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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Re..060530b [타인의 얼굴-레비나스 철학](2)강의[철학]

Re..060530b [타인의 얼굴-레비나스 철학](2)

이름 : 한윤범(IP:)

20060530b 부산강의-[타인의 얼굴-레비나스 철학](2)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여기 3페이지에 봅시다. 중간에 보면.
[이 때문에 우리가 그것에 부딪힐 때 우리 의식을 초월해 있는 현실과의 관계를 표현해 주는 것이다. 이는 우리 자신을 회의하게 만든다. 타인이란 바로 무한자의 이념으로서 우리에게 말을 건네면서 초월하고 우리를 비판하고 문제 삼고 질책한다.]

이렇게 되어 있지요. 이게 굉장히 어려워서. 여기서 방금 아까부터 타인, 타인했잖아요. 타인이 아니고 무한자라는 겁니다. 타인은 그 앞에 등장하는 것이고 무한자에요. 옛날에 무한자가 이게 신이에요. 신을 표현하는데 지금 여기서 사람들이 무엇에 어려워하느냐 하면, 우리에게 말을 건네면서 우리를 비판하고 질책하지요. 그죠? 이게 사람들이 안 느껴진다는 거예요. 체험이 안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의식이 있을 때는, 의식은 베르그송에 의해서 항상 과거에서 현재로 미래를 내다보는 의식입니다. 이게 흘려가요. 과거에서 의식이라는 게. 꿈에 꿈 꿀 때 의식이 뭡니까? 다 미래 의식 아니잖아요. 과거 의식 아닙니까? 과거에 경험했던 것이 지 마음대로 모자이크처럼 처리된 거잖아요.

그러니까 만일 어떤 사람이 그래, 당신 말이 맞아. 타인에게 잘해야지. 남들의 명령을 잘 지켜야지. 라고 해도, 그렇게 신에게 명령 들어야지. 이제부터 내 주장 하지 말고 남의 말 들어야지. 어려운 사람, 고아와 과부와 그리고 거지가 동냥하면 신의 흔적이라고 여겨야지. 라고 생각해도 그 의식은 어떤 의식이에요? 자기 과거에 있는 선입관에서 나온 의식일 수밖에 없잖아요. 이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것은 초월이 아니고 내재지요.

레비나스는 초월을 이야기하니까 소위 초월이라는 이름의 이게 내재인지, 어떻게 그걸 판정하느냐 이 말입니다. 초월이라는 이름을 걸면서 내가 과거에 알고 있던 하나의 상식이나 기존의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어떻게 판정하느냐 이 말입니다. 그렇지요?

여기서 뭘 주장하느냐 하면, 여기서 레비나스의 논리의 한계들이 있어요. 약간에 억지들이 많은데. 그래서 레비나스는 복음적은 아니지요. 뭐냐 하면, 나에게 의존하지 않은 채 다가온다. 이랬어요.

3페이지 밑에서 열 번째 줄에.
[타인은 전적으로 나에게 의존하지 않은 채 다가온다. 타인은 단순히 나와 구별된다는 의미에서, 내가 아니라는 의미에서 나와 다른 타자가 아니라 '전적으로 다른 타인'의('나'가 빠졌지요. 나하고 다른 타인이 아니고 전적으로 다른 타인이죠.) 출현으로 인해서 충격을 받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그러니까 이 점이 죽음이라는 건데, 이 책을 썼던 강영안 씨도 예를 안 들었지만 누굴 언급했느냐 하면, 바로 박완서란 사람을 언급했어요. 그 내용에 대해선 이 책에 기록 안 되어 있지만. 박완서란 사람을 설교시간에 그런 예를 들은 적이 있는데요. 박완서의 아들이 88올림픽 때 죽었다는 걸 제가 이야기했거든요.

그 박완서가 [한 말씀만 하옵소서]란 수필집을 쓰면서 자기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교통사고로 죽었어요. 그때 언제냐? 88올림픽 할 때입니다. 왜 내 아들이 죽었는데 고을고을마다 성화 봉송한다고 잔치를 벌이느냐 이 말이에요. 만약에 자기 아들이 살아있었더라면, 성화 봉송에 대해서 자기가 박수를 쳤겠지요.

지금 6월 달에 어떤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 죽는다면, 그 자식 죽은데 대해서 호응해 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어요. 월드컵에 정신 다 팔려가지고. 다 묻혀 버리지요. 자기도 만약 아들만 살아있다면, 월드컵을 같이 기뻐하고 향유, 아까 향유했지요. 즐기고 있겠지요. 나로 하여금 즐기고 싶은 걸 즐기지 못하도록 뭔가 갑자기 닥쳐오는 상황들, 이것은 나한테 의존하지 않는 상황이죠.

지금 박완서 같은 경우에 죽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자식이잖아요. 근데 지금 인도네시아에 몇 명 죽었습니까? 5000명 죽었지요. 5000명 죽어도 내 자식 하나 죽은 것보다 못하다 이 말입니다. 따져보세요. 5000 대 하나에요. 전에는 이십만 명, 이십만 명 죽어도 내 아들 하나 죽은 것보다 못하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박완서가 이랬습니다. 왜 신은 살아있는가? 그 이유는 내가, 나라는 박완서가 그에게 살의, 살의가 뭔 줄 알아요? 살인의지. 살의를 품도록 만들기 위해서 신은 살아있다.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얼마나 신을 죽이고 싶었으면. 그러니까 신은 뭐보다 못하다? 내 자식보다 못하다 이 말이죠. 신은 내 자식보다 못하다.

