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서울 경기(의존교회) 양자, 성화 1-2
Re..서울 경기(의존교회) 양자, 성화 1-2
이름 : 이장우(IP:)
05 서울 경기(의존교회) 양자, 성화 1-2
05. 12. 12 강의 이근호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합니다. 지난 시간에 십자가 사건이 무엇이라고 하였지요? 십자가 사건이란 십자가 밑에 모든 신성한 것, 거룩한 것들을 전부다 모조리 깨어버린 것입니다. 이 세상에 신성한 것들을 가라는 것입니다. 어떤 것도 거룩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온 것이 아니라 땅에서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땅에 것만 생각하고 나는 하늘의 것만 생각하는구나! 그러니 기껏 땅의 것을 만들어 가지고 거룩하고 신성하다고 이 성전이 거룩하다고 이것을 헐어버려라 내가 진짜 신성한 성전을 3일 만에 다시 짓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기도하는 집을 3일 만에 짓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은 그 집은 부동산이나 건축물이 아닙니다. 건축물은 3일 만에 짓지 못합니다. 그것도 모르고 그 당시 유대인들은 성전을 거룩한 건축물로 생각하였기에, 예수님이 3일 만에 성전을 짓는다고 우리는 46년 만에 지었는데 3일 만에 지을 수 있느냐는 그런 오해가 십자가에 까지 따라옵니다.
십자가형에 처하라는 고소가 무엇인가 하면, 성전을 헐고 3일 만에 짓는 자라고 고소하여 십자가에서 죽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였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자기들의 죄인인 것을 모르고 자기들에게서 거룩하고 고상하고 신성하고 위대하다고 여기는 것들을 근거로 해서 그기에 비하여 예수님은 모자라고 부족하기에 저런 인간은 죽어야 한다고 외쳐서 죽은 사건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따라서 십자가 사건을 가지고 다시 세상을 조명해 보면, 사람들이 이것은 거룩하다. 이것은 신성하다. 이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하나님의 뜻이다. 이것은 의로운 것이다. 라고 우긴 것 때문에 십자가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사건을 가지고 도로 그 쪽을 바라본다는 것은, 사람들이 끄집어내는 모든 거룩한 것은 십자가의 원수이며 하나님의 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거룩하고 깨끗한 것을 끄집어 낸 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정도가 아니라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려버리고 하나님의 일을 망쳐 버리고 훼방하는 적 그리스도적이요 악마적인 최후의 모습들이 신성한 것들을 찾는 그 모습들입니다.
그런데 세계의 교회는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님께서 뭉개어버린 그것을 다시 신성한 포장지로 바꾸어서 온갖 이 세상의 더러운 것들을 다 끄집어내어서 그 더러운 것을 거룩한 것으로 바꾸어서 그것을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주워 모아서 그 기독교 없이는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그렇게 사기극을 쳐 온 것입니다. 거짓말 해 온 것입니다.
그러면 아들이 된다는 발판이나 바탕은 없는 것입니까? 없습니다. 그러면 아들이 될 수가 없겠네요! 아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들이 있는데 뭘 또 다른 아들이 필요한 것입니까? 보세요!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내 입장을 생각한 것입니다.
어떤 재벌가정에 아버지가 있고 재벌 2세인 아들이 엄연히 있는데 어떤 이상한 놈이 와가지고 재벌님 저도 아들 되게 해 주세요! 저도 상속자 되게 해 달라고 한다면, 나에게 상속할 아들이 있다고 하면서 그 사람을 좇아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간이 아들 된다는 것은 예수님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 밖에 없다고 해서 하나님이 슬퍼하시거나 섭섭해 하시지 않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하나님은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들다운 아들만 원해야 하나님답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내 아들을 보라! 내 기뻐하는 자를 보라! 그리고 모든 만물들아 내가 좋아하는 그 아들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면 그것이 나의 영광이다. 이걸로 모든 일은 종결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영광과 기쁨은 예수님으로 인하여 종결된 것입니다.
자 그러면, 첫 번째 양자 됨이란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그 누구도 아들이 결단코 될 수가 없었다. 하는 첫 번째 이야기를 지금까지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들 속에서 가짜 하나님 가짜 아버지를 자꾸 만들어 내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의 어떤 여성 신학자들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하지 말고 하늘에 계신 어머니라고 해야 한다고 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어머니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아버지라고 하게 되었는가 하면, 그 당시 로마시대에 아버지만 가장이 되고 어머니는 안 되기에 그렇게 되었는데 요즈음은 시대가 바뀌어서 하늘에 계신 어머니라고 하여도 무방하다고 그것을 새로운 신학이라고 선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까 제가 이야기를 하였지요! 예수님께서 아버지라고 하신 것은 무슨 뜻이라고 하였습니까? 어느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를 자격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왜? 율법에 의하면 저주를 받을 자이기에 감히 율법을 이루지도 못한 주제에 어디에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입니까? 율법의 저촉을 받는 자는 종이지 아들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주었다는 말은 이미 아들이 아니라 육신에 속하였고 종에 속하였고 죄의 종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하여 율법을 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 아래 있는 인간은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아들 될 생각을 아예 먹지 마세요! 어떤 인간도 율법에 안 속한 사람이 없고 어떤 인간도 율법에 안 속한 인간이 없습니다. 이것이 첫 번 째입니다.
