에 대한 주님의 판정은 단호하십니다. “네가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한다”고 말입니다. 즉 니고데모가 아무리 천국에 대해서 궁금해도 그것은 현재의 자아를 억지로 천국으로 밀어 넣어보겠다는 행함의 애씀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육으로 난 것은 어디까지나 육으로 떨어지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생명책에 그 명단이 담겨 있는 사람입니까? 누가복음 24장에 보면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가 나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제 3자가 등장해서 그들과 길을 동행하게 됩니다. 두 제자는 방금 예루살렘에 일어났던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가 결국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펼치지도 못한채 십자가에서 끝을 맺었다는 겁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자신의 자아성에만 묶여 있습니다. 눈을 뜨지를 못했지요. 예수님과 살갗을 맞대어도 그 십자가 죽으신 그 예수님께서 이렇게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지를 못한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왜 그리스도가 죽어야 하는지를 모세의 글로부터 시작해서 알려주셨습니다.
즉 참된 그리스도는 인간들의 눈 앞에서 죽음으로 사라졌다가 다시 부활로 나타나셔야 하는 분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행함으로 자아를 천국으로 몰아넣어보겠다는 모든 인간들의 행함을 육으로 규정하고 배척하기 위함입니다. 갈라디아서 3:1에 보면,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인간의 모든 행함으로 인간들이 천국 백성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십자가 공로로만 택한 백성에 한해서 구원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런 지혜는 인간들이 수 천, 수 만명 모아놓아도 나올 수 없는 지혜입니다. 기도 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구원받은 자아보다 예수님이 더 귀한 분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1-05-11 06:24
017강-계3:4-6(흰 옷)-rev060618
설교 : 이근호 목사님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계시록 3장 4절에서6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402페이지입니다. 제가 읽습니다.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
사데 교회가 분명히 주님께서 세우신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같은 교인들끼리라도 주님께서 같이 쳐주지 않고 교회 안에서 분류를, 작업을 하신다는 이것은 우리에게 위기죠. 어떤 교회에 등록하면 자동적으로 교인이 되고 또는 세례를 받으면, 유아세례를 받는다든지 성찬식에 참석하면 자동적으로 천국에 가는 사람으로 이렇게 확정되는 걸로 알고 있는 우리들에게
주님께서는 성만찬이라든지 세례식이라든지 그것에 최종적인 근거를 두시는 것이 아니고 오늘 전했던 이 말씀, 이 말씀이 끝까지 우리가 천국 갈 때까지 끝까지 따라붙어 가면서, 이 말씀 들이대면서 이 말씀을 수용하느냐, 인정하느냐 끝까지 추적합니다.
특히 흰 옷 입은 사람들은 다 아니라는 거죠. 사데 교회 모든 사람이 다 지옥 가는 것도 아니고 다 천국 가는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그중에 흰 옷을 입은 사람이 있는데 더럽히지 않는 흰 옷을 입은 사람만이 생명책에 기록될 사람이고 그 사람 이름은 생명책에서 지우지 아니하면서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내 사람’이라고 받아준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가 사데 교회라는 특정 교회에만 주는 편지가 아니라 성령이 교회들에게 또는 모든 교회에게 동일하게 적용이 되는 기준점으로서 이 말씀이 적혀있다고 하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긴장이 되는 것은 하얀 흰 옷을 입고 더럽히지 않는 그런 사람과 그리고 지옥 갈사람, 같은 교회 내에서 지옥 갈 사람과 비교를 할 때에 우리는 먼저 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어요.
저 사람과 나 사이에 어떤 능력의 차이가 있겠는가? 저 사람이 갖고 있는 능력과 내가 갖고 있는 능력이 어떤 차이가 있는가? 이것부터 견주려고 시도를 하는데 그게 아닙니다. 성경에는 사람과 사람의 능력으로 견주어서 잘한 사람은 넣어주고 못한 사람은 지옥 보내는 식이 아니라 여기에 있는 말씀은 인간의 능력과 주님의 능력이 완전히 천지차이라는 거죠.
주님의 능력이 사람이 하지 못하는 것도 해내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주님의 능력에만 의존하고 주님의 능력만 믿고 자기가 아니라, 자기가 죽적한 자기 고유의 능력이 아니라 저 사람을 이기기 위해서 내가 개발한 능력이 아니라 주님께서 거저주시는 능력을 주님의 능력답게 고맙다고 여기는 데서 얼마나 유지하고 있나, 그걸 얼마나 지키고 있느냐, 거기에 대해서 얼마나 감사하고 있느냐 이걸로 판가름 나는 겁니다. 이걸로.
