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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Re..20041206 부산강의-칼빈의 교회정치강의[신학]

Re..20041206 부산강의-칼빈의 교회정치

이름 : 한윤범(IP:)

20041206 부산강의-칼빈의 교회정치
(강의:이근호 목사)

50여명의 신학자 강의 책을 읽어보면, 옛날에 신앙 생활하는 사람이 요즘처럼 쉬엄쉬엄 그냥 즐기기, 취미삼아 신앙 생활하는 게 아니고 죽기 살기로 했어요. 요즘 사람들이 신앙 생활한다 하더라도 정신상태가 목회자도 마찬가지고요.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종교라 하는 것은 하나의 작은 한 파트거든요. 그것 하고 옛날 당시에는 국가 전체의 사상적인 이데올로기의 존립을 결정하는 게 종교입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그 나라 자체가 안 될 정도니까요. 이건 네덜란드도 마찬가지고, 프랑스도 마찬가지고, 종교개혁도 마찬가지에요.

그런 입장에서 신학을 정립하는 정신상태하고 오늘날 사람 끌어 모으려고, 손님 끌어 모으려고 하는 그 사고방식하고 사고방식 자체가 너무 달라요.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그러니까 50여명의 신학자, 이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이 그냥 쉽게쉽게 넘길 수가 없어요. 하나하나 나, 이거 아니면 죽으련다. 할 정도로 매달리면서 성경과 하나님에 대해서 사색하고 연구하고 자기의 도를 닦고 자기를 수련하고 그런 결과로서 나온 것들이 이겁니다.

그러니 오늘날 이러한 칼빈이나 루터나 이런 사람들의 그 사람들은 한 마디로 말해서, 마귀와 한 판 벌이겠다는 거지요. 내 가족의 생계고 나발이고 뒷전이고,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이미 내 한 몸 주를 위해서 바치리라. 이런 정신 하에서 이 사람들이 살았던 겁니다. 이것 돌보고, 저것 돌보고, 교단 돌보고, 가족 돌보고 그게 안돼요.

시간이 좀 남으니까 하는데 ....

이번에 사이트에서 십자가로부터 출발하지 않은 뭐, 이런. 아주 너무 명확해요.
-명확하죠.
그래서 저는 이거를 주보에다 실어서 해줬어요. 아주 반응이 좋았어요.
저작권료 좀 떼어줘야지
-거저 받았으니 거저주어라.

어떤 사람이 이렇게 반론을 해요. 십자가 밑에 죽어 있으면 안 되잖아. 선한 행실을 해야지. 이렇게 해요. 기가 차서. 십자가 밑에 죽어지내서 구원 받으라 하면, 그 인간도 이단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을 위해서 어떤 것도 구원에 대해서 구원될 수 없거든요. 구원된 사람의 이런 모습으로 살아가는 그거지, 구원 받기 위해서 죽어 있다든지, 그것도 이단이에요. 구원받기 위해서 착한 행실을 안 한다든지, 이것도 이단이에요.

이번에 윤 뭐이라 하는 그 사람하고 논쟁하는 가운데 반가운 것은 그중에 이준이라는 사람이 글 남겼는데 글 얼마나 잘 썼는지, 우리교회 교인들이 감탄을 해요. 사이트에 이준이라는 사람이 반박한 글을. 그게 쓰는 게 힘들어요. 몇 시간 걸린다고. 뻔한데 쓸라 하니까 몇 시간 걸리잖아요. 그 수고를 해줬잖아요. 참, 잘 썼지요.

그래도 그거를 목사님이 안하고 그 양반이 하니까 미치는 거야. 정영균인가 하는 그 사람이 반응이 있을 것 같은데.

그래서 삭제하는 그 이유에 대해서 제가 글을 남겼는데, 삭제한 이유에 대해서 글을 남긴 것을 보신 적 있습니까? 그 글을 보고 이단들은 미치는 거예요. 글로 남길 수도 없고 쓸 수도 없고.

목사님이 삭제했습니까?
-삭제한 이유에 대해서.
삭제는 누가 했습니까?
-삭제는 내가 하지요. 10시 퇴근해서 자기 바쁜데 손무성 목사님. 보지도 안 해. 사이트 보지도 안하는데.

들어보면 크로스빌리지 오히려 도와주는 셈이 돼요. 안 들어오면 자기는 이단으로 간주되니까. 이래요. 뭔가 반대를 하려면, 예를 들어서 십자가를 전면에 내세울 때, 이걸 반대하고 싶잖아요. 십자가가 다가 아니다, 반대하고 싶잖아요. 반대하려면 십자가에서 발생된 여러 가지 이론을, 요 선을 끊어버려야 된다고. 십자가마을에서 이야기하는 십자가이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양상으로 신앙생활을 될 수 있습니다. 라면, 이걸 전체를 반대하고 싶으면, 요 고리를 끊어버려야 되잖아요.

그런데 요 고리를 끊으려고 들어가 버리면, 자신이 이단으로 노출 돼버려요. 그러니까 어떻게 하냐? 이것도 맞는데 이렇게 된다고요. 이것도 맞는다 하면, 뭔 뜻이냐 하면, 십자가 말고 다른 노선이 또 필요한 거예요. 제2의 노선. 이거 두 개를 다 가지잖아요. 그들이 제 글을 안 읽어본다든지 읽어봐도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십자가라는 것이 요 십자가 외에는 십자가가 두 번째, 세 번째를 공격한다는 사실이 이 논리 속에 포함되어 있는데 이걸 그들은 모르는 거예요.

왜냐하면 십자가라 하는 것이 무행함이 아니고 행함이 있잖아요. 여기 누구 행함이죠? 예수님의 행함이잖아요. 예수님의 행함으로 모자라면 두 번째 갖다 첨가해. 예수님을 부족하다면 첨가하라고요. 그러면 예수님이 만족하기 때문에 이런 경우가 된다면, 이걸 반대하고 싶으면 예수님이 하는 걸로 모자라서 이걸로 보태야 됩니다. 선한 행실로. 이렇게 되려고 달려들면, 이게 사실 본심인데, 달려들면 공격하다가 자기가 이단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할 수 없는 거예요.

이거는 목사뿐만 아니고, 한국에 있는 모든 신학교수들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 이야기해서는 외국에서 박사학위를 못 받아요. 왜? 외국 자체가 모든 교회가 이단이니까. 이단에서 학위를 받을 수 없는 것 아닙니까? 이걸 이야기해줘야 인류 복지에 공헌한다는 의미에서 박사학위를 받는다고.

그러면서 그들은 내심 안심을 했지요. 왜냐하면 한국의 어느 목사도 자신의 정체를 밝혀 낼 자는 없을 것이라고 내심 안심을 했는데, 십자가를 이야기해 보니까 그들은 겁이 나는 거예요. 들킬 줄 몰랐을 거예요. 자신의 박사학위의 이런 밑바탕의 허점이 들킬 줄 몰랐을 거예요. 그래서 총신교수회의에서 가결했어요. 우리나라 어느 목사도 섭외해도 좋은데 이근호 목사는 부르지 말라고 총신교수회의에서.

그런데 그것을 본인들이 모르고, 모르니까 ....
-알아요. 아는데 믿음이 애초부터 개척교회 할 마음이 없고, 교수를 할 마음으로 젊은 청춘을 보냈기 때문에 자신이 불신앙적이라는 것을 알아요. 교수라는 월급이 날 살려주지, 예수가 안 살려줘요. 예수라 하는 것은 그들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예수는 과거의 존재에요. 성웅 이순신처럼 이미 과거에 간 사람이에요. 그걸 다시 끄집어내서 그의 모범을 본받자 하는 정도에서 취급하지, 지금 예수에 의하여 이끌림을 받는다는 것을 그들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신의 개념도 마찬가지에요. 신의 개념이 사람마다 성장과정이 다르고 가정환경이 틀리기 때문에 교회마다 백 명 같으면 백 명 교회의 신이 다 달라요. 그때 어떻게 하느냐, 그 교회에 가장 헌금 많이 내는 재벌, 재산가의 신 개념에 사람들이 목사든 뭐든 동조를 할 수밖에 없어요. 옳습니다. 장로님의 신 개념이 옳습니다. 해놓고 거기에 동조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이걸 제가 이번 12월에서 1월 달까지 연구하려고 하는 것이, 칼 슈미트의 정치철학을 연구하려고 해요. 이번 공부에 이것도 공부해야 되겠죠. 칼 슈미트의 정치철학에 대해서 제가 서울 가서 형편 되면 도서관도 가고, 안 그러면 책이 되면 책으로 연구하고, 한 달간, 또 몇 달간 걸릴지 모르는데 제가 글을 쓰겠습니다.

