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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요한계시록 2:18-23 (계 2:1『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설교요한계시록

Re..계2:18-23(거짓선지자 이세벨)

이름 : 이근호(IP:)

자칭 선지자 이세벨

2006년 5월 28일 설교 본문: 요한계시록 2:18-23

(계 2:1『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가라사대』
(계 2:19) 『내가 네게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계 2:20)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계 2:21)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도다』
(계 2:22)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계 2: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주리라』

사람들은 달라지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그 대신 적응하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자기를 둘러싼 삶의 환경이 자기 몸에 맞게 개선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자신이 현재의 자기와는 영 딴 판의 사람으로 달라지는 것을 본능적으로 거부합니다. 새로운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지금까지 적응해 온 환경과 도리어 충돌과 마찰을 야기해서 스스로 망하고 마는 위기를 자초할 수 있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전편에 흐르는 있는 사상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이 있다는 반면에 주님께서 축출해 내고 싶은 자들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원하는 사람은 흔히 일반적인 상식에 준해서 규정된 그런 사람들 하고는 다르는 겁니다. 어떻게 달라야 할까요? 바로 주님의 말씀이 담겨있다는 점에서 다른 사람인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오늘 본문을 우리가 잘 들었다고하더라도 우리 마음 속에서 이 말씀을 배척하고 거부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즉 “나는 이 말씀을 담고 싶지 않아. 나는 나대로 살래. 그냥 이대로가 좋아”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 사람은 ‘달라질 의사가 없는 사람’이라는 판정을 받습니다.

신앙은 우리네 상식에서부터 출발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지식이나 양심으로 조립해 낼 수 있는 성질이 아닙니다. 과연 소위 ‘달라졌다’는 사람 중에 한 사람인 사도 바울이 어떤 고백을 하고 있는지를 귀담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고린도후서 5:14-15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더 이상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 자’로 달라졌다는 말이 됩니다. 이 세상에 어느 누구가 본인의 노력으로 ‘더 이상 자기를 위해 살지 않을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따라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은혜란 곧 ‘그 당사자를 달라지게 만드는 은혜’를 두고 뜻합니다. 우리 힘으로 우리 자신이 달라질 수 없도록 하는 그 극단의 요소가 선물로 주어진 신앙 안에 담겨 있습니다.

창세기 22장에 보면,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이 생뚱맞게 자기 아들을 신에게 제물로 바치겠다고 산 위에서 잡아 죽이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분은 곧 ‘믿음의 조상’이라는 별칭으로 굳혀질 사람입니다. 즉 신앙이라는 것을 제대로 주었다는 모델이 되는 분이라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죽이는 행위는, 곧 도저히 스스로 죽이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자신이 자신을 죽어야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신앙의 모습입니다.

야고보서 2장에 나오는 말씀, 즉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는 이 사례가 흔히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덕목을 말하고 싶으나 성경에서는 아버지가 자식을 죽이는 행위를 합당한 믿음에 따른 행위의 사례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 어떤 인간이든 자기의 노력으로 인하여 절대로 딴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임을 말해주는 겁니다. 말씀의 씨앗이 떨어져 싹이 나고 열매가 맺는 것은 몽땅 사람의 노력과 의지와는 상관없는 기적적인 사태의 연속으로 구체화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선지 이세벨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목자되시는 분은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그 분은 불꽃같은 눈으로 자기 사람들을 관찰하신다는 겁니다. 따라서 여선지 이세벨의 행위를 쫓지 말라는 언명이 누구에게나 다 효력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을 의식하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효력입니다.

과연 누가 이세벨을 따르는 자인지 아닌지는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고 주님께서 일으키신 사건에 의해서 날마다 자신이 죽게되는 그 사람에게만 알려질 사항입니다. 그 이유는 옛날 이세벨 왕비가 저질은 일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녀는 시집오면서 이방종교를 수입하다가 자기가 시집온 나라에 온통 펴뜨렸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현대자본주의적 사회에 사는 사람에게 종교의 차이라는 사람이 곧 사람됨의 차이라는 것을 별 의미없어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종교와 종교의 관계로 맺어지는 것이 아니라 돈과 돈의 관계로 맺어지고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돈이 절대적인 사회에는 돈의 이외의 관계는 결코 절대적 가치를 갖지 못합니다.