괜히 새 능력 받으려고 설쳐대면 그것이 또 자기한테 큰 문제가 되죠. 오늘 본문에서 흰 옷 입은 사람은 생명책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희미해지지 않는다. 라고 돼있을 때에 우리는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은 흰 옷을 입고 다닌다. 흰 옷은 더럽히지 않는 흰 옷이다. 그리고 그 흰 옷 입은 사람의 특징은 뭐냐,
그것은 본인의 능력이 아니고 생명책에 이미 이름이 기록됐기 때문에 그 생명책에서 터져 나오는 능력이 그 사람에게 도착되니까 그 사람은 흰 옷을 자랑스러워하면서 더럽히지 않더라, 라는 이야깁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생명책에 이름을 우리가 내 이름을 지워지지 않기 위해서, 또는 생명책에 이름이 없는데 내가 이름을 집어넣기 위해서 내 쪽에서 어떻게 힘을 쓸 수가 없겠느냐,
생명책에 내 이름이 빠져있는데 이름을 적어 넣을 수 있는 어떤 비책, 밀어부칠 수 있는 어떤 묘책, 그런 것이 없겠느냐 구상을 하게 마련인데 그것은 생명책이 뭔 책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생명책이 방명록이 아니에요. 빈 공책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생명책에 적힌 사람만 구원을 받는다고 적혀있습니다. 마지막 심판에, 요한계시록 20장 14,15절에 보면 마지막 심판이 주어지는데 그 마지막 심판에 보면 둘 째 사망에 들어가지 않는 사람은 누구냐 하면,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운다.」 이렇게 돼 있습니다.
불못에, 마귀들이 가는 유황불에 들어가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라고 단정을 할 수 이씨느냐 하면, 그 사람은 생명책에 명단이 없는 사람 생명책, 리스트에 없는 사람은 무조건 거기에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생명책에 명단이 빠져있는 사람은 지옥 불에 들어가는 거예요. 이것은 어떤 인품이라든지 종교라든지 신앙의 연륜이라든지 이런 것은 전혀 여기에서 힘을 쓰지를 못합니다.
키가 몇 센티미터냐, 남자냐 여자냐, 어린애냐 어른이냐 할아버지냐 전혀 이거는 관계없습니다. 어린애라도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은 구원받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옥 갑니다. 중세교회에서 고민거리가 있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임신해 태어나자마자 곧 죽은 사람, 아기가 지옥 갔겠는가 천국 갔겠는가 하는 그것 때문에 논쟁이 되었습니다.
애가 태어나자마자 엄마가 관리를 잘못해 죽었기 때문에 죄를 짓고 싶어도 시간적 여유가 없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자기 죄로 말미암아 만약에 어린아이가 지옥 간다면 죄도 안 지었는데 지옥가게 된다 말이죠. 그렇다면 지옥에서는 그 사람에 대해서 책임을 물어야 되는데 어린애가 책임 물을 죄를 안 지었다 말이죠. 태어난 것이 죄냐, 이래 따지면 곤란하잖아요.
그래서 천주교에서 어떻게 했냐면 패자부활절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을 연옥이라고 하는데 철이 없어가지고 멋도 모르고 지은 죄한테는 기회를 한 번 더 주는 거예요. 기회를 한번 더 주어가지고 연옥이란 데를 가가지고 지옥 비슷한 곳인데 천국보다는 못하고 지옥보다는 고통이 덜 한 곳에 가가지고 고생을 좀 해보는 거예요.
고생을 하면서 뭘 느끼는가 하면, ‘야, 이 동네 못살겠다, 예수님 믿고 천국에 갈란다’ 그런 마음이 들면 천국 보내주고 이렇게 고생해도 예수 믿을 마음이 없다, 그런 인간은 다시 한 번 이제는 연옥이 아니라 영원한 지옥에 보내는 중간지대를 마련한다. 이렇게 되었어요. 그런데 그 중간지대가 2층으로 돼있어요. 1층은 연옥이고 한 층이 더 있는데 그곳이 낙원이란 곳인데 낙원이 영원한 천국은 아닌데 일단 선선한 곳이랍니다. 섭씨 17도 내지 17도 되고 습기는 40퍼센트, 축구하기 좋은 그런 잔디밭도 있는 그런 곳인 모양입니다.
골프치다가 영원한 천국에 갈 때까지 임시로 가는 휴게소 같은 곳이 있다는 겁니다. 4단계를 만들어가지고 그 연옥에서 낙원에서 영원한 복락에 가려고 한다고 하면 어떻게 하면 되느냐, 후손들이 하나님께 뇌물을 얼마나 쓰느냐에 따라서 결정되는 겁니다. 조상들 죽고난 뒤에 미사를 열면 됩니다. 마사를 열어가지고 돈푼께나 풀면 빼줍니다.