바로 이러한 상황은 자기가 의도한 것이 아니고, 나에게 전적 의존하지 않는 채로 다가온 그런 신의 흔적이죠. 나에게 의존하지 않은 채. 나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나에게 의논하지도 않고.

크로스빌리지에 오 목사님 마늘밭 사건 나오잖아요. 그게 무슨 내용인지 보니까, 그때 사모님 울고 난리 났어요. 화평교회에 원래 설립자 되는 주동 집사 내외분이 있었는데, 오 목사님이 설교하니까 삐져서 안 나오는 거예요. 남자 집사님이. 이 교회가 내 교회인데 내 말 안 듣고 내 마음에 안 드는 설교를 당신이 왜 하느냐 말이죠. 그러니까 당신 나가세요. 라는 말이 뭐냐? 그 사람이 안 나오므로 말을 하는 거예요.

자기 안 나옴으로서 당신, 내 교회에서 주인이 없는데 너희끼리 손님끼리 잘해봐라. 그쪽 손님들이 전부다 외지에서 다 와요. 두 시간 택시타고 온다고. 우리 주인이 없는데 너희끼리 해봐라 이 말이에요. 마치 잔치 벌렸는데 손님들이 마음에 안 든다고 주인들이 퇴장한 것과 똑같은 거예요. 지금 그런 상황이라. 그런데 감시용으로 누굴 박아놨느냐 하면, 자기 부인 집사를 심어 논 거예요. 그 부인 집사가 교회 근처 마늘밭을 집어 논 겁니다. 그 몇 만평되는 마늘에 열 포기 손해 봤데요.

열 포기 손해 본 거 가지고 그걸 빌미잡아서 사모님한테 막 따진 거예요. 교회 와서 주일날. 주일날, 목사님이 교회 설교해야 되고 정신을 복음과 예배에 정신이 팔려 있는 그 목사님한테. 마늘, 애들, 사모님 애하고 동네 애들 하고 같이 마늘 열 포기 손해 본 것 가지고 예배 봐야 될 목사님한테 따지는 거예요. 일종의 예배 방해지요. 전에 또 예배 방해한 사람이 설교할 때 질문한 사람은 그 여자의 남편, 지금은 안 나오는 그 집사가 설교할 때 대들고 한 거예요. 그럴 때 사모님은 마음이 괴로웠어요.

왜 괴로웠냐 하면, 사모님이 마음이 괴로운 이유가, 자기가 화평교회를 안 떠나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 잃어버린 양 찾는 그런 심정으로 그렇게 못되게 굴어도 오히려 그들의 영혼을 생각해서 사랑해 주려고, 기어이 구원받으라고 했는데 그 사랑을 못해주고 그렇게 원수처럼 대들 때 그동안 드린 공로, 정성, 이것이 무산될 때 얼마나 서럽겠습니까? 그래서 막 울고 이랬어요. 괴롭다 이 말이죠.

그런데 그것 때문에 했을 때 아, 사모님 애가 하나 거기 간여가 됐구나. 나는 동네 애 줄 알고. 동네 애가 아니고, 목사님 애 하나가 또 간여해서 같이 한 거예요.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열 포기 값해서 민사재판 청구하라고. 그렇게 하는 사람 있지만 지금 민사재판 그게 문제가 아니라, 그렇게 이웃사랑 베풀었는데 사랑으로 돌아오지 않고 원한으로 돌아올 때 그동안 공 드린 걸 생각할 때 얼마나 괴롭겠냔 말이지요.

그런데 그게 누가 박살났습니까? 예기치 않은 사건이잖아요. 누구한테 물어본 것도 아니고 갑자기 들이닥친 사건이잖아요. 그동안 사모님은 뭐가 있었다? 내가 이렇게 하면 알아 줬으면 좋겠다는 순수미래가 아니고, 기획된 미래, 계획된 미래가 인간 속에는 현재처럼 담겨 있었지요. 그게 순수미래로 인하여 부딪치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레비나스는 의식, 뭔가를 의식했다는 거예요. 뭔가를 의식한 것은, 이것 자체를 완전히 박살내는 것은 의식이 없는 죽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이 말이에요. 죽음의 자리에서 내 자식이 남의 마늘밭 열 포기 뽑는 것, 그게 죽음하고 무슨 관계가 있느냐? 그 일났다고 죽은 놈이 벌떡 일어나서 죽으면 안돼. 해결하고 죽어야 돼. 이럽니까?

죽음이라는 게 뭐냐 하면, 어떤 상황, 어떤 사태, 월드컵이 있더라도 어떤 것이 있더라도 전혀 그것과 그것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게 죽음의 특징입니다. 전혀 무관한 관계가 없다는 거예요. 영생과 관계없는 것들이 지금 다가오고 있다 이 말입니다. 먹구름처럼. 다가오고 있는 거예요. 그걸 뭐냐? 나한테 포착된 자고, 내가 참여할 수 없는 무한자의 세계라고 보는 거예요. 신의 세계라고 보는 거예요. 레비나스가.

