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계 2:14-17 (발람의 교회)
Re..계 2:14-17 (발람의 교회)
이름 : 이근호(IP:)
발람의 교훈
2006년 5월 21일설교 본문: 요한계시록 2:14-17
(계 2:14)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계 2:15)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계 2:16)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계 2:1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사람은 그 누구로부터도 간섭받지 않고 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경도 안보고 설교 듣는 것도 기피합니다. 하지만 과연 인간이 자기 만의 즐기는 영역을 따로 장만할 수 있을까요? 요한복음 5:27-29에 보면,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그 어떤 인간도 자기만의 세계를 가질 여지가 없습니다. 평생 절에만 다니다가 죽었다고해서 그것으로 나사렛 예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입니다. 죽은 자들의 무덤까지 파헤쳐서 기어이 자신의 심판대 앞에 세우고자 말겠다는 것이 예수님 생각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를 묻습니다. 평소에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큰 불만을 안갖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람들의 독자적인 영역과 공간을 계속 공격하면서 잔소리해대면서 다가올 때는 그 누구라도 예수님에 대해서 호감을 갖지 못하고 기피 인물로 간주하기 마련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일하심을 우리는 무시하시면서 일하십니다. 우리를 늘 죽여하면서 일하십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늘 하나님에 대해서 갖은 충성을 다 하노라고 하면서 정작 자신의 가치가 무시당하고 멸시당하면 도저히 참지를 못합니다. 신앙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신앙이란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벌리시는 일을 의지하며 사는 태도를 말합니다.
그런데 평소에는 이런 신앙이 옳은 신앙이라고 동의하면서 막상 자신이 무시당하고 멸시당하는 일이 터지면, 곧장 하나님에게 이렇게 대들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동안 제가 하나님에게 얼마나 열심히 바르게 살려고 애썼는데 왜 그 가치를 무시합니까?”라고 말입니다.
즉 비로소 하나님께서 일으킨 사건 앞에서 자신이 품고 있는 죄의 본색이 들통나버리고 맙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를 들추어내는 식으로 사건을 일으키십니다. 그 중의 하나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구약 때, 발람과 발락이 짝이 되어 일으킨 원리와 같은 원리로서 움직이는 아골라당의 이야기입니다.
발람이라는 거짓 선지자와 발락이라는 왕은, 자신들의 가치를 그대로 유지하는 방책으로서 여호와를 믿는 이스라엘이 중도 와해되기를 원했습니다. 즉 이스라엘 전하는 진리가 결코 특별한 진리가 아니라 흐지부지한 일반 상식에 불과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들이 자진해서 그들의 하나님의 특별성을 부인하도록 조치했습니다.
물론 이러한 사건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은, 사건을 통해서 그동안 몰랐던 이스라엘 내부의 죄가 밖으로 들추어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동안 광야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고 왔기에 자동적으로 자신들이 훌륭한 사람들인 줄 알았습니다. 즉 훌륭하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혜택을 입고 온 줄로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건성으로 알았습니다. 인간들이 자기 행위의 가치와 의미를 알아주는 곳이 있다면 여지없이 그쪽으로 관심을 갖고 매진한다는 것을 이스라엘 본인들도 몰랐던 바입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의 은총을 말해면서 정작 그렇게 말하는 본인 속에는 본인의 가치와 의미를 포기할 의사가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이방제사의 특징은 신에게 헌신하고 바친 만큼 자기 몫의 축복을 따로 받는다는데 있습니다. 이것은 경쟁이고 시합입니다. 쟁취요 투쟁입니다. 자신의 종교적 자질과 역량에 따라 성과급을 얻어내는 식의 인간 노동입니다. 자신의 가치를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는 장이 열렸다는 것은 인간을 원초적으로 자극할 만한 소식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제시한 제사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유월절날 순전히 어린 양의 피 발림으로만 하나님의 저주를 피할 수 있었던 그런 대상들입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그들이 매일같이 얻어먹은 것은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였습니다. 이것은 즉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그런 입장에 놓여있다는 말입니다. 결코 자기 노동으로 인해 자신이 사는 식이 아닙니다.
따라서 성도는 이방 종교에 기웃거릴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겁니다. 새삼스럽게 자신의 가치를 자신의 노동이나 순수함이나 열정에서 출발할 이유가 없는 겁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손쉽게 이방종교에 합세했습니다. 그것으로 인해 평소에 그들은,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것만으로 ‘배고팠다’는 뜻이 됩니다.