그런데 로마서 8장에 보니까,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등장한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무슨 영이라고 합니까? 양자의 영이라고 합니다. 양자의 영을 받았기에 아바 아버지라고 합니다. 아바 아버지라는 말은 친 아버지라는 말입니다. 아바란 친아버지를 말합니다. 아바 그룹이라고 옛날에 호주의 그룹을 알지요! 아바란 말은 자기 아버지를 친근하게 부를 때에 아바 아빠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분은 누구 밖에 없는가 하면 진짜 아들 되시는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에 평소에 아바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경상도 말로 하면 아버지예 이렇게 됩니다. 예수님만이 부를 수 있는 아바 아버지의 그 마음을 누구에게 집어 넣어주는가 하면, 예수님이 머리가 되고 그 몸을 이루는 많은 지체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몸을 구성하기 위하여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을 특정 사람들에게 성령을 통하여 집어 넣어주신 것입니다. 무엇하라고? 예수님의 자기 몸을 이루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몸은? 이제 우리 몸은 없습니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입니다. 사나 죽으나 주의 몸입니다. 우리 몸은 없습니다. 몸도 하나이요.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입니다.
예수님의 몸을 이루기 위하여 한 성령으로 마시게 하여 그 성령이 오게 되면 직업과 나이와 상관없이 예수님의 몸이 되며 그 예수님의 몸을 이루는 전체 사람들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진짜 아버지를 부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과 예수님의 몸에 대한 관계를 성경에서 형제라고 부릅니다.
그 형제라는 말이 히브리서 2:11-12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 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내가 그들을 형제라 부르기에 부끄러워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세상적으로 봐서는 절대로 형제라고 간주 안할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세상적으로 봐서는 주님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라면 어떤 경우에도 내 동생이라고 부를 수 없는 그런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봐서 우리가 잘나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세상적으로 봐서는 저 같은 사람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가 없습니다. 왜? 하나님의 법에 의해서 우리는 온유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위에서 설교하신 말씀 중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온유하니 너희도 온유 하라.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들은 온전하게 되어야 한다. 세상에 온전하게 된다는 말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십니까? 내 말을 듣고 다 지키지 아니하면 모래위에 지은 집처럼 무너진다고 하였습니다. 먹을 것과 마실 것에 대하여 염려하면 그 사람도 안 됩니다. 원수를 미워하는 사람도 안 됩니다.
예수님은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너에게 잘해 주는 사람에게 잘해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그 은혜를 되갚을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야 하늘나라의 상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 장난이 아닙니다. 정말 어렵습니다.
그보다 더 어려운 것은 나를 따르고자 하는 자는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 나누어 주고 빈털터리가 되어서 나를 따르라고 한 것입니다. 그렇게 따른 사람 손들어 보세요! 그렇게 따른 사람 아무도 없지요! 그렇다면 그렇게 따르고 싶은 사람 손들어 보세요! 얼른 내려야지요! 없어요! 아무도 없습니다.
영생을 얻는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테레사 수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되지를 못했습니다. 슈바이처도 그렇게 되지를 못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은 정말 천국은커녕 지옥가도 맞습니다. 마땅합니다. 지옥을 천 번을 더 가도 마땅합니다. 하는 고백을 할 수밖에 없는 정도로 평소에 부끄럽게 살아가는 자들이 바로 너희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해도 이렇게 부끄러운 자들인데 주님께서 이런 부끄러운 우리를 부끄럽게 여기지 아니하시고 감히 너희는 내 형제라고 불러주시는 은총, 그 은총사이에 무엇이 있습니까? 제가 크게 쓰겠습니다. 고난입니다. 이것이 히브리서 2장에서 말하는 고난입니다.
여러분들이 예수님의 아픔 때문에 울어본 적이 있습니까? 돈 사기 당해서 울어본 적은 있을 것입니다. 아이들 공부 안 해서 성적 떨어져서 울어본 적은 많을 것입니다. 주여! 성적 올라가게 기도하였는데 이 기도가 허사로 끝났습니다. 40명 중에 39등 했으니 예수님 믿는 애가 이럴 수가 있습니까? 부끄럽습니다. 살아야 합니까? 죽어야 합니까? 하면서 통곡하며 울어본 경험이 있을 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님 때문에 울어본 적이 언제입니까?
