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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Re..계 3: 1- 3 (사데 교회)우리교회요한계시록

Re..계 3: 1- 3 (사데 교회)

이름 : 이근호(IP:)

사데 교회

2006년 6월 11일 설교 본문: 요한계시록 3:1-3

(계 3;1)『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계 3:2)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계 3:3)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 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주님이 도적같이 오신다는 말씀은, 인간들이 기대하고 그려왔던 그런 분으로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낯선 하나님으로 졸지에 임하신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평소에 인간들이 얼마나 잘못된 방식으로 하나님을 상상했는가가 백일하에 폭로되는 시점이기도 합니다. 인간으로부터 ‘초청 받지 않으신’ 하나님, 하지만 그 하나님은 그냥 가만히 계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 세계에 불현듯이 침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사야 13장에서부터 하나님은 바벨론 나라에 대해서 그만 있지 않고 공격하겠다고 하십니다. 15장에서는 모압 나라에 대해서 그만 두고 보고 있지만 않겠다고 하십니다. 17장에 보면, 다메섹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경고하십니다. 18장에 보면, 구스 땅에 대해서 공격을 감행하신다고 하시며, 19장에서는 애굽에 대해서 공격 경고를 보내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인간 세계에 대해서 끊임없이 공격을 해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저 점잖은 척으로 계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이러한 공격이 오늘 본문에 보면 자기 교회에 대해서까지 실시가 됩니다. 자기 교회라고 그냥 봐주시고 대충 넘어가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사데 교회를 향하여 말씀하기를, ‘너희들이 자칭 살아있는 자라고 하지만 실상은 죽은 자’라는 겁니다.

만약이 이러한 주님의 논리에 동의 못한다고 한다면 이것은 나중에 주님을 도적 같은 분으로 반길 수밖에 없는 그런 무관한 관계에 놓인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성경을 보고 있으면서도 자꾸만 엉뚱한 구세주를 구세주라고 믿어왔다는 말이 됩니다. 성경에서는 말씀하기를, 성도를 가지고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뜻은, 현 우리가 새로운 요소를 가미하고 첨가하면 새로운 사람으로 변모한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가 도저히 사전에 예상치도 못한 새로움이 찾아들어어서 그 새로운 세계로 우리는 “첨벙”하고 물 튕기듯이 그 새로운 세계 안에 잠기게 하는 상태를 두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인간들은 아무리 새로움을 시도해도 그것은 여전히 자신들이 마음대로 정해놓은 옛 것과 새 것의 잘못된 기준으로 인하여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요한복음 13장과 14장에 걸쳐서 그러한 예가 나오는데, 예수님과 베드로와 함께 동행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씀들을 주고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그만 제자들 곁을 떠난다는 겁니다. 즉 제자들이 올 수 없는 곳으로 가신다고 합니다.

그럴 때 베드로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직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주님이 가신 곳이라면 제가 죽어서라도 가겠습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는 베드로보고 ‘장하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이렇게 대꾸하십니다. “지금 내가 가는 곳은 네가 설사 죽는다 할지라도 올 수 없는 곳이단다”라고 말입니다.

즉 아무리 베드로라는 인간이 목숨을 버려서도 주님과 합세하고 싶어도 예수님은 그 어떤 인간도 죽어서도 합류할 수 없는 세계에 가버리십니다. 이것은 곧 인간들이라는 존재는 살아있어도 죽은 존재들이요, 죽어서도 죽어있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자기 백성들만 합류할 수 있는 처소를 따로 만드셔서 그 처소가 일단 만마련해두시는데 설사 그 처소가 만들어졌다고 하더라도 주님에게 오라고 광고하셔서 성도가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처소에 들어오게 하시는 일까지 주님께서만 실행가능한 일이십니다. 그 정도로 인간들은 항상 참 예수님과 다른 예수님을 상상하고 있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즉 무엇이 죽음이고 무엇이 생명인지를 인간들이 모르고 있기 때문에 인간들은 생명이 있다고 소리를 듣고도 갈 수 없는 자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것은 무엇이 죽음이고 무엇이 생명인지를 바로 아는 것을 뜻합니다. 죽음이란 바로, 예수님께서 처해있는 상황 속에 있지 않는 상태를 의미하며, 생명이란 바로 예수님께서 현재 처해있는 상황 속에 놓여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참으로 이것은 새로운 관점의 생명이요 죽음입니다. 생명과 죽음이 무엇이냐 하는 것은 예수님 자신의 몸과 일생을 통해서만 유일하게 밝혀지게 됩니다. 예수님처럼 되어지지 않으면 무조건적으로 그것은 죽음입니다. 생명이란, 즉 베드로가 죽어서도 갈 수 없었던 그 생명이란 현 예수님께서 처해있는 상황만을 두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새로운 원칙과 법칙이 주어집니다. 인간들이 기존 생각했던 모든 것을 ‘옛 것’이며 ‘죽음의 증거물들’ 뿐이라고 고백하는 기준이 나타나는 곳입니다. 주와 함께 죽게 되면 설마 주님과 영원히 함께 하겠다고 여긴 그 베드로의 생각이 새로운 세계에서 통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세계에서나 통하는 옛 사고방식에 불과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보고 “살았다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자로다”라는 평가를 받아도 마땅한 이유는, 평소에 우리들의 모든 행위가, ‘사는 것을 당연한 권리’로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죄와 의로움이란 일단 내가 살아있어야 한다는 것을 당연히 권리로 제공받고 난 이후에나 따질 일이라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살아있기에 죄도 짓는 것이지 살아있지 않고 죽어있다면 죄라는 것도 성립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이 우리들 생각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렇게 보시지 않고, 우리 인간은 이미 죽은 채로 이 땅에 태어난 것으로 보십니다. 아무리 오래 살아도 현 예수님께서 처해 있는 그 상황은 아니라는 점이 분명하기에 죽어있는 것이 분명하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죄라는 것은 자신이 현 지니고 있는 ‘살 권리’에 부담을 두는 요인으로 보고 있습니다. 즉 착하면 더 오래살고 풍요롭게 살고, 만약 죄를 지으면 힘들게 살고 일찍 죽는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보고 있지 않습니다. 아무리 오해살고 잘 살아도 그것은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즉 새로운 피조물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 인간들이 생각하는 죄라는 것은, 인생을 그릇에 담긴 물이라고 비유한다면, 그 물 한 곳이 오염되거나 더럽혀지는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오염된 물로 인해 나머지 그릇에 담긴 물들이 고통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잘못된 생각입니다.