하나의 이해를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노아가 있고 노아 이웃집에 사람이 살고 있잖아요. 서로 친하게 지낼 수 있지요. 왜? 개, 돼지도 아니고 어떤 사자와 호랑이 사이도 아니고 개와 원숭이도 아니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공통성이 있을 것 아닙니까? 보편적인 공통성. 공통성이 뭐냐 하면, 예의고 범절이죠. 예의범절이죠. 에티켓이고. 인사하면 서로 인사하고 공손하고 노아만 인격이 있는 게 아니고, 이 사람도 인격이 있고, 노아만 뭣이 선이고 악이 뭔지 모르는 것이 아니고 이 사람도 선과 악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래서 이것은 노아도 의식하고 이웃 사람 다 의식이 있어요.

그런데 둘 사이에 갑자기 어떤 낯선 물체가 만들어집니다. 그 물체가 뭐냐 하면, 바로 방주에요. 방주라는 낯선 물체가 여기 개입되면, 방주 안에 들어가면 무조건 구원받고, 방주 안 들어가면 이웃사람은 무조건 저주 받는 거예요. 이 둘 사이에 인간적인 대화는 이 방주라는 낯선 무한자의 세계와 무한자는 이 인간 세계의 어떤 인격이냐, 어떤 지식이냐, 얼마나 착하냐 전혀 상관없는 거예요.

방주라는 낯선 물체가 오기 전까지는 서로 좋은 이웃이었어요. 서로 대화가 통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낯선 것이 개입하고 난 뒤에는 대화가 안 통하지요. 한 쪽은 방주 안에 있고, 한 쪽은 방주 밖에 있고. 주님께서 슬그머니 집어놓은 그 방주라는 개념의 물체 때문에. 인간과 인간이 전혀 낯선 인간으로 달라졌지요. 서로 서로가 낯선 인간이 되었지요.

이것이 노아시대 때 구원 방법이라면, 오늘날 이 시대에 낯선 것이 뭐냐? 십자가거든요. 방주는 문 열고 들어가면 됩니다. 십자가는 문 열고 들어가자마자 뒤에서 때리고 앞에서 때리고 다 사람 죽여 버린다고. 그런데 사람들은 방주 같이 들어가기만 하면 구원받기를 오늘날 원하고 있어요. 십자가를 원하는 게 아니고 내가 살아있으면서 어떻게 뭘 하게 되면 구원받습니까? 이걸 원하는 거예요. 방주야 그 안에 들어가면 온전하지만, 십자가는 박완서나 오 목사님처럼 거기는 유황불처럼 낯선 죽음의 세계가 마구 가슴을 때리고 허리를 때리고 등을 때리는 그런 사건이 쏟아지는 곳이에요.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라고.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낯선 것을 주었느냐가 이 시대에 제일 중요한 문제라는 겁니다. 당신이 얼마나 훌륭하고 얼마나 배웠느냐가 문제가 아니고, 당신에게 어떤 낯선 물체가 주어졌느냐? 그러니까 옛날 같으면 방주고, 지금 같으면 십자가, 그게 중요한 거예요. 이걸 만약에 지금이 노아 시대라면, 우리가 설교할 때 뭘 증거 해야 돼요? 훌륭합시다. 이거 증거 하면 큰 일 나지요. 아는 걸 증거 하면 안돼요. 보편적으로 아는 걸 증거 하면 안돼요.

내가 주일 낮에 그런 설교하지 않았습니까? 이세벨의 종교의 특징이 뭐냐? 공통점을 찾아가는 거고, 여호와 종교는 뭐냐? 창의성을 찾아가는 거예요. 이세벨이 자신만만했어요. 바알종교 할 때 자신만만한 거예요. 왜? 공통점을 찾아가기 때문에 음란하고 확 퍼질 것이다. 라고 뻔하게 알고 수입했거든요. 바알종교 수입해서 완전히 온 나라에 퍼져 버렸잖아요. 얼마나 없으면 엘리야 선지자가 보기에는 거의 없다고 본 거예요. 왜? 지 혼자 도망치고 있으니까.

이방종교는 인간의 보편성을 공통성을 찾아서 결속하는 거라면, 여호와종교는 차이, 새로운 것이 개입되면서 새로움으로 인하여 우리는 어떤 차이로 벌어졌는가? 그 새로운 걸 증거 하면서 차이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어요. 알고 있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니는 어떤 낯선 것을 받았느냐를 이야기하는 것이 여호와종교의 특징이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노아라면 우리는 무슨 소리해야 됩니까? 누가 방주 안 들어가면 죽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해야 되지요. 그러니까 설교자가 굉장히 설교하기 쉽지요. 동시에 어렵지요. 왜? 공통 친구가 다 떠나버리니까. 교인이고 친구고 다 떠나니까. 왜? 공통적으로 결속이 안 되니까. 의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흔히 이야기 될 수 있는 게 다 없어지니까.

그러니까 오늘날 목사들은 공통점을 찾아 나서잖아요. 좋은 아버지 되기. 좋은 가정 만들기. 행복한 가정이란? 이런 거. 그들이 원하는 공통점 찾고 있지, 차이 나는 거, 십자가 안에서 우리는 죽습니다. 이런 이야기 못하잖아요.

전에 이광호 목사 평해 논 거. 이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가 그 이전에 우리 한번도 못 만났잖아요. 그래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야외예배 가던 날, 하나님의 무한자의 사건인지 모르지만, 그 바로 위에 같이 소풍 왔어요. 인사하러 왔어요. 수고한다고 인사하고 하는데 다시 왔어요. 자기 차에서 책을 세 권 가지고 와서 읽어보시라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냥 읽어만 보는 게 아니고 독후감 씁니다. 이랬거든요. 웃으면서. 하니까 이광호 목사님이 자신만만하게 그냥 독후감하지 말고 신랄하게 비평을 해달라는 거예요. 그럼 제가 신랄하게 비평하겠습니다. 그래서 신랄하게 비평했습니다.