십 오년 전입니까? 예수님 때문에 나 같이 철없고 나 같이 죄 많은 인간을 위해서 내가 당할 고생을 다 당하시고 채찍에 맞았다는 그 사실로 인하여 미안스럽고 그 예수님께 누가 된다는 것 때문에 너무나 죄송해서 울어보신 적이 언젯적 경험입니까?
그래놓고도 IMF 터졌다고 짜증내고, 비정규직이라고 데모하고, 수당 안 나온다고 삐지고, 휴가 안준다고 뭐라고, 다방에서 커피 맛없다고 짜증내고, 차타고 가다가 퍼졌다고 신경질 내고, 목사님 축복이야기 적게 낸다고 짜증내고, 목사는 헌금 적게나온다고 화내고, 그 모든 것이 결국 무엇이냐 하면, 자기 신성화, 예수 잘 믿는 나를 왜 위대하게 하지 못합니까? 하는 자기 신성화의 옛 버릇이 되살아나서 일어난 현상이지 언제 예수님께서 부끄럽기 짝이 없는 창기와 세리 같은 나 같은 죄인을 위해 고난 받으신 것에 대해 죄송스러워 눈물 흘려본 적이 언제입니까?
그런 일이 한두 번이나 있었습니까? 그런 일이 있었다면 축하드립니다. 예수님의 아픔 때문에 울지를 않습니다. 일반교회에서는 금요철야를 합니다. 여기서는 하는지 모르겠는데 커피 마셔 가면서 철야 기도를 하는데 그 철야기도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런데 고린도전서 13장에 보시면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에 대하여 우리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에게 보내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금요철야 하면서 무엇을 구하고 있습니까?
주님이여 더 이상 나의 유익을 구하지 않게 하옵소서! 이것 때문에 철야하신다면 정말 훌륭하시고 대단한교회입니다. 그런 교회도 가끔 있겠지요! 하지만 제가 알기로는 대다수의 철야하는 사람들은 결코 우리 가정과 우리 교회와 나의 이익을 위해서 살지 않도록 그러한 욕망을 꺾기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기도하는 것 보이지 않습니까? 주님이시여! 제 기도하는 것 응답하시고 우리 가정에 이익이 되도록 놀랍도록 마음껏 능력을 발휘하여 주옵소서! 아마 그것 때문에 떼를 쓰는 것이 철야기도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 있는 애들이 자기 부모에게 떼를 쓸 때에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고 떼를 쓰는 애 봤습니까? 어린이 여러분들 그래요? 엄마 엄마 이제부터는 엄마 말 잘 들을게 하면서 울어본 적이 있어요! 엄마 돈 좀 줘! 하면서 떼를 쓰고 아이스크림 사달라고 떼를 쓰지 않았습니까?
다시 이야기 합니다. 양자라는 것은 왜 우리가 정식 아들이 될 수 없었던 가를 묵묵히 두고두고 되새기게 하는 한가지와 두 번째로 우리가 아들이라면 그것은 우리 공로가 아니라 천박하기 짝이 없는 우리를 아들이라고 해 주시고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귀한 목숨을 아낌없이 우리가 받을 저주대신 자신의 목숨을 대신 던져서 우리로 하여금 저주가 오지 않도록 커버해 주신 그 공로로 아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때는 어떤 의미를 담고 불러야 하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예수님이 아니었다면 저는 결단코 주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면서 주님의 고난에 대하여 고마워하고 감사하고 아파하는 그런 마음이 내장되어 있을 때에, 그런 마음으로 아바 아버지라고 여러분들이 부르시기를 바랍니다.
성령님께서는 십자가의 공로로 빼놓고 이야기하는 성령님은 없습니다. 성령님께서 일하실 때에는 반드시 예수님의 공로를 앞장세우시고 일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양자가 되었다는 것은 절대로 너는 아들이 될 수 없었다. 너는 저 자신의 신성함과 잘난 것을 빼놓고서 무슨 관심이 있었더냐?
그런데도 예수님 때문에, 정말 부끄러운 자이기에 부끄러워서 구석에 숨고 싶은데 예수님께서 후레쉬 들고 쥐새끼 찾듯이 찾아 오셔서 어이 빨리나와! 내가 너의 운명과 팔자를 다 고쳐놓았어! 빨리나와! 너는 나의 형제야! 한 몸이야! 빨리나와! 부끄러워하지 말고 하면서 불러내시는 것입니다.
좀 등신 같지요! 바보 같지요! 창세기 3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눈이 밝아져서 자기 몸을 볼 때에 자기의 부끄러움을 알았습니다. 눈이 밝아져서 자기의 부끄러움을 알았습니다. 그러면 눈이 안 밝아졌으면 그냥 벌거벗은 그 자체가 아름답고 좋았겠지요!