죄라는 것은 십자가의 새로움을 모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인생 세월 가운데 일부분 때에 지은 죄를 위해 대신 죽으신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의 죄를 통째로 대신해주시고자 죽으신 십자가입니다. 즉 이 용서와 무한한 사랑 안에서 성도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겁니다.

우리의 죄가 포항 시내라면 주님의 은혜는 그 포항시를 다 덮고도 넘치는 쓰나미(해일)에 해당됩니다. 이 새로운 원리와 은혜가 적용되는 곳이 생명의 세계입니다. 이 안에서 옛 것의 모든 원리는 죄가 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새로운 피조물이기에 이제는 옛 생각으로 인하여 마음고생 하지 말고 새로운 은혜의 맛으로 뒤덮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1-05-07 11:53

016강-계3:1-3(사데 교회)-rev060611

설교:이근호 목사님

하나님 말씀은 요한계시록3장1-3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401페이지입니다. 제가 읽습니다.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아멘.

하나님이 자기 교회를 자기가 심판한다. 상당히 아이러니하죠? 그런데 처음부터 그랬어요. 자기가 만든 인간들 중에 지옥 갈 사람을 보낸다. 자신이 만든 인간이에요. 하나님 자신이 만든 인간이라고요. 하나님 자신이 만든 인간을 두고 지옥을 보내시는 글너 하나님이십니다.

무작정 자비롭게 봐주고 넘어가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삭제하려고, 하나님의 심판하시는 행위를 이걸 없애려고 무척이나 신학자들이 노력을 했어요. 혹시 심판이 하나님자체를 인정하는데 심판한다는 이것이 하나님께 가까이 갈 때 장애가 될까 싶어서 교회 목사들과 신학자들은 심판을 얼버무려 안들은 걸로 하세요, 대충 잊어버리세요. 하는 식으로 심판 없는 하나님을 창작해서 그걸 세일하려고. 아주 염가로 상품화시켜서 세일하려고 조작된 조작된 하나님을 유포시켜왔습니다.

그런데 시편9편1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여호와께서 자기를 알게 하사 심판을 행하셨으며 』이래 돼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알게 하사 심판을 행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알리는데 뭘 하신다고요? 심판을 행하심으로서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알린다는 겁니다.

심판을 앞장세워서 자기를 알린다는 겁니다. 마치 6.25전쟁 때 탱크를 앞장세워서 남침을 한다는 겁니다. 장갑차를 앞장세워서 이 인간세계에 침노한다는 겁니다. 들이미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도 나오지요? 도적같이 임하리라. 왜 도둑같이 임하느냐 하면, 손님이 아니니까. 인간들의 관념으로 형성해낸 그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 보기에 예상 밖의 인물이 들이닥치는 것처럼 마지막 때에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은 그런 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얼마나 인간들이 예상 못하고 초청하지도 못한 입장이라면 그것을 표현하는데 뭐라고 표현하냐면 ‘도적같이’ 임하리라. 평소에 너희들 나 몰랐지? 그런 뜻이에요.

평소에 너희들이 내가 이런 하나님인 거 기대 못했지? 그런 뜻이다 말이죠. 어디 평소에 교회 다니면서 설교 들으면서 4차원적으로 구성해낸, 창작해낸 그런 하나님과 완전히 다르지? 어디 도둑 같지? ‘저런 분이라면 내가 애초부터 안 믿었지,’ 할 정도로 기대 밖의 그런 분입니다.

