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060605 대구강의 [지옥의 하나님37-38p]
Re..060605 대구강의 [지옥의 하나님37-38p]
이름 : 손하진(IP:)
2006.06.05 대구강의[지옥의 하나님37-38p.] 이근호 목사님.
인간에 대해서 좀 더 알게 되면 바로 그 알게 된 인간이 성경 말씀대로 바르게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이러한 논리에 들어갈 수가 있죠. 하나님을 잘 섬기기 위해서는 나를 잘 관리를 해야 되는데 나에 대해서 좀 더 명확하게 알아야 관리한다 이렇게 되는 거죠. 그러면 인간이라는 것을, 나를 파악하게 될 때 인간은 무엇이냐라고 했을때 인간은 하나의 존재가 되고, 실체라는 개념이 나오고, 실재라는 개념이 나오고, 본체라는 개념이 나오고, 본질이라는 개념이 나오고, 형상이라는 개념이 나오고, 그 다음에 질료라는 개념이 나오고, 실존이라는 개념이 나온단 말이죠.
여기에 하나라는 개념, 신이라는 개념이라는 것을 덧붙여버리면 존재, 실체, 실재, 본체, 본질, 형상, 질료, 실존 이런 게 다 나오거든요. 이것이 어디에 모여지냐 하면 인간이라는 여기에 모여진단 말이죠. 그럼 여기서 이 많은 개념들 가운데 형상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형상이라는 개념이 인간이라는 존재, 실체, 실재, 본체, 본질, 질료, 실존 이런 것과 어떤 연계, 어떤 관계를 가지느냐를 일일이 검토하지 아니하면 뭐가 성립 안되냐 하면 하나님의 형상대로라는 개념이 성립이 되질 않는 거예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이란 하나님이 갖고 있는, 소유하고 있는 형상이냐, 아니면 하나님이 내비치고 있는 하나님의 품성이나 인격이 외부에 드러난 것이 형상이냐, 그것이 어느 쪽이냐에 따라서 그러면 하나님의 형상과 인간의 형상에서 인간의 형상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아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으니까 하나님의 형상을 알아서 인간을 아느냐 이런 문제가 나오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하나님의 형상을 알아야 인간은 안다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하나님 더하기 형상 아닙니까.
하나님 더하기 형상을 어디서 뽑아내느냐 하면 인간을 가지고 인간이 형상 더하기 질료. 질료라는 것은 우리의 살점덩어리, 물체, 해체되면 흙으로 돌아갈 것. 그리고 형상이라고 하는 것은 그 흙을 인격으로 갖추게 하게 한 어떤 또 다른 정신적 요인 이걸 형상으로 본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이런 인간의 형상과 질료 이 자체를 모르게 되면 하나님의 형상을 모르게 되고 하나님의 형상을 모르게 되면 인간을 모르게 되고. 그러니까 어떤 외부에서 인간이 무엇이냐 이렇게 해야 될텐데 신학이나 성경해석을 해도 뭘 해도 인간 내부에서 해답을 찾아서 그걸 되레 자기한테 되먹임시키는 이런 식으로 했을 때에 과연 믿을만 하냐 이 말이죠. 이렇게 나온 결론들이 믿을 만하냐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존재, 실체, 본질, 질료, 실존 등은 철학에서 말하면 존재론입니다. 이 존재론을 다른 말로 하면 형이상학이라고 합니다. 이런 존재론을 만약에 생각을 안하고 바로 성경보고 여호와의 증인들처럼 집단적으로 모여서 성경 구절 외워라 해서 앞으로 전도할 때 이런 소리나오거든 이 구절 갖다 대고 이런 소리하면 저 구절 갖다 되시면 저 쪽에서 말 못합니다. 이런 식으로 만약 되버리면 이것은 조금만 신학을 공부한 사람은 뭘 느끼느냐 하면 이 성경 자체가 앞 뒤가 안 맞다는 거예요. 샌더스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같은 사도 바울이 이야기해도 앞뒤가 안 맞는 거예요. 앞에서 다른 소리하고 뒤에서 다른 소리하고 다르다 이말입니다. 앞뒤가 서로 다른 소리를 내니까 성경보는 사람이 성경 좀 공부할려고 하다가 나중에 종잡을 수가 없는 거예요. 사도 바울도 왔다 갔다하고, 베드로 왔다 갔다 하고, 베드로와 사도 바울하고 서로 다투는 것 같기도 하고, 예수님하고 뒤에 나오는 사도 바울하고 안 맞는 같기도 하고. 예수님의 산상보훈가지고 한 번 가상 실험을 해보세요. 산상보훈 외에 아무 성경이 없다고 보고 마태복음 5장, 6장, 7장만 달랑 어떻게 바람에 실려서 성경이 없는 북한 사람에게 남쪽에서 바람에 실려 왔는데 보니까 5장, 6장, 7장만 달랑 날라 왔단 말이죠.
그래서 5장, 6장, 7장 딱 보니까 5장, 6장, 7장 그 끝에 뭐라 되어있냐 하면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갈 것이 아니요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백성이다’라고 하면서 아버지의 뜻대로 하지 아니하면 마치 모레의 지은 집처럼 무너진다. 그리고 뜻대로 행하는 자야만이 반석위에 지은 집이다. 5장, 6장, 7장만 딱 떼어서 보면 그것은 백 사람, 천 사람 다 봐도 그것은 무슨 얘기냐 하면 산상설교대로 완벽하게 지켜야 구원받는다 그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또 바람에 불어서 날아온 것을 보니까 이번엔 로마서 4장이 바람이 날라왔네. 로마서 4장도 다가 아니고 5절, 6절만 딱 날라왔는데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그게 달랑 날아왔다 이말이죠.
그럼 사도 바울이 도대체 산상설교도 모르는 인간, 나보다 더 성경모르나. 산상설교할 때 태어나지 않았거나 다른 데 살았기 때문에 전혀 감을 못 잡아서 자기는 일방적으로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거다. 이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거든요. 이게 샌더스를 비롯해서 많은 신학자들이 내린 결론은 그거잖아요. 이걸 서로 앞뒤가 안 맞다라고 신학자 입에서 그런 소리를 할려니까 신학 후배들한테 너무 미안스러우니까 뭐라고 이야기했냐 하면 이걸 다양성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걸 다양성이라고 하는 거예요. 다양성이라는 이야기같으면 이 존재, 본질, 실체 등 여기서 나왔던 형이상학이 나중에 존재에서 중세에 데카르트 이후에 가면 둔스 스코투스 이후에 가면 이것이 존재에서 실존으로 바뀌어요.
존재 위주에서 실존 위주로 바뀐다고요. 그 과정이 존재 위주에서 본질 위주로 가서, 본질 위주로 간 것은 토마스 아퀴나스고, 본질 위주로 가서 그 다음에 나오는게 실존 위주로 나갑니다. 실존이라는 말은 구체적으로 있는 것을 말합니다. 존재라고 하는 것은 플라톤에 의하면 지금 이 땅에 있는 것은 전부 다 허상이고 모형이고 진짜 실체는 어디 있는냐 하면 저기 이데아 세계에 있어요. 원이 사람마다 그리면 여러 삐뚤어진 원들을 그리지만 진짜 완벽한 둥근 원 개념은, 진짜 원형은 따로 있기 때문에 사람마다 그 원형을 분배받아서 그렇게 불완전한 원을 그리지만 원이라는 원형, 개념은 따로 있다는 겁니다.