이게 이메일 같으면 그 사람한테 공격 안하고 그 사람한테 개인적으로 보냅니다. 그런데 제가 박영선 목사님 평해 놓고 반성, 개인적으로 보냈습니까? 로이드 존스 책 읽고 로이드 존스 개인적으로 했습니까? 이미 죽은 사람 없지만. 공격했지요. 왜 공격했느냐 하면, 이미 뭐로 나왔느냐 하면, 이걸 내가 개인의 편지를 읽고 평한 게 아닙니다. 이미 책으로 나온 거예요.

책으로 나왔다는 말은, 어느 누구한테 제가 지금 보이겠습니다하는 거예요. 이 책에 대해서 어떤 것도 비밀로 할 이유는 없습니다. 라는 뜻이에요. 제가 책을 썼어도 마찬가지에요. 문자로 박혔다 했어요. 문자로 박혀서 썼다는 말은, 이제 빼도 박도 못하게 문자로 박혔다는 말은 이걸 통해서 마음껏 짓밟고 눌릴 각오가 돼있습니다 하는 뜻에서 책을 낸 거예요.

이것은 개인적으로 서신해서 목사님, 이런 게 문제입니다. 할 문제가 아니고, 이미 책으로 나왔기 때문에 개인서신이 아니고 책으로 나왔고, 이광호 목사가 하는 그 신학교 교과서에 쓰이고 있어요. 나왔기 때문에 그 책을 읽는 사람이 있을 것 아니냔 말이에요. 거기에 대해서 제가 신랄하게 했습니다.

핵심은 뭐냐 하면, 도대체 우리가 육과의 영의 싸움이 아니고, 악마의 싸움인데 마귀가 이정도 모르겠느냐? 마귀가 이정도 모르겠냐 말이죠. 메시아가 여자의 후손이다. 알았기 때문에 귀신들린 청년은 예수여, 왜 벌써 오십니까? 아직 때가 안됐는데. 이런 소리 했단 말이죠. 알기 때문에 광야에서 시험한 거예요. 마귀의 정체를 밝혀낼 수 있는 그런 책이 아니고, 이건 뭐냐 하면, 대충 성경지식, 흐름, 조립해서 이게 성경적 진리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한 거예요.

그래서 저 쪽에서 말이 많은 모양이라. 여러 가지 이야기 들어보니까 제일 공격하는 것은, 내용에 대해서 글에 대해서 문제 삼는 게 아니고 왜 공격했느냐? 아니 생각해 보세요. 이 미천한 나도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그러면 글 쓸 때 눈을 주신, 귀를 주신 주님 앞에 좀 반듯하게 떳떳하게 주여, 주께서 공격해도 저는 반듯하게 살겠습니다. 왜 이러한 자유성을 가지고 왜 글을 못 쓰냐 말이죠.

이광호 목사가 그 책을 나한테 준 것은 의도가 뭐냐 하면, 하도 이근호 목사가 남한테 욕을 얻어먹어도 존경스럽다 하니까, 그 존경스럽다 하는 사람도 내 책을 인정하더라. 그러니까 마음대로 여러분들은 이제 하자가 없는 겁니다. 그러한 백그라운드 하나 더 포섭하기 위해서 자진해서 책을 줬는데, 내가 보면, 그따위 사고방식이 예수를 믿는 게 아니고 이근호를 믿는 거다 말이죠. 그게.

내가 호응을 하면 내가 천국문을 열어줍니까, 내가 천당을 보내줍니까? 왜 나한테 호응을 얻으려고 해요. 그 사고방식으로 목사를 해요? 이런 소리 여러분들은 많이 듣지만 그 사람은 간만에 듣잖아요. 간만에 들으라고 하는 거예요. 또 그 사람한테 그 소리하지 않습니다. 사람 조지고 또 조지면 너무 잔인하니까 안 하는데. 여러분들은 속으로 많이 듣지만 그 사람은 오랜만에 들어요. 참석 안 해요. 우리 모임에. 사랑인 줄 알아야 돼요. 세상에 그런 사랑이 어디 있어요?

좋은 후원자 하나 얻으려고 온 그걸 가지고 후원자는 주님이 후원자지, 내가 후원자 될 수 없다고 신랄하게 비판한 거예요. 진짜 믿는 사람 같으면 진짜 십자가 믿는 사람은 내가 신랄하게 비판하면 이것도 주님 주신 무한자의 사건이다 여기고 감사히 받아야지요. 그게 왜냐하면 개인을 공격한 것이 아니고, 내용을 가지고 이야기했기 때문에, 그러면 그 앞에 내용에 대해서 수정을 하든지, 조심해야 되든지, 공부를 더 하든지 이렇게 하면 마귀를 이기는데 얼마나 협조하면 안 좋겠습니까? 항상 그러니까 공부 안하면 교주돼요. 항상 문제에요.

3페이지 밑에 봅시다.
[타인은 어떤 종족이나 가족, 어떤 민족도 초월한다.]

