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20041115 부산강의-루터와 칼빈의 차이
Re..20041115 부산강의-루터와 칼빈의 차이
이름 : 한윤범(IP:)
20041115 부산강의-루터와 칼빈의 차이
(강의:이근호 목사)
종교가 잘못 돼서가 아니라 아예 되도 않은 일을 시작해서 되는 거지요. 그래서 마지막 결론이 이렇게 해 놨어요. 세월 지나면 모든 것이 제자리 돌아온다고. 모든 것이. 아, 이게 헛짓 했구나 되돌아오게 되어 있지요. 영생주기로 작정되지도 않은 인간에게 그렇게 투자해봐야 소용도 없는 일이고.
1분전인데 시작합시다. 더 이상 ... 1분전에는 와야지.
자, 오늘은 몇 페이지냐 하면, 116페이지.
['참'을 향해 던진 물음을 '무엇'에서 '어떻게'로 넓혀가게 된 근세 전기 인식론적 반성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참이란 진리 아닙니까? 진리가 무엇이냐를 추구했던 것이 초대기독교부터 해서 근세까지 이어져 왔다면, 근세부터는 뭐냐 하면, '무엇'이 진리냐가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가 문제가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진리라 하는 것은 이미 신=진리거든요. 신이 진리가 되지요. 이렇게 그들은 생각하지 않았고, 진리를 신이라 본 겁니다. 진리가 없으면 정답이 없잖아요. 정답이 없으면 인생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불안정하겠지요. 왜냐하면 인생이라 하는 것은 변화되니까. 헬라철학에서 인간은 변화되니까 뭐, 종잡을 수 없다. 확실하게 이거다 하는 게 있어야 돼요. 정답이 있어야 되고, 이 정답은 진리가 돼야 되고. 이게 초대기독교에 들어오면서 진리는 곧 신이다. 신이 곧 진리라고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신은 진리다, 하고는 다르지요. 이게 다릅니다.
헬라철학에서 사람이 인간의 사는 목적은 뭐냐 하면, 행복이라고 하죠. 사람이 행복이죠. '행'자 떼어버리면 뭐가 되겠습니까? '복'이죠. 이것은 인류의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복에서부터 복으로 나오는 겁니다. 복이라 하는 것은 결핍에서 나온 것이고, 복을 주셔야 될 사람은 잉여지요. 여분이 남는 것, 충분히 남는 것. 그래서 모자라는 인간과 남아돈다는 신과의 거래에 의해서 잉여부분을 결핍부분에 보충함으로서 이걸 축복이라고 본 겁니다. 여기에 중개자, 중매자로 등장하는 것이 고대부터 이거는 성직자들이었고, 성직자들의 생활은 커미션 받아 챙기는 것. 부동산 중개해 놓고 커미션 받아 챙기는 거죠.
그러면 결핍은 가난한 자를 말하는가? 천만에. 결핍은 가난이 아니고, 현대철학에 들뢰즈 철학에 의하면 인간의 욕망에서 나오는 거죠. 인간의 욕망에서 나오죠. 인간의 욕망은 재미있는 게 인간의 욕망은 충족을 만들어내는 게 욕망이 아니고, 결핍을 생각하는 게 욕망이에요. 이게 참 신기한 일이에요.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욕망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 채워지면 욕망은 스톱이 되는 것처럼 여겨지잖아요. 근데 욕망 자체가 새로운 결핍을 만들어내면서 욕망은 비로소 자기 존재성을 나타냅니다.
쉽게 말해서 욕망이 없는 인간은 시체입니다. 꿈이 없는 자는 희망이 없다. 하는 그런 걸 애들한테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하잖아요. 목사들이. 꿈과 희망이 없으면 사람은 무슨 낙으로 삽니까? 아침에 눈뜨면 비전을 갖게 돼있고, 현재와 비전 사이에는 반드시 거리를 두게 돼있고, 거리를 두게 되면 뭐가 생기냐 하면, 결핍이 생기게 되죠. 그러니까 결핍이 사람으로 뭘 하게 하냐면, 사람으로 살게 만드는 겁니다.
이걸 좀더 어렵게 이야기해 볼게요. 어렵게 하면, 이걸 상징세계라 하죠. 상징세계와 상상의 세계 이렇게 하는데, 상징세계는 이게 타인에 의해서 조작된 세계를 상징세계라 합니다. 그 구성은 언어로 구성되는데, 타인에 의해서 상징세계,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로빈슨 크루소처럼 무인도에 혼자 산다면, 우리는 반복되는 생활하겠다. 그냥 되풀이 하는 생활. 타인이 없다면 자기 자신만 쳐다보겠지요. 그러면 자기 자신이라 하는 것은 어제의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어제의 나를 기초로 할 때 거기서 뭐, 더 추가될 게 없어요.
그러나 상징세계에서 타인이 돼버리면, 타인과 속에 인간이기 때문에 항상 자기는 모든 타인이 될 수 없잖아요. 나는 한 명이고, 타인은 다수 아닙니까? 그러니까 하나가 다수의 인생을 못 살잖아요. 배고플 때는 빵 만드는 사람이 참 부러워지고, 빵이 들어오고 난 뒤에는 좋은 옷을 입고 싶을 때는 패션디자이너가 부러워지잖아요. 그리고 집안이 어지러울 때는 인테리어 하는 사람이 부러워지죠. 인테리어 하는 사람, 패션디자이너, 빵 만드는 사람, 전부다 다 타인이잖아요. 타인이고 한두 명이 아니고 다수 아닙니까? 교회 오면 목사 되고 싶고 뭐, 이런 게 있다 아닙니까? 그런데 자기는 단수 아닙니까? 하나잖아요.
그래서 타인이 갖고 있는 그것이 나에게 상징세계에서 뭘 만드느냐 하면, 욕망을 욕구를 만들어내요. 나는 하나고 타인은 다수기 때문에 그 사이에 뭐가 생기냐 하면, 결핍이 생기고, 결핍이 생기니까 그것은 뭔가 결핍의 특징은 사람들을 행동에 나서게 만듭니다. 사람이 움직이는 이유가 결핍 때문에 생겨요. 성에 안 차는 거예요. 마음에 차질 않아요.
강원도에 감자 캐는 할머니 보고, 할머니 운전 배우소. 하면 미쳤나! 운전 뭐 하려고 배우는데. 운전 안 배운다. 할머니 휴대폰 사시죠. 그거 뭐 하려고 사는데? 왜냐하면 강원도는 다수가 없어요. 자기 혼자 살잖아요. 자기 혼자 사니까 남들 휴대폰 갖고 있는 그 모습이 자기 욕망의 원인제공이 되질 않습니다. 다만 욕심이 있다면 보다 큰 감자. 이런 데 욕심내지, 대상이 되질 않아요. 그런데 타인과 만나면서 욕망이 발생이 되는 겁니다.
서울에 실패하고 촌에 와 버리면, 처음 왔을 때 서울 살다 촌에 온지 1주일 되면 서울이나 내나 마찬가지죠. 1달만 지나고 1년만 지나면, 옷매무새부터 해서 모든 것이 격차가 나기 시작하는데 상상 이상으로 쭉 떨어집니다. 어이구, 촌스럽기는. 대번에 이렇게 하죠.
정보체계가 사이버세계가 구축되면서 TV가 강원도 골짜기까지 파고들지요. 공간상 강원도 골짜기에 있어도 이미 의식상은 서울시 한복판에 같이 공존하고 있는 사람이에요. 그렇다면 거기서 욕망이 생기고 그 욕망을 유발하는 것이 바로 이 상업시대에서의 광고고, 소위 매스미디어의 광고죠. 더 욕망을 누가 더 자극을 시키고 발산시키느냐에 따라서 기기에 대한 소비력이 증가가 되고, 소비력이 증가한다는 것은 사업이 된다, 장사가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광고와 자기 PR시대를 이용해야죠. 그게 안 되면 자극을 주게 됩니다. 자극 없이는 움직이지 않게 돼있고, 그 자극은 인간의 결핍된 요소를 추구하는데. 결핍이라는 것이 원래 없는 데 욕망이 타인에 의해서 욕망이 생겨버리면 없는 결핍이 생겨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자괴감을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불만을 느끼죠. 그렇다면 그 결핍은 다수의 결핍을 위해서 뭔가 충분히 여분을 갖고 있는 어떤 대상이 필요한데 그걸 고대로부터 이걸 신이라고 하죠.