칼 슈미트라는 법철학자, 정치철학자가 독일에 1920대, 30대에 있어요. 이분의 사상이 뭐냐 하면, 신앙가로서 정치를 어떻게 해야 되느냐에 대한 최고의 이론가요 실천가입니다. 신앙가로서 정치를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이것은 왜 이게 필요 하느냐 하면, 신앙가로서 교회를 어떻게 정치할 것인가, 어떻게 행정을 할 것인가? 같이 통하는 맥락이 같습니다.

이 사람은 나치주의자이에요. 히틀러 옹호자입니다. 히틀러 밑에서 일했고, 히틀러 밑에서 그가 한 것은 반유대주의를 강력하게 외쳐서 히틀러의 정치이론을 제공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전범수용소까지 재판 받았던 사람이에요. 직접 유대인의 학살에 관여를 안했기 때문에 한 몇 년 살다가, 1년? 16개월 살다가 풀려나왔어요. 풀려나와서 직업도 없이 쓸쓸하게 보낸 사람인데.

그러면서 지금 21세기에 들어와서 전 세계의 모든 정치학자들이 칼 슈미트의 정치철학을 합니다. 이게 뭐냐 하면, 옳고 그름은 정치에서는 옳고 그름을 이야기하지 마라. 옳고 그름은 신앙에서 옳고 그름이지, 정치에서는 옳고 그름이 아니고 동지냐, 적이냐 로만 구분된다는 거예요. 동지냐, 적이냐 구분할 때 이 구분이 뭐냐? 정치라는 거예요. 동지냐, 적이냐?

근데 신앙인의 입장에서는 이 정치와 무관할 수 없는데, 어떤 인간도 정치와 무관할 수 없어요. 어떤 인간도 열린우리당을 하든지, 한나라당을 하든지, 무효를 하든지 어떤 인간도 적과 동지 사이에 제3의 자리를 마련할 수가 없습니다. 교회가 목사 편, 장로 편 갈라질 때 어떤 인간도 제3의 자리에 있을 수 없어요. 양쪽 다 틀렸다는 말 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교회는 정치라는 단체이기 때문에.

그래서 이 사람은 칼 슈미트는 캐토릭주의거든요. 캐토릭이 신앙으로 어떻게 정치와 되었는가를 가장 멋지게 보여준 것이 캐토릭이라는 거죠. 캐토릭에서 반유대주의를 공격합니다. 이렇게 보면 됩니다. 그 가운데 정치라 하는 것은 캐토릭주의의 신앙을 옹호하기 위해서 정치가 동원돼야 되는데 정치적인 입장에서는 진리냐, 비진리냐가 아니라 동지냐, 적이냐 둘로 나누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거는 항상 이 사람이 하는 말이 한시적이다. 정치는 영원불멸이 아니고 한시적으로 적과 동지를 구분하는데 그 다음에 제가 이야기하는 것이 뭐냐 하면, 오늘날 21세기 정치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단어가 나오는데 그게 뭐냐 하면, 정치를 결정하는 것은 결단력이다. 이겁니다. 결단력은 옳고 그름이 아니에요. 그냥 결단해 버리는 거예요. 결단력을 결단력에 권위를 주기 위해서는 이유 없이 한 사람에게 표를 몰아주어야 된다는 거예요.

여기에 이 결단력을 저해하는 가장 나쁜 인간들이 누구냐? 유대주의인데, 유대주의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자유주의가 나와요. 소위 말하는 요새 말하는 민주주의가 나와요. 이 민주주의를 처단해 버려야 돼요. 왜? 지도자의 결단력을 반대하기 때문에. 자유로운 의사소통? 웃기는 소리하지 마라. 그런 것 다 때려치워라. 자유로운 선거 다 때려치우고, 뭐 여론을 형성해? 그런 것 다 때려치워라. 오직 모든 프로그램을 지도자에게 맡기고 지도자가 자기의 결단력에 의해서 정치를 이끌고 가도록 하라 이 말이죠.

그러니까 영원한 독재를 방기 위해서는 한시적인 독재가 반드시 있어야 된다고 주장한 사람이에요. 이게 이 사람의 핵심이에요. 영원한 독재, 절대독재를 방지하기 위해서 한시적으로 그 지도자에게 투표에서 이긴 지도자에게는 모든 목표를 줘서 한시적으로 독재를 해서 결단을 내려줘야 나라꼴이 된다 이 말이에요.

이게 캐토릭이 아주 잘 보여 주는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의 사명을 받은 소위 신앙가들은 이러한 결단력을 내려야 될 그러한 중차대한 그러한 사명을 지녔기 때문에 자기가 유대주의, 이런 인간들의 고유한 권한들을 주장하는 이런 것들의 자유로운 의사소통 이런 것을 자기의 결단력에 의해서 적으로 간주하고 처단할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히틀러가 어떻게 총통 됐습니까? 투표로 됐잖아요. 그거 절대다수의 투표 아닙니까? 투표로 되었으면 그 사람이 어떤 결의를 하든지 간에 맡겨야지. 맡겨서 그들이 결의를 할 때 비로소 정치는 된 거예요. 정치는, 그러니까 히틀러가 옳고 나쁨을 따지지 말자. 적이냐, 동지냐를 결정해줘야 이게 질서가 생긴다는 거예요. 히틀러 편이냐 즉 동지, 히틀러의 적은 동지 앞에 날아가야 돼요. 이것이 하나님이 인간에게 준 사명이에요.

이거는 오늘날 21세기, 박정희를 밀고 옹호하고, 전두환을 옹호하고, 그리고 부시를 옹호하는 이런 정치판국에서 칼 슈미트, 히틀러를 옹호했던 그 사람의 이런 철학이 다시 한번 각광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한국교회에서 제가 여기에서 열나는데, 한국의 보수교단, 보수교회에서 자기의 한번 잡은 권력을 안 내놓는 이유가 이 논리에 있었습니다. 옳고 그름을 묻지 말고,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묻지 말고.

교인들은 옳고 그름을 원하는 것이 아니고,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질서를 원한다. 그러면 그 질서를 위해서 당회장 목사한테 목사의 결단력에 믿어 둬. 이 말이죠. 부교역자, 똑똑하다, 똑똑하다 그 질 높은지 따지지 말고, 부교역자가 현재 당회장에게 동지냐, 적이냐로 구분해 버려요. 그래서 아무리 똑똑한 부교역자라도 적이 된다면, 이거는 사표내고 나가라고 해야 돼요. 그래야 교회 꼴이 돼요. 캐토릭이에요. 오늘날 개신교는 캐토릭입니다.

왜 캐토릭으로 전환될 수밖에 없는가? 그것은 칼 슈미트라 하는 이 사람이 노골적으로 신앙의 그러니까 신앙이 세상적으로 어떠한 신앙의 흔적들 표적들을 보여줄 것이냐에 대해서 캐토릭은 교회란 절대 정치, 교회라는 게 있다면, 그것을 반대했던 것이 루터이잖아요. 루터 개신교 아닙니까? 그 반대했던 개신교가 어떻게 도로 지금 회귀하고 있느냐? 회귀하고 있느냐를 보여주고 있는 그 정치철학을 칼 슈미트가 너무나 적나라하게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칼 슈미트가 이런 유명한 말을 했어요. “구별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거는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의 식구가 짝수든 홀수든 이렇게 있다면, 딸이 아버지, 왜 그런 행동합니까? 니, 내편인가, 내편 아이가? 고걸 딱 보지요. 드라마에 그런 것 많잖아요. 누가 잘못한 것 지적할 때, 니, 왜 내 편 아이가? 그것부터 묻지요. 이게 정치의 첫걸음이라는 거예요.

모든 것에 정치 안 들어가는 것이 없고, 정치가 행사되지 않은 곳이 아무도 없다. 이것이 기업이든, 교회든, 가정이든 어디든. 니는 내 편이냐, 내편이 아니냐? 그것만 구분하는 거예요. 옳으냐, 그르냐가 아니에요. 제가 언젠가 그런 애기했지요. 인간의 진심은 진리가 아니라고.

