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060530a [타인의 얼굴-레비나스 철학](1)
Re..060530a [타인의 얼굴-레비나스 철학](1)
이름 : 한윤범(IP:)
20060530a 부산강의-[타인의 얼굴-레비나스 철학](1)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합시다.
[타인의 얼굴-레비나스 철학]인데, 이 레비나스란 이 사람의 철학이 왜 우리가 신학을 하는 사람한테 왜 중요하냐 하면, 기존의 신학이 내가 어떻게 행할 것이냐? 내가 어떻게 행함으로 내가 어떻게 구원받느냐? 주로 그쪽이거든요. 하나님 앞에 내가 서 있으니까 내가 어떻게 하면 행동하는 내가 어떻게 구원받느냐 이렇게 하는 내 쪽에서 출발하는 그러한 신학이라면, 이 레비나스의 철학은 저기서 다가온다는 겁니다. 다가와서 나에게 그러니까 계시죠. 다가오는 계시.
왜 다가오는 가운데서 다가오는 계신인데 이게 어떤 계시냐 하면, 낯선 계시에요. 전혀 나에게 낯설다 말이죠. 낯설다는 말은 왜 이게 낯서냐 하면, 나는 나의 존재만 관심사, 처음부터 나에게 관심을 갖고 있고, 아무리 관심을 가져도 역시 나에게 궁극적으로 돌아오는 것은, 그렇다면 나는? 나에게 관심을 두는, 나로부터 시작해서 나에게 기여하는 그러한 관심에 대해서 이게 기존의 신학이라면, 다가오는 계시는 나에게 관심 두는 관심사가 아니라 그냥 낯설게 다가오기 때문에 이것이 상당히 특이성을 띠고 있는 겁니다.
내가 열심히 뭔가 행하고자하는 그런 윤리와 신학과 종교는 결국 이것은 뭐냐 하면, 나를 위해서 남을 희생시켜야 되는 그러한 아픔을 남한테 제공하는 겁니다. 특히 레비나스가 나치에 체포돼서 수용소까지 갔던 사람이거든요. 그때 유대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사람 취급을 못 받았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구사일생으로 집에 돌아오면서 자기 집 기르던 개가 자기를 반길 때 하아, 비로소 인간취급을 처음 받은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개만도 못한데, 그 이유가 뭐냐 하면, 개는 자기를 주장하지 않고 낮선 사람에 대해서 항상 기대를 걸고 바라보고 있는데, 인간은 자기 밖에 모르니까, 자기 밖에 모른다는 것이, 유대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학대했잖아요.
독일국민들이 독일 민족성이 자기 속에 함께 있는 유대 민족이라는 타인에 대해서 자기 민족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억압을 했던 그러한 나치인데, 그 나치의 독일민족이 그동안 얼마나 많은 관념적인 철학을 구축해 왔었습니까? 그리고 정치, 경제 모든 곳에서 그런 철학이 다 파고들었는데. 결국 그 철학이 우리한테 결국 보여주는 것은 뭐냐 하면, 내 잘되기, 나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내가 하나 돋보이기 위해서라면, 상대방을 짓밟아도 된다는 그러한 극단적인 집단이기주의로 전락한거다 말이죠.
그렇다면 그들이 기독교를 이야기하고, 하나님을 이야기하고, 구약성경을 이야기하고, 신약성경을 이야기할 때 과연, 이 레비나스 이 사람은 신을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또 신의 계시를 믿어요. 성경을 믿습니다. 그렇게 볼 때 과연 하나님과 하나님이 내렸다는 그 성경 계시가 이렇게 지독하게 집단이기주의로 나간 것이 최종 결론이라면, 그것은 하나님께 문제 되는 것이 아니고 그 해석하는 인간에게 크나큰 과오가 있다는 것밖에 안 된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결국은 기존의 자기를 학대했던 나치들의 윤리와 도덕이라는 것은 남을 희생하면서 자기가 착해지는 그러한 윤리와 도덕 밖에 더 되겠어요? 안 되지요. 이것은 진짜 참 여호와 하나님의 본 뜻이 아니다. 라고 이야기한 겁니다.
그래서 레비나스의 철학은 지금 여기 들어가기 전에 어렵기 때문에 먼저 언급하는 것인데, 자기 존재로부터 시작하는 그 철학에서 나온 윤리, 도덕은 그것은 아니다. 는 거죠. 그게 아니다. 라는 거죠.
그러면 진짜 하나님의 뜻은 어디 있느냐? 그것은 타인 속에 숨어 있는 겁니다. 낯선 인물 속에 숨어 있는 겁니다. 그리고 타인은 여기 나옵니다만, 타인은 나와 다른 사람이 아니다. 이런 말을 했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 타인은 나와 다른 사람이 타인이잖아요. 우리가 알기는요. 그런데 이 사람은, 타인은 나와 다른 사람이 아니다. 이 말은 타인은 나라는 말을 여기다 끼어 넣을 이유가 없이 그냥 다가오는 존재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보통 나만 볼 때 저 사람은 나와 얼마나 다르지? 차이 나게 보잖아요. 차이 나는 것을 보려면 나라는 것이 먼저 규정되어야 되지 않습니까? 나라는 것이 기준이 세우면 그때부터 문제가 있다는 거예요. 내가 결정한다는 거예요. 저 사람은 반길까, 거부할까? 반길까, 거부할까? 내 쪽에서 결정한다는 거예요. 그래가지고는 안 된다. 그래가지고는 결국 자기가 남에 대한 폭력을 가할 수밖에 없다 이 말이죠.