그런데 고대 신과 현대에 근대에 와서 신의 차이점이 뭐냐? 고대 신은 집단적 신이었어요. 나라 신이 따로 있었습니다. 개인적 개별적 갖고 다니는 신이 없어요. 국가 단위의 신입니다. 근대에 와서 개인이 중요하면서, 왜냐하면 옛날의 신은 개인으로 오는 것이 아니고 중간 매체를 통해서 오는데 이게 제사장이고 한쪽은 왕을 통해서 옵니다. 왕과 제사장은 일년에 한 번씩 백성들에 의해서 신 자신에 의해서 신 앞에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공개석상에서 발표하는 그러한 제사를 지내게 되어 있어요. 이거는 동양에 중국에도 마찬가지고.
왜냐하면 백성은 왕의 운명 속에 합세되어 있기 때문에 왕이 잘 돼야 백성이 잘 되고, 왕이 잘 되면 제 때에 비가 와서 농경시대기 때문에 농사 잘 되었습니다. 그래서 집단적이었어요. 제사장은 왕을 위해서 기도하고 신을 위해서 기도해줘서 왕이 신에 합당한 사람이 되어서 왕이 받은 축복이 외부에 백성들에게 주어지게 되어 있지요. 그래서 백성들은 이 점을 알기 때문에 백성들은 자기가 갖고 있는 권력의 일부를 왕에게 양보해 버립니다.
이게 사무엘상 8장에 보면 나오지요. 이방제도의 왕 제도는 뭐라고요? 십일조를 바쳐야 되고, 귀한 집 딸들을 왕녀로 대장금으로 바쳐야 되고, 온갖 좋은 제일 좋은 만물들은 다 갖다 왕궁에 집합을 해줘야 되고. 그렇게 해주는 이걸 가지고 구약학자들은 뭐라 하느냐 하면, 카버넌트, 언약이라 합니다. 언약도 개판같은 언약개념을 끄집어내요.
종속된 백성과 왕 사이에 체결된 계약이에요. 그걸 확대하면 국가와 국가 대 종족과 종족과의 상거래에 해당되는 카버넌트. 뭔가 할 때는 그냥 하는 게 아니라 잘라서 했다는 거예요. 자르다. 그래서 언약이라는 말이 거기서 나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언약은 개코도 아무것도 아니다 이 말이죠. 여러 가지 구약 주제 가운데 하나지, 그게 뭐 중요하냐 이 말이죠.
그게 뭐냐? 성경을 집어 던지고 성경 밑에 있는 인류문화학에 가서 인류문화학의 범주보다 더 넓힌 결과가 그 정도입니다. 그러니까 인류문화학은 그 밑에 또 뭐가 있는 줄 압니까? 역사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현대 소위 개혁신학의 특징이 뭐냐? 역사입니다. 성경이 아니에요. 역사에요. 역사를 이야기 안 하면 그거는 이야기가 안 통할 정도에요. 무조건 역사가 전부라는 겁니다. 그걸 여기에서 제가 이야길 해 놨지요. 딜타이, 이 책에 다 있어요.
그러니까 백성이 갖고 있는 자기 권리를 왕에게 부여하고 계약 관계가 성립되면, 왕의 운명에 여기 백성의 운명이 되었기 때문에 왕은 신으로부터 복을 받을 때 비로소 그들은 복이 오고. 이것이 집단적인, 왕의 종교가 곧 그 나라의 종교가 되고 그 민족의 일관적인 종교로서 전환되는 겁니다. 그 왕이 바로 기름부은 자죠. 동료들보다 성하다. 했어요. 시편에 보면 나오죠. 히브리서 1장에 나오죠. 기름부음으로 동료보다 성하다. 다른 차원에 분류시켰다.
하나님은 그러한 인간들의 문화를 충분히 이용해서 멜기세덱이라는 정말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땅의 흔적도 남기지 않는, 완전히 위에서 스턴트맨이 피아노 줄에 매달려서 하는 것처럼 위에서 매였지, 땅에선 안 매인, 그걸 가지고 자유라 하죠. 성경에서 자유라 하는 것은 그냥 혼자 있는 걸 자유라 하지 않고, 하늘에 매여 있는 것을 자유라 합니다. 율법으로부터 자유케 한다. 다른 차원에 소속된다.
율법은 땅의 사람을 공격할 때 율법을 사용하거든요. 하늘에 속한 것은 율법으로 공격하는 게 아닙니다. 용서의 약속으로 하늘의 언약으로 묶어 버려요. 땅에 속한 것은 율법으로 묶어 버려요. 아까 제가 이야기했죠. 인간이 땅에 추방되고 난 뒤에 많은 세월이 지나고 난 뒤에 곧장 따라온 게 뭐냐 하면, 모세를 통한 율법이 따라 왔잖아요. 그러니까 율법이 시내산 밑에서 왔다는 이 말은, 이제는 죽었다. 이 말이에요.
너거는 처음부터 죄였지만 이제는 본격적으로 죄인임을 알려주기 위해서 다른 민족이 아니라 특별한 선택한 민족,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줌으로써 결국 이스라엘이 망해버리잖아요. 율법 받은 민족이 율법에 의해서 망했다는 말은, 이스라엘 외부의 모든 민족도 동일하게 망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망한다는 정도가 아니라 갇혔기 때문에 망하고 그들에게서 어떻게 하늘로 도약할 수 없다 이 말이에요. 기약할 수 없다 이 말이에요.
출애굽기 19장 4절에서 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내가 이스라엘을 독수리 날개로 업었다" 하잖아요. 독수리 날개가 몇 마리 동원되었어요. 그것 분명히 독수리 날개 아니잖아요. 홍해가 갈라져서 왔는데. 독수리 날개 업어서 왔다. 독수리 날개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여러 가지 중요한 뜻이 담겨 있는데, 앞으로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답게 하는 것은, 인간의 능력이 손댈 수 없는 다른 차원의 능력이 거기 개입된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되는 조건은 이미 확정되어 버렸으니까 인간의 어떤 능력이 거기다 가미할 필요가 없다는 거죠. 만약에 가미하려고 덤벼들면 독수리 날개로 업는 그 원칙에 위배되기 때문에 그건 이스라엘이라도 이스라엘로 간주하지 않겠다는 분명한 어떤 확답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지금 하는 이야기가 오늘 하는 공부가 루터와 다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여기 적힌 루터 이야기 보면 놀라운 이야기가 담겨 있어요. 야, 참, 루터가 이 정도였구나, 할 정도로. 뒤에 보면, 칼빈 보면 개판이라. 칼빈은 기독교 신자인지 모호해요. 루터 보면 정말 정곡을 찌르는데, 칼빈은 이거는 기독교 신자가 아니고 종교사업가 같은 인상이 강해요. 정통신학은 칼빈에서 나왔지, 루터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루터 신학은 중간에서 끊어졌어요. 없어져 버렸어요. 버리고 없어지고 루터 의식만 남아 있는
근세에 와서 집단적 구원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구원으로 전환하게 된 것이 칼빈과 루터 이후인데 이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전환한 것도 사실은 큰 오해에요. 성경을 잘못 해석해서 그래요. 루터가 개인적인 구원을 그런 식으로 한 것이 아닌데 그들은 그 뒤에 나오는 인문주의자들, 철학자들 특히 칸트 같은 경우에 크게 오해했죠.
개인주의가 왜 생겼느냐 하면, 하나님의 형상론을 개인적 형상론으로 바꾼 거예요. 그러니까 아가페, 인간 하나하나에 뭐가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 형상이 다 들어있다는 거죠. 원래 하나님의 형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데 여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없고 신과 내 속에 내재되어 있는 하나님 형상과 바로 직결시킨다는. 이게 토마스 아퀴나스에 보면 나옵니다.
이러한 개인주의 신학이 그 당시 근세에 있었던 에너지 원천의 변화, 그러니까 자본주의의 금융자본주의 석탄의 발굴과 더불어서 에너지가 폭발함으로서 광산업이 발달했고 그 에너지를 얻기 위해서 식민지 개척에 나섬으로 말미암아 그때부터는 농경시대라 하는 것은 집단생산체제인데 농민들이 어디로? 도시로 와서 개인적인 도제제도나 개인적인 자기의 자질 그러니까 내 하나의 스킬, 기술에 의해서 밥 먹고사는 시대가 되면서 개인주의가 확산되면서 그 개인주의와 개인주의 신학과 결부되어서 이게 개신교가 확산되어 버렸어요. 그렇게 된다고.
