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존재란 무엇인가]-철학과 신학 허상 사리즈
[일반] [존재란 무엇인가]-철학과 신학 허상 사리즈
이름 : 이근호(IP:)
[ 존재란 무엇인가 ] E. 질송 저 정은해 역 서광사(서울: 2003)
‘존재란 질료와 형상 그리고 실존이 함께 구성해 낸 복합체’라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말하고 있다. 이것은 곧 실존적인 인간이 집요하게 매달리고 궁극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관심사가 ‘존재’에 있음을 고백하는 말이기도 하다.
존재란, 뭔가가 분명히 있다는 점을 경의로움으로 바라보아야 함을 요구하게 된다. 내가 있고 네가 있고 돌멩이가 있고, 또 저 들판에 풀이 있고 하늘에는 태양이 있다는 것이다. 뭔가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들이 하필이면 그것들만이 왜 꼭 있어야하는가 라는 의문점은 심오한 철학가가 아니더라도 존재자라면 누구나 다분히 품고 살아가게 된다.
우는 아이에게 젖을 먹이면서도 아기 엄마는 속으로 생각한다. “너는 왜 있어서 나에게 젖을 얻어먹고, 나는 왜 있어서 너에게 젖을 먹이게 되느냐”고. 만약이 평소에 이런 생각을 품고 있지 않는다면 우는 자기 자식에게 젖을 줄 리가 없다. “네가 뭔데 나에게 젖을 달라고 울며, 내가 나에게 뭔데 너에게 젖을 주어야 하는가. 모든 게 다 귀찮다”라는 식으로 행동이 나올 것이 뻔하다.
따라서 토마스 아퀴나스를 말하기를, 인간이 존재하기에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함 자체가 곧 행동이다’고 했다. 사람이 왜 이런 행동을 하느냐 혹 저런 행동을 하느냐 하는 것은, 행동만 따져서 파악할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라는 점을 알아야 가능하다.
따라서 존재론은 인간들이 끄집어낼 수 있는 모든 생각의 집약점이다. 이미 존재하기에 생각하고, 믿고, 따지고, 잠자고, 노래하고, 행동하기에 존재론을 정립한다는 것은 인간에게 나올 수 있는 모든 학문의 근원을 차지한다. 근원이란 하나(1)를 뜻한다. 그 하나(1)가 발휘하고 보여주는 모든 것이 곧 인간이요 인간 세상의 전부이다.
그래서 존재론을 방치하고서 벌리는 신학 논쟁이나 신학적 토론은 자신의 진정한 면을 은밀하게 감추고 시도하는 지적 여흥에 불과하다. 즉 자신이 신에 대해서 관심을 보이고 성경에 대해서 논하고 있는 그 행위가 어디로 하나(1)로 집약되는지도 모르는 채 발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 최종 하나로 달려가 보면, 모든 것이 존재가 계속 존재로 남기 위한 시도에 불과하다. 마치 숲 속의 사자가 먹이감의 고기를 부지런히 뜯어먹고 있는 행위가 사자가 사자로서 계속 지탱하는 존재 본능인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존재가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묻는 시도가 없다면 자신의 사고방식의 근원에 대해서 본인 스스로가 발생시킨 환영에 놀림감이 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취지에서 저자는 인류 철학사를 걸쳐서 존재에 대해서 꾸임 없는 고백과 더불어 탐색을 깊게 한 대가들의 ‘존재론 ;을 소개하고 어떠한 변천과정을 겪고 왔는가를 나열하고 있다.