그러니까 내가 초월이란 말을 했는데 레비나스, 당신은 이미 알고 있는 초월 아니냐? 레비나스는 말합니다. 알고 있는 초월 같으면 초월 값도 못하지. 설마 이럴 줄이야. 라는 것이 초월이지요. 아마 하나님께서 내가 이런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이런 벌이 올 걸? 라고 알고 있는 벌은 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홍해 건넜으면 다음에 또 홍해가 또 있는 줄 알아요. 다음에 요단강이에요. 요단강 건넜으면 요단강 또 있는 줄 압니다. 여리고성입니다. 항상 인간은 자기 힘으로 건너갈 수 없는 산 넘어 산, 태산이에요. 나중에 신약성경에는 그 정도가 아닙니다. 그 정도 건너는 정도가 아니고, 아예 나무를 뽑아서 바다에 빠지라했습니다. 그것도 아니에요. 나무를 빼서 바다에 빠지라 해도 빠지고, 산을 옮기라 해도 옮기는 믿음이라도 베드로가 물 위를 건넌 믿음이 있더라도 베드로는 세 번째 주님을 저주했습니다.

이것은 내가 아무리 내가 기적을 만났고 기적을 행한다 할지라도 열두 제자가 다 기적을 행했습니다. 심지어 가룟 유다 기적 행했습니다. 주의 권능으로. 마귀가 사탄이 하늘에서 떨어졌습니다. 했지만 결국 인간은 또 건널 수 없는 무한자는 주님께서 주셔야 된다는 거예요. 구원이란 것은. 기껏 구원했더라도 그것 말도 또 있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바로 시간. 순수미래는 다가오는 거지 내가 여기서 정리해서 내 것으로 만든다고 오케이가 아니다. 그게 오케이가 아니다 이 말이죠.

여기 3페이지 밑에 봅시다.
[타인의 말 건네 옴은 단순한 대화 차원의 말 건넴이 아니다. 그것은 “너는 살인하지 말지어다”라는 명령이다.]

이게 좀 설명해야 돼요. 이게 어려워요. 여러분 대화하고 명령하고 차이점이 뭡니까? 이게 어려운 거예요. 왜냐하면 이게 신약성경 해석에 사도 바울의 명령법 해석에서 제일 중요한 겁니다. 사람들은 신학자들은, 이런 사람들은 자꾸 대화한다고 생각하는데, 성경은 대화가 아닙니다. 명령이라 하는 것은 우리 속에 행할 능력이 없음을 고발하는 거예요. 대화라 하는 것은 이 양쪽의 공통성 가지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명령이란, 살인하지 말지어다. 라는 이 말은 지금 너는 살인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지금 살인 안 하는데요. 그러면 네 아들 죽여 볼까? 저는 제 아들 죽여도 살인 아닌데요. 그럼 네 마누라 죽여야지. 기어이 주님을 죽일 수밖에 없음을 드러낸 그 이후에 너는 뭐 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가 유효한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살인하지 말라는 그 타자의 명령을 유효하기 위해서 우리를 도구로 사용하는 겁니다.

탐내지 말라. 우리는 배부를 때 탐내지 마라. 별로에요. 탐 안 냅니다. 백화점에 좋은 물건 있다. 그때 들려오는 게 뭡니까? 탐내지 말라. 아하, 들켰구나. 들켰구나에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신약성경을 해석했을 때 '들켰구나'라고 해석하면 다 맞습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다. 들켰구나. 이렇게 해야지. 만일 해내겠습니다. 하면 안돼요. 만약에 해버리면, 그거는 부자 청년 돼요. 부자 청년 된다고.

잃어버린 양이 돼야 돼요. 구십 아홉 양이 되면 안돼요. 잃어버린 양이 돼야 돼요. 주께서 찾지 않으면 구원될 수 없어야 돼요. 만약에 주께서 찾지 않고 내가 찾자고 하면, 그거는 내가 방주를 만들고 내가 십자가 만드는 거예요. 낯선 물체가 아닙니다. 그럼 방주는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과거의 산물이기 때문에 내가 만든 방주에요. 지가 만든 방주는 그게 보트지,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지가 만든 십자가는 자기희생이지, 어떻게 구원의 능력이 되겠어요. 평생 살아보세요. 날마다 새로운 우리를 붕괴하는 망가지게 하는 새로운 사건이 있을 겁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우리 목회할 때 하나의 예를 들면, 목사가 자기가 분명히 죄를 지었다 이 말이지요. 그러면 분명히 지가 예상 문제를 짜요. 지가 스스로 벌주거든요. 첫째, 이런 죄를 지었기 때문에 벌이 올 것이다. 첫째, 잘난 교인 두 명 빠지고, 그 다음에 헌금이 갑자기 한 주에 이십만 원 줄 게 될 것이고, 그 다음에 내가 허리가 아프다든지, 뭔 일이 있을 것이고. 지가 예상문제를 뽑아요.

지가 죄 지은 게 죄가 아니고 그건 선악적인 관점이고, 그걸 죄 지어놓고 벌 받으려고 벌서려고 마음 준비하는 뽑아낸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용서하심을 모독하는 죄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를 죄인 되게 하는데 어떻게 죄인 되게 하느냐 하면, 죄인이어서 죄인 되게 하는 게 아니고, 죄 짓고 자기가 달게 받겠다고 나서는 죄를 죄 짓게 하는 거예요. 어렵다 어려워. 이거는 십자가에 대한 모독입니다.