처음에 우리나라에 근대 자본주의 사회가 시민사회가 들어오기 전에 농경시대 때는 부흥회를 열어도 집단적인 성향이 많았어요. 뭘 강조했느냐 하면, 아버지에 대한 효도를 강조했고, 나라에 대한 충성을 강조했습니다. 왜냐하면 농경시대의 특징이 생산은 뭉쳐야 살아요. 옛날에는 기계화된 농업이 아니고, 여자가 시집을 가면 하나의 농민으로 취직한 거예요. 그리고 농사짓는 노하우는 누가 갖고 잇느냐 하면, 윗대 어른이 갖고 있어요. 윗대 어른이 갖고 있다는 말은, 어른이 갖고 있는 종교가 곧 손자 종교가 돼야 됩니다.
윗대 어른이 무슨 종교? 조상숭배잖아요. 조상숭배라는 그 집단을 뭉치게 하는 이데올로기입니다. 하나의 이념이에요. 전부다 제사지내는데 난 예수 믿는다 하고 밖에 서 있으면 이것은 단순히 제사문제가 아니고 단결력에 그 가문의 결속력에 문제가 생깁니다. 이거는 우리나라뿐만 아니고 농업에 집단화된 모든 민족들이 다 그래요. 모든 종교는 생산을 위한 거예요. 얼마나 생산을 잘 해대느냐.
예를 들어서 손녀가 와서 손자며느리가 와서 시할아버지, 사람 죽으면 어떻게 되는 돼요? 대답을 해야 돼요. 시할머니, 죽으면 어떻게 됩니까? 죽으면 귀신이 되서 산다. 그래서 우리는 죽고 난 뒤에 삼우제 드리고 이렇게 하는 거야. 라는 것을 계속해서 전수받는 거예요. 그게. 그렇게 함으로서 새로 시집온 며느리는 사랑을 받게 되고.
인간은 사랑 안 받고 못 살거든요. 왕따 당하면 큰일 나는 겁니다. 그 이유는 바로, 이거 참 어려운 이야기인데. 사람은 왜 사느냐 하면, 인간은 주체가 있고 자아가 둘로 나눈다. 사람은 주체가 있고 자아가 없는 줄 알고 있어요. 이걸 모르고 크로스빌리지에 절 공격하는 사람이 굉장히 많아요. 주체라 하는 것은 하나의 영사막처럼 파편되고 부서진 그 순간의 조각들이 재조립되는 겁니다. 내가 누구냐? 아파트에 10평짜리 살면 나는 이걸로 돼야 돼. 갑자기 50평 살면 그렇지 나는 마땅히 살아야 되지. 만약에 100평짜리 살면 마땅히 나는 부자 돼야 돼. 마땅해.
남들이 어떻게 칭찬해 주고 남들이 어떻게 알아주느냐에 따라서 그걸 부서진 조각들을 재구성해서 그때마다 수시로 바꾸는 거예요. 왜 애들 교육에 칭찬해라고 합니까? 칭찬을 해주게 되면 칭찬거리가 모여서 자기를 밑으로 보는 게 아니라 위로 볼 수 있는 여력이 생기거든요. 주체라 하는 것은, 그래서 만약에 실패했다. 그래 나는 이것 밖에 안돼. 라고 그 환경에 적응하게 되어 있는 게 인간의 동물적인 본능 아닙니까? 적응한다는 것은 주체 수위를 조정하는 거예요. 그래 마음을 낮춰야 살 수 있어.
그런데 자아는, 주체는 뭐냐 하면, 외부에서 오는 이런 경험들이 다시 반사되면서 여기서 항상 재조립하지요. 새벽기도 나올 때는 천당 갔다가 죄 짓고 난 뒤엔 저녁땐 지옥 가고 있잖아요. 난 지옥 갈 거야. 이렇게 하다가 새벽기도 나오면 난 천당 갈 거야. 교회 나올 땐 천당 갈까 하고 교회 못 나오거나 아내와 싸우면, 이렇게 해서 천당 가겠나? 그러니까 그 주어진 상황과 사태를 가지고 계속해서 조립해 만들어 갑니다.
그래서 20대 인생관 다르고, 30대 인생관 달라요. 50대 인생관이 다릅니다. 20대에 살던 말이 안 나오지요. 시시하지요. 30대 할 때 인생관, 내가 한달에 월급 100만원 주면 하나님한테 다신 욕하면 안 되겠다. 30대 인생관이죠. 처음 취직해서. 주여, 내가 공무원 시험 합격했는데 이제는 가만있어도 승진하는데 내가 뭘 더 바라리오. 하는 놈들이 지금 오늘 데모 파업하고 있다고. 공무원은 어떻게 파업을 해달라고 해쌓고 있다고. 인간은 아니다 해쌓고. 지가 공무원 시험 합격할 때 그런 소리했습니까? 국가여, 감사합니다. 이렇게 했지. 주체가 수시로 바뀌기 때문에.
그래 이런 걸 약간의 깊숙이 모르고 대충 알아서 또 목회상담을 만들어내는 거예요. 이런 걸 이용해서. 그런데 문제는 주님께서 주체를 공격하는 게 아닙니다. 이거는 주체는, 그러니까 주체를 신앙적으로 확립할 수 있다 하는 것은 전부다 사기입니다. 30년 믿고, 40년 믿어도 소용없습니다. 50년 동안 교회와도 그 다음날 되면 인간은 욕심내게 되어 있어요. 주체는 영원히, 이거는 매일 맨 날 바뀌고, 그런 거예요. 통곡의 눈물, 백 날 흘려도 소용없어요. 돌아서 버리면 헤헤거리는 거예요.
그런데 주체는 영사막이죠. 영사막 뒤에는 사람들이 갈 수 없잖아요. 은행 뒤에 영사막, 가보면 아무것도 없잖아요. 인간은 마귀의 영사막으로 현실과 대화하고 있고 그 배후에는 계속해서 아담 안에서 전수 받은 게 있어요. 이게 자아입니다. 이 자아는 근본적으로 뭐냐 하면, 자아는 아담의 속성을 그대로 인수인계 받았기 때문에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적대감이 있어요. 적대감이 있는데 이걸 주체로 감추지요. 열심히 교회 다니고 기도함으로 감추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언제 자아가 화내느냐 하면, 자기 뜻대로 안될 때 자아가 화를 내지요. 그러니까 주체라 하는 것은 이건 바람, 바람, 바람이에요. 바람불면 날아가 버려요. 남는 것은 자아가 나와요. 내 인생을 왜 이렇게 망쳤습니까? 하는 자아만 남는다고. 이 자아가 어디서 나왔는가? 이 자아는 없어요. 그냥 아담이에요. 아담의 재생이고 재탕이에요. 이게 로마서 5장에 '아담 안'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주체를 대해서 공격하는 게 아닙니다. 어딜 공격하느냐? 자아에 대해서 공격해요. 뭐의 이름으로? 자아의 이름이 아담이거든요. 이건 인간의 이름입니다. 자아를 공격하는 것은 누구의 이름으로? 오히려 주의 이름이에요. 주의 이름은 나타날 때, 오늘 교재 말씀처럼 루터에 의하면 십자가를 통해서 나타납니다. 루터는 십자가 중심이에요. 칼빈은 삼위일체 중심입니다. 이게 적대적이에요. 이게 맞질 않아요.
여기 몇 페이지에 있느냐 하면, 119페이지에 있어요.
[루터의 예정론은 칼빈의 예정론과 심한 대조를 이루는데, 루터는 그리스도 중심의 예정론이라면 칼빈은 하나님 중심의 예정론이다.]
여기서 차이점이 뭡니까? 루터는 그리스도 중심으로 되어 있고, 칼빈은 하나님 중심으로 되어 있지요. 여기 하나님 중심이라 할 때는 뭘 우회했습니까? 뭘 비껴갔습니까? 십자가를 비껴가서 하나님은 만나자. 그 말이에요. 칼빈은, 십자가는 뭐냐? 잠시 들어갔다가 빼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독감 주사 한방 맞고, 그 다음부터는 맞을 필요 없잖아요. 십자가는 저리 가라 이 말이에요. 십자가는 됐으니까 필요 없고, 남는 것은, 신과 우리 속에 있는 아까 했죠. 하나님 형상과의 맞대결, 맞거래지요.