세상 것도 함께 가지지 않고 어린 양이 피로서 만족하지 못하겠다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주시는 것이고, 자기가 원하는 것은 자신이 노동의 결과로 따로 챙기겠다는 겁니다. 하지만 주님은 바로 이런 인간성이 그리스도의 피만의 공로를 훼손하기에 늘 사건을 일으켜서 자신의 가치가 뭉개지고 부서지게 만듭니다. 그렇다면 어느 인간이 구원이 되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감추인 만나’ ‘오직 선택된 자만 아는 이름’을 언급하고 계십니다. 만나의 취지는, 하나님의 기적이라는데 있습니다. 즉 절대로 인간의 자기 능력으로 만나를 끌어댄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만나를 제공하신 분은 바로 그리스도라는 이름의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이 사실은 오직 그리스도로 인하여 아신 바 된 성도에게만 제공됩니다. 즉 장래 심판을 행하실 그 분께서는 미리 자기 백성에게 찾아오셔서 늘 그들의 개인적인 가치와 의미를 말살하시고 오로지 자신의 피만의 가치와 능력을 펼치시는 겁니다.
이로서 성도는 자신의 본 모습을 확실히 규명해야 합니다. 인간은 죄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면에서 죄인인 줄로 모릅니다. 행여 자기 자신이 죄인이라고 인정해도 막상 자신의 예측과 예상에 어긋나는 일이 일어나면 곧장 하나님에게 반발하는 특성을 뿜어내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기적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인간 힘으로 살지 말고 주님의 기적으로 산다는 사실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근호
11-03-29 16:34
013강-계2장14-17(발람의 교회)-rev060521
설교: 이근호 목사님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계시록 2장14절에서 17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401페이지입니다.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아멘.
성경에서 하나님이 이러쿵저러쿵 못을 박듯이 이야기한다는 것은 우리 인간들로 하여금 피할 자리가 없다, 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인식 시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 앞에서 도망칠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도 간섭 않고 예수님도 간섭 않고 나만이 풍족하게 즐길 수 있는 나만의 공간 나만의 삶의 터전, 아무도 간섭받지 않고 나만이 영원토록 자존할 수 있는 것이 인간에게 용납이 되겠느냐, 그런데 성경에는 왜 이리 간섭이 많은지 침투하는 하나님 말씀이 왜 그리 빈번한지 우리는 그 앞에 여름에 자외선 안 쬐고 지나갈 수 없듯이 우리는 그 하나님이 식선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요한복음 5장28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요5:27-29』라고 돼있죠.
평소에 예수 안 믿고 교회 안 다니고 무덤으로 복귀하면 하나님과 자기의 관계는 청산했다고 세상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평생 동안 교회 한 번 안 다니고 삔질이처럼 피했는데 결국 성공했네, 이제 죽었으니까 죽은데 까지 설마 나사렛 예수라는 청년이 죽음까지 관여하겠느냐,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는 대대로 불교 신자고 불자 집안이기 때문에 예수에 대해서 몰라도 아무 상관이 없다고 여기겠지요.
그런데 요한복음5:25-29절 보니까 무덤에 들어가도 예수님 음성을 들을 그 시점에 있다는 겁니다. 결국 아무리 피해도 예수님의 심판대 앞에서 만난다는 겁니다. 삐져서 교회 안 나와도 도망칠 자리가 없습니다. 결국에는 예수그리스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느냐, 네가 예수그리스도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아타냈느냐 그걸로서 영원히 그 인간의 운명은 결정나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평소에 간섭도 않고 잔소리도 않을 것 같으면 그 점잖으신 예수님에 대해서 우리가 호감을 갖고 ‘4대 성인가운데 한 분으로 평소에 존경 했었습니다.’ 하면 되는데 그냥 간섭도 않고 간섭도 안 받는 상태에서 예수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예수님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고 있습니다. 호감을 갖고 있습니다.’ 이러면 되는데
오늘 요한계시록 2장에 보니까 그 예수님께서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 인생에 대해서 이렇게 저렇게 쑤시고 간섭하니, 나중에 예수님 만나서 좋다 싫다 하기 이전에 지금부터 살작 예수님이 싫어지는 걸 어떡합니까. 예수님에 대해 호감을 갖고 싶어도 주님께서 나의 호감을 갖지 못하게 만드시는 것 같아요.
간섭이 너무 많아요. 이러지 마라, 저러지 마라, 이래서야 되겠느냐 저래서야 되겠느냐, 신앙인이라면 이렇게 살아야 되지 않겠느냐, 왜 그리 잔소리가 많은지 호감을 갖고 싶어도 못 갖게 만드는 것 같아요. 한마디로 이것은 인간을 무시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앞장세워 일하시는 이유는 우리를 철저히 무시하면서 일합니다. 사람은 모든 것을 참을 수가 있습니다만 사람은 무시하면 못 참아요.
