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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Re..051010 요한복음(안산강의)강의요한복음

Re..051010 요한복음(안산강의)

이름 : 오용익(IP:)

요한복음 안산강의(이근호목사, 2005년 10월 10일 안산나라장로교회)

제가 여기 오는 것은 힘들고 안힘들고 간에, 그런것과 관계없이 그런분들을 생각하면 제가 힘들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요한복음 17장을 해보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요한복음 17장은 겟세마네 기도입니다. 이 겟세마네 기도에서 염두에 둘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를 믿었지요? 믿었는데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를 믿었을 때, 어떤 태도를 가지고 인생을 살아 갔는지 그것을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를 믿고, 지금 우리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믿잖아요. 그러면 같은 신앙 같으면 그 태도가 같아야 할까요? 달라야 할까요? 같아야 되지요.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이땅에서 아버지를 섬겼는지 요한복음 17장을 보기 전에 2장을 먼저 봅시다. 요한복음 2장 24절과 25절에 “24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25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심으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음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예수님은 ‘외롭다’는 것이 없어요. 그것이 ‘예수님의 아버지 믿기’입니다.

예수님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믿는데 그 믿는 특징이 어떤특징이냐 하면, 요한복음 2장 24절, 25절에 있는대로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다 아시기 때문에 사람에게 뭔가 기대한다든지, 기댄다든지, 사람에게 뭔가 바라는 것이 있다든지, 사람들의 안목이나 평가를 전혀 개의치 않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믿었습니다. 따지고 보니까 굉장히 자유롭지요. 무지 자유롭잖아요.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의지하지 않는 이유가, 그 사람들을 알기 때문에 구태여 사람들을 의지할 필요 없이 그냥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믿고 살았습니다. 그것이 다른 사람보기에는 외롭지요. 그런데 예수님 본인은 하나도 안외롭지요. 왜냐하면 요한복음 여러곳에 나오기에 다 찾을수는 없습니다만 “아버지와 나는 함께 있고 하나이기에 지금 내가 아버지의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바쁘다는 것입니다. ‘외롭다’의 반대말이 무엇이겠어요? (할일 없다) ‘할일없다’가 아니고 ‘외롭다’의 반대말은 ‘안외롭다’인데 사람이 안바쁘면 외로워지게 되어 있잖아요. 사람이 바쁘면 안외롭습니다. 예수님은 홀로 있을때도 외롭지 않고, 참 희한하게도 군중속에 있을때에도, 그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를 다 아시기 때문에 그들이 어떤 이야기를 해도 그들이 “인기좋습니다” “훌륭합니다” “왕으로 모시겠습니다”라고 해도 그 사람들에게 넘어간다든지 “와” 하면서 인기끌어주니까 그들에게 흠뻑 빠진다든지 그런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교회다니고, 예수 믿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심지어 이 가정에, 이교회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계신다고 믿으면서도, 막상 사람들이 비난하고, 안좋은 소리를 하고, 늘 같이 동조를 하던 사람들이 떠난다든지, 섭섭한 소리를 한다면 왠지 외롭고 떠나고 싶고 살맛이 안나고 그렇지요? 특히 젊은 분들은 그런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젊은 분들은 “욱샤 욱샤” 하면서 모여서 시간을 함께 보내야 재미 있잖아요. 그러다가 홀로 있으면 외롭고 죽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놓고 제가 아까 운을 던진,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믿는 것 하고 우리가 아버지를 믿는 것 하고 태도가 같아야 되는데 같습니까? 문제가 있지요? 그 문제를 제가 지금 지적하려고 합니다. 무슨 문제냐 하면 예수님은 ‘공포심’이 없었습니다. 이런 사태가 일어나면 나는 ‘조졌다’ 이런 사태가 일어난다면 나는 ‘죽었다’. 어찌할꼬! - 경상도 말로 으짜꼬 - “이런 사태만은 일어나서는 안돼. 만일 그런 사태가 일어난다면 나는 굴복하고 싶어”. 이런 것이 일체 없었습니다. 왜 없었느냐 하면 제가 그림으로 한번 그려보겠습니다. 칠판이 세로로 세워져가지고 몰골이 희한하게 되었는데, 다들 피곤하시니 제가 천천히 하겠습니다. 그림을 그려 가면서 천천히, 천천히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계시잖아요. 아들 예수님이 계신단 말이죠. 이렇게 계실때에 아버지와 아들 사이가 너무 친밀하면 이 둘 사이에 다른 인간들이 끼어 드는 것이 귀찮지요. 그것은 아까 이야기했고요. 더 놀라운 사실은 아버지께서 아들과 함께 있다면 다른 사람들이 여기서 공박하고 비난하고 욕해도 안무섭지요. 왜냐하면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다 된다는 것을 아들되신 예수님이 믿으니까 안무섭다는 말이죠. 이것을 가지고 아버지와 아들관계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게 되면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감히 불러요. 집에 아버지가 계시면 “아버님! 계십니까? 진지 드실 시간입니다”하고 노크하고 아버지가 살아 계신다는 것을 인정하고 확인하는 그 이상으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친밀하게 교제를 했기 때문에, 이 세상은 다 아버지의 뜻대로 되고 아들은 아버지의 뜻대로 되었다면 그것으로 오케이 하고 끝날문제라는 겁니다. 남들에게 “날 알아줘. 내 팬이 지금 몇 명인데. 네가 얼마나 가졌는지 모르지만 난 내가 가진 것으로 널 이길수 있어. 난 너보다 더 많이 가졌어. 내가 아는 사람 청와대에도 몇 명있고---", 이런식으로 구태여 그럴 필요가 없다는 말이죠.

