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광주 강의 14-2
Re..광주 강의 14-2
이름 : 서경수(IP:)
광주 강의 14-2
두 번째 시간을 시작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한 것을 요약해 보면,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나실 때 우리가 취사선택해서 신을 골라잡아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신을 소개하므로 말미암아 천국 갈 사람은 이미 하나님에 의해 확증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그 확증된 사실과 우리가 그것을 아는 것 사이에는 뭐가 매개체가 되어야 하는가? 이것은 육으로는 안 되고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정죄함이 없고, 이미 의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파악하게 됩니다.
그런데 보통 매개라고 하면, 그냥 들어갔다가 적당할 때 알아서 빠져나오는 것이 매개지요. 이것을 화학에서는 촉매라고 하지요. 촉매의 역할은 일이 성사되면 빠지잖아요. 중매쟁이가 결혼시켜놓고 빠지지 결혼한 사람들과 같이 살지는 않지요.
그런데 영적인 경우에는 이게 아닙니다. 예수님과 우리를 중매시켜놓고 빠지는 것이 아니고 영원토록 함께 기거하면서 살게 됩니다. 이것을 성령의 임재라고 합니다.
그냥 한 집에 사는 거예요. 눈치 보지 않고 주인노릇 하는 거예요. 이렇게 성령이 주인노릇 하는 것을 공간적인 용어로 ‘성전’이라고 합니다. 성전이라고 할 때는 우리 몸과 연관시키지 말고 성령님께서 들어가서 사시는 곳이라고 보면 됩니다.
성령님께서 들어가서 사시면 그것이 성전이 됩니다. 그 사람의 직업에 관계없이. 성령님이 들어와 계시면 거룩한 성전 되는 것입니다. 내가 거기 있다고 성전 되는 것이 아니고, 주도권이 내가 아니라 성령님이 계시면 그것이 성전입니다.
그리고 성령님이 계시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이 부분은 진짜 어려워요.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로 방금 지옥에서 기어 나오는 꼴로 만드는 것이 성령님의 하시는 일입니다. 목욕탕 사우나에 들어갔는데 누가 밖에서 문을 잠갔다고 생각해 봅시다. 누가 문을 열어 이 뜨거운 곳에서 건져줄까? ‘주여 건져 주소서.’
성령님의 하시는 일이 이런 처지에 있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주님 밖에 날 구원할 자가 없습니다. 주여 살려주심을 감사합니다.’ 이런 고백을 되풀이 하게 하시는 분이 성령입니다.
방금 죽음에서 나왔는데, ‘내 보따리 내 놔라’는 말이 안 나오도록.
갇혀있는 뜨거운 사우나에서 아무리 휴대폰으로 사정을 외부에 전해도 소용없어요. 그러니까 이런 상황에서 구원하는 것은 119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고 오직 주님밖에 없습니다. 바로 지옥이 그런 곳입니다.
지옥은 주님 이름 외에 다른 이름으로 구원 받을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 지옥을 안 갔기 때문에 나는 주님과 상관없다고 여겼는데, 성령께서는 어떻게 하는가 하면, 우리를 뭘로 삼았다? ‘성전’ -- 결국 성령님의 자기 집이지요. 성전이 우리 집이 아니고, 오해하지 마세요. 성전을 우리 좋으라고 지은 집이 아니고, 우리는 고급 빌라 좋아하지 이런 집 안 좋아합니다.
우리가 좋으라고 지은 집이 아니고 성령께서 우리 허락도 안 물어보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성전으로 삼았기 때문에 성령님 마음대로 하신 것입니다.
자기 마음대로인데, 어떻게 일하는가 하면, 우리로 하여금 방금 지옥에서 기어 나온 꼴로 만드는 것이 바로 우리가 성전 됨이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여, 주님밖에 없나이다.’를 외치게 되는 것입니다.
무시무시한 지옥으로부터의 구출을 실감케 하시는 것이 성령님의 하시는 일인데, 이것이 4장 8-9절부터 나옵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여기에서, 성령께서 왜 이렇게 시키는가를 따지면, 자기 집이니까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 허락도 안 받고 들어오셔서 자기 집으로 삼고 자기 마음대로 일을 벌이십니다. 네 가지가 나옵니다.
첫째: 우겨 쌈.
둘째: 답답한 일.
셋째: 핍박.
넷째: 거꾸러뜨림.
의도적으로 이런 사건을 일으키지요. 우겨 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고, 핍박을 당하고, 거꾸러뜨림을 당하고.