나를 무시하면 못 참아요. 나를 무시하면 교회 나오기 싫어요. 옮고 그르다의 문제가 아니라 왜 나를 무시하느냐 이 말이죠. 예수가 뭔데 나를 무시하느냐고! 하나님이면 다냐? 예수면 다냐? 왜 무시하느냐 이 말이죠. 절의 중들이 왜 교회를 안 나오느냐면 예수가 자기를 무시한대요. 언제 절의 중들이 하나님과 손잡느냐 하면, 불교도 절이다. 산에 올라가는 길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기독교로 올라가도 되고 불교로 올라가도 되고 결국은 한 자리에서 만나는데 우리 불교도, 석가모니의 진리도 보통진리가 아니다. 라고 자신의 석가모니를 무시하지 않은 경우에만 천주교 추기경과 손잡는 거예요.
마지막 때에 '예수를 믿지 않는 자는 지옥에 가도록 죽은 놈도 다 끄집어낸다.' 이렇게 나오면 곤란해요. 양과 염소가 있는데 양은 영원한 천국에 염소는 영원한 지옥에. 이렇게 나오면 난처하죠. 대화가 안 되죠. 오늘 본문에 왜 하나님께서 교회에 잔소리를 늘어 놓으냐 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무시하는데 ‘너는 이것을 죄다’ 라고 지적하면서 무시하고 들어갑니다.
할 때 ‘내가 뭐가 잘못 됐습니까?’ 하고 나오죠. 그럴 때 비로소 인간은 최조로 자신의 본색을 고백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아 나는 죄 가운데 있구나’ 성실하게 살고 성실하게 말씀을 지키지만 나도 제대로 몰랐던 그 죄의 덩어리가 주님께서 나를 무시함으로써 다가설 때 우리가 발각되고 들통이 나면서 우리는 반발하게 됩니다. 제가 어떤 강의에서 이런 강의를 했어요. 이 강의에 많은 사람이 했어요.
아멘 하고난 뒤에 얼마 지나서 거기서 삐져가지고 도망간 사람도 있습니다. 이게 뭐냐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살리시면서 일하는 것이 아니고 죽이시면서 일합니다. 라고 한 거예요. 이 말에 대해서 많은 사람이 동의했습니다. 맞다, 하나님은 날마다 우리를 죽음에 넘기우며 죽은 우리 자리에서 예수님의 생명이 살아나는 방식으로 인도하고 살리시는구나.
라고, 이구동성으로 ‘가 하시면 예 하세요’ 라고 말은 안 했지만 분명히 ‘가 하시면 예’ 하시는 것으로 돼있었는데 막상 그 사람이 자기가 무시당한다고 하니까 그 다음부터는 ‘어쩌란 말이냐, 왜 날 무시해!’ 강한 반발심으로 튕겨 나가버린 겁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여기에 나온 믿음이라는 것이, 그러니까 신앙이 무엇이냐에 대해 동의를 구하면서 속으로 가냐 부냐 판단해보세요.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맞죠? 여기에 대해서 ‘아니요’ 라고 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런데 막상 우리가 자기 자신을 돌아보면, 세상에 나와 단독자로 서 있으면 ‘내가 노력하는 힘’으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내가 노력한 힘으로 살아가다가 자기가 노력하고 바르게 산 것에 대해서 누가 시비 걸고 무시하게 되면 ‘내가 열심히 일앴는데 왜 나의 가치를 알아주지 않느냐’고 하나님께 도전하게 된 겁니다.
그런데 믿음대로 사세요. 하면 ‘믿음이 뭐냐!’고 묻는 거예요. 믿음이 뭐냐! 그런데 믿음이 뭐냐고 되묻는 이유가 뭐냐 하면, 믿음이라 하는 것은 ‘내 열심과 내 양심과 내 착함으로 살면 믿음이 아녀?‘ 이런 나름대로의 정의를 이미 갖고 있었던 거예요. 이야기가 복잡해지는데 다시 첨부터 합시다.
신앙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이 벌이시는 일에 내가 의지하는 게 신앙입니다. 할 때 거기에 대해서는 동의하는 겁니다. 동의하다가 막상 내가 남한테 무시당하고 모멸당할 때, 내가 지금까지 바르게 살고 열심히 말씀을 지키려고 했는데 왜 거기에 대해서는 무시하느냐, 할 때 내가 ‘신앙대로 살아야 합니다.’ ‘신앙이란 것은 내가 열심을 다해 충성을 다하는 게 신앙 아뇨?’ 이런다고요.