그러니까 평소에 자기가 벌이 없는 것은, 그러니까 교인 더 와야 되고, 그리고 헌금 더 나온 것은 자기는 평소에 죄를 안 지었다고 착각하고 있는. 그러니까 하나님을 하나의 대상으로 봤지, 요소로 본 게 아니에요. 십자가를 하나의 요소로, 나는 금붕어를 둘러싸고 있는 물로 보지 않고, 내가 다룰 때 비로소 내 것이라는 상품으로 보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그런 목사에게 자기의 죄를 깨닫는 낯선 사건을 줌으로 말미암아, 예를 들어서 자기가 교인 두 명 빠지고 헌금 이십만 원 갑자기 줄고 자기 머리 아프고 했는데 그 다음날 죄 짓고 난 뒤에 하니까 헌금 백만 원 더 나왔고 교인 열 명 더 나온 거예요. 주여! 쓸데없는 계산을 했군요. 내가 쓸데없는 계산을 했군요. 이거는 대화가 아닙니다. 뭐냐? 항상 명령형으로 다가오는 우리의 은혜에요. 은혜가 명령형으로 다가오죠. 살인하지 말라 하는 게 은혜입니다. 이게 축복입니다.

제가 광주 강의할 때 헌금이야기를 했거든요. 고린도후서,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헌금이야기하면서 이랬어요. 헌금의 의미가 뭐냐 하면, 어떤 사람은 억지로 내지 말라. 자발적으로 내라. 뭐, 적게 거둔 자는 적게 내고 많이 거둔 자는 많이 내고, 은혜를 받았으면 헌금을 해야지. 이쪽으로 해석하는데. 저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어떻게 보느냐 하면, 부요한 예수님이 가난하게 됐잖아요. 부요한 예수님이 가난하게 되심으로 빠져나온 게 뭐냐? 우리가 주어진 은혜가 나옵니다. 부요한 주님이 가난하게 되었다고 사도 바울이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가 가난한 자를 우리를 부요하게 했다. 이렇게 나와요. 성경에 보면 나옵니다. 그렇다면 헌금을 할 때 우리가 부자라고 여기고 헌금을 하라 말이죠. 부자한테 헌금하는 것은 신나는 일입니다. 왜? 부자 됨을 들어 봤어야지. 그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왜 자기가 부자라는 걸 모르느냐 이 말입니다. 헌금하라가 아니라 너, 부자야. 이런 뜻이에요.

부자 헌금할 때 째째하지 않습니다. 왜? 부자기 때문에. 몇 푼 없어도. 그래서 그 과부 있잖아요. 두 렙돈 과부. 되게 부자입니다. 그래서 생활비 전부를 받쳤어요. 얼마나 부자였으면 생활비 전부를 바쳤습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이런 부요함을 위해서 주님은 가난하게 되셨다는 게 본인이 가난한 것으로 끝이는 것이 아니고, 그분의 가난의 여파가 파도가 계속 해변으로 밀려서 이제 우리를 부자 되게 하는 가난이라는 것을 수용하여 믿자.

예수님의 가난은 나로 하여금 이렇게 부자 되게 하신 가난이었습니다. 저, 부자입니다. 한달 수입 십만 원 받는 부자입니다. 나는 내일 모레 곧 굶어 죽는 부자입니다. 거지 나사로가 너무나 부자지요. 왜? 하늘나라 가기 때문에 입는 것 신경 안 쓸 정도로 부자지요. 현재 자기가 아픈 것, 개가 핥는 것, 자기가 거지인 것 전혀 거기에 대해서 신경조차 안 쓸 정도로 너무나 부자였던 겁니다. 그럴 때 그 헌금이 기쁨의 헌금이 되고, 자발적인 헌금이 되지요.

4페이지 봅시다. 조금 더하고 마치겠습니다.
[타인의 얼굴은 한 존재자가 직설법으로서 아니라 명령법으로 나를 접촉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얼굴의 현현]

여기 얼굴이라는 이야기 나왔지요. 얼굴은 상판대기가 아니고, 얼굴이라고 하는 것은 표정이라고 했어요. 여기 얼굴하고 머리 두개골하고 다릅니다. 얼굴을 통해서 그 사람의 삶이 다 나와요.

[1인칭 관점에서의 타인에 대한 윤리나 책임론은 결국 나의 존재 유지의 연장으로밖에 안 된다.]

아, 놀라운 사실. 4페이지 위에서 열 번째 줄에. 1인칭 관점에서, 그러니까 내가 타인에게 사랑한다. 이 사랑은, 이것은 나의 존재 윤리의 연장책 밖에 안 된다 이 말이에요.

그들은 말하기를, 책임 있는 주체의 자유성에 근거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나의 행위에 대해 내가 책임지려면 행위를 한 주체가 바로 나이며 내가 한 행위는 나의 자유로운 의지의 선택으로 한 행위임이 확정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의미에서 책임은 나의 삶을 내가 짊어진다는 의미에서 책임일 뿐 타인을 위한 책임은 아닌 것이다.]

그러니까 내 잘나기 위한 선행이 벌어진다 말이죠. 책임한테 안 눌리기 위해서 내가 스스로 내 양심한테 안 꿀리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이러한 사랑은 사랑도 아니란 이 말입니다. 우리가 어떤 노력을 하든지 간에 우리의 약점을 집요하게 고발하고 소환하고 나를 고소하는 그 타인. 그게 아까 제가 이야기한 거죠. 죄 지어놓고 벌을 지가 선택하는 것. 이 중에서 한 개만 때려주세요. 이런 것. 이것은 자기가 자기를 책임성 있는 인간으로 돋보이기 위한 수법이지.