어떤 분은 어떤 존재, 낯선 분, 낯선 하나님 본 헤퍼라는 사람은 아주 이건 낯선 하나님이다. 예상치도 못한 하나님이다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성경에 꽉 담겨있는데, 흐르고 넘치고 있는데 사람들은 성경을 볼 때 뭘 보고 있는지 성경을 볼 때마다 자기가 기대하지 않았던 낯선 하나님이란 생각을 가져야 할 텐데 성경을 보는데도 낯선 하나이라는 생각을 안 가지고 보니까 나중에 진짜 하나님과 우리 인간이 만날 때는 화들짝 놀라면서 ‘이런 분인 줄 미처 몰랐습니다.’ 뒤늦게 후회하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사야12장부터 쭉 보면요, 아주 지겨울 정도로 나오는 대목이 뭐냐 하면 이겁니다. 제가 되풀이하면 「하나님이 바벨론에 대해서 경고한다.」「 하나님께서 애굽에 대해서 경고한다.」 「하나님께서 모압에 대해서 경고한다.」 「하나님께서 두로에 대해서 경고한다.」「 하나님께서 다메섹에 대해서 경고한다.」저와 여러분 똑 같은 성경을 보게 되는 건데 이사에서 느끼는 뉘앙스가 어떤 뉘앙스인가 하며는,

하나님은 인간 세계에 대해서 어떤 감정, 억한 감정 원한인가? 왜 이렇게 이방신을 믿음에 대해서 가만두지 않겠다, 가만두지 않겠어, 왜 이렇게 자꾸 시비 걸고 달려드느냐, 어르신 같으면 좀 점잖게 굴지 ‘모르는 건 봐줄게’ 이렇게 넘어가줄 수도 있는 문젠데 어디 잡을 걸 잡아야지 이방 민족, 요새로 말하면 ‘절에 가는 사람은 그냥 두지 않겠다.’ 이런 식으로요.

내가 교회 안 나가는 사람 봐주나 봐라, 이사야 15장부터 계속 나와요. 그런데 그정도가 아닙니다. 그 정도가 아니고 오늘 본문에 보면 그러한 하나님의 객기, 객기로 표현해서는 안되는 겁니다마는 하나님이 낯설게 행동하니까. 하나님의 그 객기, 낯선 행동이 이제는 남의 민족이 아니라 자기 교회 내부까지 그냥 두지 않고 집적거리십니다.

『너희들이 살았다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로다.』실상은 너희들이 죽은 자다. 교회 안 다닌 사람이 그 하나님을 낯설게 여겨지는 것은 우리가 이해가 됩니다. ‘나는 그런 신 안 믿어, 나는 그런 신 안 믿는단말야,’ 이렇게 거부하면 그만인데 소위 예수를 믿고, 나는 교인이다 라고 자청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확실히 믿는다고 여기는 그분으로부터 이러한 회개 요청이 들어왔을 때 우리는 또다시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인가 라고 되새겨보는 그런 기회가 되는 겁니다.

작년 겨울에 전라도 함평에 가서 수련회 할 때 첫 강의 입을 떼면서 저는 이야기했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갖고 있다는 십자가, 언약, 믿음, 예수, 하나님, 능력, 삼위일체 그걸 어느 날 몽땅 빼앗겼다고 칩시다. 그럴 때 여러분에게 남은 것은 뭡니까? 라고 물었어요. 수십 년 동안 교회 다니면서 알고 있었던 모든 성경지식이 연탄가스에 취해가지고 다 잊어버렸다고 칩시다.

연탄가스에 정신이 혼미해가지고 순식간에 다 날아갔다고 했을 때에 그때 당신은 도대체 믿는 게 뭡니까? 그래 제가 정리를 곧장 내렸지요. 그럴 때 결국 믿는 것은 내가 살아있다는 걸 믿는다. 남는 게 그거다 말이죠. 남는 것은 결국, 모든 것을 의심하고 의심해도 내가 존재한다는 것, 내가 여기 있다는 것, 생업을 하고 있는 이 주체가 바로 나라는 것, 이것마저 부정하고 이것마저 의심할 수가 있겠느냐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결국은 자기 자신을 믿고 있는 그 상태에서 위에다가 엄청나게 겹쳐서 무슨 신학과 성경지식을 폭설 내리듯이 붓는다 할지라도 나중에 여름철이 돼서 그 폭설이 다 녹아서 흔적 없이 증발해버리면 남는 것은 ‘내 주먹만 믿는다’는 이거 하나밖에 남는 게 뭐가 있느냐 이 말입니다.

제가 운을 그렇게 뗀 이유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성경에서 말씀하시기를 새로운 피조물이라 하니까 내가 옛날에 술 먹고 담배피우고 하다가 새사람 되어서 술 담배 끊고 교회 잘 다니고 예배 잘 드리는 이런 새로움이 가미되어서 새사람 되었다 이래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시면 여러분들 하나님을 모른 사람이에요.