그런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고 좋았던 그것이 선악과 따먹고 눈이 밝아지고 나서 보니 부끄러운 것입니다. 왜? 자신의 신성함은 신성함대로 유지되면서 자신의 부끄러움은 부끄러운 대로 새어나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성함을 유지하기 위하여 부끄러움을 가려버리는 것입니다. 그것도 대충 가려버립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오셔서 그 무화과 나뭇잎의 치마를 벗겨버리시고 양을 잡아 양 가죽옷으로 입히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수치를 가려주지 아니하시면 하나님께서 부끄러움을 해소하여 주시지 아니하시면 어떤 인간도 하나님과 동행하여 살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사실입니다. 어떤 철학자에게도 물어보십시오! 당신이 벌거벗으면 왜 부끄럽습니까? 그거에 대하여 해답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성경을 모르면 왜 당신이 벌거벗고 세상을 돌아다니면 부끄럽습니까? 물어보면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정답은 무엇입니까? 선악과 따먹고 눈이 밝아졌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습니다. 눈이 밝아졌다는 것은 이제 내 인생은 내가 관리해야 하고 내 인생은 내가 인도하고 내가 책임져야 하고 내가 잘되고 못되는 것은 순전히 내 손에 달려있다고 하는 그런 사고방식으로 무장되어 있기에 자기를 보니 부끄러운 것입니다.
처음에 아담은 하나님께 맡겨진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는 독립적인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 모든 인간이 독립적인 존재를 마치 위대하게 진화된 인간으로 여깁니다. 그 독립된 존재가 된 것이 과학의 발전이고 진화이고 철학의 발전이고 문명의 발전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것 다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제발 바보와 등신이 되십시오! 주님 앞에서, 주님 같은 바보가 어디에 있습니까? 자기 목숨조처 덜렁 주어버리고, 그러나 진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원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 삼킨바 되고, 예수 없으면 나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가 없다면 나는 희망이 없다는 것을 명심하고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할 때마다 왠지 부끄럽고 고맙고 감사한 마음이 드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예수님과 한 형제이며 그리스도의 몸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양자입니다.
이것으로 한 시간 넘게 한 양자에 대하여 끝내겠습니다.
그 다음 차례가 무어냐 그 다음차례 성화입니다. 그 다음차례라고 하면 양자에 대하여 다 잊으니 다시 한번 당부합니다. 우리가 양자 된 것은 예수님의 고난으로 부끄럽기 짝이 없는 우리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받아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바보가 되어가지고 자기 자신에 대하여 부끄럽게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부끄럽게 여기지 아니하시고 받아 주셨다면 자기 자신에 대하여서도 너무 똑똑하게 굴거나 명철하게 굴지 마시고 좀 어설퍼지세요! 제 아는 사람 중에서 아주 명석한 사람이 있는데 지금 삼수합니다. 어려서부터 자칭 천재입니다. 컴퓨터를 해도 상을 타고 뭐를 해도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똑똑한데 학력고사 시험을 치면 자기 원하는 점수가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또 재수 한 것입니다. 올해가 삼수입니다. 마음에 차지를 않는 것입니다. 자기가 부끄러운 존재인줄 모르고 자기가 잘난 존재인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에게 높임을 받는 것은 하나님께 미움을 받는다고 합니다. 이런 말씀이 성경이 분명히 나와 있건만 오늘도 교회마다 금요 철야기도해서 자기 자식을 높은 사람 되고 해 달라고 무려 세 시간 네 시간 간절히 목이 쉬도록 기도하니 어떻게 그 간구를 마귀가 들어주지 않겠습니까?
기도할 때 아까 말한 것처럼 이렇게 기도하세요! 주님이시여! 주님의 아픔에 대하여 제가 솔직하게 마음 놓고 신나게 울어볼 수 있는 그런 사람 되게 해서 세상에 주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총임을 은은한 달빛도 찬란한 햇빛도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깨닫게 해 달라고, 아마 그 기도하는데 세 시간 네 시간 해도 모자라고 밤 새도록 해도 모자랄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안 들겠지만 성령이 역사하시면 그런 기도가 되고 양자의 양자다움이 나올 것입니다.
양자를 끝내면서 하나 더 당부하고 싶은 것은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그 많은 신앙인들이 끝에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것이 나옵니다. 톱에 켜임을 받았고 광야에서 유리함을 당하였습니다. 그러함에도 그들을 세상이 감당치 못할 정도로 믿음으로 버텼습니다.
그걸 보면서 오늘날 교회가 자기 자신을 너무 신성시 하지 않았는가 하는 반성이 되네요! 여기서 더 하면 잔소리 되니까 뚝! 잔소리 그치고 이번에는 성화에 대하여 하겠습니다.