모든 존재는 다양하지만 다양한 이유가 그것들은 모형들이 때문에,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신의 품성을 양적으로 어떤 것은 많이 받은 것이 있고 적게 받은 것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선 있잖아요. 선. 착하다. 착하다는 것이 원래 신의 세계에 있어요. 플라톤의 이야기입니다. 사람마다 A라는 사람, B라는 사람마다 더 착한 사람이 있고 중간쯤 착한 사람이 있고 아주 못 된 사람이 있죠. 그런 못 된 사람이라 하지 않고 덜 착한 사람이라고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못됐다하는 것은 악이 있어야 되는데 이 세상에는 선한 것밖에 없어요. 존재가 이콜(=) 선입니다. 이것은 어거스틴도 이야기했고, 토마스 아퀴나스도 이야기했고, 플라톤도 이야기한 거예요. 있다는 자체가 선한 거예요. 있다는 것이 그냥 있는 거이 아니고 있다는 것이 선한 거예요.
그런데 실존주의철학은 뭐냐하면 있는 것은 있는 것은 그냥 있는 것이지 있는 것에 어떻게 선이라는 가치를 부여하느냐 그것은 말도 안 된다. 그냥 있는 것은 뭐냐. 있음은 있음이단 말이죠. 있는 것은 그냥 있는 것뿐이지 있는 것이 어떻게 선하다 악하다 가치를 논할 수 있느냐는 말이죠. 그래서 옛날에는 악이 없고 쪼끔 선한 거예요. 적게 선한 사람은 어떤 희망이 있을 수 있느냐 하면 앞으로 많이 선할 수 있는 여지있는 사람이라서 인간에게 희망을 부여합니다. 많이 착한 사람은 착한 대로 희망이 있는 것은 뭐냐하면 이 사람은 죽으면 거의 신과 가까이에 좋은 세계에 들어가기 때문에 그것도 역시 희망을 주죠.
존재가 무엇이냐 할 때는 그냥 존재가 무엇이냐 묻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을 과연 낙담안하고 앞으로 계속 살아야 돼? 과연 살만한 세상이냐? 아니 이렇게 힘든데 살아야 되겠어?라는 것에 대한 희망을 제공하는 그러한 철학들이단 말이죠. 실제가 아니라 사람들 격려해주고 북돋아주는 겁니다. 어제 주일학교 설교를 하는데 설교하면서 제가 물었어요. 여기 솔로몬 시대의 사람들은 하나님 섬기기를 애썼는데 우리 어린이들은 하나님 좋아하십니까? ‘아니요’. 아주 기다렸다는 듯이. 하나님 섬기기 안 좋습니까? ‘안 좋습니다’해요. 어른들도 마찬가지거든요.
왜 사람들이 하나님을 안 좋아하느냐 하면 이유는 하나밖에 없어요. 자기가 현재 고생할만큼 그 만큼 죄를 안 지었다는 거죠. 내가 지금 이렇게 고생하는데 나는 아무리 봐도 이런 고생할만큼 죄를 지은 적이 없다는 거죠. 하도 내가 인간성이 좋아서 교회나오지 참 다른 사람같은 안 나왔다 신이시여. 나라서 나왔지. 그래서 억지로 헌금하고 억지로 예배 참석하는 거예요. 더러워서. 그런데 성경에 나와 있는 세리나 창기나 이런 사람들을 보면 예수님 섬기는 것이 좋아서 섬겨요. 좋아서. 막달라 마리아같은 경우에 용서받은 사랑이 너무 커서 섬겨요.
그리고 사도 바울같은 경우도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현재 내가 지금 살아서 남들은 고생한다고 하지만 이 고생하는 것도 내 지은 죄에 비하면 이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한 유명한 말이 ‘내가 모든 사람에게 빚진 자로다’. 이것이 얼마나 낮아진 건지 내가 모든 사람에게 빚진 자로다. 나는 모든 사람에게 대해서 채무감을 느낀다는 거예요. 당신들이 날 대우하지 않더라도 난 당신들을 대우하고 싶어 환장했다 이 말입니다. 그게 주의 종의 바른 태도란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이 내가 잘못 봐서 그런지 모르지만 교회오는 사람보면 ‘진짜 예수 당신 너무한 거 아니요? 내가 무슨 죄가 있다고 해서 이렇게 사람을 고생시킵니까’. 전부 다 자기가 고생 제일 많이 한대.
그래서 이 철학이라는 것이, 만약 이러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신학을 보게 되면 산상설교를 봐도 거기서 바로 이러한 철학의, 자기는 철학 몰라 철학 안 배울거야라고 하면서 현재 철학에서 이야기한 그대로의 사상을 가지고 산상설교를 가지고 산상설교를 해석하다 보니까 산상설교를 보면서 아 이것은 다 지켜야 반석위의 집이 된다라는 해석이 나오고 사도 바울보고는 이것은 완전히 농땡이쳐도 되는구나 하고 이렇게 해석이 나오는 이유는 이런 기존의 존재론적인 자기의 품고 있는 그런 본성이 그대로 있기 때문에 그런겁니다.
근대에서는 존재에서 본질로 가다가, 존재에서 본질로라고 하는 것은 뭐냐하면 인간은 허구고 진짜 존재는 플라톤에 의하면 신이 진짜고 선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선이 없고 신에게 진짜 선있다라고 나가다가 토마스 아퀴나스의 중세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본성을 주었고 그 본질을 가지고 우리가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서 우리가 구원받느냐 구원 안 받느냐, 우리가 천당가느냐 지옥가느냐,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냐. 다시 말하면 우리가 이미 부여받은 신의 품성의 양에 따라서 결정된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본질 위주가 되면요.
잘 보세요. 철학이 이렇게 되는 겁니다. 존재, 글자로 쓰면 굵게 써야되는데 이외에, 본질 이건 아무것도 아니고, 실존 이건 허구고 이렇게 되는 겁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하다가 존재만 주장하면 우리가 있는 게 허구가 되니까, 본질이, 이 본질이 존재에서 넘겨받은 본질이기 때문에 이 본질은 우수한 본질이다. 이걸 무시하지 마라. 이게 토마스 아퀴나스의 중세이죠. 이 본질을 가지고 어떻게 사느냐. 바르게 살면 천사, 못 살면 악마. 이게 중세 철학이고 신학입니다. 그러나 근대에 오면 이렇게 본질주의가 되면 소위 더 착한 사람이 덜 착한 사람을 폭력적으로 압제를 하게 되고 더 많이 아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을 종속시키는 그런 것이 된단 말이죠.
그러면 더 못 배운 사람은 더 똑똑한 사람에게 어떤 본질을 신으로부터 받았다고 해놓고는 신으로부터 본질을 받은 것이 아니고 나라는 본질은 어떤 특정 인간의 본질에 예속이 되는 경우가 발생이 되니까 이게 과연 옳은가라고 자문하면서 참으로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이 신으로부터 온 피조물이라면 본질이 아니고 실존이 더 우선 되어야 된다. 실존. 실존은 뭐냐하면 개별자의 가치예요. 최초의 실존 철학을 한 사람이 키에르케고르인데 이 사람은 뭐라고 하냐하면 단독자라는 말을 했어요.
성경 한 번 찾아봅시다. 에스겔 13장 19절요. “너희가 두어 웅큼 보리와 두어 조각 떡을 위하여 나를 백성 가운데서 욕되게 하여 거짓말을 곧이듣는 내 백성에게 너희가 거짓말을 지어서 죽지 아니할 영혼을 죽이고 살리지 못할 영혼을 살리는도다”. 보세요. 죽지 아니할 영혼을 죽이고 살려내서는 안 되는 영혼을 당신은 구원받았습니다라고 사기쳐서 살려내는게 된다 이말이예요. 자 그렇게 되면 사람 숫자 끌어모으는 목회는 일단 안 된죠. 그럼 사람 숫자 끌어모는 목회가 되어버리면 사람 숫자 끌어모았다는 그 자체가 사람수가 많은 교회가 하나의 진짜 구원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집단 구원인 것처럼 행세를 하게 되요. 집단 구원인 건처럼.