새로운 피조물이라 하는 것은 어느 정도 새로우냐 하면 과거에 내가 예수를 몰랐을 때 기대했던 그 새로움이 전혀 스며들지 않은 새로움이에요. 새로움이 날 장악해야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나의 새로움은 이건데, 나를 새롭게 하소서 내가 새롭게 다가서는 새로움은 그것은 고물입니다. 그거 새로움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한 새로운 피조물은 어느 정도 새로운 피조물이냐 하면, 이젠 과거에 대해서 지긋지긋하게 느껴져야 그게 새로움이에요. ‘새로움 없나? 새로움 없나?’가 아니라 새로움이 나를 새로움 속으로 풍덩 집어넣어버리는 거예요. 성경은 자기 존재를 눅눅하게 그대로 가지고 거기다 뭔가 첨가해서, 불량식품 첨가하듯이 뭔가 첨가해서 얽히고설킨 것을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신 적이 없어요.

아까 불렀던 찬송가에 보면 찬송가 471장 4절에 보면 이렇습니다.「 십자가 그늘에서 나 길이 살겠네」 3절에 보면 나 사모하는 광채로 주 얼굴 보겠네」3절의 가사 세 번째 보면「이 세상 나를 버려도 나 관계없도다.」이건 정말 새로움의 극치입니다. 피로 섞인 형제우애 뭐, 동서 친척 그 사람들이 나를 버린다 해도 나 관계없도다.

심지어 목사 장로 집사가 나를 버린다 할지라도 나 관계없도다. 「내 한량없는 영광은 십자가뿐이라.」십자가 영광이에요. 나사렛 청년이 죽은 것은 자기에게 속한 유일한 영광은 십자가뿐이라는 겁니다. 이게 돈 사람이에요. 이거 완전히 미친 사람입니다. 세상 나를 버려도 관계없다니요. 자신해서 외톨이 되려고 환장을 했지 그럴 리가 있습니까.

새로운 사람이 아니면 이 가사 이해 못합니다. 전혀 동조 못합니다. 겁납니다. 혹시 나도 이렇게 달라질까봐 겁이 날 정도예요. 오늘 본문에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우리보고 ‘네가 왜 간음했느냐, 왜 살인했느냐, 왜 부모공경 않느냐’ 이걸 뭔가 따지는 것이 아니고 우리 존재 자체에 대해서 평가내립니다. ‘너는 죽은 자다’ 이래 보는 겁니다.

우리가 성경을 이래 보면, 성경은요 모든 직업과 연령을 초월해서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보편적인 내용을 성경에서 받아들여야 성경을 제대로 해석한 겁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해당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해당 안 되고, 이런 진리가 아닌 것은 성경해석 잘못하신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적하시는 것은 직업과 상관없이, 나이가 백 살이 되든 뭐든 상관없이

모든 인간에게 공히 적용되는 것이 뭐냐면 ‘너는 새로운 피조물이야’ ‘너는 새로운 피조물이 아니야’ 그런 규정들이에요.

이미, 새로운 피조물 되고 안 되고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해주신 것이 우리가 알고 있던 것보다 월등하게 가치 있고 소중하면 심지어 내 생명보다 더 크고 좋다는 것이 온 몸에 감싸인다는 것이 주어져야 되요. 그래야 이것이 교회 나오는 보람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보람이 여기 있어요. 교회 왔다리 갔다리 해서는 안되요. 이거는 내 목숨보다 더 귀한 것을 얻었다는 그게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이 성경을 읽어보게 되면 어떤 새로운 피조물이 아닌 사람에게는 이해 안 되는 대목이 많은데 제가 대목 예를 들 테니까 여러분들 어떤 뜻인지를 생각해 보세요.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별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라.」 고전12:29절에 나오는 성찬식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제가 여기서 여러분에게 속으로 질문을 던지고 싶은 것은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 무슨 뜻이냐는 거예요. 분명히 성경에 나와 있는데 주님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이 떡을 이 잔을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라. 이게 얼마나 어려운 말입니까. 이것이 대학 나왔다해서 해석되는 말씀이 아니잖아요.

사람들이 먹고 마신다는 행위는 어떤 잡채를 하든지 짜장면을 먹든지 뭘 먹을 때 하는 행위지 죄를 먹고 마신다는 내용은 성경에만 담겨있는 내용이지 세상의 어느 경제 어느 소설책에 어느 철학책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까! 사르트르가 이런 소리 한줄 압니까? 헤겔이나 칸트나 어떤 인간도 이런 소리 못해요. 그들은 인간 대 인간의 공통점을 찾아가기 때문에 남들이 납득이 안 되는 말은 함부로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게 아니에요. 새로운 피조물을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자기 죄를 먹고 마신다는 이런 말도 안 되는 납득이 될 수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이게 이해됩니까? 자기 죄를 먹고 마신다는 게. 이거요? 짜증날 일이에요. 제가 여러분 대신 하나님께 짜증내 드릴까요? 하나님, 알아듣는 이야기 해달라고. 그러면 하나님 알아듣는 이야기 합니다. 「너는 살았다고 간주하나 내가 보기에는 죽었도다.」죽은 자다. 오늘 본문 이거는 이해됩니까?