그러면 앞에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신앙이라는 것은 본인의 열심과 착함으로 사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벌이시는 사건, 하나님의 벌이시는 일에 대해서 수긍하고 동의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설사 하나님이 나를 죽이신다 해도 무시, 모멸정도가 아니고 나를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거기에 대해 감사하는 게 신앙입니다. 내가 어떤 잘못을 했기에 이런 벌이 나옵니까? 하는 것은 처음부터 신앙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동의 해놓고 속으로는 동의를 안 하는 거예요.
미처 깨닫지를 못하는 거예요. 나이 70가까이 되는 박완서라는 소설가가 있습니다. 1988년도에 놀라운 사건이 벌어졌어요. 1988년은 전두환 시대 88올림픽 할 때 박완서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교통사고로 죽었어요. 독생자입니다. 그때 ‘한 말씀만 하옵소서’ 라는 책에 보면 이래 돼있어요.
내 아들 죽었는데 웬 88올림픽 잔치를 벌이느냐! 내 아들 죽었는데 왜 계절은 바뀌고 내 아들 죽었는데 왜 고을고을 성화는 옮겨 다니면서 잔치를 벌이느냐! 신이시여! 신은 왜 살아있습니까. 내가 신을 죽이고 싶은 살인의지를 발휘하기 위해서 당신은 살아있지요? 이렇게까지 이야기했습니다. 신이시여! 내 손에 한 번 죽어볼래요? 그 뜻입니다.
내 아들 죽었는데 왜 계절이 바뀌느냐 말이지요. 팝송에도 그런 가사 있어요. 내 사랑은 떠났는데 왜 태양은 빛나는가! 왜 파도는 치는가! 라~라~ 이런 노래 있어요. (와...이건 라이브로 들어야하는데)
온 천지가 석유가 없다고 신에게 기도하고, 월드컵에서 이기라고 목사 보내 골대에 기도하는 그런 판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하나님 그 아들 죽였습니다. 그 피가 유월절 피 인데, -잘 들어보세요.- 출애굽 할 때 하나님께서 죽음의 사자가 피를 보고 넘어간 겁니다. 이게 그때 피를 바른 신앙, 믿음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도 살아남았고 피 바른 신앙이 없던 사람은 “그게 뭐야~! 장난도 아니고 그게 뭐~야 피 바른다고 넘어가? 착해야 넘어가지”
반듯하게 살아야 넘어가지, 훌륭하게 살아야, 말씀대로 살아야 용서해주지 하고 버틴 사람은 다 죽었습니다. 하나님은 피에다 모든 것을 신앙을 묻습니다. 이미 피가 있기에, 하나님께서 구원할 근거가 마련되었기에 우리 자신은 허물어져야 되고 붕괴돼야 된다는 겁니다 피 앞에서 얼쩡거리지 말고 제거돼야 된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제거시키기 위한 작업이 뭐냐, 오늘도 사건 사건을 일으킵니다. 피 말고 그보다 중요한 것이 얼쩡거릴 때 주님께서는 그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예수님의 피만 남기고 나머지는 도태시키고 지워버리고 잘라버리는 작업에 나섭니다. 그 잘려나가는 것들이 뭐냐 하면, 착한 거, 교회 잘 섬기는 거, 말씀대로 살기, 십일조 헌금한 거, 봉사한 거, 전도 많이 한 거, 설교 잘한 거, 강의 한 거, 공부 열심히 한 거, 자식 훌륭한 거 전부 다 잘려나간 거예요.
박완서라는 이 작가에 있어서 예수님의 피를 가린 것은 뭐냐, 그것은 ‘아들’이었습니다. 아들과 자기는 한통속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제거함으로 말미암아 교통사고라는 사건을 일으켜서 내가 평소에 얼마나 나밖에 모르는 죄인인가를 드러내는 그런 일을 열심히 했어요. 88올림픽 가운데서 열심히 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미래에서 날아온다고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왜 아들 죽은 사건이 벌어졌습니까. 미래에 가보면 그 원천이 거기서 밝혀집니다. 가보면 ‘아 이것 때문에 내 아들 앞당겨 죽었구나’ 우리는 과거의 입장이기 때문에 과거의 입장에서 봐서는 과거의 아들 잘 키워서 가문의 영광을 받겠다고 다짐하고 아들 위해서 얼마나 기도했겠습니까. 박완서 그 사람이 아마 모르면 몰라도 이렇게 기도했을 거예요.
하나님 아버지 국가와 교회에 큰 일꾼이 되게 하옵소서. 부모가 자식을 위해 기도하는 거 이것 빼면 뭐가 있습니까? 또는 무슨 기도냐면 맥아더 기도. 내 아들 촐랑거리지 말게 하옵시고, 예의바르게 살게 하옵시고 남에게 보탬이 되게 하옵시고 … 이런 맥아더 기도인가 맥아지 기도인가 잘라버려요.