그런데 왜 인간들은 성령받았다고 하면서 ‘아버지여’ 기도하면서도 ‘아버지여’ 아버지라는 말을 그렇게 남발 하면서도 막상 일 터지면 공포심과 두려움이 밀려와가지고 남들앞에 그럴싸한 신앙적 모양새를 갖추는데 급급하더라는 말이죠. 이게 무슨 난리입니까? 이것이 어떻게 예수님의 그 아버지 섬김과 일치되느냐 말입니까? 문제는 누구에게 있습니까? 바로 우리 인간들에게 문제가 있지요. 안무서워야 하는데 뭐가 날라갈까봐서 무섭고, 가진 것 깨질까봐서 무섭고, 자존심 뭉개질까봐서 무섭고, 또 젊은 분들은 앞으로 장래가 희미해질까봐서 무섭고, 결혼할 때 되면 결혼 못할까봐서 무섭고, 모든 것이 하루 눈뜨면 무섭기 시작해서 해질때까지 무섭습니다. 하루 해 지면 또 꿈꾸는 거기서조차 무서워요. (잠자기도 겁나지요) 예! 내일되면 또 무서워요. 내일 이런 일이 벌어지면 안되는데. 내일 시험인데 그거 떨어지면 안되는데. 내일 숫자 제대로 써야 하는데 엉터리로 써내서 떨어지면 어떻게 하지? 이래 놓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부르니. 그것도 그냥 부릅니까? 성령에 의해서 불렀다는 겁니다. 성령에 의해서. 이것이 보통문제가 아니라는 말이죠.