처음에 등장하는 사람은 파르메니데스이다. 그는 말하기를 “누구도 존재가 있지 않다고 주장하려고 하기 않기 때문에, 철학적 사유를 향해 열려진 유일한 길은 이른바 ‘존재는 있다’는 것이다”라고 했다. 과연 계속 있을까? 개별적인 사물은 끊임없이 나타나고 사라진다. 그들은 존재하기 시작한 후 점차적으로 변하고 쇠퇴하면서 종말에 이르는 것을 본다. 이것이 실존이다. 즉 있다는 것과 실존한다는 것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이 파르메니데스의 계승자가 플라톤이다. 플라톤의 존재도 파르메니데스의 존재가 갖는 불변성, 부동성, 자기 동일성 등을 갖고 있다.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라는 존재는 불변적인, 부동하는, 자기 동일적인 것일 뿐이다. 여기서 변화하지 않는 것만 ‘실재’라고 간주되어 버리면 동일한 인간이 수시로 변할 때, 과연 그러한 변신태 가운데 어느 것을 그 사람의 실재라고 말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등장한다.
그래서 플라톤은 우시아(ούσία), 즉 본질 개념을 거론한다. 이 본질을 참 실재로 보는 것이다. 이 본질만큼은 늘 동일한 것으로 보자는 것이다. 플라톤은 이 본질에 대해서만 ‘이름’과 ‘형상’과 ‘이데아’와 연관짓는 것을 허락한다. 인간의 인식 능력으로 파악이 가능한 가지적( 可知的)인 참된 실재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인간이 알아차리는 것만이 참된 존재이다. 즉 존재와 사유(思惟)가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플라톤에 있어 실존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 ‘존재의 정도(程度)’에 따라 실재성이 정도가 갖추어지는 것을 두고 말한다. 즉 ‘덜 있는 것’과 ‘더 있는 것’ 정도의 차이에 따라 실존의 실재성 정도가 판가름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궁극적인 선(善)이 이상(理想)세계에만 참 존재의 원형으로서 있다면 이 실존의 세계에서는 선이 더 있는 실존과 덜 있는 실존과의 차이가 지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성화(聖化)가 더 된 성도와 덜 된 성도와의 실존적 차이를 보인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세계에 있는 각종 이데아(원형)들 사이에서 통일성이라든지 ‘같음’이라는 이데아를 동일하게 공유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지만 각자의 이데아 자체적으로 ‘자기 동일성’이라는 절대 속성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이데아를 초월하는 그 무엇은 바로 존재 너머의 것을 의미하는데 신플라톤주의자라고 할 수 있는 플로티누스는 이것을 일자(一者), 곧 신이라고 부른 것이다. 여기서 모든 존재는 유출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눈에 보이는 구체적 존재로부터 철학을 출발시킨다. 그는 참된 실체를 존재(우시아)라고 보았다. 쉽게 말해서, “아픔이라는 것은 없고 오직 아픈 사람만 있다”라는 표현이 이런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단번에 말해준다. 이 실체는 형상과 질료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서 질료는 잠재태가 되고 형상은 실현태가 된다. 이 실체 내에서 형상에게 우선권이 있으므로 개별적인 인간의 본성은 그 개별적 인간이 포함된 ‘인간이라는 이름의 종(種)의 본성과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에게는 ‘실존하는 한 사람= 한 사람= 사람’이라는 등식이 성립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에, 그 계승자들 끼리 의견의 차이가 나는데, 아베로에스는 실체 내에서 실존이 별개로 고려될 수 없고 실체를 현실적 실재로 간주한 반면에, 아비첸나는, 실존이라는 것은 본질에 우연히 발생하는 우연자라고 주장했다.
아비첸나는 가능적 존재의 현실적 실존을 설명하기 위해서 본질에 실존이 우연 발생한다고 보고, 현실적 존재는 자체적으로는 가능적이고 다른 것으로부터는 반드시 상대자로 존재하고 있는 필연적 입장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서 에베로에스는 어떤 것이 필연적이면서 가능적이라는 것은 모순으로 성립될 수 없고, 창조된 것인 한에서 세계와 종(種)은 필연적이며 불변적이라고 주장한다. 즉 개별자들이 변화하기는 개별적으로 변화하지만 운동이 운동을 낳아 운동이 끝나지 않듯이 개별자가 개별자를 낳아 결국 종(種)은 불변하다는 것이다. 이로서 그의 세계는 눈에 보이는 필연자들로 이루어진 불변 세계가 된다. 이로서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르는 철학계는 이 세계를 불변의 가지적 형상 세계로 이해하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여기에 기독교 신의 고유적인 자유로운 창조 의지와 거기에 따르는 무에서 유로의 창조성이 실존 안에 개입할 여지가 없어져 버린다. 즉 인간들이 미처 인식하지도 못할 우연성의 여지를 실존 개념 구성에 담겨 있어야 하는 것이다.