타인은 나와 다른 사람, 나를 빼버려라. 전혀 다른 사람이죠. 나와 다른 전혀 다른 사람으로 나에게 찾아드는 거죠. 그러니까 찾아드는 타인에 대해서 내가 가타부타 판단하거나, 배척하거나, 영접하거나 할 수 있는 권리가 우리한테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는 거예요. 그래서 타인은 신의 계시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차근차근 왜 나라는 존재로부터 출발하면 왜 안 되는가?
여기 1페이지, 위에서 다섯 번째 줄에. 서양철학은 전통적으로 '자아론'이었습니다. 자기를 향한 초월이며, 기어이 존재하고자 하는 노력만 벌릴 뿐이죠. '자기성'이, 그러니까 내가 누구냐 하는 것을 찾아가는 작업이었다. 타인 속에 하나님의 계시가 뭐냐? 그런 것은 전혀 관심 없었던 사항이죠. 처음부터.
[자기 자신 속에서 자신만 관계함으로써 인간은 타인과 바꿀 수 없는 자기 고유의 내면성]
남과 바꿀 수 없다. 얼마나 우리의 속내를 확 찔러줍니까? 남과 바꾸지 않는다. 아무리 좋아도 나는 남하고 바꾸지 않는다. 남과 바꾸지 않는 상태에서 이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사기죠. 완전히 거짓말이죠. 주님을 바꾸려고 왔는데, 우리는 예수라 할지라도 남하고는 안 바꾼다. 이렇게 나오니까 십자가를 운운한 그 자체가 전부다 사기가 되는 거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 지고 나를 따르라 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이것은 예수님을 믿을까, 말까 하는 그 판단력조차도 우리한테는 그런 권한이 없다 이 말입니다. 이것은 십자가를 진짜 아신다면, 십자가를 안 이후에는 자기 고수라는 것이 성립이 불가능하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아는 사람이 그렇게 많아도 십자가 아는지, 안 아는지, 나중에 그 사람들이 십자가 안다 하지만 쭉 글들을 보면, 자기 포기가 안 되었으면, 자기 부인이 안 되었으면 그 사람 십자가 근처에도 안 간 사람이에요.
사람이 십자가 근처도 안 가게 되면 십자가를 대체할 만한 어떤 신학적인 개념들을 쏟아 놓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라든지,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형상 이런 논쟁. 이거 전부다 거짓말이에요. 왜냐하면 예수님 여기 계시고, 내가 여기 있다면, 내가 예수님을 잘 섬긴다는 것은 결국 나를 확고히 잘난 나를 만들어줘야 잘난 나에서 예수님을 폼 나게 섬길 수 있지 않습니까? 그죠? 나라는 인간이 예수를 잘 섬길 것이다 할 적에 나라는 인간을 계속해서 괜찮게 관리해야 되고 나라는 인간을 잘 수리하고 평소에 5분 대기조로 관리를 잘 해 놨다가 주께서 명령 계시면 따르면 이렇게 거예요.
예수님을 잘 섬기는 것이 아니고 결국은 뭐냐? 내가 나에 대해서 포기를 안해야 된다는 이야기밖에 안돼요. 이게. 이것이 기존의 신학입니다. 삼위일체까지 동원시키면 삼위일체를 반드시 알아야 하나님 영광이 된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그러면 삼위일체 아는 주체는 누구냐? 내지, 뭐. 내가 실력을 길러야 하나님 영광이 된다는 겁니다.
그게 공관복음에 나오는 세리와 창기와 맞든가요? 간음한 여인하고 강도하고 부합되는 이야기입니까? 양이 길을 가다가 잃어버렸어요. 백 마리 양 중에서 한 마리 양이. 그 한 마리 양이 자기 관리해야 됩니까? 어떤 처녀가 동전을 잃어버렸어요. 동전의 길을, 땀을 뻘뻘 흘리면서 어서 주인한테 찾아달라고 낮은 포복해야 되겠어요? 탕자가 아버지 재산을 탕진했습니다. 그러면 탕자가 아버지께 돌아오기 위해서 번득하게 착하게 살아야 됩니까? 성경에 뻔하게 나오거든요. 불의한 청지기가 돈을 다시 주인에게 그 사기 친 것을 자수해야 됩니까? 신약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는 잃어버린 자를 그냥 찾는 거예요. 잃어버린 자가 훌륭한 자가 되면 잃어버린 자가 아니에요. 이건 영유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신학이라는 게 무서운 이유가, 잃어버린 자가 잃어버린 자의 그 의식 속에 상상 속에 마음속에 성경 전체를 다 집어넣어서 이 집어넣은 성경 지식을 가지고 잃어버린 자아가 훌륭한 자아로 변모하려는 그러한 시도, 노력, 큐티. 이게 십자가를 모르기 때문에 생긴 현상입니다. 이게 사기입니다. 사기. 이거는.
바로 이러한 것이, 이러한 것을 아직도 이런 신학과 이런 설교와 이런 목회를 하는 이유는, 사람 본능의 자기, 여기 나오듯이, 남하고 타인과 바꿀 수 없는 자아, 이러한 자기 본심을 스스로 힘으로 못 바꾸기 때문에 자기의 본능대로 신학하고 성경 읽고, 본능대로 큐티하고 교회 나오다 보니까 결국은 십자가는 집어넣다 빼버리고 결국 이거만 남는 거예요. 그래서 남는 것은 뭐냐? 내가 잘났냐, 니가 잘났냐? 그것밖에.