로마서 8장 15절을 보겠습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스톱! 누가 다른 분이 다시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스톱! 무슨 영이 종이다? “무서워 하는”. 예수님은 “얘들아 평안하냐.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다”고 평안을 주시려고 왔는데,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의 특징은 매사를 무서워 한다는 것입니다. 나를 지켜줄수 있는 아는 사람이 없어서 무서워하는 것입니다. 송목사님의 과거의 이야기를 죽 들어 보면, 만약에 그 과거가 나의 과거 였다면 하고 생각해 보는 겁니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으면서 비난했을때 본인이 얼마나 얼마나 무서워했겠습니까? 사모님이 아니었으면 큰일날뻔 했습니다. 사모님이 죽 안끓여줬으면(?) 큰일날뻔 했어요. 그러니까 이시간에 우리 신앙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정립해 봅시다. 신앙이란게 “이것이 신앙의 공식이니까 다 외워라 시험친다”는 이것이 신앙이 아니거든요. 실제로 무서움이 안나타나면 신앙이고 무서우면 좀 달리 생각해 봐야 합니다. 내가 성령도 받지도 않았으면서 성령 안받으면 신자가 아니라고 하니까,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자기를 연출하고 연기를 해대면서 자기를 스스로 위선자로 만들어 가고 있지 않은지를. 그것도 세월이 가면 갈수록. 신앙생활 하면 할수록.

그러니까 이렇게 보게 되면 우리가 성경공부한다는 자체가 어떤 기회가 되냐 하면 예수님을 바로 아는 기회가 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목각처럼 만들어 놓고 예수님이 뭐라고 하는지 그것은 들어 보지도 않고, “믿습니다” “믿습니다”하면서 그 목각을 광내도록 닦고 우상숭배하듯이 예수를 섬기는데 그런다고 예수님이 흐뭇해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섬긴다다는 것은 예수님과 교제하는 것이지 예수님을 하나의 대상으로 만들어 놓고 그 앞에서 향불피워놓고 빈다고 그것이 예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예수님은 보스죠 보스. 소위 노는 동네의 애들 보스역할이죠. “형님” “형님” 이렇게 하면서. 깡패세계에서 보스하고 졸개들하고 놉니까? 안놀잖아요. 지시와 명령뿐입니다.