삼위일체라는 것은 성경에 없는데 어디서 끄집어냈다? 하나님 형상으로 이루어지는 인간의 이성의 합리성에 의해서 신이 주는 여러 가지 성경에 있는 파편들을 조각들을 모아서 만든 게 삼위일체에요. 그래서 삼위일체는 뭐뭐다 라는 말은 못하고 뭐뭐는 아니다 라고 밖에 못하죠. 예수님은 전적으로 하나님이라고 할 수도 없고, 전적으로 인간이라고 할 수 없고, 자꾸 뭐 아니고 라고 이야기하죠. 부정적으로 이야기하죠. 하나님은 새 분이라고 할 수 없고, 그렇다고 한 분은 아니고 이렇게 이야기하죠. 이게 바로 신과 인간 사이에 신의 존재와 인간의 존재와 존재의 만남으로 신학을 형성한 것이 칼빈 신학입니다.
그런데 루터는 그게 아니라 신도 없고, 인간도 없어요. 왜냐하면 여기에 116페이지, 밑에서 일곱 번째 줄.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하나님이 신앙의 대상이 되기보다는 철학적 탐구의 지적 호기심의 대상이 되는 것을 일삼는 인간 이성의 영광의 신학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을 통해서 나타난 역리적인 하나님의 사랑과 역사(役事)를 믿는 십자가 신학을 주장한 것이었다.]
영광의 신학보다는 뭐라고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인데, 그게 왜 십자가 구속 이렇게 하면, 칼빈도 그 십자가, 우리도 믿는데 이렇게 하잖아요. 그게 어디서 날아가느냐 하면, 그 뒤에서 날아가요. 그들이 믿질 않아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숨어 계시는 어둠'이라 했죠. 하나님은 숨어계시는 하나님이에요. 이게 이사야 45장 15절의 말씀. 하나님은 숨어 계시는 하나님. 이거 말, 다한 거예요.
칼빈은 그 당시에 언약신학이 발달하지 않아서 자기가 어떻게 알았는지 어떻게 알았는데, 언약신학하면 확실하죠. 언약신학, 에베소서 2장 같은데 나오죠. 언약 안에 있다는 말은 언약 밖에 있는 자가 절대로 뭐 안에 못 들어온다? 언약 안으로 못 들어옵니다. 왜? 언약 안에는 봉쇄 자체이기 때문에. 좀더 쉽게 이야기해 봅시다.
시내산의 하나님을 비행접시라고 보세요. 비행접시가 시내산 꼭대기에 있을 때 그때 독대했죠. 모세하고 하나님 만났잖아요. 그 모세하고 하나님 만남을, 그것을 산 밑에 내려왔다고 해서 그 안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루터 이야기는 내려왔다고 못 들어간다는 거예요. 가까이 왔다고 해서 믿어지는 게 아니라 이 말입니다. 가까이 하면 할수록 너무나 먼 당신이에요. 그래서 여기 구획을 정해 준 게 뭐냐? 이걸 성소라 하죠. 여기 들어오면 죽어버리죠. 산에 올라가 죽는 것 마찬가지로 내려왔다고 막 맞먹어서는 안 된다 이 말이죠. 내려왔다고 맞먹는 게 아니에요.
기본적으로 현재 한국교회에 복음이 없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하나님이 아브라함 친구라 하니까 맞먹으려고 생각하고 있어요. 기본적으로 이게 추방되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봉쇄되었다는 사실을 전혀 몰라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 안 해 줘도 된다는 사실을 그들은 몰라요. 자기를 구원해 줘야 좋은 하나님으로 보고 있다고. 이게 근세적 인간의 자아사상이 아니고, 주체사상에서 나온 거예요. 아까 주체 이야기 했지요. 주체에서 나온 거예요. 자아가 아니고. 주체는 자아를 가리는 방패막입니다.
중세나 고세의 자아는 십자가 없던 시절이기 때문에 그냥 존재와 존재의 만남이에요. 그래서 포이에르바하가 거기 대해서 뭐라고 했습니까? 신이라는 것은 없고 인간이 자기 존재를 확대시켜서 투사한 거다 말이죠. 투사해서 그걸 자기가 가져온 것뿐이다 말이죠. 그러니까 그 증거가 뭐냐? 그러니까 각자각자 신이 다 다르지. 각자각자 신이 다 다른 거예요.
10살 때 신 스물 때 신 다르죠. 부자 집 신과 가난한 집 신 달라요. 필리핀 민족의 신과 저 유럽의 신과 달라요. 다 다릅니다. 그리고 종족마다 바알 신, 무슨 신, 무슨 신, 뭐, 그렇게 신이 그렇게 많아요. 일본의 종교가 10만개가 넘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종교란 자기 꼴리는 대로 막 나가죠. 그겁니다.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지금도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보통 큰 문제가 아닙니다. 뺑뺑이 도는 것 밖에 안돼요. 백 날 해봐야 회전목마가 말을 달리는데 10시간, 스무 시간 달려보세요. 돌아가나. 내리소. 시간 끝났습니다, 하죠. 맨 그 자리 도는 거죠. 그냥 뺑뺑이 도는 거죠. 자기가 만든 신을 그냥 섬기면서. 목사는 그 중간에 커미션 받아 처먹고. 그저 희망 줄려고.
결핍에 의한 보충하기 위해 신은 뭐다? 전능하신. 전능하다는 뭐예요? 잉여적 존재. 가진 게 많고 여분이 많아서 달라는 놈에게 주고, 안 달라 하면 안 주는. 그러니까 달라는 자에게 주고 안 달라 하면 안 주니까 결국은 주고 안 주고는 자기 능력에 달려있지 하나님도 자기 손에 다루기 나름이에요. 하나님에게 뇌물 받치고 하나님을 달래면 복 받는다는 사고방식이 가인에서 나왔다고. 가인이 풍성한 추수 제사상 드려서, 나는 추수감사절 안한지 오래되어서 요새 추수감사절 보니까 .... 그것 더 받쳐서 뭐냐 하면, 이렇게 성의를 표하니까 내 하는 일이 앞으로 무슨 재앙이 없고 미리 사전에 수를 치는 거예요. 사전에 입막음하는 거예요. 좀 봐주소. 이게 이방인적입니다.
그러나 언약은 외부에서 주어졌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아이디어가 아니에요. 이 점이 달라요.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에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아브라함이 지어낸 하나님의 말이 아니고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이 있고, 이삭에게 주신 언약이 있고, 야곱에게 주신 언약이 있잖아요. 그 언약만 이루고 언약 바깥에는 절대 이루지 않아요.
그리고 그 언약을 주신 이스라엘 이름 자체가 뭡니까? 싸움꾼이에요. 이 싸움꾼은 언약 안과 언약 밖의 누가 이기느냐의 싸움이에요. 언약 안에는 뭐가 들어 있느냐? 의가 들어있고, 언약 밖은 무조건 죄가 들어 있어요. 따라서 하나님은 의만 찾고 죄를 찾기 때문에 저주받게 하시는 겁니다. 이걸 누가 아느냐? 귀신은 알아 버렸어요. 놀랍게도. 귀신은 나중에 알고 자기 민족 다 버리고 남의 스파이를 영접해서 결국은 여리고 성 멸망할 때 살았잖아요. 여리고 성 왜 멸망해야 하느냐? 이유는 하나. 언약이 없기 때문에. 언약이 없는 걸 두 자로 뭐라 하느냐 하면, 우상이라고 해요. 부처가 우상이 아니고, 공자가 우상이 아니고, 언약이 없는 게 우상이에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약속대로만 이루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약속 바깥에 있는 것은 전부다 우상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새 언약의 완성자로 오셨잖아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그러니까 루터는 십자가만 이야기하는 거예요. 왜? 십자가 바깥에는 지가 신을 이야기하든, 인간을 이야기하든 그것은 전부다 뭐다? 비언약이며, 죄며, 악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추방된 자체로 지옥이다 이 말이죠. 그래서 숨어있는 하나님이에요.