고린도전서 1장에 있지요. 우리 중에 잘난 사람이 누가 있으며, 지혜로운 자가 누가 있느냐? 못난 자를 택하여 하나님의 백성 되게 했는데 자랑할 것은 그리스도밖에 자랑할 것이 뭐가 있느냐? 이렇게 되어 있다 말이에요. 예수님이 누구냐를 니가 알아서 니 속에 집어넣어야 훌륭한 사람이 된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예수님 이야기하면서 이쪽 이야기한다는 것은 예수님과 이쪽을 다 설명할 수 있는 양발 차기할 수 있는 어떤 사건이 있었는데 그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다 이 말이지요.
사람들은 십자가 사건이 양발 차는 게 아니고 자기는 십자가 사건을 알아서 자기가 스스로 자기를 밀어서 예수님 나오라 하는 거예요. 이게 선교단체에서 이야기하는 뭐냐? 십자가 다리다 이러는 거예요. 십자가는 다리에 불과하고 자기는 다리는 건너가는 번듯한 하나의 건전한 사나이가 되어 있는 겁니다.
십자가는 하나의 사건이기 때문에 하나의 대상으로 잡을 수 있는 어떤 사물이 아니에요. 가지고 있을 그게 아닙니다. 십자가가 나에게 터뜨려서 내가 산산 조각나는 그 사건이지, 내가 십자가를 고이 모시는 그러한 성물이 아니에요. 십자가 거룩한 종교 물품이 아니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레비나스는 왜 인간이 그렇게 돼 있는가를 설명하는데, 그것을 가지고 뭐냐 하면, 여기 중간에 보면.
[타자를 나에게로 환원하고 나뿐만 아니라 타자에게 법으로 군림한다.] 중간에 나오죠.
[이런 노력을 한마디로 말해서 ‘자율성’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나는 타자를 나에게로 환원하고 나뿐만 아니라 타자에게 법으로 군림한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남을 나로 자꾸 전환하는 거죠. 그걸 제가 전에 이야기했잖아요. 자아의 확대, 자아의 확산.
[여기서 나의 자유가 성립한다. 나는 세계와 타인으로부터 나 자신을 분리하여 홀로 세계 안에 섬으로써 나 자신의 독립성을 확보하고 이 독립성으로부터 타자의 지배를 시도한다.]
이거는 각자가 다 그렇게 살아요. 그래서 이러한 자유. 이걸 자유의지, 자유라 하잖아요.
그런데 레비나스의 책을 보면서 아주 뛰어난 점은, 최고로 뛰어난 점은, 인간의 자유를 논하면서 자유의지에서 나온 자유를 논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주 뛰어난 점이에요. 제가 보기에는. 기발하고 뛰어나요. 그게 뭐냐 하면, 자유의지로부터 자유가 되면, 자유의지는 누가 갖고 있습니까? 의지는 누가 갖고 있습니까? 내가 갖고 있죠. 나로부터 자유에요. 내가 실행하는 자유다 말이에요. 나한테 자유가 있는데 그 자유를 내가 실행에 옮겼다 이렇게 되거든요.
그런데 레비나스의 자유는 뭐냐 하면, 바로 시작으로부터의 자유에요. 시작으로부터 자유라 하는 것을 여러분 생전 처음 들었지요. 자유의지로서의 자유가 아니라는 겁니다. 시작으로부터 자유라 하는 것은 나한테 없는 자유가 나를 사용해서 자유가 나를 수단으로 삼아서 자유 자신의 본래 모습을 드러낸다 이 말이죠. 내가 자유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자유가 나한테 다가와서 나를 빼앗아서 나를 자기 것 만들어서 자유가 나를 그 자유에 가깝게 사용한다 이 말입니다. 그렇게 될 때 뭐가 해석되느냐 하면, 갈라디아서 5장이 해석 됩니다.
갈라디아서 5장 13절,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됐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뭣을 위하여?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다 했지요. 우리는 이 성경을 보면서 얼마나 내가 자유를 이젠 내 것으로 삼았다는 관념을 가지고 얼마나 이걸 자주 봤습니까? 총신의 모든 교수들. 한국의 내놓으라 하는 모든 세계의 교수들이, 신학자들이.
이것이 뭐냐 하면, 옛날에는 자유가 없었는데 마귀한테 빼앗겼는데 이제는 자유를 갖고 있으니까 자유를 반듯하게 사용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겁니다. 그게 아니고, 그러니까 그게 어거스틴의 자유의지와 연관되어 있는 거예요. 이 한 마디가 기존의 모든 신학을 그대로 허리를 두 동강 내놨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가 자유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자유가 우리를 가졌고, 우리는 자유를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그 자유를 가지고 레비나스는 뭐냐? 그 자유는 우리 자유의지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한테는 없었다고 보는 거예요. 자유는 우리한테 없는 거예요. 우리가 있는 것은 기껏 자유의지지만 그 자유의지라 하는 것은 나를 더욱더 나답게 만드는 나를 굳히는 그런 횡포만 부릴 뿐이지, 하나님이 계시는 나 바깥에 있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를 내가 만들어내려고 해.
그러니까 내 바깥에 있는 계시를 들여다 볼 생각도 안 해요. 모든지 내 쪽에서 발산해야 돼. 내 갖고 있는 것을 실력을 발휘하고 그래서 그걸 끌어 모아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또 내 쪽에서 항상 쏘는 것은 내 쪽에서 쏘는 거예요. 외부에서 나를 쏜다는 생각을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 거예요. 나는 외부에서 쏨을 당해야 될 표적이라는 사실을 한번도 해 본적이 없는 거예요.