마치 에스겔시대에 우리 유다 나라는 집단적으로 구원되는 것양 그 당시 거짓 선지자들이 유포한 것처럼. 에스겔은 그걸 각개전투해서 그걸 파괴시키잖아요. 너희들이 우리는 아브라함의 혈통이기 때문에 다 구원받는다, 어떻게든 구원받는다라고 안심하고 평강이 있다고 하는데 에스겔은 각개전투로 찾아가가지고 에스겔 자신에게 떨어진 여호와의 말씀을 진실로 순종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각개전투로 개별자로 전부 다 구분시키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은 뭐와 관계되는 겁니까. 존재가 본질이 아니라 뭐와 관계되요. 실존과 관계되요. 실존과. 실존과 관계된다면, 실존적인 측면에서 관계된다면 사도 바울의 지체, 몸의 개념과 안 맞아요. 또.
제가 사실 어제 오전 설교에 대한 토요일에 준비한 내용 가운데 이런 것이 있어요. 뭐냐 하면 교인들에게 내가 묻고 싶은게 있어요. 과연 여러분들한테 교회가 있습니까라고 묻고 싶어요. 왜냐하면 복음으로 구원받고 예수님 십자가로 구원받는다고 하는 사람들의 입에서 교회가 뭐 필요하나라고 하는 소리가 나오더란 말이죠. 그러니까 마치 제가 듣기에는 교회가 구원받는데 필요가 없다든지, 교회가 없어야 구원이 된 양, 교회가 없다고 이야기해야 진짜진짜 구원이 된 사람처럼 행세하는 그 오해를 나타낼 수가 있어요. 그래서 저는 그러면 당신에게 교회가 있습니까 하면 가짜로 구원받은 사람같으면 예수 십자가 있는데 교회 뭐 필요합니까 라는 소리가 나올 거단 말이죠.
그래 되면 주님이 주신 교회있잖아요. 그죠? 주님주신 교회도 없이 천국가겠다는 사람과 똑같은 거예요. 과연 그런 성도 봤습니까? 교회없는 성도 있습니까 세상에.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의 몸이 없는 성도 있어요? 서로 사귀며. 이게 [뒤에서 본 한국교회]나와요. 분명히 제 책보고 교회를 비판하니까 사람들이 ‘아 나는 교회 안 가고 인제 집에서 혼자서 인터넷으로 믿겠습니다’. 이런 사람이 나올까 싶어서 “서로 섬기며, 서로 화목하며, 서로 도와주며.....”. 거기에 ‘서로 ...’를 열 몇 개 적어놨어요. 기억나죠. 그런데 왜 우리는 서로라고 해당되는 사람이 없습니까. 왜. 다 자기를 위한 구원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구원에 대해 언급하면서 교회를 비판하고 다 이래야 될텐데. 달랑 자기가 구원하면, 구원받고 내빼면 끝나는 거예요.
이제는. 교회가 어떻게 돌아가든. 말아먹든 모르겠다는 거예요 도대체. 실존이죠 실존. 철학적 용어로 실존에 해당되는 거예요. 개별자에 해당되는 거예요. 지금 하나님의 이름을 이야기 전에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이름 자체가 이름이 붙어있다는 것은 현재있는 피조성을 겨냥해서 이름이 붙어있거든요? 피조성이 없다면 이름이 없어져야 되요. 반드시 지은 자가 지음받은 자가 있거든요. 피조성은 이름의 세계이기 때문에 이름의 세계 속에 이름을 가지고 들어와야 이게 교제가 되고 관계가 됩니다. 물론 이름이 그냥 호칭하는 이름이 아니고 능력을 한껏 품고 있는 이름이죠. 그리고 그 이름이, 그 이름에 담겨있는 능력대로, 맹세한대로, 언약대로 그대로 실천해 나가는 가운데서 계속해서 주님께서 자신의 이름, 자신의 이름을 여기 다 흩어 넣습니다. 그것은 그냥 역사를 초월해서 방관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역사 속에 같이 이름을 가진 피조성과 함께 더불어서 그 이름과 이름과 이름의 만남 속에서 우리가 구원받을 이름으로 계속 부각시키는 방법으로 구원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겁니다.
따라서 이러한 이름이 나중에 어떤 육체성, 인간성을 띨 때에 그것은 현재 인간이 안고 있는 이 문제를 외면하는 것이 아니고 이 문제 속에 그대로 들어오시는 것이거든요. 따라서 지금 이런 복잡한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계속 제가 이야기를 해보면 존재에서 본질로, 본질에서 실존으로 나가버리면 그 다음에 실존에서 멈추는게 아니고. 어려운데 잘 들어보세요. 토마스 아퀴나스나 플라톤은 실존에 대해서 왜 그렇게 신경을 안 썼냐하면 실존은 우연이라고 했어요. 우연. 철학적으로 이 용어를 알아야 되요. 실존은 우연이라는 거예요. 우연이라는 말은 다른 말로 영원하지 않다는 겁니다. 우리가 죽잖아요. 죽으니까 잠시 있다 없어지는 안개잖아요. 그걸 철학에서 두 자로 줄여서 뭐라하면 우연이라고 합니다. 우연.
왜 그걸 철학자들은 우연이라고 하느냐. 왜 그렇게 이야기하냐 하면 사람이 신으로부터 어떤 본질을 받았으면 신으로부터 온 본질이기 때문에 이게 계속 가치가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들이 아는 철학에 의하면 신으로부터 받은 가치라고 하는 것은 신으로 받았기 때문에 신은 영원합니까? 영원하지 않습니까? 영원하지요. 그럼 신으로 받은 가치는 영원합니까? 영원하지 않습니까? 영원하잖아요. 그런데 영원한 게 죽잖아요. 그러니까 인간은 우연한 존재고 영원한 존재는 신에게 있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신만 영원하지 인간은 우연한 거라는 말이죠.
그런데 여기서 토마스 아퀴나스가 고민이 되는게 있었는데 뭐냐하면 인간이 만약에 우연이라면 인간이 우연이라는 사고방식이 스토아철학이거든요? 인간은 우연이니까 그냥 대충 살아라. 피타고라스학파나 디오게네스학파쪽도 마찬가지지만 그냥 대충 살아라 이러거든요. 우연이기 때문에. 우연이라는 것은 90세 살면 우연 아닌 것같죠? 그런데 천년, 만년 입장에서 보면 우리는 반딧불처럼 반짝하고 없어지죠. 순간적이죠. 토마스 아퀴나스는 본질주의자이기 때문에 고민이 있어요. 만약 인간이 우연이라면, 인간이 진짜 우연한거냐, 인간 속에 영원한 게 없느냐. 영원한 것을 영혼으로 봤고 그 영혼만큼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본 겁니다. 그런데 영혼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봤을 때 후배들한테 욕을 많이 얻어먹었다고요.
왜 욕을 먹었냐하면 그것은 성경적인 것이 아니고 신플라톤주의의 플로티누스의 사고방식이라 이렇게 본 겁니다. 만약에 영원한 것이 영혼이라면 우리는 창조론에 있어서 뭔가 많은 것을 양보를 해야 됩니다. 창조한 것이 아니고 섭리한 것이 되요. 골치 아프죠. 하나님께서 무에서 창조하신 것이 섭리한 게 된다고요. 이게 꿀홍삼이잖요. 이 탁자 위에 꿀홍삼쥬스가 있는데 제가 지금 이걸 부서버리면 없어지잖아요 그죠? 없는데. 여기있는 것을 저 쪽으로 옮기면 이것은 부서버린 것이 아니라 관리한 거죠. 관리했던 뭐했든 이 탁자위에 없잖아요. 없는 것은 마찬가지 아닙니까. 없을 경우에 두가지 경우가 있단 말이죠. 하나는 관리, 섭리해서 다른 곳에 치워버렸다든지 아니면 아예 없앴던가 두가지란 말이죠. 이걸 철학에서는 구분시켜요. 소멸과 파멸로.