종교란 어디까지나 오락의 일종으로 봅니다. 기독교인이 있는 반면에 천주교인도 있고 불교도 있고, 특히 아무 종교도 갖지 않는 사람들도 더 많습니다. 이는 이 사회의 속한 인간들에게 있어 종교란 필수적인 것도 아니요 절대적인 것도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인간은 종교 형식에 의해서 맺어지는 것이 그 내면에 다른 면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이세벨 왕비를 통해서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이세벨은 바알종교의 위력을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 어떤 인간도 막지 못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왜냐하면 바알종교는 인간이 지니고 있는 공통적인 보편성을 찾아서 세력을 확장하는 자생적인 능력을 모집하는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그 공통점이라는 것이 바로 ‘내가 잘 되려면 나의 정성으로 인해 타인들과 차별화되는 축복을 받아 얻어낼 수 있다’는 원리입니다. 쉽게 말해서 ‘지성이면 감천’ 즉 정성만 모아놓으면 그 모은 정성을 보고 하늘은 반드시 복을 내려주시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 어떤 신이든 이 원리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즉 내가 잘되기 위해서 내가 뭔가를 해야 하는 종교가 이세벨의 종교입니다. 거기에 비해서 그 당시 엘리야 선지자가 전하는 여호와 종교의 진수는 ‘차이점’을 찾아가는 종교입니다. 그 차이점이란, 사람의 능력이나 좌절감이 아니라 자신의 본성과는 차이점을 지니고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와 약속의 능력에 의해서 남게 된 자의 종교입니다.

오늘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상식이나 능력이 아니라 오로지 예수님의 공로만을 상정하고 자신을 그 앞에서 부인하는 그들이 바로 참된 성도입니다. 주님께서는 불꽃같은 눈으로 그들만 선별해 내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 앞에서 나를 죽이는 주님의 손길에 붙잡힐 수 있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1-03-30 13:54

014강-계2장,18-23,(거짓선지자 이세벨)-rev060528/이근호 목사

성경말씀은 요한계시록2:18-23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401페이지입니다.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시되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아멘.

교회들에게 예수님께서 방금 읽은 것과 같이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라는 곳이 자립적으로 알아서 처신 하는 그런 동네가 아니고 누가 주시하고 있고, 관찰하고 있고, 관리하고 있고 심판하고 징치하는 대상으로서의 교회라는 것이 여기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교회에 왔으니까 누구로부터 간섭받지 않고 나 하고 싶은 대로 내 맘대로 살래 놔둬, 라는 것이 교회가 아니라 본격적으로 고개 숙이고 이 말씀에 대해서 수용하겠습니다, 그냥 받아들이겠습니다, 라고 이 말씀 그대로 바깥의 말씀이 아니고 내 속에 말씀이 살아서 움직이는 그런 사람이 되겠습니다. 라고 그것을 수용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 다니는 사람들 내장을 내부를 쫙 째면 그 안에서 뭐가 나와야 하느냐 하면 요한계시록2장 말씀이 들어있어야 되고 창세기1장이 들어있어야 되요. 자기 혼자서 촐랑거리며 살 것이 아니라 말씀이 움직이는 대로 살아가줘야 그것을 가지고 뭐라 하냐면 말씀의 사람, 하나님의 말씀이 주도권을 가지게 되는 그런 사람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을 압축해보면 이겁니다. 사람이 달라져야 된다는 겁니다.

어디서부터 어디를 달라져야 되는가,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제가 달라져야 된다고 이야기하면 어떻게 달라져야 됩니까? 그런 물음보다도 어떤 반발이 강하게 오느냐 하면, 왜 달라져야 되는데? 지금이 어때서? 지금 내 형편이 뭐가 문제가 있기에 내가 달라져야 된다는 지적을 받아야 돼? 만약에 나는 달라져야 한다면 교회 안 다닐 거야. 나는 이대로가 좋아.

교회 바깥의 사람들이 오히려 더 정이 가. 나 그래도 묻혀서 살 거야, 뭐가 달라져? 나 안 달라질 거야, 하나님이 날 사랑만 해 나는 달라질 의사가 없고 그럴 마음도 없어. 라고 강하게 거부할 것입니다. 이러한 단호한 거부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들어서 보면 어릴 때부터 욕 얻어먹어서 나타나는 반응이 아니고 자칭 목사들, 성직자들, 그런 사람들이 아주 거세게, 단호하게 예수님 앞에서 저항을 하게 됩니다. 저항을.

지금까지 충실하고 최선을 다하여 사람과 하나님 앞에 반듯하게 살아왔다고 자부 했는데 예수 당신이 뭔데 나에게 달라져야 한다고 반발하느냐, 그런데 세리와 창기 그리고 강도, 간음한 여인, 못사는 과부, 막달라 마리아 이런 사람들은 그냥 주님 앞에 자빠지고 엎어지고, 주님 없이는 못살겠다고 순응하면서 주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천국이 바로 소수자인 너희 것이다, 라고 하고 있습니다.