그 레비나스는 시장으로부터의 자유를 설명하면서 시간 개념을 여기에 도입합니다. 그 시간개념은 뭐냐? 미래에서 오는 시간 개념이에요. 그러니까 전에 이야기했잖아요. 장차 얼굴과 얼굴을 맞볼 것이요. 지금은 얼굴 안 보이잖아요. 장차 본다는 말이죠. 미래가 찾아와서 현재 나를 쏟아댄다 이 말이죠. 기존의 미래라 하는 것은 희망이고, 기대고, 이것은 하나의 비전일 뿐이에요.
레비나스는 말하기를, 기대의 미래가 왜 이게 엉터리냐 하면, 과거의 나와 연관되기 때문에 이게 엉터리일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아무리 미래라 하지만 그 미래는 과거의 내가 만들어낸 환상이고, 가상인 거예요. 욕망이다 말이죠. 그게. 그 욕망이 뭐냐? 더욱더 나로 하여금 나답게 하고 아까 나로 확고하고 타인마저 삼켜서 나의 지배 하에 두려는, 타인마저 내가 명령하려는.
그런데 레비나스에 의하면, 미래가 과거와 연결되어 있지 않는 오직 순수한 그걸 ‘순수미래’라 해요. 순수미래가 현재 나와 결합될 때 비로소 그 미래는 나 안에서 현재 결합되면서 나로 하여금 미래로, 다시 말해서 보이지 않는 무로 인도하는 거예요. 인도한다 이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누가 명령해요? 내가 명령해요, 미래가 나를 명령해요? 미래가 나를 명령하는 거예요. 내가 내 자유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누가 나를 명령해요? 자유가 나에게 이렇게 살라고 명령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는 문제. 이게 숨어있거든요. 숨어있고 낯설기 때문에 어디에 숨어 있느냐 하면, 여기에 대해서 레비니스가 여러 가지 예를 듭니다. 인간의 존재에 의해서, 인간의 존재라 하는 것은 항상 과거에서 물려받은 거잖아요. 과거에서 물려받은 존재는 주위에 있는 환경을 하나의 대상의 내가 정복해야 될 대상으로 본 거예요.
그런데 여기에 나와 있듯이 이 세상은 모든 것을 나의 대상으로 보는데, 여기에 1페이지 밑에서 다섯 번째 줄에 보면, 사실은 이 세상이라는 것은 나의 대상이 아니고, 내가 누려야 될 하나의 '요소'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예를 들면 물고기가 물에 삶의 요소입니까? 물고기가 그걸 해석해야 될 하나의 대상입니까? 물고기에서 물은. 그걸 삼켜야 될 내가 저걸 형식으로 규정지어야 되고 저걸 규정지어서 내 것 만들어야 될 그런 겁니까, 아니면 자기가 거기에 포함되는 겁니까? 자기가 거기에 포함되죠. 그러니까 그 안에 품에 안기듯이 안겨야 되는 거예요. 하나의 요소라는 거예요. 요소는 하나의 정복의 대상이 아니고, 그 요소에 묻힐 입장이 내죠. 오히려 반대로.
[물고기가 물을 삶의 ‘요소’로 체험하듯 세계는 사람에게 ‘요소’요 터전이다. 우리는 요소 속에서 살 뿐만 아니라 요소를 먹고 마시고 살고 있다. 마시는 물, 들이켜는 공기, 우리를 에워싼 따뜻함과 차가움]
부드러운 바람. 부드러운 바람이 우리가 요청하면 옵니까? 택시 부르듯이 옵니까? 여기 부드러운 바람, 하면 옵니까? 그냥 가만있는데 부드러운 바람이 부는 거예요.
여기서 레비나스가 기존의 다른 사람하고 차이점이 뭐냐? 기존의 사르트르 같은 것은 인간의 고해, 석가모니 같으면 인간의 고통, 고해로 보잖아요. 그러나 레비나스는 고해로 보지 않습니다. 고통, 고해로 보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고통하다, 불화하다, 부드럽다 하는 것은 항상 그 밑바닥에는 나라는 것을 먼저 의식하기 때문에 왜 나한테 고통스럽냐 하지만, 나라는 것을 빼버리면 '향유'지요. 왜 세상을 고통스럽게 보느냐 말이죠. 나라는 것을 너무 강하게 의식하다 보니까 고통으로 다가오는 거예요.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란 말이죠. 생각해 보면 부드러운 바람이 오잖아요. 그러면 그건 향유잖아요. 즐기는 거잖아요. 향유하는 거란 말이죠. 향유하는 거.
인간이 짜증내고 괴로워하는 것은 향유에서 뭐로 변하냐 하면, 나로 바뀔 때 나를 딱 때리면, 그 다음부터는 분노가 있고 짜증이 나고 화딱지가 나는 거예요. 그럼 그동안 자기가 즐겼던, 이게 뭐냐 하면, 왜 물고기 언제 화내느냐 하면, 왜 물에 산소가 적어. 이럴 때 화낸다 이 말이죠. 그런데 물고기는 물 속에 물고기지, 물 주변의 물이 아니에요. 그동안 즐기면 되는 겁니다. 즐기면 돼요.