목사가 용어를 쓸 때 쉽게 써버리면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소멸케 합니다’라고 한다면 교인이 100명같으면 100명 다 달라요. 소멸이냐 파멸이냐 자기 마음대로 해석 다 해버려요. 그런데 그 해석을 한 것에 대해서 오해마시기 바랍니다하고 명확하게 개념을 목사님이 설교할 때 짚어넣어야 될텐데 목사는 목사대로 설교하다보면 성경대로 했는데 내가 뭐 잘못인데 이러거든요. 교인들이 어떤 점에서 성경에 대해서 지금 오해를 하고 있다는 것까지 파악을 해서 ‘여러분들은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해도 아마 성경과 다른 비복음적인 이런 생각들을 이미 철학적으로 갖고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이런 면은 아니예요. 성경에서 말하는 언약은 이겁니다’라고 딱 집어서 이야기해야 될텐데 성경대로 했고 성경 본문대로 인용했는데 내가 뭐가 잘못인데 이래요.
그만큼 설교에 공부해야 되고 신경을 써야 돼요. 어떤 분은 설교를 들어보면 저 이야기를 들으면 세 가지 오해가 생긴다. 그 다음 이야기를 들어보죠. 하아 저 이야기를 들어보면 네 가지의 다양한 오해가 생길 수 있다. 그 다음 이야기는 저 이야기를 들으면 저것은 아예 처음부터 오해할 수가 있다. 그런 것이 막 들려요. 들려가지고 저 대목에서는 분명히 이겁니다라고 확정짓고 그 다음을 넘어가줘야 되겠다. 이것은 제 설교를 들을 때 마찬가지예요.
이것할 때 왜 그 소리를 뺏을까. 이걸 집어넣어야 될텐데. 앞뒤를 바꿔야 되는데. 어제 오후에 돌아가면서 아침설교 때문에 많이 후회가 되었었어요. 사탄의 깊은 곳이라는 설명을 했는데 설교 다 끝나고 사탄의 깊은 곳이 뭡니까 딱 물으면 사탄의 깊은 곳이 뭔가 명확하게 이야기를 안 해준 것 같아요. 사탄의 깊은 곳은 하나님의 깊은 것과 대비되서 아는데 그 다음에 중요한 게 뭐냐하면 사탄의 깊은 곳이든 하나님의 깊은 곳이든 인간은 깊은 곳이기 때문에 깨낼 수가 없는데 깨낼 수 없는데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해서 어떤 식으로 깨내는가. 그것은 바로 난데없는 어떤 이상한 행동들을 통해서 에스겔을 예를 들어 이스라엘에서 남들이 깨닫지 못하는 사탄의 깊은 곳을 파헤치는 장면을 했어야 되는데 이걸 했어야 되는데 자꾸 바둑 복기하듯이 되새기거든요. 그래서 설교를 할 수 있는 분들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신앙을 점검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니까. 우리 장로님도 목요일 강의하실 때 강의하시는 것이 좋죠? 강의를 해보면 반성이 되니까 수정이 가해지니까. 그래서 말씀 전하는 것이 큰 행복이에요. 집사님도 자꾸 남들 붙들고 싫은 소리 해가며 전도하면 그것이 나중에 집에 오면 반성이 되고 그렇거든요.
토마스 아퀴나스는 지금 고민이 되요. 어떻게 인간은 우연한 존재인데 우연한 존재에 어떻게 영원이 담기느냐. 여기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걸 어떻게 해결했느냐 하면 이걸 시간론으로 해결했어요. 시간론으로. 인간은 유한하지만 시간은 유한하지 않다라고 하니까 후배 신학자들이 막 들고 나오거에요. ‘당신은 지금 영혼의 영원함과 인간의 신체의 우연함을 결합시켜서 뭐해서 잘 조화가 안 되니까 영원한 영혼 대신에 시간의 영원함을 가지고 시간은 영원하지만 인간은 시간 속의 하나의 점이다라는 식으로 그러면 토마스 아퀴나스 시간은 영원합니까’. 만약 시간이 영원하다면 이것은 무슨 사상이냐.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이에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거예요. 그 시간이 영원하다는 사상이 오늘날 유명한 신학자 누굽니까.
오스카 쿨만이죠. 오스카 쿨만은 창세전에도 시간이 있었고 끝나도 시간이 있다는 거에요. 오스카 쿨만이 왜 그런 소리를 합니까. 우연과 영원을 결합시키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연과 영원과 결합된 그 지점에 뭐가 있다? 인간의 본질이 있다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야기했고 키에르케고르는 실존이 있다고 보는 겁니다. 실존이, 인간 자체가 있다고 본 거죠. 인간의 실체가 있다고 본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가치있다. 키에르케고르도 인간은 가치있다, 토마스 아퀴나스도 인간은 가치있다. 왜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나님의 형상이 들어있기 때문에 형상이 뭔데, 그것은 영원한 것. 그 형상이 구체적으로 뭔데, 본질적으로 들어가면 이것은 인간의 영혼이다.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형상 더하기 질료아닙니까. 그러니까 질료, 인간의 몸은 흙으로 돌아가지만 인간의 형상, 영원한 형상은 영혼이 되어서 영원토록 그 자립성은 영원히 존재한다, 인간의 자아성은 영원히 존재한다 이렇게 한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나중에 현대 신학에서 깨져버립니다. 현대 신학의 경우에 인간의 실존에서는 뭐냐하면 인간은 우연한데. 자 어렵습니다 잘 들어보세요. 인간은 우연한 데, 시간 때문에, 시간과 비교해서 우연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 주신 사건 때문에 우연하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하나님 주신 사건. 사건이 중요해서 인간이 중요하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만약 사건이 없으면 인간은 아무 것도 아닌데 하나님의 사건이 담기기 때문에 인간은 비로소 하나의 중요한 의미을 지니며 영원성과 접촉이 된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이 키에르케고르의 사상을 이어받은 사람이 하이데거와 불트만이에요.
그래서 불트만의 종말론을 가지고 실존적 종말론이라고 합니다. 실존적 종말론이 뭐냐하면 그림으로 그리면 인간이 여기 있으면 수평적으로 시간따라가는게 아니고 위에게 수직으로 뭔가 순간적으로 사건이 임할 때 비로소 거기서 뭐가 발생되느냐하면 믿음이 발생되고 이 믿음의 사건을 일으킨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현재 영원성에서 이죠. 영원에서 내뿜는 사건에 의해서 우리는 믿음이 생겼다라는 것이 불트만의 사상입니다. 이 불트만의 이런 사상으로 주위에서 뭐라고 평하는지 압니까. 불트만은 루터와 그 사이에 아무 것도 없이 루터에서 바로 붕 날라온 사람이 불트만이다고 하죠. 루터의 십자가신학이 그냥 날아왔는데 불트만이 이런 사상을 하게 된 원인은 키에르케고르나 앞에서 있는 선배들과 하이데거의 사건철학의 영향을 결합해서 이러한 불트만의 신학이 정립된 거에요.