그럼 왜 이렇게 하시는가?
방금 어디에서 기어 나왔다? 지옥에서 기어 나왔기 때문에 이런 일을 당해도 주님이 있다면 이런 것 쯤 대충 넘어갑니다. 이런 일들이 사소한 문제가 됩니다.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이렇게 확인시키는 것이 성령님의 충만한 역사입니다.
그 한 예가 사도행전 7장에 나옵니다. 스데반 집사입니다.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는 것은 마지막 대목에 나오고 그 앞부분에는 뭐가 나오는가 하면, 기똥찬 설교가 나옵니다. 거기 처음 나오는 용어가 뭐냐 하면, ‘광야 교회’입니다. 보통 교회는 신약 시대에 처음 나오는데 그는 구약에 광야 교회를 말합니다.
그의 설교는 광야 교회를 시작으로 해서 신.구약을 통째로 뽑으니까 놀라운 진리가 선포되었어요. 그것도 성령에 충만해서.
성령 충만한 자의 설교를 들으면, 설교 듣고 방언하고 회개하고 눈물 흘리고 이렇게 되어야 할 것인데, 청중들은 전부 돌맹이를 들고 설교자를 향해 던졌습니다.
오00 목사님하고 똑같아요. 설교하고 난 후에 돌 들고 죽이려고 달려들고.
이렇게 사정없이 스데반을 향해 돌을 던지니까, 그 돌이 스티로폼이 아니고 진짜 돌이니까 돌 맞고 죽었어요.
당나귀가 말하는 것도 기적이지만, 스데반에게 던진 돌맹이가 진짜 돌이라는 것도 기적이에요. 그리고 그 돌맹이에 맞아 죽는 것도 기적이에요.
사실은 주님이 그렇게 죽도록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비참하고 불쌍하고 억울하게 보이고,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저렇게 일찍 죽어야 하는가?’ 라고 하지만 이런 말을 스데반 집사님께 하면 스데반은 섭섭해 합니다. 자기는 지금 주님 품에 평안히 쉬로 가는데 뭐가 불쌍하고 안 됐다고 합니까?
스데반을 쉬게 하기 위해서 주님은 그를 죽게 했습니다.
쉬는 그 순간까지 하나님께서 일을 어떻게 하셨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방금 지옥에서 막 끄집어낸 주님만 바라보았다면 그런 죽음도 안식이라는 쪽에서 해석이 되지요.
이런 관점으로 7, 8절을 보면,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이”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지요? “심히 큰 것이”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겨 쌈을 당하고 핍박을 당하고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는 능력이 과연 주님께 있는지 보여주기 위해서 성도에게 이런 일 당하도록 하십니다.
10절을 봅시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제가 첫째시간에 뭐라고 했습니까? 이번시간 처음에. 보통 중매쟁이는 두 사람을 붙여놓고 자기는 빠지잖아요. 그런데 성령이라는 중매쟁이는 어떻습니까? 계속 사시는 거예요. 그런데 이 성령님이 뭘 표준삼아 우리에게 계속 사시면서 일하시는가 하면,
천국을 흔히 죽어서 가는 곳으로 알지요. 맞습니다. 죽어서 가는 곳인데 그것은 육체가 죽어서 가는 천국이고, 그 전에 우리가 이미 천국에 들어와 있어요. 그게 무엇인가 하면, 죽음 이후의 세계지요. 육체적 죽음 말고 진짜 죽음 이후의 세례란 말이지요.
따라서 우리가 지금 속해있는 성령님이 속해있는 세계가 진짜 천국이냐 아니냐를 뭘로 판단하는가 하면, 제가 십자가를 그려보겠습니다.
십자가를 중심에 놓고 이편을 A편이라고 합시다. 그리고 저편을 B편. A편과 B편 가운데서 A쪽에 있는 사람이 B쪽으로 왔을 때, 십자가 뒤에 있는 이것이 천국입니다. 그러면 천국에서 이쪽을 볼 때는 십자가라는 구멍으로만 보이고 저쪽에서 천국 간 사람을 볼 때는 십자가로 가는 거예요.
천국의 정문은 십자가인데 이 십자가 뒤편에 있는 B쪽에 있는 사람에게는 이미 십자가 속에 있다는 것을 되풀이해서 확인시킵니다.
십자가 사건이 뭡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한 사건이지요. 그래서 그것을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시키는 것입니다.