결정론적 세계관을 부수고 자유로운 세계관을 옹호하기 위해 옥캄은 자체적인 본질을 부정하였고, 둔스 스코투스는 개념과 개별자에 대해 중립적인 것으로서 공통 본질이라는 것을 내세웠다. 즉 이러한 공통적 본질이란 존재가 신의 이데아를 갖다가, ‘창조될 수 있는 것’으로 선택당할 때에는 가능적 본질로서의 존재를 갖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창조되어 피조물이 되면 실존이라는 존재를 갖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성도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미지가 창세 전부터 하나님의 이데아 속에 담겨 있기에 앞으로 구원될 본질을 지니고 있다가 실제로 역사 속에서 출생을 하게 되면 그 때부터 진짜 개별적 성도라는 실존자가 된다는 주장이다.
이렇게 되면 신의 선택에다가 신의 자유 의지에 따른 결과로서 그 성도가 출생하고 구원된 것이다. 결코 그 성도의 본질이 자체적으로 가능성을 스스로 발휘하여 현실적으로 ‘성도’라는 실존자가 된 것만이 아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설명에서는 이데아들의 존재와 가능적 본질의 존재, 그리고 피조물의 실존간의 관계가 문제시된다.
즉 과연 신이 혼자만이 실존에 관여하느냐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두 마리의 동물이 제 3의 동물을 낳았을 때, 현실적인 한 동물의 본질에 들어 있는 모든 것이 현실적으로 주어지고 그래서 그들이 낳은 것은 현실적으로 실존하는 동물이다. 이것은 동물의 본질 속에 있는 능동적인 원인이 자생적으로 발휘한 결과로서 자기 새끼를 낳은 것이 된다. 새끼의 본질이 어미와 다르지 않다면 구태여 신의 본질이 개입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토마스 아퀴나스에 있어 실존이란, 존재란 질료와 형상의 복합체로 되어 있기에 본질 속에 있는 형상이 현실화 된 것을 두고 말한다. 이렇게해서 하나님의 형상이 지닌 영원성을 인간 안에 그대로 유지하려고 하는 것이다. 만약에 인간이 단지 실존에만 머물러 있다면 이것은 소멸되고 파멸되는 인간성으로 간주되어 결국 죽음 이후에 인간 자체가 아예 없는 것이 된다.
즉 실존적으로 우연하지만 실체적으로는 영원한 것이 인간이라는 것이다. 마치 공기나 물이 투명한 빛의 수용체로서는 역할이 가능하지만 빛이 그들 속에 침투했다고 해서 공기나 물이 빛을 종속시키는 없는 것과 같다.
빛은 그들 안에 있지만 그들에게 속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빛이 비추어지는 일이 중단되자마자 투명한 주체들은 우리가 어두움이라고 부르는 빛의 무(無)에로 전락한다. 태양이 숨어버리자 모든 것이 어두워지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신이 실존의 원인이라는 것도 이러한 양상이다.
신도 사물들로 하여금 있을 능력이 있게끔 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있게 만드는 것이다. 다른 말로 말해서 신이 갑자기 실존을 부여하기를 중단하는 한 신은 사물들에게 사물들이 보존할 일순간의 실존조차도 허용하지 않는다. 이로서 실존은 토마스 아퀴나스가 생각한 창조된 세계 내에서 어떤 실체에게도 본질적인 것이 못된다. 그에게 있어 실존은 본질이 아니다. 본질과 실존은 구분된다.