[향유를 통해 자아는 삶과 활동의 중심이 된다. 향유는 자기의 응축이고 자신에게로 복귀 활동]
향유란 말은, 향유하고 요소의 차이점은 요소가 있는데, 그 바깥에 있는 산들바람을 내 것으로 만드는 순간, 내 것으로 복귀될 때 그걸 향유라 합니다. 즐기는 사람은 역시 내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레비나스의 철학을 하면서 자기를 부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자기를 더욱더 확고히 해요. 레비나스가 주체를 부수는 게 아니고, 주체를 정확히 하자는 거예요. 주체를 부수는 것은 누구냐 하면, 데리다나, 안 그러면 들뢰즈 같은 경우에. 그런 것은 스피노자 같은 경우엔 주체를 부셔버려요. 이것은 불교식입니다. 불교에서는 인간 자체를 옴의 집합으로 봐서 부셔버려요. 자아가 없고 무아사상에 들어갑니다. 무아가 됨으로서 자아로 생기는 번민과 고통과 질곡에서부터 항상 해탈을 추구하는 것이 불교와 현대 들뢰즈의 철학이거든요.
그런데 레비나스는 그게 아니고 더욱더 뚜렷하게 주신 것을 즐기자는 거죠. 이것은 바로 종교가 신을 인정하는 것과 신을 인정하지 않을 때 차이점입니다. 신을 인정하게 되면 뭐냐 하면, 은혜를 알아요. 은총을 안다고. 신을 인정하지 않으면, 신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결국 궁극적 인정해야 될 것은 뭐냐 하면, 믿을 놈을 나밖에 없잖아요. 내 고통은 내가 알아서 내가 처리해야 되는 데, 어떻게 처리하는가? 스스로 자기를 부인함으로서 고통을 처리하겠다. 이게 불교죠.
향유라 하는 것은 자기가 즐기는 것은 어느 누구도 빼앗을 수 없다. 하는 겁니다. 이것은 향유라는 것이 잘했다는 말이 아니고 레비나스가 이런 이야기하는 것은 그러니까 훌륭하다는 말이 아니고 우리가 이렇게 되자는 말이 아니고, 지금 뭔 뜻이냐 하면, 기존의 철학에서는 인간이 번민과 고통에서부터 인간을 출발, 탐색을 했는데 자기는 그렇게 하지 않고 즐기는 것으로 인간을 보자 이 말입니다. 이게 잘했다는 것이 아니고, 이게 잘했다는 게 아니에요. 여기 지금 오히려 눌려 있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을 이렇게 보는 겁니다. 기존의 인간들은 고통스러운 것이 인간으로 봤으며 이것은 인간은 그게 아니고 즐기는 것이 인간입니다. 라고 지금 레비나스가 우리한테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2페이지 위에서 여덟 번째 줄에.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은 줄 수 있지만 그를 대신해서 먹어주는 못한다.]
얼마나 맞는 말이에요. 그를 대신해서 먹어주면 상대를 약 올리는 거지. 이것은 뭐냐? 향유라 하는 것은 요소 세계 안에서 인간이 향유함으로서 더욱더 이 세상에는 내 중심이라는 것이 분명해졌다는 걸 이야기하는 겁니다. 내 중심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어설픈 타인에 대한 이웃사랑을 하지 마라 이 말입니다. 뭐, 이해를 한다? 안된다. 동정을 해? 소용없다는 거예요. 이웃사랑을 내 중심에서 내 자유를 사용에서 이웃사랑을 하겠다는 것은, 이것은 말도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볼 때 아까 갈라디아서 5장 13절에 말씀을 가지고 이제 자유로 남을 사랑한다? 이건 말도 안 되는 거예요. 왜? 인간은 본인의 향유하는 존재기 때문에 남의 아픔을 이해하지 못해요. 할 수가 없습니다. 남은 남이고, 나는 나기 때문에. 왜 나는 나냐? 원래 요소를 향유하는 것은 내가 주체기 때문에 그래요. 할 수가 없어요. 안된다고. 남을 이해 못한다고. 남에 있는 티끌을 내가 알아챌 수 없어요.
그러면 그렇다면 뭔가 우리 바깥에 있는 신의 계시, 타인을 통해서 오는 그 낯선 계시, 나로 하여금 향유에 머물지 않고 정말 신의 뜻대로 펼칠 수 있도록 하는 그러한 계기들, 그러한 기회들. 그걸 흔적이라고 하는데. 유명한 흔적. 흔적이라는 말은 모래밭에 작대기 하나 끌고 가면 흔적이 남잖아요. 신은 흔적을 남기면서 지나가고 있는 거예요.
그 흔적이 뭐냐? 타인의 일그러진 얼굴이라는 거예요. 얼굴이라는 말하고 머리하고 달라요. 머리는 하나의 물체지만, 얼굴은 표정을 말합니다. 표정은 머리가 못 만들어내요. 그 표정 안에는 모든 게 다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은 표정으로 오시지, 머리로 오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을 믿어 찍어서 그걸 조각 만들어 놨다고 그 예수님을 읽을 수 없습니다. 표정이라는 말은 결국 표정이 계시란 말은, 이것은 명사 위주로 규정지어서 계시를 아는 것이 아니고 명사에서 동사로 바뀌어야 됩니다. 그때그때 사건화 되어서 다가오는 거예요.
우리가 전에 시간할 때 이야기했잖아요. 하나의 사건이 주어지게 되면 그 사건은 우리가 그걸 명사화시킵니다. 하나의 규정을 형식을 행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레비나스는 그걸 가지고 ‘문법적 버릇’이라고 합니다. 항상 동사가 주가 아니고 주체, 누가 했느냐, 무엇을 했느냐? 목적어는 동사가 못 들어가요. 목적어는 명사가 들어가야 돼요.