10절을 봅시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리고 우리는 아무것도 안 하는데 우리 안에 계속 누가 살아있어요? 그리스도가 계속 살아 있기에 우리가 덩달아 같이 사는 세계, 이것이 십자가 뒤편에 있는 세계입니다. B영역입니다.
예수님이 살아 있기에 계속 살아있는 세계.
이것을 갈라디아서 2장 20절 유명한 말씀인데 읽어보세요.
이것 이야기하고 기존의 신학의 문제점을 이야기하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전체로 보면 우리는 살아 있지요? 살아 있지만 내가 살아있다고 우길 수는 없단 말입니다. 왜? 전체로 보면 내가 살기는 살았지만 나는 그 안에서 죽은 채로 있고, 내가 살아있는 것은 그리스도가 나를 살려내는 식으로 내가 살아있다고 보는 거예요.
그러기에 내가 나를 살리기에 내가 살아있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어느 세계에서? 십자가 뒤에 있는 세계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살아있어서 산다면 십자가가 의미가 없어요. 만약 내가 살아있어서 산다고 하면 기껏해야 90년 살고 그 후에는 지옥 갑니다. 90년 이후에 죽어서 천국까지 살려면 지금부터 내가 나를 살리는 식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살리는 식으로 살아 있어서 이것이 90년 지나고 천국까지 계속 사는 것이 됩니다.
제가 아까 식사시간에 농담 삼아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만, “우리 노회 목사님들은 보너스도 없고 수당도 없으니까 노회에서 줄 수 있는 혜택은, 다른 노회에서는 70세가 정년인데, 우리는 정년을 20년 더 늘여서 90세 까지 정년으로 하자.” 고 했습니다.
왜 90세로 했는가 하면 보통 90살 되면 다 죽거든요.
그런데 여기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보니까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살아 있어야 천국까지 돌파하는 살아있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20절 끝부분에 보면 “이는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여기에서 성화론이 다 깨집니다. “나를 위하여”에서 나는 사도바울이고 성도지요. “자기 몸”은 누구 몸입니까? 예수님 몸이지요. 예수님께서 몸을 주셨지요? 그렇다면 십자가 뒤의 세계는 어떤 세계냐를 따져보니까 나는 계속 죽은 상태에 있고 예수님이 살아서 내가 사는 식인데, 죽은 내가 왜 계속 사는가 하면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나에게 뭔가 공급하는 것이 있어요. 예수님 자기 몸을 계속 공급하세요. 자기 몸을 계속 버리는 거예요.
사람이 자기가 살아 있을 때 성숙이나 성화가 성립이 되지, 예수님은 우리를 성숙, 성화가 아니라 계속 우리를 죽이는 거예요. 내가 단독으로 우리 집에 혼자 있다면 나는 성숙해야지, 나는 성화 되어야지 이것이 가능한데, 만약에 나 외에 더 강한 사람이 같이 있어 나는 매일 얻어맞고 산다면 성화될 시간도 없어요. 매일 얻어맞기 바빠요. 너는 죽어야 돼. 너는 죽어. 계속 쥐어 박히는 거예요. 이것을 제가 “묵사발 된다.”고 어느 글에 섰는데, 계속해서 묵사발 되는 거예요.
묵사발 하는 방법이 뭐냐 하면, ‘네가 탐을 냈잖아. 네가 거짓증거 했잖아. 네가 여호와 아닌 세상을 좋아 했잖아.’ 이렇게 계속 쥐어 박히는 거예요. 이렇게 우리 몸은 말씀에 의해서 죽음에 넘기우지요.
우리가 매일 죽음에 넘기운다는 말을 어떤 사람은 오해를 해서 매일 바늘로 자기 몸을 찌르고 이렇게 해서 죽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서 내가 매일 죽는다는 말은, 우리를 말씀으로 죽이는데 입이 100개라도 할 말을 잊지요. 그 앞에서.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다.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 알라.’ 매일 쥐어 박히는 거예요. 성경말씀 어떤 구절을 봐도 우리가 지킬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어요. 말씀으로 계속 쥐어 박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누가 때리느냐가 중요합니다. 나로 하여금 계속 입 다물라고 하고, 내가 사는 것은 내가 말씀 몇 개 지켜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예수님의 공로를 믿음으로 나는 산다고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에서 성경을 해석할 때 마지막에 항상 예수님의 공로만 나타나야 되요. 그렇지 않고 ‘당신도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됩니다.’라고 되면 그것은 영의 일이 아니고 육에서 육으로 가는 것이어서 그 자체가 기도하면서 지옥 가고 있고, 전도 열심히 하면서 지옥 가고 있고, 십일조 열심히 하면서 지옥 가고 있고 그런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이렇게 되었다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가짜 하나님을 대동해서 나타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렇게 해서 ‘네가 진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자인지 판단해 보라’는 것이지요. 복음도 없고 개판치는 교회에 그냥 있어야 되는지, 그동안 바친 밑천이 아까워서 그냥 눌러앉아 있어야 하는지 ---
10절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되어 있고, 11절을 보면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방금 지옥에서 기어 나오는 거예요. 이것은 내 힘으로 지옥에서 빠져나온 것이 아니고 살아계신 예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천국에 이미 도착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능력이 예수 생명인 것을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내려 하심입니다.