인간에게 있어 본질은 영원성을 지닌 하나님의 형상이다. 실존이 아니다. 인간은 자신을 죽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영혼을 그의 신체로부터 분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죽일 수 없는 두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그의 신체의 질료와 그의 영혼이다.
이처럼 토마스 아퀴나스에 있어 실존의 관점과 실체의 관점간의 이러한 뚜렷한 대립이 성립하는데 그것은 실체와 실존의 복합(이것은 인간이 분리할 수 있다)이 질료와 형상의 복합(이것은 인간이 분리할 수 없다)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즉 파손 가능성과 파멸 가능성을 구분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파손 불가능한 실체들은 사실상 그들이 파손될 수 없으므로 파손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파멸되기 위해서 창조된 것이다.
전도서 3:14에 보면, “나는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작품들이 영원히 존속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라고 되어 있다. 즉 인간 자체가 이미 시간을 초월하고 있는 존재라는 말이다. 인간의 본질이 이것을 말해준다.
사물의 실존함의 현실은 사물의 통일성을 보증하는 것이다. 질료, 형상, 존재 안에 있는 우연적 속성들(우연자), 그리고 사물 안의 모든 것들이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똑같은 실존함의 현실을 분유(分有)한다. 그리고 이 점은 사물이 존재인 동시에 하나가 되는 이유이다.
실존은 요소들을 분리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그들을 동일한 존재의 구성 요소들로서 혼합하는 것이다. 같은 이유로 해서 시간적 실존은 끊임없는 영원의 해체도 아니고 끊임없는 존재의 분할도 아니다. 시간적 실존은 오히려 생성을 통한 그들의 점전적인 성취인 것이다.
그래서 ‘있다’를 통한 생성은 충실히 규정된 존재에 이르는 길이며, 이와 마찬가지로 시간은 영원에 이르는 길이다. 인간은 시간 안에서 영원을 잃지 않기 위해서 분투하고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참된 정신적 실재들과 같이 그는 본래적인 권리로 영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그가 더욱 충실하게 있기 위해서 생성되어야만 한다면, 시간 안에서 자기를 성취하면 자기를 영원화하는 존재가 되는 일이 인간에게 본질적인 것이다. 이것은 추상적 본질이 정적인 반면에 실존은 동적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본질은 생성과 양립 불가능하지 않고 오히려 생성의 궁극 원인이며 생성의 가능성의 형상적 조건인 것이다. 현실적 실존은 영원한 다름(otherness)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원한 생성이기 때문이다. 이상이 토마스 아퀴나스의 존재론이다.
실존이 본질의 완전한 현실성일 뿐이라는 견해는 근대에 이르러 데카르트, 스피노자, 볼프 등에 의해 계승된다. 칸트는 볼프의 형이상학을 수용했으나, 흄에 의해서 독단적 형이상학의 꿈에서 깨어난다. 흄은 판명한 지각은 곧 판명한 실존이라고 말하고 판명한 실존들 내에서는 어떠한 실재적 연관도 지각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칸트의 실존은 그의 인식론에서 미지수 x로서의 사물 자체에서만 상정되어 있고, 인식을 위해 기여는 하지만 그 자신으로서는 아무런 기능도 하지 못하는 무력한 것으로 남게 된다. 즉 하나의 어떤 사물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물이 또한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 어떻게 성립하는가 하는 것을 실재 자체가 말하기를 거부한다면, 그것은 단지 인간의 인식서이 사물 자체에 속하지 않고 오히려 인간의 마음에 의해 그들 속에 두입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다는 것이다.