제가 긴 이야기할 필요 없이 진짜 이야기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사람들은 성경을 보기 전에 살만한 권리가 있다고 여기는 그것이 죄다 이 말입니다. 자기가 살만한 권리가 있다는 거예요. 살기 위해서 교회에 모인 것을 이해해달라는 겁니다. 나는 살아야 된다는 권리가 있기 때문에. 이 권리는 하나님마저 침해할 권리가 없는 하나님이라고 규정한다는 말입니다.

우선 내가 살아야 하나님 당신이 있지 내가 죽는 마당에 당신이 무슨 소용이 있냐, 이래 나온다 말이죠. 그런 자를 향하여 ‘너는 죽은 자다’ 하니까 ‘저는 살았습니다.’ 한다 말이죠. 울산에 있는 모 교회 게시판에 보니까 목사님이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교인들이 답하는 게시판에 그런 대목이 있어요. 질문이 뭐냐 하면, ‘예배하는 것도 죄냐? 아니면 어려운 행위냐’ 이렇게 나와 있어요.

예배하는 것도 죄입니까. 여러분? 그 목사님께서 예배하는 것도 죄냐? 그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사람들은 일단 나는 살아있는데 살아있기 때문에 실수하고 죄를 짓는다. 죄라는 것을 내가 살아있다는 ‘그릇’ 가운데서 뭔가 시커먼 물을 튕긴다든지 인생이란 물을 오염시킨다든지 그걸 죄라고 보는 거예요. 살아있다는 그건 기본으로 깔고 거기에 죄가 있다고 보는 겁니다. 이거는 누가 그렇게 생각해요. 본인들이 그렇게 생각해요. 본인들이.

본인만 생각하는 게 아니고 가까운 친구들 친척이나 가까운 교회에서 만나서 이야기해보면 죄가 뭔데? 집사님 죄가 뭡니까? 목사님 죄가 뭡니까? 장로님 죄가 뭡니까? 하면 ‘하다보면 실수 한 것, 하다보면 성경에 어긋난 것’ 이걸 죄라고 다 이야기하니까 그런데 깨끗한 그릇이 있는데 더러운 것이 왔고 더러운 행동을 해서 이게 죄구나. 전부 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성경에서는 그게 죄가 아니고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죄는 십자가 은혜를 모르는 것을 죄라고 합니다. 십자가 은혜를 모르는 걸. 사람들은 어떤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데 스트레스가 뭐냐 하면 이런 거예요. 나는 교회 10년 다녔는데 아직도 나쁜 죄를 짓느냐, 앞으로 내가 죄를 줄여 나가야될 건데 왜 자꾸 죄를 짓느냐, 자기가 잘못 생각한 것을 죄라고 스트레스 받고 이거는 자기함정에 빠지는 것이 되는 겁니다.

주님은 우리를 통째로 다루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통째로 다루시기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통째로 십자가에 죽은 겁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그 통째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거예요. 열아홉 살 스무 살에 지은 죄, 그것만 위해서 십자가 진 게 아니고 42세 43세 때 지은 죄 그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통째로 우리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거예요.

그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가 태어나서부터 무슨 죄를 지었느냐, 나쁜 짓을 했냐 문제가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난 겁니다. 죄인으로. 죄인으로 태어난 절대적인 증거가 뭐냐면 ‘나는 가끔 죄를 짓는다.’라는 잘못된 죄관을 갖고 있는 겁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의 사랑이 어느 정도냐 하면, 죄 지으면 용서해주고, 죄지으면 사랑해주고, 또 죄지으면 사랑해줘요.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많다. 했습니다.(그랬더니 친구 왈, 그러면 죄를 많이 지어라‘ 면서 비웃던 생각이 떠오릅니다.) 만약에 죄가 ‘포항시’라면 은혜는 그 포항 시내를 덮는 쓰나미, 해일이에요. 포항시내 영역보다 더 넓습니다. 죄지으면 용서해주고 죄지으면 용서해주고 나중에는 뭐가 있냐면, 사랑과 용서만 남는 거예요. 자기 죄지은 것은 생각도 안 나고.

죄지은 거 생각도 안 나고 용서만 남는 거예요.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것은 자기 죄지은 것은 생각 안 나고 주님의 용서하심과 사랑만 가득 찰 때 그것을 주님께서 만족하시는 새로운 피조물이라 그런 겁니다. 그것이 새로운 피조물이에요. 그런데 사람은 살아가면서 어디에서 스트레스를 받느냐 하면, 잘 착하게 살다가 삐걱, 다리 삐듯이 한 번씩 나쁜 죄를 지었는데 그때 그 죄만 아니었으면 나의 상품가치가 올라갈 건데, 주님 보시기에 더 축복을 해주셨을 건데 어제 지은 죄 때문에 지금 복을 못 받아서 내가 살아가고 있다. 자기가 잘못된 죄관 속에 빠져 들어간 거예요.

그러니까 그것은 뭐냐, 실상은 네가 새로운 피조물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거는. 그것은 어찌어찌해서 새로운 피조물로 달라져볼까 자기 딴에 땀 빼면서 노력하는 것뿐이지 주님께서 의도했던 새로운 피조물은 그런 고백이 나오면 안돼요. 그거는 자기 자신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는 증거입니다.