밥을 먹니? 밥을 먹는다. 해야지. 사실은 밥을 먹는 게 아니고, 밥 먹는 행위를 향유하고 잇는데, 우리는 그걸 동사로 표현 못하고 밥을 먹는다. 이렇게 하는 거예요. 맛있나? 맛있다는 거예요. 그럼 그 밥 먹어보세요. 맛있는가? 안 맛있지. 왜 안 맛있느냐? 그때 맛있었는데 오늘 왜 같은 맛이 않나. 맛이 없지. 왜? 목적어를 먹는 게 아니고, 그때 그 당시 사건으로 맛있었기 때문에. 맛있음은 사건으로 나왔지 동사에서 나왔지, 밥이 나에게 맛있는 걸 주는 건 아니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그걸 언어표현으로 할 때, 그때 맛있으면 맛있다. 이렇게 하면 복잡해서 안돼. 왜 맛있나? 밥 먹어서 맛있다. 그 밥 어디 있는데? 니 먹어도 소용없어.
이걸 현대에 와서 왜 그러냐 하면, 밥이라는 그것이 멈춰있다고 생각한 그 의식 자체가 우리가 멈췄기 때문에 멈춘 의식으로 이렇게 쭈욱 고양이 오면 '잡았다.'하는 고양이 잡는 게임하듯이 딱 잡아서 스톱될 때 그때 우리는 멈춰서 바라보는 것이 우리가 멈춘 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모든 지 사건은 포착되는 순간, 그 사건은 쉬익 사라져버리고 나한테 포착된 정지된 내가 거기다 새로 투사한 나의 의미, 나의 가치만 거기에 포로 되어 나옵니다.
어제 알고 있던 십자가는 어제용이에요. 오늘 알고 있는 십자가는 아닙니다. 그러면 어제 알고 있는 십자가로 오늘 알고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지옥가지. 그럼 난 지옥 가겠네. 천만의 말씀. 주의 성령께서 사건을 일으키기 때문에 성령이 임한 사람은 오늘은 오늘 분의 십자가 복음에 대한 믿음을 오늘 또 줘요. 그래서 우리는 주님 없이는 못 살아요.
과거에 갖고 있던 십자가 믿음을 가지고 버티려고 한다면, 그거는 어제용이기 때문에 사건의 주인공이 내가 돼버려요. 그러면 나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고, 나는 내 능력으로 내가 구원받는 것이 되는 겁니다.
이게 하나하나 따져보면 마음에 안 들어. 도대체 세상의 모든 학문이고 사고방식이고 간에, 신앙이고 신학이고 간에 도대체 마음에 드는 게 없어요. 공부하라 그렇게 해도, 안다. 맨 날 안대. 그 안 것은 어제 안 거에요. 그걸 부인해야 돼. 그걸 십자가 앞에서 날마다 부인해야 돼요.
다시 한번 봅시다. 인간은 과거를 보게 되면, 나라는 주체가 있기 때문에 과거를 대상으로 봅니다. 대상으로 볼 때는 규정시키고 형식으로 박스에 딱 담아서 보는 거예요. 과거에 난 이랬다. 오늘 아침까지 이랬다고 본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돼버리면, 나라는 존재자체권 속에 그것이 하나의 소유권으로 들어와 버리면, 그래서 그 소유권과 그 내용과 내가 하나가 되죠.
이걸 아리스토텔레스는 뭐라고 보느냐 하면, 이걸 본성, 또는 본질이라고 보는 겁니다.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철학자는 실존은 없다고 본 겁니다. 실존 이야기는 13세기 철학이 들어왔을 때 처음 나오고 그 이전까지는 실존이야기가 안 나옵니다. 그냥 존재가 있는데 존재는 보이지 않고 존재가 나에게 준 본성을 본질을 이렇게 늘어놓는 거예요. 이 세상에 발현시키는 거예요. 그게 잠재태에서 현실태로 바뀐다는 이야기에요. 가능성이 현실화되는 거예요.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시작도 끝도 없이 항상 현재의 운동은 과거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렇게 봅니다. 그 말에 누가 이의를 달 수가 없어요. 너무 뛰어나서.
아비첸나(Aviecenna, 980~1037)라든지, 아비첸나는 거의 다 수정을 했고, 아베로에스(Averrho s, 1126~1198)란 그러한 이슬람의 철학자들은 거기에 대해서 그대로 전수하고, 중세철학에 보면 거기에 대해서 논쟁이 많아요. 제가 언젠가 거기에 대해서 강의를 해드리겠습니다.
어쨌든 간에 여기 현재 내가 내 속에 있는 것은 나에 의해서 형식과 규정된 박스에 이렇게 짜여 있습니다. 그럴 때 순수미래가 다가오면서 나의 존재가 미처 알지 못하는 그러한 계기들을 제공하지요. 그 제공하는데 그것을 우리는 ‘타자’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타자인데 타자다움 이전부터라도 우리 존재 내에서 우리 존재를 오버하는 과잉 존재, 우리 존재가 미처 포착 못하는 내가 어쩔 수 없는 그런 사건들이 우리 속에 있다고 보는 거예요. 그게 아까 요소라고 했지요. 물고기가 물 속에 있는 게 요소지요.
요소가 우리 개인적인 존재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게 어떤 거냐 하면, 잠을 자는 것, 꿈을 꾸는 것, 남자와 여자, 그리고 특별히 죽음. 이런 것은 내가 나를 규정할 수 없는 그런 낯선 것들이에요. 왜 인간이 잠을 잡니까? 늘 깨어있어야지. 사람은 의식이 있어야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는데 잠을 자면 못 느낍니다. 따라서 인간이 요소 세계에 놓여 있지 어떤 세상을 잠을 내가 지배하고, 꿈을 지배하고, 특히 여성을 지배하고, 죽음을 지배할 수 없는 거예요.