성화-
성화에 대하여서 두 가지 다른 뜻이 있습니다. 첫 번째 뜻과 두 번째 뜻이 있습니다. 이것을 혼동하면 안 됩니다. 첫 번째 뜻은 ‘거룩하게 되었음’ 이라는 뜻이 있고 두 번째 뜻은 ‘점차 거룩한 생활을 하게 됨’ 이 두 번째 뜻이 있습니다.
첫 번째 거룩하게 되었음이란 히브리서 10:10절에 나와 있습니다. 강의를 하다보면 내가 너무 나무라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여러분의 분위기가 가라앉는 것 같기도 한데 여러분만 강의를 듣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20년 30년 후배들도 들을 수 있기에 여러분이 잔소리 같아도 좀 인내하여 주시고 참아주시기 바랍니다.
이왕 나무라는 김에 더 나무라면 속도 시원한 것입니다. 저만 시원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도 시원한 것입니다. 아주 바닥을 긁어내어야 합니다. 찝찝하게 남겨두면 안 됩니다.
히브리서 10:10절에 보면,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여기서 거룩이란 어떤 상품 같습니다. 박스에 포장이 되어서 물체 같아서 받아 챙기면 그것으로 거룩 끝, 상황종료가 되는 것처럼 얻어 챙긴 것이 되는 것입니다. 얻었다는 것입니다.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 첫 번째 뜻으로 거룩함이란 변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변했어! 어떻게 변했어? 우리는 거룩한 사람이 되었어! 이것이 거룩함의 첫 번째 의미입니다. 앞으로 나의 신상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어떠한 타락과 방탕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과 상관없이 이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룩함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것을 그림으로 그리면 이렇습니다. 우리 이 강의를 잘 듣는 사람 중에 한 사람이 광주에 계시는 어떤 집사님이 계시는데 그 집사님이 부러워하는 것이 무어냐 하면 강의는 잘 들리는데 그것을 그림으로 한번 그려 볼까요! 하면 그것이 그렇게 부럽다는 것입니다.
자 잘 보세요! 그림을 그려 보겠습니다. 거룩이라는 고무풍선 안에 우리가 이미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방팔방 날아오는 것이 무엇입니까? 거룩이 날아오지요! 우리는 거룩이 안 된 상태인데 날아오는 그 거룩을 안 받고 배길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거룩이 계속 날아오는 것입니다. 거룩! 거룩! 하면서 거룩 됨! 거룩 됨! 하면서 날아오는 것입니다.
이 거룩 됨이 무엇이냐는 조금 있다가 말씀드리겠는데 어쨌든 여러분이 아셔야 할 것은 우리가 예수님 안에 놓여 있기에 이 거룩함이라는 화살을 피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가슴에 배에 어깨에 거룩함의 화살이 막 박히는 것입니다. 거룩함의 화살이 마구 날아와 꽂히는 것입니다. 이 동네가 무슨 동네인가 하면 예수님이 활동하는 동네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활동영역이기에 거룩을 거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미 거룩함이 되러 버렸고 예수 안에서 거룩함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번 거룩을 안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믿지를 않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하면 기존의 교회에서 대부분 1번 거룩을 지워버리고 감추어 버립니다. 이상하지요! 심지어 개신교가 성경대로 가르친다고 하면서도 히브리서 10:10절을 이야기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말하지 않고 무슨 거룩을 이야기 하는가 하면 2번 거룩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점차 거룩한 생활을 하게 됨’ 이것을 가지고 거룩이라고 하게 된 것입니다. 칼빈도 이야기 하고 루터도 이야기 하고 교회사에서 유명하다는 사람들 전부다 이것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점차점차 거룩한 생활을 하게 된다고 이야기하는데 여기에 대하여 반대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자크 엘룰이라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뒤틀려진 기독교라는 책에서 무엇이라고 하는가 하면, 점차 거룩하게 됨이라는 이것이 어디에서 나왔는가 하면, 이것은 고대 철학에서 나온 사고방식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속성과 본질에서 나온 것이지 이것은 기독교가 아니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복음이 아니고 고대 철학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언제 점차 거룩하여 진다고 언제 이야기 한 적이 있는가? 예수님과 사도바울이 그렇게 말한 적이 성경 전체에서 한 대목도 없다는 것입니다. 점차 거룩해 진다는 것은 성경전체에 한 대목도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자크 엘룰에 대하여 그 사람이 어떤 마음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였는지 잠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부터 약 3분간 이야기 할 것은 자크 엘룰에 관한 이야기이기에 여러분이 귀담아 들어보세요! 이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사람들이 선이라고 여기는 것은 선악과를 따 먹고 난 뒤에 이미 자기가 악이 되었지요! 선악과를 따 먹는 자체가 악이잖아요! 이 논리를 잘 들으세요! 나중에 속았다 하지마시고 들을 때 잘 들으세요!