이 긴긴 문장에 중요한 것 두 가지가 나옵니다. ‘예수님과 우리 육체’, 그 사이에 ‘죽음과 생명’ 이것이 전부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전부입니다. 예수님과 우리는 한 집에 살고, 예수님을 위해서 나는 죽음에 넘기우고 그 죽게 될 우리에게 예수님의 생명이 제공되고 이런 이상한 관계, 희한한 동거생활 이것이 바로 이미 천국 속에 있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당나귀가 말하는 것만 기적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은 것만 기적이 아닙니다. 우리를 죽음에 넘기우고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찾아온다는 이것 역시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입니다.
여기에 무슨 주체가 있고, 자아가 있습니까? 있을 수가 없어요. 이것이 없다는 말이 아니고 생겨나도 의미가 없지요. ‘내가 기도한다. 내가 뭘 한다. 내가 전도한다.’ 나, 나, 나 가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구원해 주시고, 주님께서 기도하게 하시고’ 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은 것을 밤새도록 생각해 보아도 저는 우스워요. 내가 만약 물 위를 걸었더라면 그 이후에는 물만 보면 시험해 보고 싶었을 거예요. ‘내가 전에 한 번 물 위를 걸었는데, 그 때는 자아를 바라보았기 때문에 빠졌는데 그 때의 그 짜릿함을 과시하는 용도로 다시 한 번 걸어볼까’ 하고.
그런데 베드로는 두 번 다시 물 위로 걸었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그 때 물 위를 걸은 것은 죽을 베드로에게 예수의 생명이 나타났기 때문에 걸은 것이지 그 상황 그 자체를 자신이 재현하려고 하면 되지를 않습니다.
그러면 왜 주님께서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시는가? 주님은 물 위를 걷는 것 말고 다른 방법으로 또 베드로에게 능력을 주시는데 그것이 뭔가 하면, 베드로로 하여금 자신이 원치 않는 죽음의 길로 가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13절을 봅시다.
이것 보기 전에 비슷한 이야기가 고린도후서 6장 9-10절을 보면 있는데,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효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앞, 뒤가 대조되지요. ‘징계 받는 자, 근심하는 자, 가난한 자, 아무것도 없는 자’가 앞에 있지요. 그리고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항상 기뻐하고, 많은 사람을 부효하게 하고, 모든 것을 가진 자’ 이것은 뒤에 있습니다.
이것을 서로 대비시키는 이유가 예수 믿고 난 후에 만사형통이란 말의 의미가, 어려움이 안 닥친다는 의미가 아니고, 어떤 어려움이 오더라도 그것이 징계가 아니고 예수님이 과연 살아계심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것에 대해서 우리가 ‘좋다. 싫다. 혹은, 거부하겠습니다. 수용하겠습니다.’라고 결정할 수 있는 자유가 우리에게는 없고, 우리의 주도권이 이미 주님에게 넘어가 있습니다. 그냥 주님 이끄시는 대로 사시면 됩니다.
13-14절을 봅시다.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는 고로 또한 말하노라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니”
무슨 뜻인지 이해되시지요?
제대로 이해가 되었는지 제가 물어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너는 죽어야 해. 살 필요 없어”라고 말한 사람을 다시 만나고 싶습니까? 다시는 안 만나고 싶습니까? 두 번 다시 만나기 싫지요.