그래서 이 칼 슈미트가 뜨고, 흔히 경영학에서 말하는 인간의 리더쉽, 리더쉽을 어떻게 확고히 다질 것이며, 그 리더쉽이 기업경영에서 얼마나 많은 효과를 줄 것이냐를 인간의 지도자에 있어서 칼 슈미트의 이론이 국가경영에서 교회경영에서 상당히 중요한 이슈를 차지하죠.

그래서 이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제가 연구해서 책을 보고 파악해서 칼 슈미트의 이론이 오늘날 교회에 어떻게 먹혀들고 있는가를 내일부터 서점에 가서 많은 자료를 구해서 제가 하겠습니다. 칼 슈미트의 이론은 아마 1월 17일 날 강의할 때 칼 슈미트의 이론에 들어가고, 또 하나는 뭐냐 하면, 불교.

대승기신론? 기신론이라고 불교의 6세기 이후에 그러니까 초기 불교부터, 초기 불교, 중간 불교, 유식 불교 이렇게 나오다 불교가 발전합니다. 최근 6세기부터 완성된 기신론적 불교가 완성이 돼요. 불교의 인간은 왜 행하느냐? 인간은 행함에서 어떻게 구체화 되느냐? 세상 사물을 불교에서는 어떻게 보느냐? 불교는 모든 움직임에 대해서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 하는 그것도 제가 이미 글을 써놨습니다. 그것도 참고로 내가 강의에 첨부시킬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다가 왜 행하느냐하는 화이트헤드, 화이트헤드하고 불교하고 거의 유사해요. 스피노자, 라이프니찌. 그 다음에 스토아학파. 전부다 유사합니다. 그리고 토마스 아퀴나스의 무한과 유한이 접착했다가 발산되는 것. 무한, 절대와 최고의 자리. 절대와 최고의 자리가 있는 한 인간은 배고파요. 신이 있는 한 인간은 배고픕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어지간해서는 자기 만족할 놈들이 아니에요. 이 정도 착하니까 이만하면 됐다하는 정도로 머물 인간들이 아닙니다. 최고와 절대가 코앞에 보이는데 그 고지를 점령해야지 그걸 방치하고 있을 인간들이 아닙니다. 그 무한에 대해서 어떻게 집념을 가지고 그걸 추구하느냐 하는 그 문제. 그리고 그것이 주님께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해요. 올라왔나? 잘 올라왔다. 에라이, 죽을 놈아.

책, 제일 뒤에 봅시다. 여러분들이 50여명의 신학자들, 이 책은 한번 휙 흩어보고 말 책이 아니고, 두고두고 새겨봐야 돼요. 여기 뒤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죽이기 위해 사람들을 살려주고 있다.]

그런데 죽이는 사람은 시시한 놈 죽이는 게 아니고 신의 최고의 자리에 올라온 놈을 죽여 버려요. 이 정도 올라왔나? 그것도 거룩이야. 해서 죽여 버려요. 예수님 당시에 최고의 자리가 누구였습니까? 바리새인이었어요. 그 바리새인을 악마의 화신으로 정죄함으로서 바리새인 뒷줄에 서 있는 줄줄이 서 있는, 도미노현상이죠. 바리새인을 열렬하게 추종하고 있는 모든 인간이 다 넘어지죠. 바리새인 톡 밀면 그 뒤에 다 넘어지지요.

여기 강도사님 연락 안 됩니까? 했어요?

그 다음에.
[인간들은 자신의 삶을 통해 자신이 욕망하는 활동하는 장비요 장치다.]

자기가 욕망을 다스리는 게 아니고, 뭐가 자기를 가지고 다스린다? 욕망이 자기를 가지고 노는, 자기 몸은 욕망이 자기를 가지고 노는 활동의 장치다. 들뢰즈의 이론에 의하면 그 욕망은 어디서 생기느냐 하면, 우리 각 부분에 차지하고 있는 세포, 분자구조선에서 이미 욕망이 발생됩니다. 그러니까 세포 하나하나가 자기 욕망을 가지고 있잖아요.

욕망이라는 게 딴 게 아니고 세포가 스스로 살려고 하는 의지 아닙니까? 그 의지가 60조개인가 70조가 있다고요. 이것들이 모여서 서로 구더기, 벌레처럼 들 끊고 있으니까 그게 뭐가 됐다? 인간의 몸을 조정하니까 그 조직체에 있는 것이 하나하나 살려고 하니까 그게 인간의 욕망이 되니까, 몸이라 하는 것은 그들이 세포들이 만들어내는 하나의 이미지죠. 가상현실이죠.

이미지는 뭔 뜻이냐 하면, 멀리서보니까 구미에 가면 그런 산이 있는가? 구미에 가면 부처가 누워 있는 산이 있다. 멀리서 보면 부처가 누워 있는 것 같아요. 가보면 바위하고 풀하고 그것 밖에 없지요. 멀리서 보면 이미지가 되겠지요. 네온사인이 보면 깜빡깜빡하는데 멀리서 보면 글자가 나오잖아요. 그게 이미지 아닙니까? 그렇게 디자인해서 이미지를 디자인해서 만들어낸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우리 몸이 점멸하는, 여기 나옵니다만, 전자로서 점멸되는 이것인데 이게 몸 안에 이미지를 만든다고. 결국 인간은 몸이라는 것은 자기가 자기를 그렇게 감상하고 그런 자기가 자기를 망상하는 것 같은 인상, 인상을 그렇게 보는 거고, 사실은 안에는 구더기 같은 퇴물이 들 끊지요. 그러니까 사는 의의가 뭐? 결국 욕망이고.

욕망은 두 가지지. 욕구와 요구. 요구라 하는 것은 자연적인 그냥 살려는 그것이고. 그것이 잉여, 자꾸 뭔가 그냥 살게 되는데 이놈의 살려는 것이 더 살려고 해. 이것이 사자나 코끼리 보세요. 계속 죽이려고 하면 움찔하고 방어를 하지요. 이것은 세포도 마찬가지거든요. 그러니까 현재 요구에서 머무는 게 아니라 잉여적으로 더 살려고 한다고. 살려는 게 잉여고 욕구가 돼버려요. 그게 두 개 합쳐서 욕망이 되는 거예요. 이 욕망을 인간이 어쩔 수 없잖아요.

그래서 인간 쪽에서 인간 선에서 짐승이나 동물이나 개, 돼지 선이 아니고, 인간 쪽에서 생각한 것은 뭐냐? 살려면 어떻게 하면 되느냐? 인간들은 생각하기를 착하면 더 살려준다는 게 있어요. 선하고 착하게 살면, 복을 받아서 더 살 거야. 그래서 욕망은 뭐로 감춰지겠어요? 근데 남의 의는 안돼요. 자기가 자기만의 의가 자기를 살려요. 물론 남의 의에 빌붙어서 사는 경우가 있습니다. 남편이 착하니까 난 빌붙어서 복 받겠다. 하는 여자 같은 경우가 있잖아요.

무슨 말이냐 하면, 교회에서 교회의 문제점이 뭐냐 하면, 누가 선하냐? 전에 애기했는데 교회에서 문제점이 누가 더 선하느냐? 하는 문제거든요. 교회의 보이지 않는 경쟁이 그겁니다. 누가 더 성화되었느냐? 그런데 누가 더 성화되었느냐는 결단 되는 것은 뭐로 결단 된다 했습니까? 누가 많은 재산을 가졌느냐? 누가 더 건강하냐? 아무리 착해도 목사 비실비실 아프면 저거, 분명히 뭐 죄졌다. 이러거든요. 그러니까 건강하고 재산 많으면 이것은 복을 많이 받은 거예요. 그러니까 등쳐먹고 해도 출세만 하면 권력이 높아지면 착한 사람이에요. 복 받은 사람이에요.

이것은 바로 우리의 욕망 아닙니까? 자신에게 의가 없어 자기는 팔자가 더러운데 센데 남이 갖고 있는 재산, 재물을 뭐로 본다? 복으로 보고, 이 복은 그 사람의 의에서 왔다면, 결국 그 사람에게 빌붙어서 살겠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의에 빌붙어 살겠다는 거죠. 그런데 이게 이 재산가가 최고의 자리, 절대의 자리가 있지요. 그게 신 아닙니까? 신은 최고의 자리, 최고의 재물을 갖고 있으니까 그 신의 의로움에 빌붙어서 내가 빼먹자는 내가 원하는 현재의 팔자 좋은 행복한 삶을 내가 빼내겠다고 빌붙을 때, 이걸 가지고 겸손한 마음, 어린아이 같은 신앙, 뭐 이래요.