특히 레비나스는 여자와의 성관계를 통해서 비로소 낯선 것을 느낀다는 거예요. 도저히 내가 이해해도 이해 안 되는 낯선 것이 항상 거기에 있어요. 여자를 통해서. 특히 아이가 태어날 때, 레비나스는 이런 소리를 했어요. 나는 아이다. 이렇게 했어요. 나는 나의 아이다. 내가 내 자식이다 이 말입니다. 굉장히 어려운 말이지요. 내가 나의 자식이다 이 말이죠.
왜냐하면 자식이라는 것이 분명히 내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나로 하여금 말을 하는 거예요. 당신 때문에 내 태어났다는 거예요. 당신 때문에 라는 말을 유일하게 하는 것이 내 자식이에요. 이것은 누가 나보고 '당신 때문에'라고 한다면, 내가 원치도 안는데도 불구하고 당신 때문이라고 갑자기 외부인이 다가올 때 나는 내가 규정하고 내가 설정한 영역, 이것이 전부가 아니며 그걸 지배받고 있다는 것을 아이를 통해서 아는 겁니다.
아버지, 왜 날 낳았습니까? 이렇게 나올 때. 아버지, 용돈 주이소. 아버지, 교통카스 좀 빌립시다. 니가 뭔데? 아버지, 내가 누군지 모릅니까? 니가 왜 생겼는데? 아버지, 그것 몰라요. 나는 자식을 원했지, 너를 원한 게 아니거든요. 무슨 말인지 압니까? 나는 자식을 원했지, 너를 원한 게 아니다. 라는 게 무슨 소리냐 하면, 내가 현재 규정한 과거에서 이어져 온 현재 규정한 자식은, 아이큐 176, 키 185, 그리고 건강하고 효도하고 그런 자식을 규정했는데 너는 왜, 니는 미래에서 온 코난이라. 내가 원치도 의도하지 않은 니는 누구고? 그러면 자식이, 아버지, 나 몰라요? 네가 나로 하여금 내가 너의 자식 되게 만드는 거예요. 그 자식이 나로 하여금 자식이 자식으로 만든 거예요. 나를. 그게 뭐냐? 시작의 자유에요. 내 자유의지는 멋들어진 자식이 나오기를 원했지요.
그러니까 그 자유의지는 순수 미래에요. 그걸 박살 당하고, 아이가 몰고 온 자유에 의해서 나는 뭔가 새로 시작해야 된다는 걸 요구받게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이삭이 아버지 아브라함을 구원하는 방법입니다. 어떻게 다윗의 자손이 다윗의 주가 되겠는가? 아무도 대답 못한 거예요. 그 당시 바리새인들 아무도 대답 못한 거예요. 어떻게 자식이 다윗의 주가 될 수 있는가? 어떻게 자식이 그 아비가 되고 아비가 그 자식이 될 수 있는가? 이것 강도사 시험 내야 돼. 아무도 못 맞혀.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았지요. 마태복음 1장에 나오잖아요. 마태복음의 1장의 그걸 해석 못합니다. 다윗과 아브라함의 세계라. 순수미래가, 언약이 미래에 얼굴을 맞댈 그분이 지금 과거에 집착돼 있는 어떤 자기규정에 자기 자유의지를 발휘하여 규정에 맺힌 우리를 그분의 자식으로 만드는 거예요. 그것이 온전히 여자를 통해서, 자식을 통해서, 꿈을 통해서, 잠을 통해서 내가 어떻게 담을 수 없는 특히 뭘 통해서? 죽음을 통해서.
물론 레비나스는 십자가라는 말 안 합니다. 왜냐하면 유대교인이기 때문에. 자기 죽음을 통해서 이야기합니다. 죽음이 자기에게 중요한 이유는 의식이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의식이 없다는 말은 훗설의 현상에 의하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인간의 의식이 만들어 낸 거예요. 그 의식은 어디서 나오는가? 인간의 몸체에서 신체에서 나와요. 인간의 신체에서 의식이 나오고, 그 의식이 모든 현상과 모든 것을 규정한다고 보는 거예요.
그러면 묻지요. 그러면 죽으면 의식이 없는데 어떻게 하려고? 답변 못해요. 답변 할 수가 없어요. 의식이 없는데.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고민이 됐어요. 의식이 없는 내가 죽음 이후에 어떤 존재로 버틸 수 있느냐 하는 그 문제가, 이거는 어거스틴부터 해서 토마스 아퀴나스까지 골치 거리였어요. 연옥이란 부록을 집어넣은 이유가 그것 때문에 그래요. 의식이 없는 내가 어떻게 음부에서 주를 찬양하리요.
레비나스는 말하기를, 삶과 죽음의 차이가 뭐냐를 살아있는 동안은 모른다는 겁니다. 살아있는 인간이 죽음에 대해서 논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이가 뭐냐? 차이를 알려면 양쪽을 다 알아야 되는데 차이가 뭔지도, 자체도 모른다는 겁니다. 이것은 결국은 뭐냐 하면, 인간은 자기 존재를 가지고 있지만 삶이란 존재를 가지고 있지만, 삶이란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계시를 아예 알지 못한다는 거예요.