선악과 따 먹은 자체가 죄이지요! 맞지요! 그렇다면 선악과 따먹고 나서 눈이 밝아진 것이 죄의 결과지요! 눈이 밝아졌다는 것은 부끄러움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니 선과 악을 구분 했다는 자체가 죄를 지은 결과가 맞지요! 자크 엘룰은 말하기를 선과 악을 나눈다는 그 자체가 악인데 저가 무슨 자격으로 점차 거룩한 생활을 하게 되는가 하는 말입니다.
무슨 점차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제 이야기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으면 차츰 차츰 죄인 됩니까? 아니지요! 선악과를 따 먹은 그 자체가 너는 이미 죄인이라는 신분이 되고 말았습니다. 점차 점차가 하나님 앞에서는 없지요! 아까 히브리서에서 뭐라고 하였습니까? 예수님을 믿음으로 거룩함을 얻는데 그것도 단번에 얻은 것입니다.
한번 실패하고 두세 번에 걸쳐서 하신 것이 아니라 단번에 이루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점차 점차가 빠진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인가 하면 아담이 죄 지을 때 로마서 5장에 나옵니다. 아담이 죄를 지을 때에 점차 점차 죄를 지은 것이 아니고 단번에 죄가 아담을 지배했고 아담의 후손도 지배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십자가 지심으로 모든 율법을 이루셨을 때에 그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점차 점차 의인 되는 것이 아니라 단번에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점차 점차는 어디에서 생겼는가 하면 이미 선악과를 따 먹었기 때문에 선과 악의 괴리, 선과 악이 괴리되어 있기에 악에서 멀어져서 점차 점차 나아지겠다는 선을 하나의 목표점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에게 선이 하나의 목표점이 될 때에 점차 점차가 성립됩니다.
이래도 모르고 저래도 모르고 오늘 제일 어려운 이야기를 해봅니다. 제가 어떤 사람을 사랑합니다. 그러면 간 내주고 쓸개 내주고 다 합니다. 왜? 사랑하게 되면 남에게 내어주는 그 자체가 희열이고 행복입니다. 나에게 남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하는 사람이 그것을 받고 픽 하면서 돌아섰다고 하면 내가 그 사람에게 간 내주고 쓸개내주고 다 내어주었으니 아무것도 없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몇 시간 지니자 않아서 다시 다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있는 것 없는 것 다 내어준다는 것이 거짓말이 되었지요!
사실은 거짓말 한 것이 아니고 사랑할 때는 다 내어줍니다. 다 내어주는데 이상하게 인간은 무엇을 모르는가 하면 다 내어 주었다고 생각하는데 이상하게 밑에서 또 무언가 차 올라오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라캉이라는 사람이 대문자 X로 표현합니다.
그림으로 그려보겠습니다. 그림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약 오르겠지만 할 수 없고 그림으로 그려보겠습니다. 사람들은 삽을 가지고 흙을 팝니다. 낑낑 되면서 동굴을 파 들어갑니다. 어떤 사람이 묻습니다. 당신은 왜 이 동굴을 팝니까? 막혔으니까 판다고 합니다. 누가 파라고 하더냐? 무언가 미지의 X가 자기를 당기고 있습니다. 더 파야지! 더 파야지! 하면서 계속 파라는 것입니다.
요게 무언가 하면 도박일 수도 있고, 술일 수도 있고, 여자 일수도 있고, 심지어 이것이 기도일 수도 있고, 전도일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성경공부도 될 수 있습니다. 무언가 앞에 막힌 것이 있으니까! 그 막힌 것을 판다고 파는데, 나는 이것을 한 오 분 동안 판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 분 동안 파면 또 막혀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낚시 일수 있습니다. 경마일 수도 있습니다.
이쯤 하면 내가 도사 일거야! 컴퓨터 게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쯤 하면 도사일 거야야 하고 들어 가보면 도사가 또 있는 것입니다. 바둑도 마찬가지 압니다. 사람은 무언가 미지의 X가 있어 가지고 자꾸만 나를 잡아 당기는 것입니다. 이만 하면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더 파야지 더 파야지!
이것이 직장일 수도 있습니다. 무언가 완벽하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화론 할 때에 할 것입니다. 더 완벽해야지 더 착해야지 하루에 성경 석장씩 일었는데 내일부터 다섯 장씩 일어야지! 기도 두 시간 했는데 세 시간 해야지! 자꾸 파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을 라깡이라는 사람이 미지의 X라고 한 것입니다. 미지의 X가 무언지 모르지만 모든 인간에게 다 있는데 직장 따라 사람 따라 성향 따라 환경 따라 다를 뿐이지 다 있다는 것입니다. 황우석 교수가 인간복제를 안한 다구요! 그것은 지금까지의 이야기이고 만약에 원숭이 복제되고 다 복제되면 반드시 더 파게 되어 있습니다. 왜? 미지의 X가 자기를 잡아당기는 것입니다.