이사야 45장 한번 봅시다. 이사야 45장이 그 대목만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이사야 45장 8절부터 이런 것들부터 다 중요해요.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
그냥 숨어있는 게 아니고 스스로, 그러니까 이게 뭡니까? 적극적으로 은폐하는 식으로만 활동하신다. 45장 15절. 그런데 8절에 보면, "너 하늘이여 위에서부터 의로움을 비같이 듣게 할지어다 궁창이여 의를 부어 내릴지어다 땅이여 열려서 구원을 내고 의도 함께 움돋게 할지어다 나 여호와가 이 일을 창조하였느니라"
이렇게 하실 수 있는 분은 숨어계시는 하나님 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도표로 그리면, 루터의 신학은 이렇습니다. 십자가로부터 시작해서 십자가에서 비로소 하나님과 비로소 인간을 이야기하자 이 말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십자가는 새 언약이거든요. 그리고 하나님은 언약으로만 이루기 때문에 언약이라는 좁은 영역만 고수하고 나머지는 그냥 저주받아요.
여호수아에 보면 나오는데 왜 이방민족이 왜 이스라엘, 날아온 돌, 이스라엘한테 왜 멸망 당해야 됩니까? 여호수아에 보면 이런 소리를 하고 있어요. 그들은 은혜를 안 주어야 될 저주를 받아야 될 이유가 모세언약이 없기 때문에. 모세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그것뿐이에요. 모세언약을 이룬다는 말은 하나님의 택한 자만 구원받고, 나머지는 반드시 지옥 가야 돼요. 그게 하나님이에요.
그러니까 김용옥 교수가 뭐라고 합니까? 도대체 내가 기독교를 연구해 보니까 기독교는 저거 택한 자만 구원받고, 나머지는 저주받는다는 해괴망측한 유대민족의 독선주의를 표현한 종교라서 나는 못 믿겠다.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한국교회는 김용옥보다 더 못해. 한국교회는 김용옥이가 공부한 것보다 더 못해요. 그걸 김용옥은 메시아니즘이라 보거든요. 자기는 유일하게 선택된 민족이고, 이 말은 결국 민족만 구원받는다는 말이 아니고, 다른 민족이 만들어낸 신은 전부다 엉터리고 가짜이며 그들이 만약 구원되고자 하는 것은 기생 라합처럼 이스라엘 신 앞에 복종하는 경우 밖에 없다.
그러니 그게 뭐, 정신적인 이거는 뭡니까? 공격이고 정신적인 폭력이고 독재지, 그게 어떻게 만유에 계신 하나님이겠느냐? 라고 하는 것이 김용옥 교수의 주장입니다. 그래 김용옥 같은 사람이 많이 나타나야 돼요. 나타나서 현재 한국 사람이 믿는 교회는, 교회가 아닌 것을 하나의 회관인 것을 그들이 스스로 알아야 돼요. 그냥 놀이 삼아 가는.
십자가에서 나올 때에 하나님은 무슨 하나님이 되느냐 하면, 존재하는 하나님이 아니고 숨어 있다가 십자가로 나타나는 그 자체를 뭐로 본다? 하나님의 은혜로 보는 그런 하나님관이 성립됩니다. 이런 은혜는 뭐가 있습니까? 지옥 갈 사람을 반드시 지옥 보낼 때, 이 구원 받은 사람은 십자가 안에 있는 사람은 박수를 치죠. 이것 때문에 나보고 공격하지요. 십자가마을에서 이것 때문에 공격한다고.
주님은 지옥에서도 주님이에요. 천국의 주님만이 아니라 지옥에서도 주님이라고요. 주가 되려면 지옥, 천국에서 다 주님이 돼야 된다고요. 그러니까 지옥 보낼 자를 지옥 보내는 것에 대해서 박수와 찬양을 보내야 됩니다. 이래야 주님을 주님답게 이해하는 거예요.
그리고 천국 가는 것은 뭣 때문에? 행함이 아니라 오직 뭣 대문에? 은혜로 가는 거예요. 지옥은 뭣 때문에 갑니까? 은혜를 안 줬기 때문에 지옥 가는 거예요. 그 사람이 나쁜 짓했기 때문에 가는 것이 아니고 우리보다 바람 피워서, 도둑질해서 가는 것이 아니고 단지 은혜를 안 줘서 지옥 가는 거예요. 그리고 주고 안 주고는 오야 마음대로죠. 이것이 바로 모세가 알려준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을 줄 자에게 긍휼 주고, 차별하는데 진짜배기 하나님의 특징이 그거란 말이죠.
제가 이야기하면, 목사님, 어느 놈이 믿겠습니까? 믿는 자가 복이 있도다. 나는 이렇게. 이 말은 어느 놈이 믿느냐 말이에요. 인간의 가치, 존엄성 다 때려 부셔. 존엄성, 가치, 행함, 선행, 종교적 열성, 기도, 금식기도, 다 때려 부셔. 전도, 교회부흥 무슨 소용 있습니까? 다 무너지죠. 십자가 옆에 강도 두 사람 선 것도 이 이유 때문에 그래요. 똑같은 강도인데 한쪽은 구원받고 한쪽은 지옥 간 것도 은혜 줄 자에게 은혜 주었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루터의 책에, 여기 보면 나와요. 사람이 구원 받겠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이야기가 여기 나옵니다. 놀라운 이야기에요. 루터가 이야기했어요. 사람이 구원을 받다니 무슨 소리하고 있는 거냐?
여기 118페이지 봅시다. 위에서 열 번째 줄에, 한번 읽어보세요. 누가 읽어보세요. 이장우 목사님 읽어보세요.
[하나님은 오직 자신의 영광을 만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통하여 죄인을 구원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자기 힘으로 하나님을 찾으며 구원을 획득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역사를 막는 일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결과가 된다.]
오히려 막는 일이며. 누가 막는다고요? 모든 인간이. 그러니까 십자가는 뭐냐? 십자가 알아채면 구원받는다가 아니라, 십자가는 모든 인간이, 장차 구원될 자나 안 될 자나 천당 갈 자나 관계없이 하나님의 일을 방해했었던 하나님의 원수 된 자인데, 오직 구원된 것은 사람보고 다루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와 하나님, 둘 사이에 예수님의 화목제물로 원수 된 자를 의롭다함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이쪽 관계가 아니에요. 사람들 관계가 아닙니다. 저거들, 하면 .... 하나님 성부와 성자의 둘 사이에 끝난 이야기에요. 이것이 창세전에 이미 끝난 이야기에요.
이 세상은 마음껏 지옥 되어야 됩니다. 저는 양이 안 차. 더 지옥 돼야 돼. 교회마다 이단 되어야 되고, 목사마다 이단 되어야 됩니다. 그래야 성경 말씀에 보면 마지막에 믿음을 보겠느냐는 게 생소하게 됩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되어야 됩니다. 성령이 누구한테 임했는 줄 압니까? 내 이름으로 핍박을 받을 때 성령이 너희 위에 임할 것이다.
그게 이 이야기가 루터에 보면 또 나와요. 117페이지 위에 봅시다. 요게 좀 어려운데. 글자 틀린 것 몇 군데 있으니까 고쳐가면서 봅시다. 제가 해 볼게요. 둔스 스코투스, 스콜라, 우리가 다루었잖아요. 존재론적 신관념, 이것은 안 된다는 거지요. 위에서 세 번째 줄에.
[하나님은 어디든지 계시고 또 어디에도 안 계신다는 역설적인 하나님의 편재를 그가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은 범신론에서 말하는 것처럼 자연물 안에 갇혀서 제한되어 계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말씀 없이는 그를 붙잡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 계시고 또 믿음이 있는 곳에 그는 베일 속으로 나타나시며 또 그는 스스로 나타나시고자 하시는 곳 즉 그가 역사하시는 곳에 나타나 계시는 것을 말한다.]
여기 끝에, 위에서 여섯 번째 줄이 중요합니다. 스스로 나타내시고자 하는 곳에만 나타내고 스스로 안 나타내겠다면 백날 바알, 아세라처럼 불러내도 소용없다 이 말입니다. 철야기도해도 소용없다 이 말이에요. 그런데 나타났다, 안 났다는 증거가 뭐냐? 오직 말씀이고, 그 말씀에 대한 신앙적인 반응, 그것뿐이다 말이죠. 그러니까 그 신앙은 뭐냐 하면, 그 말씀에 대한 신앙이에요. 예를 들어서 방금 이야기했습니다만 말이 좀 어려운데 쉽게 이야기해 봅시다.