그걸 통도, 마리아의 기도 살아있는 사람들이 많은 기도를 하고 기도빨을 먹여주면 이게 중보기도가 돼가지고 중보기도라는 것은 내 기도에 효험이 있다는 거죠. 저쪽이 복음에 반응이 나타나지 않을 때는 여기서 기도빨을 올리면 그쪽에서 반응이 나타나 그쪽에서 복음 받아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는 겁니다. 왜 이렇게 반응이…? 이게 중보기도거든요. 중보기도 덕분에 빠진다는 거지요.
그래서 생명책이라 하는 것은 원래 비워있는 곳인데 얼마나 후손들이 잘하느냐 여분에 따라서 생명책에, 명단에 리스트가 올라가느냐 마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만약에 베스트10에 못 들어가면 후보에서 빠지다가 6대손이 밀어줬다 하면 6대 조상이 6대손 조상에 의해서 베스트10에 드는 거예요. 들어갈 수 있는 겁니다. 천국 갈 수 있는 거죠.
그래서 그만큼 교회서 하고 있는 성만찬 성례식에 진지하게 참여하고 부동산은 후손이나 선대들을 위해서 성과급을 누적하는, 마일리지 포인트, 마일리지 포인트를 쌓기 위해서라도 십일조가 문제가 아니라 재산을 성당에다 바치면 부동산이 오르고 병원도 잘 될 것이고 미리 죽은 사람들에게 힘이 돼가지고 빼준다 이런 겁니다.
문제는 생명책이라는 것이 이미 리스트가 확정이 되면 더 이상 아무리 인간이 힘쓰고 빽써도 이 리스트가 변동사항이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하실 때 생명책이 비어있는 것이 아니고 이미 확정된 명단이 어떻게 그 본인의 행함과 상관없이 본인이 이 땅에서 어떤 짓들을 하고 어떤 죄를 지은 것과 상관없이 명단이 갖고 있는, 생명책에 이름을 적어놓은, 주님의 적게 하신 그 위업과 능력이 얼마나 쌨으면 구원받을 자의 행동거지와 모든 것을 상관없이 구원이 되겠느냐, 그것을 밝히 보여주는 위력이 바로 생명책입니다.
생명책에서 명단이 지워진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겁을 집어먹고 그 생명책의 명단이 지워지지 않게 이쪽에서 뭔가 자기 행함을 집어넣으려고 시도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묻는 게 이겁니다. ‘목사님, 일단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됐는데, 기록됐기 때문에 다 학습 세례 받았는데 만약에 나쁜 짓을 했다고 합시다.
나쁜 짓을 했다고 했을 때에, 그 흰 옷이 더럽혀졌을 경우에 생명책의 잉크가 지워져버릴 경우에 그걸 다시 한 번 복원할 수 있는 어떤 방법이 없겠습니까?‘ 이렇게 묻는다는 것은 구원이란 것이 예수님 쪽에서 거저 나누시는 티켓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골라 잡아내는 하나의 티켓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요구하는 사람에 의해서 얼마든지 천국은 내가 들어가면 들어가고 말면 말 수 있다는 그 선택권이 나에게 있다고 여기는 그런 착각, 착각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흰 옷을 입는다는 것은, 흰 옷이라는 게 원래 색깔 없는 옷이거든요. 흰 옷이라는 것은 어떤 인간의 개성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흰 옷을 입혀준 분의 개성과 특징만 고스란히 그 사람에게 남고 개인의 요구사항 같은 것을 흰 옷에다 새길 수가 없어요. 흰 옷은 일종의 유니폼인데, 유니폼이라는 것은 동일한, 한 가지밖에 없는 색상이 하나밖에 없는 옷이에요.
이 옷은 내가 선택해서 내가 알아서 입는 옷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나는 노란색 되는데 저 사람은 농땡이치고 놀아서 빨강색이다, 이런 것이 없다 이 말이죠. 흰 옷이라 하는 것은 외부에서 나에게 입혀준 옷이에요. 그 흰 옷이 되기 위해서는 첨부터 흰 옷이라는 색깔을 입었던 게 아니고 처음에는 붉고 얼룩덜룩한 여러 가지 색깔들이 사람마다 다 다른데 그것이 흰 옷이 된 것은 그 모든 색깔을 뭔가 지워버리는 어떤 요인 때문에 흰 옷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무엇을 지우는가? 요한계시록 7장14절 보니까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 그 옷이 씻어 희어지게 되었느니라」천국에 갔는데, 먼저 온 장로님들이 보니까 사람들이 떼 지어 오거든요 Who Are you? 당신들 누구십니까? 당신들 어디서 왔으며 누구십니까? 물으니까 사도요한이 하는 말이 “이분들은 어린 양의 피로 씻어 희게 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어린 양의 피로 말미암아 씻었기 때문에 색깔 없는 흰 옷을 입고 하얗게 된 사람입니다. 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어린 양의 피가 적용이 되는 사람은 아무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세제가지고 자기 옷 때를 민다고 하얘지는 게 아니에요. 어린 양이 여기에 도달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면 주님께서 유일하게 아시는 분이에요.