내가 자신을 보면서 달라져야 한다는 것은 이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내가 나 자신을 다른 인간 만들기 위해서 애를 쓰는 것은 무엇이 그대로 남느냐 하면, 자신의 자존심과 체면이 계속 유지되는 가운데 달라지기 때문에 그거는 달라지는 게 아니에요. 괜히 다르게 변모되었다는 그 자체가 또 나의 새로운 자존심으로 등장돼가지고 나를 더욱 더 나에게 집착하게 만드는 원인제공만 할 뿐이죠.

그것은 주님의 달라짐과 아무 상관없습니다. 자기가 자기 값어치를 높이기 위해서 한번 몸부림쳐 보는 것이죠. 성화란 이름으로. 거룩한 이름으로 그렇게 하는데 그거 성경적 아닙니다. 어떤 인간이 아무리 달라져도 목사로 있다가 졸지에 창기로 달라지기를 원하는 사람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는 원하는 것은 “네가 목사냐? 너는 깡패야!” 라는 식으로 달라지기를 원하는 겁니다.

사도바울 같은 경우에는 자기가 이 세상에서 자기만큼 훌륭한 사람이 없다고 자부했던 사람입니다. 훌륭하면 더욱 훌륭함을 추가하기 위해서 열심히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던 사람입니다. 그런 사도바울이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복음에 대해서는 사도 바울보다 더 뛰어난 복음을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 겁니다.

예수그리스도의 그 중요성에 대해서 사도바울보다 더 확실하게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얼마나 예수님에 대해서 확실했으면 자기가 죄인 중에 최고의 괴수 자리에 온다 할지라도 그것이 나한테 합당한 평가다, 라고 본인 스스로 고백하고 있지 않습니까? 어느 정도 달라졌는가를 보려면 고린도후서 14장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오는데 저는 이 말씀 여러분들에게 소개할 때마다 조금 미안한 마음을 갖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면 너무나 엄청난 고백을 하고 있기 때문에 과연 이 말씀에 사도바울과 같이 동의하고 합세하는 사람이 우리 중에 과연 나올까? 약간은 염려스러움이 있어요.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

끝부분이 대단하지요? 예수님의 사랑이 강권된 사람의 특징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리고 누굴 위해 사는 하면, 자기를 위해서 대신 죽으신 분을 위하여 살게 되는, 그러한 달라짐의 현상이 있다는 겁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다고 할 때에 나타나는 특징이 무엇이겠습니까? 자기가 자기를 극구 변호한다든지 핑계한다든지 변명이 입에서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나 잘못한 게 없는데’ ‘나 실수한 것 없는데 왜 나보고 욕하냐?’ 이런 변명 같은 게 나오는 것이 아니고 뭐라 하냐면, 이러한 일이 벌어진 것은 주님께서 네가 아직도 주님을 사랑하고 있느냐를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해서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알게 하기 위해서 이런 난데없는 억울한 일을 벌어지게 했구나, 라는 고백이 나오신다면 그 사람은 고린도후서5장15절의 사도바울과 일치된 고백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을 찾고자 하는 제가 못됐습니까? 그런 사람을 만나고자 하는 제가 욕심이 많은 겁니까? 제가 만난 많은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이에요. 전에는 하나님을 몰랐는데 하나님 만나고 난 뒤에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인간답게 살았더니만 이렇게 인간 되었습니다. 라고 자신의 가치를 증거 하는 사람들을 너무나 많이 만났었어요. 그런 사람들만 만났습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개망나니였는데 예수 믿고 새사람 되었다. 그렇게 자신을 변호하는 사람은 숱하게 많이 만났지만 그것마저 포기하고 버린 사람은 ‘우리교회’ 교인들 빼놓고는 못 만났습니다. -아, 입에 발린 소리- ‘우리교회;’ 교인들 빼놓고는 없다. 너무 티나나요? 기적이죠. 기적. 훌륭한 자기 자신마저 훌륭하지 않다고 하는 게 얼마나 큰 기적인데요.

그립습니다. 신자가 보고 싶어요. 훌륭한 사람 만나기 싫고 그냥 신자가 그리워지는 거예요. 성령께서 달라지게 하는 것 하고 인간들이 자기 학대, 자기 반성해서 달라지는 것 하고 격이 다릅니다. 생각해보세요. 망해가는 나를 왜 증거 합니까? 예수님을 증거 해야지. 늙어 치매현상 일으키고 나중에 오줌 싸고 똥 싸는 인간이 될 수밖에 없는 인간을 왜 증거해야 됩니까.

성령께서 우리를 주신 것은 나 잘났다고 주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가 잘났다고, 그리스도가 의인인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었습니다. 사도행전 1장8절에 보면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땅 끝까지 예수님의 증인 되라 했지 나이 증인 되라 하지 않았어요. 오늘날의 시대는 훌륭함의 경쟁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피곤합니다 정말. 짜증납니다.