지난 월요일 날 서울 가서 그런 강의를 했었습니다. 여러분에게 할 기회가 없고 꼭 서울 가서 할 기회가 생기네요. 교인들이 교회 나오는 이유는 자기가 고생한 것보다도 하나님께서 더 심하게 고생을 시키기 때문에, 자기가 지은 죄보다도 하나님께서 더 심한 고생을 시키기 때문에 뭔가 하늘나라에 행정착오가 있다는 거죠.

그래서 내가 교회에 나가서 열심히 전도하고 봉사하면 ‘내가 너를 고생시킬 존재가 아닌데 내가 너를 얕잡아 봐가지고 이런 고생 시켰구나, 내가 사무원한테 이야기해가지고 주일날 지시 내릴게 미안하데이, 미안하데이’ 그런 행정착오를 띁어 고치기 위해서 교회 나오는 거예요. 그 심보가. 그거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자 하는 시도? 노력에 불과한 겁니다.

‘너는 실재는 죽은 자로다’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할 때, 그것도 자기 교인들보고 그런 소리 할 때, 우리는 어떤 기준에 의해서 내가 죽은 자냐, 그 기준을 찾아야 되지 잘해볼게요. 열심히 해볼게요. 잘 할라하는데 잘 안 되네, 되고 안 되고가 뭐가 있습니까. 주님께서 시도하라고 한 게 아니에요. 그런 뜻으로 한 게 아니다 말이죠.

오늘 서론이 좀 길었습니다만, 오늘 본문에서, 요한계시록 3장에서 ‘실상은 너는 죽은 자라’ 할 때에 이제부터 모든 것 잊어버리고 그렇다면 주님이여, 죽음이 뭐며 생명이 뭡니까? 이런 질문이 툭 튀어나와야 되요. 도대체 죽는다는 게 뭐며, 우리 보기에 말고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님 보시기에 뭘 가지고 죽음이라하고 무엇을 가지고 생명이라고 합니까? 무엇이 될 때 ‘너는 산 자로다’ 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습니까, 라는 그런 질문이 나와야 되요.

주님께서 ‘너는 죽은 자야’ ‘살았으나 내가 보기에 너는 죽은 자야’ 라는 판단을 내는 그 기준은 뭐냐 하면, 순전히 예수님 자기 기준입니다. 자신이 처한 환경과 자기가 있는 상태와 우리 상태를 비교하면서 이렇게 판정을 내리는 겁니다. 더 쉽게 말해서 예수님은 나처럼 이런 환경에 있으면 그거는 산 자요, 예수님처럼 이런 환경에 있지 아니하면 그거는 죽은 자다. 그런 뜻입니다.

제 말을 오해하지 말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처럼 완전히 행해야 산 자요 예수님처럼 완전하지 못하고 조금이라도 죄지으면 죽은 자다, 제가 그런 뜻으로 이야기한 게 아닙니다. 그런 뜻으로 이해한 것으로 아는 사람 한 세 명 정도 보이는데 그런 뜻이 아니고 지금 예수님이 누리고 있는, 주님이 만약에 금붕어라면 둘러싸고 있는 어항과 금붕어.

물속에 있는 금붕어와 어항처럼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는 그런 상태의 예수님처럼 그런 세계에 놓이지 아니하면 그것은 무조건 죽은 거고 예수님처럼 그런 상태에 놓여있으면 그거는 산 것이다, 살아있다 이 말입니다. 어떻게 행동하라 이 말이 아니에요. 행동하란 말이 아니다 말이죠.

이걸 제가 좀 더 쉽게 말씀드려서 요한복음 13장 14장에 보면 이런 말씀 나와요. 베드로와 예수님이 동행하다가 예수님이 이런 이야기를 불쑥 꺼냈어요. ‘애들아 나 간다.’ ‘어디가십니까?’ 예수님 하시는 말씀이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곳으로 간다.’ 그것이 재밌습니다. 예수님이 ‘나 간다.’ 하니까 베드로가 ‘어디로 가십니까?’ 베드로가 하는 말이 ‘아 죽으시는구나’ 베드로 자기는 살아있으니까. 목숨이 붙어있으니까. ‘아, 예수님이 죽으시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그 정도 세계에서는 자기도 갈 수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예수님 제가 제 목숨을 버려서라도 주님 가신 곳에 동행하겠습니다.’ 저도 가겠습니다.

우리 같으면 ‘장하구나, 진짜 네가 수제자다. 그래 같이 가자.’ 이런 답변을 기대했는데 예수님 하시는 말씀이 생뚱 맞는 말씀을 해요. 예수님 하신 말씀이 ‘네가 죽더라로 내가 죽는 곳에 못 온다.’는 겁니다. 왜냐 하면 베드로는 지금 살았으나 죽어서나 죽은 자예요 그거는.

베드로가 죽더라도 예수님이 죽어서가는 곳에 합류할 수 없어요. 이걸 베드로가 모른다는 것은 지금 우리도 모른 것과 똑같은 거예요. 어떤 인간이 그걸 압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축복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우리가 죽어서 좋은 나라 가는 데가 아니라 죽어서 현재 예수님이 계신 곳에 가는 거예요. 예수님이 계신 곳에.