주님께서 아시는 사람인데 주님은 어떤 사람을 구원하느냐면, 요한복음 6장39절에 보면 「내가 이 땅에 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함이 아니요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 함인데 그것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를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까지 다 살리는 이것이니라.」이렇게 돼 있어요. 예수님의 머릿속에는 뭐가 들어 있느냐하면,
오직 자기 백성만 생각하는데 그 자기백성을 건져내는 데는 일말의 실수나 오류나 허점이나 실패가 있을 수 없다 이 말이죠. 실컷 건져놓고 ‘어? 내 사람 아니네,’ 이런 경우는 없다 이 말입니다. 정확하게 자기 양인지를 가려내요. 그리고 양은 특징이 뭐냐, 다른 사람은 그걸 거부해도 자기 양만큼은 목자의 음성을 이상스럽게 거부하지 않아요. ‘야~ 목자다!’ 하고 알아봐요. 알아봅니다.
양은 목자를 알아보고 목자는 자기 양을 알아보고, 그들만의 세계죠. 그들만의 폐쇄된 세계, 그들만의 공유하는 비밀이 있는 그런 세계. 그런 세계가 형성되려면 그러한 세계에서 투입하는 모든 인간적인 행함이라는 것, 종교적인 노력과 정성 이런 것을 커트할 필요가 있습니다. 모두 잘라버릴 필요가 있어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착함, 선행, 양심껏 살았다는 이런 모든 것, 열심히 살았다는 이 모든 것, 그런 것을 다 끊어버릴 필요가 있어요.
무슨 말이냐 하면, 인간과 인간이 인간의 차이를 낼 수 있는 인간 속에 있는 어떤 자질 같은 것, 이런 것을 일체 거부해야 됩니다. 어떤 사람이 남들보다 노력을 더 배가했기 때문에 더 열심히 정성을 바쳤기 때문에 구원받는다는 이러한 인간적인 자질과 자질로서 대결이 가능하고 비교가 가능한 이런 요소는 사정없이 다 잘라버려야 목자가 양을 찾고 양이 그 목자의 음성을 안다는 이것만 달랑 남거든요.
그래서 마지막 심판에는 어떤 거냐 하면, 책이 두 권이 있는데 하나는 ‘행함 책’이 있고 하나는 ‘생명책’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지옥 가느냐 하면, 생명책이 없는 사람들이 지옥 가고 행함 책에 명단이 있는 사람은 다 지옥 갑니다. 계속해서 그 인간은 자기 행함에만 마지막 기대를 걸고 살아가기 때문에 이런 사람은 처음부터 생명책에 명단이 없는 주님, 목자를 못 알아본다는 사람이 그런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지요?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하면서도 구원에 관심 있는 사람, 이게 요한복음 3장1절에 보면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밤에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니고데모라는 사람은 성경박사입니다. 신학도사지요. 메시아를 기다리고 천국을 사모하는 사람입니다. 남들 보기에 정말 흠잡을 데가 없을 정도로 고귀한 인품을 지닌 사람입니다.
고귀한 인품을 지닌 사람, 한국교회에 많습니다. ‘나 부족합니다, 할렐루야 부족합니다.’(허스키 목소리 내리 깔고) 이런 사람, 성품이 고귀한 사람 굉장히 많습니다. 니고데모도 그와 같이 한 몫을 합니다. ‘어떻게 하면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 예수님 이야기가 이렇습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 했습니다.
이미 내가 알고 있다는 천국은 그것은 어디서 나온 천국이냐 하면, 나라는 존재, 내가 여기 있다는 전제하에 나를 포함시킨, 나를 기정사실로 여기고 내가 구원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기고 여기에서 번져 나와서 하늘까지 도착할 때 사람들은 자기만의 천국, 자기 천국이거든요. 그 천국은 가짭니다.
인간은 나라는 것이 성립돼 있으면요 인간 속에는 ‘나’가 있고 또 내가 그리워하는, 되고 싶은 나가 또 있어요. 누구든지 인간 속에는 ‘나’가 둘이 있어요. 두 개의 ‘본인’이 있어요. 둘 있는데 하나의 ‘나’는 뭐냐, 자꾸 ‘붙잡는 나’예요. 하나의 나는 뭐냐, ‘도망치는 나’예요.