하나님 하시는 일이 우리의 예상을 빗나갑니다. 상당히 극단적이에요. 인간이 하는 행동 하나가 아주 극단적인 일이 있지만 성경에서는 그것이 넘칩니다. 손대기가 겁나요. 모든 게 극단적입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세벨의 선지자를 쫓는, 여자목사를 쫓는 그들을 내가 용서치 아니하리라. 이게 얼마나 극단적입니까.

오늘날 21세기 민주주의 사회 용어로써 이런 사건이 일어나면 ‘냅둬요! 냅둬! 제가 뭘 하든지 간에. 당신한테 돈 달라는 소리 하는 거 아닌데 냅둬요 그거! 이러고 말지, ’용납치 아니하리라‘ 오늘날 사람 위에 사람 없는 이런 시대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런 발언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처음에 뭐라 했습니까. 인간 마음을 칼로 째버리면 흔히 아는 상식들이 담겨있는 것이 아니고 이 말씀이 담겨있어야 그것이 말씀의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것은 우리의 예상과 기대를 완전히 빗나간 거예요. 그런 사건을 제가 골라낸 사건이 바로 창세기 22장의 사건입니다. 아버지가 자식을 칼로 죽이는 그 대목이에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는 겁니다. 자식이 없는 처녀나 총각들은 그 느낌을 잘 모르겠지만 자식을 두고 있는 부모 입장에서 부모 손에 의해서 자식이 못된 친구들 손에 죽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애지중지 하는 자식을 자기 손에 들린 칼로 죽여야 한다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단호한 명령이라는 것

융통성이 허용되지 않는, 모호함이 개입되지 않는 명확하게 지시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보다 더 엽기적인 일은 없습니다. 이것보다 더 당황스럽게 만드는 일은 없습니다. 총각들은 모를 것입니다만, 그리고 여자를 무시하는 발언 같습니다만 오해하지 말고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현대 여성들이 배우자를 고를 때 자기보다 더 예쁜 남자를 골라요. 왜냐면 옛날 여성들은 밥 먹고 사는 게 급선무였지만 지금은 먹고 사는 건 일단 되니까 아름다움을 추구합니다.

자기가 평소에 못났다고 느낄 때에 아름다움에 대한 열등의식이 얼마나 강하겠습니까. 그래서 아무리 능력있는 남자라 할지라도 못생긴 남자는 용서가 안 되는 거예요. 어떻게 하든 내 자식만큼은 못생겼다는 이 지옥 같은 굴레에서 내 자식만은 탈피해주고 싶은 겁니다. 그저 DNA 하나 잘 만나서 엄마는 못생겼지만 나와 같은 전철의 수모를 겪지 않게 하기 위해서 열 살이든 스무 살이든 나이 상관 않고 찾아 헤매는 겁니다.

만약에 그런 결혼으로 여자가 아이를 낳았는데 그렇게 귀한 자식을 자신의 칼로 죽여야 한다는 것. 우울증도 아니고 맨 정신으로. 그것도 죽이지 않으면 지옥 간다는 하나님 명령에 접했을 때에 얼마나 당황스럽겠습니까. 사실은 그것부터 시작돼야 합니다. 그 당황스러움부터 시작돼야 합니다. 왜냐면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니까.

믿으려면 이렇게 믿어야 정상이지 그 외부적인 것은 믿음도 아니다 그런 뜻이거든요. 자기 자식을 살인한 사람을 믿음이라고 이야기하고 야고보서 2장에 보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하면서. 우리는 그 말씀을 흔히 거짓말 하고 있는, 예수 믿고 난 뒤에 착한일 해야 된다 그렇게 이해하고 해석하고 싶지만 야고보서 자체가 그 해석을 거부하고 그 뒤에 보니까 믿음에 대한 행함은 딴 게 아니고 자식 죽이는 아브라함의 경우를 예로 들었다 말이죠.

흔히 윤리도덕으로 슬쩍 넘어가고 싶은 것이 우리 본성이지만 그걸 단호히 거부하고 적어도 믿으려면 하나님 명령대로 자기 자식을 죽일 수 있어야 그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다. 이렇게 나왔을 때에 도대체 우리는 어쩌란 말입니까. 주의 뜻은 이겁니다. 달라져야 된다. 우리는, ‘인간답게 살면 안 됩니까?’ 인간답게 사는 게 아니라 달라져야 한다. 네가 생각했던 인간이라는 개념 자체로부터 탈퇴돼야 된다 말이죠.