자 그렇다면 제가 이제까지 쭉 이야기한 것을 들어보니까 여러분은 뭘 생각할 수 있느냐 하면 성경을 해석할 때 첫째, 명확하게 복음을 이야기해야 된다는 것, 이 복음이 명확하게 드러날 때까지 성경해석을 멈춰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만약 복음이 명확하게 안 드러나는데도 한다는 것은 중간에 뭐라고 희석시키느냐고 하면 성경에는 다양성이 있습니다하고 희석시킵니다. 성경에 다양성이 있어버리면요 그것은 무슨 말이냐 하면 그것은 철학의 기본도 모르는 사람이에요. 왜냐하면 플라톤의 철학은 존재, 본질, 실존 모두가 하나입니다. 하나. 결국은 모든 다양은 하나로 모야진다는 거지 이것은 약간의 철학적 사고, 논리적 사고만 갖고 있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다 이야기한 거에요. 심지어 성경에도 나와요. 인간은 두 주인을 섬길 수가 없다. 다양한 게 있다니요. 다양한 게 어디 있어요. 다양한 것은 반드시 순서를 지울건데. 다양한 건 없어요. 제가 십자가, 십자가의 피를 이야기하니까 많은 사람들이 다양성이 있지 십자가 피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이제 이 본문에 들어가 봅시다. 주의 이름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다양성의 이름을 한꺼번에 원자폭탄가지고 다 터져버리고 그 터진 구멍난 그 구멍에 모든 이름을 다 부수어버리고, 그걸 빌립보서에서는 무릎을 꿇고라고 하는데 모든 이름을 무릎을 꿇리고 폭탄터뜨려서 큰 구덩이가 생기고 그 구덩이에 오직 하나만 남기는 거예요. 뭐냐. 주의 이름만 남기는 거예요. 이게 다양성입니까? 오직 단독 하나 주의 이름밖에 없습니다.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다. 이제 다양성이 아니다. 오직 유일성이에요. 존재의 유일성이 아니고 주의 이름의 유일성이에요. 사건의 유일성이라 하면 안 된니다. 사건은 계속해서 또 다른 다양한 사건이 벌어지기 때문에.
사건의 유일성도 아니고 존재의 유일성도 아니고 무엇에 있느냐. 주의 이름.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수 없는 주의 이름의 유일성. 이것이 진정한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유일성 아닙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지옥의 하나님] 37쪽 보시면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요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로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이렇게 여호와의 이름을 알리지 아니하였다고 하거든요? 여호와의 이름을 알리지 아니하였다고 할 적에 이게 성경의 앞뒤하고 안 맞아요.
성경이 앞뒤가 맞는 게 없어요. 그 말이 옳아요. 창세기 4장 끝에 보면 아벨이 죽고 난 뒤에 아벨 대신 셋을 주죠. 셋을 주고 난 뒤 그 때 비로소 사람들은 무엇의 이름을 불렀다했어요.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되어있어요. 이미 창세기 4장에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어요. 그리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계속 무슨 이름입니까. 여호와의 이름이 계속 나와요. 심지어 아브라함이 이삭 잡으려 할 때 그 때 지명 이름이 뭡니까. 여호와이레 아닙니까. 여호와 나오잖아요. 나오는데 왜 다른 이름으로 안 줬다 이 말입니까. 왜 자료가 딴 자료라서 그래요? 그렇습니까. 성경에는 맞는게 없을 정도입니다. 따지고 보면 맞는게 없어요. 맞는 게 없다는 말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일상적인 해석가지고 해석할라고 생각도 하지 말라는 얘기예요. 해석해봐야 제대로 되지도 않고, 해석해봐야 사사로운 의견을 집어넣어봐야 혼란만 야기시키지.
여호와 이름이란 이름이라는 그 명칭과 더불어 함께 있는 게 있어요. 여호와라는 호칭과 더불어 그 내용, 그 능력이 함께 병행해서 나타나야 됩니다. 여호와 이름으로 어떤 일을 실행에 옮긴다 할 때에 이것은 좀 어려운데 잘 들어보세요. 이게 논리적으로 굉장히 어려운데. 그림으로 그립시다. 위에 2층이 있고 아래에 1층이 있죠. 아래층 사람이 여호와 이름을 불렀어요. 또 여호와 이레라고 했습니다. 쪽 이렇게 했는데.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여호와 이런 이름을 갖고 있다. 가는 곳마다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제단을 쌓았잖아요? 이렇게 했을 때 여기서 생각하는 이것이, 여호와의 이름이라고 생각하는 그 층이 아래층이라면. 2층에서 여호와 이름이라고 이야기하는 층과 기름과 물처럼 층이 달라요. 다른 층이 있다는 이것은 뭐냐하면 언약이 어떤 언약이 투입되느냐에 따라서 그 언약은 그 때마다 그 때마다 층은 둘로 구분됩니다.
그 하나의 예를 들면 노아 때 방주 만들 때 사람들은 여호와를 알았어요. 하지만 노아가 방주라는 어떤 물체가 등장하면서 아는 그런 여호와는 2층에 해당된다면 기존의 사람들이 알고 있었던 여호와는 1층에 해당되는 겁니다. 언약이라는 것은 새로운 창조력을 품고 계속 등장하기 때문에 그래서 사무엘서를 보면 순종이 뭐보다 낫다 그러냐 하면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했잖아요. 사울이라는 왕은 역시 율법대로 살라했는데. 새로운 언약이 투입되게 되면 기존의 언약과 새언약사이에 여기서 완전히 새언약에 추종할 수 있는 능력이,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능력이 1층에서는 안 나옵니다. 나올 수가 없어요. 2층에 있는 새로운 언약 계시에 의해서 1층에 있는 사람 중에서 진짜 여호와를 아는 사람만 따로 분류해서 구원하는 작업이 이루어집니다.
홍해를 건넜다. 홍해를 건널 때 누가 했습니까. 하나님이 하신 일이죠. 하나님이 하신 일인데 요단강 건널 때 요단강이라는 새로운 상황이 벌어지면 홍해를 가르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여기던 1층 사람들은, 그대로 1층 상황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사람은 요단강 건널 때 건너지를 못합니다. 왜? 이것은 자기가 알고 있는 여호와의 범주 바깥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학교 선생님이 더하기 빼기를 이야기하면서 시험칠 때 곱하기 나누기를 시험치는 거예요. 이것은 배운 적이 없는 시험을 해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는 거예요. 예수님 어머니 마리아는 그 전에 애기 밴 적이나 나아본 적이 없어요. 이것은 특히 말씀으로 얘기를 나아본 적이 없다고요. 돌발적인 사태에요. 돌발적인 사태.
여호와 이름은. 제가 왜 이래 얘기하느냐 하면. 목사님 여호와 이름이 뭡니까 할 때 제가 하는 말은 하나 밖에 없어요. 손에 잡히지 않는다 이말이죠. 여호와 이름이라고 딱 규정짓기는 커넝 여호와의 이름이 뭐냐고 규정지을려는 그 인간을 도리어 그래서는 안된다고 공박하는 그런 능력이 여호와의 이름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어요. 이러한 논리가 여러 군데 많이 나타나요. 부자청년하고 예수님하고 만날 때, ‘선한 선생이여 어떻게 해야 내가 영생을 얻습니까’할 때 그 때 예수님 뭐라고 하셨습니까. 영생은 이렇게 얻는다라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뭐부터 시비를 걸어요. 왜 나보고 선하다하느냐.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왜 나보고 선하다하느냐하는 그런 물음을 왜 던졌는지를 몰라요. 지금 부자 청년은 문제가 뭐냐하면 현재 1층에 있으면서 1층에 있는 개념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2층에 옮겨갈 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1층의 이런 개념을, 십계명 개념, 선한 개념, 영생의 개념이 있다는 말은 이미 자기화된 거예요. 이미 자기한테 예속된 여호와 이름이예요.
그런데 주님의 여호와는 항상 손에 잡히는 게 아니고 도리어 인간의 손에서 빠져나오서 도리어 외부에서 그 인간을 장악하시는 식으로 우리를 인도하여 가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을 인도해 나가시기 때문에 이것이 여호와다, 이것이 여호와 뜻이다라고 한다면 자꾸 미끌어져요. ‘얘, 그게 다가 아니야, 그것 가지고는 모지란다, 계속 내가 널 인도해야 돼’. 새로운 사건들을 통해서 또 우리로 하여금 당황하게 만들고 당황하는 순간 진짜 성도같으면 ‘주의 뜻대로 하옵소서, 십자가만 바라봅니다. 내가 바라볼 건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날마다 날 죽이겠습니다. 난 주님앞에서 늘 부서져야 됩니다. 늘 죽어야 됩니다.’라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부수어야 된다는 것을 인정하는 상태를 만들어서 인도하는 거에요.