어떤 사람이 아까 이야기한 12가지의 답답한 일을 준단 말이지요. ‘저 인간은 비실비실 앓아야 해. 병명도 모르는 채. 저 인간은 이혼해야 돼. 저 인간은 자식이 죽어야 해.’ 등등의 악담을 합니다. 이렇게 온갖 악담을 퍼붓는 사람을 두 번 다시 보고 싶겠습니까? 안 보고 싶겠지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약을 올리고 있어요. ‘내가 이런 예수님을 그리워 한 것처럼 당신들도 그리워하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렇게 보고 싶어 하는 주님 앞에 세우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주님 앞에 설 수 있는가 하면, 주님이 보고 싶어 환장한 사람들만 주님 앞에 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주님이 평소 우리에게 어떻게 했습니까? 답답한 일을 의도적으로 유발시킨 분이예요. 그러니까 이 능력이 얼마나 놀라운지 몰라요. 답답한 일을 만나게 하셔도 ‘내가 산 것은 주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고백하는 사람을 만드시고, 이 사람들이 결국 주님 앞에 서는 것을 고대하게 되고 결국은 만나게 됩니다.
평소에 부자 되게 하고, 건강하게 만들고, 평소에 잘나가게 만들고 그런 분 같으면 또 만나고 싶지요.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평소에 답답한 일을 당하고, 우겨 쌈을 당하고, 핍박을 받게 하신 그분이 바로 나를 구원한 분인 것을 알고 그분을 즐거워한다면 그 사람이야 말로 진정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 제 일은 사랑이라.’ 모든 밑바닥에는 이런 사랑으로 말미암아 믿음, 소망 이런 것이 다 형성된다고 보면 됩니다.
제가 이런 강의를 하니까 여러분이 근심어린, 마치 12제자 가운데 가룟 유다의 얼굴을 하고 있는데, 인생을 살면서 ‘아름답다’는 이것이 환경이 좋아서 아름다운 것이 아니고, 주어진 할 일, 다시 말하면 사명이지요. 주님에 대한 복음적인 사명이 있을 때는 세상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어요.
목사도 평신도도 사명감의 약발이 떨어지면 살기 싫어요. 그런데 사명감이 있을 때에는 주위의 모든 것이 아름다워요. 교회에서 하는 일이 억지가 되는 이유는 다른 이유가 아니라 사명감이 없어서 억지가 됩니다. 헌금하는 것도 억지로 하고 --
사명감이 없으면 자아밖에 없어요. 이 자아는 갈수록 점점 더 고착화, 견고해 져요. 자아는 블랙홀이지요. 블랙홀은 주위에 있는 별들을 끌어 모아서 자기의 질량이 점점 더 강해져서 나중에는 너무 강해져서 스스로 폭발해 버려요. 자기가 자기를 주체 못해서. 마치 비만 환자의 포식증 처럼. 이런 사람은 음식이 자기 자신을 죽이지요.
인간은 날 때부터 자기밖에 모르기 때문에 자기밖에 모르는 것이 습관이 되어서 마귀가 자꾸 ‘네가 편한 것이 최고야. 네만 아름다우면 최고야. 너만 부자면 돼.’ 이렇게 너, 너, 너 이것만 계속 속삭이니까 세월이 갈수록 ‘나’ 외에는 다른 것을 생각을 못해요.
중, 고등학생들은 육교를 통해 길을 건넙니다. 그런데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육교가 있어도 육교 안 건너고 그냥 길을 건넙니다. 왜 그런가 하면, ‘나만 편하면 되지.’라는 생각 때문에 그렇습니다.
대학생 때는 민주화가 어떻고, 인권이 어떻고 하며 외쳤던 사람들이 삼성이나 현대그룹에 취직하고 난 후에는 오직 ‘나, 내 회사’ 밖에 몰라요.
처녀 시절에는 교회 와서 주일학교, 성가대 하면서 주님만 사랑한다고 하다가 시집가고 난 후에는 자기 아이만 생각해요. 교회 와서도 아이 자랑하고, 아이 어떤 학원에 보내고 무슨 과목을 잘 하고 -- 아이 이야기하면서 시간 다 보내요. 말씀에도 관심 없고 모든 관심이 오직 자기 아이 뿐입니다.
처녀 때 주일학교 봉사할 때는 이 아이, 저 아이 다 사랑하다가 결혼 후 자기 아이가 태어나고부터는 자기 아이가 혹시 어떻게 될까봐 큰 아이들이 곁에 오기만 해도 싫어해요.
사명감이 없으면 자아만 남고, 이 자아는 블랙홀입니다. 결국은 폭발합니다.