그런데 그것은 어떤 인간도 못 가는 곳이고 주님께서 처소를 예비하면, 요한복음14장입니다. 너 지금 오면 안 돼, 왜 못오냐, 처소가 마련되지 않았어요. 하늘나라 처소가 예비 되면 그 처소는 뭐냐 하면 생명이 있는 자만 따로 집어넣는 좌석표가 있는 그런 생명이에요.

예수님께서 그걸 마련해놓으면 그때 가서 너희가 들어오는 것이 아니에요. 그 처소가 있다 해도 못 와요. 그 처소를 마련해놓고 그다음에 주님께서 가셔가지고 그들을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이걸 가지고 생명이라 하는 겁니다. 요한복음의 생명. 주님께서 찾아와서 우리를 데리고 가는데 어제는 나쁜 일 했고 오늘은 좋은 일 했고 오후 세 시에 좋은 일했고 오후 네 시에 착한일 했어. 왜 자기 스스로 스트레스를 만들어냅니까. 스트레스를.

일반교회에서 뭘 가르칩니까. 성화론을 가르치는데 얼마나 무서운 죽음의 사상이냐 하면, 성화론이라 하는 것은 선이 있죠. 선이 쫙 그어져가지고 1998년도 생활과 2006년도의 내 생활과 얼마나 더 향상 되었는가 증거 하자는 거예요. 1998년과 2006년도를 전부 다 알 필요 없습니다. 어제 같은 경우에 어제 토요일 10시부터 시작해서 오후 4시까지 선을 한번 그어보세요.

오전 10시의 나라는 인간과 오후4시의 나라는 인간이 얼마나 발전했습니까? 얼마나 성숙했습니까? 만약에 성숙 안 하면 성화론자들은 곤란한 거예요. 시간마다 해야 되니까. 그런데 살다보면 성질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잖아요. 아침 열 시에 기분이 좋아가지고 ‘주여, 지금 데려가 주시면 낙원 갑니다. 주여! 할렐루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시어머니에게서 전화 와가지고 한바탕 하고 나니까 갑자기 11시에 악한 며느리 악한 여자가 되고 말았어요.

그런데 문제는 악한 며느리가 돼가지고 그때 만약에 예수님 재림하시면 그 아다리가 나는 열시되면 참 좋아 열한시 되면 끝나는데 그래서 회개했다 칩시다. 회개하고 다시 ‘십자가 그늘 밑에 나 편히 거하네 이 세상 날 버려도 관계없도다.’ 이렇게 기분 좋아졌는데 오후2시에 구청에서 뭐 날아와서 보니까 과속했다고 오만 원 내라, 그래서 이게 문젠데 세상에 어느 부부가 아침 열시에 부부됐다가 열두시에 부부 아니고 세상에 그런 부부가 어디 있느냐 말이죠.

예수님은 우리의 신랑이고 우리는 예수님의 신부입니다. 그걸 성경에서는 뭐라 하냐면 ‘예수그리스도 안 En cristo' 그리스도라는 그릇 속에 우리가 포함 돼 있는 거예요. 지금 주님께서 우리를 건지려하는 것은 우리보고 오후 두 시에 착하고 오후 네 시에 착하라 이거 하라고 건지는 게 아니고 오후 두 시가 되던 네 시가 되던 ’너희는 생명 안에 들어있다; 이 말입니다. 생명 안에.

생명 안에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는 것을 네가 왜 잊어버리냐는 때문에 나무라지, 왜 잊고 있느냐 때문에 나무라지 새삼스럽게 완벽하라. 어느 인간이 완벽합니까! 어느 인간이 마음 속으로 간음 안 품는 인간이 누가 있어요? 어느 인간이 죄지을 때마다 자기 오른 팔을 톱으로 자른 사람 누가 있습니까. 팔을 자르는 것은 그래도 괜찮지, 오른쪽 눈이 범죄하면 눈알을 빼버리라, 세상 어느 인간이 범죄 하면 자기 오른쪽 눈을 빼버립니까.

산상설교도 못 지키면서 바울의 면제품을 지킨다고요.?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그건 성경이고 이건 성경 아닙니까? 성경을 가지고 두더니 게임하듯이 성경의 어느 대목을 때려도요 딱 때리면서 ‘너 새로운 피조물 맞아?’ 이게 나와요. 너는 주님과 함께 있는 거야. 너는 주님과 함께 있는 거지. 이게 나와야 되요.

십자가 그늘 밑에 편히 쉬기를 원하네. 그게 나오는 겁니다. 뭘 지키고 못 지키고가 아니라. 너는 죽은 자다 할 때 그 기준이 뭐냐 하면 너는 예수님이 처해있는 그런 환경 그런 세계가 너희에게 지금 침투돼 있는 거예요. 지금 우리가 있는 세계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준 것이 잔소리하라고 준 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왈, ‘너는 왜 나쁜 일 하느냐 고쳐라’ 이런 잔소리하시려고 주시는 분이 아니고 예수님은 우리의 신랑이고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의 몽땅 죄를 한번에, 단 한 번에 십자가에서 해결사, 해결해서 다 치웠습니다. 해결 다 본 거예요. 너는 그 용서와 사랑의 혜택을 입는 주님은 사랑하는 자, 사랑을 쏘는 자, 우리는 바보같이 사랑을 받고 용서를 받고 누리며 사는 자, 이런 관계를 가지고 생명이라고 합니다. 생명.