그런데 아들과 아버지 사이에는 늘 교제하고 있습니다. 두분 사이에서는 서로 웃고, 서로 주고 받고 하는 대화와 교제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것 때문에 무서워하는 적은 없었다는 말입니다. 마지막 기도하는 것도 이 내몸을 아버지의 뜻이라면 바치겠다는 헌신입니다. 마치 “아버지 식사시간입니다”하고 아버지와 교제하고 묻는 것처럼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해본적이 있습니까? “아버님 잘 계십니까? 어떻게 식사는 잘 하시고요? 잠자리는 따뜻한가요?”이렇게 친 아버지에게 묻듯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 대해서 다정스럽게 주고 받고 주고 받고 하는 그런 기도를 해본적이 있습니까? 기도를 제대로 하면 세상의 모든 불행은 한순간에 날라가 버립니다. 기도만 제대로 해도요. 기도만 제대로 해도 모든 걱정, 근심, 우환, 한꺼번에 다 날라가 버립니다. 그런데 기도를 잘못하게 되면, 기도를 해놓고도 더 스트레를 받게 되고 그렇게 됩니다. 오늘날 교인들은 기도하나 제대로 할줄 모릅니다. 기도하라고 하면 주기도문 하나 외우고 끝내버립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세상에 대해서 많이 기대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이런 입장에서 요한복음 17장을 보겠습니다. 오늘 진도상황도 그렇고 많이 하지 않을 것이니 피곤하시더라도 조금만 참아 주세요.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서 세상이 나에게 뭐라고 하든지 상관없이 귀담아 듣지 아니하고,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서 “저는 이런일을 하겠습니다”라고 기도하는 것이 요한복음 17장 기도입니다. 17장을 다시 요약합니다. 세상이 뭐라고 반응하든지 그것은 전혀 개의치 않고 그런 것은 상관하지 않고,
그냥 아들이 “제가 아버지에게서 받은 사명과 소명을 꾸준히 이루겠습니다” 라는 다짐의 시간이 바로 요한복음 17장의 내용입니다. 이것은 둘만의 시간이기 때문에 제삼자가 여기에 끼어들 필요가 없지요. 그렇다면 이 예언 기도를 지금 우리가 해야 된다는 겁니다. 우리가 기도하면서 “하나님 아버지 내일은 제가 무슨 일을 해야 합니까” “아하 그런 일을 해야 됩니까”라고 할때, 아내나 자식이나 가족들이 “밥먹으로 오소”할 때 “아냐 아냐, 가만있어봐 지금 밥먹을 때가 아니야. 잠깐 있어봐. 내가 이거 마치고”라고 할수 있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명을 받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하루의 해가 뜨면 내가 할 일만 남아 있지, 상대방이 이일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하고, 어떻게 반응한다는 그것은 아버지의 소관이고 하나님께서 할 문제이지 내 소관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수능을 앞두고 있는 학생이 수학공부를 50페이지 이부분까지 한다고 했을 때, 가을단풍이 참 좋은데 아침에 그 학생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하고 기도하기를 “오늘은 수학공부 삼각함수와 미적분을 공부하겠습니다”라고 다짐을 했다면 바같에 아무리 아름다운 단풍이 있다고 해도, 친구가 놀자고 불러내도 자기는 아침에 기도한대로 할바만 하면 되는 거예요. 그렇지 않습니까? (아멘) 그러면 되는데 “오 하나님 아버지여 바같에 있는 단풍이 저를 시험들게 하고 있군요”라고 하는 것은 그날 아침에 한 기도가 건성으로 했든지 대충했다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겟세마네 기도의 대목에서 왜 자꾸 기도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사람이 평소에 아버지와 기도하고 교제를 잘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가 평소에 기도이야기를 잘 안하는데. 잘 안들어 봤지요? 기도 이야기 거의 안해요. 안하는데. 아버지와 아들처럼 이렇게 진실된 기도와 교제를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고, 남들이 만들어가는 남의 인생을 살아가다 보니까 그들의 박자를 맞추고 그들의 비위를 맞추어야 하고 그들의 시선에 따라서 몸둘바를 모르는 것입니다. 자기 인생이 없어요. 자기인생이. 그러니까 자꾸만 흔들리는 겁니다. 그게 무슨 성령에 의한 아버지입니까? 여기 아까 제가 스톱해서 읽다가 말았습니다만 그 대목을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로마서 8장 15절-17절에 “15 너희는 무서워 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성령이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했기 때문에, 자녀이면 하나님의 후사요 - “하나님의 후사”라는 말은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말입니다 -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무엇도 함께 받는다?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것이니라. 고난을 받는다는것에 대해서 무서워하거나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텐데 “목사님! 저는 예수 믿는 것도 힘든데 고난까지 받는다면 진짜 감당못해요”라고 물러설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 청년들 계시는데 세상 살기 힘들지요? 힘들지요? 힘들때 그 고난이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받는 고난, 다시 말해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됨을 증명하는 고난, 하나님이 주신 고난으로 받아 들여야 됩니다. 제가 말을 지금 이렇게 했지만 “예! 제가 지식으로 동의합니다” 이렇게 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고, 그것은 본인이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진실된 기도를 해야 합니다. 해가지고 오늘 아침 9시부터 근무에 들어가는데 오늘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아버지께서 자기 아들됨을 확인하기 위해서 내게 고난을 주신 것이기에 “이것이 로마서 8장 17절의 말씀대로여서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도 괜찮습니다” 하는 그런 마음으로 다짐하고 하루 일과를 시작하면, 그 고난이 아버지와 내가 지금 함께 있다는 하나의 계기로 기쁘게 받아들이게 되면서 두려움과 공포심이 없게 되는 겁니다.