이런 벌은 생전 처음이야. 라는 그런 벌을 받아야 된다니까. 이건 예상문제에도 안 나온 벌이에요. 이런 벌을 받아야 돼. 그 벌이 뭐냐? 헌금 증가, 교인수 증가에요. 갑자기 애가 공부를 잘한다든지, 이런 것. 그러니까 그게 축복이죠. 사실은. 설교도 잘하고 심방을 잘하고 열심히 하고 새신자도 심방하고, 그 다음날 열 명 빠져버리고. 열심히 했는데. 이것은 내가 나한테 머무르면 안 된다는 것을 일깨워주시는 하나님 은혜지요.

다른 말로 하면, 내가 만든 나의 과거의 나의 자아에게 그냥 머물고 그걸 천당에 밀어 넣으면 안 된다는 거. 그러면 나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의 그 구원의 공로를 과거의 산물인 내가 모독한 게 돼요. 새로운 것이 다가왔음에도 불구하고 옛 것에 집착하고 있는 내가 새로운 것을 밀쳐버리고 그걸 추방해버리면 안된다는 겁니다. 지금 레비나스의 이야기는.

4페이지 중간에.
[나는 타인에게 갇힌 자로, 타인에게 볼모로 붙잡힌다. 도망을 시도해도 불가능하다. 타인은 나를 끝까지 따라온다. 이처럼 타인의 얼굴로부터 오는 윤리적 호소는 나에게 행복을 주기보다 오히려 고통을 준다.]

왜 그렇습니까? 그러면 나의 행복은 그동안 어디서 얻었습니까? 향유했죠. 요소 세계에서 받아온 것을 향유하지요. 하지만 고통은 더해지지요.

[나만이 누리던 자유가 부당함을 일깨우고 타인을 수용하고, 내 것을 내어놓고 타인을 환대하도록 요구한다. 응답을 요구하는 타인의 부름에 내가 ‘응답할 때’ 나를 ‘응답할 수 있는’ 존재로 세울 때 나는 비로소 ‘응답하는 자’로서 ‘책임적 존재’ 또는 윤리적 주체로 탄생한다.]

내가 상대방을 응답하는 것이 아니고 타인이 와서 나로 하여금 그 나에게 다가온 타인에게 반응을 나타내는 사람으로 그 타인이 나를 그런 인간으로 몰아가고 만들어낸다 이 말입니다. 내가 타인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고. 그러니까 나에게는 주도권이 없는 거죠.

그 응답이 뭐냐? 내가 여기 있음. 내가 아까 뭐라 했습니까? 들켰네 했지요. 아까 제가 했지요. 들켰다고. 이 사람은 뭐라 하면, ‘’내가 여기 있음. ‘들켰네’가 더 적당할 것 같아. 마치 외투 보관소에서 담당직원이 외투 여기 있습니다. 말하면서 외투 내어줄 때, 자기가 외투 되는 거야. 외투 여기 있습니다. 하고 나를 찾아오는 누구든지 나를 내어주는 그것이 바로 순수미래에 끌려가는 사람이다. 낯선 계시에 반응을 나타내는 사람이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그 다음에 5페이지 봅시다. 위에서 네 번째 줄에.
[대속이란 타자에 의해 책임적 존재로 지정받은 내가 타자를 ‘위한’ 책임적 존재로 세워지는 모습이다. 대속은 문자 그대로 ‘자리 바꿔 세움 받음’이다. 여기서 나의 위치가 수동적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내가 먼저 그렇게 세움 받고 그 뒤, 그것을 나의 책임으로 개인적으로 수용하는 행위가 뒤따른다. 내가 기억할 수 없는 먼 과거에, 나의 의식과 나의 선택의 자유가 발동하기 이전에 벌써 타자에 의해서 타자를 위한 책임적 존재로 세움 받았다.]

야, 예정론까지 나오네. 현재의 나는 어떤 나에게 그런 신의 계시가 왔다는 것을 내가 알았다면 내가 느꼈다면, 그것은 현재 그렇게 될 뿐이지, 사실은 내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뒤좇아 온 거예요. 그동안 나는 몰랐던 거죠. 내가 그 신의 흔적을 가진 타인을 만나기 전까진 몰랐단 말이죠. 그전까지는 어떻게 됐나? 나를 위해서 내가 확정되기 위해서 그저 향유에만 몰입하면서 살아왔다 이 말이죠.

자, 그렇다면 여기에서 끝으로 이러한 레비나스에 대해서 예상되는 반발이 있는데 반발하는 게 뭐냐? 5페이지 밑에서 열두 번째 줄에.
[그렇다고 ‘자기 말살’이나 ‘자살’은 말이 되지 않는다. 자기 말살과 자기 부인은 구별해야 한다. 타인의 고통에 대속적 책임을 지는 주체는]

책임을 져야 되지, 와 자기가 죽으면 우에 돼요? 그죠? 책임지라 했는데 나, 죽어버릴란다 하면 책임 안 지겠다는 말 밖에 안 되잖아요. 다시 말해서 레비나스는 예수님이 대속했다는 그 말을 하는 게 아니고 우리가 대속자가 돼야 한다는 그 말이에요.