그러니까 최고의 자리, 옛날에 부처가 최고의 자리였는데 비는 것. 오늘날 신학생들의 문제점이 뭐냐 하면, 자꾸 절을 만들려고 해요. 절이 돈이 되니까. 교회라는 이름의 절을 그렇게 탐내요. 나는 언제 큰 절 한번 가져보나. 특히 부산에 가면 큰 절 안 많습니까? 굉장히 큰 절 많지요. 유명한 절. 범어사. 옛날부터 한번 가본 적도 있고요. 소문이 전국에 자자해요. 범어사 돈 많기로. 원래 바닷가에 불교가 심하잖아요. 범어사, 돈 많기로 유명한데 아닙니까? 그래서 신학생들이 뭐, 복음을 알고 공부를 합시다. 그러는데 근본적으로 큰 절을 한번 사찰을 만들겠다는 그런 의미라면 아무런 소용없어요. 성경공부해도 소용없어요. 이미 자유자가 되어서 자유를 외치는 ....

이준 씨가 자유라는 설교가 좋았다고 해서 내가 다시 보니까 오늘 아침에 봤는데 사도행전에 제가 설교한 [자유]라는 설교가 있었던 모양이에요. 김대익 씨한테 너무 좋았다고 이준 씨가 추천해서 설교를 다시 올려놨어요. 아침에 우리교회 사이트에 올려놨어요.

그러니까 사찰, 절, 전문종교인, 그걸 자꾸 마음속에 희망한다면, 그건 살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에 상당히 나중에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에 아마 용서받지 못할 거예요. 아마가 아니라 확실할 거예요.

좀더 봅시다.
[인간의 몸으로 등장해서 몸으로 사라지죠.]

그러니까 인간은 몸으로 등장해서 몸으로 사라진다는 말은 요 말이 어려운데, 인간이라 하는 것은 보조용어고, 실체는 아니에요. 뭐가 실체입니까? 몸이죠. 몸으로 등장해서 몸으로 하는데 딱히 포착할 게 없어서 그냥 인간이라 하는 거예요. 참, 듣기 싫지만 너무나 적나라한 현실입니다.

아무리 젊을 때 믿음 좋아도 나이가 70세 되면 30%가 치매고요, 80세 때는 50%가 치매에 있습니다. 치매에 들어가면 뇌 뉴론 상태가 뭉개져요. 뭉개지면 그때부터 몸의 본능적인 반응이 나타나는데. 그게 얼마 전에 심방가면서 우리교회 어떤 교인의 어머니, 80세 넘었는데 치매 걸려서 갔는데, 사람이 이렇게 뭉개지니까 평소에 자기가 사탄이라고 여겼던 것이 드러나요.

사탄은 뭘 사탄이라고 하느냐면, 나의 몸을 힘들게 하면 다 사탄이에요. 그러니까 찬송을 부르니까 사탄아, 물러가라. 그래요. 성경을 보니까 사탄아, 물러가라. 나는 이제 예수도 모르고 하나님도 모른다. 그런데 그 할머니가 수십 년 동안 철저하게 자식들에게 본인 스스로가 감사헌금 하나 안 빠지고, 십일조 한번 안 빠지고, 주일성수 하나 안 빠지고, 자식들에게 꼭 하나님 믿어야 된다고 수십 년 동안 당부했던 사람인데 치매 걸리니까 목사가 찬송 부르니까 찬송하지 말라고. 저는 아닙니다만. 제가 간 건 아닙니다만. 저는 의사를 물어보고 하거든요. 찬송할까요? 물어보고 하거든요. 저는 아닌데, 찬송하면 사탄아, 물러가라. 나는 하나님이고 뭐고 다 싫다. 다 귀찮다. 그거 다 사탄이다. 자기 빼놓고 다 사탄이다.

왜냐하면 이게 뭉개지니까 이미지가 두뇌에 남아있는 게 뭐냐 하면, 신이라는, 사탄이라는 그 개념은 두뇌 속에 마치 웅웅웅 메아리처럼 움직이고 있거든요. 원래 두뇌 학자들에 의하면 대뇌피질에 보면 옛날에 있었던 여러 가지 개념들이 돌아다니면서 웅웅 남아있습니다. 이게 하나 뭉개지더라도 이미지는 남아있어요. 남아있는데 그 이미지가 내용이 바꿔요. 뭐냐? 몸이 불편 하냐, 몸이 편하냐에 따라서.

결국 뭐냐 하면, 이거에요. 사람이 몸이 컨디션이 안 좋으면 모든 것이 귀찮고, 귀찮아지면 다 사탄이에요. 나를 힘들게 하면 다 사탄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사탄의 모습으로 왔어요. 왜? 모든 사람을 정신적으로 압박을 가하니까. 그래서 예수님, 진짜 여호와 하나님은 뭐냐?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싸우론이라는 최고의 절대 악이 있잖아요. 그게 여호와에요. 사실은.

인간은 악마를 메시아로 모시고, 악마를 메시아로 모신 상태에서 인류가 계속 태어났기 때문에 진짜 메시아는 꼭 악마의 모습으로 오시게 되어 있어요. 그 둘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가는 곳마다 자기 적을 지정했어요. 내 적은 이렇다고 계속 지정한 거죠. 왜냐하면 예수님은 싸우러 오신 분이에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참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상태가 뭐냐? 싸움꾼 아닙니까? 이스라엘은 싸움으로 오기 때문에 싸움은 반드시 적이 있어야 돼요. 또 뭐가 있어요? 동지가 있죠. 그러니까 칼 슈미트가 말했듯이 예수님은 진리를 논쟁하러 온 게 아니고, 회의하러 온 게 아니고 동지와 적을 구분하기 하러 왔어요. 그러니까 칼 슈미트의 이론이 얼마나 신앙과 현실정치를 딱 결합시켰는지 반박의 여지가 없어요.

유대인을 치려 하는 것이 세상적인 차원에서 치려고 하는 게 아니에요. 칼 슈미트가. 영적인 사명으로 치는 거예요. 거기에 대중들의 하나님의 뜻을 된 게 표를 받은 게 누구냐? 히틀러라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히틀러의 결단은 신의 결단입니다. 이의 있나? 가하시면 예하시고. 큰 교회 당회장이 이론입니다. 교회정치철학이에요. 이철신 목사부터 해서 영락교회, 이 이론이에요.

그 다음에 봅시다.
[욕망의 덩어리로서 몸이기에 허무한 욕망의 잉여만]

그러니까 이 몸인데 몸은 늙어서 썩어가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이 몸을 유지, 자기 욕망을 계속 보충해서 채워주면 좋겠는데, 욕망은 젊을 때 못지않아요. 60, 70되도 욕망은. 왜 욕망이 커지냐 하면, 옛날에 했던 욕망들은 한 번 다 해봤거든요. 해보니 재미가 없는 기라. 골프도 쳐보고, 낚시도 해보고. 젊을 때 야, 저거하면, 어떤 의사 바둑 두다가 애 놓는 것도 잊어버리고 바둑 두다가 남편한테 귀때기 맞는 것도 있는데, 야, 난 바둑만 두면 평생소원이 없겠다. 하고 처음 바둑 두는 사람들 그러거든요.

그런데 나이 들어가면 그것도 시시한 거예요. 컴퓨터 고스톱도 시시하고. 컴퓨터 게임 한번씩 해보면 컴퓨터 게임 백만 점 넘으면 재미가 없어. 처음에 몇 천 점할 때는 죽을 둥 살 둥 밤새도록, 밤새지 말란 말이야. 그렇게 당부해도 밤새워가면서 컴퓨터 게임하고 설교준비도 안하고 컴퓨터 게임하다가 한 백만 점 넘으면, 그것도 재미없어.

그런다고 욕망이 어디 갑니까? 더 커졌는데. 젊을 때보다. 그런데 몸은 어떻게 됩니까? 욕망을 받쳐 주지를 못해. 여자는 밝히고 싶은데 몸이 안 받쳐줘.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남는 것은 욕망의 허무한 잉여만 남지요. 그 욕망의 잉여로 남은 그것이 뭐냐? 그게 모아 모아서 신에 대한 염원으로 새로운 욕망으로 신을 내 손아귀에 쥐려는 새로운 욕망으로 하지요.