이렇게 되면 누가 만나자고 하면 혹시 보증해 달라고 하지는 않을까? 돈 빌려달고 하지는 않을까? 염려하고 경계 태세를 취합니다. 이렇게 경계가 생기면 자기 공간이 점점 좁아지니까 압박이 되고 이렇게 되면 무거운 짐이 됩니다.
어떤 학자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기의 사슬 영역을 더욱 공고히 하게 되면 자기 사슬 영역을 지키기 위한 공적 법칙을 더욱 요구하게 됩니다.’ 그런데 모순이 뭐냐 하면, 내 것을 지키기 위해서 나라의 경찰이나 공무원이 더욱 많아지기를 원한다면 자기 집안에 나라에서 설치한 감시 카메라가 있어야 해요. 이것이 모순이잖아요.
나의 안전을 위해 설치한 카메라 때문에 나의 사생활이 노출이 되고 또 다른 위험에 놓이게 됩니다.
과거 농경시절에는 모든 것이 개방되어 있었습니다. 내 집, 네 집 경계도 허술했고, 서로 어우러져 살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서로의 경계가 너무 높아져 있습니다. 고급 아파트는 철옹성과 같은 담이 쳐져 있습니다. 본인이 스스로 감옥을 만들어 놓고 그 안에 갇혀 있어요.
진정한 자유는 누가 들여다보아도 괜찮고 아무 상관없는 것이 진정한 자유이지, 누가 보면 안 되고, 누가 알면 안 되는 그런 것은 자유가 아니고 스스로 자기를 속박하는 것이지요.
불신자들이 이렇게 사는 것이지요. 그런데 신자도 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자의 주도권은 주님께 있어서 내가 내 마음대로 살도록 주께서 가만 내버려 두지를 않습니다. 깨지게 하고, 열도록 만들고 그렇게 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그냥 사세요. 여러분 속에 주께서 날마다 여러분을 죽음에 넘기우고 감사하도록 합니다.
15절에 보면, “모든 것을 너희를 위하여 하는 것은 은혜가 많은 사람의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말이지요.
16절부터 보게 되면,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왜 그렇습니까? 어떤 사람은 ‘우리가 열심히 살기 때문에’라고 합니다. 이 사람은 지옥 갈 사람입니다. 이것이 아니고 더 이상 나의 주인은 내가 아니기 때문에 주님께서 알아서 하다 보니까 날로 새로워지고, 겉 사람은 후패해 지고. 머리카락 빠지고 희어지는 것이 주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자신이 늙는 것은 그렇게 슬프지 않아요. 그런데 부모의 입장에서 자식이 늙는 것을 보면 그렇게 슬플 수가 없어요. 왜 그런가 하면, 자식이 계속 젊은 채로 있어야 자신이 계속 젊은 엄마인줄 착각이 유지가 되요. 그런데 자식이 늙어버리면 나는 더 늙은 것이 되지요. 희망이 없잖아요. 그래서 대안이 뭐냐? 늦둥이를 낳는 것입니다. 꼬물꼬물 기어 다니는 어린 애를 보면서 자신은 다시 회춘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 심리가 타인을 위함이 아니라 모든 것이 내가 어떠냐를 발견하기 위해서 타인을 바라봅니다. 자식을 낳고 난 후에 자식을 위함이 아니라 내가 얼마나 젊고 생생한가를 확인하고 만족하는데 자식이 늙어버리면 믿을 구석이 없어져요.
겉 사람은 날로 후패해져 가는 것을 믿어야 해요. 그리고 겉 사람을 후패하게 하시는 그분이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게 하신다는 것도 믿어야 해요. 그러니까 낙심할 이유가 없지요.
현대인들은 자기 인생에 대해서 상당히 억울해 합니다. “저 인간만 없으면 내가 저 자리를 차지할 텐데.” 이렇게 억울한 마음이 있으면 나중에 한이 맺힙니다. 한 맺힘은 자기 손가락으로 자기 눈을 찌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한이 맺히고 억울하다는 말은 여전히 자기 주인이 주님이 아니고 내 자신이 주인이 되기 때문에 자꾸 억울한 느낌이 듭니다. 방금 지옥에서 기어 나온 놈이 무슨 억울한 것이 있습니까?
성령께서는 분명히 억울할 만한 일이 있더라도 십자가의 피를 바라보면서 주님이 주인이지 네가 주인이라고 착각하지 말라고 당부하지요.
좀 쉬었다가 5장 공부하겠습니다.
(2006. 5. 18. 10: 25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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