비로소 죽음에 가야 죽음에 이르러야 삶도 알고 하나님도 알고, 죽음이라는 것도 알고 다 안다는 겁니다. 그 죽음이 우리에게 찾아오는 흔적이 뭐냐? 일그러진 병든 모습이죠. 생전 세계에서 쏘아대는 모든 진리라는 것은 그것은 다 환상이고 헛빵이라는 겁니다. 자기 주제 파악도 안 되는 주제에 어데 죽음을 논하느냐 말이죠.
그런데 그 죽음이라는 것을 모르는데 아까 이야기한 흔적을 남기죠. 그 흔적을 끊고 지나가죠. 그것은 뭐냐 하면, 바로 자식의 잉태라든지, 여자 .... 성관계 하면서 제일 궁금한 게, 내가 즐거운데 상대방도 즐거운지 제일 궁금한 거예요. 괜찮았어? 와 묻는데? 자기는 지금 지금 상대방을 배려해서 베푼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웃사랑이 과거에서 경험한 자기가 누적한 향유였지, 자기한테 갇혀진 향유지, 낯설게 다가오는 그 향유는 남의 향유는 아니다 이 말이죠. 그래서 성관계하면 짜증나는 거예요. 내 마음을 못 알아 주노. 마음을 왜 알아주는데. 즐기면 그만이지.
이게 레비나스 이야기입니다. 내가 지금 에로물 쓰는 게 아니고, 레비나스 책에 보면 나와요. 모르는 거예요. 다만 뭘 알아야 되느냐 하면, 나는 이토록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다슬기만한 것들이 자꾸 우리 주변에 하나의 요소처럼 우리 주변에 쫙 깔렸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타인한테 명령을 받아야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기존의 신학과 철학은 뭡니까? 내가 훌륭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잖아요. 뭐든지 내 쪽에서 출발하잖아요. 내가 잘나고 내가 반듯하게 살고 내가 거룩한 생활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거예요. 뭐든지 내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게 자유의지를 발휘하는 게 아니고, 시작된 자유가 있는데 그 시작된 자유는, 내가 만들어 낼 수도 없고, 내가 유발할 수도 없고, 외부에서 얼쩡거리며 하나의 흔적과 흔적들이 몰려오면서 나에게 톡톡 쏘면서 다시 하나의 사건으로 끝나버리고 가버리는 거예요.
자식이 그렇게 해도 나중에 결혼하면 떠나야 되고, 여자가 그렇게 성관계할 때 서로서로 사랑하니 해도 언젠가는 부부관계 해놓고 아침에 밥 먹다가 반찬 투정한다고 잔소리해대는 거예요. 여자가. 여보, 너무 좋아요. 해놓고, 반찬 뭐 없나 하니까, 이게 어디서 아침부터 반찬투정이야. 아까 그러면 좋은 건 뭐야 그러면? 심지어 시엠송에 ‘알 수 없어요.’ 같이 정말 알 수 없어요. 모든 게 포착되는데 여자만큼은 포착이 안돼. 그래서 여자의 마음은 갈대라 했어.
그런데 레비나스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다. 신의 뜻이다. 세상이 전부다 니 마음대로 된다고 생각하지 마라 말이지요. 그리고 그런 여자가 있다든지 그런 사태가 있다고 그냥 고개 끄덕이면서 돌아서지 말고 오히려 그 여자 말을 들어야 되고, 자식 말을 들으란 말이죠. 낯설다 싶으면 무조건 명령을 받아야 된다는 거죠.
내가 분명히 주체가 있지만 내 주체를 지배하시는 것은 내가 아니라 오히려 타자라는 거예요. 그게 타인의 얼굴이에요. 그게 타자의 명령이에요. 신은 타인을 통해서 나에게 명령한다 이 말이에요. 내가 그러니까 법을 쏘는 것이 아니고 그쪽에서 날마다 법을 쏘고 있다는 겁니다. 날마다 명령을 던지고 있다는 겁니다.
여기 3페이지 위에 봅시다. 2페이지 끝에부터.
[계획을 세울 수 있는 미래는 진정한 미래가 아니다.]
세상에, 미래를 계획을 세운다. 말이 됩니까? 말이 안 되는데 세우죠. 왜 세우냐? 우리는 향유기 때문에. 우리는 즐기고 그것을 과거로 규정하는 게 우리 주특기기 때문에 늘 계획을 세웁니다. 하루일과를 늘 세웁니다. 안 세울 때가 없어요.
[참된 미래는 손에 거머쥘 수 없는 것이다. 그 미래는 전혀 예기치 못한 순간 그것이 다가온다는 사실로 인해 시간의 공간적 외재성하고는 다르다.]
공간적 외재성. 그걸 외삽이라고 하죠. 외부적으로 쭉 길게 늘어뜨리는 걸 외삽이라고 합니다. 또는 외부적으로 둘러싸는 걸 외삽이라고 하지요.
[고통과 죽음의 경험을 갖기 전에 주체는 어떤 다른 것을 통해서, 다른 것과의 관계를 통해서 ‘자기’로서 정립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과의 관계를 통해서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게 된다. 주체는 단순한 존재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소유하는 존재자이다. 여기에 타인이 죽음과 함께 다가온다. 타인은 주체의 자기 동일성 바깥의 존재하는 세계에 속한다.]
세계에 속한다. 타인이 아니죠. 타인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타인이 안고 있는 그 세계가 다가오죠. 한 사람만 다가오는 것이 아니고 몰고 오죠. 자기 세계를 몰고 온다고. 그리고 현재 내가 구축한 나의 세계와 정립된 세계와 마주침이 있습니다. 마주치게 되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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