‘날 잡아라~’ 해운대 바닷가에서 신혼부부가 ‘날 잡아봐라’ 하고 신부가 뛰어가면 남편은 따라가는, 우리의 ‘나’는 어떤 이상적인 것을 향하여 ‘되고 싶은 나’가 잡았다 하면 놓치고 잡았다 하면 저만큼 도망치게 되는, 끊임없이 도망치는 겁니다.
‘나’라는 것은 어떤 ‘나’를 노리느냐 하면 내가 그리워하고 내가 기대하는 그 나를 지금도 붙잡기 위해서 계속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나가 성경책을 보니까 뭐라 돼 있느냐 하면, 생명책 이야기 나오고 흰 옷 이야기 나오거든요. 그걸 보고 흰 옷 입고 생명책에 기록된 그 나를 이상적인 나로 성경책 보는 순간 하나의 대상으로 둡니다. 두고, 지금 부족한 나를 그 이상적인 나를 따라 붙으려고 애를 쓰는 거죠.
이러한 모든 노력에는 반드시 뭐가 들어가야 되느냐 하면, ‘행함’으로 그 간격을 메꾸게 되어 있어요. 행함으로. 주님이여, 내가 이렇게 행함을 동원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총동원한 행함, 전도하고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헌금하고 봉사하고, 착한 일 하고 구제하고 신장 떼주고 북한선교하고 성지순례하고 신학교가서 목사 되고 이 모든 행함들, 이 행함들 열심히 하는 이유가 성경에 나와 있는 ‘구원받는 나’라는 모델을 그 목표로 삼아서 그 간격을 메꾸기 위해서 따라붙기 위해서 열심히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최선의 노력을 다 해봤자 이쯤하면 되겠지 하고 도착해보면 나보다 더 멀리서 착한 나가 약을 올리네, ‘날 잡아봐~라’ 하고 도망치고 있어요. 결핍이에요. 그게 갈증 목마름, 그래서 잡다 잡다가 못 잡으면 헉헉거리면서 그 다음부터는 하나님한테 따지죠. 열심히 신앙생활 잘해보려고 노력했는데, 성경말씀대로 하니까 잘 안 됩니다. 주님이여, 나도 열심히 한 만큼 성과급으로 보너스 주시고 저는 오늘부로 교회 안 나올랍니다.
저도 애쓰고 담배도 안 피우고 술도 끊고 해봤지만, 해봤지만 안 되네요. 하고 주저앉습니다. 그때 들려오는 주의 음성은 간단합니다.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생명책 명단에 기록된 사람은 그러한 갈증이라든지 목마름, 그러한 애씀 때문에 헉헉거리면서 낙담하든지 지치든지 주저앉든지 이럴 필요가 없어요.
안 그런다는 게 아니고 그렇게 하는 그것이 바로 부질없는 짓을 내가 되풀이하고 있구나 라는 것을 확연하게 느끼는 순간이죠. 그걸. 지난주일 날 성경 어려운 구절 하나 대면서 무슨 뜻인지 숙제를 드린 적이 있지요? 성만찬 하면서 고린도전서 11장에 보면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고린도전서 11장에 나오잖아요.
그 말씀이 무슨 뜻이냐고 제가 물었잖아요. 그게 얼마나 어려운 말씀이냐 말이죠. 어떤 철학자도 이야기 못하는, 세상에 어떻게 자기 죄를 먹고 마십니까? 잡채 짜장면 젓가락 가지고 먹는데, 음식이라는 것은 집어서 먹으면 되는데 어느 인간이 자기 죄를 먹고 마시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자기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 불신자들이라 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며는,
지금 예수님의 세계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자기가 알고 있는 그런 세계에다 예수님마저 집어넣으려고 시도하는 것은 자기가 지니고 있는 죄와 함께 살고 있는 그곳에 주님까지 집어넣는 식이 된다 그 말이죠. 이것도 먹고 저것도 먹듯이.
예수님의 살이 뭐냐, 예수님의 피가 뭐냐 라는 것을 예수님 십자가 입장에서 생각해야 되는데 예수님 십자가 입장에서 생각한 게 아니고 내가 나를 구원시키는 하나의 행함으로서 ‘저 떡 먹을까?’ ‘저 잔 마실까?’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은 예수님이 무슨 생각인지 전혀 모르고 자기가 갖고 있는 자기 죄의 확산, 죄의 확대니까 이것은 곧 자기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추가적으로 죄를 먹고 마시는 식이 된다 이 말입니다.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며는, 현재 인간이 생각하고 있는 모든 것은 죄가 가르쳐 준 죄악된 생각이다 이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그 대목 이상으로 어려운 게 뭐냐 하며는 이 대목 이야기해드리겠습니다. 「십자가가 네 눈앞에 보이거늘 누가 너를 꾀더냐.」이런 대목입니다.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누가 너를 꾀더냐, 라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다시 말씀드리면, 인간은 두 개의 자아가 있다고 그랬죠?