사람이 사람답게 돼야 사람이지, 요새 유행한 말로 남자가 남자다워야 사람이지, 우리는 그런 것에 익숙해졌는데 이거는 짐승만도 못한 행동을 해놓고 그것을 믿음의 모델로 내세우고 그 믿음에 부합해야 되는 믿음이라면 우리는 어떡하라는 말입니까. 결론적으로 말해서 우리가 그 믿음 만들어내지는 못하고, 그 믿음이 여러분 속에 생겼거든 주께서 여러분들을 구원하기 위한 기적의 씨앗이 떨어졌다고 믿어라,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런 이야기예요. 방금 길게 *소리 한 것은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내가 만들 수 있는 것을 간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 그것은 나의 자존심으로 굳혀졌기 때문에요. 예수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 믿는 내가 잘났다고 떠벌리기 쉽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짓입니다.

여러분이 만들려고 애썼던 그런 것이 오히려 무시당하고, 무시할만한 정말 기발한 것, 기발한 것을 고상하게 얘기하면 이제부터는 내가 나를 위해 살지 아니하고 주님 위해 사는 사람이 되었다는 믿음의 흔적이 여러분에게 발아되었거든 더 이상 여러분은 당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런 분들을 위해서 봉사할 뿐이지, 책임과 임무가 있을 뿐이지 그런 분을 주관할 수 있는 어떤 자격자도 교회에는 없습니다.

왜냐면 오늘 본문에서 제가 느낀 바는 교회를 주도면밀하게 관찰하시는 분은 오늘 본문 18절에 보니까 ‘그 눈이 불꽃같다, 해서 그 불꽃같은 눈을 가진 분 만이 교회를 관찰할 수 이는 자격이 된다 이 말입니다. 제 눈이 불꽃같습니까? 안경 껴야 보입니다. 그래서 목사는 교인들을 주시할 수 있는 자격도 권한도 없어요! 목사는 오히려 망해가는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이 목사에 대해서 신경을 쓰고자 한다면 그 사람에게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고 단정하고 싶어요. 얼마나 중심이 없으면, 주님이 주신 믿음이 기적처럼 발아되지 않았으면 왜 주위에 있는 목사와 장로들을 의식하고 거기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을 하느냐 말이죠. 얼마나 믿음이 없었으면….

오늘 본문에서 ‘이세벨’이라는 여자가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두아디라 교회를 언급하는데 독특한 특징이 하나 툭 튀어나옵니다. 그게 뭐냐면 여 선지자 이세벨의 교리를 따라갔으면 안 됩니다. 따라가면 나의 불꽃같은 눈으로 관찰해서 다 솎아낼 거고, 그런 사람에 대해서 용서하지 않고 멸망시킬 것이다 는 것입니다. 이렇습니다. 보이지 않는 분이 현재 우리교회에 목사님이신데 그 목사님의 특징은 보이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 보이지 않는 예수님이라는 목자께서 교인들에게 설교를 하세요. 설교를 하시는데 재밌는 것은 보이지 않는 분이 말씀을 통해서 설교하시기 때문에 어떤 사람만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냐 하면 그 사람 마음속에 보이는 목사 장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주님을 우선시하는 사람에게만 유효한 반응이 나타나는 식으로 성경은 말씀한다 말입니다.

그럴 때 보이지 않는 분이 말씀하시기를 여 선지 이세벨 같은 사고방식을 솎아내서 지옥 보낸다하니까, 보이지 않는 주님에 대해서 믿지 않고 보이는 우리끼리의 조직 만들어 거창한 교회됩시다. 이런 쪽으로 교회 우상시 하는 사람은, ‘살다보면 그럴 수 있지 뭐 그걸 가지고 이렇게 하느냐’ 얼렁뚱땅(이게 표준어였나?-녹취자) 넘어가려고 하더라 말입니다. 여 선지 이세벨은 주님께서 엘리야시대 때 경우와 똑같이 두아디라교회에서 되풀이 되었다는 겁니다. 열왕기상 18-21장에 나오는 현상과 동일하게 터져 나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두아디라교회에서 누구와 싸우셨냐 하면 여선지 이세벨과 싸우시는 거예요.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이 옛날 사건의 실체와 싸운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의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우리가 어디로 돌아가야 하냐면 엘리야시대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엘리야 시대로 돌아가면 이세벨이라는 왕비가 나옵니다. 자기 남편이 아합인데 이스라엘이 두 개 쪼개진 북쪽이스라엘이죠.

나쁜 나라고 남쪽은 은총을 받은 나라 아닙니까? 그 북쪽나라의 아합왕 부인 이름이 이세벨입니다. 이세벨이라는 여인이 시집을 오면서 바알이라는 신을 확산시켜 놓았습니다. 그것이 그 당시에는 문제가 되지만 지금은 그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지요. 왜 요새는 그게 문제가 안 되느냐 하면, 종교라는 게 어차피 오락의 일종 아닙니까?