왜 자르느냐, 과거의 입장에서 보면 안타깝지만 미래의 입장에서 볼 때는 그 잘라버린 것으로 말미암아 우리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심판대 앞에서 피할 곳이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재확인 시키는 겁니다.
나만의 공간, 아들과 나만의 행복한 그러한 자리가 주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자기 아들 피흘리는 자리 앞에서는 그것도 하나의 얼쩡거리는, 장애물에 지나지 않아요. 날마다 지워버리는 겁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여기 복잡한 단어들이 나오는데 단어 하나하나가 몇 시간 걸리는 겁니다. 초스피드로 압축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여기 단어 보면 ‘발람’ 나오죠, ‘발락’ 나오지요, 그 다음에 ‘우상의 재물’ 나오죠, ‘행음’ 나오죠, 니골라당 교훈 나오지요, 그리고 이기는 자에게는 감추었던 맛나 나오지요. 흰 돌 나오지요, 새 이름 나오지요. 이것 전부다 예수님의 잔소리입니다. 교회들에게 하시는 잔소리예요. 이런 모습이 너희들 속에 담겨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이야기를 하게 된, 배경이 되는 민수기 25장에 나오는 발람과 발락이야기 우상의 재물 먹는 이야기 행음이야기 이것이 한 세트가 되어서 민수기 25장에 담겨있습니다. 그것이 무슨 사건이냐 하면 이런 사건입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 인도할 때 인도 당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슨 문제점이 있는지 발각이 안 된 상태였습니다.
마치 오늘날 교회들이 예수의 피를 믿고 천국도 뚫을 것을 믿습니다. 천당 갑니다. 오늘 죽어도 낙원에 가 있습니다. 하는 자신만만한 우리들 내부에 어떤 죄가 있는지를 우리가 몰라요. 발람과 발락의 이야기가 뭐냐 하면, 발락이라는 사람은 일종의 교회를 해체시키려는 저쪽 세상 사람의 주권자입니다. 왕이죠. 교회를 해체시키려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체시키려고 하는 겁니다.
어떤 책에 이런 내용이 있어요. 상당히 중요한 건데 사람이 자기 자신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을 때는 중요시여기지 않는 그 대체물을 타자, 남들에게 그걸 찾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의 것을 함부로 굴리고 자기 자신의 감각과 욕망과 욕심과 탐욕과 쾌락에 자기 몸을 묻을 때는 자기를 낮추고 상대방의 완벽, 완전과 괜찮음과 절대에 대해서 높이게 되는 겁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하느냐 하면, 나보다 더 나은 상대방이 있다는 것을 꼴 보기 싫어서 그 상대를 잔인하게 죽여 버립니다. 이게 인간의 본성이에요. 아주 정확하게 지적한 겁니다. 사람이 자기를 낮추면 겸손한 거 같죠?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의 못난 것을 들춰내면 자기보다 장점에 갖고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붕괴시키고 싶어요. 죽이고 싶어요.
세상 사람들이 교회 안 나오면서 교회 다닌 사람들을 빈정대면서 비양 거리면서 자기는 술에 절이고 담배에 절이고 타락에 절이면서 술 담배 않는 기독교 신자에 대해서 빈정대면서 ‘그런다고 인간 되냐?’ 이렇게 하는 이유는 상대적으로 저쪽이 나아 보인다는 것에 대해서 자기가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저쪽이 갖고 있는 것에 대해서 참을 수가 없는 겁니다.
발락이라는 사람이 그런 사람입니다. 발락이라는 사람이 여호와 하나님의 막강한 힘에 의한 인도함을 받으니까 어떻게 하든 자기가 망하는 것처럼 저쪽도 망해야, 둘 다 망하는 자리에서 있어야 다시는 저쪽 하나님 믿은 사람에 의해서 천국이 있다 지옥이 있다, 그따위 소리 안 나올 것 아닙니까.
천국이 어디 있고 지옥이 어디 있어? 그냥 개판대로 살다가 개판대로 죽는 게 인생이지 뭐가 있어. 그런 식이다 말이죠. 제가 알고 있는 유행가 가사 가운데 음미할만한 가사가 있어서 소개합니다. 제목이 '술아 술아 술아‘ 라는 노래인데 오늘도 그만 하려 했는데 또 네가 땡기는구나. 가사가 그래요. 가사가. 술아 술아 술아 네가 오늘 취하게 하는구나.
나는 저것을 못 끊었는데 왜 예수쟁이는 저걸 끊었느냐 이 말이죠. 건방떨지 말라 이 말이죠. 그러니까 죽여버리겠다는 거예요. 동일하게 같이 타락하고 동일하게 같이 망할 때 우열이 없으니까 속이 편하다는 거죠. 나에게 부담으로 작용하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 믿는 것을 해체시켜버리고 없애버리려고 하는 겁니다. 그게 발락의 전략이었어요.