만약에 이런 기도가 없이 하루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예상밖의 일이 터지면 덜컥 겁이 납니다. “야 오후 두시에 이런 일이 터졌으니 오후 네시에 또 무슨 일이 터지겠나. 안돼 안돼 그런일이 터지게 되면 나는 이제 하나님이고 뭐고 다 버리겠어” 그런식으로 스스로 무서워 하면서 벌벌 떨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평소에 진실된 각오와 다짐 소명감이 없기 때문에 그런일이 일어납니다. 제가 어제 주일 아침에 이런 설교를 했습니다. 여러분이 진정 예수를 믿는다면 심지어 이런 경험조차 능가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이렇게 열심히 섬겼지만 예수님이 나의 원대로 안해주고 나에게 고난을 주면서 힘들게 하니까 내가 두 번 다시 예수를 믿으면 내가 개다” 이런 경험조차 해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경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까지도 싱긋이 웃으면서 “진작에 그러지. 왜 이제와서 그런 소리를 하느냐. 나는 처음부터 네가 신앙을 위선적으로 할때 다 알아봤다. 나한테는 그런 위선이 통하지 않아. 너는 그런 고백을 진작에 했어야 해. 바로 너같은 인간을 내가 구원한다”는 겁니다.

어떤 돌발적인 사태가 일어날 때 이렇게 하나님과 교제가 되어 있으면 그 돌발적인 사태를 웃으면서 반길수 있는데, “하나님 이래서는 안됩니다”하면서 두려워하고 공포심을 느끼더라는 것입니다. 갑자기 애인이 떠난다든지 이런 경우입니다. “이제 우리 헤어지자”고 나올 경우 말입니다. 자 그런 입장에서 제가 요한복음 17장을 빠른 시간에 훑겠습니다. 한 일분만에.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그 소명과 사명으로 기도했는데 그 내용이란 이겁니다. 제가 건방지게 예수님 되었다고 하고 쉽게 풀어서 해보겠습니다.

아들 예수님 : 아버지!
아버지 하나님 : 응
아들 예수님 : 제가요. 아버지가 저에게 주신 사람에게만 복음 전하겠습니다.

이것이 첫째입니다.

그러니까 전도하지 못했다고 책잡힐 일이 없지요? 아버지께서 제게 넘겨주신 사람에게만 전하겠다는 것입니다.

아들 예수님 : 아버지!
아버지 하나님 : 응
아들 예수님 : 제가요 그 사람을 제가 부활해서 천국갈 때 데려가지는 않겠습니다.

이것이 두 번째 내용입니다.

아들 예수님 : 아버지!
아버지 하나님 : 응
아들 예수님 : 제가 그들을 데려가지 않고 이 세상에 그냥 놓아두면서 그들도 제가 이 세상에서 당했던 모든 고난을 다 당하면서도 기어이 하나님을 안버리고 예수님을 안버리고 살아가도록 제가 뒤에서 돕겠습니다.

이것이 세 번째 내용입니다. 이것이 요한복음 17장의 예수님의 기도내용입니다.

다시 정리해봅시다.

1. 아버지께서 제게 넘겨준 사람에게만 전도하겠습니다.
2. 그 사람들이 내가 천국에 들어갈 때 데려가지 않겠습니다.
3. 끝까지 그들이 고생을 하면서도 어떤 일이 있더라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제가 만들어 내겠습니다.

여기서 어려운 것이 나옵니다. 우리가 부족하잖아요. 저와 여러분이 다 부족한데 그 부족한 자가 위의 세 번째 것, 어떤 어려움이 와도 이길수 있는 이것을 해낼수 있습니까? 대번에 넘어집니다. 우리는 친구없이는 못삽니다. 친구없이는 못살고 애인없이는 못살고 세상이 없이는 살수 없습니다. 가족없이도 못살고, 직장없이도 못살고, 하여튼 하나님이 이것을 건들면 나는 하나님 버릴것이라는 것들이 여러개가 됩니다. 심지어 자식없이도 못살지요. 없을때는 자식없이도 사는데 있으면 자식없이는 못살아요. 참 희한해요. 그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이것 하나 기억하세요. 존재는 주머니거든요. 존재는 주머니인데 그 주머니에 돌맹이가 채워집니다. 그것이 자식일수도 있고, 돈일수도 있고, 직장일수도 있고, 직분일수도 있고, 건강일수도 있어요. 자기존재란 그 안에 있는 소유물을 통해서 ‘내가 이렇다’는 식으로 자기존재가 확정됩니다.