라깡이라든가 프로이드라는 사람들은 세계의 모든 학문을 섭렵한 철학자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미지의 X가 무엇인지 그렇게 연구하고 연구하여도 그것이 무언지 몰라요! 이제 제가 그 미지의 X가 무엇인지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모든 종교든 무엇이든 심지어 축구든 배구든 간에 끊임없이 계속하여 막다른 것이 다가오고 그것을 넘어가면 또 다가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문제들을 또 파게 만들고 또 파게 만드는 것입니다. 철학자들은 철학을 하면서, 철학이 무엇입니까? 필로소피아, 진리를 사랑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무언가 진리를 사랑하였다면 그 사랑의 대상이 진리라는 것을 내 놓아야 하는데 그 진리를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지의 X인 것입니다. 결국 나는 모르겠다는 것이 진리입니다.
그 미지의 X 무언인가를 지금부터 알려드리겠습니다. 오른 여러분 잘 오신 거예요^^! 미지의 X가 무언가 하면, 사람들은 선악과 따 먹고 난 뒤에 내가 무언가를 파면 파는 것만큼 무언가 진리에 가까이 가게 된다는 착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위에서 하나님께서 들여다보시니 인간의 모든 신체와 환경이 이미 어디에 갇혀있는 말뚝에 매여 있는 꼴입니다.
마치 개를 말뚝에 묶어 놓으면 동쪽에 갔다가 서쪽에 갔다가 하면서 자신은 자유롭게 다니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주님께서 보시면 너는 그렇게 백날 해도 뺑뺑이 도는 것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말뚝에 박혀 있다는 것입니다. 해아래 새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어디에 갇혀있다는 우물이나 동굴에 갇혀있다는 이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 못하는가 하면 인간은 선악과를 따 먹었기 때문에 선과 악이 선과 악이 같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선과 악을 벌려 놓는 것입니다. 이 선이 무언가 하면 진선미입니다.
이것도 어렵지요! 진선미라는 것은 참되고 선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것은 진리의 대체물인 것입니다. 인간들이 진리를 찾을 때에 참되고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참되다는 것은 3+5=8인데 7이 된다면 마음이 어때요? 무언가 기분이 나쁘지요!
우리나라 조선시대 때에 장군 중에서 왜군하고 싸우다가 총탄에 맞아 죽으면서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하신 분이 누구냐 하면 그 사람이 을지문덕입니다. 이 말이 굉장히 기분이 나쁘지요! 그 분이 누구입니까? 이순신 장군이지요! 이순신 장군인데 제가 을지문덕이라고 하니 굉장히 기분이 나쁘지요!
기분이 나쁠 때에 목사님! 을지문덕이 아니고 이순신입니다. 할 때에 을지문덕이 나쁜 것이고 죄악된 것이고 이순신은 어디에 가까운 것입니까? 진짜 참된 진리에 가깝지요! 나중에 보니 이순신 옆에 있던 부관이 한 말을 가지고 그것을 이순신이 한 것처럼 미화한다고 사기 친 것을 모르고-그런 것이 있다는 말이 아니라- 나중에 고고학자가 조사를 해보니 이순신이 말한 것이 아니라 이순신이 죽고 나서 그 죽음을 아름답게 미화하기 위하여 그렇게 사기 친 것이라고 하게 된다면 또다시 무엇이 됩니까? 진리를 다른데 있었구나!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지금 여기에 컵이 있습니다. 아름답습니까? 아름답지 않지요? 이것은 어떻습니까? 아름답지요! 그러면 아름답지 않은 것은 죄악에 가깝고 아름다운 것은 선과 가깝지요! 인간은 참되고 아름답고 선한 것을 추구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악한자라도 자기 자식에게는 나쁜 짓을 시키지 않습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은 도적질 하면서도 자기 자식에게는 도적질 하지 말라고 합니다. 물론 사정이 어려우면 자식을 앵벌이 시키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그것을 급할 때이고, 무언가 선에 대한 추구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착하여 보면, 나는 5미터만큼 착하게 되었다면 누가 나만큼 착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 그런데 6미터가 나옵니다. 그러면 다른데서 나는 7미터라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5미터인 사람은 졸지에 나는 착한 사람이 안 된다는 것이 됩니다. 덜 착한 사람이 되겠지요!