거기에 앞장섰던 사람이 돈만 주면 시킨 대로 움직이는 그런 목사가 있죠. 이름이 ‘발람’이에요. 발락 하니까 한때 독일 유명한 선수가 있어요. 발락과 발람이 한 조가 돼가지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 백성을 망하게 할 수 있느냐 전략을 짰는데 그 전략이 뭐냐면 우상 재물을 먹게 하고 모압이 믿던 종교가 있죠. 그 종교가 뭐냐 하면 사람을 즐겁게 하는 종교입니다.
사람의 감정을 높이는, 붕 띄워주는 종교예요. 고린도전서 13장에 보면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라고 했잖아요.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그 당시에 복음 말고 그 당시 헬라인들이 갖고 있던 종교특징이 뭐냐 하면 울리는 꽹과리와 음파와 마약 종류를 동원해서 사람의 기분을 업UP되게 하는 것, 한껏 높여주면서 세상 시름과 스트레스를 다 푸는 쪽으로 상품화시켜서 종교단체를 꾸려나가는 종교의 특징이 있습니다.
우상 재물 뿐만 아니고 거기에서는 다산의 신이라 해서 그들이 원하는 자식을 생산해주기 위해서 항상 대기하고 있는 여자들과 남자들이 있어요. 여자들은 남자와 상대하고 남자는 여자와 상대해서 그 성전에 있는 남자와 여자들은 ㅡ이 이야기는 19이상인데ㅡ 뭘 하냐면 그것이 성적인 것이 아니고 하나의 의식의 절차예요. 마지막 축도로 끝나는 것처럼 그걸로 끝나는 거예요.
남녀의 결합은 신이 내려준 은총에 의해서만 원하는 자식을 배태할 수 있다는 그들만의 교리에 의한 하나의 코스입니다. 그 코스를 거쳐서 집에 내려가도록 돼있습니다. 상당히 기분 업 되지요. 육체적으로 즐겁지요. 자기들은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으니까 잠시 이것도 맛보는 게 뭐가 나쁘냐 이 말이죠. 내 가족이 잘되고 내 가문의 영광이라면, 그리고 나이 스트레스가 풀린다면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된다는 것이 니골라당의 윤리입니다. 도덕이에요.
그리고 그것이 발람의 일과 연관이 있다고 지금 예수님께서 지적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예수 믿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종교단체에 관여해서는 왜 안 됩니까? 이런 반발이 나올 수 있어요. 고린도전서 10장20절에 보면 「대저 이방인의 제사는 귀신한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라고 돼있어요.
「나는 너희들이 귀신하고 교제하기를 원치 않는다.」 이래 돼있어요. 『20무릇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21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에 겸하여 참여하지 못하리라 』
오늘날 우리 입장에서는 그걸 조상이 살아있어서 절하는 것도 아니고, 장난삼아 호기심 삼아 한 번 해보는 건데 거기에 심각한 의미를 둘 필요는 없었는데 그것 가지고 주님께서는 잔소리 합니까? 하는 생각이 들지요. 여호수아 7장에 보면 아간이란 사람이 나오는데 아간은 여리고성이 무너지고 난 뒤에 하나님께 드릴 제물을, 금 은 외투를 가져갔습니다. 그런데 유다족속 가운데 세라족속, 세라족속 가운데 삽디족속 가운데서 아간을 기어이 찾아내서 돌로 쳐죽이고 난 뒤에 다시 아이성을 정복하게 됩니다.
이 말씀은 제가 왜 드리느냐 하면, 주님의 상과 이방신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예수님이 주시는 것으로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잊어버렸다는 겁니다. 이방종교와 이방 예배에 참석한다는 것은, 이방종교와 이방제사는 자기 바침으로 복을 받는 거예요. “바드~소서~ 바~드~ 소~서” 자기가 바침으로 복을 받는 겁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종교, 하나님의 제사의 특징은 우리가 바치지도 않았는데 예수님의 피흘리심에 동참해서 우리가 영생을 얻고 구원으로 가고 천국으로 가고 있는 입장입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입장이에요. 아간이란 사람이 왜 처벌받아야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것, 하나님이 주신 건데 자기만의 단독으로 이것을 자기 것으로 삼았다는 게 뭐냐 하면 자기의 힘으로 살아가겠다는 자기의 신앙고백을 한 거예요. 아간이.
나는 내 힘으로 살겠다 말이죠. 제가 처음에 말했죠? 신앙은 내 힘으로 사는 게 아니잖아요. 주님이 주시는 힘으로 오늘도 사는 것이 신앙이잖아요. 그런데 내 힘으로 살겠다는 것은 뭐가 빠져버렸냐 하면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피, 어린양의 피를 완전히 모독하는 게 되는 겁니다.