그게 노인네들이 교회에 오는 이유입니다. 노인네들이 교회에 오는 첫째는 심심해서 와요. 단지 그뿐입니다. 특히 시골교회. 시골교회를 예배를 일주일 내내 해보세요. 내내 노인들 참석합니다. 목사는 죽을 지경이지만. 왜? 놀이터니까. 구 목사님, 한번 그렇게 개방 해보지요. 일주일 내내 예배 한번 드려보지. 내내 올 텐데. 같이 교회에서 점심 제공해 보세요. 내내 와요.

그러니까 결국은 지금 결론 부분이잖아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수천 년 교회역사가 모든 걸 다 해봤는데 결국은 일단 몸이 배태한 욕망의 잉여들이 신학을 구사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현대교회는 그 뒤에 뭡니까? 껍데기죠. 어떤 껍데기? 신의 시대가 남기고 간 껍데기. 국가, 총 국민적 전체가 신을 믿던 그 시대의 껍데기가 교회란 말이죠.

그러니까 예배당만 덩그러니. 수천억, 수백억 들여서 예배당 지었잖아요. 그게 껍데기만 남아요. 지금은 관리하는데 수십억 들어요. 월급 줘야 되지, 청소해야 되지, 관광객들 관리해야 되지, 지진이 일어나 무너지면 수리해야 되지. 유명한 명화 하는데 그 얼마나 전문가들 수리, 보수하려면 일당 수십만 원씩 하는 거예요. 얼마나 비쌉니까? 스테인 그라스 수리 다 해 줘야 되지요. 먼지 끼면 청소 다 해야 되지요. 골치 아픕니다. 신부들이 그게 다 해야 돼요. 일반회사들, 총무과하는 일 있잖아요. 그거 해야 돼요.

신을 붙잡기 위한 계속 달리다 이제는 그만 탈진해 버린 자의 신의 껍데기입니다. 탈진해 버렸어요. 왜? 신은 잡히질 않았어요. 진짜 신을 잡았더라면 1차 대전, 2차 대전이 안 벌어져야 됩니다. 왜? 세상은 평화로운 세상이기 때문에 신을 많이 안 만큼 성화되고 성숙된 세상이기 때문에. 서로 이웃을 사랑하기

신을 안다는 것은,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면 신을 안다는 게 뭡니까? 이웃 사랑이잖아요. 이웃 사랑은 뭐가 없다? 전쟁이 없어야 되고, 위험이 일체 없어야 되잖아요. 그런데 1차, 2차 한바탕 붙었으니까 이거는 결국 신을 잡았다고 여겼지만 사실은 다 거짓말이었다 이 말이에요. 이 땅에 전쟁을 일으키는 신이 어디 있느냐? 이거는 칼 슈미트의 이론이지, 진짜 제대로 된 정신 박힌 놈들은 신이 전쟁, 그게 이웃 사랑입니까? 칼 슈미트는 그걸 이웃 사랑으로 봤지만.

결국 여기서 실망을 한 거예요. 물론 신앙인 같으면 이웃 사랑으로 보겠지만, 일반인들은 밑에서부터 신을 찾기 때문에 밑에서부터 사랑, 그 다음에 평화, 이런 것을 밟아서 신은 절대 사랑, 절대 평화 이렇게 보거든요. 그런데 2차 대전해서 얼마나 고난과 수난을 받았습니까?

그리고 러시아공산주의가 언제 태어난 거예요? 언제 러시아혁명이 있었던 거예요? 1차 대전, 2차 대전 그 와중에 생긴 겁니다. 뭘 엎어버리고? 소위 짜르 황제의 러시아 정교회에 의한 이데올로기를 엎어버리고, 프랑스혁명의 시민혁명의 정신과 동일한 정신으로서 인민들의 평등과 자유와 평화, 이것을 위하여 러시아혁명을 일으킨 거예요. 결국은 신을 인간이 밟은 거예요. 드디어 신의 시대는 끝나갔다. 없다 이 말이에요. 신은 우리 안에 있다. 하나님 형상 박혀 있는 우리 안에 있다.

[외로움을 달래는]

그래서 지금은 교회 뭐냐? 그 껍데기만 가지고 외로움을 달래는 권태로운 집단, 이것이 하이퍼커뮤니케이션. 하이퍼커뮤니케이션이라 하는 것은 인터넷 같이 거칠 것 없이 정보원들이 교환하는 이러한 시대에 파국을 맞은 교회의 모습이에요.

교회라는 것은 노인정이죠. 아직 한국에는 안 그런데요 하지 마세요. 한국에는 국민소득이 안 높아서 그래요. 유럽에 가면 다 노인정입니다. 미국도 마찬가지고. 흑인노인들, 침례교회에 앉아서 일주일 내내 노인정입니다. 이민교회는 달라요. 막 이민한 사람들 정보 교환하는 데에요. 거기서 커미션 받아먹고 교회 운영되고 있어요.

종교든 교회든 간에 어느 것도 정보의 바다에서 달아나지 못해요. 그러니까 교회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뭐가 공유해야 된다? 교회가 정보를 갖고 있어야. 예, 이번 아파트 새로 나온 것 있는데. 그러니까 교회 부흥되려면 게시판에 아파트 새로 나온 것 있는데 부동산 중개소에 중개비 줘야 되는데 우리교회 같은 교인들끼리는 소개비 안받고 그냥 드립니다. 앞에 있는 삼일아파트 34평 나왔습니다. 이거 하면 교인들 다 모여요. 함 바꿀까? 이거.

바자회 뭡니까? 정보의 교환 아닙니까? 비싼 것 나왔는데 이거 필요한 분 있습니까? 그러면 교회에서 잘사는 쪽에서 자비를 베풀면, 그 교회 같은 교인 중에서 못사는 사람들이 자원재활용 차원에서 받아 챙길 때 그럴 때 교회는 계층이 융화가 되면서 화해가 된다. 이렇게 생각하고, 그게 교회가 이상적인 유무상종의 초대교회의 모습이다 이렇게 해서 바자회 열잖아요. 많이 열어. 많이 여세요. 앞 집 절에서. 이게 요새는 도시에 사는 세운 절에서 교회에서 많이 해요.

종교단체가 뭐 하냐 하면, 정보 교환의 매체 역할을 해 줘야 교회가 오늘날 교회로서 사회적으로서 고유의 가치를 펼 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 이야기입니다. 정보의 바다에서 못 벗어나요. 심지어 그러니까 노총각, 노처녀들 부킹해 주는 곳이다.

[심지어 시간의 위협마저 상투적이고]

옛날에는 마지막 종말이 온다고 했잖아요. 이것도 이제는 권태로워. 왜냐하면 죽으면 그냥 모든 게 안식이죠. 그래 죽을게. 좀 쉴란다.

[정보의 불빛이 꺼져버린 교차로에서]

이 뭐냐 하면, 하이퍼커뮤니케이션에서는 정보의 교차로가 많아요. 전부다 깜빡깜빡깜빡깜빡깜빡깜빡깜빡하는 자기 고유의, 너는 뭐하노? 한국전력 다닌다. 니는 뭐하노? 나는 촌에서 장미 키운다. 너는 뭐하노? 나는 교사 아이가. 각자 기능과 불빛을 내죠. 불빛을 내면 이 사람은 인간 취급돼요. 정보에 의해서. 그런데 한전 다니다 퇴직했다, 그러면 내 친구가 동창회에 나오지 마라 해요. 깜빡깜빡해서 그러니까 퇴직하면 퇴물되고, 퇴물은 곧 죽음이죠. 왜? 내 놀 정보가 없기 때문에.

아버지의 권위는 아버지가 돈을 벌어줄 때 아버지에요. 퇴직한 아버지는 이제는 부담스러워. 어릴 때 반디 장사해가면서 자식들 공부시킬 때 어머니는 훌륭한 어머니에요. 그러나 치매 걸려서 똥, 오줌 벽에 바르는 어머니는 이건 자기 책임이 아니고 국가적 책임이라고 해서 갖다 버려요. 노인복지회에서 처리해야 돼요. 실버타운 그런 데 집어넣어서 간병인 붙여서 형제들 돈 모아서 안 보이는 데서 처리해야 돼요. 왜? 냄새나기 때문에. 냄새피우기 때문에. 어떤 노인은 냄새피운다고 자살한 노인네 있어요. 며느리가 냄새난다고 하니까 상심해서. 그 놈의 거, 냄새나는 몸을 인정해야지. 욕망의 잉여는 뭡니까? 자존심 아닙니까? 자존심 커서 자살해 버렸어요.