그냥 인도하시는 게 아니고. 나를 계속 부수는 가운데 있는데 그 부수는 작업이 뭐냐하면 하나님의 이름의 특징은 인간의 이름을 죽인다. 그 근거를 대라고 물으면 그 근거는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십자가에서 완성되거든요? 지금 요단강에서 완성되는 게 아니고 그 뒤 여리고성에서 완성되는 것도 아니고 계속 가요, 계속가다가 십자가에서 다 이뤄요. 다 이룬 그것을 근거로 해서 지속적으로 우리의 이름을 죽이는 거예요. 계속 우리의 이름을 죽인다 이 말입니다. 우리는 늘상 주님의 생명에 의해 죽음에 넘기움을 당하죠.
어제 오후에 제가 중요한 포인트를 이야기한 게 이겁니다. 십자가을 바라볼 때 불신자들이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은 자기에게 도움되는 십자가로 바라보지만, 신자가 십자가를 바라볼 때는 뭐냐하면 심판을 통해서 십자가를 바라본다고 했어요.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심판당하신 예수님이에요. 심판을 받으신 예수님이에요. 심판을 통하지 아니하면 십자가를 몰라요. 십자가가 뭡니까. 심판당하신 주님의 십자가. 이렇게 해야 정답입니다. 심판을 당하는 거예요. 심판. 날 구원하기 위해서라는 날 구원이 앞서면 안되고 그냥 심판을 당하시는 거예요. 심판당했기 때문에 그 심판당한 십자가를 성령을 통해서 우리한테 하나님의 이름을 들이대었다는 말은 우리로 하여금 매일같이 우리 안에서 우리 이름을 심판하시는 주의 이름이예요. 심판하시는 주님의 이름이란 말이죠. 심판하시는 이름이, 그 분이 바로 여호와의 이름이 갖고 있는 능력이에요. 매일같이 우리를 죽이는 거예요. 그리고 매일같이 우리를 살려내고. 여호와의 이름이 뭐냐라고 규정하는 그것마저 죽어라 이말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이여 이렇게 하시지요할 때 그것마저 죽이는 거에요.
그래서 현대철학자들은 이것은 옛날 고대철학자들이 존재를 규정하는 이 철학가지고는 이러한 사건을 해명할 수 없다해서 존재의 형이상학 철학을 다 날려보낸 겁니다. 과거의 철학을 다 날려보냈는 데 왜냐하면 존재로에서부터 존재로 규정되는 건데 이것은 날마다 돌발적이고 우발적이고 우연적으로 등장하는 이 사건 하나하나를 처리를 하지 못한다거죠. 그런데 그것이 성령의 십자가에서 온다는 사람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그것을 그렇게 보지 않고 뭐로 보느냐 하면 또 나에서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들뢰즈는 자기 욕망으로부터 온다. 인간의 모든 사건은 욕망에서부터 나온, 욕망에서부터 사건화된다. 사건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사건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자기는 사건이 왜 터지는지 모르겠다. 자기는 광야에 비오는 이유를 모르겠고,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사건화, 다른 말로 하면 이걸 의미화라고 하죠. 그건 의미있다, 의미없다를 결정하는 것은 나의 욕망에서 나온다 이렇게 본 겁니다. 이게 들뢰즈철학입니다. 여러분 어제 보신 분 계신지 모르겠습니다만 가나와의 축구에서 3대 1로 졌잖아요. 졌을 때 호주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아무 사건, 아무 의미없어요. 그런데 3대 1로 지는 것이 우리는 속상하다고 느끼느냐. 이것은 나의 욕망 속이 이미 이 사건과 이 사건의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에 내가 부여한 욕망을 그대로 하라는 겁니다.
이 철학을 그대로 신학에 그대로 가져오면 하나님께서 왜 사건을 일으킬까. 하나님 의 자기에게 욕망이 있는데 그 욕망에 대해서 하나 하나 의미를 주기 위해서 사건을 일으킨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것은 어디 철학이냐 하면 놀랍게도 이게 토마스 아퀴나스 철학에 나와요. 토마스 아퀴나스에게는 창조가 강하지 않고 뭐가 강하냐 하면 섭리가 강해요.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 일하느냐.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 어떤 사건을 통해서 의미를 두느냐하는 이 점이 강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욕망이 있는데. 이렇게 되버리면 보세요. 하나님께 욕망이 있다했죠? 욕망은 어디에 속하느냐하면 이것은 본질에 속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본성인데. 하나님의 이 본성과 실존과 어떤 관계가 있느냐를 논문으로 써라고 이야기한다면 신의 품성에 있어서, 신의 품성 개념에 있어서 신이 갖고 있던 욕망이라 하는 이것, 어거스틴은 이것을 뭐라했느냐 하면 신의 의지와 그 의지로 인한 실존은 어떠한 관계에 있느냐. 이것은 유명한 논문 테마가 되고 이런 논문이 수 백개 있어요. 이게 성령의 은사론과 관련되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썼던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에 관한 글을 보면 이게 나와요. 신은 감추어져 있어요. 없어요. 스피노자의 이야기입니다. 신은 이름을 통해서 보는데 이름은 무얼 품고 있느냐하면 하나님의 본성, 속성을 품고 있단 말이죠. 인간의 의지. 이 본성이 양태를 이루면 이것이 실존이 되고 이것이 하나의 개별자가 된다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자 여러분 이 스피노자의 말이 맞습니까. 신은 보이지 않고 이름만 등장하고 그 이름은 어떤 이름이냐 자기는 신이 갖고 있는 속성을, 능력대로 이루어지는 속성인데 이 속성에 의해서 여러 가지 양태 또는 양상을 보여주면, 양상 하나하나들이 저와 여러분이고 개이고 소이고 이런 실존들이다라고 스피노자가 주장했어요. 이걸 가지고 분여라고 하지요. 분배. 신의 속성을 분배하는 거죠.
왜 신으로부터 출발했냐 물으면 만약에 개별자로부터 출발해버리면. 신은 하나잖아요. 어떤 것도 신으로 다 하나로 모이잖아요. 신은 하나을 말합니다. 신이 둘 되면 안되지요? 스피노자는 유대인입니다. 유대교인이라서 신이 다신론이 아니에요. 어떻게든 하나로 모야져야 되요. 하나의 유일신으로 모아지기 때문에 개별자로부터 출발하면 안 되고 이렇게 되요.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는지 압니까? 이걸 가지고 범신론이라고 하지 않고 이걸 내재적 신이라고 합니다. 자 여기서 뭐가 약화되었습니까? 이 스피노자의 논리에서 뭐가 약해졌습니까? 창조. 창조가 약해졌죠 그죠? 그러니까 이 개별자는 우연자가 아니고 뭐가 되어버려요. 우연이 아니고 필연적이 되요. 필연적이 되고 죽고 난 뒤에는 신에게 합류하고. 신으로부터 나와서 신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로마서 11장 33절같애. 이것이 내재적 신이라는 겁니다.
그처럼 옛날 중세 철학자나 신학자들은 성경 하나하나 그냥 대충 넘어간 게 아니고 진지하게 묻고 또 묻고 또 묻고 하는 거예요. 정확과 정확성을. 진리와 진리를 위해서. 더 깊은 진리. 더 명확한 진리를 위해서. 더 확실한 걸 위해서. 그래서 오늘날 목사들이 나는 철학공부 안한다고 하는 것은 이건 너무 성의없는거예요. 그들이 하나의 진리를 얻기 위해서 얼마나 고민하고 애쓰고 어떤 사물하나 무심히 보지 않고 다 연관시켜가지고 모든 사건 다 꺼집어내어서 자기가 생각하는 그 진리체계에 부합되느냐 부합되지 않느냐 수정해야 될거냐 말아야 될거냐를 늘 고민하면서 깊은 진리를 알려고 그렇게 애를 썼잖아요.