현재의 나는 비겁한 것, 뭔가 모자란 게 자꾸만 생기는 것, 그런데 내 속에는 무슨 자아가 있느냐 하면, 아주 완벽한 나, 하나님도 보시고 반할만한, 하나님도 흠을 못 잡는, 그런 이상적인 내가 되고 싶은 하나님도 입을 벌리고 감탄할 수밖에 없는 완벽한 나, 그런 나가 있다 이 말이죠. 그런 나가 있으니까 이 ‘모자라는 나’가 그런 나를 따라잡기 위해서 부단히 애를 쓰며 헉헉거릴 때 그 눈앞에 뭐가 보여야 되냐면 십자가가 보여야 됩니다.
지금 네가 무엇 때문에 헉헉거리고 무엇에 결핍을 느끼면서 네가 안달하고 애를 쓰느냐 이 말입니다. 「지금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누가 너를 꾀더냐」이 말이죠. 생명책에 리스트가 이미 확정됐다는 말은 나를 구원에 집어넣기 위해서 애를 쓰는 어떤 해석도 맞지 않습니다. 그건 옳지 않는 거예요.
옳지 않고, 그 생명책이라는 것은 어떤 것이냐 하며는 인간의 모든 행함, 그러니까 생명책에 자기 이름을 등재시키기 위해서 생명책이라는 그 책에다가 자기 이름을 올리기 위해서 애를 쓰는 그 모든 행함을 생명책 자체가 그걸 거부하는 식으로 ‘저리 갓!’ 내쫓는 식으로 배척하는, 배제하는 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게 돼있어요. 생명책 자체가.
우리는 생명책에 ‘제 이름 넣어주세요’ 라고 할 자격도 안 되고, 그런 입장에 있지도 않고 그런 위치에 있지도 않아요. 생명책 안에 무슨 내막이 들었는지는 우리가 절망해야 되요. 그 절망이라 하는 것은, 생명책이라 하는 것은 뭐냐면 인간의 최후의 모습을 가장 간결하게 이야기해주는 게 뭐냐, 생명책에 이름이 빠진 사람은 지옥 불, 유황불에 들어간다 그 말이에요.
인간의 모든 애씀, 구원받기 위해서 총신 가서 공부 잘해서 장학금 받고 이런 모든 애씀, 이거 제 이야기 아닙니다. 저는 장학금 못 받았습니다.^^* 어떤 모든 노력 곁들이면서 기어이 나를 천국에 집어넣으려고 내가 나에게 빽쓰고 내가 나에게 응원해주고 ‘대~한~민~국’ 하면서 집어넣어주려고 애를 쓰는 그 모든 것, 그 모든 것을 절망으로 끝장내게 하는 능력이 바로 생명책에서 나온 능력입니다.
니고데모는 자기 자신도 모르는 체, 감히 천국에 대해서 의논한 겁니다. 자기 자신도 모르는 체,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거듭나야 보이리라. 」뭐가? 하늘나라가. 거듭나야 가리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다」 했습니다. 너는 아니다, 이 말이죠. 그런 식은 아니다 이 말이죠. 누가복음 24장에 보면 그 이야기 못지않게 희한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두 제자가 엠마오로 가는데 그 두 제자는 오늘날 우리와 똑같습니다.
‘나’라는 자아가 있고 또 이상적인 자아가 있어요. 두 자아를 갖고 있는 두 제자가 가고 있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가? 예수님의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예수님 그분 나는 메시아인 줄 알았더니만 그분을 사람들이 안 알아줘가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버렸어, 참 안됐다 그렇지?’ ‘그분이 장차 이스라엘을 회복할 분인데 너무 안됐다.’ ‘그거 안됐어도 이미 끝난 과거일인데 뭐 잊어버리자’ 라고 이야기하는데 ‘그런데 아저씨들 누구세요?’ 하고 같이 가는 거예요.
지금 이야기가 두 제자가 엠마오로 내려가면서 나누는 이야기 속에 지금 바로 같은 육을 입고 온 예수님께서 세 명이 동행하고 예수님은 계속 이야기를 듣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두 사람은 바로 옆에 예수님이 있어요. 악수도 했을 것이고 손도 만졌을 것이고 피부 세포를 만질 수도 있었을 겁니다. 옷자락 만지고 백날 봐도 소용없어요.