만약에 이 사람이 전라도 출신이라고 해봅시다. 저도 전라도 광주에서 태어났는데, 말은 전라도 말씨가 아니지만 전라도에서 태어났는데, 전라도라는 것을 소유했다면 어떤 사람이 만약에 전라도를 욕한다면 나보고 욕을 하지 않았는데도 내가 욕을 막 해요. 화가 나죠. 왜냐하면 나라는 주머니안에 전라도가 들어 있죠. 이것은 뭐냐. 내 존재는 내가 가진 소유로서 확인되기 때문에 만약에 자식이 있었는데 없어져 보세요. 죽고 싶어요. 주머니 속에 그 나머지가 뭐가 있든지 간에 죽고 싶어요. 이것이 죄짓고 난 뒤의 모든 인간 군상들의 모습입니다. 이 주머니 속에 예수님이 채워주는 것으로 채운것이 아니라 내가 그동안 노동해서 얻은 것들을 가득 채워놓고 “내것이 많으냐 네것이 많으냐” 이런식으로 살아갑니다. 여기 학력, 인물, 집안 이런 것 다 포함됩니다. 쌍커플을 했는가 안했는가? 또 했는데 풀려 보세요. 화를 냅니다. 소유물들로 가득 채워져 있는데 혹시 누가 그 소유물들을 건드리면 내 존재가 화를 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심령이 가난한자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 소유물 다 없다고 한다면 이것은 누구입니까? 소유물이 없다고 한다면 인간은 존재를 못느끼는데, 성도는 뭐냐 하면 이 소유물이 없다 하더라도 그 자체가 예수님의 은혜, 하나님의 은혜라고 인정하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주신자도 하나님이고 가져자신 자도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욥기 1:21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은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찌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하고) 그냥 여기에 빈 것이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면 무엇인가 자식이고 돈이고 채워진다면 이것은 누구것입니까? 내꺼예요 아니면 하나님꺼예요? 하나님것이지요. 이것이 하나님것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때로는 빼갑니다. 빼가도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남아야 돼요. 바로 이런 상태가 예수님의 기도속에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악을 완전히 이겨준다고 하니까 성도가 매일 착한일 하고 구제하고 그런 일을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내 존재가 소유를 극복할수 있는 사람이냐, 그리고 그것이 은혜로 된거냐’, 그것을 보시는데 내 존재가 그 소유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여기에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어렵다는 것이 이겁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그냥 오는 것이 아니고 바로 십자가 이들의 죄를 대신 지시는 십자가 사건이 벌어져야 십자가의 은혜로 인하여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압니다.

이제 그것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우리 집에 화장실이 있어요. 그 화장실에 보면 물내려가는 하수구가 있거든요. 그 하수구에 망을 씌워놓았습니다. 망을 씌워놓았는데도 불구하고 밑에서 벌레가 올라와요. 진드기같은 것도 올라오고, 귀뚜라미도 올라옵니다. 제가 화장실에 가보면 벌레가 마구 기어다니고 어디서 올라왔나 보면 하수구에서 올라온겁니다. 우리도 세상 사람과 똑같잖아요. 나라는 존재에 무엇이 채워집니까? 내가 가진 재산, 돈, 식구등등 이런 것이 채워질때 비로서 “나” 잖아요. 이런 것이 빠져버리면 “나는 죽고 싶다. 나는 왜 사냐? 나는 살 이유도 없다”이러면서 자살도 하고 술도 먹고 이러죠. 남이 가진 소유 없다는 이유로. 이렇게 하는데 내 소유에 이렇게 벌레가, 그림으로 그릴까요? 이렇게 벌레가 기어다니잖아요. 어? 벌레 있네. 벌레! 이 벌레는 지하세계, 곧 나를 받치고 있는 땅 밑에서 올라왔죠? 우리가 세상사람하고 똑같이 소유 많은 것을 기뻐하다가 갑자기 지하에서 무엇이 올라오냐 하면 십자가은혜가 올라옵니다.