옛날에 성만찬 할 때 예수님의 피와 살, 다른 말로 하면 떡과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우리는 우리 힘으로 살 수 없고 지금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의 은혜로 지금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 혜택을 맘껏 받고 있습니다. 그런 입장에서 성찬식에 참여하는 겁니다. 거기에 자기의 섞어버리면 폭발해요. 있을 수 없는 겁니다.
저는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게 뭐냐 하면, 목숨 주고도 바꿀 수 있는 것을 붙잡는 것, 그게 제일 중요해요. 목숨을 빼앗겨도 그것만 있다면 저는 오케이입니다. 라는 그것 하나를 잡아야 되요. 그것 하나가 없으면요 평생을 우왕좌왕하다가 세월 다 보냅니다.
사건 하나 흔들릴 때마다 같이 흔들리고 사태가 하나 일어나면 불안해서 못사는 것, 그것은 확실히 잡은 그 하나가 없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목사님의 놀라운 신앙고백) 여러분들 교회 왔으면 그것 하나를 잡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마음대로 잡는 건 아니지만, 아무튼 잡아야 되요. 그게 뭐냐 하면 ‘피’입니다. 예수님의 피입니다. 피!
잡기 쉬우라고 글자도 한 자에요. 피. 예수님의 피로 다 이룬 거예요. 그 피를 먹고 마시면서 우리는 지금 천국으로 미래로 가고 있는 겁니다. 따로 곁눈질 할 필요조차 없어요. 그런데 다른 이방종교 특징은 뭐냐 하면, ‘바쳐야 복을 받지 이놈들아!’ 이거거든요. 기도해야 복을 받지! 전도해야 복을 받지! 전도 방해하는 건 사탄의 역사다!
전도를 해야 되고, 뭘 해야 되고. 안 하는 사람과 차별시킨다는 것이 이방종교의 특징입니다. 그래야 행함을 유도할 수 있잖아요. 경쟁적 유도가 가능하잖아요. 시합을 붙여야 하잖아요. 그런데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이 땅에서 여러분들이 할 때만 일이 벌어졌습니까? 인생이라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하지 않더라도 의도하지 않더라도, 예상치도 못한 사건 사건들이 스물 네 시간 여러분 인생을 가득 채웁니다.
여러분들이 예측치 못한 일들이 계속해서 여러분 직장에서 기다리고 있고, 가정에서 살림한 사람들은 예상치도 못한 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설거지 하면서 그릇 깨지리라는 것을 누가 예측했겠습니까. 그것도 비싼 것 깰 때. ‘주여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그릇보다 피가 더 중요하다는 걸 네가 몰랐던가?’ ‘아 이제 알았습니다.’ 접시 두 개 깨지는 것까지는 봐준다. 네 개 깨지면 ‘내 아들 왜 죽입니까!’
주님께서 여러분들이 원치도 않는 사건들을 일으킵니다. 결국 인간의 행함이라 하는 것은 자기가 행하는 것이 아니고 예측불허의 사태 속에서 어떻게 적응해보려고 원상복귀 해보려고 몸부림치는 몸부림의 일종이에요. 그걸 행함이라는데 행함도 아닙니다. 어쩔 줄 몰라서 몸부림 쳐보면 그런 행함이 나오는 거예요.
바쳐야 복을 받는다는 거. 바쳐야 복을 받는다는 것은 지금 주는 것이 영 불만스럽다는 고백밖에 안 되거든요. 그래서 발람과 발락은 작전을 짰습니다. 자기들이 겉으로는 ‘여호와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지만 새로운 유혹꺼리, 그들이 평소에 몰랐던 새로운 것이 들어왔을 때 덥석, 그걸 잡아버려요. ‘아쿠 이거 좋구나!’ 기분 업 되네, 와 기분 좋으네. 인생을 이리 살아도 되는구나, 하고 덥석 잡을 때 잡는 순간, ‘나는 예수만으로 배고파!’
히딩크가 아직도 배고프다 하던데 ‘나는 예수님 피만으로는 아직 배고파’ ‘세상 사람이 즐기는 것은 나도 다 즐겨야 돼, 그래야 나는 배부르겠어.’ 라고 했을 때 결국 그것은 뭐냐 하면 ‘다 이루었다’의 가치가 상당히 일이 좁아지는 겁니다. 좁아지고, 주님이 어떤 사건을 일으키면 불만만 터져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본문 17절에 뭐라고 돼있느냐 하면, 「… 이기는 그에게는 감추었던 만나…」감추었던 만나를 주겠다는 거예요. 광야에서는 만나만 있어도 대단한 것이고 축복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만나가 맛있어서 그러는 것도 아니고 만나 내리는 그 자체가 기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없던 데서 만나가 나오고, 또 없던 데서 만나가 나오고. 우리 인생이라는 것은 자기의 욕심을 주체 못합니다. ‘나는 예수보다도 세상 사람이 가진 것 다 가지고 싶어’ 이게 우리 인간의 본 모습입니다.