만약에 자아를 말살한다면 타인의 고통을 노출해야 될 노출 시기를 놓쳐버려 노출할 수 있는 기회를 우리가 스스로 가리는 것밖에 안된다 말이죠.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아는 것이다. 야고보서 1:27의 말씀처럼 ‘참된 경건은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봄에 있다’는 것이다. 타인이란 존재 저편에, 저 너머에 오는 흔적이요 자취요 남은 자국이다.]

하나님은 타인을 질질 끌고 가면서 우리 앞에 지나간다 이 말이죠.

[하나님은 흔적으로서 고통 받은 자의 얼굴로 나타났다고 곧장 자신의 모습을 지워 버리신다. 그것으로 인해 우리가 계속해서 독립성을 가지면서도 하나님께 의존케 하기 위해서이다.]

평가 봅시다.
[복음적으로 봐서, 죄라는 것은 우리에게 책임을 물어서 우리가 지은 죄로 확정짓는 것이 아니라]

그런데 이 사람은 5페이지 중간에, 악이 뭐냐 하면, 바로 그 책임, 대속의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이 악이라고 본 거예요. 죄악이라 본 겁니다.

그게 지금 레비나스가 출발점이 뭐냐 하면, 레비나스가 무엇과 무엇을 대비했느냐 하면, 기존의 신학은 신과 인간을 대비했잖아요. 레비나스는 인간과 타인을 대비했지요. 나와 타인. 둘 다 아니다 말이죠. 나는. 만약 인간에 대비 했으면 오류가 없어요. 완벽해. 인간은 자기 밖에 모르는데, 신은 나 밖에 타인을 둠으로 말미암아 나로 하여금 신에게 신의 고통을 책임져야 될 존재로 남는다. 대속한다. 다 맞는 것 같아. 참된 경건은 고아와 과부를 돌보고. 다 맞는 것 같아요.

하지만 성경은 신과 인간의 관계도 아니고, 나와 너의 관계도 아니라 십자가 사건을 위하여 너도 나도 하나님 여기서 다 모이는 거예요. 심지어 하나님도 예수님 이름을 위해서 다 모이는 겁니다. 십자가 사건은 양 발 차기에요. 다시 이야기해 볼까요. 방주라는 것이 낯선 거라니까요. 아무래도 노아시대 때 레비나스가 있었으면 이렇게 애기 했을 거예요. 노아야, 타인의 옆에 있는 고통을 책임 져. 이렇게 나올 겁니다.

지금 언약은 그게 정말 낯설어요. 내가 아는 타인의 고통이 낯선 게 아니고, 그냥 방주가 물체라니까 이거는. 얼토당토않은 물체가 떴다. 이게 본드 아니에요. 잠수함도 아니고. 그냥 예상도 못한 그냥 물체라니까. 요즘은 뭡니까? 예상도 못한 십자가라고.

예를 들어서 사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났고, 사울이 누구냐? 할 때에 예수님은 뭐라 했습니까? 나는 나사렛 예수라 했어요. 나사렛 예수가 뭐냐 하면, 그냥 예수가 아니고 십자가 죽었던 예수입니다. 십자가를 품고 난 예수님이에요. 사도 바울의 정신은 뭐냐 하면, 십자가를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가 있는 것이지, 우리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 있는 게 아니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십자가 사건을 증거 하기 위해서.

6페이지 봅시다.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같은 인간으로서 예수님을 자신과 대비시킬 수 있는 상대자로 삼는 것 자체가 용납하지 않는다.]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행하심 앞에 예수님의 구체적인 행하신 십자가 앞에 어떤 인간도 그것은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기존의 것을 다 없애야 되죠. 부서져야 되죠.

끝에 봅시다.
[레비나스는, 메시야와 인간, 양쪽을 함께 담을 수 있는 공통 영역을 구상하려 했는데 이러한 발상은, 인간의 윤리도 메시야가 원하는 윤리로 인정받을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기대감은, 철저하게 예수님만]

그 다음에 뭐라 되어 있어요? '홀로' 이게 중요해요. 이게 진짜 베드로도 몰랐어요. 베드로가 그 앞에 세 번 부인해야 됩니다. 왜? 자기하고 너무 관계없기 때문에. 예수님 홀로. 십자가 지신 홀로 그분 밖에 없어요. 옆에 강도는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았어요.

그리고 성령님께서는 뭡니까? 예수님이 홀로 하셨다는 걸 증거 하는 게 성령이에요. 성령은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니고, 레비나스 너도 아니고, 예수님 홀로, 오직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게 성령의 역사입니다. 마치 노아가 너도 아니고, 이웃집 아저씨도 아니고, 나도 아니고, 방주만 증거 하듯이 방주 타면 구원이고, 안 타면 지옥 가듯이, 지금은 예수님 홀로 지신 십자가가 구원이냐, 저주냐 결정 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여기 있게 된 것이 새 언약을 증거 하라고 주께서 뽑아 세운 줄 압니다. 마땅히 죽어야 되지만 주께서 뜻이 있어서 뽑아 세웠사오니 창세전부터 있었던 그 계획대로 저희들이 새 언약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증거하고 그걸 느낄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더 이상 우리의 자신에게는 오직 죄밖에 나올 수 없다는 것을 날이 갈수록 점점 많이 깨닫게 해 주시고, 십자가의 능력이 얼마나 넓고 크고 위대한 것인지를 다가오는 주님의 얼굴을 뵈올 때까지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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