너가 주의 이름으로 고난 받는 곳에 주의 영이 함께 계시다. 라는 말씀이 있잖아요. 문자로 있잖아요. 그게 맞아. 그러니까 고난 받아도 괜찮아. 라고 믿어질 때 그게 자기 행위가 아니고 고때 주의 영이 함께 한 증거다 이 말입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다. 보통 같으면, 그걸 어떻게 지킵니까? 나 못 지키겠습니다. 이렇게 나오는데, 맞아.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 되는 쪽으로 주께서 지금 그 말씀 쪽으로 모든 일을 지금 꾸미고 있구나. 라는 것이 믿어질 때, 내가 지키는 게 아니고요. 내가 돈을 사랑하지 마라를 내가 지키는 게 아니라, 누가 지킨다? 주님께서 그 말씀을 주님께서 지키는 거예요. 주님께서 주신 언약을 누가 지킨다고요? 주님께서 지킨다는 것이 믿어질 때 그때 주님께서 나타난 증거다 이 말입니다. 그럼 나는 뭐냐? 주의 말씀이 나타나는 그냥 흔적들이죠. 주의 말씀이 역사하고 있다는 흔적들이죠.
다시 이야기하면, 십자가라 하는 것은 철저한 봉사를 말합니다. 십자가 믿을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는 없어요. 없이 하기 위해서 십자가 진 거예요. 예수님 당시에 십자가 처형이 많았습니다. 그 당시 많은, 디도라든지 그런 이단, 수많은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대들다가 십자가에 처형을, 본디오 빌라도에게 3000명 죽은 십자가 처형 있잖아요. 십자가, 십자가 많아요. 많지만 주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뭐냐 하면, 그냥 정치적인 처음으로 십자가가 아니고, 그건 슈퍼스타 예수 그리스도 그런 뮤지컬에서 그따위 소리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는 뭐냐 하면, 어떤 논리에도 천국에 못 온다는 봉쇄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단절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리고 다가서는 것은 말씀이 주님의 자기 활동에 의해서 다가서지요.
117페이지 중간에 보면, 특수한 장소에 계신다는 말이 아니고, 이 말은 은혜 받는 기도원 같은 데는 없다 이 말입니다. 특수한 장소에 계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주체적인 태도와 연관돼서 그게 표현된다는 겁니다.
[루터는 중세 스콜라주의 합리적인 사색적 신학과 도덕적 경건과 신비주의의 교훈]
합리적인 사색, 지죠. 지정의 할 때 지. 도덕적 경건, 의죠. 신비적인 교훈, 정이죠. 그러니까 지정의를 다 부셔 버리고 그런 것들이 뭘 만들었다? 신 중심의 종교를 인간 중심의 종교로 전환해 버렸다. 그래서 나온 것이 인간 중심의 그러니까 십자가 중심이 아닌 ....
그러니까 모든 이유는 십자가. 여기서 십자가 중심의 하나님 형상론이 나와야 되고, 십자가 중심의 전도가 나와야 되고, 십자가 중심의 예배, 헌금이 나와야 된다 말이죠. 예를 들어서 십일조 같은 경우에 십자가 중심의 십일조로 해석해 버리면, 십일조를 줄 돈이 없어요. 왜? 하나님은 더러운 돈을 안 받기 때문에. 의와 신과 인에 의해서 생긴 수입이 아니면 십일조 할 돈도 안돼요. 창기가 번 돈은 어디에 넣지 마라? 성전에 넣지 말라 했습니다. 어느 인간이 요새 직장인들 더럽게 안 해서 돈버는 사람들 누가 있습니까? 학원은 좀 예외인가 모르겠습니다만. 십일조 할 돈이 없어요.
그러면서 십일조는 이루어져야 됩니다. 어떻게? 의와 신과 인으로. 그 말씀을 누가 이룹니까? 예수님께서 십일조가 되셔서 드리고 그걸 믿는 자에게는 십일조 한 것이 돼버렸어요. 십일조 할 돈이 없다니까요. 더러워서 안 받는다니까. 우리 몸 자체가 더러운데. 그래서 예수님께 그랬잖아요. 너희들이 형식적으로 고르반 드린다? 너희들 속에서 새록새록 질투와 미움과 속에서 쏟아 나오는데 드리기는 뭘 개코는 뭘 드려? 입에 들어가는 게 더러운 게 아니고, 마음에서 나오는 게 더러운데 뭘 바치느냐? 바칠 게 뭐가 있느냐 말이지요. 십자가는 안 받는다는 뜻이에요.
이게 시편에 보면 예언돼 있습니다. 산천에 있는 초목에 산림과 동물과 다 내 것인데 네가 뭘 바치느냐? 너는 차라리 어떤 분이 올 텐데 그분을 기다리라. 그분이 구원할 자다. 의는 그분에서 나오지, 너의 행함에서 나오지 않는다. 이미 시편에 예언되어 있잖아요. 그러니까 나한테 있어도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인간은 욕망대로 움직이고, 인간은 자아가 바탕 되어서 주체를 형성하는 삶이 인간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싫어하는 게 기본으로 깔려 있고, 그 다음에 그걸 카바하기 위해서 하나님 해가지고 그것은 하나님 좋아서 하는 게 아니고 자기 좋아라고.
아까 인간은 자기 행복을 위해서. 행복이란 결핍을 잉여로 보충하면 행복한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만 배부르면 끝나는 거예요. 민족이고 국가고 나발이고 나와 내 식구만 배부르면 끝나는 거예요. 그게 근대주의 주체였고, 그것들이 오늘날교회를 만들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교회들이 지 밖에 모르지.
십자가를 차단된 상태에서 하나님은, 다시 이야기할 게요. 하나님은 어떻게 한다? 은혜 준 하나님이라 했지요. 그런데 은혜 줄 자에게만 은혜를 주게 된 이유가 뭐냐 하면, 하나님은 언약대로 지옥을 만들어내야 돼요. 그 지옥에 가는 이유가 십자가를 지게 한, 하나님을 죽게 한 제공자로 죄목으로서 지옥에 갇혀야 돼요. 이 인간도 마찬가지지만, 이 인간은 은혜를, 은혜라는 게 용서로 오거든요. 용서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자기가 원하는 자를 죄를 씻어 주겠다는 데 누가 널 송사하리요. 자기 원하는 자를 씻어줘서 언약대로 용서해서 이 사람을 구원해서 이 천당 간 사람은 오직 예수님의 공로만 영원토록 찬양하는, 이것이 지옥과 천국이에요.
그럼 십자가 밑에 인간은 뭡니까? 인간의 모든 인생은 자기가 죄 값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죄 값으로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는 그런 족적을 남기는 그런 거지요. 무슨 말이냐 하면, 사람이 무슨 짓을 하든지 간에 뒤돌아보면 그것은 내 앞에 있는 죽음을 유발시키는 원인 제공했던 족적들이에요. 그래서 인간은 죄인이에요. 이 죄는 윤리적 죄가 아니고, 이미 죽음이 확정된 상태에서 죄를 유발시키는 죄를 발산하는 도구로서 인간이에요. 인간은 뭐냐? 죄를 발산하는 도구. 왜냐? 이미 죽음이 확정되었기 때문에.
그런데 소위 한국의 신학은 뭐냐 하면, 자기가 잘만 하면 뭐 될 수 있다? 잘만 하면 자기가 개과천선하면, 스스로 깨달으면 하나님께 구원받을 수 있는데 그 깨달음 중에 하나가 십자가 믿어 주는 것까지 자기에게서 끄집어내서, 그러니까 인간 속에 뭐가 들어있다? 인간 속에 자기가 나쁘다는 것도 들어있고, 착할 수 있는 것도 두 개 다 들어있다는 거지요. 이게 칸트의 도덕법으로 나옵니다.
칸트는 십자가 거치지 않고 바로 하나님과 바로 인간과 연결시키기 때문에 인간 속에 하나님 형상이 있는데 형상이라는 것은 하나님 형상이기 때문에 하나님 형상의 특징이 뭐냐?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뭐냐? 선에 대해서는 동의하고, 악에 대해서는 미워하는 이것이 하나님의 도덕적인 것이 인간 속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포함되기 때문에 이걸 그대로 발휘하게 되면, 십자가도 믿고, 하나님 모아서 믿어서 구원받을 수 있다는 그런 뜻이다.
완전히 '그때 거기'에요. 완전히 달라요. 그래서 칼빈주의는 하는 놈들은 이렇게 하지요. 너희는 맨 날 십자가만 쳐다보고 있다 이렇게 하지요. 십자가 그 이후는 아니지.