그걸 저는 ‘정신적 불구자’라고 하는데 이 세상 현대인들은 정신적 불구자예요. 정신적 불구자가 예수의 피로만 구원 받았어, 라는 생각이 든다는 것은 이것은 그 사람 속에 있는 새로운 만나입니다. 기적입니다. 미래에서 퍼붓는 기적이 그 사람 속에 아직도 살아있습니다. 세상 것 다 가져야 만족하고 싶죠.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피’ 예수님의 피야.
이게 새록새록 순간순간마다 잊혀지지 않고 떠오른다는 것은, 이것은 주님께서 내 속에 만나를 분사噴射하고 있는 거예요. 만나를 뿌리고 있는 거예요. 그 만나가 세상에서 우리가 갖고 싶은 것보다 더 중요한 겁니다. 감추어진 이 만나와 더불어서 주어진 것이 흰 돌이예요. 그런데 흰 돌의 특징이 뭐냐, 이것을 아무도 알지 못하는 거예요. -침튀네, 마지막인데 양해를-
이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니 받는 자 외에는 그 이름을 알 자가 없다. 흰 돌은 만나를 주시는 제공자의 이름이 거기에 적혀있는 겁니다. 예수그리스도가 나에게 만나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영생을 얻게 하시는구나, 그런 내가 무슨 복을 더 얻겠다고 이방 제단에 가서 바치고 바쳐서 무엇을 더 받겠다는 이런 탐욕을 부리는가! 깨달으라! 하는 것이 오늘의 본문 내용입니다.
동의하시죠? 몇 분은 주무시고 있지만 빼놓고 동의하실 줄 믿습니다. 동의하시죠? 그런데 막상 어떤 사건이 일어나게 되면 박완서처럼 88올림픽 할 때 온 나라가 좋아할 때, 또는 2006년 월드컵 한다고 온 나라가 다 즐거워할 때, 불의의 화재로 자식이 죽고 남편이 죽을 때, 어떻게 그 월드컵에 기쁘게 참여할 수 있겠습니까. 신에게 멱살 붙잡고 한 판 해보겠다는 거죠.
그럴 때 그게 바로 기적이 아니고 우리의 본마음이었습니다. 우리가 본마음 가지고 어떻게 천당 가겠다는 생각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속에 만나의 기적이 없으면 천당은 남의 이야기입니다. 끝난 이야기예요. 못 들어갑니다. 화날 때 화내세요! 어쩔 수 없어요. 뿔따구 날 때 뿔따구 내시고!
그리고 그것을 행함으로 해보려고 애쓸 때 애쓸 수밖에 없어요. 그게 우리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런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런 사건 저런 사건이 벌어져도 내가 지금 이 땅에서 육을 벗고 영생을 얻는 것은 그것은 ‘피’ 예수님의 피, 유월절의 어린양, 죽음의 사자도 보고 그냥 넘어가주었던, 그 피가 이러한 나의 고난과 역경조차도 그걸 뛰어넘는다는 사실이 믿어진다는 것, 그건 여러분의 솜씨가 아닙니다.
끝으로 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건 어디에 나오느냐 고린도전서에 보면 피에서 나온, 십자가 피에서 나온 피의 능력이 여러분들이 모든 근심과 걱정과 염려를 이제는 어떤 사태가 오더라도 그런 것 때문에 자기 몸을 때리지 말고, 후회와 절망에 빠지지 말고 그리스도라는 새 이름이 여러분들에 박혀지는 영원한 새 이름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신앙이란 내가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열심히 하셔서 우리를 구원해내시는 것을 믿는 것이 신앙인 줄 압니다. 신앙 있다 믿음 있다 자부했는데, 예측치도 못한 사태가 벌이지고 사건이 일어나니까 이제는 ‘왜 나를 무시하느냐, 왜 모멸하느냐 하나님이면 다냐, 왜 내 인생을 망가뜨리느냐, 웃음꺼리로 만드느냐, 하고 원망밖에 나오지 않는 이것이 우리의 본성입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만나를 깨닫고 그리스도가 만나인 것을 깨닫는 그런 기적들이 고개 숙인 저희들 마음속에도 지금도 살아있다는 것을 저희들 동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녹취: 박온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