종교라는 게 오락의 일종이라고 사람들은 그렇게 알고 있다 말입니다. 사람들은 ‘당신은 불교신자입니까, 천주교신자입니까, 기독교신자입니까, 다른 종교입니까?’ 라는 물음은 필수요 선택이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불교신자입니까, 천주교신자입니까, 기독교신자입니까? ‘아무 종교가 아닙니다.’를 집어넣는 걸 봐서 결국은 사람들은 종교가 필수가 아니고 여가선용? 취미활동처럼 자기가 가질 수도 있고 버릴 수도 있는 게 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종교라는 것은 별반 중요한 것이 아니올시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보편화되어 있는 그런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다빈치코드’라는 영화의 주제가 뭐냐 하면 예수그리스도라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고 보통사람인데 ‘까불다가’ 십자가 진 거예요. 정치범으로 봐주려다가 너무 까부니까 죽인 거예요. 그 예수란 자가 십자가지기 전에 막달라 마리아라는 여자와 연애를 해 임신했는데 아이 이름이 사라예요.

사랑해가지고 예수님이 잡힐 때 그 여자가 애굽에 내려가서 12살까지 키우다가 유대인들이 자꾸 핍박해서 못살아가지고 남프랑스 해변에 상륙해서 혈통을 잇는데 기독교는 오락일 뿐 의미 없다는 그 이야기예요. 어떤 종교를 수입해다 심든지, 퍼뜨리든지 간에 오늘날 현대 사회에서는 내가 가진 돈을 훼손하지 아니하면 항상 친구가 됩니다. 종교가 달라도. 심지어 교회를 안 나온다 할지라도 나에게 경제적으로 도움만 줄 수 있다면 친구 관계가 엮어져요.

그런데 엉뚱하게 여기에다 이세벨이라는 여인이 시집올 때 바알이라는 종교를 가져와 이스라엘 전체를 우상화시켰다. 라고 성경에 나오니까 우리는, 현대인은 ‘어쩌라고? 그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그게.’ ‘그게 뭐가 중요한 문제냐’ 종교 믿는다고 사람 달라지느냐 이 말이죠. 사람은 안 달라지고 종교라는 걸 하나 선택하고 취향에 맞다할 뿐이지, 다시 말해 종교라는 것은 그 사람의 취향을 저쪽에 반응을 검출하는 반응치에 불과하지 종교라는 건 인간을 달라지게 하지는 않는다는 말이죠.

만약에 종교가 인간을 달라지게 한다면 종교가 그 사람을 선택하는 게 되고 그 사람이 종교를 선택한 게 아닌 게 되잖아요. 그렇다면 자본주의보다 더 센 종교가 있다는 말인데 그들은 말하기를 ‘이건 말도 안 된다’는 거죠. 이 세상이 돈보다 중요한 게 어디 있어요. 돈이 전부인데.

그런데 돈보다 중요한 다른 어떤 진리가 있다, 한다면 이건 하나의 독선이고 말도 안 된다. 그게 진리라면 모든 사람이 그 진리를 믿을 건데, 일본에 가면 종교가 십만 가지, 한 사람당 하나의 종교가 있어요. 종교가 다르다는 이 말은, 각자 취향대로 입맛대로 골라간다 이 말입니다.

제가 말을 어렵게 했습니다만, 만약에 중국집에 가서 자장면은 맛있고 다른 건 맛이 없다면 다 자장면을 원할 텐데 중국집에 가면 짬뽕도 있고 우동도 있잖아요. 쟁반우동(쟁반우동? 첨들음-녹취자) 잡숴보셨습니까? 이건 뭐냐 하면, 음식 고르는 것은 자기 취향대로 고르는 것이지 자장면 자체에 대해서 어떤 구원의 능력이 안 나온다는 겁니다.

종교라는 건 있다가 싫으면 버려도 그만이고 죽을 때 불안하다 싶으면 그때 가서 다시 믿으면 그만이고 언제든 내가 취했다가 버렸다가 버렸다 취하다가 제 맘대로 할 수 있는 하나이 대상이지 종교가 뭔데?! 하나의 오락인데! 내가 흥분하고 말았습니다만, 이게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는 돈이 전부라는 것을 기초로 한 그 이후에 나오는 상부구조 여러 가지 오락 중 하나인데 그중에 ‘나는 어떤 종교도 안 가진다’는 취미를 가진 사람도 있어요.

골프, 축구 거기에 매여 있는 사람이 있다 말이죠. 지난, 세계 야구대회 할 때 그때 2:1로 지고 있을 때가 7회였습니다. 7회인데 그때 우리 예배시간이 2시였습니다. 갈등생기죠. 마지막 8회보고 올 것이냐, 종교가 뭔데, 야구가 뭔데, 다 같은 오락인데 지금 급한 오락이 야구고 그 다음 오락이 종교다. 라고 생각할 것 아닙니까? 얼마나 주님께 감사한지. 제가 이야기한 그게 바로 상식이거든요.