그럼 죽음이 뭐냐, 자기 힘으로 살려고 하는 것이 죽음이에요. 자기 힘으로. 자기 행함으로 살려고. 현대인들의 특징이 뭐냐 얼마나 오만한지 믿는 놈이 없어요. 믿는 놈이. 자기 주먹을 믿어요. 자기 머리만 믿고. 의지하고 믿는 놈이 없어요. 너무 잘났어 아무것도 안 믿어요.

믿는 것이 없으니까 자기를 알아주면 그 집단에 합세하려하고 안 알아주면 도망치려하고 뭔가 믿는 게 없어요. 세상 나를 끊어도 나는 관계없다. 그렇게 듬직하게 십자가만 있으면 무슨 걱정을 더 하리요. 나는 십자가 밑에서 이미 산 자인데. 십자가는 어항 속의 물이고 나는 그 안에 담긴 고기인데, 금붕어인데, 이런 관계 속에 우리가 있는데 뭐를 주님을 피하고 도망칠 그런 처지에 있지도 않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끝부분에 나오는 구름처럼 달라붙는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이렇게, 이렇게 하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오늘 본문에 여기에 3절에 보면 「내가 도둑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임할련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여기 보면 내가 도둑같이 임한다는 말은 아까도 제가 말씀드렸지만 예수님께서 도적같이 임하기 전에 미리 예수님의 십자가 그늘을 생각하면서 예수님을 생각한 사람은 결코 예수님은 도적이 아니에요.

예수님이 도적으로 오시면 ‘누구세요?’ 이 밤중에 새벽 두시 반에 남의 집에 담을 타넘고 누구십니까? 이럴 때는 도적인데 평소에 늘 자기가 믿는, 믿는 사람이 있어가지고 주님을 믿기 때문에 십자가를 생각하는 사람한테는 그 십자가를 가지고 주님인지 아닌지를 판명되기 때문에 늘 십자가를 생각하는 그분한테는 ‘신랑이다’ 기름 준비하는 신부처럼 ‘드디어 신랑이다, 드디어 오신단다.’ 라고 반길 수가 있는 겁니다.

제가 괜히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도마에게 나타났을 때, 예수님이 여기 현장에 계신 것을 안 믿겠다 할 때 갑자기 주님께서 나타나 하는 말이 내 창 자국을 보고 만져봐라 못 자국을 만져봐라, 창 자국 못 자국을 만져봐라 이 말은 우리가 그렇게 고민하고 있던 인생문제가 이 창자국과 못 자국이 무슨 문제가 있는지 여러분도 생각해보세요. 이게 관련 있어요.

우리가 인생에 있어 그렇게 고민한 것은 고민 할 것도 없는 쓸데없는 고민을 했다 이 말이죠. 이미 용서받은 상태인데 왜 용서받은 십자가 그늘 밑에서 네가 걱정할 것을 왜 네가 만들어내느냐 이 말입니다. 네가 못나도 용서하고 잘난 것도 없지만 잘나도 용서하고 죄지어도 용서하고 죄 안지은 적이 없지만 죄 안지어도 사랑하고.

주님께서는 늘 품에 안아줬는데 그것을 네가 인정하느냐, 그 문제인 것을 네가 알아 모시느냐, ‘알아모십니다.’ 그러면 그건 도둑관계가 아니고 신랑과 신부관계가 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것은 주님께서 이미 처소를 마련하고 우리가 다가서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오신 것은 뭐냐 하면 ‘네가 이미 새로운 피조물이다.’ 옛것은 기억하지도 마라 다 사라진 것이다.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십자가를 향하여 달려간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달려간다. 왜? 십자가가 나의 모든 죽은 나를 생명으로 전환시키는 능력이 그 십자가에서 분출되기 때문에. 그 능력이 나오는 십자가를 향하여 내가 달려간다. 이렇게 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자기 교회를 할 때 정말 너희들이 참된 교회라는 죽음에 의해서 십자가의 복음에 의해서 살아있는 사람, 그 사랑이 바로 유일한 생명이니까 이 품안에서 쓸데없는 근심걱정을 만들어내지 않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이 구태여 십자가를 졌어야 될 이유를 신부인 우리가 몰라서야 되겠습니까. 우리는 돈도 필요하고 여러 가지 명예도 필요하고 위신도 필요하지만 우리가 필요한 것을 주께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가지고 나타나실 때, 그 의미가 무엇인지 저희가 이제 알았습니다. 우리가 알았습니다. 우리가 죽은 자였는데 주님께서 품어줌으로 생명을 얻게 된 것을 이제 누구에게도 자랑할 수 있는 저희들 삼아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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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745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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