십자가은혜가 올라오게 되면 갑자기 무엇이 나오느냐 하면 “우리는 죄인이었는데 십자가 피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게 된다”는 십자가 공식이 나오죠. 그러면 나는 이런 소유가 있으면 죄인입니까, 아닙니까? 죄인이 아니라 잘나가는 인간이죠. 그런데 갑자기 밑에서 십자가 은혜가 올라오면 나는 잘나가는 인간이 아니라 졸지에 강도가 되어 버리고, 창기와 세리가 되어 버리면서 그 모든 것은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것을 알지요. 요게 하루에 2.5초죠. 하루에. 주일날 되면 좀 오래가는가? 주일은 좀 길게 가서 한 6초쯤 되는가? 2.5초 진짜 얼마 안된다. 가끔은 이런 생각이 들어갑니까? 나는 이유없이 죄인이며 내가 살아가는 것은 십자가의 피의 은혜로 지금도 용서받고 산다는 생각이 하루 24시간중에 거의 나지 않는데, 뭔가 받친 것 같아서 띵할때라든지, 안그러면 자기 자신에게 절망할 때, 나같은 인간이 살아야 하나 할때, 이 소유에서 뭔가 빠져나갈 때, 자식이 말을 안듣는다든지, 오늘 오후 세시에 누굴 만나기로 했는데 못만났다든지 했을때 갑자기 피곤이 몰려 오면서 죽고 싶죠. 피곤이 몰려 오면서 세상이 누래지고, 갑자기 안먹던 술도 먹고 싶고. 이런 것들이 젊은 사람들에게 있을거예요. 못배운 담배도 피우고 싶고, 세상을 허무하게 보고.

그런데 자기에게 실망할 때 그 틈새를 노려서 “실망할 필요 없다. 넌 원래 실망해야돼. 원래 네 꼬라지가 그거였어. 그런데 지금은 왜 그러냐. 너무나 세상에 대해서 기대를 했기에 그렇다”는 겁니다. 나 좀 알아달라는 거죠. 아까 예수님은 아버지만 알아도 남에게 의탁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아버지의 이름만 있어도 충분했다고 했죠. 요한복음 17장에 그렇게 되어 있죠.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살지 못하죠. 우리는 세상 사람들 따라 하는 것이 익숙해 져서 남들처럼 살아갑니다. 남들처럼 똑같이 살아가는데 그런 우리를 이 철딱서니 없는 우리를 하수구를 통해서 그 십자가의 대속의 공로를 심어 줌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앞에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자각하게 하고, 그런 죄인조차 십자가의 피 한테는 모든 것이 용납이 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사건들이 밑에서 하수구에서 올라오는 것 같이 올라오더라는 것입니다. 하수구에서 올라오는 사랑 이해하십니까?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사랑