참, 인간사 누가 그런 명언을 남겼는지. '인간사 한방의 부루스다.' 그런 유명한 명언을 남겼지요. 한방 부루스 추고 끝내자 이 말이에요. 이건 고상하게 말하면 이렇게 돼요. 그러니까 죽음이란 파멸이 아니라 정보의 네트워크에서 은퇴한 거예요. 퇴직한 거예요.

경찰간부로 있을 때 그렇게 권세가 셉니다. 그러나 퇴직하고 난 뒤에 정수기 팔려 다니면 그렇게 참, 서글프기 짝이 없어요. 경찰에 있다가 퇴직해서 건강보조기구 팔고 다니는 영화가 살인의 추억이라. 마지막 장면에 송광호가. 그거는 좀 상무님 하고 편하지요.

그래서 부교역자들이 제일 애달아하는 게 뭐냐 하면, 그겁니다. 월급이 적다. 그것도 아니에요. 그러면 뭐, 사택이 없다. 그것도 아니에요. 왜 사랑을 당회장이 독차지 하느냐? 이겁니다. 부교역자들이 독 오른 점이 그거에요. 왜 당회장이 교인들 사랑을 독차지하느냐? 질투에요. 이유가 뭐냐? 설교를 독점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당회장들이 여력이 있는 한 설교를 부교역자에게 안 주려고 해요. 자기에 있는 사랑을 뺏어갈 까봐.

그런데 그 사랑을 독차지한 것을 만족할까요? 아까 했지요. 절대 신, 최고의 신이 있는 한 그걸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교단적으로 사랑 받기를 원해요. 자기 교회만 사랑 받지 말고 교단적으로, 시찰적으로. 참, 불쌍한 놈들이에요. 정, 사랑 받을 게 없으면 해외로 뛰는데 그걸 선교사라고 합니다. 사랑받고 싶어서. 나도 굶어 죽어도 좋으니까 사람들에게 사랑 받아 보자. 사랑 받을 때 자기는 주의 종이라고 확인받고 싶은 거예요.

그러니까 마태복음 10장, 11장에 나오는 예수님 제자의 모습, 전혀 아니에요. 거기는 미움 받고, 그야말로 쫓겨 다니고, 양이 이리 가운데 다니는 그러한 예수님의 말씀하신 제자의 그 모습하고 전혀 달라요.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에게 싸움꾼이 되라고, 사나운 싸움꾼이 되라고 그래서 장렬하게 죽으라고 요구했건만, 오늘날 정보의 바다에서 자기의 정보를 가지고 남한테 사람 대접 받으려고 하는 그것이 우선적이죠.

그래서 봅시다. 하나님이란 존재, 신학도 환각이죠. 모든 게 존재의식이란 존재가 만나는 환각이 뭐냐? 신학입니다.

[하나님이라는 존재, 그리고 인간 존재를 명제로 삼고 거기에다 성경의 내용으로 가득 채워 놓아봤자, 남는 것은 무료함 뿐이다.] 아아, 심심해 미치겠다.

[아무 것도 아닌 것들에 둘러싸여 있는 적막감]

이것은 뭔 뜻이냐 하면, 목회자가 시간이 남아돈다가 그런 뜻이 아니고요. 이거는 목회자가 아니라 정수기를 팔든, 안 그러면 부지런히 뭐, 어떻게 매표소에서 철도역에서 아르바이트로 표를 팔든 간에 사람이 아무리 연구해봤자 남는 것은, 예를 들어서 부산역에서 표를 파는 아줌마, 아르바이트, 아줌마들 보세요. 그들과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표라는 매개로, 어디 갑니까? 서울 갑니다. 그냥 표 파는.

정말 왜 당신은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냐 이 말이에요. 왜 당신은 나에게 유익한 정보를 못 주느냐 이 말이죠. 고속도로 톨게이트에 표 파는 아줌마들. 김정숙이라는 푯말 꼽아서 시간되면 교체하는. 그냥 표라는 물질이란 말이죠. 교환이죠. 교환은 행위죠. 돈 받고 티켓 끊어주는 행위 아닙니까? 다른 말로 하면 이걸 사건. 사건으로 우발적으로 두 사람이 만났죠. 하나는 드라이버, 운전사고 하나는 톨게이트 아줌마로 만났죠. 그런데 왜 니는 나한테 의미가 없고, 왜 너한테 의미가 없느냐? 왜 누가 따지냐 말이죠. 그러니까 아무것도 아니죠. 정말 아무것도 아니죠.

목회도 처음에 개척 할 때는 사랑으로 하고 목사님, 하면서 맛있는 것 대접하고 하죠. 그 개척교회 3년 지나고 5년 지나면 보세요. 니는 니고, 나는 나고. 난 설교나 집에 가 .... 설교 끝나고 누워 잘란다. 돈만 내라. 나 좀 살려 둬. 빨리 끝내라. 갈란다. 그냥 교회란 매개체에서 의미 없는 만남과 헤어짐. 왜 아무것도 아니냐 하는 그게 문제죠. 그럼 그거는 다른 사람이 나한테 묻는 거예요. 니는 왜 나한테 아무것도 아니냐? 말이죠. 몰라. 나도 몰라. 잘 가라. 그런 식으로 점멸, 소멸되겠죠. 빛이 꺼져버리겠죠. 터미네이터 마지막 장면처럼 나쁜 로보트가 완전히 불이 꺼져버리면서 로보트가 하나의 물질로 변해버리면서 모든 것이 꺼져버리죠.

그럴 때 들려오는 말씀이 마지막에 뭡니까? 결국은 우리는 돌 아닙니까? 돌인데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영생을 주면 누구도 빼앗을 수 없다는 예수님 쪽에서 행하는 자기 숙제로 말미암아, 눈이 번쩍 뜨이지요. 이게 기적이죠. 내가 지금 어디 있지. 내가 왜 예수를 이야기하고 왜 내가 입에서 십자가를 이야기해서 퍼뜨리지. 왜 이러지. 이게 바로 십자가가 임하면 자기 꼬락서니를 분명히 알면서도 이것은 십자가만 토해내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내 몸이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결론은 이 책의 앞에 것을 다 읽어야 돼. 공부를 다 해야 돼. 왜냐하면 아까도 처음에 공부하기 전에 이야기했지만 여기 나온 사람들이 그냥 장난삼아 신학을 한 사람이 아니고, 여기 사람들이 자기 가족도 버리고, 자기 생계도 잊어버리고, 칼빈 같은 사람은 자기 몸도 안 돌보고, 오직 하나님의 진리 하나를 외치고 연구하기 탐구하기 위해서 몸을 바친 사람들이에요. 그냥 오다가다 쉬엄쉬엄 공부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의 업적이 결국은 현대에 와서는 결국 인간은 돌이다. 상당히 김용옥의 말이 맞네. 돌도사가 맞는 이야기에요. 그 와중에서 이걸 미리 알았던 사람이 루터였지요. 오늘 한번 들어가 봅시다. 오늘 쓸데없는 이야기한 게 아닙니다.

루터 이야기에서 어디를 보느냐 하면, 118페이지 봅시다. 했지만 다시 한번 봅시다. 밑에서 열 번째 줄에.
[하나님은 오직 자기 영광만을 위해서] 이렇게 되어 있지요. 찾았습니까?

119페이지. 칼빈 해놓고, 그 뒤에 보세요.
[실질적인 원리는 하나님의 영예였는데 캘빈은 이것을 단순히 주관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모든 존재가 다 그것에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 원리에 준해서 그는 항상 성화와 경건의 실천을 권하고 있다.]

상당히 재미있지 않습니까? 루터가 뭘 이야기했다고요? 하나님의 영광을 이야기하고, 칼빈이 뭘 이야기했다고요? 하나님의 영광을 이야기했죠. 뭐가 달라요? 다른 점이 있지요. 어떻게 다릅니까? 루터는 보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 뒤에 딱 붙는 게 뭐가 붙어요? 그리스도의 그 다음에 뭐라고요? 모범적인 행함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뭡니까? 루터는 십자가를 그리스도의 모든 행함의 결정체로 보는 반면에, 칼빈은 십자가를 어디다 섞어 버리느냐 하면, 예수님의 행한 것 중에서 일부에 해당, 하나의 한 모퉁이에 해당된다 말이죠. 이 차이. 누가 맞느냐 중요합니다. 누가 더 성경적으로 맞느냐가 대단히 중요한 문제겠지요.