참 옛날 사람 믿음있니 없니 욕을 해도 그만큼 요즘처럼 교인들이 드문드문 있는 게 아니고 그 당시에는요. 그 당시는 전 백성이 다 교인이에요. 그 당시 목사나 이런 사람들이 신학에 약간 부족한 게 있으면 대번에 저쪽에서 시비걸고 나온다고요. 지금은 이런 신학문제를 이야기하면 인터넷에 써봐도 조회수도 없어요. 왜? 아예 말씀에 관심이 없어요. 전 나라가 그래요. 요즘 완전히 이런 복음이야기하면 인간문화재라고 합니다. 아무도 없어요. 실체, 본체 이거 아무 관심없어요. 철학도 그런 거 공부 안합니다 요즘은. 영화평론해요. 요새 철학은 영화 평론한다고요. ‘친절한 금자씨’의 의미가 뭔가 이런다고요.
하나님의 이름은 인간을 고발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여호와라. 나는 다른 이름으로 한 적이 없다. 이 말은 새롭게 여호와라는 이름이 품고 있는 너희들이 아직도 알지 못하는, 1층에서 노는 것 말고 새롭게 전개될 뭔가 더 큰 깊은 여호와의 이름이 ‘아 여호와 이름이 이랬었든가, 하나님이 이런 분이었던가’ 새삼 놀랄 수밖에 없는 일을 하는데 그게 뭐냐. 그게 그 전에 것과 다른 점은 뭐냐하면 바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을 이루는, 언약과 처음으로 연결된 여호와 이름은 모세가 처음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호와 이름이란 뭐냐. 비로소 이 지점에 와서 언약달성과 관련되요. 언약달성.
그 전에 여호와라는 것은 인간이 부르는 거예요. 그냥 불투명해요. 아브라함이 그냥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서 제 길을 그렇게 가는 거예요. 언약 맹세 같은 게 없어요. 숨어서 했지 노골적으로 하지 않았지요. 그냥 자기는 자기대로 가버리고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하고 이랬는데 여호와 이름이라는 언약과 관련되면서 이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 의해서 계속된 언약의 내용을 이제는 실천에 옮길 때이다. 실천할 때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나는 그 전에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이야기했다. 그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그 당시에 여호와 하나님말고 그 당시에 많은 신들이 있는데 그 신들도 전부 다 각자 전능하심을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느닷없이 전능하신 분이 아니고 바로 각자 사람마다 전능하심의 기준을 따로 갖고 있을 때 아브라함은 아브라함 나름대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따로 갖고 있었던 거예요. 이삭은 이삭대로 야곱은 야곱대로. 전능하신 하나님.
이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누구냐가 아니라 전능하시다는 이 형용사로 인하여 진짜 하나님의 실체가 숨겨져 있습니다. 감추어져 있고 모호하게 되어있었어요. ‘너 이웃사람 이름이 뭔데?’라고 물으니까 ‘훌륭한 이웃’. ‘그래 훌륭한 건 아는데 훌륭한 그 이웃의 이름이 뭔데? 이름을 뭐라고 하던데? 고씨든가 김씨든가 누구든데’. ‘친절하신 이웃’. ‘친절한 것은 아느데, 그 이름이 뭐라는데?’. ‘놀라우신 이웃’.‘그 놀라우신 이웃의 이름이 뭐래, 이름이 뭐래?’. ‘몰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이 이제는 아브라함 개인적이나 이삭 개인적이 아니라 이젠 이스라엘 전체, 세상을 향하여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일개 신에, 다신론의 일개 신에 불과한 것이 아니고 진짜 전능한 이름으로 온 애굽과 바로왕과 이스라엘 양쪽에다 전부 다 자신의 여호와 이름의 여호와 이름됨이 드러나는 거죠. 그 전까지는 자기 택한 백성에게만 하나의 다른 여러 가지 전능하신 하나님의 일부로서의 전능하신 하나님. 아브라함은 알지요. 이삭도 야곱도 알지만 그것이 대외적으로 공개되지는 않았잖아요. 그걸 가지고 신학자들은 옛날 신은 여호와는, 모세의 여호와와 아브라함의 여호와의 차이점이 뭐냐. 아브라함의 여호와는 일개 가족, 종족의 여호와였고 이쪽의 모세의 여호와는 국가적으로 여호와다. 그렇게 이야기를 구분하는 겁니다. 신학자들은.
뭐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닌데. 저는 일개 종족은 같은 개인적인 혈통이잖아요. 그때는 다른 종족까지 들여다보지 않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가족에만 신경쓰는 그런 하나님이기 때문에 남들보기에 항상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보수주의쪽 학자들은 그렇게 설명하는 게 아니고 그들은 여호와라고 안 불렀대요. 안 부르고 그냥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했는데 다만 후대 모세가 창세기를 써면서 그 때 여호와의 이름도 모르고 전능하신 하나님이여라고 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까 여호와니까 나중에 그 여호와 이름을 전능하신 하나님을 대신 썼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비로소 그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불렀더라’ 이것이 맞는데 모세가 그 ‘전능하신 하나님’이 여호와이니까 여호와를 집어넣어서 ‘그 때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이렇게 주장하는 겁니다. 보수주의 학자들은 그렇게 주장하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자유주의학자들은 그게 아니고 자료가 여러 가지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자료설로 이야기합니다. 보수주의학자들은 자료설을 거부하기 위해서 미리 집어넣었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저는 양 쪽의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니고 여호와라는 이름의 호칭이 아니라 그 실체가 범국가적으로 다 드러나는 것은 그것은 모세가 처음이었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왜냐하면 왜 그렇게 주장하냐. 근거가 뭐냐. 그게 언약과 관련되어있기 그래요. 아브라함언약은 안 되느냐. 아브라함 언약 때는 그 언약이 아브라함언약이 정립될 수 있는 외부 세계에 대해서 아직 관여를 안했어요. 아브라함 언약이 적용되어야 될 외부세계에 대해서 아직까지 관여를 안했다고요. 이삭의 언약도 어때요. 야곱 외에 다른 민족에게 가할 파장은 그때까지는 아직 활동되지 안했다 이말입니다. 분명히 약속은 했지요. 에서는 한 국가가 되고 야곱도 한 국가가 된다라고 예언은 했지만 이 양쪽 다에 전능하신 여호와라고 하는 것은 모세 때에 비로소 공식적으로 펼쳐진단 말이죠.
그리고 보수주의학자들처럼 여호와 이름을 일체 몰랐고 전능하신 하나님으로만 한다면 아브라함이 지었던 지명이 ‘여호와 이레’가 안 되고 ‘전능하신 하나님 이레’ 이렇게 되어야 된단 말이죠. 그게 호칭 자체에 중요성을 띠고 보수주의 쪽에서 그렇게 지금 이야기하잖아요. 그렇다면 호칭 자체가 중요하다면 그 지명이 ‘전능하신 하나님 이레’라고 호칭 자체를 그들이 그렇게 불렀던가하는 문제가 있어요. 의미말고 호칭을 ‘여호와 이레’가 아니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타나 준비하신 장소’ 라고 이렇게 했을까요. 그게 약간의 무리가 있지 않을까. 또 전에 나오는 여호와 이름을 전부 다 바꾸려고 하면 이 작업이 보통 작업이 아니죠. 그래서 지금 언약과 연관해서 나타났다.