그러면 우리를 밑바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노동력입니까? 이것이 마르크스 주의 인데 내 힘으로 살았습니까? 아버지 어머니도 제가 골랐습니까? 그냥 던지진 존재지요. 내 머리카락 빠지는 것이 내뜻입니까? 빠져라 빠져라 그래서 빠집니까? 세상에 어느 사람 만나는 것도 다 주님이 알아서 만나게 되어 있어요. 영생의 길로 가라고. 만나게 하는 사람마다 뭔가 하나 배우게 하고 깨닫게 하고, 우리 밑바닥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밑에 깔려 있다는 것, 아버지께서 택한 백성은 따로 있다는 이 사실을 일깨워 주기 위한 그러한 배치, 그러한 장치들에 요구되는 사람들을 우연찮게 만나게 해서 나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사람인 것을 지금도 주님께서 배후에서 계속해서 실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내가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10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 이것이 몇초 간다고요? 2.5초. 2.5초 지나면 또 짜증네요. 또 짜증네고 또 실망하고 또 하나님한테 화내고, “오늘 하루 엉망이었다. 왜 내뜻대로 안되나” 하고 따지다가 성도 같으면 또 주님의 기도한 것이 있어가지고 “내가 미쳤지 내가 미쳤지”.

또 그러다가 내 소유가 오늘 오후 두시에는 이것이 채워져야 하고, 오늘 오후 세시에는 이것이 채워져야 하고 ABCD 같으면 오후 6시에는 C가 있어야 하고, 또 모든 것이 내기준, 내맘대로 다 되어야 하고, 세상 중심은 나중심으로 돌아가야 하고, 내가 응원하는 프로축구팀이 이겨야 하고, 내가 원하는 프로야구팀이 이겨야 하고, 내가 원하는 사람이 서울시장에 당선되어야 하고, 그것이 내 존재를 만들어 갑니다.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이것이 안되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겟세마네 기도에서 “주여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제가 저 사람이 지옥백성 같으면 이렇게 하수구 뚫고 올라오지 않습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이 지금 완전합니까? 절대로 완전하지 않습니다. 이게 무슨 완전한 것입니까? 세상사람하고 똑같은 거죠. 완전하지 않은데 완전하지 않은 인간인데, 그 예수님의 피땀나는 기도덕분에 우리가, 그 밑바닥의, 내가 아니고 우리 부모도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 밑바닥의 지하세계를 구성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는 겁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도 이런 관점에서 성경을 좀 보시고 평상시에 아침에 기도좀 하세요. 아침에 왜 기도를 하라고 하냐면 아침에 별로 할일이 없잖아요. 이렇게 하세요. 고상하게 천하통일, 남북통일 그런 것 하지 말고, “오늘 제가 무슨 일을 할까요? 아버지의 뜻대로 하겠는데 어떤 우발적이고 예상치 못한 일이 있더라도, 나에게 그것을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다가 아니라 오히려 아들이다 하는 뜻에서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내 밑바닥은 뭐다? 내 밑바닥은 예수님의 피로 흥건히 고여있다. 나는 예수님의 피로 용서받았다 하는 사실을, 내가 지금 천국으로 몰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수 있는 어떤 우발적인 사태나 사고, 내가 예상치도 못한 일이기를 원합니다” 라고 기도한다면 장담하건대 하루 일과를 하면서 남들이 뭐라고 씹고, 남들이 뭐라고 욕하고, 남들이 뭐라고 하더라도, 여러분은 여러분대로 여기까지 된 일을 그대로 해 나가면, 다른 사람들도 덩달아 인정합니다. “쟤는 어떻게 다른 사람보다 자기일을 꾸준히 그렇게 잘해”. “쟤는 어떻게 남들 눈치도 안봐”. “요새 애가 안같애”. “요새 젊은 사람같지 않게 어떻게 그렇게 자기 맡은 일을 남들 눈치도 안보고 그렇게 잘해”. “쟤속에는 성령님이 들었나?” 할 정도로 그것이 남에게는 복음을 증거하게 되는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남 탓하지 말고, 자기운명 팔자 탓하지 말고, 남이 나를 알아주기를 아예 기대하지 말고, 주께 받은 소명 즐겁고 기쁘게 하다가 때로는 힘들고 어렵더라도 주의 자녀 아닌 것이 아니고 그럴수록 아버지! 하고 살아계신 아버지를 마음껏 부르는 참되게 이땅에 살아 있는, 빛같이 살아 있는 진짜 하나님의 아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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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