그게 언약적으로 봐서 아무리 인간들이, 백성들이 맛있는 살진 양을 갖다 줘도 양은 제사장 노선을 경계선을 넘어설 수가 없습니다. 제사장까지만 갖다 바쳐야 돼요. 넘어서면 안 됩니다. 그 위에 넘어서는 것은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 차례씩 7월 10일 날, 지성소에 가서 올라갑니다. 그까지. 제사장 나오소. 이제는 내가 제사장이야. 지가 나올 수가 없어요. 제사장까지만 갖다 놔야 돼요. 죄인으로서.
제사장이 누굽니까? 예수님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나가는 것은 거기 인간이 낄 수가 없습니다. 예수를 타 넘고 나갈 수 없어요. 이제는. 예수님까지만 와야 됩니다. 늘 십자가 앞에 자기를 사르는 그게 다에요. 뭐, 십자가 이후에 어떻게 한다 말이에요. 지가.
특히 116페이지에 있어서, 하나님은 영광의 하나님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렇게 했는데, 자, 영광의 하나님이란 말이, 루터가 영광의 하나님에 대해서 공격했지요. 그건 아니다 이 말이죠. 그건 잘못 된 거다. 라고 이야기했잖아요. 영광의 하나님은 잘못된 거다. 영광의 하나님이 뭡니까?
이게 국문학 같은 것, 여러분, 국문학이나 영문학 하게 되면, 전설이나 신화 여기에 대해서 공부하게 되는데, 세상에 있는 모든 민족들이 갖고 있는 전설이나 신화 이런 걸 보면 특징이 뭐냐 하면, 이겁니다. 이게 볼프라는 사람이 그걸 수만 가지 전설을 해가지고 세상의 공통적으로 인간의 모든 문학과 구전은 이런 겁니다. 하고 내 논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인간은 유토피아, 그러니까 환상이죠. 환상을 꿈꾸게 되어 있는데 그 환상은 인간은 자기를 스스로 영웅화합니다.
반드시 영웅은 그냥 하는 게 아니고 내려갔다 올라와요. 고난과 시련을 거침으로 말미암아 여기 현재는 주름잡혀 있어서 영웅이 안 나타나요. 그냥 주름잡혀 있지요. 부채살 이렇게 접히면 부채인지 막대기인지 모르지만 펼치면 부채잖아요. 주름잡혀 있다가 고난을 거쳐서 비로소 전부터 자기는 뭐였다? 영웅이었다를 최종 목적에 도달하면서 느끼는 이것이 인간들의 이상적인 인간상이라고 보는 거예요. 그리스신화, 로마신화 마찬가지에요. 인간이 영웅 되기 위해서 신은 인간과 맞짱 뜨는 신으로 전락해야 됩니다. 그리고 인간과의 흥정이 가능한 신이 되어야 돼요.
동양에서는 호랑이도 그렇잖아요.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하거든요.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겠다는 말은 뭡니까? 너하고 나하고는 거래 대상이며, 지혜롭게 떡 하나 줌으로써 더 힘 센 호랑이에서 죽음, 고난이란 게 결국 이건 죽음의 흔적 아닙니까? 죽음마저 극복했으면 곧 그건 뭡니까? 영생 아닙니까? 죽음을 자기에게 주어진, 하이데거에 의하면 인간은 날마다 죽음에 시달리는데 악몽에 시달리는데 이 죽음을 극복함으로서 자기는 죽음마저 극복한 뭐가 된다? 영웅이 되는 거예요.
이게 십자가 앞에서 뭡니까? 이따위 사고방식이 전부다 뭐가 돼요? 이것이 바로 악마가 가르쳐 교과서에요. 악마가 낸 수능시험이에요. 이게 자아의 본성으로 아담으로 물려받은 거죠. 계속해서. 나도 뭐 될 수 있다? 신처럼 될 수 있다. 신처럼 되는 것이 니므롯이 우대받고. 그리고 뭡니까, 창세기 10장에 보면, 당대의 영걸이죠. 영웅이죠. 그 영웅 신화가 계속해서 그 영웅 신화의 고향이 뭡니까? 바벨. 그 고향에 탑을 세움으로서 영웅을 기념하고, 계속하죠.
그런데 하나님께선 거기서 엉뚱한 우상이나 만들고 있는 엉뚱한 아브라함을 택해서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너의 이름을 창대케 하리라. 다른 이름, 인간의 이름, 영웅의 이름을 말고 다른 이름이 오는 거예요. 가인의 이름이 아니라 죽은 자의 이름이죠. 죽은 자의 이름이 뭐냐? 셋이죠. 아벨을 대신해서 셋이에요. 그런 식으로 계속 이어져 나간 겁니다.
그러니까 영광의 신학이라 하는 것은 이것은 말려도 튀어나와야 돼요. 영광의 신학이 되려면 반드시 그 앞에 이런 증거가 있어야 되죠. 이런 증거를 가지고 요새 역사라고 하지요. 우리교회 역사. 우리교단 역사. 우리는 이러한 시련을 겪었는데 결국은 하나님 복 주셔서 교육관 지었다. 이런 것 있잖아요. 간증집회. 전부다 뭐냐? 현재를, 사람들이 뭘 원한다? 영웅을 원하니까 영웅을 원하면 나도 영웅처럼 되려면 여기 방법론을 제시해야 되지요. 이 방법론은 간증설교로 이어지지요. 간증설교는 인간의 자기 역사지요. 구라, 거짓말이 여기에 포함되지요. 내가 이렇게 되었다. 당신도 나처럼 될 수 있다. 나처럼 하면 1주일 만에 컴퓨터 할 수 있다.
결국은 교회라는 것은 민중이 만들지, 하나님이 만든 적이 없어요. 하나님이 만든 교회는 숨어있는 교회에요. 숨어있는 십자가 교회이지, 현재 있는 교회는 사람이 만들기 때문에 번창해야 됩니다. 왜? 이 세상을 떠나야 될 사람이니까. 부흥돼야 돼요.
그러니까 지금은 종교가 사양사업 아닙니까? 바빠서 못가요. 교회를. 맞벌이하다 보니까. 그때 어떻게 해야 하느냐? 종교끼리 합해야 돼요. 그때 어떻게 하느냐? 크리스마스 때 불교 쪽에서 축하 보내고, 석가탄신일에 교회가 축전 보내고. 이렇게 해서 싸우는 꼴 안 봐야 장사가 서로가 윈윈작전, 서로가 승리하는 작전. 맨 날 종교끼리 싸우면 여당, 야당 싸우면 전체가 다 욕먹잖아요. 서로 종교는 인류복지를 위해서 이웃 사랑을 위해서 구제를 위해서 있는 교회라도 장차 돈 될 젊은 놈들이 안 빠지고 나온다 말이지요. 안 빠지고, 말고 교회 갈 시간이 있어야지. 회사 놀지 않고. 짬 내서 와야 될 판이니까.
그게 영광의 신학입니다. 그러니까 영광의 신학은 구태여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기존에 있는 거고, 십자가가 특이한 거죠. 왜? 영광을 영광이 아니라고 해버리니까 그건 영광이 아니고 그건 악마가 만들어낸 환상이라고 조져 버렸으니까 그러면 루터에 이야기에 의하면 영광이라고 하는 것은 복음의 영광, 그 이외에는 영광이 없다는 거죠. 사도 바울이나 사도들이나 스데반 집사가 죽었던 이유가 세상 영광을 위해 죽은 게 아니고 십자가의 영광, 나도 몰랐었는데 성령 때문에 알게 된 십자가, 이것이 좋아서 기뻐하는 그 영광, 그 십자가의 영광만을 위해서 하는 거지, 다른 영광은 있을 수 없다고 하는 거죠.
그래서 루터의 신학이 이렇게 깊은데 이 루터의 신학을 이해한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면 루터를 왜 좋아했느냐? 근세적인 주체의식이 등장하면서 루터가 뭣을 박살냈느냐 하면, 그 당시 신과 인간이 중매자 역할을 했던 신의 은총을 독점했던 단체가 있었는데 그게 교회입니다. 결국 루터는 십자가와 교회의 싸움이었어요. 루터에서 교회를 만든다 하는 게 도대체 루터한테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루터 교회가 성립이 될 수가 없어요. 루터 교회가 없어요. 루터라는 것은 십자가만 알아야지, 루터에서 교회가 나오면 안 됩니다.