선과 악에서 상대적으로 밀리게 되면 그 사이에서 무엇이 생기는가 하면 결핍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 결핍이 생기게 되면 신성화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무언가 다른 사람들보다 나락에 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자신이 위대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을 무엇으로 메우는 것입니다. 그것을 선으로 메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바쁘면 다른 것으로 매우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미지의 X가, 진선미가 자꾸만 나를 당기는데 이 진선미라는 것이 어디서 생겼는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 진선미를 가지고 약을 올리는 자가 누구인가 하면 창세기 3:15절에 보면 그게 바로 뱀의 후손 악마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희 아비가 악마이고 너는 그 악마의 자식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창세기 3:15절에 보시면, 이 세상에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그 둘밖에 없습니다. 여자의 후손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 이외에 모든 아담의 후손은 죄의 종이고 뱀의 종인 것입니다. 율법의 종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3:15절은 예언입니다. 예언은 변경이 불가능합니다. 그 예언대로 성취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과정은 남아 있습니다. 모든 역사는 창세기 3:15절의 예언을 이어갑니다.
그것이 어디에 나오는가 하면 요한 계시록에 나옵니다. 요한계시록의 특징이 무엇인가 하면 성도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누가 다한 것입니까? 바다에서 나온 짐승과 하늘에 있는 어린 양, 짐승과 천사들이 싸우는 것입니다. 성도는 가만히 있다가 얻어맞고 가만히 있다가 목 달아나고 죽고 그랬습니다. 예수 믿고서 가만히 있다가 죽은 것을 무엇이라고 하는가 하면 첫 번째 부활이라고 합니다.
영생 얻는 것을 두 번째 부활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잘난 체 하더라도 예수 믿지 않는 자들은 첫 번째 사망이라고 합니다. 그 다음 영원한 지옥 불에 들어가는 것을 두 번째 사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점차 점차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하나님은 인간의 운명을 인간 손에 맡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상 나의 운명은 내 하기 나름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의 미래는 내가 채우기 나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식보도 열심히 공부하라고 합니다. 열심히 공부하라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진선미 그것을 획득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진선미는 악마가 해놓은 덫입니다. 악마나 해 놓은 면류관입니다. 그래서 목사들이 심방을 가서 기도하기를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큰 일군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말은 이 자식은 신성한 자식 만들어달라는 것입니다.
제가 첫 시간에 말씀드렸지요! 인간에게는 신성한 것이 없다. 무엇이 신성한 것을 다 부수어 버린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입니다. 십자가 사건 앞에서 어떤 신성한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 어느 것도 신성하지 않습니다.
미지의 X에서 어떤 인간들도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철학자들이 밝혀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말해서 죄로부터 못 벗어납니다. 그 죄가 무엇인가 하면 선악이 죄가 아니라 그 죄란 하나의 권세자입니다. 왜 선악과를 따 먹었어 이놈아! 선악과를 따 먹은 자체가 죄인 것입니다.
제가 방금 이렇게 말씀드리면 이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이렇게 공격합니다.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이 죄라고 어디에 적혀 있습니까? 성경에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성경이 엉터리라고 합니다. 불신자들은 성경 자체를 다 날려버리는 것입니다. 성경 자체를 다 거짓말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왜 벌거벗으면 부끄러워하는가? 몰라! 그러니 그들은 모르는 것이 진리인 것입니다. 이 모르는 것이 성경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 모른다는 것이 너무나 당당해서 성경 전체를 부정하여 버리는 것이 오늘날 우리가 속하여 있는 이 세상의 현황입니다. 가봐야 안다는 것입니다.
거지 나사로와 함께 죽은 부자의 이야기가 이와 같습니다. 부자가 아브라함에 말합니다. 지금 제 동생이 이렇게 지옥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나처럼 까불며 살고 있는데 어떻게 나사로를 부활시켜서 지옥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어서 지옥에 오지 못하게 하면 안 되겠습니까?
이렇게 말할 때에 아브라함이 말하기를 성경책이 있다는 것입니다. 모세와 예언자가 기록한 성경책이 있는데 이것을 믿지 않으면 죽었던 나사로가 부활하여 가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코앞에 있는 성경책 자체를 완벽한 하나님의 계시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에게 희망이 없습니다. 선악과 따 먹은 것이 왜 이유 없이 죄인가 하면, 이유 없이 죄 인줄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성화란 게 없어요! 점차 나아진다는 이런 성화는 없는 것입니다. 단번에 거룩함을 얻는 것이지 이런 성화는 없는 것입니다. 자끄엘룰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점차 나아진다는 것은 본인의 솔직한 표현인 것은 동의하지만, 그것이 진심이기에 동의는 하지만 진심이 진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진리는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선악과 따 먹은 것이 죄입니다. 이유 없이! 이것이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의인 되는 것 이것이 진리입니다. 이것 외에는 없습니다. 이 정도하면 계속 밀어붙여야 하는데 어떻게 할까요? 오 분 쉴까요? 오 분 쉬고 하겠습니다.
녹취 060607 이장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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