칼빈과 루터와 차이점은 어떤 의미에서는 전 인류를 두 종류로 나눈다고 보면 돼요. 여기 칼빈은 하나님의 영광이 칼빈의 목표였는데 그 영광은 어떠해야 된다? 항상 성화와 경건의 실천을 말하지요. 그러면 예수님은 뭐냐 하면,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서 뭘 했다? 경건생활을 했고, 성화로운 생활을 했다. 거룩한 생활을 했다. 이걸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그걸로 밑바탕으로 봤지요. 봤단 말이죠.

그런데 루터는 예수님의 여러 가지 행위가 무엇이 없이는 해석이 안 된다? 십자가 없이는 해석이 안 된다 말이죠. 예수님의 행위와 경건과 실천은 밑에 십자가를 통해서 해석돼야 된다. 이렇게 보고, 칼빈은 우리들이 지금 경건하고 싶고, 성화하고 싶은데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 우리 눈으로 바로 보자 이 말이에요. 예수님의 행위와 경건을. 바로 보고 바로 파악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 차이점을 아시겠습니까? 하나님을 섬기고 싶은데 우리는 죄인이라서 못 섬기는데 예수님을 통해서 예수님이 모범을 보였으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아서 행위를 해서 영광을 돌리자. 이거에요. 그중에 하나 들어가는 게 뭐냐? 자기희생이라는 자기희생은 아주 고상한, 아주 경건된 또 하나의 경건의 십자가로 보죠.

루터는 그렇게 안 봐요. 예수님의 행위와 경건은, 루터 생각에는 만약에 예수님이 칼빈으로 행위와 경건을 봤으면, 바리새인과 그렇게 다툴 필요가 없단 거예요. 심지어 바리새인이 믿는 신을 가지고 악마라고 그렇게 할 수가 없다는 거지요.

예정에 대해서 왜 이렇게 루터와 칼빈이 생각이 다르냐? 이 점에 대해서 좋은 아이디어를 제공한 사람이 손성식 목사님인데, 손성식 목사님은 인간이 뭘 볼 때는 하나의 초점으로 보는 게 아니고 장場으로 본다, 영역으로 본다는 거예요. 하나의 필드. 그러니까 어디에 매여 있느냐로 예수님은 인간이 전적으로 어디에 매여 있다는 쪽으로 예수님은 인간을 보는 데 반해서, 인간들은 자기는 종이 된 적이 없다고 해요. 요한복음 8장에 나오죠. 나는 누구의 종이 된 적이, 아브라함 자손인데 무슨 종이 되느냐 말이죠.

여기 120페이지 끝에 보면 나옵니다만. 칼빈은 말하기를 인간에게는 자유의지 있다는 거예요. 자유의지가 있는데 칼빈은 나중에 말하기를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었는데 잃어버렸다고 보는 거예요. 참, 말이 되지요. 자유의지가 있었는데 잃어버렸으니까 자유의지가 없다고 보는 거예요. 의지가 있었는데 잃어버렸으니까 없다고 보는 것이고, 루터는 아예 자유의지가 없다는 거죠.

118페이지에 위에서 일곱 번째 한번 봅시다.
[하나님의 전능은 인간 측의 모든 선택을 배격하며 하나님의 전지는 근본적인 것이라고 본다.]

근본적이라는 말은 처음부터 인간에게는 뭐가 없다? 자유의지가 없다. 왜? 인간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영원부터 하나님은 극히 작은 일까지라도 미리 아시고 그 일을 생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하나님의 섭리가 있을진대 인간의 자유의지는 없다.]

자유의지가 없는데 칼빈은 있었는데, 죄 때문에 잃어버렸다고 보는 거예요. 여러분 그런 차이점을 파악해야 될 줄 알아야 됩니다.

[만일 자유의지가 있다면 섭리는 없을 것이다. 이것은 성경이 증명하는 바이며 아무도 피하거나 혹은 고칠 수 없는 전능하신 힘으로써 하나님은 창조셨고 움직이시고 또한 앞으로 나가도록 강요하신다. 그리하여 사람은 다 하나님이 주신 힘에 따라 그에게 복종해야 한다. 그리고 사람의 구원문제에 있어서 이성도 무력하다. 사람의 의인(義認)에 있어서 사람의 역할을 전혀 없다. 오직 믿음으로만 된다. 하나님 나라에 머물러 살기 위해서 사람이 할 일이나 꾀할 일은 전혀 없고 오직 그것은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성령이 우리를 새롭게 하고 보존하는 것이므로 자유의지가 할 몫은 없다. 하나님은 누구보다도 강하시기 때문에 악마나 대적들이 자기를 하나님의 손에서 빼앗아 낼 수가 없다.] 이게 루터의 생각입니다.

루터는 더 나아가 말하기를, 여기를 보면, 118페이지 밑에서 열 번째 줄에.
[인간이 자기 힘으로 하나님을 찾으며 구원을 획득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역사를 막는 일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결과가 된다.] 지난 시간에 했지요.

118페이지 밑에서 여섯 번째 보면.
[하나님이 내가 구하면 구할수록 그리하여 하나님에게 가까워졌다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나는 점점 더 멀어지는 것이었다. 아니 하나님은 그런 방법으로 우리가 그를 찾도록 허락하지 않으신다.]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 하면, 올라와. 올라와 이놈아. 지옥이야. 이렇게 되는 거예요. 다 올라왔는데 지옥이야. 그 자체가 지옥이라. 주여, 이만하면 완벽하지요. 그래, 잘 가라. 지옥으로. 보내버려요. 그러면 천당은요? 내가 지정하는 사람 구원받아. 니, 백날해도 소용없어. 믿는 사람한테는 멋있는 하나님이고, 안 믿는 사람한테는 악마고.

저거 바로 사탄이라. 왜? 인간의 선하려는 모든 하나님이 원하는 경건과 거룩을 묵사발 만들기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과 경건을 묵사발 만드는 자체는 뭐다? 결국 사탄이 하는 짓이지, 하나님은 그런 생각을 할리가 없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거는 비슷한 정도가 아니고 완전히 등을 돌리고 서로 대적하려는. 내가 온 것은 불화할 수밖에. 이거는 시어머니고 며느리고 간에 아들과 자식 간에 소용없어요. 서로 등 돌리고 갈라지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 하나 때문에, 십자가 때문에 갈라지게 되어 있어요.

칼빈이 등장한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왜냐하면 칼빈은 인간이 모든 신학을 총괄해서 마지막 내뱉을 수 있는 건 이거에요. 칼빈의 문제점이 하나 더 등장한 게 뭐냐 하면, 축복도 아니고, 저주도 아니고 제3의 지역을 만들어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이거 말이 어려운데 들어보세요.

신명기 28장 1절에서 3절에 보면, 이 말씀을 지키는 자는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죠. 그 다음에 신명기 28장 15절부터 19절 보면, 말씀 안 지키면 들어가도 저주받고 나가도 저주받고. 그러면 축복과 언약공동체, 이스라엘이라는 언약공동체 안에서는 축복과 저주 말고 제3의 지역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이게 미치는 거예요. 이게 환장한 노릇이라.

제3의 지역에 나가 있어서, 그러니까 축복도 아니고 저주도 아닌 제3의 지역에 나가 있어서 자기가 원하는 대로 축복 안 되면 좀 쉬었다가 이렇게 하고 싶은데, 거룩하다는 말은 말씀이 거룩한 거예요. 언약이 거룩하기 때문에 지키든 안 지키든 거룩해져 버리는 거예요. 말씀이 거룩하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저주받을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그 상황이 거룩한 단체라. 빼도 박도 못해요.

원래 인간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그랬었어야 됐어요. 죄짓고 난 뒤에 하나님 버리고 저희끼리 똘똘 뭉쳐서 우리는 하나님도 없다. 그자? 하고 제3의 빈 공간을 중립지역을 마련했기 때문에 그렇지, 사실은 진짜 하나님이 찾아오신 이스라엘에서는 뭘 느꼈습니까? 우리는 빼도 박도 못하고 축복 아니면 저주, 저주 아니면 축복 둘 중에 하나 해야 되는데 말씀을 언 놈이 지킵니까? 못 지키잖아요. 그러니까 저주받아야 되죠.

그런데 칼빈은 121페이지 위에서 열 번째 줄에 보세요. 칼빈은 이런 언약을 몰라요. 기독교강요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언약을 몰라요. 121페이지 위에서 열 번째 줄 뭡니까?
[외면적 자유에는 섭리와 아디아포라 αδι αφορα(무해 무익한 중립적인 것)에서의 자유가 있다. 성경에서 금하거나 명백하게 명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자유]

담배 피워라. 성경에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담배 피우든 안 피우든 축복도 아니고 저주도 안 되겠지요. 그런 지역을 칼빈이 만들어 놨어요. 이게 칼빈이 이런 아이디어를 끄집어낼 줄은 상상도 못했지요. 그러니까 죄도 아니고 의도 아닌 그런 게 있다는 거죠. 인간에게. 오늘날 목사들 다 이렇게 가르쳐요.