옆에 있는데, 성경에 보면 이렇게 돼있어요. 본인들이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옆에 있어도 몰랐어요. 부활하신 예수님이 옆에 있는 줄도 몰랐다 했습니다. 이게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예요. 오늘날 교회를 폭파시키는 이야깁니다. 오늘날 교회라는 것을 폭파시키는 이야기예요. 교회 다니면 뭐하느냐 이 말이죠. 옆에 예수님이 계신 걸 깨닫지 못하면 그만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식당에 가가지고 ‘주모 밥 한 그릇 말아주소’ 밥 먹으면서 떡을 떼 주니까 비로소 눈이 열리면서 ‘아니, 주님 아니십니까?’ ‘주님 살아나셨네요?’ 예수님께서 그들을 깨닫게 할 때 모세로부터 성경 전체를 예수님께서 없어졌다가 나타나는 분이어야 메시아라는 사실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숱한 이스라엘 사람들, 한국교회 교인들 보지 못하는 이유)
왜 사람들 눈앞에 없어져야 합니까? 사람들 눈앞에 없어져야 하는 메시아여야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사람은 주님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속에 있는 이상적인 자아상을 그리워하는 것에 홀려있습니다. 홀려있어요. 자기가 없어져야 될 것을 자기가 없어지지 않고 주님이 없어지는 것을 애 닳아 해요. 우리는 없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없어졌다가 나타나요. 없어졌다가 살아나는 그분에 의해서 죽은 우리도 다시 부활하여 나타날 겁니다.
이 기독교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독교를 융성하게 한 것은 다 뜻이 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며는, 깨닫지 못한 사람을 한 곳에 집어넣기 위해서. 깨닫지 못한 사람을 다 집어넣어요. 모든 종교적인 것, 신학적인 해석, 성경해석, 모든 것을 다 집어넣어놓고 주님께서는 거기는 인간들의 멋있음, 인간들의 순결한 인품, 고귀한 인격 이런 걸 다 집어넣어놓고 거기에는 우리 주님이 안 계시는,
안 계시고 바깥에 와 계시면서 그런 사람에게 오직 ‘십자가로만’ 다가서요. 네 눈앞에 십자가가 보이거늘 누가 너를 행함을 가지고 유혹 하더냐, 성경 몇 독해야 되고 십일조 해야 되고 주일성수 지켜야 되고 누가 너희들을 그따위 식으로 꼬이더냐, 이 말입니다. 이미 구원해주는,
구원을 완성하기 위해서 죽었다가 삼일 만에 부활했는데 죽었다가 부활한 그분과 함께 동행한 이것이 바로 하늘나라요 성령 안에 태어나 이것이 구원이고 천국인데 어떻게 천국에 들어가려고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해야 되고, 그런 것들은 뭡니까, 그런 것들은 내가 이렇게 분열된 자아가 있다는 것을 고백할 뿐이에요. 나에게는 쳐진 나와 뭔가 붙잡을 만한 괜찮은 나, 인격적인 훌륭한 나, 그겁니다.
‘흰 옷’의 특징은 뭐냐, 이게 유니폼이죠. 이것은 제복입니다. 이것은 자기가 집에서 만드는 게 아니에요. 마태복음22장에 보면 어떤 임금님이 혼인잔치를 만들어놓았는데 초청하니까 전부 다 자기의 이상적인 자아를 향하여 도망치고 말았어요. 이상적인 자아가 뭐냐 하며는, 밭을 샀거든요. 부자 됐다 이 말이죠.
지금의 가난한 나와 부자라는 나, 부자라는 나가 됐기 때문에 임금님의 혼인잔치에 관심이 없어요. 어떤 사람은 장가갔기 때문에 참석 안 했고, 장가갔다는 말은 총각신세를 면했다 이 말이죠. 장가가서 하나의 가정을 꾸민 나, 이제는 일단 내 목표가 달성되었으니깐 이제는 임금님의 혼인잔치를 거부해버렸어요. 어떤 사람은 소를 샀기 때문에, 소를 사서 많은 이익을 남기겠다는 이상과 거기에 비전과 그 꿈을 떨쳐버릴 수가 없어서 임금님의 혼인잔치에 오지를 않았습니다.
‘다 가!’ 다 가라 말이죠. 자아가 꿈꾸는 그 욕망이 달성되는 것에 일생의 기쁨과 보람을 느끼는 자는 다 가라, 다 가고 오직 임금님이 아들 보내서 아들 혼인잔치를 벌인 것이 관심사는 자는 오너라, 억지로 불렀죠. 관심있 는 사람은 다 불러왔는데 거기 가서도 탄락하는 사람 있어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면, 혼인잔치에서 그 주인께서 유니폼을 입혀주었어요.