지금 루터교회가 완전히 천주교입니다. 저희끼리 골프 치러 다니고요. 돈은 어디서 나오느냐? 독일에서 다 받고. 독일에서 성전세를 내기 때문에. 독일에서 본점에서 돈 다 보내주거든요. 공부해줘, 개척교회 자금 다 대주지요. 우리나라의 연세대학이나 일류, 제일 수석 장학생만 뽑아서 돈 줄 테니까 월급 줄 테니까 루터교회 들어오라 하거든요. 들어가지요. 그래서 그들은 사색적인 공부만 논문이나 이렇게 하고 공부는 취미지요. 그 다음에 구제는 교인들에게 맡기고 저희들은 놀러 다니고. 그냥 커튼 색깔이나 바꾸면 돼. 그러면 독일에서 와서 검사해서 아, 이거 되는구나. 아주 루터교회 연구하면 자금 대주고. 루터교회가 성공회거든요. 기가 찰 노릇이에요.
루터는 교회로 설명 안 됩니다. 루터에서는 무형교회, 유형교회 자체가 없어요. 그냥 루터는 십자가 믿는 사람은 교회이기 때문에 무형교회, 유형교회 없습니다. 가시적 교회, 비가시적 교회 구분한 것은 칼빈에게서 나왔어요. 칼빈은 루터에 따라서 비가시적 교회로 나오다가 칼빈의 기독교강요 3권 째부터는 비가시적 교회가 없어져 버리고, 가시적 교회로 바뀌어버렸어요. 왜? 대중들이 원하니까. 한번 보세요. 그 당시 대중들이 뭘 원하느냐?
그 당시 신과 인간 사이에 모든 신학을 독점한 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왜 독점했느냐? 문자거든요. 문자해독력이 있어요. 문자해독력이 있었는데 이게 문자가 어떤 문자인가?라틴문자입니다. 이건 고급 문자에요. 그런데 쿠텐베르그가 인쇄술이 그 당시 발달되면서, 그 당시 영어는 영어권, 독일이면 독일어권, 각자의 언어로 확산되니까 문자해독에 의한 진리 확보체계가 깨지면서 소위 머리 되는 놈들, 똑똑한 놈들, 평신도들, 에라스무스 이런 사람들은 에라이, 하면서 지가 다 번역해 버렸다고.
그러니까 이게 하나님의 뜻이, 옛날에는 뭐냐 하면, 문자해독력이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신부가 아버지에요. 신부가 하는 말이 곧 신의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자해독을 통해서 이것들이 사기를 쳤다는 말이지요. 뭐, 땡그랑하면 천당 가겠다고 사기를 쳤기 때문에 여기에 누가 반발했느냐 하면, 그동안 교회한테 세금 뜯기던 놈들, 세금을 안 뜯길 수가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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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카톨릭교회의 성례론은 몇 가지냐 하면, 세례, 견진, 성찬, 고해, 종부. 임직, 혼배 아닙니까? 여기에서 견진은 뭐냐 하면, 아 좀 컸다고 니가 시건나가지고 성령 인도함을 받아라. 이게 견지이에요. 단단히 견뎌라 이 말이에요. 세례는 알지요. 유아세례. 그 다음에 성찬은 알지요. 그 다음에 고해 알지요. 죄 지을 때마다 하는 것. 그 다음에 종부, 죽을 때. 임직, 어떤 집사나 할 때, 신부 할 때. 혼배 알지요. 결혼식.
이거 주례 누가 합니까? 사회 누가 봐요? 만약에 떡을 안 받으면, 성찬식 때 떡 같은 것, 피 안 마시면 그 사람 어디 갑니까? 지옥 가거든요. 골치 아픈 신학 다 필요 없어요. 누가 떡 주며 그 떡을 받으면 천당이에요. 한번 떡 먹으면 천당이고, 한번 떡 못 먹으면 지옥 갑니다. 간단한 문제에요. 나무아미타불보다 더 쉽지요. 나무아미타불은 게을러 못 외우면 천당 못 가지만 이거는 눈에 보이잖아요. 지난 주일날 먹었잖아요. 끝난 문제에요.
그러니까 문제는 자기가 집에서 떡 만들면 안 된다고요. 이거는 무슨 성찬에 의해서? 순환논리지요. 임직 성례에 의해서 임직 받은 신부만 해야 된다고. 임직 받은 신부만 뭐 할 수 있다? 성찬식 사회를 볼 수 있으니까, 성찬식 사회를 볼 자 누구? 또 임직해야 되지요. 그러니까 이건 어느 테두리에서? 교회가 만든 법 테두리 안에서 뺑뺑이 도는 거지요. 저희끼리 다 해먹는 거죠. 그러니까 저 외부에 있는 사람들은 무조건 천당 가려면 교회를 거쳐야 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칼빈은 숨어있는 하나님이지요. 어떻게 나타난다? 교회에 나타난다? 천만에. 교회에 나타나는 게 아니고 뭐로 나타난다? 자기가 믿음으로 십자가 믿는 그 순간에 성령이 함께 있는 거지요. 그것이 옳다 그르다는 이미 인쇄된 성경에 통해서 루터가 이야기한 성경 본문을 보니까 발각되었지요.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돈 있는, 돈 있다는 사람은 땅 가진 영주들이 미쳤다고 세금 받칩니까? 야, 이쪽은 돈이 덜 들겠다. 덜 드는 쪽으로. 윗대가리 없는 교황 같은 간섭하면 밀려 버렸지요. 정치적으로.
복음 전하면 십일조 안 해도 되고, 주일성수 없다 하니까 좋아하는 이유가 그게 십자가 믿어서 좋아 한 게 아니고, 지 마음대로 살려고. 그래 지 마음대로 하니까 이근호 목사 하고 같이 공부했다고 해서 복음적으로 하다가 안 되거든. 에이, 과거가 낫다 말이죠. 너거들 성찬만 안하면 지옥 간다. 이게 훨씬 돈 돼지. 복음해서 돈 안돼요. 왜 고신 측에서 왜 자꾸 법을 주장하는 겁니까? 돈 때문에 그래요. 돈 때문에. 100억 부도나서 그래요. 딴 거 아무것도 아니에요.
목사의 본심은 뭡니까? 아, 나 살려도. 이거에요. 그리고 그것이 바로 죽음에 두려워하는 자아의, 히브리서 2장 나오죠. 죽기가 무서워서 종노릇하는 것에서 해방. 자아에서 아담의 본심이에요. 흙이 흙으로 될 때 두려움이 생기잖아요. 꺼질 때.
그게 루터가 처음에는 이렇게 일을 안 벌이려고 했습니다. 그냥 언 놈이 보겠노? 해서 95개조 한 것도. 이거 볼 사람도 별로 없고. 처음에는 인기도 별로 없었어요. 누구 하나 언론에서 퍼뜨려서. 그래 루터도 나중에 감당을 못했어요. 감당을 못해서 루터가 자기 조정에 나섰습니다. 이게 루터의 문제점이 되는데. 왜냐하면 지금 일반교인들의 수준이, 신학을 논하는 수준이 아니라, 온전한 수준이 아니라 그럼 우리도 나름대로 떡 줘 하니까 떡 주려고 하니까 루터도 나름대로 목사를 세워야 되고, 그 목사는 뭐냐 하면, 결혼을 해야 되고. 왜? 뭔가 차별화 돼야 되니까.
그렇게 되면 자연적으로 뭐가 생깁니까? 법이 생기고 조직이 생기고 교회 있어야 되니까 교인들은 신학을 하러 온 것이 아니고 다만 뭔가 새로우면서도 옛날식으로 그냥 계속 게기면 천당 갈 수 있는 그런 간단한 방법을 원한 거예요. 그래서 루터 신학은 날아가 버리고, 루터 교회만 남는, 그러한 결과가 생긴 겁니다. 그러나 이거는 이 세상의 생리가 그러기 때문에 루터가 말릴 필요는 없고, 은혜 줄 자만 구원받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루터의 신학을 이해하려면 루터 앞에 있었던 신학들이 어떤 신학이 있었는가를 쭉 공부를 지금까지 했듯이 해야 되고. 그 다음에 루터의 신학이 여기에 보면, 여기도 나옵니다만 116페이지 밑에서 일곱 째 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