그러면 거기에 대해서 궁금하잖아요. 교인들 궁금하잖아요. 궁금하니까 고거에 대해서는 교회법을 만들어서 노회법을 만들어서 메우지요. 제직회 2/3를 통과해야 됩니다. 이런 것. 그러니까 전승과 유전을 성경에다 플러스, 첨가해서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첨가해서 해 노니까 어떤 무식한 노회 목사 하는 소리가 노회법 안 지킨다고 하는 말이 이 주여 주여 하는 자가 다 구원 받을 것이 아니고. 마태복음 7장에 나오죠. 내 법을 지키지 않으면 다 저주받는다 하는 마태복음 7장에 나오는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 가는 것이 아니요, 그 다음에 뭡니까? 하도 내가 노회 오랫동안 안가니 다 잊어버렸다. 아버지 뜻대로 하지 않는 자는 저주받는다 하니까 그걸 노회법을 아버지 뜻으로 보는 거예요. 왜? 교회는 하나님의 몸 된 교회인데 교회에서 법을 만들기 때문에 그 법은 뭐가 된다? 아버지 법이 되고, 하나님 법이 되죠. 그 교회법 안 지키니까 저주받는다. 이게 뭐냐? 칼 슈미트의 정치철학입니다. 동지와 적.

지금 이 칼빈의 이야기를 이렇게 강조와 큰 소리로 이야기될 이유가 뭐냐 하면, 우리가 칼빈이기 때문에 그래요. 성경은 루터인데 우리의 본심은 칼빈이라서 그래요. 자꾸 변명해요. 그래서 이 칼빈이 나타나야 됩니다. 칼빈을 공부해야 돼요. 우리는 루터가 좋으면서도 칼빈으로 도망치고 싶어요. 때로는. 사실은 때로만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칼빈을 공부함으로서 왠지 오늘은 칼빈이 되고 싶어라! 칼빈이 더 마음에 들고, 칼빈이 오히려 더 사람의 존엄성과 인격성을 옹호해 주는 것 같고, 루터는 인간을 막 박살내는 것 같고. 루터는 피하고 싶고, 칼빈은 환영하고 싶어요. 그런 본성을 갖고 있을 수 있어요.

좀 더 칼빈 봅시다. 119페이지 봅시다. 제일 위에.
[루터의 예정론은 칼빈의 예정론과 심한 대조를 이루는데, 루터는 그리스도 중심의 예정론이라면 칼빈은 하나님 중심의 예정론을 이야기하고 있다. 루터가 그리스도 중심의 예정론을 말하는 이유는, 구원의 예정을 믿고 개인의 행동이 어떻게 해도 상관없다는 방종적 태도를 경계하기 위해서였다.]

아아, 참, 이 말은 어렵다. 루터가 그리스도 중심의 예정론이 뭐냐? 그것은 예수를 믿고 십자가 믿음으로서 내가 구원을 얻었다. 라는 () 방종을 루터는 차단하기 위해서라는 겁니다. 상당히 어려운 말이에요. 이게.

그러니까 크로스빌리지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글이 이거 아닙니까? 십자가로만 구원 받는다고 하니까 그러면 십자가 안에 죽치고 있으면 되겠네. 그러니까 구원을 받는데 십자가 밑에 죽치고 앉아 구원 받는 게 아니고 감나무 밑에 감 떨어지듯 구원받는 게 아니고 착한 행실을 해 줘야 말씀들을 지켜줘야 구원받습니다. 라는 말 속에 뭐가 포함되어 있습니까? 십자가는 우리에게 뭘 준다? 방종을 유발하기 때문에 방종을 방지하기 위해서 선한 행동으로 그걸 카바 해줘야 된다. 라는 사고방식 자체가 이게 그걸 경계하기 위해서. 그게 바로 인간들의 구원 욕구에 대한 하나의 환상이죠. 신을 이용하겠다는, 자기 구원에 대해서 신을 등쳐먹겠다, 이용하겠다는 그것을 잘라내게 하는.

루터 머리 좋지요. 루터가 특징이 마귀를 안다는 거예요. 마귀를 알면 다 아는 거예요. 왜냐하면 마귀는 누구 적입니까? 예수님의 적이잖아요. 예수님의 적을 안다는 것은 누굴 안다? 예수님을 안다. 그러니까 아까 결론에 첫 번째 보면, 하나님은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사람을 살려주고 있다는 이 말을 알아야 돼요. 고신 측에서 백날해도 이 말을 모릅니다.

질문 : 목사님, 표현이 조금 애매모호한 게 아닙니까?
-항상 애매모호해요.

아니, 그게 아니고, 방종적 태도를 경계하는 것을 한 번 더 뭔가 여기 들어가야 말이 ....
-그게 좀 필요하겠지요.

안 그러면 오히려 이걸 반대로 이야기할 가능성이 ....
-그런데 십자가 안 믿는 자는 뭘 해도 안 믿어요.

그게 아니고, 표현 자체가 뭐냐 하면, 개인의 행동은 어떻게 해도 상관없이 하는 방종적인 것은 그게 원래 행함의 어떤 사고가 있는데 그것을 경계하기 위한 것이라 하면 ....
-그런데 그렇게 하면 뭘 더 설명해야 하느냐 하면, 사실은 그걸 더 덧붙이는 게 아니고 그리스도 중심의 예정론이 뭐냐를 사실은 설명을 더 해줘야 돼요.

그러니까 그리스도 중심의 예정론이 뭐냐? 왜냐하면 그리스도 중심의 예정론과 칼빈의 하나님 중심의 예정론, 지금 이 두 사이의 차이를 모르잖아요. 한번 보세요. 지금 루터 생각을 치우고 칼빈 생각으로 돌아가 봅시다. 칼빈의 생각에 만약에 내가 칼빈의 생각을 갖고 있다면, 지금 이 말에 대해서 동의하면서 의아해 할 거예요.

왜 동의할 수밖에 없는가 하면, 그리스도가 누굽니까? 하나님 밑에 있잖아요. 성부 밑에 성자 아닙니까? 그런데 칼빈은 뭘 봤다? 성부의 예정론을 이야기하면서 사실은 뭐도 포함시켰다? 그리스도 중심의 예정론을 포함시켰기 때문에 루터, 그거는 동의해. 하지만 이걸 경외한다는 것은 이해 안돼. 이렇게 된다고요.

그거 동의해. 내가 동의 안한다는 말이 아니야. 똑같은 말을 할 거예요. 그러니까 이렇게 이야기하나, 저렇게 이야기하나 이걸 하나님의 예정론과 그리스도의 예정론을 이게 어떻게 꼭 대조될 필요가 뭐가 있느냐 말이죠. 그냥 하나로 묶으면 되지, 라는 사고방식을 칼빈 측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사람은 다 이야기한다 이 말이죠. 한 식구인데 뭘 이야기해도 마찬가지지. 같은 식구인데.

그러면 루터는 하나님 예정론과 그리스도 예정론을 분명히 나누었다 이 말은, 이거는 뭐냐 하면, 그래서 이게 어려운 거예요. 말이 어려운데 알아듣던 못 알아듣던 마음대로 하시고 내 어렵게 할게요.

루터는 하나님이든 예수그리스도이든 하나님께서 일을 할 때는 성경을 대하는 인간 전체의 마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신과 그리스도에 대해서 하나님은 그걸 배제하지 아니하고 그 안에서 일을 하셨다는 거죠. 무슨 말인지 모르지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구름 위에서 ~~ 이렇게 하지 않고 이 땅에 오셨다 말이죠. 마찬가지로 인간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성경 보니까 한 가족이더라. 이래 이야기하나 저래 이야기하나 똑같은 것 아이가. 라고 생각할 줄 아시고, 예수님은 그게 아니라고 파고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실제로 예수님과 하나님은 한 가족 맞지요. 맞지만 그걸 하늘에서 논하는 게 아니라 이 땅에서 논하자 말이죠. 땅에서는 너희들 정신머리가 마귀들 정신머리기 때문에 구분돼야 되는데 너희들 구분할 줄 모르잖아. 그러니까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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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746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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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