언약과 연관해서 나타났을 때 이것은 이사야 9장에 보면 여호와 이름의 하나의 특징을 가지고 여호와의 열심이라고 하는데. 여호와의 열심. 목회자들의 제일 큰 시험거리는 뭐냐하면 자기가 열심히 기도하고 연구하고 심방하고 노력한 대가만큼 교회가 활성화되지 않는다는 여기에 제일 큰 시험이 있습니다. 열심히 노력을 했는데 교회가 복음에든지 말씀에 활성화되지 않을 때 복음이 좋아요 복음이 좋아요라고 활성화되지 않고 아침부터 교회에 찡그려서 와 가지고 끝까지 찡그리고 집에 가는 거예요. 그럼 누가 열이 나는가. 목사만 열내는 거예요. 열낼 수밖에 없죠. 찡그린 거 다 깨울려고 하니까 열낼 수밖에 없잖아요.
그럴때 제일 큰 시험이 뭐냐하면 바로 주의 이름이 지금 주님이 부지런히 하고 있는데 주님이 나한테 허락도 안 받고 건져낼 자 건져내고 제거할 자 제거 다 하시는데 이 목사가 믿음이 없어가지고 내가 열심히 일하는 내 기대치만큼 거꾸로 교회가 꽉 죽어있고 전부 다 답답하고 성경책 가져오지도 않고 와 가지고 뒤에 있는 성경책부터 다 챙기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교회놓고 다니고. 집에서 성경 안본다는 이말이거든요. 가르치지 마라, 당신 십자가만 이야기하고 나한테 가르치지 마라 이런 뜻이거든요. 그리곤 떡 앉아가지고 휴대폰 꺼내고 있다가 전화받으러 나가고 도대체 정신을 어디에 파는지 설교흐름 다 깨지게 만들고 이런다고요. 그럴때 주여 토요일 밤새가면서 설교준비했는데, 이래가고 설교 30분넘어가면 저쪽 할머니부터 졸기 시작하죠. 여름에는. 특히 촌교회. 장로님 기도할 때 다 자버려요. 자다가 축도할 때 일어나잖아요. 도대체 내가 그 동안 열심히 심령을 깨우소서, 영적 눈을 떠게 해주소서 하는 것도 소용없고 아무 소용이 없는 거예요. 이게 뭐냐하면 그 목사가 착각하고 있는 겁니다.
그 사람들 주께서 열심을 다 해서 천국에서 제거하는 작업중이에요. 주님께서 제거하는 것도 주의 열심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목회자들이 몰라요. 탈락을 시키는 것이 얼마나 큰 열심인지, 공들여야 탈락되는 거예요. 그것도 모르고 자기 교인 숫자가 많아야 자기 보람인 줄 알고 있습니다. 이게 바로 여호와 이름입니다. 이근호라는 이름을 꺾어버리고 누구 아무개 목회자의 이름을 부서버리고 죽여버리는 지금도 살아계신 여호와 이름의 특징입니다.
그걸 모세를 통해서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을 통해서, 애굽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모세는 안 할려고 그랬습니다. 안 할려고 그랬습니다. 왜냐하면 모세에게는 자기 일이 아니었거든요. 모세는 자기 딴에 열심히 할려고 했어요. 애굽사람을 쳐죽이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백성의 자존심과 위신을 고려해서 어이 우리같은 형제끼리 우리 싸워서 되겠느냐하고 서로 화목시킬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말짱 소용없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삐쳐서 도망갔습니다. 도망가가지고 어디갔는냐. 양무리치는데 가서 모든 것 다 잊어버리고 모든 계획이고 다 잊어버리고 이제는 그야말로 우연자로서 안개로서 그냥 있는거예요. 언약이고 뭐고. 그런데 그런 가운데 하나님께서 찾아와서 하는 말이, 그 말이 평소에 모세가 생각하는 그것과 전혀 달라요. 그래서 모세가 그 이야기에 또 삐칩니다. 저는 말을 못합니다. 말을 못하기 때문에 딴 사람보내소서 저는 안 갈랍니다.
그래서 키에르케고르는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무신론자가 아니면 신자가 아니라 그랬어요. 한번이라도 무신론자가 되어보지 않은 사람은 결코 신자라고 이야기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신을 아는 사람이 유신론자이잖아요. 신을 아는 유신론자가 성도가 된 지금. 왜냐하면 성경에 보면 항상 유신론자는 하나님께서 뭘로 만들어놓고? 무신론자로 만들어놓고 일단 무신론자가 된 상태에서 그 다음에 하나님 자기 일에다가 집어넣어서 성도되게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키에르케고르가 루터에서 붕 뛰었다고 할 수 있죠. 성경 전체가 그래요. 성경 전체가 다 그래요. 모세는 하나님 일에 항상 틈만 나면 발을 빼려했습니다. 광야에서 조금이라도 말썽이 있으면 모세가 뭐라는 줄 압니까? 제가 어떻게 제가 어떤 능력이 있다고 이 많은 백성을 저에게 맞겼습니까? 저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차라리 저를 죽이소서. 이렇게 맨날 삐치는 거예요. 그리고 반석을 가리키라고 했는데 성질나서 반석을 두 번 쳐버리잖요. 그리고 모든 불평은 자기한테 다 쏠리고.
이게 욥에도 나와요. 욥기에도 앞뒤가 안맞는게 뭐냐하면 분명히 마귀가 이야기했습니다. 욥이 원망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뭐라고 하셨습니까. 욥은 결코 원망안한다 했잖아요. 욥기 보세요. 원망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했잖아요. 욥기 가지고 새벽기도 강해를 하면 중간에 가면 당황스럽기 짝이 없죠. 분명히 초반에 욥은 절대로 원망 안합니다해놓고 그 본문에 욥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렇게 나오니까 성경 어떻게 해석해야 될지. 무신론자를 만드는데 왜 인간을 그렇게 만드느냐하면 인간 속에 무엇이 있기 때문에. 인간의 이름이 있기 때문에. 인간의 이름을 무신론으로 만들어줘야 여기에 하나님의 이름의, 맹세의 의한, 언약에 의한 창조가 여기에 발현됩니다.
이미 죽은 자, 사도 바울처럼 사울일 때처럼 이미 핍박하는 자, 예수님을 공박하는 자, 죽은 이름이 되어야 거기에 순수하게 여호와 이름만을 높일 수 있는 그러한 그릇이 되는 겁니다. 여기에 귀한 그릇, 천한 그릇 나오는 거예요. 그릇이라는 것은 담는 거예요. 담는 기능입니다. 그릇이라는 것은 자기가 채우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주는 대로 담는 그릇이에요. 하나님의 이름을 채운다는 것은 그 이름 앞에 우리는 철저하게 무신론자가 되어야 되요. 안 할려고 했는데 왜 자꾸 따라옵니까 이렇게 되어야 되요.
바로 그 이름, 주의 이름에 의해서 앞으로 성경해석을 다시 쭉 해봅시다. 그래보면 여호와 이름이 투입되는 곳에 남들 치기 전에 왜 자기 백성을 치고 다른 이방나라인 아람이나 바벨론치기 전에 왜 자기 나라 유다 이스라엘을 부수는가. 왜 심판이 하나님의 집부터 심판이 개시되는가. 그것은 전부 다 주의 이름만을 높이기 위해서 자기 이름, 인간의 이름을 부수는 그 작업이 지금도 계속 되는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십자가를 가지고 일하시는 주님과 자신의 수고로움가지고 버티는 우리와 이름의 차이, 명백한 차이인 줄 압니다. 어찌했든간에 우리 이름을 빛내고 내 위신을 챙기려는 우리의 간악한 육신적인 생각이 앞으로 주의 이름의 십자가의 능력에 의해서 날마다 부서지고 죽어져서 그 죽은 우리속에서 그리스도의 생명만 나타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손하진 성도님 녹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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