예복을 입혔는데 예복을 안 입고 등장하는 사람이 있어요. 예복 안 입고. 아주 혼쭐을 내지요. ‘누구야! 예복 안 입은 사람 누구야! 끌어내가지고 지옥 불에 집어넣어라.’ 지금 이런 이야기는 일련의 예수님 이야기는 무슨 뜻이냐면 일체 인간들이 뽑아내고 인간들의 아이디어 종교라는 것, 인간들 행함을 주출해서 뭔가 뽑아낸 근사한 어떤 보험 비슷한 것, 유사진리, 유사기독교, 이런 것은 일체 인간에게서 나왔다는 이유 때문에 하늘나라에서 거절당한다, 단지 이유가 뭐냐 하면 인간에게서 나왔다는 거예요.
인간이 머리만 쓰면 뽑아낼 수 있다는 이유 때문에 안 받아줍니다. 인간이 천 명이 모이든 만 명이 모이든 절대로 인간의 지혜로서 뽑아낼 수 없는 게 뭐냐, 그게 바로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천국에서 닐니라~ 춤을 춘다는 이 사실. 그렇게 된 사람은 자기가 원해서 천국 간 사람이 아니고 이미 생명책에 리스트가 있기 때문에 생명책이 퍼뜨린 그 위력에 의해서 뽑혀 나온 사람만 구원을 받는다는 이 사실.
이 아이디어, 이 발상은 수천 명 수만 명 모여도 인간의 힘으로는 뽑히지를 않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갖고 있는 모든 행함을 거부한다는 것은 아예, 인간자체를 주님께서는 인정을 하지 않는다는 것, 인간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오직 죽었다가 부활하신 주님께서 자기 곁에 붙어서 동행해 주시는, 그런 사람만 새로운 피조물로 인정해주지 다른 사람은 사람으로 인정해주지를 않아요.
다시 말해서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절대로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니고데모처럼 천국에 관심 있다고 해서 그건 천국사람 아니에요. 성령으로 거듭나야 되는 겁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의 특징은 뭐냐, 바로 니고데모에게 얘기했듯이 오직 어린 양의 십자가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독생자로 말미암아 저를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다는 거죠.
이것은 바로 내 속에 있는 나,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나, 그 두 개의 나보다 더 중요한 분이 바로 나 바깥에 있는 예수님이란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대신 꿰차야 되요. 예수님이 나를 대신해야 됩니다. 이제는 내 인생은 없어지고 주님이 만들어가는 인생입니다. 주님께서는 왜 우리를 죽이십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죽이시는 이유는 우리를 살려내기 위해서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거예요.(아멘)
절대로 우리 힘으로 살 수 없다는 것, 흰 옷을 입었다는 것, 더럽히지 않는다는 것은 쉽게 말해서 어린 양의 피에다가 내 행함을 섞어 넣지를 않는 겁니다. 만약에 어린 양의 피에다가 내 행함을 섞어 넣어버리면 더러워져서 안돼요. 이거는 더럽혀진 겁니다. 백퍼센트 순수하게 생명책에 기록된 그 공로와 사랑과 선택하신 그 뜻에 의해서만 내가 천국에 들어간다. 이 이외에 어떤 것도 거기에 보태거나 섞거나 집어넣으면 그건 내 자아에서 나온 나의 욕망의 모습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사람은 죽습니다. 그런데 죽음으로 끝이 아니에요. 그래서 생명책이란 말이 나옵니다. 이 땅에서 인간의 행함으로 보면 죽음이 끝이지 싶지만 생명책 입장에서 봐서는 진짜 생명책, 그 가치를 보여주기 위해서 주님께서 우리를 죽이십니다. 그래서 둘 째 사망에 들어가지 않는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생명이다. 아직도 우리에게는 지옥 불에 들어가지 않는, 영원한 천국에 가는 두 번째 생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의 어린 양의 피, 유월절 어린 양의 피가 세운 약속인 것을 믿는 여러분의 몫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께서 열심히 일을 하시는데 지금도 우리와 동행하시면서 지금도 옆구리 툭툭 치시면서 십자가 얘기 하시는데 우리는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자기 자신에게만 몰두하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 자신이 나를 붙들기 위해서 내가 또 나를 붙들기 위해서 애 쓸 것이 아니라 지금 주님께서 나를 붙들어서 거저주시는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지 생명이 얼마나 큰지를 우리의 자랑꺼리로 삼으라고 인도하신 줄 믿습니다. 이제 더 이상 우리 행함 때문에 좌절하지 말고 코앞에 있는 십자가 바라보면서 다 이루었다고 환호성을 올릴 수 있는 최후의 승리자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