사물의 실존은 인간 지성(知性)이 묻는대로만 답변하고 그 외 것은 허용되지 않는 실존인 것이다. 실존은 내가 정립하는 바의 무엇이 아니라 내가 그것을 정립하는 방식을 뜻한다. 칸트에게 있어 실존은 더 이상 본질 자체의 양상(mode)일 수는 없으며, 단지 판단의 양상일 수 뿐이다. 자연법칙은 인간이 지정하기 나름이다. 칸트는 실존에다 ‘사물 자체’라는 불가지 영역을 배정했다. 인간들이 알기를 원하는대로 일단 배치된 것 뿐이다.
헤겔에 있어 실존이란 신의 무규정으로부터 파악한다. 존재라는 것은 최고의 추상성을 지니는 무규정이므로 무(無)이다. 존재와 무, 존재와 비존재의 동일시는 양자의 통일성인 운동을함축하므로 생성으로 이행한다. 생성은, 그것이 동시에 소멸인 한에서 자기 모순적인 것이고 불안정하므로 사유는 생성을 생성라고 파악하고 이렇게 생성으로 파악된 생성에서 안정을 얻는다.
존재는 늘 비존재로 이행한다. 이로서 모든 존재는 항상 그들 자신이며 동시에 바로 그들의 반대인 것이다. 이것은 곧 본질이 비본질적인 것을 포함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현상이란 알 수 없는 근원을 갖고 등장한다. 이로서 늘 자신의 동일한 것으로 현상하려는 본질과 실재 나타난 현상 사이의 극복에서 비로소 실존이 생겨난다.
여기에 대해 키에르케고르는 말하기를, 실존은 객관적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주관적 인식 자체에 해당된다고 한다. 성도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기독교를 아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곧 성도의 객관적 실존을 구축하려고 하면 할수록 덜 주관적인 것이 되어 진정한 실존에서 멀어진다는 것이다.
그는 말하기를 “참된 실존주의가 해야만 할 유일한 것은 더 훌륭한 실존주의가 되기 위해 침묵하는 것뿐이다. 왜냐하면 사실상 실존주의자는 실존주의에 관해 얘기를 시작하자마자 실존주의로 있기를 그만두는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인간이란 나는 있고 또 나는 생각하지만 그러나 나는 하나의 ‘사유하는 사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순수하게 추상적인 사유는 어떠한 사유 주체도 없는 사유이다. 하지만 인간은 생각하면서 실존한다.
인간의 사유는 사유 자신의 본질에 낯선 환경에 처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본질에 낯선 본질을 갖는 사유와 결합하려고 끊임없이 애쓴다. 그 결과 실존은 사유와 존재를 지속적으로 격리시킴으로써 사유를 존재로부터 분리시켜 본다. 늘 내가 생각한 그 ‘나’가 되기 싫은 것이다. 그리고 낯선 본질과 결합하려고 사유에 나서게 된다.
이렇게 실존을 존재의 영속적인 단절과 동일시하는 것은 키에르케고르 이후로 현대 실존주의의 출발점이 되었다. 실존 자체를 새로운 본질, 곧 어떠한 본질도 갖지 않는 것의 본질로 바꾸는 것이다. 이러한 승산없는 몸부림이 곧 실존이라는 것이고 키에르케고르는 말한다. 만약 신이라면 이런 실존을 갖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가질 것이다.
(평가) 복음은 ‘있음/없음’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심판/축복에서부터 출발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가지고 나타나신 언약은 모든 존재자들에게 낯선 개념이다. 모든 존재자들은 자기 존재를 우선시하지만 참 하나님은 언약을 우선시하신다. 곧 새언약 되시는 예수님의 언약적 성취성을 우선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악마는 비록 존재론은 거부하지 않겠지만 십자가 복음만큼은 예민한 반응을 나타낸다. 예를 들면, 악마에게 속한 교회 목사들이 교회 존재와 자신의 목사직에 대해서는 자신이 인식하는 영역이라고 여기면서 항상 강단에서 할 말을 갖고 있다. 하지만 십자가 복음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다. 그것은 악마만이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한지를 미리 알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