그런데 창세기22장에 뭐라 했습니까? 아버지가 칼을 들고 아들을 죽이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다, 이건 무슨 뜻이냐면 아들 죽이라는 말이 아니고 그 칼을 가지고 아들을 사랑한다는, 하나님보다 자기 아들을 사랑할 수 있는 자기 자신을 칼로 죽이는 겁니다.(목사님 모션 섬뜩^^) 하나님이 나를 죽이는 대신 자식 죽이면서 나를 죽이는 것을 대체시키는 것이 그 작업이에요. 그게 믿음이에요.

누구든 십자가 앞에서 자기를 찔러 죽이라는 말입니다. 그게. 주님께서 노아에게서는 방주로 구원했지만 지금 오늘날은 십자가로 구원하거든요.(십자가라는 단어만 들어도 왜 그리 좋은지) 십자가는 뭡니까, 방주는 문 열고 들어가면 되는 거 아닙니까, 십자가는 문 열고 들어갈 데가 없어요. 문 열고 들어가면 나를 죽입니다. ‘잘만났다! 십자가에서 나와 함께 죽자’ 이겁니다.

‘너는 죽고 이제부터 너는 사는 것은 너를 위해 살지 않고 널 위해 죽었다가 사신 예수그리스도를 위해 살게 하려 함이니라’ 하고 멱살을 잡고 ‘이리와!’ 끌어당기는 것 그것이 십자가, 오락이 아닌, 종교가 아닌 진짜 복음의 능력이 바로 그겁니다. ‘그러면 목사님, 우리보고 어쩌란 말입니까?’ ‘어쩌긴 뭘 어째? 이세벨이 누군지 여호와가 어떤 분인지 진짜 구분하면 그만이에요.’

나머지는 알아서 다 하십니다. 우리가 심판하면 안 됩니다. 심판은 주께 맡겨 놓았습니다. 저 많은 사람들이 믿음, 믿음 하지만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는 심판을 주님께 맡기는 사람은 믿음이 있다고 보고 있어요. ‘아, 억울하지만 심판을 주님께 맡길 줄 아는 주님의 주 되심을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구나,’ 어떤 사람은 믿는다 해놓고 심판을 주님께 맡기지 않고 자기 자신이 나서서 심판하는 사람이 있어요.

천주교 지키기 결사대라든지 흔히 선교단체들 자신의 자존심을 깔아뭉갠다고 이거는 회사에서 노조에 대항해 만든 구사대 만든 것과 같은, 내가 보기에는 그게 자존심인데…. 주님께서는 자신을 방어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께 다 맡기고 자기 몸을 날려버렸어요. 스데반집사가 죽을 때 ‘너 두고 보자’ 이러면서 죽지 않았습니다. ‘주여, 저들이 하는 짓을 저들이 알지 못합니다.’ 하고 자기 몸을 날려버렸습니다. 그게 믿음이에요.

이세벨이 가지고 온 바알종교의 특징이 뭐냐, 인간의 공통성을 찾아 나가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바알의 이세벨이라는 여인이 시집오면서 마음에 다짐을 하죠. ‘여호와를 섬겨? 여호와는 명목상의 이름뿐이고 실속은 우리가 믿는 바알종교가 가득해’ ‘나는 자신만만해, 두고 봐 어느 종교가 더 퍼질지’ 바알종교의 특징은 뭐냐 하면 정성대로 바치면 복을 받는 겁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다’ 정성을 다 하면 하늘이라도 감동해 복을 주신다. 이 논리입니다. 그 안에 들어가면 그것뿐이에요. 복잡한 논리가 있지만 강의가 아니라서 다 할 순 없습니다만, 바알종교의 특징이 뭐냐 다산의 원리, 본문의 음행한 거 나온 것도 이방종교의 특징인 다산의 원리. 제가 지난주 시간에 얘기했지요? 이방종교가 전문적으로 성행위를 담당하는 성직자가 배치돼 있는 것은 성행위 자체를 두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성행위 자체가 그쪽 신이 내린 치러야 될 의식이고 의례고 행사인 것입니다.

성전에 배치돼 있는 여 사제들과 성 결합을 함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그들이 믿는 신과 일치되고 합일되는 상태에 빠지는 거죠. 그런 것이 인간의 내부에 잠재돼 있던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을 외부로 드러내면서 일차원에서 느낄 수 없는 최고조의 희열과 섹스타지한 기쁨을 제공됨으로써 종교라는 회사가 영업이 진행되는 운영을 할 수 있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식으로 하면 ‘여러분들이 교회 오는 목적이 뭡니까’ 예배드린 만큼 남들보다 더 많은 돈벌이를 하겠다고 오시는 것 아닙니까? 그거야 우리 교회에서 해 드리겠습니다. 라고 내세우는 이것이 바로 이세벨 종교예요. 우상숭배 종교입니다 이게. 평소에 내가 원하는 것을 제공해주니까 어느 인간이 마다하겠습니까. 그때 엘리야는 사투하면서 말하기를 ‘하나님 아버지 이 나라 전체가 맛이 갔습니다.

이제는 나 혼자 도망자 신세가 되었습니다. 죽을 때까지 이세벨이 현상금 붙였어요. wanted(수배중인) ‘황야의 무법자’에 보면 나오잖아요. ‘이런 인상착의를 알고 있는 사람은 가까운 지구대나 경찰에 신고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쫙 퍼졌어요. 도망가기를 호렙산까지 도망갔어요. 가면서 한탄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맛이 갔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네가 보기에 맛이 갔지? 하지만 내가 은혜로 남게 한 7천명이 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힘으로는 자기본능, -바알종교가 인간의 본능에 호소하는 종교이기 때문에- 어떤 인간도 자기 본능을 거부하면서 예수까지 믿을 수 없습니다. 예수, 하나님을 믿되 자기 욕심을 들어주는 예수이기를 바라는 것은 누구나 빠질 수 있는 함정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아니야, 이건 아니야 진짜 믿음은 날 위해 살지 않고 주님을 위해 사는 거야’

그런 씨앗이 맹아처럼 피어오르는 사람은 그것은 자신의 능력이 아니고 주의 은혜로 남게 되는 사람이 분명 있습니다. 저는 있다고 믿습니다. 왜!? 아직까지 예수님이 재림하지 않았기 때문에. 분명히 그런 분이 계십니다. 이것은 여호와종교의 특징은 인간의 공통점을 찾는 것이 아니고 차이점을 찾아나가는 것이 여호와종교의 특징입니다.

인간의 상식과 나의 욕망인 줄 빤히 알면서도 ‘아니야 그게 아니야’ 복음을 안다 하면서도 열한시에 교회 오시면서 (열한 시 십 분에 오시지만) 그때는 뭐냐, ‘주님이여 없는 시간 짬 내서 피곤한데 억지로 왔습니다. 출석 잘 지켰기 때문에 이번 한 주 동안 복 주옵소서’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목사 같으면, ‘목사가 토요일 날 죽도록 설교준비 했습니다. 이 좋은 설교 준비한다고 고생 좀 했으니까 교인들 결석하지 말고 많이 참석하게 해주옵소서.’ 그런 것들이 누구나 바알처럼 나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니야, 그건 아니야’ 이게 죽을 때까지 나타나는 현상인 줄 알지만 이건 ‘나’ ‘우리교회’ ‘사업 잘되는 나’ 그런데 고린도후서5장에 보면 새로운 피조물은 그런 나, 바알종교 신봉자인 나를 위해서 죄인 괴수되게 만드시고 오직 자신의 피로써 딴사람으로 만든 주님을 위해 살게 하십니다.

‘나는 주님 앞에 죄인이며 주님만 의인이고 그 의로움으로 구원받습니다.’ 그걸 증거 하는 사람으로서 우리에게 그런 현상들을, 이세벨 같은 현상들을 일으킨다 말이죠. 결론적으로 말씀드려서 지금 보이지 않는 목회자께서 솎아내시는데 우리가 평소에 얼마나 죄를 지었느냐 그걸 보시는 게 아닙니다. 죄는 죽을 때까지 다 지어요.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정말 너희 속에 ‘아니야, 그게 아니야’

이게 내 본성인 줄 알고 세상사람 못잖게 내 욕심과 자존심 챙기는 게 당연한데 주님께서 원하는 건 ‘아니야, 그건 아니야! 그건 이세벨이야! 요한계시록2장에서 그걸 배웠어!’ 인간의 공통점을 찾아나가는 거. 그래서 그걸 하나의 종교로 집단화시키는 거. 그건 이세벨이야. 그건 아니고 감히 내가 만들어낼 수 없는 것, 예수그리스도의 그 공로와 사랑과 용서를 증거 하는 사람으로 찍혔다는 거.

택함 받았다는 그 사실을 증거 하기 위해서 나의 욕심과 본능 속에 여전히 나는 존재한다. 그걸 인정하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에 종교 많아도 두 종교밖에 없는 줄 알았습니다. 인간의 기존의 욕망과 자존심과 의미와 가치를 높여주는 종교와 아브라함이 아들을 죽이는 것처럼 칼로 찌르시는 종교와 두 종류밖에 없는 줄 저희들 알았습니다. 십자가를 가지고 저희를 찔러주셔서 세상이 내 중심이 아니라 예수님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이제야 발견하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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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746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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